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
요사이는 향사(響士)의 휴일인 이곳 시간 금요일과 토요일이 기다려진다. 왜 이리 시간이 빨리 않가지? 그가 올린다고 공고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싶어서 였다. 이 곡이 생각나면 나도 모르게 진해(鎭海) 해군시절이 머리에 떠 오르는 것과 동시에 절로 이런 軍歌 박자가 쿵쿵 내 가슴을 두드린다. 아니, 오른 팔까지 거기 맞춰 오르락 내리락 거린다. 오늘 아침 지하철역 층계에서 내려오던 청년 두엇이 나를 보고 멈칫 하길래 의아해서 나도 잠시 멈춰 섰는데, 그러고 보니 아침에 이 곡을 듣고 나온 영향으로 나도 모르게 속에서 군가와 이 팔 운동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점잖게 차려 입은 싸이코 영감이 바로 나 였다.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생명을 다 하는 대한의 海軍
험한 저 파도물결 천지를 진동해도 지키자, 우리 바다 !
나가자, 푸른 바다로 !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 하여 !
우리 동기 가운데 나는 몇 손가락에 드는 장기 군복무자다. 1961년, 내가 의대졸업 후 군의관으로 입대하고 보니 해군군의관은 그 해에 7년을 근무한 사람들이 제대를 하고 있었다. 법으로는 엄연히 3년이지만 군의관 수가 모자라 ‘국회의원에 출마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다는 상부의 방침이었다. 다행이 사정이 조금씩 나아져 해가 갈수록 6년에서 5년으로, 그리고 내가 제대하던 해에는 4년짜리 우리 다수와 3년짜리 소수가 제대의 행운을 얻었다. 나 같은 물컹이는 선배들 권유에 따라 일찌감치 3년 제대 희망을 포기하고 첫해를 인턴교육을 받는 대다수에 들었기에 4년 만에 군복을 벗었다. 하지만 깡으로 버틴 우리 51회 ‘앵두’ 鄭喆隆이 같은 친구는 정말 운이 열려 나 보다 한 해 먼저, 3년만 하고 나갔다. 그래서 나는 미국유학 도중 귀국 입대한 51회 동문보다 4배, 학도병 간 동문들보다 2배, 대학졸업 후에 간부후보생 장교생활을 한 다른 동문들보다 1년을 더 근무한 폭이다. 젊은 시절의 1~2 년은 큰 의미가 있어 빨리 군을 마치는 것이 좋았겠지만, 명정계(酩酊界)를 제외한 기타 사회물정 늦깍이 였던 내 개인에게는 ‘그 놈의 복무’가 무언지 모를 재미가 있어 그리 어굴하지 않았다. 허긴 육군에 간 내 의과대학동기는 거의가 다 5~6 년씩 하고 나왔다. 그런 시대였다.
미 제5공군 사령부로 썼던 건물을 되찾은 지 몇 년이 채 되지않던 내 졸업 때의 서울대학교병원은 시설이 빈약했었다. 나는 군 병원은 그보다 훨씬 못하려니 하고 기대도 하지않았다. 그런데 해군의 진해병원 시설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고도 남았다. 당시는 군이 한국발전의 모델이었다. 수술실도 대학병원의 몇 배, 수술시설도 당시로는 최고시설 이었다.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는 터라 정부도, 미군원조도 아낌없이 투입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5.16 군사정부가 그런대로 의의가 있었다고 본다. 당시로 가장 똑바로 4년제 대학교육을 국제수준에서 하던 곳이 군의 사관학교가 아니었던가. 그런 교육을 받고 나온 집단이 군 사관학교 출신들이 아니었던가. 큰 설합문 여닫이 같은 칠판도 나는 그 진해 해군병원에서 처음 보았다. 군기도 엄했다. 예컨대, 진해시 사창가(私娼街)를 출입하다 헌병에게 걸린 장교 명단이 매주 각 부대 사령부 칠판에 계시되는 판이었다. 우리 선배 이름이 한번 여기 올라 일대망신을 당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아무도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다 잊지않는 그런 대망신이었다.
해군은 혹독한 의학수련을 시켰다. 미구에 군함이나 해병부대에 배치되어 혼자 부상자를 처치해야 했기에 나는 병원배치 두 달째에 혼자 하는 맹장수술을 해 내야 했다. 혼자 환자 척추마취를 하고, 좀 기다렸다가 수술대에 눕히고, 위생하사관 두 명의 도움을 받아 칼로 배를 짼 다음 맹장을 떼어내야 되니 그 긴장은 말로 표현키 어려운 정도다. 물론 만일을 위해 외과 선배 군의관이 뒷줄에 서 있었지만 서도 이다. 한번만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다시 해야 하는 수술의식이라 초긴장 속에 죽을 기를 쓰고 해야 하는 판이었다.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 전공의는 외과를 전공해야만 인턴을 마치고 2년째에야 하는 수술인데, 내가 들어 간 당시 군대는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 40여 분 걸려 나는 해 내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강제 ‘집도식(執刀式)’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도식이란 ‘칼잽이’가 된 기념으로 뒷배를 봐 준 선배들에게 한잔을 내는 좌석이다. 돈이 없으니 그 달 월급을 외상으로 맡기고 우루루 몰려 간 집이 진해 시내 한복판 우체국과 은행이 있는 8거리 광장 모퉁이의 중국집 ‘鎭海樓’다. 여기 꾸뻑, 저기 꾸뻑, 정신없이 술 잔을 돌리고 나서 내 차례가 되어 한잔이 들어가니 그제야 제 정신이 들었다. 뒤에 알고 보니 이 ‘진해루’도 서울 동숭동의 ‘진아춘’ 같아 장교들에게는 외상값을 몇 년이건 독촉하지 않는 집이었다. 도망가 보앗짜 주인이 해군본부에 전화 한 통만 하면 근무지가 들통나면서 해군 망신시킨 군법재판에 회부되기 때문에도 주인은 느긋했다.
중국집에서 나와 커피를 마시자고 들어간 집이 바로 길 건너의 저 유명한 ‘黑白茶房’이다. 그 다방은 전에 한두 번 갔었지만 잠시 였었는데, 이 날 저녁에는 어딘지 음악부터가 정신을 앗찔하게 하는 것이었다. 바로 오랜만에 듣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아닌가. 이제는 어디를 가건 의사로서 칼을 휘두르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자신감이 내 배꼽 밑에서부터 뿌듯이 올라 오면서 듣는 이 협주곡 1악장의 주제선율은 나를 하늘로 띄우는 것이었다. 아! 船醫에의 꿈! 당시는 의사가 미국에 가서 일하고 배울 줄을 누가 알았던가. 장래가 암담해서 우리끼리 모여 앉으면 제대 후에 구두닦이 가방을 메고 서울시내 골목을 누비며 “페니실링 맞으시요! 싼 값이요! 한 방에 다 나아요!”라는 직업을 택하던가, 아니면 강원도 탄광인근 병원에 취직해 일생을 보내는 수 밖에 어디 다른 수가 있겠느냐고 하던 시절이다. 국민은 있으나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고, 의사는 많이 배출되고, 취직할 병원이라야 손으로 꼽을 정도 밖에 없고, 그나마 박봉이라 보름치 하숙비에도 미달하는 그런 시절이다. 그런 내게는 몰래 원양항해 나가는 배의 선의가 되자는 꿈이 있었다. 사실 그 꿈은 대학시절에 보았던 ‘뻬뻬 러 모꼬(Pepe, Le Mocco)’라 하여 우리 번역으로 ‘望鄕’이라는 영화에서 힌트를 받은 것이다. 쟝갸방과 마르를린 데드리히가 나오는 1930년대 연애영화로, 아마 동문들 상당수가 보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대형 여객선을 타고 떠나는 여자를 멀리 보면서 권총자살을 하는 알제리아 백인 깽 두목 쟝갸방이 그렇게 멋이 있었다. 요컨대, 그런 멋진 세계의 그런 멋진 여객선의 선의가 되어 인생을 한번 ‘외인부대 대원격’으로 누벼 보자는 것이 청년의사 시절의 내 숨은 반쪽 환상이었다.
흑백다방은 이름 유래가 해군 장교의 겨울복장에서 나온 것이다. 검은 상하의에 검은 외투, 그리고 흰 마후라가 그러했다. 해군도시 진해의 유일한 문화가 여기를 중심으로 다소 있었다. 주인은 이북에서 피난 나온 청년 서양화가였고, 주인 아줌마는 일편단심 내조만 하는 여자다. 다방 레지는 한 두 번 바뀌기는 하나 언제나 머리는 빈, 몸 좋고 물 좋은 젊은 아가씨였다. 이 다방에는 주로 해군장교, 특히 간부후보생 출신의 특과장교와 군의관들이 꼬였다. 달 포간의 해상근무를 마치고 모항에 방금 귀환한 군함의 장교들이 함장의 인도에 따라 집에 가기 전에 이 다방을 먼저 찾아와 신고를 하는 일은 언제나 벌어졌다. 벽에는 그림과 사진들이 붙어 있고, 고전음악이 흘렀고, 미 해군 고문관실에서 새어 나온 진짜 커피가 큰 잔에 부어 나왔다. 홍차는 더 큰 잔에 나왔다. 계절에 한 번씩은 진해 문화예술협회가 여는 시화전이나 시 낭독회가 열렸다. 이 다방 이야기를 얼마 전에 心山 최낙규와 南岡 목영민이가 이 게시판에 올린 일이 있다. 요 얼마 전까지 라스포사 옷 사건으로 유명했던 김태정 법무장관도 군 법무관시절 우리 뒤를 이어 이 다방 단골이었다고 누가 전해 주었다.
금테 모자에 흑백의 해군 장교복을 입고 부산 남포동 골목을 주말 저녁에 걸으면 많은 고졸 아가씨들이 우리를 기웃거렸다. 오랜만에 서울역에 내리면 양동 삐끼들이 “장교님! 가시죠, 예쁜 …”하고 공손히 따라 붙는가 하면 헌병들, 특히 해병대 헌병들이 벼락처럼 달려들어 경례를 딱 부친 뒤 짐을 시발택시 정거장까지 들어 주었다. 이러니 대한민국 장교노릇, 한번 해 볼만 하지 않은가! 물론 당시가 5.16 직후이긴 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내게는 꿈과 환상과 근육이 뛰는 청춘을 준 曲이다. 해외라고는 군함 타고 그저 동서해로 밖에는 나갈 수 없던 꽉 막힌 시절, 이 음악의 바이올린 선율은 밖으로 도망쳐 나갈 구실과 꿈을 주면서 나를 유혹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들을 때마다 생각난다, 그 진해의 흑백다방과 빵집 ‘백장미’가! 그 친구들이!
그것은 尹伯榮중위, 嚴泰星중위, 崔洛奎상병, 睦榮敏상병, ‘스딸린’ 故崔正玩해병소위 모습을 떠 올려주는 음악이기도 하다.
첫댓글 겸산이 말하는 '향사'는 미국에 살던 이홍순을 말한다.
홍슨이가 홍현과 희우정에 고전음악 파일을 많이 올려서 그렇게 별명을 받았다.
겸산의 옛 얘기들을 읽으면 우리의 과거생활역사를 뒤집어 보는 마음이다.
'앵두' 철륭이도 해군장교로 있었구먼, 대학 들어가고는 서로 보지 못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