시조 700년 위의를 기리고 내일의 한국문학을 이끌어 갈 신인들의 장을 펼치면서 심사위원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언제나 그렇듯 기성의 문법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빛깔을 가진 시인을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다. 신춘문예의 목적은 무난히 질그릇을 빚는 장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시조가 어떻게 기능하고 새로운 물음을 제시하는 시인을 가려 뽑는 것이다. 오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기약하며 함께 걷고 싶은 동반자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을 떠나지 않은 작품은 ‘획을 긋다’, ‘사이’, ‘유축(乳蓄)을 하다’ 등 3편이었다. ‘획을 긋다’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시선이 눈길을 끌었다. 그 지난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긋고 운명하는 별똥별과의 상관관계를 그려내었다. ‘사이’는 지금 현재, 극복되지 않는 사람과 사람과의 간극이 높은 벽이 되는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4수로 엮어가는 힘이 좋았으며 자유로운 변주도 상당한 습작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획을 긋다’는 마지막 3수에 와서 다소 힘에 부치는 느낌을 주었다. 첫 수 종장의 “무얼까 별똥별이다 운명했군. 별 하나”에서 폭이 큰 음률의 변화를 주었고, 기대감을 갖게 했지만 끝까지 긴장감을 견지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사이’는 활달한 보폭, 시원한 전개 등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시조 본연의 축약, 탄력적 음보처리 등에서 미숙함을 드러내었다. 특히 한 작품 속에서 ‘사이’란 단어가 여섯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이 결정적인 흠결로 지적되었다.
당선의 영예는 ‘유축(乳蓄)을 하다’에 돌아갔다. 한 맞벌이 부부의 일상을 통해 떠안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고통을 담담히 적고 있다. ‘일과 육아’라는 부담을 안고 일상의 쳇바퀴를 돌아야 하는 커리어우먼의 삶을 시조로 잘 녹여내고 있다.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으나 미래를 기약하는 의미에서 올해의 당선작으로 민다.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이달균·장성진)
2018 경남신문 신춘 시 당선작
등대 ㅡ 유하문
지붕 낮은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엎드려 있는 작은 마을 앞 바다에 방파제가 두 팔 벌려 마을을 넘보는 거센 파도 막아 줍니다. 근심 끝에 파수병 하나 하얀 총 들고 서 있습니다.
멀리 부레옥잠처럼 떠 있는 형제 섬들 너머로 아침나절 조업나간 배들이 돌아오고, 서녘 하늘 피조개 속살 같은 노을이 만선한 어부들 얼굴에 단풍으로 피어났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면 보초선 이등병이 아직 귀환하지 않은 전우들을 위해 반딧불처럼 기별을 보내고, 육지에선 촛불이 활화산 마그마처럼 흘러 바다까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서서 어두워진 바다를 바라보며 소매 끝 눈으로 가져가는 노모와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우리들의 아버지는 작은 촛불 켜고 착착착 잘도 돌아옵니다.
아침에야 걱정 거두고 잠이 든 등대 안쪽 부두엔 옆구리 맞대고 늘어선 배들이 잠시 낮잠을 잡니다. 수협 앞에서 파시가 펼쳐지고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등 푸른 지갑을 엽니다. 돈 좀 챙긴 아버지들 소주 몇 잔 나누며 서울 간 자식 걱정에 한숨 자다가 또 바다로 나갑니다.
위문편지처럼 마지막 여객선이 부두로 들어오면 도시로 가는 마분지 박스마다 바글바글 병아리 사랑이 실립니다. 수협 뒤 여관 창에 불빛이 들어오고 홀로 된 숙모가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가에 잠을 잡니다. 등대 너머 하얀 부표들 밑으로 김이 자라고 미역이 자라고 전복이 자랍니다.
[심사평] 이광석 배한봉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 집요하게 잘 살려
올해 시 부문에는 경남신문 신춘문예의 역사를 대변하듯 응모작품의 양이 많았다. 서정적·전원적 상상력을 보여주거나 삶을 성찰하는 작품이 많았고, 사회적 문제나 문명 비판적 의식을 담은 작품, 실험적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은 적었다. 풍성한 응모작품의 양에 비해 작품 수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신인의 시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개성과 패기가 있는 참신한 상상력이다. 자기만의 언어로 고유한 자기 세계를 힘차게 밀고나갈 때 다소 거칠고 모자라는 점이 있을지라도 그 가능성에 큰 신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응모작의 상당수가 신인다운 참신한 특징을 보여주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관념과 감정의 과잉이었다. 묘사가 산만하고, 시적 긴장감이 느슨한 시, 주제 의식이 치밀하지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가운데 본심에 오른 작품은 ‘소슬 모란’ 외, ‘옷핀, 먼 길을 꿰어 오다’ 외, ‘태풍의 눈’ 외, ‘가새’ 외, ‘등대’ 외, 5명의 시였다. 이 시들을 다시 정독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배종영씨(경기)의 ‘가새’ 외 3편, 유하문씨(경북)의 ‘등대’ 외 8편을 최종 논의하기로 했다.
배종영씨의 ‘가새’는 ‘가위’의 지역말인 ‘가새’를 모티브로 상상력을 차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말놀이와 의미의 적절한 거리가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마무리가 성급해 아쉬움을 남겼다. 단절과 봉합의 상상력 역시 조금 더 활달하게 전개됐으면 좋았을 것이다.
유하문씨의 ‘등대’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의 일상을 ‘등대’라는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다. 부분적으로 이미지의 낯익음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상상력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언어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신뢰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상징화된 ‘등대’의 의미를 집요하게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 진입시키려는 노력이 시적 긴장을 유발시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마지막까지 붙잡았다. 유하문씨의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하며 대성을 바란다. 아울러 당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심사위원 이광석·배한봉)
당선소감 그 겨울 촛불들의 염원처럼…
격정의 80년대 초반,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시인이 되겠다고 다시 국문과에 진학해 겨우 졸업했으나, 공부하는 시간보다 밖으로 나가 민주화 투쟁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꿈이던 시인은 되지 못하고 자비 출판으로 소설집을 먼저 몇 권 냈다.
내 나이 올해 60, 시인의 꿈을 찾아 응모했는데, 덜컥 당선 소식이 왔다. 섬을 지키며 길 잃은 배들을 인도하는 등대의 모습에서 문득 그 겨울 광화문 광장을 떠올리고 쓴 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광장에 등대처럼 불을 밝힌 촛불들…. 그 촛불들의 염원대로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가 되길 바란다. 내 아들, 딸들이 희망을 갖고 노인들이 외롭지 않은 나라가 되길 간절하게 빈다.
그동안 모아둔 시가 백여 편 되니 이제 첫 시집을 내야겠다. 나이 60에 내는 첫 시집이라니! 그런데 누가 이 무명 시인의 시집을 내줄지 걱정이다. 소설집도 그러했지만 또 형제간, 친인척, 동문, 친구들에게 강매(?)라도 해야지, 하고 생각하니 늦은 나이에 문학을 버리지 못한 내 운명이 조금 가소롭다.
도대체 무얼 위해 이 나이에 불멸의 밤을 보내야 했던가. 글쓰기란 실패한 삶의 서정적 미화하기란 말에 동의한다. 못난 작품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남신문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
★ 유하문 씨 약력 △1958년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한국해양문학상, 여수해양문학상 수상 △대전 재수종합반 학원 국어 및 논술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