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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2장
1. 레위와 세운 생명과 평강의 언약(1-9)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피조물인 성도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기 마련이지만,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리신 뜻은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4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레위와 세운 하나님의 언약이 항상 이스라엘에게 있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항상 이스라엘에 있게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바라보며, 언약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가 언약의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왜 레위와 세운 하나님의 언약이, 항상 이스라엘에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이 필요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2절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내리시는데, 이스라엘의 복을 저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2절하에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듣지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저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할 수 없고, 따라서 영원히 저주에 갇힐 수밖에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스스로의 힘으로,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진 거룩한 제물의 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을 거룩한 피가 그들의 생명이 되는 관계에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에 있기 위해서는, 거룩한 제물의 피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자신의 실상에 대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킬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나 같은 자가 아무리 복을 빈다고 해도, 주어지는 것은 저주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 아래서 실감하게 되는 것은, 명령을 지켜 행하지 못하는 우리 현실입니다. 그래서 깨닫게 되는 것이, 저주에 갇힌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생명의 언약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고, 저주에 갇힌 자가 믿고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을 알고 언약을 믿는 성도가,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령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킬 자질이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무너뜨리면서, 자기의 세계만 굳게 세우려고 할 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저주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저주가 당연하다면,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과 어려움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난 자가 고생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를 저주에서 건지시기 위해 구원자를 보내시고, 그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은 저주에 갇힌 자에게는, 분명 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육신의 삶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저주에 갇힌 실상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기 때문에, 이방인보다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힘든 삶이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셨다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사랑하였나이까’라는 반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이스라엘에게 함께 했습니다. 그 증거가 이스라엘 안에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 말한 대로 이 언약은, 이스라엘에게는 생명과 평강의 언약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생명도 평강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도 보지 못합니다. 단지 삶이 힘들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님의 사랑은 없다는 생각만 굳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편안함을 원합니다. 사실 편안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한 바람은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편안한 삶도, 화살처럼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편안한 삶도 잠시 후면 끝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코앞에 있습니다. 오늘의 일일 수도 있고, 내일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 인간은, 영원한 저주의 세계, 고통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보이는 것만을 믿는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를 무시하겠지만, 성도는 말씀 안에서 저주의 세계를 보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편안한 삶이 아니라,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는 생명과 평강의 언약 안에서, 언약을 이루실 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둔 성도에게, 참된 복은 생명입니다. 저주에서 구출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3절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절기의 희생의 똥은,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바친 희생의 제물을 말합니다.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도 모른 자가 바치는 희생의 제물은, 냄새나는 똥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을 줄 아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 바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베푸신 것을 받을 줄 알고,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야 말로 신앙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치는 것을 신앙으로 강조하는 현대 교회는,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잘못된 신앙 안에서, 교인들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받기 위해서, 더 많이 바치는 경쟁을 일삼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존귀한 것을 받았습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귀한 복의 세계를 살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처했던 자리를 다시 보기를 바랍니다.
2.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10-17)
우리 눈에 펼쳐지는 세상의 현실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큰 함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현실이,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도라는 인식이 살아있습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리면서, 오히려 믿지 않는 자들이 더 평안과 부를 누리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혼란을 해결하지 못한 채, 같은 현실이 계속 될 때,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게 되면서, 믿음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기 십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이, 곧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라고 하면서도, 그 사랑이 우리의 현실의 문제에서도 나타나기를 바라는, 우리의 기대가 우리를 함정에 빠지게 합니다.
십자가로 인한 구속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임을 믿는다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속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복의 자리에서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큰 것을 받았으니, 나머지 작은 것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연약함으로 인해서,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고, 그가 곧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감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라고 하면서, 발뺌을 합니다. 말로 여호와를 괴롭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은 척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그들 생각에는, 말로 여호와를 괴롭힌 적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 생각에는 여호와 앞에서, 자신들은 떳떳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보다는, 믿지 않은 악인들을 더 돌봐주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 현실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실종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당연하지, 자신들이 언제 말로 하나님을 괴롭힌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말로 하나님을 괴롭혔는지는 다음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7절하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를 좋게 보신다는 말, 악인이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말, 그리고 세상에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는 말들이, 하나님께는 괴로움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스라엘이, 그들이 악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잘되어야 할 만큼 나은 사람들입니까? 10절에 보면 그들은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라고 책망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아버지를 섬기는 관계에 있고,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동일한 피조물이라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아버지를 섬기는 관계를 무시하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함으로,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삶의 사고방식입니다.
이스라엘은 한 분 아버지를 섬기는 관계에 있고, 아버지라는 관계 안에서 그들을 모두 형제입니다. 그런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는 것은, 오직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형제가 해를 입는 것도 개의치 않겠다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또한 11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여, 하나님의 성결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곧 이방인으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복을 얻을 자격이 없는, 이방인과 동일한 자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한 대로, 자신들의 괴로움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로 여겼습니다. 제사도 드리고 제물도 바치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그들은 제단에 나오되, 자기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나왔습니다. 곧 죄로 인한 애통이 아니라, 자신이 원한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눈물과 울음과 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는 그들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받지도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마치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처럼, 그들의 모든 제물을 돌아보지도, 받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복을 주지 않고, 악인이 잘살고, 자신들이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악인으로 규정하는 이방인보다, 더 잘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15절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유는,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오직 하나만을 만드신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혼하는 것과 아내를 학대하는 것을 미워하신다는 것도,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만을 만드신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혼하고 아내를 학대하는 것은, 아내로부터 마음이 나눠진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만을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이 나눠지지 말아야 할 이스라엘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이혼을 하고, 아내를 학대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떳떳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고, 무엇이 이스라엘다움에서 멀어지는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원하신바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종교적 실천과 행함이 있으면, 신앙이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실천과 행함이 있을수록, 떳떳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나옵니다.
이러한 사람일수록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떳떳하기 때문에,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현실 문제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잘못한 게 뭡니까’ ‘할 만큼은 했습니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면서, 결국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 있다며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이 오히려 함정이 되어, 여러분을 불만으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거부하시고, 오직 예수님만 받으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현실이 어떻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가장 복되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