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어디에서 핼리 혜성을 볼까
달빛이 대관령 감자꽃밭을 품었다
마치 은하 세계를 보듯, 저것은 어디에도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
눈들의 파종이다
점질감자와 분질감자는 고랭지에서 눈을 틔웠다
빛을 보면 퍼렇게 속내를 드러내는 그들
골바람이 사각지대를 휘돌 때 골짜기는
암막커튼을 치고 부르럽고 촉촉하게 붉어지기도 하는
고분자의 감정으로 지지고 볶고 졸이고
아웅다웅하는 관계로
눈이 눈을 분양하고 감자에 집중하는 중이다
푸른 점 하나 창백하게 빛난다
출입문 당기는 완자무늬 만은, 서로를 꽉 문 눈의 눈
눈 깜빡일 때마다 누기적으로 감정이 사천억 개의 별처럼
태어났다 죽었다 반짝이기도 한다
무엇으로부터의 혁명이고 무엇으로부터의 반사일까
안과 바깥, 중앙과 구석의 세계
구석은 빛으로 가는 기다림일까
행성에서 놓쳐버린 서로의 달빛을 잠재운다
달의 둥긂에도 모남이 있어 구를 때마다
한 겹을 벗고 뭉툭한 날이 생긴다
사람을 불러들이고 사람을 밀어내는 데 걸린 수많은 시간
감자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지에서
기다려도 오지 않을 우리의 핼리 혜성을 기다린다
홍영과 대광의 씨감자가 피워내는 눈과 눈의 기다림
뿔이 솟아올라 감자꽃을 피웠다
한 이랑 속에서 사람의 맛이 떨어지는 시간
76년을 더 기다리면 올까 우리의 핼리 혜성
키오스크
가야 부스까지 둘러보니 나니 두 시간이 흘렀다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 한 잔 너머로 창밖을 본다
햇볕이 내게 가닿아 터치되는 느낌, 내 몸도 키오스크가 아닐까
세모를 콕 찍은 가야의 화면 속으로 들어간다
토기와 장신구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몸속의 장기들
명암을 담은 유적이 마른 입술처럼 머릿속에 뜬다
저 햇볕은 나의 기원을 향한다 시대를 건너뛰어 선사에 이른 것일까
무의식의 구동이 저릿하다
거품 한 모금 넘기니 손잡이를 단 굽다리 항아리를 잡고 있는지
팔찌가 덜그럭거린다 어느 부족의 속눈썹이다
붐비는 관람객 틈에서 잃어버렸는지 귀고리 한 짝이 없다
귀를 만져보는 사이 탁자 위 팸플릿에서 산치자 달린 귀고리가 반짝인다
몇천 년을 뚫고 비친 것일까
나도 21세기의 껴묻거리가 아닌지 철판 두르고 가죽 끝으로 단단히 몸 조이듯
막막한 어둠에 잠겨본다
박물관 키오스크에서 빠져나온 불빛 하나가
아직도 나를 터치하고 있다
물 위의 집
의암봉 앞섶 사이로 붕어섬을 굽어본다
언제 방생된 것일까 저 몸짓
흙탕물이 넘실거릴 때도 한결같은 그의 적요
한때 선인들 싣고 오갔을 돛단배였을까
닻이 물결 흔들고 돛은 바람 흔드는데
의암 스카이워크는 노을이 지질러도 허공 떠받들고
케이블카는 계절 싣고 삼악산 오르내릴 때
검푸른 몸빛이 흰 뱃속에서 태양광을 뿜고 있다
덕두원 갈기슭이 카누의 노를 흔들면
막 산봉우리에 오른 붉은 노을이
붕어섬을 회유하고 있다
엄세원
202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숨, 들고나는 내력>> <<우린, 어디에서 핼리 혜성을 볼까>>
2022년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 선정
***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이자 사유의 세계이다.
엄세원의 시집 <<우린, 어디에서 핼리 혜성을 볼까>> 는
타자나 사물을 통해 "보다"의 의미를 그 저변에 사람이 있음을
관철해내려는 시인의 자세가 정직하게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면모는 <달의 맛>이나 <물 위의 집> 그리고 <키오스크> 등으로
등치된 "핼리 혜성"은 우리가 처한 현실의 "봄"(보다)을 잘 주조해낸
사실에서 쉽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