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강좌(6)】 "공동 살림에 지켜야 할 원리"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6
공동 살림에 지켜야 할 원리
도둑놈이 올 땐 (한 구절 잘 알아들을 수 없음) 막을 수가 없어! 그러니깐 꼭 문(門)을 만들어놓고, 자유를 잃는 것 같지만 자기는, 주인은 주인인 만큼 아무 때도 없이 어디로도 올수 있지만, 그러나 주인인 이가 스스로 자기의 자유를 내버려서 (바로)고 문으로만, 문지기한테다 쇠를 주고, 문지기보다 자기가 못해! 그러지 않아요? 전체를 위하는 생각에 문지기를 딱 쇠를 주고, “문 열어라!” 그러고 자기는 들어가고 나머지는 “잡아라!”, 그것은 얼핏 보기에 자유가 없는 것 같아. 또 어느 때나 갈 수 있건만, 그러질 않고 딱 시간이 돼야 가고 그래. 그러는데(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것 같지만 ,그건 그렇게 해야만 전체를 보호할 수가 있어! 그러니깐 공동 살림엔 공동 살림에 반드시 지켜야하는 어떤 원리가 있는데, 그거 지키는 사람은 내 목자(牧者)지만, 그거 안 지키는 사람, 자유라는 이름하에 되는대로 막 크는 사람 말이야.
요새는 더구나 그렇지 않아요? 자유가 구현된 시대니까. 그 사람, 그게 너 해치자는 사람이지, 속아선 안된다! 지금같이 이렇게 자유사상이 올라가는 때, 민주주의라고 하는 땐 더구나 그래. 민주주의라 할수록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 어느 원리 지키기 위한 민주주의지, 원리도 아무것도 도무지 무시하고 그건 살림 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거 지키는 사람이냐? 아니 지키는 사람이냐? 그거 너 봐라! 그러니깐 그럼 목자의 하는 것이 뭐냐? 목자가 할 것이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할 거에요. 첫째는 그건 울타리에 안에 살림, 첫째는 그 안에 안전해야 돼. 위험이 없이 안전해야 돼. 그 다음은 그 안에 있으면 서로 평화 있어야 될 거에요. 그 다음은 그 안에서 육성이 돼, 자라가야 할거예요. 적어도 그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그게 울타리 의미가 있지.
교회라는 걸 말하면, 교회 안에 있다면 교회 안전 평화가 있어야지. 안전해야지. 또 거기 자라는 거 있어야지. 그럭하기 위한 살림에 어떤 기본적인 원리가 있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 모양으로 오셨다는 건 뭐냐? 그러면 그 원리를 지키기 위하는 겁니다. 그러니깐 온전히 사람 됐다는 거야. 연극을 하는 것 아닙니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렇게 있다가. “자 우리도 사람으로 들어가자” 그런 게 아니라, 그건, 우리가 이해하는, 이해하자니깐 이점이 이게 너무 이렇게, 제가 유치한 말 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런 점에 있어서까지도 요렇게 쉽게 설명 안해주기 때문에 성경을 잘못 읽어가지고, 거리끼는 일이 많이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하는 말이, 절대로 하늘이라는 저기 어떤 딴 세계가 있어. 거기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성경을 둘이 쑤근 쑤근 의논을 해가지고, “야! 너 내려가 봐”. 뭐, 그래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 살림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역사에 난 사람인데, 그 사람의 살림을 보고 이해를 하니깐 저 사람은 뭐이지? 저 하는 거 뭐이지? 뭐지? 깊이 깊이 바로 이해를 하니깐 발표가 되고,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마는 이 세상에 건지기 위해서 육신으로 돼 왔다”. 그랬는데 그 육신으로 돼 왔다는 게 뭐냐? 그러면 무슨 목적이 있기 때문에, 세상 건지기 위한 거는, 건지는 데는 왜 그래야 되지? 여기 우리 이 인간에 인간사회에 이게 사람으로서 편안하게 살고, 서로 화평하고 화목하고 살다가 점점 더 자라서 이 이상의 인간이 돼 가!
높은 세계에 올라가려면
이제 이 세 가지 조건을 다 만족이 된다면 지켜야하는 반드시 그 기본적인 몇 개의 원리가 있어. 사람의 모양을 쓰고 왔다는 거. 자기도 그걸 그대로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그 점이 이제 성경에 말대로 ‘자기가 특별히 겸손하게 자기를 낮춰서 이렇게 왔다’고 하는 그 말로 표시되는 겁니다. 근데 인도사람, 시간이 너무 길어집니다만, 인도사람 말로는『바가바트 기타』 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어요. 거기 크리슈나(Krishna)가 뭐야, 크리슈나가 우리말로 하면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얘긴데. 거기 뭐라 그러면 그래요, “나는 일체 부적(符籍)이 없다. 나는 본래 난 나대로 스스로 사는 거니까, 뭣을 먹어야 산다는 것도 아니고, 뭘 입어아만 산다는 거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일할 필요가 없다”, 그게 이제 이 동양사상에 무(無)라고 있습니다만, 인도사상에도 “무엇을 사람이 이익에 붙잡혀 가지곤 안된다” 그래! 그 지경을 초월하고 무(無)의 지경을 말해요. 근데 그걸 잘못 오해하도록 않기 위해서 이제 하는 말입니다.
한 동안은 저 인도에서도 무위, 무위라 해서 “일체(一切) 사람이 자유로워지려면 이 세상에 이걸 다 버려야 된다” “버려야 된다” 그랬는데 그걸 그렇게 되면 폐단이 나! 버리면, 아무리 버릴 수가 있나? 철저히 버리려면 숨쉬기도 그만 둬야 하겠는데 그걸 하여야지만 무위, 진정한 무위. 근데 그렇게 되면 뭐 일반적으로 없어지겠는데, 그건 무위라는 건 어느 정도지. 아주 그 논리적으로만 그렇겐 안된다, 그래 그런 걸 가르치느냐고 그래. 나는 이 세상이 내가 만든 거기 때문에 나는 일할 필요가 없어. 나는 무엇을 해야만 산다는게 아니에요. 그런 존재니깐 내게는 일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지만, 나는 왜 이 세상에서 와서 일을 하나? 이 세상 인간이 어드런고 하니, 사람이라는 건 자기보다 잘난 사람이 하는 걸 보면 모방을 하게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야.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이 하는 걸 보면 저도 따라하는데, 내가, 나는 나를 생각한다면, 나는 하나님, 직접 하나님이니깐 일 할 필요가 없지만, 안하고도 살 수 있지만, 내가 일을 안하면 이 세상이 왼통 나를 보고 일 안할거다, 그럭하면 이 세상의 질서가 왼통 깨질거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왜 지금 이걸 하냐 하면, ‘세상의 질서를 올바로 유지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한다’, 그 생각이 참 이제 좋은 생각이야! 그게 꼭 기독교로 말하면 예수님이 뭐 하나님의 아들이 뭐이 부족해서, 안타까워서, 목수의 집 아들로 왔지? 자기는 그럭허지 않아도 돼! 하지만 이 세상에 이 사람들 봐서 그렇게 해야 돼! 왜?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라서, 자라서, 이것만이 목적이 아니고, 보다 높은 세계에 올라가려면 반드시 지켜야하는 그 생활의 원리가 있어! ‘그건 누구든지 지켜야한다’ ‘그것을 안지키면 안된다’ ‘그것을 자기가 배워주기 위해서 자기 왔다.
그런데 세상의 임금이라는 건 뭐냐? 대통령이란 건 뭐냐? 그런데 안 지켜 예외적으로 돌았다는게 권력잡니다. 권력이 다른 것 때문에 좋다는 거 아닙니다.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인을 자긴 안지키고 살아볼까? 하자는 게 권력욕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위대한 이들이 모두 다 낮은 살림에(서) 낳다는 건 그 때문이예요. 그거 아니라, 어느 백성도, 어느 백성도 다 살라면 지켜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 원리를 나도 지켜야 된다, 내가 왜 저 사람들 지켜봐 줘야 한다, 그렇게 희생이 돼. 그런데 이 세상은 내가 재주가 있기만 하면 나는 일 안해도 된다. 권력이 있기만 하면 나는 그렇게 안 해도 된다. 그래 이 세상에선 높은 것에 대접이, 뽑아주는 게 대접이에요. “아이, 선생님 뭘 다 그러겠어요? 그만 두세요” 그래. 대접할수록 뽑아줄려고 그러지만, 예수님의 생각으로 하면 ‘대접할수록 뽑지 마!’ ‘똑같은 거!’ ‘남이 십자가를 지면 나도 져야지’ ‘남이 걸어가면 나도 걸어가야지’ 그럭하는 게 높은 거, 이게 이 진리의 나라에서 보는 눈이나, 이 세상 나라에서 보는 눈이 다른 점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한테 더 가까이
그래서 이 세상 이럭하고 왔다는 거. 그러니깐 그 조건만은 그 원리만은 꼭 지켜야 돼. 그런데 이 세상에 사람으로 되는 원리 지키려면 좀 거북한 점이 있으니깐, 될수록은 꺼불러 자기는 예외, 익셉션(exception) 되려고 그래. 이렇게 나만은 안하고 지나가려고 그러니깐, 이 세상에 지식 있는 사람 권력 쥐는 게 욕심인데, 소위 지배자라는 거, 그런 일 안하기 위해서 그러니깐, 자연히 그걸 대단히 이렇게 낮은 살림을 치룰 수밖에 없어. 그래 표준이 하여간 그거 돼서, 문(門)으로 들어와야 된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닌가?
그 다음 또 그 다음에 참 목자와 목자 아닌 걸 구별해야 돼. 목자냐? 삯꾼이냐? 근데 그건 아주 알기 쉬운 거예요. 어느 정도 삯꾼은 자기하는 책임도 상당히 해요. 주인과 같이 하지만, 가다 그것이 진짜 주인인지, 삯꾼인지는 마지막 단계야! 마지막 단계는 어느 위험이 올 때에 생명을 내대고도 양을 보호 하냐? 도망을 하냐? 그걸 보면 그때 가서 판명이 된다. 그러니깐 그래.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왜 십자가에 죽었나? 우리 죄를 대신, 그건 물론 대속(代贖)이라고 붙이면 붙이겠지만, 대속이라는 그런 어려운 데까지 가지 않고라도, 않고라도 예수님 자신대로 말한다면 어떤고 하니 “양을 삼키겠다는데 그럼 어떻게 내가 보고 있겠냐?”
그럼 요번에도 나 요새 남강선생님의 전기 쓰느라고 그랬습니다만, 이00한테 대해 쏘니까니 이00 가리우겠다고 나섰던 사람이 또 맞아 죽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 이00 따위 죽을래도 자기가 몸을 내대며 보호하겠다고 하는데, 하는데, 예수님의 생각으로는 어째 이 참 민중이 저게 살 길이 있고, 이리 같은 놈들한테 지금 소위 임금이랍시고, 관리랍시고, 제사장이랍시고, 백성들을 짜먹는데 저걸 어떻게 내가 보느냐? 어떻게 막아야 하지 않냐? 막다 막다가 죽게 되니깐 죽은 거지. 그렇게 해야 참이야! 그러니 그 다음에 생각을 하니깐 아! 이건 좀 우리가 죽을 걸 대신 죽었는데. 그럭허니 생명이지. 그걸 자기로써 무슨 연극을 했겠어요? 진짜 그럼(그런다면) 그럴 수가 있겠냐? 목자로써의 자기 충성을 하는 이제 그 점은 그렇게 보는 게 예수한테 더 가까이, 정말 이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럴 겁니다. 그러니깐 조건은 다른 거 아니라, 마지막 관두에 올라가면 어째나 ‘이 전체를 위해서 죽나, 안 죽나?’에 달렸다,
그러니깐 이때까진 일 상당히 재주 있게 하는 것 같다가도 아주 어려운 일 나는 것보고 내빼는 사람은 “그건 목자 아니야” “그 사람 믿을 수 없다” “그러니깐 거 상대 하지마!” 그리고 “나는 선한 목자(다)” 라고 하는 거 아닌가? 자기는 아주 각오하셨기 때문에 맘에 일체 흐틈이 없어. 그러니깐 자긴 정말 생각 하는 거야. “나는 내 목숨 내댄다”, 그때부터 각오를 하신 거니깐, 그래서 그것 보면 ‘정말 전체를 위하는지 아니하는지 알 것 아니냐?“ 인제 그거 하나!
음성만 들어보면 안다
그 다음 조건이 더 중요한 거야! 고거 이제 두 가지야. 하나는 ‘강도냐, 절도냐?’와 비교해서 참 목자 구별하는 거. 하나는 ‘삯꾼이냐, 참 목자냐?’, 그래 이 세상에 반드시 인간이 살아가는 원리, 도덕이요, 종교요, 이런 사회 원리, ‘이 원리 지키냐, 안지키냐?’ 하는 거 봐서 ‘그 사람 믿을 사람이냐, 안 믿을 사람이냐?’ 아는 거. 또 마지막에 누가 이리 와도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라도 ‘하냐, 안하냐?’ 그것 봐서 정말 ‘목자냐, 삯꾼이냐?’ 알게 된다. 그걸 봐서 네가 판단을 해서 알아라, 그건 그 마지막엔 고 셋째 조건이 요게 더 중요한 거야.
그건 뭐냐? 그러면 문을 열고는 그 목자가 이름을 불러. 너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불러서 내 끌고 데리고 간다고 그랬어요. 그럼 그것 보면 아까 얘기대로, 울타리는 임시지, 영구히 거기 있자는 목적이 아냐. 거기 밤 동안에 도둑이 오는 때를 막기 위해서 두었지. 일하려면 문을 열고 문으로 나가. 어디로? 이제는 제재해야지. 어딜 가나 못 먹을 때가, 못갈 때가 어디 있어? 이 천지에 자유자재 하도록 만들자는 게 그게 종교의 구경 목적이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교회에 무슨 법칙이란 따위가 범법 지키는 데만 입장을 나눠 그런데, 어느 시기동안 고걸 그렇게 하여만 도둑한테 안 걸릴 수가 있어. 그래 지켜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지키면 문제가 없어요.
그건 거기 이제 중요하다는 건 뭔고 하니 이름을 불러서 낸다고 그래서, 그리고 그 양이 목자소리를 알아듣는다고. 언제 연습했단 말도 없고 언제 가르쳐 주었다는 말도 없어요. 그건 본래가 그렇게 돼 있어! 이게 이제 중요한 아까 말씀에 드린 셋째 조건이 제일 어려웠는데, 그 아주 단순하다, 악의(惡意)는 없지만 단순해서 유혹에 빠져 넘어가기가 쉽다! 그랬지만 사실을 말하면 그건 왜 그러냐? 그러면 우리가 이 쓸데없는 것에 집착이 되가지고 이 욕심 때문에 그래 모르지, 사람이 제 속을 밝히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게 생겨서, 저 사람이 내 목잔지 어떻게 알아? 음성만 들어보면 안다 거야. 그 전에 들어봐서 아는 것 아니라 들어보면 안다는 거야. 그 누가 어떻게 아냐 내 이름을 안다는 거야.
이름이란 뭔고 하니 나의 참 잘 알아주는 거지. 날 알아주는 그하고 나하고 둘 사이에 벌써 이렇게 산 관렴이 돼 있어. 그래 마치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안에 있는 것처럼 그런가하면 본래 처(處) 처에 올라가면 예수하고 그리스도와 우리 따로가 아니야. 본래 아는 처지여. 본래 하나야 하나인데, 그것이 이렇게 나온 거니까, 본심에 이게 이걸 맑혀서 유혹을 받지만 생각만 하면 저 사람이 목자인지 직감으로 안다는 거야 또 이렇게 하면 저것이 내양인지 직감으로 안다는거야 그 관계가 대단히 중요한 거야.
네가 내 안에 있다
그게 있으니깐 내 백성이라고 그러고, 내 양이라고 이제 그러고, 거기다 말을 하는, 그런데 너희는 그렇지만 울타리 밖에 있는 거 있다, 지금 모르고 있는 거 있지만 그것도 내가 이다음에 여기다 넣어야 된다, 그러니깐 다 하나야! 교회 밖과 교회 안이 없어. 종교와 종교법, 불신자 신자가 따로 있는 것 다 구경(究竟), 마지막에는 하나 왠고 하니 참 삶은 이 왼통 우주전체가 한 공동체, 한 정치에 들어가야 하겠는데 그러니 본래 그 가능성이 본래부터 있어. 목자한테는 그들의 이름을 알아. 이름이 일일이 그 사람의 특성을 안다 그 말이야! 알아준다고 불러내는 거, 또 그러면 알아듣고 다른 사람이 오면 양이 벌써 알아보고 안 나간데. 그러니 뭐 울타리 문 보고. 물론 못 박아 둔 처음이지. 그거 볼 필요 없이 000하면, 그 사람의 얼굴만 봐도 내 마음 속에 딴 생각만 없으면 이렇게 보면 직관에 의해서 저 사람이 정말 진리의 전도잔지, 딴 욕심을 가지고 그러는지 판단하게끔 돼 있다 그래.
너와 나 사이에 본래 내가 너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다, 그러니깐 어느 때 가르쳐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본래부터 여기 참교회가 돼 있어. 그러니깐 그러면 이제 문이라 목자라 그랬지만 그건 말로 그런 거고, 문이 어디 있나? 문이라 하지만 문이 있어야 올 줄 알지만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기라 그러면 문을 어디서 찾다가는 못 찾고 말겁니다. 여기 불교에 무문간(無門間)이라 그러는 거 있어(흑판에 쓰는 소리 들림). 문 아닌 문이다 그 말 이예요. 문 아닌 문이야. 사람이란, 문이라 그러면 문에 집착해요. 요것이 꼭 우리, 서울대학교면 우리 서울대학교 우리 서울대학, 경제학과도 우리 경제학과 우리 경제학, 고게 고 문에 붙잡히 거야. 그거는 사람이 문으로 다니는 것 아니라, 문한테 먹히어서 문에서 해방 못되는 사람, 그래가지곤 우리가 기독교에 종이 되가지곤 구원 못 얻는다, 불교에 종이 되도 구원 못 얻는다, 내가 필요에 의해서 믿는 거지, 어느 때 있는 거지, 내가 교회를 위해 나오는 거 아니니깐, 그런 모양으로 그래, 문이 마지막에 문 없는데 가야돼! 그 본시 여기 속에 본래 그 점을 강조해 말씀하신 거 아닌가? 그래 내가 이제 그 다음 건 이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생각을 합시다.
사실 어찌해서 내가 내 목숨을 버리나? 목숨을 버리지만 버리는 거 아니다. 그건 내가 어째 더 얻기 위해서 그러는 거다. 그러고는 그게 아버지께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그러고 거기가 정말 이제 마지막 구경 가르치자는 데야. 네가 양육을 받아서, 받아서 이제 더 산 자(者)도 내가 이끌겠다고 그랬는데, 산 자 이끈다는 건, 거 그 자리에 가는 거야. 목숨을 다룰 수 있는 대로.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솔선해서 버린다고 하는. 그래 선한 목자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런 걸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걸 구별을 해서, 내가 따를 사람인지 따를지 않을 사람인지, 그래 사실을 말하면 밖에 있는 아까 하던 말이 잊어버렸다는데서 그랬습니다만, 문이 밖에 있는 줄로 알고 찾는 한은 문을 못발견하고 말거예요. 그럼 어느 건 그 문에 그만 구애가 돼. 붙잡혀버리고 말아. 목자가 저기 누군지 알고. 그걸 사람으로 구별을 해서, 예수 따라간다, 공자를 따라 간다, 뭣을 따라가, 사람과 사람이지, 예수는 몇 점 드려야할까? 공자는 몇 점 드려야할까? 석가는 몇 점 드려야할까? 그런 따위 생각을 해가지곤 이 진리를 모른다 그 말이야.
그런데 있는 거야. 여기 본래 아는. 문이 있대도 여기 안에 있어. 왜 그런고 그러니깐 내가 아는 것이고, 목자가 있대도 본래 여기 안에 있는 거야,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야, 밖에서 오는 것이 아냐. 그러니 그게 아까 말이 이름 불러내면 안다. 또 내가 보면 내 양을 안다. 그렇고 해서 이제 앞서 갔다 온다 하는 게 말로 그렇게 됐지만 사실은 여기 안에 세계 여기 이 안에 본래 있는 거야. 그러니깐 문이 속에 마음에서 열려야 돼. 저번에도 다른 데서 한 얘기인데 문을 내가 속에서 내가 여는 거냐?, 밖에서 열어주시는 거냐? (문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 들림) …어려워요. 내가 열었다면 이 보통 여기 있는 복음주의에서 말한다면 내가 도대체 알지 못해. 하나님이 열고 들어와, 하나님이 열어주셨다, 의논이 됐다 그럴라면. 하지만 하나님이라는 게 결코 고립자(孤立者)가 아니라는 거, 000가 아니라 하는 말이 하나님이 막 강제로 열고 들어와 이 자식아 문 안 열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연애 하나 할래도 강제해가지고 안 되는 줄 뻔히 아는데 하나님이 결코 강제로 이 자식아 너 날 사랑할래, 안할래? 그러진 않아요. 그러니깐 다른 걸로 하면, ‘묵시록’에 있는 걸로 하면 예수님이 여길 오셔서 귀를 기울이고 듣는데 어디 여나, 안 여나? 아무 때나 열면 들어가겠다! 십년이 돼도 열 때까지 기다리지. 내가 이런 열고 들어가는 거, 열고 들어가 살아야지!(문을 여닫는 소리가 크게 들림) 예수님도 (두 구절이 정확하게 안들림). 그도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나? 사랑하는 기미가 보일 때 “난 당신 사랑 합니다” 그러지 말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만 보면 맨날 사랑해, 싱거워라,(큰 웃음 터짐) 벌써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할 땐 저기서 말 받아가지고 하는 거예요. 말보다 그이상의 사랑다운 고백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서 하지 말이야! “모르겠는데 한번 해볼까?”(웃음) 그런,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건 그것과 마찬가지 모양으로 벌써 이 속에, 그러니깐 이게 내가 연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연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결코 무리로 들어오는 이가 아니다!
사랑의 경험
그러니깐 ‘묵시록’에 보면 안에서 열라고 기다려! 기다린다는 예수가 얼마나 좋아요. 난 마음으로 열고 들어오는 예수보다는, 내가 요렇게 하면 기다린다고 하는 예수 생각을 하면 그건 눈물이 안 날 수가. ‘아이 참 고마워라. 어디 갈 데가 없어 나한테 와서 기다린다고 그러실까?’ 그리고 나면 내가 열라고 하지만, 열래도 (한 두 마디 큰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음) 열리기 전에 열라고 하면, 열까 말까 열까 아이구 무서워서, 고맙게 생각할수록 참 안와. 그러니 열려! 몰라, 내가 열었나, 열으셨나? 알 수 없지. 그게 내가 연 것도 아니요, 제가 연 것도 아닙니다. 또 내가 연 거고 그가 연 겁니다. 남은 여유가 없어 동시에 아마 소리가 났던지도 몰라요. 그게 종교의 체험의 과정을 말하면 그런 거. 그런데 이 사람들이 자기네 이 사랑의 경험은 없이 남의 얘기를 하니깐 말이야. 은혜로 된 거지, 그게 제 노력으로 된 거냐? 이렇게 그럼 노력 안하고 은혜가 어디 있어요? 또 노력으로 된 거지, 은혜로 된 거냐? 은혜 없이 노력이란 것 어디 있어요? 근데 거 쓸데없는 이런 문구를 가지고 자꾸 싸움을 하지 않아요? 그게 뭐냐? 그러면, 내 속에 당초 예수님을 언제 겪어보지 않았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겪어보았으면, 그런 말의 문구에 걸려서 뭐 은혜로 됩니까? 노력으로 됩니까? 하나님이 예정을 했습니까? 예정했다면 어떻게 그럼 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정이 무슨 예정이겠소?
누가 누구를 난 널 본래 안사랑하기로 예정했다. 그런다면 참 나무라울 거예요. 아무리 사랑 안했으면 몰라. 글쎄 우리 처음 뵙니다. 나 아직도 몰라요. 그럴 거예요. 당신 나 안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었어. 그런다면 아무리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남 보고 실례의 말이 그런 말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이란 이가 누군 구원을 할 것 누군 구원을 안할 것 예정을 해 그런 의미의 몰라. 난 칼빈(J.Calvin)은 어느 의미로 했는지 모릅니다만 그런데 우리가 상기도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그런데 걸려 있다고 하는 데가 어떻게, 어떻게 생각이 제로야, 이 속에, 속에 그리스도를 속에서 보고, 내 이 교회를 속에서 볼라고 속에서만 보면 문제가 없습니다. 거기 무슨 장로교, 감리교 있을 리가 있어요. 속에서 안보고 겉에서 보니깐 싸움이 나지. 여기서 속에서, 내 속에서 왜 그런고 하니 신(神)은 겉에 있다 그래도 내가 내 속에 찾지 않고는 보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 맨 마지막에 그 조건을 말씀 하시는 거야. 참 그래 가장 아주 중요한 거야. 내가 이름을 알고 불러낸다. 그리고 따라온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올 땐 도리어 싫어서 아니 온다. 그 목소리를 몰라보기 때문에 그런다. 그건 이 세상에서 양을 치는데 있는 그 누구든지 잘 아는 그 그림을 그려가지고, 우리와 그와 둘 사이에 생명으로 하나 된 그 관계를 말합니다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안에 있는 것 같이 너도 내안에 있고 내가 너 안에 있고 해서 우리가 다 하나 된다. 그러니깐 참 교회는 합하라! 한 울타리로! 그 안에 들어가기를, 그럭할려면 너가 이런 조건 적어도 알아야 된다. 문은 어느 것 부자유한 것 같지만 그거 통과 할 줄 알아야한다. 또 다 좋은 말로 오지만 말에 속아선 안돼. 참 목자냐? 도둑놈이냐? 참 목자냐? 삯꾼이냐? 구별할 줄 알아야한다. 그런 걸 우선 우리에 가르쳐준 것 아니예요? 그러니깐 그래 내가 내속에서 그러면 그럼 저절로 거기, 이제 그걸 초대면을 해도 알아본다 그 말이야. 너는 이제 걱정, 못 알아볼까봐 걱정할게 없어. 꼭 알아본다고. (잠시 휴식을 위해서) 이제 그만둡시다. 조금 앉았다 합시다.
잘못된 자아를 이렇게
(곧 이어서) 그래서 요걸 내가 제목이나 (한마디가 안들리는 중에 판서를 함) 글은 길어서, 길어서 오늘 이 다음 주일에나 다 하는 것은 못 하는거고. (계속 판서 중) 오묘한 뜻에 옛날 보명선사(普明和尙)라는 유명한 중에 목우(牧牛), 소치는 얘기가 있어요. 이제 목우십도(牧牛十圖), 거기에 대한 시(詩)입니다. 목우십도, 이제 사람이 자기를 내 이 잘못된 자아(自我)를 이렇게, 이렇게 기독교로 회개를 하고 이제 신(神) 한테 그 과정을 이제 열 개로, 소 먹이는, 소가 본래 길들지 않은 걸, 어떻게 가져다 길을 들여서 하는 그 과정으로 열 개에다가 비교했어요. 그걸 본래 우리 마음이 처음에는 말 안 듣는 소 같아. 그런 걸 차차차 어떻게 훈련해서 하냐? 그건 말은 맨 처음에는 미목(未牧)이라고 그래요. 첫 시절! 이건 아주 사나운 뿔이 이렇게 난 놈의 소가 사람을 만나면 밟고, 남을 밭 다 짓이기고 그래요.(계속 판서를 함) 그런 거를 이제 붙잡아 가지고 코를 꿰요(初調). 처음엔 코 꿰 가지고 해. 코를 꿰 가지고 이제 해요. 얼마큼하면 머리를 돌리게 돼(廻首). 그놈이 차차 말을 듣게 돼. 그 다음이……수제(受制). 여기에 이제 처음에는 길 안들었다가 처음부터 억제하고, 그 담에 조금, 이제 후에 나아가지고 그 담에 머리를 돌려서 마찰하고, 이제 순종하면, 이제 길든거야(馴伏), 길든거야. 길들었어도 그게 다가 아니예요.
이젠 웬지 거리낌이 없어. 길든 것은 이제 주인 이제 쓰윽 오늘 들어가자 나가자하면 자연이 나가서 먹다가도 들어오고 그러지만, 인제 뭐하냐 내버려둬도 이제 내버려둬도 이제 길이 잔뜩 잘 들었기 때문에, 내버려 상관, 이제 뭐야. 이건 무애(無碍)라. 자유자적 그보다 더 지경에 들어가면 그 다음은 뭐 목동은 떡 앉아서 잠만 자요(任運). 그러면 소는 저대로 이제. 그래 아주 정말 졸리면 소를 잊어버려요. 목동은 소 잊어버리고, 소는 목동 잊어버리고(相忘). 그렇게도 흥미 없는 지경에 가요. 이제 그러면 독조(獨照), 그 담에 소는 어디가고 자 목동은 아유 이젠 뭐, 소 때문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 나는 나대로 아주 즐거운 지경이라고. 하지만 요것도 마지막이 아니고, 마지막엔 사람도 없어지고, 뭣이 두고 갔는지 몰라(雙泯). 정말 그 지경에 가면(여기부터 몇 마디 녹음 불량으로 안들림)……. 그래서 맨 마지막 부분은 이제 그래요. 대단히 불교식인 말입니다만, 아~ 인우불견묘무종(人牛不見杳無蹤)하니, 사람도 소도 간데 없고 종적이 없어 아무것도 없는데, 명월광한만상공(明月光寒萬象空)이라. 달이 밝은데 일만 인이 다 텅 비었어! 무엇인나 만상이야. 약문기중단적의(若問其中端的意)인데, 그런데 그중에 정말 참뜻이 뭐냐 하고 묻는다면 대답이 없는 걸 뭐라고 그러게. 그래 그제 말이 좋아요. 야화방초자총총(野花芳草自叢叢)이다, 들에 꽃과 풀이 제 스스로 총총한게, 풀이 제대로 풀일 뿐이지. 뭐 이랬다 저래라 뭐 있냐? 그런 걸 뭐 그린 것인데, 그게 수양회, 수양회에서 처음에 어째해 왔는지, 아주 완전해지려면 그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야 자유자재하는, 자기도 교회도 둘 다 서로 잊어버리게 되는, 나와 내 자아를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지경에 가야 된다고 하는, 그건 불교식으로 한 말 이예요.
그런데 그런 말이 기독교가 싫으면 그건 안들어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참고로 얼마든지 아하 그런 지경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녹음6, 32:36)
牧牛十圖頌
普明和尙
1.未牧
生獰頭角恣咆哮 奔走溪山路轉遙 一片黑雲橫谷口 誰知步步犯佳苗
2. 初調
我有芒繩驀鼻穿 一廻奔競痛加鞭 從來劣性難調制 猶得山童盡力牽
3. 受制
漸調漸伏息奔馳 渡水穿雲步步隨 手把芒繩無少緩 牧童從日自忘疲
4. 廻首
日久功深始轉頭 顚狂心力漸調柔 山童未肯全相許 猶把芒繩且繫留
5. 馴伏
綠楊陰下古溪邊 放去收來得自然 日暮碧雲芳草地 牧童歸去不須牽
6. 無碍
露地安眼意自如 不勞鞭策永無拘 山童穩坐靑松下 一曲昇平樂有餘
7. 任運
柳岸春波夕照中 淡烟芳草綠茸茸 饑飡渴飮隨時過 石上山童睡正濃
8. 相忘
白牛常在白雲中 人自無心牛亦同 月透白雲雲影白 白雲明月任西東
9. 獨照
牛兒無處牧童閑 一片孤雲碧嶂間 拍手高歌明月下 歸來猶有一重關
10. 雙泯
人牛不見杳無蹤 明月光寒萬象空 若問其中端的意 野花芳草自叢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