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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호경의 수필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유영자
달님달님 조각달님 어디로 가나
송재국
"고기가 무난해요. 갈비보다는 안심이나 등심 같은 살코기로."
아내는 누구에게나 부담 없는 종류의 선물이 좋은 선물이라 했다.
"아니 과일이 좋겠어. 형형색색으로 포장된 과일 바구나 말이야!"
나는 거의 35년 만에 찾아뵙는 초등학교 때의 은사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는 중이다.
"알아서 해요, 당신 선생님이니까."
아내는 유독 '당신 선생님'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구태여 이 옹색한 살림살이에서 무엇이 그리 위급한 사안이라고 그 먼 곳 거창까지 일삼아 가려느냐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당신 선생님이 얼마나 고마웠던 분인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기억나는 선생님은 나에게도 얼마든지 있어요. 당신이 언제 장모님 한번 구색 갖추어서 찾아뵌 적 있어요? 어이구, 그저 허세만 가지고선...."
'거기서 왜 장모님 얘기가 나오나.' 나는 피식 웃고 말았지만 아내의 타박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무슨 대단한 행차인 양 초등학교 때의 선생님을 찾아뵙겠다고 나서는 모양새가 지금 나의 살아가는 모습과 썩 어울리는 장면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나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꼭 한번 찾아뵙고 '저 부강국민학교 때의 아무개 입니다' 라면서 넙죽 절이라도 드려야 내 맘이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하나의 의무감 같은 부담으로 나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내의 의견을 궛등으로 흘리고는 가까운 H백화점으로 갔다. 과일 코너에는 빤짝종이로 잘 포장된 바구니가 여러 종류 있었으나 내가 기대하는 것만큼 풍성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TV드라마에서 병문안 갈 때 흔히 들고 가는 손잡이가 기다란 바구니들뿐이었다. 나는 발길을 돌려 조금 멀기는 해도 새로 생겼다는 큰 백화점 SA로 가보았다. 역시 그만그만한 모양새들이었다.
"좀 큰 것 없습니까? 이것 두 개 합친 것 정도로요."
나는 정말 크고도 조금은 화려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가고 싶었다. 선생님이 받으시면서 '아이구 이런 건 처음이네' 하시며, 동화 속의 공주님처럼 함빡 웃으실 수 있는 그런 바구니를 나는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직접 고르세요. 필요하신 걸 담아 놓으시면 잘 포장해드리겠습니다."
호텔 지배인처럼 명찰을 단 말쑥한 신사가 곁에서 거들었다. 골라 놓은 과일별로 셈을 하고, 다만 포장용 등나무 바구니를 별도로 구입하면 된고 일러주었다. 나는 내가 혼자 들기에는 벅찰 정도로 한가득 과일을 모아 보았다. 초봄이었지만 백화점의 과일 코너에서는 사계절 지구촌 곳곳에서 나는 온갖 과일들이 가득했다. 수박.참외. 사과. 배는 기본이고 왕포도와 잔포도, 자몽과 키위, 그리고 먹고 싶었던 바나나까지....
보기만 해도 마음까지 풍성해지는 듯했다. 대형 백화점의 전문 매장이라 그런지 직원도 친절했고 포장 솜씨도 능숙했다. 과일 하나 하나를 색색의 종이로 포장을 하고는 크기에 따라 바구니에 균형 있게 담은 후, 투명한 랩으로 씌우고 넓적한 색실로 묶은 다음 리본까지 달아 주었다. 마지막으로는 홑이불처럼 커다란 보자기로, 안고 가기에 쉽도록 싸매주었다. 백화점 직원이 과일 바구니를 안아다 자동차 둿좌석에 대려다 놓았을 때, 나는 마냥 흐믓했다.
나는 아파트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하였다. 내일 아침에 떠날 때까지 혹시라도 아내가 들여다보기라도 하면 또다시 토를 달것 같아서였다. 소풍가는 아이같이 홀로 설레며 하룻밤을 보내고는 아침 일찍 경상남도 거창을 향하여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97년 4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B선생님은 거창군 가조초등학교에 계셨다.
요즘은 스승찾기운동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관련 교육청에 몇 번 전화를 하다보면 선생님의 근무지를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나는 3월에 이미 선생님의 근무지를 확인해 두었고 정말로 오랜만에 편지도 한 통 보냈었다.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신지요.
저는 부강초등학교에 다니던 송재국입니다.
저는 지금 청주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가끔 말씀하시던 수동성당이 바로 저희 학교 근방에 있습니다.
4월이 되면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차는 어느새 추풍령 휴게소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휴게소에 내려 캔음료수를 하나 거머쥐고서는 기다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선생님의 조금은 매서워 보이던 눈매. 그러나 어머니같이 너그럽던 모습이 그때 막 떠오르는 아침해처럼 크게 다가왔다.
B선생님이 플에어스커트를 나폴대며 부강초등학교 우리 반 담임으로 부임한 것은 2학년 봄이었다. 그때 신혼이었던 것으로 보아 초임은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교직 생활을 시작한 지가 오래되진 않았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반장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선생님과 접할 기회가 많았다. 나중에 좀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내가 반장 노릇을 하게 된 경위를 우선 조금은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나는 10살이 되고서도 한여름이 다 지나서야 초등학교 1학년에 이상한 입학을 하게 되었다. 당시 혼자이시던 (어머니는 내가 4살 때 돌아가셨다) 늙으신 아버지는 (아버지는 53세에 나를 낳으셨다)나를 품에 안고 키웠는데, 10살이 되어도 학교에 보낼 생각을 안했다. 사실은 학교에 보낼 형편이 아니었으리라. 일정한 직업이 없이 이 집 저 집 농사 품팔이를 하던 아버지는 누군가가 '애를 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채근이라도 할라치면,"학교에 간다고 밥이 나오나, 술이 나오나, 저 먹을 것은 타고나는 벱이요"하면서 마냥 태평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까지 고지배기(나무를 자른 밑둥. 겨울에 얼었을 때 도끼로 내려치면 뿌리채 뽐혀히는데 이것을 겨울 땔나무로 사용하곤 했다) 나 하러 다니고, 산 속 개울을 뒤져 가재나 잡으면서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었다.
어느날 동네 이장 아저씨가 아버지에게 말씀도 하지 않고 내 손을 이끌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께 데리고 가서는 '애가 우리 동네에 사는데 학교에 다니게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참으로 고맙게도 교장 선생님이 '하여간 내일부터 학교에 나오라' 고 승낙을 하여, 나는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나라에 '의무 교육제도'가 있다는 사실에 눈물나게 감격하고 있다. '내가 그때 늦게라도 입학하지 않았던들...'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언제나 애국자가 된다.
그때 A선생님이 담임이었던 반으로 배정되었는데, 고맙게도 담임선생님은 아무것도 없는 (교과서는 물론 연필 한 토막도 없는)나에게 이것 저것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편입하자마자 (그것은 정말 편입이라 해야 옳다) 공부를 제일 잘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서울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를 데리고 당신의 고향인 충북 영동으로 내려가서 한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심천면에 있는 옥계리 폭포 아래에다 초막을 짓고 정착하였는데, 거기에는 우리 집안의 거의 유일한 친척인 작은 아버지가 조그만 암자(암자라기보다는 굿당이라 해야 맞을 성 싶다)를 갖고 있었다. 우리 식구는 폭포수 아래 물가의 너럭바위 옆에 솔가지와 억새풀로 얼기설기 움막을 치고 살았다. 거기서 나는 일곱 살이 되어 30여 리 떨어진 심천면 초강국민학교에 입학하여 두 살 많은 사촌형과 함께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1학년을 거의 마칠 무렵에 아버지는 당시의 부강으로 또 거처를 옮겼고, 그 길로 그렇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나는 학교를 중단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궁금한 게 있다. 초강초등학교에 가보면 내가 무단으로 학교를 그만둔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일단 한글에는 눈을 떴고, 셈본에도 얼마 만큼은 문리가 트이었을 때였으니, 다시 1학년으로 편입한 나는 부강국민학교의 어린애들보다는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었음은 정한 이치였다.
언젠가 담임선생님이 조용히 물었다.
"너 다른 데서 학교 다닌 적 있지?"
나는 가슴이 뜨끔했으나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럼 어떻게 해서 공부를 잘하니?"
이에 대해서는 집에서 누나가 가르쳐주었다고 대충 둘러대었다. 선생님은 속아 넘어갔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는데, 후일에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의 불편한 심사를 배려하여 기꺼이 속아준 것임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나는 새로 등장한 다크호스였다.
내가 편입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어느 날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엄청난 특별 성명을 발표하셨다.
"내일부터는 새로 온 송재국도 우리 반의 반장으로 일하게 된다."
물론 기존의 반장도 있으나 반장은 둘이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선생님 나름의 교육적 판단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다른 애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열 살이나 된 나이배기이니, 일곱 살짜리 꼬맹이들은 한 손에 휘어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고만고만한 또래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어느 날인가 반에서 일굴 깨나 내미는 애들이 모두 모였을 때, 한 녀석이 공개적으로 나의 권위를 시험해왔다.
"너 여기 있는 애들 다 이기냐?"
나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저기 동애만 빼고 다 이긴다."
(그때까지 동애랑은 한번도 겨뤄본 적은 없었지만, 덩치도 크고 험상궂게 생겼기에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자신 있는 목소리로 나름의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동애 녀석이 곧바로 꼬리를 내리면서" 나, 재국이한테 져!"하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적으로 천하를 평정하고 대권을 움켜잡게 된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을 눈치채고 있었을 선생님은 현명하게도 무혈쿠데타를 일으켜 나에게 사실상의 반권(班權)을 넘겨주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1학년 때 잡은 학권(學權)을 확고히 유지하면서, 6학년 때까지 난공불락의 장기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B선생님이 부임을 했을 때에도 나는 반장이었다.학교에서는 빛나는 반장이었으나 집에 오면 그야말로 거지 신세였다. 그때는 집도 없어서 공굴다리 밑에서 가마니를 치고 지내던 때였다. 집에 일찍 가봐야 반겨주는 이도 없고 따로이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나의 생활에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보여줄 사람들이 내 주변에는 아예 없었기에 학교가 끝나고서도 나는 학교 주변을 빙빙거렸다. 그러다가 돈 좀 있는 애들이 뭘 좀 사먹으려 학교 앞 상점에라도 가려는 눈치가 보이면 슬그머니 뒤따라가서 어정대었고, 그러다 보면 박하사탕 한 개라도 얻어먹곤 하였다.
부강은 경부선의 역이름이고 행정 구역상의 명칭은 부용면이다. 그때만 해도 주요한 교통수단은 열차였기에 부강역 주변은 자연스럽게 부용면의 다운타운의 위치를 담당하고 있었다. 역전에는 제법 큰 상점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정말 별의별 상품들이 가득했고,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딱지.장난감.아이스케끼. 달고나 띠기 등이 언제나 우리의 썰렁한 주머니를 유혹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상점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버릇이 생겼고, 그러다보면 아는 급우들에게 딱지 한 개라도 얻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던 초여름 어느 날, 역전에서 구두 닦기 하는 평소 눈에 익은 형이 나에게 아이스께끼 하나를 사주면서 붙임성 있게 다가왔다.
"너, 약수터 가는 공굴다리에서 살지? 내가 다 알어, 임마, 너 노래도 잘한다며?"
그 형은 다짜고짜 임마부터 시작했는데, 나는 하나도 고깝다거나 무섭지 않았다. 그러자 몇몇의 구두닦이 형들이 한마디씩 거들면서 무언가를 부추겼다.
"형들하고 놀면 좋아."
나는 형들의 억세고도 건들거리는 몸짓이 싫지 않았고, 은연 중에 나도 학교에서는 한 가닥 하는 놈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 친하게 되자 예의 그 형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야! 임마, 너 이렇게 놀면 뭐하냐. 형이 가르쳐줄 테니까 열차에서 장사 한번 해봐. 벌면 다 줄게."
부강역은 급행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시골역이다. 하루에 두 번씩은 뒤따르는 급행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서 완행열차가 별도의 선로에 비껴서서 한동안 기다리게 되는데, 이때는 선로 부변에 승객들을 상대로 하는 임시 난장이 서게 된다. 대용식 카스테라. 삶은 달걀. 심심풀이 땅콩. 시원한 냉차. 조치원 꿀복숭아..., 애총 이런 것들을 파는 잡상인들로 열차주변이 북적댄다. 보통은 30분 정도 대기하지만 어떤 때는 한 시간도 넘게 정차하곤 한다.
정차 시간이 길면 승객들은 지루해 하였지만 잡상인들은 신이 났다. 그런데 그 열차 장사하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장사꾼 카르텔이 형성돼 있었고, 그것을 주도하는 역전 마피아가 바로 구두닦이 형들이었다. 나에게 아이스께끼를 사준 형이 그 중에서도 대빵이었다. 형은 나를 데리고 열차 칸을 한번 휘젓고 다니게 하더니 장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안에게 잡히지 않는 것이고, 만약 들키면 빨리 토껴야 해. 너는 똑똑하니까 잡혀서 빵에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겠지. 하여간 열차 한 칸 돌 때마다 한 통씩 팔면 돼."
그러면서 녹색 빛이 영롱한 껌 한판을 내 손에 얹어주는 것이었다.
"일단 열차에 올라가면 사람들이 잘 보이는 중앙 통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거야. 그리고는 껌을 한 통씩 돈 좀 있어 보이는 아저씨나 마음이 약해 보이는 아줌마들 무릎에 얹어놓고는 한 바퀴 돌아와서 수금을 하는 거야."
나는 으쓱대면서 말했다.
"아이참, 형도, 제가 그런 정도도 모르겠어요?알아서 할게요."
어서 빨리 나의 숨은 역량을 확실하게 과시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기운차게 기차 칸에 올랐지만 막상 중앙 통로에 서고 보니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다. 그러나 출입문에 기대어 망을 보는 형의 위압적인 눈빛에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어 에라, 까짓것, 하면서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처언 두웅 사안 파악 딸 쩨에르을...(천둥산 박달재를..)."
나는 한 곡조를 신나게 뽑았다. 노래가 끝나자 어디선지 걸쭉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고! 하나 더,"
나는 평소의 실력대로 또 한곡을 불렀다.
"무운 패애도 버언지 수우 도오 엄는 주우 마악에...(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두 번째 곡을 마치고 나는 흥에 겨워 자청해서 한 자락을 보태었다.
"하아 냐앙 처얼리 떠나 가안 드을 너를 어이 잊을 쏘오냐아...(한양 천리 떠나간들 너를 어이 잊을소냐)."
세 번째 노래가 다 끝나가기도 전에, 망을 보던 형이 슬그머니 곁은 지나치면서 나지막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어조로 다그쳤다.
"짜식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임마. 빨리 돌리지 않고."
나는 그제서야 재빨리 껌을 돌렸고 또 수금을 했다. 그런데 결과는 요즘말로 해서 거의 왕대박이었다.
한번 장사에 다섯 통이나 팔렸으니 그것은 형들에게도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나는 개선장군 마냥 당당하게 형들 앞에 나섰고 형들은 흡족해하는 얼굴로 "내일도 꼭 나와라"하고 다짐하면서 2원을 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었다. '아, 세상에 내가 돈을 벌다니! 그것도 2원씩이나, 그 맛있는 아이스께끼도 1원밖에 안 하는데...'하여간 나는 그때부터 역전의 명카수로 열차 칸을 누비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노래 실력도 일취월장 더욱 간드러져갔다.
B선생님은 부임하시면서 우리 반 애들에게는 물론 다른 반 애들에게도 무언가 약간 다르다는 분위기를 보이곤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들이 쉽게 들어본 적이 없는 조금은 이상스런 노래를 시도 때도 없이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내 모자 세모났네, 세모난 내 모자.
세모가 안 난 것은 내 모자 아니지."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머리 위에 얹고는 무릎을 굽히면서 율동을 했고.
"내 양말 빵꾸 났네, 빵꾸난 내 양말.
빵꾸가 안 난 것은 내 양말 아니지."
하는 노래를 가르칠 때에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흔들어 댔다. 어느 날인가에는 발행 날짜가 오래된 <가톨릭 소년>이란 잡지를 여러 권 가지고 와서 나눠주기도 했는데, 이 모든 것이 아마도 선생님께서 성당에 다니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 것은 후일의 일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에서 제일 무섭기로 소문난 M선생님이 어느 날 점심시간에 우리 반으로 들어오더니 우리를 모두 운동장으로 불러내어 일렬로 앉혀놓고는 오리걸음으로 휴지 줍기를 시켰다. 우리가 운동장의 중간 정도까지 움직였을 때, 어디선가 B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달려오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
"너희들 여기서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운동장 청소하고 있는대요."
반장인 나는 대답해야 할 어떤 책임감을 느끼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청소하라고 했어? 누가?"
내가 다시 M선생님이 시켰다고 말하자, 이번엔 아예 악에 받친 큰 목소리로 다그쳤다.
"M선생님이 너희들 담임이니? 너희들은 아무나 시켜도 무조건 따라 하냐?너! 반장은 워하는 거야. 반장은 뭐냐고!"
선생님의 벌개진 표정에는 나로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의 노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때 바로 M선생님이 뱀처럼 스물스물 다가왔다.
"내가 시켰소, 왜요. 애들을 좀 시키면 안 됩니까?"
사실 내가 일기로도 학교 내에서 M선생님의 위치는 신참내기 여선생이 도전해도 될 만한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B선생님은 고개를 치켜들고 당차게 대들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지켜보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나는 반장으로서 일단 담임선생님 편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소리쳤다.
"야! 모두들 교실로 들어가자."
우리는 모두가 조용히 앉아서 선생님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들어오신 선생님은 당신의 교탁에 엎드리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처연한 표정들로 선생님을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후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매만지던 선생님은
"너희들에게 이런 꼴을 보이다니..., 너희들 나가 놀아, 그리고 반장 너, 똑바로 해! 선생님이 없을 땐 반장이 책임지는 거야, 알았어?"
하여간 B선생님은 무언인지는 몰라도 전과는 다른 특별한 바람을 교정의 곳곳에 일으키고 있었다.
선생님과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음악시간에 일어났다. 우리는 전교에서 하나뿐인 풍금을 교실에 옮겨 놓고는 선생님의 신나는 음악과 율동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날 선생님은 교과서가 아닌 '동요집'이라고 쓰인 크고 두꺼운 노래 책을 풍금 위에 올려놓고는 새로운 노래를 가르쳐주셨다. 노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가사와 곡조는 지금도 뚜렷하다.
달님달님 조각 달님 어디로 가나.
잃어버린 반 조각을 찾으러 가나.
머나 먼 길 걸어서 힘이 없나봐.
그러길래 허리가 꼬부라졌지.
선생님은 풍금을 힘차게 밟으면서 한 소절씩 반복하여 가르쳐주었고, 우리는 매미들처럼 목청껏 높여 따라했다. 음악 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자, 그럼 얼마나 잘 하는지 누가 한 번 해볼까?"
"그래, 반장이 한번 대표로 불러봐"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심 크게 기뻤다. 선생님께 나의 특별한 노래 실력을 보여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당하게 풍금 앞으로 나아갔고 선생님은 반주를 치면서 선창했다.
"달님달님 조각달님 어디로 가나..시이 ~ 작!"
나는 노래했다.
"드알니임 드알니님 쪼호각 따알님 으허디로 가흐나아(달님달님 조각 달님 어디로 가나...)..."
평소 기차 칸에서 불러제치던 그 뽕짝 곡조로 목젖을 떨어가면서 신나게 뽑아올렸다.(독자들은 그 상황을 제대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고향의 봄)같은 동요를 나훈아 식 창법으로 말아 올려서 부르는 것, 또는 송대관 식으로 꺽어 부르는 것이다.
슬쩍 곁눈질을 해본 선생님의 표정은 조금 일그러진 듯했지만,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내 노래를 끝까지 들어주셨다. 노래가 끝나자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시던 선생님은 "너, 다시 한 번 해봐!" 하면서 다시 풍금을 울렸다.
나는 속으로 '아! 내가 노래를 워낙 잘 하니까 다시 시키시는가보다'감격하면서 처음보다도 더욱 신명나게 어깨까지 흔들어 대면서 곡조를 말아 올려 불렀다.
"뜨아알니임 뜨아알니님, 쪼오가악 따알니님 으워디로호 가아나하..."
그런데 한 소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은 갑자기 꽝 소리를 내며 풍금을 내리치더니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너, 니눔 자식! 어디서 이 따위 노래를 배웠어, 엉?"
나는 정말로 당황했다. 칭찬을 해야 마땅한 내 노래에 대하여 도대체 선생님은 왜 저토록 화를 내는 걸까? 내가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부강 천지가 다 아는 일 아닌가.
우연히 동네에서 차일을 친 잔칫집이라도 지나가게 되면 나는 습관처럼 대문 안 쪽을 기웃거린다. 그러다 보면 지지미를 부치던 아주머니들이 "야, 너 이리 와서 노래 한번 해봐'하고 청하기 일쑤이고, 그러면 나는 기분을 돋우어 기차 칸에서 부르던 18번은 물론이고 양산도, 창부타령 등 민요까지 구성지게 불러댔고, 그러고 나면 신문지에다 부침개 등을 싸 주었다. 재수가 좋은 날은 돼지비계 한 덩어리가 포함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신나게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께 식판을 벌이곤 했다. 그럴 때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도 잔칫집에서 노래 불렀냐? 그래, 다음에도 잔칫집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러서 노래를 부르거라."
이렇듯 나의 노래 솜씨는 이미 공증을 받은 실력인데, 이상하게도 담임선생님만은 그 노래 실력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고 도리어 역정을 내는 게 아닌가?
그날 음악 시간이 끝나고 풍금을 다시 교무실로 가져 가려할 때 선생님은 "그냥 둬"라고 말하고는 이내 종례를 하셨다.
"자, 모두들 집에 가고,. 그리고 반장 너는 남어."
나는 정리되지 않은 심정으로 눈을 끔뻑거리며 선생님 앞으로 나아갔다.
"너 바른대로 말해! 어디서 그런 유행가를 배웠냐?"
나는 할 수 없이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끝나면 역전에 나가 껌 팔면서 유행가를 불러요."
선생님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역전에 나가지 마라. 내가 매일 역전에 나가서 살펴볼 테니까, 한번이라도 걸렸다 하면 너는 반장이고 뭐고 아예 학교에 못 다닐 줄 알아."
선생님은 평소와 매우 달라 보였고, 그 말씀에는 거역할 수 없는 단호감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아끌어 풍금 옆으로 데려갔다.
"자, 이제부터 날 따라 해봐. 달님달님 조각달님...시이~작!"
나는 선생님의 곡조를 따라 불렀다.
"드알니임 드알니님 조오각 다알니님..."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래 곡조는 그대로 뽕짝 조였다.
나는 선생님의 노래를 따라 부르려 애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 나 자신이 정말로 야속했다. 선생님은 드디어 회초리를 들더니 종아리를 치셨다. 나는 매를 맞으면서도 목구멍에서 내 의지대로 나오지 않는 소리를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선생님은 멈추지 않았다.
"너, 오늘 이 노래 제대로 부르기 전에는 집에 못 갈 줄 알어."
그렇게 저녁 어스름이 올 때까지 나는 풍금 앞에 묶여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풍금소리가 뜸해서 돌아다본 선생님은, 아! 울고 계신 것이 아닌가?
나는 선생님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면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 자신이 너무 서러워서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선생님은 당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동안의 침묵이 또 흘렀다.
"집에 가서 연습해, 내일 또 해볼 테니까."
풍금의 건반 덮개를 내려놓고 선생님이 교실을 나간 후에도 나는 무엇때문인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을 훌쩍였다.
다음날부터 나는 더 이상 역전에 나가지 않았고, 행여라도 구두닦이 형들과 마주치지 않을까 긴장하며 지냈다. 선생님은 다음날이 되었지만 다시 노래 연습을 시키지는 않았고, 내 유년의 노래는 그때부터 왠지 자랑스럽지만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나는 선생이 되었다.
그때 선생님이 노래 곡조를 고치기 위해 그토록 애쓰시던 이유를 나는 한동안 알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선생이 되고부터 조금씩이나마 선생님의 마음 자락을 짐작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 정말이지 아무렇게나 내던져 살았고 막돼먹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익숙해져 있었다. 내 멋대로 지내도 누구 하나 내 주변을 상관할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건들대며 살다 보면 자연스레 건달이 되는 것이리라.
노래 역시 건들거리며 불러대야 제 멋이었다. 그것이 최고의 멋들어진 노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혹독하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노래는 내 기분대로 건들대며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곡조를 따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 생각해보니'사람은 마땅히 이웃과 함께 목청을 맞추고 보폭을 같이하며 살아야 한다'는 상징적인 가르침을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 같다.
아무리 너그럽게 나를 생각해도 나 같은 처지의 아이들은 세상의 어두운 구석에 묻혀 제 기분에 취해, 제 흥에 따라 노래하면서 한 세월 보내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제멋대로 자라다보면 사춘기쯤에 이르러 주변의 정황에 눈을 뜨게 되고, 그러고 보면 보이는 건 모두가 불만스럽고, 그래서 남는 건 독기와 오기뿐일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탓하고 그냥 앉아 있기에는 젊은 혈기와 의지가 넘쳐났을 것이고, 결국은 세상에서 허락하지 않은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무언가를 이루어보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겠는가? 그런 몸부림 속에서 좌절하고 상처받고, 그러다가 별이라도 한두 개 쯤 달게 되면, 그때부터 선택의 폭은 뻔해지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모든 여건이 갖추어져 있던 내가 어찌된 일인지 선생님의 말씀만은 귀하게 받아들였고, 세상에서 허락하지 않은 곡조의 노래는 부르지 않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고 또 지키기 위해 힘썼다.
그 후에 나의 인생은 제 흥에 겨워 불러제끼는 유행가의 유혹 속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동요의 반듯한 곡조를 지켜내려는 내면적 갈등과 번민 속에 던져졌고, 용케도 나는 동요 쪽을 선택해 왔던 것 같다. 돌아보니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35년 전의 바로 그 B선생님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을 찾는 길은 수월했다. 구마 고속도로에서 남해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거창으로 나가는 표지판을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드디어 가조초등학교를 찾았다. 교문에서 먼발치의 골목에다 주차를 하고는 망연히 12시가 되기를 기다리면 학교 주변을 어스렁거렸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연세가 지긋하신 선생님 한 분이 나를 맞아, 조금 있으면 B선생님이 내려오실 거라 일러주며 접객용 의자를 내놓았다. 나는 선생님을 뵈었을 때 뭐라고 인사해야 하나 잠시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그때 책상 너머 저 편에서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급한 걸음으로 선생님께 다가가서 진정 반가운 미소를 얼굴 가득히 머금고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저 송재국입니다."
선생님은 조금 놀라는 기색이었으니 이내 내 손을 잡아주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먼 길을 어떻게 왔어? 편지는 잘 받았지. 아이구 얼굴 좀 보자."
그렇게 선생님과 나는 35년 만의 해우를 하면서 손을 잡은 채 한동안 무슨 말인가를 주고 받았다. 선생님은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정년이 3년 남았는데 아무래도 내년에는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아, 눈치들이 곱지 않아서 할머니 선생으로 그냥 버티기가 어려운 실정이야."
선생님의 용수철 같던 눈매는 이제는 그 탄성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았지만 어릴 적 마주했던 그 투명하고 선한 눈빛은 여전히 곱고 깨끗했다.
그날 선생님이 사주신 비지찌게 백반은 왠지 더 맛있었다. 아침을 거른 탓도 있었겠지만 공깃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 이곳은 산세가 아주 좋아. 집사람과 한번 놀러오면 반가울 거야. 하여간 애썼다. 애썼어."
나는 선생님을 찾아뵙고 돌아왔다.
벌써 다섯해 전의 일이다. 그때 선생님과 함께 올려다보던 산봉우리들은 올해도 그때처럼 푸르러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