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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유치(有治)면의 옛 이름은 유치(有恥)면이었기에 그 유래가 늘
궁금했다. 왜 하필 유치(有恥)란 말인가?
일각에서는 그 유치(恥)에 ‘고을 원님이 인끈을 잃어버렸다는 사건의 전설’을
결부시키는 견해도 있으나, 별 신빙성이 없다. 설령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일정 기간 후에 복호(復號)하면 될 일이었을 것.
<세종실록지리지>에 ‘유치향(有恥鄕)’으로 등장함은, 고려 때에도 ‘유치(有恥)’로 불렀던 모양. <장흥읍지
정묘지(1747)>에는 ‘유치방(有治坊)’으로 나오긴 하지만, 그 이후 <장흥읍지 경술지(1910)>에도 ‘유치면(有恥面)’으로
나온다. 돌이켜 그 지역에서 선사시대 고려시기 유물이 나오는 사정으로 미루어 보면, 애초에는 말 그대로 ‘다스림이 시작된 곳 有治’였을 것도
같다. 빈재를 넘어 ‘오동(五洞)안 大里 분지‘ 쪽을 장흥 최초의 治所 위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앞의 의문은 계속 된다.
왜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도 유치(有恥) 명칭이 고쳐지지 않았는가? 유치 사람이나 남평 문씨 집안에서는 그런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일까?.
오히려 ‘풍암 문위세(1534~1600)’ 선생은 “인불가이무치(人不可以無恥)”라는 산문을 남기고 계셨다. “無恥하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는
것. 그 출전은 <맹자, 진심편>인데, 사람이라면 부끄러움을 알아야하고, 그런 부끄러움을 알 때라야 그 허물이 고쳐진다는 것이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야 ‘인의예지(仁義禮智)’등이 생겨난다는 것. 결국 염치(廉恥)가 사회적 가치요, 미덕인 시대였기에 ‘풍암’
선생도 유치(有恥) 명칭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던 것은 아닐까? 나아가 <정묘지><남평 문씨 족보>에 의하면, 그 후손
‘문회우’가 유치 오복리 사미동에 ‘차격당(且格堂)’을 세우고 있었다. 또 ‘문회우’의 손자 ‘문덕용’은 그 ‘且格堂’으로 호(號)를 삼았다.
‘문덕용’은 유치 출신 문과급제자 형제 ‘장육재 문덕구(1667~1718)’, ‘문덕린’의 큰 형으로 진사 입격자이다. 그런데 그 ‘차격당’이란
말의 출전은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유치차격(有恥且格)”이다. “德과 禮로써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또한 올바르게 될
것”이라는 것. 스승 공자는 제자 ‘자로’의 질문에 답하셨다. “자기의 몸가짐에 부끄러움을 알 때,.. 가히 선비라 칭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선대 분들에게는 염치(廉恥)야말로 절대미덕인 것이니, 유치(有恥)라 한들 하등에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었던 것 아닐까?
오늘날은 염치(廉恥)가 실종된 시대라서 “이, 염치 없는 놈!”이란 말도 아예 하지 않는다. 파렴치(破廉恥) 시대인 것이다.
정리한다. 유치면의 옛 명칭 유치(有恥)의 정확한 유래를 단정하지는 못하겠으나, 적어도 조선 중후기 이후에는
“유치차격(有恥且格)” 가치 속에서 그 유치(有恥) 지명이 수용되었던 것 같다. 유치(有恥)를 알고 살았던, 그 시절 유치 사람들이 요즘의
무치(無恥) 시대에 더 그립다. 덧붙이는 한 마디. ‘아산군 염치면’은 소금이 수송되던 염치(鹽峙) 고개에서 유래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