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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02. [역경의 열매] 김형석 (1-38) 기독교인의 인생이란… “아름다운 열매 맺는 것”
교회주의 벗어나 사회에 도움 돼야… 기독교인은 따로 정년이나 은퇴 없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난 10월 22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를 갖고 역경의 열매 연재를 결정하게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00세를 맞았던 2020년이 저물고 있다.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무던히 고생한 한 해였다. 고령이므로 감염병에 각별히 유의하라는 의료진의 권고가 있어, 올 초에는 은거 생활을 했다. 확진자 수가 줄었을 땐 강연도 나섰지만, 오랜 기간 고생하는 의료진을 생각하며 안전수칙에 최대한 유의하며 지냈다. 코로나19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서로를 깊이 위하고 사랑하는 공동체 의식만이 이 난국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올해 10월엔 2006년 펴낸 ‘희망의 약속’을 개정·증보한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두란노)란 책을 냈다. 100년 전 내가 이 땅에서 체험한 기독교를 전하며, 지금의 한국 기독교가 새길 만한 내용을 담았다. 이즈음 국민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며 ‘역경의 열매’ 연재 제안을 받았다. ‘100세 철학자’가 바라본 삶과 신앙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그간 내 한평생을 정리해 보자는 제안은 적잖게 받았고 여러 차례 고사했지만, 이번엔 남다르게 느껴져 수락했다. 내 삶과 글이 조금이나마 한국교회 성도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삶을 마라톤 경기에 비유해 본다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골인 지점이다. 이 마지막 지점을 알차게 마무리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오늘부터 연재가 시작되는 역경의 열매도 그 열매가 되길 기대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기독교인의 인생이다. 넓게 보면 한국 기독교 또한 이래야 한다고 본다. 교회주의를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서 사회에 알찬 결실을 전해야 한다.
역경의 열매에서는 1920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시작한 인생길을 찬찬히 소개한다. 이 길에서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 선생, 윤동주 시인 등 민족의 선각자이자 독실한 신앙인을 만났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민주화운동 등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기도 했다. 이 역경을 지나며 나와 가족, 주변의 벗들이 맺은 열매는 무엇이었을까. 또 그 열매는 민족과 국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미칠 것인가. 이제 차분히 짚어보려고 한다.
평소 여러 매체와 가진 인터뷰나 강연에서 “사회에 무언가 줄 수 있는 나이는 60세 이후부터”란 이야기를 해왔다. 60세부터 90세까지는 사회인으로 책임을 감당하자는 이야기다. 기독교인에겐 따로 정년이나 은퇴 시기가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은 삶을 마무리하는 그날까지 이웃을 향한 사명을 계속 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이 기독교인의 소명이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내 소명의 흔적이다.
약력=1920년 평안북도 운산 출생, 평양 숭실중·평양 제3공립중학교 졸업, 일본 조치대 철학과 졸업, 연세대 철학과 교수, 미국 시카고대·하버드대 연구교수 역임. 현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 기독교인의 인생이란… "아름다운 열매 맺는 것"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 선한 삶 몸소 보여주신 부모님… 신앙 길잡이
* [역경의 열매] 김형석 (3) 중1 때 참석한 신앙부흥회… 삶의 새 이정표
* [역경의 열매] 김형석 (4) 신사참배 싫어 중3 때 자퇴… 독학하며 번뇌
* [역경의 열매] 김형석 (5) 학도병 징집 압박에 기도… 신검서 '불합격'
* [역경의 열매] 김형석 (6) 안창호 조만식… 배움의 길에서 만난 인연 '삶의 등대'
* [역경의 열매] 김형석 (7)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 20여년간 병석에서 동행
* [역경의 열매] 김형석 (8) 천신만고 끝 고향에 돌아오자 일본 경찰이 감시
* [역경의 열매] 김형석 (9) 공산화 물결 피해 탈북… 검문 걸려 조사실 끌려가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0) 경비정에 쫓기며 쪽배로 탈북… 사공 "이제 안심하라"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1) 중앙중·고서 7년간 교편… 학교 밖에선 성경공부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2) 공산당 피해 홀로 피난길… 임시정부 좇아 부산까지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3) 온 가족 재회도 잠시… 중공군 남하로 또 피난길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4) 주중엔 선생님 주말엔 교회 봉사… 군부대서 설교도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5) 34세에 연세대 부임… 60년 포도밭 같은 소중한 일터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6) 꿈에서 광화문 한복판에 주님 시신이 묻힌 관 보고…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7) 학내 분규 수습된 후 교환교수로 미국행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8) 주님 흔적 찾으려 이스라엘 등 성지 방문했는데…
* [역경의 열매] 김형석 (19) 숭실중 4학년 때 첫 설교… 성인 대상 부흥회 인도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0) 두 번째 수필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 출판계 큰 반향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1) "베트남 전장서 교수님 말 떠올라"… 청년 편지에 울컥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2) 강연 잘하는 선배 부러워 '제게도 연설 능력을…' 기도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3) 군부대·산업체·NGO… 교회 밖 신앙운동에 동참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4) "내 사랑하는 가족을 주님께 맡기나이다"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5) 소질·개성 못살리는 교육 여건… 답답하고 마음 아파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6) 사회악 만연한 지금, 참다운 정신적 지도자 필요한 때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7) 31년의 교수생활 마침표… 최루가스 자욱했던 고별강연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8) 한국의 미에 눈뜨고 도자기·민화에 반한 20년 세월
* [역경의 열매] 김형석 (29) 어린 시절 자주 쓰러져… 모친 "스물까지라도 살았으면"
* [역경의 열매] 김형석 (30) 내 인생 황금기는 75세 전후… 소명·사랑 다하려 노력
* [역경의 열매] 김형석 (31) 허위·폭력 몰아내고 진실·사랑 가득한 사회로…
* [역경의 열매] 김형석 (32) 휴전선 밑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제2의 고향
* [역경의 열매] 김형석 (33) 안창호상·유일한상·인촌상… 값진 상 연달아 수상
* [역경의 열매] 김형석 (34) 내가 가르친 철학과 현실 사이 큰 간극에 회의
* [역경의 열매] 김형석 (35) 코로나로 사회 곳곳 문제… 기독교 정신 살아나야
* [역경의 열매] 김형석 (36) 한반도 통일되려면 북한 동포 개방사회로 이끌어야
* [역경의 열매] 김형석 (37) 코로나로 힘든 시기…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 절실
* [역경의 열매] 김형석 (38·끝) 진실·사랑·희망 전하려 애썼던 삶 헛되지 않기를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형석 (2) 선한 삶 몸소 보여주신 부모님… 신앙 길잡이
성경 즐겨 읽고 말씀 실천하신 부친, 모친 항상 ‘민족·국가 걱정하며 살라’ 가르침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성서주의 신앙을 추구한 부모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받았다. 사진은 30~40년 전쯤 모친과 함께한 김 교수.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나는 1920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나 평안남도 대동군 송산리에서 자랐다. 송산리에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장로교회가 있었다. 처음 본 예배당은 크기가 작은 편이었으나 증축을 한 뒤에는 제법 큰 규모가 됐다. 예배당에 들어서면 한가운데 천으로 된 휘장을 기준으로 남녀 좌석을 구별했던 기억이 난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지켜지던 때였다. 유교 전통을 지닌 이들에게 오해받지 않으려는 초창기 교회의 배려였다. 초등학생 때 몇 달간은 이 예배당이 학교로도 사용됐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녔지만, 이 교회가 내 신앙의 온상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내 고향 교회에서는 목사가 적잖게 배출됐다. 같은 환경 속에 자랐지만, 이상하게 나만 목사가 되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주님의 뜻이 아니었나 싶다.
선친이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됐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분명한 건 선친이 성경을 즐겨 읽었다는 점이다. 선친은 운산의 금광에서 일하다 그곳에서 미국인을 만나 기독교를 접했다. 성경을 많이 읽으며 믿음을 갖게 됐다. 성경뿐 아니라 성경 주석도 찾아 읽은 덕에 선친은 교인과 목사에게 성경 해설을 하곤 했다.
선친의 신앙생활은 좀 특이했다. 어떻게 보면 교회주의보다는 성서주의 신앙 같은 인상을 줬다. 선친은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않았다. 식사 기도를 했는지조차 기억에 없을 정도다. ‘신앙은 마음과 생활로 보여줘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신앙을 강권하지도 않았다. 다만 삼촌이 교회를 멀리해 고민이 깊었던 것 같다. 남몰래 기도도 많이 했으리라 생각한다. 교회 직분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장로가 돼도 부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녀들이 집사나 장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로선 드문 신앙관이었다.
어머니 역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선친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른다.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부인네가 울며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습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했다. ‘바르게 살고 남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교회 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품으셨다.
나 역시 이런 환경에서 교회를 다녔다. 신앙이 무언지 깨닫기는 너무 어린 나이였으나 당시 주일학교에서 인상 깊게 들은 교훈이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한 모세나 에스더 같은 애국자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일제강점기였기에 기독교 신앙은 애국·애족심과 직결돼 있었다. 선친 역시 “항상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며 살면 민족과 국가만큼 너도 성장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선친의 이 말씀은 지금까지 내 인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신앙의 유산을 전해준 부모님이 지금도 매우 그립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3) 중1 때 참석한 신앙부흥회… 삶의 새 이정표
윤인구·김창준 목사 설교에 감명… 신앙적 의욕 샘솟아 어디서든 기도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다닌 평양 숭실중학교 전경. 숭실중은 당시 숭실전문학교와 같은 캠퍼스를 썼다. 왼쪽부터 숭실전문학교 교사, 과학관, 도서관, 숭실중학교 교사.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기독교 신앙으로 깨달음을 얻고 삶에 변화가 생긴 건 중학교에 입학한 열네 살 때다. 6남매의 장남이긴 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렵고 건강에도 자신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내가 살던 송산리의 신망학교는 4학년 과정밖에 없어 5학년부터는 10리쯤 떨어진 칠골의 창덕학교를 다녔다. 창덕학교에서 만난 윤태영 선생님은 없는 재산을 부풀려 써주고, 내 건강에도 좋은 평가를 해 주며 중학교 진학을 도와주셨다. 나를 꼭 중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선친께도 강력히 권했다.
당시 평양에는 여러 중학교가 있었지만, 장로교회를 다닌 나는 숭실중학교를 유일한 중학교로 여겼다. 중학교 신입생을 대상으로 신체검사가 있었는데, 평양의 근대식 병원인 기홀병원 의사들이 찾아와 검진했다. 한 의사가 내게 “아픈 곳은 없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영양부족으로 뼈만 앙상해 보이는 내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아픈 곳이 없다”는 내 대답에 그대로 통과시켰다. 신기하게도 그 뒤부터 내 건강에 이상이 없어졌다.
중학생이 되고 나니 느낌과 생각의 차원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이제 어른이 된다고 느꼈다. 또래와 달리 뜻이 있어 중학교에 왔다는 자부심도 들었다. 운명 같은 무언가가 나를 기다린다는 예감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을 준비해야 하고 누군가 나를 불러줄 때가 왔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생을 바꿀 만남도 이때 찾아왔다. 숭실중은 당시 3학기제였는데 1학년 3학기때 같은 캠퍼스를 쓰는 숭실전문학교 5층 소강당에서 학생을 위한 신앙부흥회가 열렸다. 일주일 동안 저녁 시간에 집회를 한다는 소식에 나는 시골 통학을 중단하고 시내의 작은할머니댁에 묵으며 전일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강사는 장로교를 대표하는 윤인구 목사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감리교의 김창준 목사였다. 특히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막 돌아온 윤 목사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 지금도 그 설교 제목과 내용을 기억한다. 그 아늑하고 엄숙했던 부흥회 분위기는 성경에 나오는 잔칫집을 연상시켰다. 많은 젊은이가 영혼의 양식을 얻고 돌아갔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부흥회를 마치면서 내 생각과 행실에도 큰 변화가 왔다. 병아리가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내 삶의 새로운 이정표가 생겼다. 희망을 품고 그 길을 달려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신앙적 의욕을 채우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도는 이러한 노력의 하나였다. 집과 예배당은 물론 이른 새벽 산에 올라가 기도했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먼저 기도하는 습관도 익혔다. 이때 한 기도 중 하나가 “이제부터 나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과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택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택하셨다는 신념이었다.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교회 부흥회에 가 여러 목회자의 설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4) 신사참배 싫어 중3 때 자퇴… 독학하며 번뇌
같은 학년 윤동주는 용정 모교로 떠나 ‘학업 잇는 게 애국의 길’ 설득에 복학
‘숭실학교’라고 적힌 평양 숭실중학교 정문 모습. 교정 안에는 숭실전문학교도 있었다. 아래 작은 사진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숭실중학교 졸업사진.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평양 숭실중학교에는 매일 한 시간씩 성경 공부가 있었다. 인근 평양신학교 교수들과 평양의 유명 목회자들이 와서 설교하곤 했다. 한경직 박형룡 목사, 조만식 장로 등 학교를 찾은 교수들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한다. 공부는 학교에서 했으나 정신적으로는 채플 시간 설교 말씀으로 배운 게 더 많았다.
숭실중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어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장로교를 대표하는 학교였기에 부산 대구 등 영남이나 평안북도에서 온 이들이 적지 않았다. 북간도 용정의 학교에서도 전학을 왔다. 기숙사 학생들은 방학 때마다 지방의 교회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하나님을 믿으며 민족의식을 중시한 학교의 전통은 1935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위기를 맞았다. 조선총독부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민족주의 계열의 학교를 폐교하려 들었다. 첫 희생양이 평양의 3숭(三崇), 즉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 숭의여자중학교였다. 세 곳 모두 선교사가 교장인 데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신사참배 거부를 결의하자 선교사들은 학교에서 손을 떼야 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사와 학생도 학교를 떠났다. 내가 3학년이 되던 해다.
조지 맥큔(한국명 윤산온) 교장의 고별사를 기억한다. 맥큔 교장은 학교를 떠나기 전 마지막 예배에서 자신의 저서를 전교생 500명에게 나눠줬다.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예수님께 호소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책이었다. 일제 경찰이 강당을 둘러싼 가운데 그는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높이 쳐들며 “두(Do·하라)!”를 7번 외쳤다. 그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학생들은 채플 시간이 끝나자마자 교문으로 뛰어가며 “숭실학교 만세”를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를 불러야 했으나 일제 경찰 앞이라 차마 그러진 못했다.
학교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이자 교사와 학생들도 하나둘 교정을 떠났다. 같은 학년이었던 시인 윤동주는 용정의 모교로 돌아갔다. 나는 자퇴를 선택했다. 하지만 배움을 멈춰선 안 된다는 생각에 평양부립도서관을 학교처럼 다니며 1년간 독학했다. 이때의 고됨과 번뇌는 말로 다 하기 어렵다.
이런 내 생각을 바꾼 이들 중 한 명이 데이비드 마우리(한국명 모의리) 선교사였다. 그는 “강요에 의해 형식적으로 신사참배했다고 죄가 될 리 없다. 학업을 이어 먼 장래에 신앙인으로 항일운동을 하는 게 민족에게 더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선친뿐 아니라 교회 목사와 장로도 같은 생각이었다.
4학년으로 복학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신사참배 대열에 끼게 됐다. 첫 참배 때 나는 울면서 마음속으로 “이런 비극이 사라지는 날이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년 뒤 숭실중학교가 폐교되면서 일본식 공립학교인 ‘평양 제3공립중학교’로 바꼈다. 5학년 과정이었던 중학교의 마지막 1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황국신민 개조’를 목표로 군국주의 교육을 한 이 학교에서 생활은 전쟁터 같았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5) 학도병 징집 압박에 기도… 신검서 ‘불합격’
전세 불리해진 일본, 젊은이들 입대 강요… 굴욕감과 울분에 기도하며 주님 뜻 구해
1940년대 초반 유학 중이던 일본 도쿄 조치대학교 교정에서 찍은 단체 사진. 김형석 교수(앞줄 오른쪽 끝)와 김수환 추기경(앞줄 왼쪽 끝)의 모습이 보인다.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중학교 5년 과정을 힘겹게 마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소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서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항상 대학을 꿈꿨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번민하는 모습을 본 모친은 “내가 아직 이렇게 건강한데 동생들과 굶어 죽기야 하겠니. 집 걱정하지 말고 대학에 가거라”고 권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나, 아들인 나에 대한 주님의 뜻이 있을 거란 믿음으로 한 말씀이었다.
철학과를 지망한 나는 일본 도쿄의 조치대학교에 지원해 입학했다. 조치대는 가톨릭계 대학으로 독일 교구에 속해 있었지만, 독문과보다 철학과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학교였다. 스콜라철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쳤기에 가톨릭 신부가 되려는 학생들도 철학과에 지망하곤 했다. 후배인 고 김수환 추기경과는 이곳에서 함께 수학한 인연이 있다. 철학도를 자처한 나는 톨스토이를 비롯한 인도주의적 문학책과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쇼펜하우어 등 여러 사상가의 책을 폭넓게 읽었다.
대학 생활을 마무리할 때쯤, 나를 포함한 한인 유학생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제가 대학생과 휴학생,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인까지 전장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한인 학생 역시 ‘자원입대’ 대상자가 됐다. 말은 자원이었지만, 실제로는 경찰을 동원해 압박을 넣었다. 일본인들이야 조국을 위한 출정이라지만, 우리로선 원수 국가인 일본의 군인으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굴욕감과 울분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 와중에 일본 경찰과 공무원은 “한인 학생이 일본 학생 못지않게 애국심으로 입대한다”며 선전했다. 많은 한인 유학생이 좌절해 술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 생애를 좌우할 중차대한 사건이 닥쳐오자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간 외부와 연락을 끊고 하숙방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물었다. 요한복음 15장을 읽던 중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게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며 마음에 음성이 들렸다. “주께서 나를 택했다. 그렇다. 내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주님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곧 책상에 엎드리고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외쳤다. 내가 드린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기도’였다.
이윽고 평안을 되찾았다. 징집이란 폭풍우 속에서도 나는 조용히 책을 읽으며 기도하는 생활을 지속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데,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학도병 징집을 위한 검사를 받으러 갔다. 책임자급으로 보이는 내과의사가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어릴 때부터 앓던 병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끔 의식을 잃곤 했다”고 말한 뒤 몇 가지 질문에 더 답하자 그는 내 서류에 ‘불합격’이라 적었다. 기적적으로 학도병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인 학생 여럿이 군에 끌려가 남태평양이나 중국 전선에 투입됐다. 나라 잃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6) 안창호 조만식… 배움의 길에서 만난 인연 ‘삶의 등대’
항상 민족 걱정했던 도산·고당 선생, 심지 곧았던 시인 윤동주…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에 큰 감명
김형석 교수(왼쪽 두 번째)가 1940년 평양 제3중학교 시절 학교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민족의 비극 가운데서도 길을 잃지 않았던 건 배움의 길에서 만난 인연 덕이었다. 애국애족의 마음을 심어준 도산 안창호 선생이 대표적이다.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1년간 학교를 자퇴했던 17세 때 고향교회에서 도산의 마지막 설교를 직접 들었다. 도산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다”며 나라 사랑과 인재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민족과 국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에게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봤다. 무엇보다 자신의 안위를 넘어선 마음의 크기가 존경스러웠다.
중학교 선배인 고당 조만식 선생 역시 도량이 넓었다. 20대부터 신앙생활을 한 고당 선생은 생을 마칠 때까지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숭실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시인 윤동주 역시 잊을 수 없다. 용정에서 온 윤형은 나보다 3살 많았지만,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키가 커 뒷자리에 앉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윤형 역시 나처럼 신사참배 문제로 고민하다 용정의 모교로 돌아갔다. 그는 시를 쓰며 정신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이었다. 일제의 학도병 징집을 피해 도쿄 릿쿄대학에 있다가 교토 도시샤대학으로 옮겼는데 거기서 경찰에 잡혀갔다. 경찰을 피할 길도 있었겠으나 심지 곧은 성격상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시를 남긴 윤형의 희생이 지금도 안타깝다.
중학교 2학년 때 접한 일본의 사회운동가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강연도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가가와 목사는 일경이 배치된 숭실학교 강당에서 강연하며 자신의 치부를 공개했다.
그는 “세계 일주를 하다 평양에 도착해 대동강을 지나는데 ‘기생학교’ 건물을 봤다. 그 간판을 보면서 이름 모를 술집 여성으로 산 어머니가 생각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술집 여성이란 걸 부끄러워하며 살아왔지만, 주님이 천한 나를 그분의 일꾼으로 택했다는 사실을 믿고 나서는 생각을 바꿨다. 여러분은 주위 여성을, 내 어머니처럼 버림받는 여성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강연 내용을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저렇게 사는 게 신앙인의 길”이라 생각했다. 일본 유학 중에도 몇 차례 그의 강연을 찾아 들었다.
일본교회뿐 아니라 지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기독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에게서도 감명받았다. 그리스도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그의 계몽적 사상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정치권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과 교계에 대한 조언에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흔히 그를 무교회주의자라 부르지만, 성경적으로 보수 신앙을 지킨 성경학자였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의 성경 연구엔 순수성이 있었다. 그의 사상을 접하면서 기독교 공동체는 기성 교회의 독점물이 아니며 기독교의 활동 무대가 교회 내에 제한돼선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7)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 20여년간 병석에서 동행
함께 교회 다니다 만나 일본서 결혼… 고향에 돌아와 격동의 시기 동고동락
김형석 교수가 1979년 아내 고 김옥수 여사와 함께한 모습. 김 여사는 이듬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아내 김옥수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힌 건 일제가 학도병을 징집한 태평양전쟁 막바지 무렵이었다. 내가 삶에서 동행하는 하나님을 굳게 믿었듯이 아내 역시 신앙 안에서 끝까지 나를 믿고 따라줬다. 함께 교회를 다니며 만난 아내는 무척 밝고 아름다운 감정을 가진 여인이었다. 우리는 1943년 일본에서 식을 올렸다.
하루빨리 귀국하고 싶었지만, 일본의 물자 사정이 좋지 않아 방도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도쿄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기차표를 구하기도 힘들었으니 현해탄을 건너는 연락선을 타는 건 오죽했을까. 매일 귀국을 위해 기도했다.
도쿄를 떠나 교토에 머물던 어느 날 한 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였다. ‘귀향’이란 제목의 독일 영화를 봤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돌아가라, 고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대사가 기억난다. 나 역시 고향에 돌아가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밤 검고 큰 말이 우리 집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꿈을 꿨다. 나를 태운 말은 순식간에 고향 집에 데려다주더니 사라졌다.
꿈에서 깬 나는 무작정 역으로 나갔다. 역 게시판에는 한반도와 만주로 가는 사람의 명단이 붙어있었다. 현해탄을 건너는 배표를 포함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거기에 내 이름이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일단 역사무실로 가서 평양행 열차표를 샀다. 나와 아내는 이렇게 일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금도 어떻게 그토록 쉽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교통편을 신청해도 2~3주 넘게 걸리거나 못 구하던 때다. 게다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라 신청조차 못 한 상황이었다. 친구가 귀국 신청을 하며 내 이름도 넣은 게 아닌가 짐작한다.
고향에 돌아온 나는 38선 이북의 공산주의 사회를 경험하고 목숨을 건 탈북과 6·25전쟁, 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60여년을 아내와 동고동락했다. 아내가 61세 되는 해엔 함께 세계 일주 여행도 했다. 권사로서 교회 일을 열심히 했고 자녀들의 신앙교육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아내는 62세 때 뇌졸중으로 쓰러져 위독한 상태가 됐다. 주치의는 “살 희망은 없지만, 뇌수술은 해보겠다”고 했다. 아내를 먼저 보낼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아내는 기적같이 깨어났다. 그간의 우여곡절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말을 할 수 없었고 기억도 대부분 상실했지만, 아내의 생존은 우리 가족에게 큰 감격을 줬다.
23년간 병석에서 나와 동행한 아내는 2003년 여름 85세를 일기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평소 화를 잘 안 내던 아내는 병상에서도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을 소중히 여겨서 ‘일 다녀오겠다’고 하면 항상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내의 삶은 아름답고 착한 신앙의 선물 같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8) 천신만고 끝 고향에 돌아오자 일본 경찰이 감시
항일인사로 간주 주변 맴돌아 피신하기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고 거리에서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는 시민들. 쏟아져 나온 시민들 뒤로 발이 묶인 전차가 보인다. 국가기록원 제공
1944년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나를 항일 인사로 간주한 일본 경찰이 주변을 돌며 감시했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 황해도 안악으로 피신해 상당 기간 지냈다. 절망감과 위기의식이 동시에 밀려왔다. 가족과 민족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하루는 안악의 거처에 머물다 그 집에 사는 젊은이가 일본군에 입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물의 기도가 나왔다. “주님, 이제 더 갈 곳도 없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까.” 가냘픈 체구에 착한 심성을 가진 그 청년은 돌아오지 못했다.
1945년 8월 14일 밤이었다. 고향에 돌아와 조용히 지내던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꿈에서 마우리 선교사와 진남포 바닷가에 있는 큰 창고 두 곳에 들어갔는데, 부패한 일본인 시신이 놓여 있었다. 무슨 꿈인지 생각하다 다시 잠들었는데 또 꿈을 꿨다. 빛을 잃은 큰 태양이 동쪽 산으로 지는 모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버지께 꿈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일본의 침략이 시작될 즈음 작은 태양이 동쪽에서 무수히 떠오르더니 온 땅에 가득 차는 꿈을 꿨다”며 “오늘 평양에 다녀와 보라”고 했다. 아침 식사 후 20리를 걸어가 전차를 타고 평양 중심가로 가는데, 갑자기 전차가 멈췄다. 거리의 라디오에선 일본 국가와 함께 “일왕의 중대발표가 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전차에서 내려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일본이 항복한다는 일왕의 목소리였다.
귀를 의심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일제는 “미국과 싸워 승리하고 있다. 대동아공영권이 이뤄진다”고 떠들어댔다.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쟁은 끝났다. 일본은 패했다. 우리는 독립했다. 집에 돌아와 이른 저녁을 마치고 동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누군가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종전과 독립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지 않는 집이 없었다. 아내와 나는 “이제부터 건강하게 열심히 조국을 위해 일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은 환희와 더불어 혼란에 빠져들었다. 한반도는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졌다. 평양에 주둔한 소련군은 남아 있는 일본인을 마구잡이로 학대했다. 본토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은 수용소에 모여 지냈는데, 소련군은 일본인 수용소 내 젊은 여성을 트럭에 태워 납치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은 일본인 시신은 소달구지로 옮겨져 그대로 땅에 묻혔다. 비참했다. ‘일제 잔당 척결과 친일파 처단도 필요하지만, 인권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련군과 함께 온 공산당은 38선 이북을 이념과 무력으로 다스렸다. 불행히도 나는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과 고향이 같았다. 그는 나와 같은 보통학교를 다닌 선배로 그의 조부모와 삼촌, 사촌들과도 알고 지냈다. 종전 뒤엔 고향에 돌아온 그와 하루 오전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대화를 나누며 공산주의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았고 소련의 사주를 받아 집권하는 과정도 지켜볼 수 있었다.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 되는 과정은 물론 그의 친인척도 모두 알았기에 역사의 아이러니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9) 공산화 물결 피해 탈북… 검문 걸려 조사실 끌려가
8·15 해방 후 중학교 재건해 교장 맡아… 청년들 교육과 피신처로 활용
1945년 8월 26일 소련의 붉은 군대가 평양에 입성하고 있다. 김형석 교수는 공산정권의 박해를 피해 47년 8월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왔다. 국민일보DB
8·15 해방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다닌 국민학교 건물을 증축하고 농촌 청소년을 위한 중학교를 재건한 것이었다. 낮에는 정규 중학과정을 가르치고 밤에는 인근 농촌의 청년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었다. 내 꿈은 고향 주변에 중등 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이가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교장을 맡았다. 학교는 공산사회에 참여하기 힘든 여러 친구의 피신처도 됐다.
하지만 공산정권이 빠르게 정착하면서 학교 역시 공산화의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친구인 설립자 김현석 장로는 조선민주당 간부라는 이유로 보안서원에 체포됐다. 김 장로는 윗마을에 살고 나는 아랫마을에 살았는데, 그를 실은 트럭이 아랫마을로 오는 게 보였다. 그때 급히 뛰어온 작은동생이 “형도 잡아갈 거 같으니 뒷산으로 가라”고 외쳤다. 다음 차례는 내가 분명했다. 뒷산에서 내려온 뒤 38선을 넘어 서울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38선을 넘기로 작정했으나 누구에게도 속내를 밝힐 순 없었다. 후임자 문제 등을 정리한 뒤 아내에게 계획을 밝히고 무사 탈출을 위해 같이 기도했다. 얼마 뒤 부모님께도 알렸다. 고향을 등질 날은 1947년 8월 16일로 정했다. 광복 2주년을 전후해 경계가 느슨해질 거라고 판단했다.
지금도 그날 아침을 잊지 못한다. 아내는 8개월 된 큰아들을 업었고, 나는 평소처럼 보이려고 빈손으로 뒤를 따랐다. 세 살배기 큰딸은 할머니가 맡았다가 기회가 닿는 대로 서울에 보내주기로 했다. 딸은 우리가 평양에서 선물을 사 올 걸 기대하며 싱글벙글했다. 아버지는 떠나는 장손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아내의 발걸음을 멈췄다. 슬프게도 이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38선을 넘는 데 실패했다.
우리는 평양과 사리원을 거쳐 해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승강구 근처 구석에 앉았는데 하필 맞은편 사람들이 보안서원이었다. 열차에서 38선을 넘어 남하하려는 사람을 잡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 열차 밖 장수산 일대 경관은 참 수려했지만,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우리는 짐짓 “장연에서 친척을 만난 뒤 장수산 부근의 인척을 만나자”는 대화를 하며 보안서원의 주의를 돌렸다. 열차 내에서 여러 사람이 잡혀갔으나 우리는 무사히 해주역에 도착했다.
아내가 나보다 50m 정도 앞서 걸으며 여관을 찾는데 파출소 앞을 지나가다 검문을 받았다. 탈북 의도를 직감한 보안서원이 멈춰 세운 것이다. 결국 우리는 탈북하다 붙잡힌 사람들이 수용된 국민학교 건물로 끌려갔다. 앞채엔 남자가, 뒤채에는 여자가 수용됐다.
내가 먼저 조사실에 들어가고, 어린것을 업은 아내는 일단 현관에서 대기했다. 계장급의 책임자가 나를 조사하기 위해 서류를 들고 말문을 열려던 참에, 갑자기 전화벨이 따르릉 울렸다. 주변에 전화 받을 사람이 없자 책임자가 직접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10) 경비정에 쫓기며 쪽배로 탈북… 사공 “이제 안심하라”
탈북자 수용 인원 넘쳐 운 좋게 풀려나… 보안서원 따돌리고 목숨 건 탈출 감행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연설하는 모습. 김형석 교수는 47년 공산화 물결이 거센 북녘땅을 천신만고 끝에 떠났다. 국민일보DB
“여기는 경계 지휘소입니다. 오늘도 붙잡혀 온 사람이 많습니까.”
전화 통화 소리가 크고 또렷해 조사실 책상에 앉은 나한테도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장은 “아침부터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상대는 “이제부터 체포되는 사람은 무조건 북으로 돌려보내라는 게 본부 지령이다. 수가 너무 많아 처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계장은 잠시 생각한 뒤 “어린애까지 업고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내가 “장연에 간다”고 하자, 부하에게 우리가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걸 직접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정류장에 도착한 우리는 보안서원에게 “꼭 가겠으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한 뒤 근처 여관에 방을 잡았다. 저녁 때쯤 해주에 있는 지인 누님 집으로 이동했다. 거기엔 남쪽으로 가려는 이들이 여럿 숨어있었다. 우리는 불과 몇 분 차이로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풀려난 걸 감사히 여겼다.
이튿날 밤, 농사꾼 복장을 한 30대 중반의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골목길을 돌고 돌아 바닷가 근처 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 집에서 새벽녘에 나와 갈대밭을 거쳐 바닷가에 도착했다. 작은 나룻배가 보였다. 남쪽으로 가는 배였다. 아내와 어린 것을 태운 뒤 나도 타려는데 배가 만원이라 탈 수 없다고 했다. 사공을 포함해 6명쯤 태울 수 있는 작은 어선이었다. 10여분 뒤 다른 배를 타고 바다를 보니 탈북자를 나르는 쪽배가 사방에 있었다. 경비정들이 이 배들을 잡으려 어두운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온몸이 땀에 젖은 사공이 “경비정에 잡히면 수영할 수 있는 사람은 바다로 뛰어들라”고 했다.
큰 배 옆을 돌아가고 몸을 숨기기도 하면서 200m쯤 갔을까. 사공은 “이제 안심하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배 안 사람들이 서로 인사했다. 다른 배에선 “대한민국 만세” “자유 만세”를 외쳤다. 우리도 호응해 같이 만세를 불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남쪽 바닷가에 도착하자 사공이 간곡하게 당부했다. “우리가 공산주의 치하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도록 선생님들이 힘써 주십시오. 우리는 한 명이라도 더 남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우리를 조국의 반역자로 모는 보안서원과는 전혀 달랐다.
바닷가에는 서북청년들이 장작불을 피워놓고 탈북자를 환영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에게 아내와 아들을 수소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참이 지난 뒤 그가 나를 아내와 아들이 있는 불가로 안내했다. 우리는 별 큰일이 아니었다는 듯이 불을 함께 쬐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바다 위에선 서로의 안전을 위해 그토록 간절히 기도를 드렸는데도 말이다. 철없는 아기 울음소리가 경비정을 유인할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옥의 문을 헤치고 나오는 것과 같은 모험을 감행했다. 주님의 이끄심과 보호를 믿으면서 말이다. 모험에 성공한 그 날은 1947년 8월 18일 새벽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11) 중앙중·고서 7년간 교편… 학교 밖에선 성경공부
김성수 선생과 인연 맺은 것 감사
김형석 교수는 1947년부터 7년간 서울 종로구 중앙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학교 설립자 인촌 김성수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인촌 동상이 세워진 중앙고 본관 모습.
서울에 도착해선 신촌 기차역 인근에 정착했다. 작은 방을 하나 얻었는데, 가진 게 하나도 없었다. 여벌 옷이 없어 잠들 때도 외출복을 입고 자야 했다.
급선무는 직장을 잡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새벽 교회에 나가 새 출발을 주님께 의탁하며 기도했다. 아내 역시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 나 같은 처지의 사람이 택할 만한 직업으로는 교육계가 제1순위였다. 기독교 계통의 중·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지원했지만, 좀처럼 길이 열리지 않았다.
하루는 신문에서 중앙중학교(현 중앙중·고등학교) 기사를 읽었다. 큰 기대 없이 계동의 긴 골목 끝에 있는 학교로 찾아갔다. 심형필 교장을 뵙고는 “북에서 월남했는데 교육계에 몸담고자 한다”고 말씀드렸다. 심 교장은 교감에게 나를 소개하며 “함께 일할 뜻을 가진 것 같은데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이렇게 나는 1947년 10월 2일 중앙중학교 교사가 됐다. 7년간 이곳에서 교편을 잡으며 많은 걸 배웠다. 그중에서도 인촌 김성수(1891~1955) 선생과 인연을 맺은 걸 가장 큰 혜택으로 여긴다. 나는 취직한 뒤에야 중앙중학교가 인촌이 고려대와 함께 운영하는 명문 사립학교란 걸 알았다. 그 정도로 대인관계가 넓지 못하고 누구나 가진 정보에도 어두울 만큼 우둔한 편이다. 이런 내가 중앙중학교를 통해 인촌과 친분을 맺은 건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이다. 그가 만년에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는 침묵 가운데도 서로 통하는 걸 느꼈다. 한 분 구세주를 같이 믿는다는 사실에 정신적 유대감을 느꼈으리라.
지금도 나는 인촌을 존경한다.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과 더불어 많은 가르침을 준 고마운 분이다. 그는 애국심과 지혜로움을 갖춘 인물이었다. 일각에선 친일파라고 비난하지만, 옳지 않다. 인촌만큼 민족과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한 분도 흔치 않다. 그는 도산이 병중에 있을 때, 일제의 감시 아래서도 도움을 주곤 했다. 인촌은 병을 얻으면서 신앙을 갖게 됐는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친지와 가족에게 신앙을 권했다.
중앙중학교에서 일하며 얻은 큰 즐거움은 우수한 제자를 여럿 만났다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 캐나다 유수 대학의 교수로 있는 제자들만 20명 가까이 된다. 정진석 추기경과 민경배 연세대 명예교수도 우수한 제자로 기억한다. 좋은 제자를 많이 갖게 해 준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리스도인 교사로서 제자에게 지식뿐 아니라 신앙적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학교 교육의 순수성을 저해하고 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줄까 우려해 일부러 일요일 오후 외부 공간에서 모임을 했다. 새문안교회에선 대광고 학생을, 덕수교회에선 중앙중학교 제자를 대상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열었다. 하지만 모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12) 공산당 피해 홀로 피난길… 임시정부 좇아 부산까지
반공운동 앞장서 A급 제거대상에 올라… 전쟁 나자 첩자인 제자 동원, 체포 혈안
6·25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4월 중공군의 5차 대공세를 피해 한강 부교를 건너는 피난 행렬 모습. AP통신 기자가 같은 달 29일 촬영했다. 국민일보DB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공산군의 남침 소식이 뉴스로 전해졌다. 그런데도 이날 오후 덕수교회엔 성경공부를 위해 모인 중앙학교 제자들이 꽤 있었다. 예배와 강의를 마친 뒤 나는 “이번 전투는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다음 주부터는 모임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안과 절망을 안고 뿔뿔이 흩어져 돌아가는 제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들이 무사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이들의 운명을 오롯이 하나님 아버지께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성경공부 모임에는 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나를 체포하기 위해 온 학생도 있었다. 중앙중학교 교사 중 공산당 책임자가 있었는데, 그를 중심으로 한 조직에서 제자 E를 첩자로 삼았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당 조직에서는 교사를 A급과 B급으로 구분했다. A급은 제거 대상이고, B급은 구속 심사 대상이었다. 반공 운동에 앞장선 나는 A급이었다. 제자 E는 전쟁 발발 후 나를 체포하려고 우리 집에 두 차례 찾아왔지만, 헛걸음이었다. 내가 27일 밤 홀로 피난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전쟁은 온 국민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이 난 지 3일 만에 내가 사는 신촌 이화여대 뒷산에 인공기가 꽂혔다. 당시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테이프만 믿고 집을 지켰다. 그날 나는 유용한 정보를 얻을까 싶어 밤새 거리를 헤매다 같은 교회의 이북 청년과 제자를 만나 그길로 떠났다.
빗길을 헤치며 한강에 가보니 다리가 폭파돼 끊어져 있었다. 이튿날 다시 피난길에 오를 여유가 없었다. 그날 밤 나룻배 뒤를 따라 헤엄쳐 한강을 건넜다. 경기도 수원을 지나 오산까지 걸어가면서도 머잖아 신촌 집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빈민가에서 하루를 묵은 뒤, 이틀을 더 걸어 충남 온양을 거쳐 홍성까지 갔다. 이때도 며칠 뒤엔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우리는 다시 먼 길을 걸어 임시정부가 있는 대전으로 갔다. 대전도 위태롭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 남하하기로 했다. 전남 목포나 광주로 갈까 생각했지만, 대전역에서 만난 지인을 따라 부산행 화물차를 탔다. 이때 우리 정부가 부산으로 간다는 소식을 못 듣고 전남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면 또 한 번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것이다.
부산에서 내가 지낸 곳은 대연리의 작은 교회였다. 이곳에서 3개월간 머물다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가 10월 초쯤이었다. 열차를 타고 노량진에 내려 한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북에 들어섰다. 나는 가슴을 졸이며 집이 있는 노고산 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이 격전지로 뉴스에 보도됐기에 긴장감은 더했다. 언덕에 올라 집이 있는 쪽을 보니 앞집과 뒷집, 옆집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저 우리 집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13) 온 가족 재회도 잠시… 중공군 남하로 또 피난길
아군 후퇴 소식 전해 듣고 다시 부산행… 송산리 집에 남은 동생·부모 걱정
김형석 교수는 중공군의 남하로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서울을 거쳐 부산으로 다시 피난을 떠났다. 사진은 1951년 1·4후퇴때 중공군을 피해 남하하는 피난민의 모습. 국민일보DB
언덕에서 집을 바라보니 아내와 다섯 살짜리 큰아들이 보였다. 나는 뛰다시피 해서 대문을 열었다. 아내의 표정은 놀랍게도 담담했다. 잠시 출장 다녀온 남편을 맞는 것 같았다. 세 살배기 둘째 딸과 갓 태어난 셋째 아들도 집에 있었다. 내가 “피난을 같이 못 가 미안하다”고 하자 아내는 “같이 갔더라도 이 셋을 데리고 어떻게 살았겠느냐. 하나님이 잘 지켜주셨다”고 말했다.
아내는 다행히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전투가 있는 동안에는 두 아이 손을 잡고 한 아이는 업은 채 산 아래 방공호로 대피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방공호로 가는 걸 싫어해 나중엔 마루방 밑에 낮은 구멍을 파고 거기로 몸을 피했다고 했다. 피해를 본 건 포탄 조각이 박힌 나무 담장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큰놈은 “왜 이렇게 팡팡하는 소리가 나지”하면서 나를 찾은 모양이다. 아내가 “아버지는 여기 있으면 안 돼서 멀리 갔다가 온다”고 말해준 덕에 자녀들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귀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 두 명이 집에 찾아왔다.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는 열차가 있으니 군복을 입고 고향에 가보자고 했다. 제자들과 함께 평양행 열차를 타고 대동강 동쪽에서 내렸다. 전투의 흔적이 남은 철도 주변엔 생기 잃은 북한 주민이 내가 탄 열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 대동문 근처에 내린 뒤 미군 군용 지프에 동승해 송산리에 도착했다. 집에는 부모와 두 남동생, 막내 여동생과 38선 남하 때 데려오지 못한 큰딸 성혜가 있었다.
얼마 뒤 송산리 집에 제자가 다시 왔다. 중공군이 참전해 아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두 남동생과 여동생, 큰딸을 데리고 만경대에서 역포까지 갔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로 뒤따라오라며 큰동생을 다시 송산리 집으로 보냈다. 우리는 군용열차 석탄 칸을 타고 수색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남하로 곧 온 가족이 부산으로 떠나야 했다. 1951년 1·4 후퇴였다. 부산행 열차를 타고 부산진역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내가 머물렀던 교회에서 지냈다.
문제는 송산리로 되돌아간 큰동생과 부모님이었다. 큰동생에게 서울 신촌집으로 오라고 했기에 다시 서울로 올라갔지만, 집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부산 대연리 교회로 오라’는 쪽지를 남기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해 12월이 끝나갈 때까지 동생의 기별은 오지 않았다. 나는 동생의 무사 귀환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기도했다.
그해 12월 마지막 날이었다. 저녁에 예배당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이 예배당에 김형석 선생 가족이 있습니까”란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과 모친이었다. 비록 부친은 모시지 못했지만, 다른 일행도 함께 데려왔다. 방금 나는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희망의 소식을 전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 참이었다. 기도를 들어준 주님께 감격해 눈물이 났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14) 주중엔 선생님 주말엔 교회 봉사… 군부대서 설교도
중앙학교 부산분교 교감으로 일하며 아내와 함께 주말 예배 때 교회 도와
김형석 교수와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가 지난달 17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호텔에서 부산 광안장로교회와 인연, 이 목사의 조부모가 섬긴 평양 서문밖교회에 관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 목사는 김 교수의 제자인 민경배 연세대 명예교수의 제자다. 김 교수의 후임으로 광안장로교회에 온 목회자가 이 목사의 작은아버지인 이경준 목사였다. 신석현 인턴기자
대연리 교회로 찾아오는 피난민은 점점 늘었다. 밤에는 좁은 예배당이 잠자리로 가득 찼다. 힘든 상황에서도 피난민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낮에는 가까운 부산항이나 미군 부대에서 무기와 군수물자 운반을 돕는 일을 했고 저녁엔 예배를 드린 뒤 잠을 청했다. 새벽에는 다 같이 기도회에 참석한 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갔다. 나는 새로 생긴 중앙학교의 부산분교 교감으로 일했다. 주말엔 교회 봉사를 했고 설교도 때때로 했다. 아내는 예배 때 풍금 반주를 하며 교회를 도왔다.
하루는 대연리에서 멀지 않은 광안리의 육군 피복창에서 일하는 이들이 찾아왔다. 피복창에 일하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은데, 이들이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부대 안에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수락했다. 교회 봉사는 주께서 맡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매주 부대에서 설교하니 부대 본부에서도 전도 강연을 겸한 교양 강좌를 요청해왔다. 전쟁 중에 군대를 도울 수 있어 마음이 뿌듯했다.
얼마 뒤 부대 안 교회는 군목이 예배를 책임지게 됐다. 일부 교인은 내가 계속 설교하길 원했다. 그러면 교회에 온 목회자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거절했다.
부대 밖 교우를 위해선 예배 공동체를 만들었다. 새 교회당이 생기면 목회자를 모시는 조건으로 교회 봉사를 수락했다. 내 본업은 교사이기에 언제든 교회를 떠날 수 있었다. 나는 목회자 없는 교회에서 목회자를 대신해 교회를 섬겼다. 이곳이 지금의 광안장로교회다. 휴전되고 서울로 환도하면서 내 교회 봉사는 마무리됐다.
이즈음 나는 자주 광안리 해변에 나가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서울역에 있는 많은 지게꾼이 짐 주인을 기다립니다. 지게꾼은 짐 주인의 뜻에 복종할 뿐입니다. 저는 주의 작은 종일 뿐입니다. 주님이 부탁하는 짐을 지고 뜻하는 곳까지 가겠습니다.” 이때 드린 기도는 지금도 내 평생의 인생관이 됐다.
부산 피난 생활은 한국 장로교의 분열을 목도한 시기였다. 1952년 부산 중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 지지파와 보수 신학 지지파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지인의 초대로 방청권을 얻어 지켜보던 나는 도중에 나와버렸다.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선 지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보이는 행태에 크게 실망했다. 기독교가 조국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허탈감에 빠져 미국문화원 앞을 지나던 중 어디선가 음성이 들렸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는 말씀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미국문화원 지붕 위 하늘을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다짐했다. “고인을 장사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도 얼마든지 있다. 그 책임을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이날 일은 내 신앙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15) 34세에 연세대 부임… 60년 포도밭 같은 소중한 일터
중앙중 교감 재직 중 한신대서 청빙… 신학 강의하다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김형석 교수는 1954년 철학과 전임강사로 시작해 정년퇴임 후 2003년 특수대학원 수업까지 만 60년을 연세대 강단에 섰다. 사진은 미소 띤 채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김 교수 모습.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피난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중앙중학교 교감을 맡았다. 분에 넘치는 직책이었지만 정부의 교육 정책에 대한 회의, 정신적 지도력 한계 등으로 이곳에 계속 있어야 할지 적잖이 고민이 됐다. 그 무렵 서울 남산의 옛 조선신궁 자리에 있는 장로회신학대와 서울역 근처의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사 청탁이 왔다. 장신대는 박형룡 목사가, 한신대는 김재준 목사가 학장으로 있었다.
나는 한신대를 택했다. 학문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신대에서 강사를 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세대 신과대학에서도 기독교 윤리학을 강의해 달라는 청탁이 왔다. 당시 재학생이던 민경배 교수 등이 내 강의를 요청한 것 같다.
한신대와 연세대에서 1년 정도 강의를 했을 때였다. 고려대에서 시간강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 제안을 수락해 고려대로 가려던 차에 백낙준 연세대 총장이 급히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백 총장은 “김 선생은 신학 전공이 아니라 철학과 출신이니 문과대학 철학과에서 수고해 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세대는 주께서 주인 된 포도밭 같은 소중한 일터였다. 1954년 철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했을 때 나는 34세였다. 이때 다짐한 게 있다. 연세대에 있는 동안은 연구하고 강의하는 교수다운 교수로 머물자는 생각이었다. 대학을 마치고서는 일제강점기 도피 생활, 해방 직후 혼란, 한국전쟁이 이어져 학문에 집중할 수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교내 보직과 행정엔 관여치 않고 대외적으로도 교육관련 활동만 하기로 했다. 훗날 ‘교수다운 교수로 시종일관했다’는 평가를 받는 교수가 되자고 다짐했다. 85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31년간 연세대에 봉사했다. 2003년까지 진행한 특수대학원 강의까지 하면 만 60년을 연세대 강단에 선 셈이다. 건강과 일을 허락해 준 주님께 감사드린다.
연세대로 오면서 대외 활동의 반경이 넓어졌다. 그중 하나가 방송 출연이었다. 중앙중학교에 몸담았던 시절, 종로의 CBS기독교방송에 자주 출연한 게 계기가 돼 KBS와 MBC에도 출연했다. 삼성그룹이 시작한 동양방송(TBC)에도 2년간 아침마다 10분씩 출연해 인생과 교양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방송으로 이름이 알려지면 인기를 얻게 돼 그 인기가 인품까지도 높여준 듯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성인과 정신적 지도자는 다수의 인기보다 적은 수라도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교수직을 가진 나로서는 그 한계를 지키는 게 무척 어려웠던 것 같다.
대학 밖에서 강연할 기회도 늘었다. 54년 흥사단 강연을 계기로 군부대, 사회단체, 기업체 등에서도 강연을 했다. 처음 강연할 때는 오래지 않아 후배 교수가 뒤를 이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껏 강연을 계속하고 있다. 강연의 결과도 좋았던 것이라 스스로 위로해본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16) 꿈에서 광화문 한복판에 주님 시신이 묻힌 관 보고…
창에 찔린 시신에 잠에서 깬 후에도 전율, 며칠 뒤 4·19혁명 터져 광화문에서 시위대 합류
김형석 교수는 4·19를 ‘민족의 한 없는 아픔’으로 기억했다. 사진은 순회강연을 다닐 때 연세대 동료 교수들과 함께한 모습이다. 왼쪽부터 김 교수, 테너 이인범(음대) 김명선(의대) 교수, 두 사람 건너 홍윤명 공대 교수.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1960년은 격동의 해였다. 그해 4월 10일, 나는 놀라운 꿈을 꿨다. 광화문 네거리 한가운데 지하 깊숙한 곳에 뚜껑이 열린 관이 있었다. 관에는 주님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시신엔 창에 찔린 자국이 있었고 새빨간 선혈이 넘칠 듯 고여있었다. 꿈에서 깬 뒤에도 한동안 전율을 느꼈다.
나는 8·15해방이나 6·25전쟁 등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놀라운 꿈을 꾸곤 했다. 다만 꿈에 관해 자꾸 이야기하면 비과학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어 외부에선 말을 아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의 계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꿈을 꾼 이튿날, 마산에서 자유당의 두 번째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있었다는 보도를 접했다.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다가 자유당이 동원한 깡패에게 폭행을 당했다. 1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 목소리가 전국에서 터져나왔다.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였다.
이날 나는 학생들과 함께 광화문으로 가 시위대에 합류했다. 광화문 일대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는데, 절대다수가 학생이었다. 서울시청과 서울역 쪽에도 시위대가 가득했다. 시위대 일부는 경무대(현 청와대)로 진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성이 들렸다. 구급차 소리도 요란했다. 부상자를 싣고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을 향해 달리는 차들이었다. 이튿날 보도에 따르면 이날 수백명의 학생이 숨지거나 부상당했다. 25일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은 학생들의 피와 목숨에 보답하기 위해 시위에 나섰다. 학생 수보다 더 많은 시민이 시위에 합세했다.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4·19는 민족의 한 없는 아픔이었다.
4·19혁명은 사회 여러 기관의 반민주세력을 향한 비판과 항거로 이어졌다. 연세대에서도 학원민주화운동이 벌어져 대학 당국이 세 교수를 파면했다. 대학의 조치에 항거하는 교수들이 농성을 벌였는데 나도 합류했다. 나는 농성 중 매일 열리는 예배의 인도를 맡았다. 우리는 어느 한 편의 주장보다는 학교를 위해 좋은 결과가 있길 기도했다. 그리스도 안에선 이기적인 사고와 인간의 주장이 앞설 수 없다. 이 일로 나는 교수 농성대의 주동자 중 한 명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그해 11월 일부 학생이 원일한 총장서리 집으로 진입해 구속됐는데, 그 배후인물 중 하나로 거론돼 서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학생들은 모두 풀려났다. 세 교수 중 두 교수도 나중에 복직됐다. 하지만 대학은 큰 상처를 입었고 교수들도 깊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게 됐다. 돌이켜보면 크게 잘한 사람도 없고 잘못한 사람도 없는 분규였다. 하지만 대학 당국이 나를 분규의 주동자로 본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17) 학내 분규 수습된 후 교환교수로 미국행
분규 주동자 누명 벗고 유학의 꿈 이뤄… 저명 신학자 강의 듣고 학문과 사상의 지평 한 차원 높이게 돼
김형석 교수는 1961년 여름 1년간 미국으로 교환교수를 다녀온 뒤 안병욱(숭실대) 한우근(서울대) 교수와 세계일주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은 ‘철학계 삼총사’로 불린 안 교수와 김태길(서울대) 교수, 김형석 교수(왼쪽부터)가 함께한 모습.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학내 분규가 끝나갈 즈음 교목실장이자 절친한 친구인 백리언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학에서 분규 주동자로 나를 꼽고 있는데 원일한 총장서리도 그렇게 안다고 했다. 이사회에 나를 음해하는 서신이 전달되고 있으니 늦기 전에 가서 항의하라고 권했다.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해 총장실로 향했으나 길을 가면서 생각을 바꿨다. 집으로 돌아가 기도드린 후에 찾아가는 게 옳다고 여겼다. 나는 방에 들어가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했다. 원래 생각과는 다른 뜻밖의 기도였다.
“주님, 제가 학교를 위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를 위한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끝내니 모든 상념이 사라졌다. 내가 누명을 벗기 위해 아무런 반론을 하지 않자 원 총장서리도 뜻밖으로 여긴 것 같다. 분규가 수습되자 학교 당국은 내게 비중 있는 요직을 맡아보라고 권했다. 나는 즉석에서 거절하고 다른 적임자를 소개하며 “어느 편을 지지했든 간에 누구도 학교를 떠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후 학교는 미국에 다녀올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1960년 8월 청주 서문교회 부흥집회를 다녀오다 주님께 ‘저도 미국이나 서구 사회에 다녀오고 싶습니다’란 기도를 한 적이 있다. 욕심스럽긴 하지만, 당시로선 간절한 기도였다. 내 위치의 젊은 교수라면 누구나 갖는 꿈이었다. 1년 뒤 이 기도가 응답됐다. 분규를 잊고 싶은 마음도 있어 감사히 응했다.
풀브라이트재단 초청으로 61년 여름 미국 시카고대와 하버드대에 1년간 교환교수로 가는 길이 열렸다. 지금도 김포공항에서 여객기 일등석으로 올라가는 카펫을 걸어가는 장면을 기억한다. 그때는 국제선 여객기 일등석 승강구에 자주색 카펫을 깔곤 했다. 신문 동정란에 저명인사의 출입국 기사가 실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해 가을 학기는 시카고대에서 보냈는데 철학뿐 아니라 종교철학과 신학 강의도 들었다. 칼 바르트의 아들이 신약학을 강의하고 있었고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도 강의 중이었다. 62년 봄 학기 하버드대에선 신학자 폴 틸리히와 라인홀드 니버의 강의도 들었다. 하버드대에 있을 때, 칼 바르트가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강연회를 열어 그곳을 방문한 일도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신학자 3명을 미국 동부에서 모두 본 셈이다.
미국에서의 1년 동안 철학의 세계적 조류와 정상급 신학자의 면모를 접할 수 있었다. 내 학문과 사상의 지평을 한 차원 높여준 계기였다. 1년간 연수를 마칠 무렵이었다. 나는 같은 비행기로 미국에 온 안병욱 숭실대 교수, 하버드-옌칭연구소 연구원으로 와 있던 한우근 서울대 교수와 함께 세계일주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세상을 보는 눈을 더 넓힐 요량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18) 주님 흔적 찾으려 이스라엘 등 성지 방문했는데…
미신적 유물·장사꾼 가득한 모습에 실망… 기도 드리자“왜 날 여기서 찾느냐” 응답
김형석 교수(가운데)가 세계일주 여행을 함께 다녀온 안병욱 숭실대 교수(왼쪽)와 한 행사장에서 만나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은 김성식 고려대 교수.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세계일주여행 비행기 삯은 일등석인 귀국편 항공기표를 일반석으로 바꿔 마련했다. 동행한 두 사람과 달리 나는 성지순례를 위해 이스라엘로 가고픈 희망이 있었다. 이집트에서 두 사람이 귀국하고 나만 이스라엘로 향했다. 1962년 당시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의 갈등으로 중동 정세가 불안했다. 나는 다행히 카이로에서 우연히 만난 요르단왕국 명문가 딸의 도움으로 요르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헤브론과 사해, 베들레헴과 요단강 주변 등을 돌아봤다. 가슴 아프게도 성지엔 미신적 유물과 장사꾼이 가득했다. 이스라엘로 가서는 예수의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고 다볼산과 갈릴리 호수도 찾았다. 갈릴리호숫가의 한 호텔에 머물다 바닷가를 거닐며 이런 기도를 했다.
“주님, 어릴 때부터 주님의 흔적이 있는 성지를 간절히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 모든 곳이 우상화됐고 성직자는 돈벌이에 급급합니다. 누가 이 지역을 거룩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때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너는 여기서 왜 나를 찾느냐. 나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한국의 가난한 형제, 삶의 길을 찾지 못한 젊은이, 너희의 사랑과 봉사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과 머물고 있다. 나와 더불어 일할 곳으로 돌아오라.’ 이 기도를 마친 뒤 나는 다른 나라에 들르지 않고 귀로에 오르기로 했다. 기독교는 공간적 신앙이 아닌 시간, 즉 마음의 종교임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다.
1972년 6월엔 아내와 함께 두 번째 세계여행을 시도했다. 미국 캐나다를 거쳐 유럽 인도 중동 등지를 돌았다. 나는 주일마다 현지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덴마크 영국 미국 이탈리아 일본의 교회 참석 인원이 점점 줄고 있었다. 이런 추세는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지성인 수가 많아질수록 뚜렷했다. 한국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대학 출신 젊은이가 많아지고 과학과 지성적 비판력이 높아지면, 교회 성도 수가 적어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많이 모인다고 해서 그 규모만큼 그리스도 정신이 열매를 맺는 건 아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이런 시대에는 초(超)이성적이며 휴머니즘과 부합될 수 있는 종교와 신앙이 필요하다. 예수는 구약의 율법을 인간적 생명의 진리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인간성과 삶의 진리를 구속하는 교리와 교리주의를 탈피하지 못하면, 앞으로 종교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어떻게 더 많은 사람에게 인간다운 삶을 약속해 주며, 자유와 평화를 증대시킬 수 있을까. 이것이 기독교가 제시하고 나가야 할 방향이다. 기독교의 목표가 교회 자체가 아닌 하나님 나라가 될 때, 진리와 인격의 왕국이 건설되는 생명력 있는 종교로 발전할 수 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19) 숭실중 4학년 때 첫 설교… 성인 대상 부흥회 인도
주 강사 불참 대타 나섰다가 계속하게 돼
성경공부 이끌며 신군부 때도 중단 안 해
60년 넘는 인생 3분의 2 성경공부에 바쳐
김형석 교수는 연세대 재직 중에도 시간을 쪼개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사진은 연세대 교수 시절 동료 교수와 함께한 김 교수(뒷줄 맨 오른쪽)의 모습.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내가 부흥집회와 성경공부로 교회를 섬긴 건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 때부터다. 평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 버스로 갈아타고 들어가는 시골인 덕지리의 교회 여름 성경학교에 보조교사로 섬기러 갔는데 주 강사가 불참해 내가 설교자로 나섰다. 열흘 넘게 오전엔 주일학교 어린이에게 말씀을 전하고 오후엔 성인을 대상으로 부흥집회를 했다. ‘앞으로 내 삶은 하나님 뜻을 따라 살리라’는 14살 때의 기도가 처음 이뤄진 순간이었다.
이듬해에도 마우리 선교사의 부탁으로 평양 숭실전문학교 농장 교회의 부흥회를 이끌었다. 그는 시골교회를 찾을 때마다 나를 데려가서 설교를 부탁하곤 했다. “내 서투른 한국말보다는 한국인인 네 설교를 더 좋아한다”는 이유였다.
중앙중학교와 부산의 피란민 시절 이후에도 성경공부 지도 요청은 이어졌다. 1956년 12월 남대문교회에서 대학생을 위한 성경공부를 의뢰해왔다. 참석자의 3분의 2가 외부인으로 채워지자 남대문교회 성경공부반은 1년 뒤 문을 닫았다. 이들 중 교회를 처음 나온 이들이 갈 곳을 잃었다. 덕수교회 찬양연습실을 얻어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다 이들의 제안으로 58년 4일간의 공개집회를 열었다. 첫날 저녁부터 덕수교회 예배당이 가득 찼다. 대부분 젊은 대학생이었다. 이튿날엔 2층까지 빈자리가 없었다. 나는 이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총으로 여기고 있다.
성경공부 참가자 수가 늘면서 덕수교회에 부담을 줄까 봐 집회 장소를 피어선성경학교로 옮겼다. 이후엔 강신명 목사의 제안으로 새문안교회에서 열었다. 그러자 타 교회 성도는 물론이고 천주교 수녀, 구세군 사관도 참석했다. 마음이 무거워진 나는 다시 종로의 YMCA회관과 시사영어학원 순으로 장소를 옮겨 조용히 모임을 가졌다.
30여년 동안 성경공부를 이끌면서 여러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 신군부가 등장했다.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집회를 금지하는 포고령도 내렸다. 그래도 우리는 모임을 쉬지 않았다. 내가 신군부를 비난할 때는 고초를 겪을까 걱정됐다고 참석자들은 말했다.
교회에서는 무교회주의란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조용히 말씀과 기도 시간을 갖는 데만 몰두했다. 성경공부 참석자 중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이들은 성경공부에만 집중했다.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진 않았다. 기성 교회를 비판하다가도 성경공부를 하며 교회를 섬기기로 한 이들도 적잖았다.
아내가 중병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면서 성경공부는 중단됐다. 내가 아내와 함께 교회에 동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94년 6월 몇 사람과 함께 성경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여러 명이 모이는 수고를 덜기 위해 성경공부를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주기로 했다. 테이프는 주부, 목사, 교수, 실업인 등 국내 각계각층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중국 등 해외에도 전달됐다. 25년 차가 되는 2019년엔 마지막 성경공부를 이끌었다. 모두 합해 60년이 넘는 세월, 인생의 3분의 2를 성경공부에 바쳤다. 앞으로는 또 다른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20) 두 번째 수필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 출판계 큰 반향
청년들에게 선한 삶 이야기해주려 출간… 60만부 팔리며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김형석 교수의 수필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당대 출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은 강원도 양구인문학박물관에 소장된 김 교수의 책들. 가운데 책이 ‘영원과 사랑의 대화’다.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나는 나 자신이 수필가란 직함을 얻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수필은 여섯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일과 각종 활동으로 바쁜 내게 취미 같은 것이었다.
나는 연세대에 부임한 첫해 여름부터 주제가 떠오를 때마다 수필로 쓰는 일을 시작했다. 철학적 내용이 담긴 수필집을 읽으며 받은 영향일 수도 있고, 어린 시절 문학책을 열심히 읽은 게 잠재 원인일 수도 있다. 평균 한 달에 두세 편 정도는 쓴 것 같다.
이렇게 쓴 수필 중 20편을 모아 1960년 첫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을 펴냈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미 써둔 수필에 몇 편의 글을 추가해 이듬해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냈다. 책을 낸 특별한 의도가 있던 것도 아니고, 독자가 많이 생기리라는 기대감도 없었다. 그저 대학교에 오며 아쉽게 작별한 고등학생과 인격형성기를 맞은 청년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삶’에 관해 이야기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만 경제적 이유는 있었다. 출간 당시는 1년간의 미국행을 앞두고 있던 시기다. 학교에 다니는 어린 것이 여섯이나 됐기에 미국으로 간 뒤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좀 팔리면 생활비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리라 여겼다.
미국에 있는 동안 아내가 ‘인세가 조금씩 들어오니 미국 국무부에서 지급하는 비용을 당신 혼자 써도 좋다’는 연락을 해왔다. 살림 걱정을 안 해도 되니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영원과 사랑의 대화’가 출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건 1년간의 미국 체류와 세계일주여행을 다녀온 뒤에야 알았다. 이 책은 당시 60만부가 판매되며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출판사 주간이 그해 출판연감을 보내줬는데, 거기엔 우리나라 출판사상 가장 많이 팔린 박계주의 장편소설 ‘순애보’보다 내 책이 1년간 몇십 배 더 팔렸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비소설 분야 저자가 소설가보다 더 많은 독자를 차지한 선례를 남겼다고 했다.
세월이 지나서야 나는 내 책의 독자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실감했다. 지금도 그렇다. 아버지 권고를 듣고 아들이 읽었는가 하면, 어머니와 딸이 독자인 경우도 있었다. 후배나 제자 교수, 사회 저명인사 가운데 청소년 시절 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도 여럿 들었다. ‘영혼과 사랑의 대화’는 60년대부터 지난해까지 판을 거듭하며 독자를 만나고 있다. 나는 내 책이 그렇게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독자를 갖게 된 것은 당시 글 쓰는 사람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생활과 사고에 지침이 될 만한 책이 적었기에 젊은 독자가 내 책을 고맙게 접한 것 같다. 나는 이들에게 착하고 아름다운 감정, 순수한 삶의 모습을 전하고 싶었다.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날들이 더 밝아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 기저에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이 책이 많은 독자가 기독교에 가까워지고 기독인 독자들이 신앙의 문을 닫지 않고 살아가도록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도 감사하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21) “베트남 전장서 교수님 말 떠올라”… 청년 편지에 울컥
기독교적 신앙관 녹아있는 수필집 읽고
독자들 삶이 변한 경험 담아 감사 인사
주님 이끄심 덕분 독자들과 교감하게 돼
김형석 교수의 글에는 기독교적 사고와 가치관이 녹아있다. 사진은 김 교수의 친필원고.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나는 비교적 많은 책을 썼다. 철학과 사상을 다룬 책도 있고 수필이나 수상(隨想)에 해당하는 책도 있다.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했기에 내 글과 책 속에는 언제나 기독교적 사고와 인생관, 가치관이 녹아있다.
제자들도 내 ‘철학의 세계’ ‘윤리학’ ‘종교의 철학적 이해’ ‘역사 철학’에 깃든 휴머니즘적 정열과 이를 뒷받침하는 종교적 이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사상이며 삶의 기반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젊었을 때 독일 철학자 칸트를 공부하면서도 같은 감상을 느꼈다.
내가 처음 펴낸 종교적 에세이는 1966년작 ‘이성의 피안’이다. 종교 문제와 기독교의 본질, 신앙의 과제에 관한 책이다. 내 전집에도 기독교 신앙을 다룬 글이 있는데, 이를 모아 나온 책이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다. 예상외로 많은 독자를 모았고, 그 영향도 적지 않았다. ‘예수’는 사복음서를 여러 번 읽던 중 나 같은 지성인에게 있어 ‘예수는 누구인가’를 찾고자 쓴 책이다. 교회나 신학 안에서가 아닌, 한 지성인이 보는 예수는 어떤 삶을 살았고 무슨 교훈을 남겨줬는가를 찾아내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다. 이 책 역시 적잖은 독자들이 호응해줬고 감사 인사를 전해 와 기쁘다.
95년 펴낸 ‘한국 기독교 무엇이 문제인가?’는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비판하고 진로를 모색하기 위한 글을 담았다. 한국교회가 가진 문제들을 정리하며 해결책을 찾으면 조금 더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책을 낸 뒤 더 많은 과제를 안게됐다. 주로 보수 신앙 노선을 따르는 이들의 비판이었다. 학교 교정에 들어가 단군상을 파괴하거나 사찰에서 불상을 훼손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는 글에 대한 항의가 적지 않았다. 곤혹스러운 점은 인간 존중의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가 기독교와 배치된다고 생각하는 목회자가 꽤 많다는 사실이었다.
내 신앙도 보수적인 편이다. 장로교 전통에서 자란데다 일찍부터 교회에서 설교하며 가르쳤기에 더 그렇다. 하지만 나는 교리보다 진리, 교회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관심이 더 컸기에 ‘개방된 보수 신앙’을 택했다.
독자들은 내 책을 읽고 삶이 변한 경험을 담아 편지를 보내왔다. 감명 깊었던 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청년들이 보낸 편지였다. “참호 속에 있을 때 기억에 떠오른 건 학문도 사상도 대학도 아니었습니다. 김형석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왜냐면 그건 인생의 문제였으니까요.” 전쟁터에서 중상을 입고 돌아왔다는 청년의 이 편지를 읽으며 나는 책상에 엎드려 울면서 기도했다. 독자들과 내가 삶과 신앙 문제에서 뜻을 같이할 수 있던 건 주의 이끄심 덕분이다. 내가 쓴 몇 권의 책으로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체감하는 데 도움이 됐음에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22) 강연 잘하는 선배 부러워 ‘제게도 연설 능력을…’ 기도
중2 때 드린 기도 실천의 원동력 된 듯… 주일학교서 학생 가르치며 자신감 키워
김형석 교수는 10대 시절부터 지금껏 대중에게 강연과 설교로 ‘선하고 아름다운 삶’에 관해 연설해왔다. 김 교수(왼쪽 세 번째)와 안병욱 숭실대 교수(왼쪽 두 번째)가 울산시민대학에서 강연한 뒤 단체 사진을 찍었다.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나는 활동적이고 사교적이기보다 내성적이고 사색적이다. 100세가 넘은 지금도 성격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성격을 갖고 태어난 내가 지금껏 대중 앞에 서서 강연과 설교를 해온 건 놀랄만한 일이다.
이런 생애를 보내게 된 이유가 뭘까 스스로 물어본 일이 있다. 한 가지 떠오르는 일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드린 기도다. 교회 성경학교 강연에 나서는 선배들을 부러워하며 ‘잘 가르치고 연설할 수 있는 능력을 제게도 베풀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기도는 실천의 원동력이 되는 걸까. 이후 시골교회에서 주일학교 학생을 가르치며 연설 능력과 자신감을 키웠다. 훗날 여러 강연과 연설을 하게 된 힘도 이렇게 생긴 것 같다. 감사드린다.
처음엔 강의와 강연, 설교는 구별되는 것이라 여겼다. 강의는 교재 준비를, 강연은 알찬 내용을 마련하면 자신 있었지만, 설교는 그렇지 않았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청중이 나를 기억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막중한 책임이 맡겨지는 설교를 마치고 집회에서 돌아올 때의 행복감은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축복이다.
30여년 전부터는 강연할 때도 설교 때와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임하고 있다. 강연 역시 주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일이다. 기독교인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사람을 더 걱정하는 주님의 마음을 몰랐던 것이다. 신앙인으로서의 나와 세상사람으로서의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인격과 삶인 것이다.
1965년부터 85년까지의 일기를 정리하며 그간 설교한 횟수를 세어보니 2200회 정도가 됐다. 일주일에 평균 2회 정도 신앙 강연을 한 셈이다. 이전 10년에는 더 많은 설교를 했을 것이다. 지금도 교회 안팎에서 설교한다.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몇 차례 집회가 있다. 57년 상동감리교회, 61년 동대문감리교회에서 열린 청장년을 위한 신앙집회다. 두 집회 모두 교회 밖 대학생과 청년으로 예배당이 초만원이 됐다. 6·25전쟁 후 공허감에 빠진 청년들이 적잖았던 시기다. 63년 원주YMCA 주관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연 옥외 집회에 우산을 쓰고 삼삼오오 모여있던 수많은 청년도 기억한다. 누가 해낸 일이 아니었다. 주님이 원하셨기에 우리가 심부름했을 뿐이다.
60년대 후반부터는 미주의 한인교회 집회 기회가 늘었다. 특히 78년 뉴욕 한인교회에서 열린 집회를 잊을 수 없다. 평소 한인교회 성도보다 3~4배 더 참석했는데, 교회 밖 전문직 종사자들이 찾아와 준 덕이었다. 85년 LA 동양선교교회에선 집회 후 “김형석 교수에게 전해달라”며 미화 1만 달러를 두 차례 전달한 초로의 신사도 있었다. 여기에 교회가 3000달러를 더 후원해 나는 연세대에 2만3000달러를 장학금으로 기부할 수 있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부족한 평신도 한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에 동참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23) 군부대·산업체·NGO… 교회 밖 신앙운동에 동참
군인·공장 근로자들에게 강연하면서 소외 이웃의 어려운 처지도 알게 돼
김형석 교수(첫줄 왼쪽 두 번째)가 1965년쯤 강사로 나선 월드비전 대학생 수양회에서 단체 사진을 찍은 모습. 김 교수 오른쪽부터 곽선희 이호빈 홍현설 목사. 월드비전 제공
나는 군부대와 산업체, 병원과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에서 교회 밖 신앙 운동을 펼쳤다. 직접적인 건 아니었지만, 이들 단체에서 신앙적으로 협력할 기회는 주께서 허락하지 않았다면 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교수로 살았기에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우리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처지를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교수로서 여러 강연을 한 군부대에는 40대 때부터 20년 가까이 봉사했다. 국군방송에선 누구보다 오랜 세월 봉사했고, 군 정신교육 지도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신앙 강연은 아니었기에 군부대 안의 전도에는 직접 영향을 주진 못했다. 국방부 강연을 오랜 기간 계속한 건 군부대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렇게 묻곤 했다. “왜 욕을 먹으면서도 정부 일을 돕는지 모르겠어요. 잡혀가기까지 하면서….” 전두환 정권 당시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강연 내용을 꼬투리 잡아 집에 전화로 협박을 가할 때가 있었기에 한 말일 것이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이렇게 답했다. “우리 같은 탈북자는 대한민국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탈북자로서 내가 대한민국을 위해 하는 일보다 대한민국의 혜택이 더 크다는 사실은 분명한 사실이니 말이다.
산업체에서 전도 경험은 우연한 기회에 얻었다. 최창근 영락교회 장로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의류공장 ‘동영물산’을 운영했는데, 그는 공장 근로자를 신앙의 길로 이끌기 위해 매 주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공장 내 신우회를 조직해 군부대 위문과 소외이웃을 돕는 일도 했다. 그의 산업전도를 지원하기 위해 1965년쯤부터 6년간 목사가 아닌 내가 예배를 맡아 도왔다. 주로 인생관과 가치관, 일을 사랑하는 삶의 자세를 설교했다. 63년 을지로6가의 국립병원에서도 2년간 예배를 인도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직장전도 활동이 교회 운동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굳혔다. 신앙과 진리를 교회라는 형식의 그릇에만 담아둘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양심과 생활의 터전에서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월드비전은 64년 여름 신앙수련회 강사로 초빙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후 매해 월드비전 수련회 강사로 초청받았기에 타 강사 및 여러 회원과 깊은 신앙적 우정도 나눌 수 있었다. 강남대 설립자 이호빈 목사와 홍현설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성결교의 정진경 목사와 장로교의 곽선희 목사 등을 그렇게 만났다. 강연을 계속하면서 월드비전 이사도 맡았다. 지금도 명예이사다.
교회 밖 신앙운동에 동참하면서 깨달은 또 다른 사실은 ‘직장 선교가 중요하다고 해서 본래 직책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교수와 수필가, 신앙인으로서 1인 3역을 했지만, 학문적 책임과 신앙적 책임을 혼미하게 처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최선의 길을 택하진 못해도 가능한 차선의 길은 택하면서 살아왔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가 어떻게 평하든 나는 주님 앞에서 종으로 살아왔다. 6·25전쟁 이후부터는 종이라기보다 주의 지게꾼으로 살길 원했다. 당시 시대와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24) “내 사랑하는 가족을 주님께 맡기나이다”
신앙은 본인 선택인 동시에 주님의 선택
‘가정의 주인은 예수그리스도’란 믿음으로
이웃·사회에 책임 다할 때 축복·영광 누려
그리스도인 가정이라면 이웃과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게 김형석 교수의 견해다. 사진은 김 교수가 50대 때 연세대 교수 축구팀으로 활약하던 모습.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공동체는 가정과 민족(국가)이다. 가정과 민족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운명공동체다. 선택의 여지도 없으며 그 책임을 포기할 수도 없다. 좋은 가정이 모인 국가는 좋은 국가다. 모든 가정을 좋은 가정으로 육성하고자 노력하는 국가도 좋은 국가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더불어 사회와 가치관이 변해도 건전한 가정, 모범적인 가족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때론 기독교 가정이 보수적이라는 평을 듣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평하는 사람의 가정보다 더 사랑과 봉사심을 갖고 세상에 행복과 보람을 나누는 가정이 되면 그것이 곧 사회의 빛과 소망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주께서 우리의 이런 기도와 노력을 헛되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믿음이다.
나는 자녀를 여섯이나 키웠고 손주 13명, 증손주 6명을 두고 있다. 자녀세대 신앙을 위해 고민하는 부모가 적지 않은데, 자녀와 후손을 키우면서 얻은 몇 가지 결론이 있다. ‘신앙은 결국 은총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본인의 선택인 동시에 주님의 선택이기도 하다. 신앙생활에 관한 강요는 선택의 길을 막을 수 있다.
내 경우 아이들이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교회를 같이 다니며 신앙적 분위기를 익히도록 도움을 줬다. 가정예배까지는 아니었지만, 집에서 가족회의를 할 때 예배처럼 드린 적도 있다. 성년이 된 후에는 신앙이 자율적 선택이 되도록 옆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그렇게 갖춰진 신앙이 결국에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는 법이다.
나는 자녀에게 목회자나 신학자가 되길 바라거나 권한 일이 없다. 은총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성실히 교회를 섬기며 신앙공동체에 동참하는 일도 똑같이 귀하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살 수 있다면 어떤 직업을 택해도 좋다.
자녀 중에는 신앙이 없는 상대와 결혼하거나 다른 종교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이를 만난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진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내 뜻을 잘 알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세월이 지날수록 대부분의 아이가 기독교 신앙에 동참하게 됐다. 내 가족은 단순히 내 가족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 가정의 일원인 것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우리 가정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란 믿음을 품게 된다. 가족의 공동 목표가 주님의 가르침에 맞춰진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자연스레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는 가정이 된다. 가정이 이웃과 사회의 책임을 다할 때, 그 가정은 더 큰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
탈북 이후 두 남동생과 여동생, 어머니를 모시고 자녀들을 키우며 체감한 건 ‘사랑하는 가족을 주님께 맡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가족을 위하고 돕는 데는 한계가 있으나 믿음에서 오는 축복에는 한계가 없다. 앞으로 더 늙은 후에 드릴 기도가 있다면 ‘내 여러 가족을 주님께 맡기나이다’가 될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25) 소질·개성 못살리는 교육 여건… 답답하고 마음 아파
무거운 짐 지고 쫓기는 듯 공부하는 한국
모든 자녀가 성공과 행복 누릴 권리 있어
개성 존중하는 기독교 정신으로 해결해야
김형석 교수(왼쪽)는 교육자로서 교육 정책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다. 사진은 김 교수가 연세대 교수 재직 시절 조의설 전 연세대 부총장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우리 가정을 아는 사람은 내게 비교적 자녀 교육에 성공한 편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여섯 자녀가 모두 국내외에서 석사 과정 이상을 마쳤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교수가 됐고, 큰 며느리도 교수며 작은 며느리는 의사다. 큰딸은 저술 활동을 하며 큰사위는 미국에서 심장내과 교수를 한다. 첫째 외손자 역시 워싱턴대에서 심장내과 교수로 일한다. 첫째 외손자 며느리는 하버드대 출신의 변호사다. 둘째 사위는 법관, 셋째와 넷째 사위는 미국에서 의사를 하고 있다. 막내인 넷째 딸은 미국에서 사회학 교수를 하고 있다. 넷째 외손녀는 MIT 출신으로 애플에서 근무한다. 넷째 외손자는 심장외과 의사가 됐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연히 집안 자랑을 하는 거 같아 죄송해진다. 물론 내 가족보다 더 훌륭히 성공한 가정은 많다. 언제 이렇게 대가족의 책임자가 됐는지 모르겠으나, 가장으로서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 자녀와 손주들에 대한 교육적 책임이다. 나이가 들면서 더 그런 자책감을 느끼는 거 같다.
여러모로 자녀 양육에 있어 감사할 일이 많지만, 아쉬운 건 좀 더 교육적인 배려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손주의 반은 미국에서 자라 교육을 받았으며 반은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타고난 소질과 능력은 모두 비슷한 편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자란 애들이 훨씬 자유롭고 즐거운 교육을 받았다. 이에 비하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애들은 어려서부터 무거운 짐을 지고 쫓기는 듯한 교육을 받는다. 자유로운 선택도 없고, 친구와의 즐거운 사귐도 갖지 못 한다. 한국의 자녀와 손주들이 소질과 개성 측면에서 더 탁월하더라도 주어진 교육 여건 상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손실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이걸 눈으로 직접 보는 가정의 책임자이자 교육자로서 마음이 아프고 답답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나 같은 한두 사람이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우리 자녀가 더 유능하게 자라 행복할 수 있고, 후손들이 보람 있는 행복한 일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책임이 있지 않겠는가. 이런 걱정을 할 때면 차라리 지금 같은 교육부가 없었더라면 교육이 더 잘되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한다. 오래전부터 했던 생각이다. 교육은 교육부보다 교육자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학교장이 교육 행정관보다 학생을 더 사랑하며 위해주는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자녀가 성공과 행복을 찾아 누릴 자질과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이를 좌절시키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이다.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이는 기독교의 정신이기도 하다. 너무 부담스러운 과제이기는 하나, 기독교 교육은 가정과 학교, 교육계에서 해결해 나갈 책임이 있다.
소망스러운 교육을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도 중요하다. 자녀에 대한 이기적 욕심을 교육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부모의 진정한 사랑은 자녀가 성인이 됐을 때 어떤 인격을 갖출지를 생각하며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26) 사회악 만연한 지금, 참다운 정신적 지도자 필요한 때
교육·종교계 지도자 국가·사회 문제 외면
초창기 한국교회 사회 전반 선도적 역할
교회주의에만 빠질 경우 버림 받을 수도
김형석 교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교회를 향한 애정 어린 고언을 여러 책과 연설로 남겼다. 사진은 강원도 양구의 인문학박물관에 전시된 김 교수의 신앙 서적들.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대학을 떠나 사회 속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 사회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병들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경제계보다는 정치계가 더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계보다 정신적 영역에 속하는 교육계와 종교계의 무능과 무책임, 애국적 관심의 결핍은 더 심한 것 같다. 온갖 사회악이 만연해 있는데, 교육계나 종교계 지도자들이 국가와 사회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정신계의 지향점과 윤리적 가치관은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다. 물론 교육계에 있던 내가 종교계 지도자에게 무엇을 요청한다는 건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종교계를 위하고 사랑하는 국민의 위치에서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다. 나 자신이 몸담은 기독교에 관해 조금 더 사랑이 있는 걱정을 용납해 주길 바란다.
초창기 한국교회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인의 성장이 신앙인의 성장을 앞지르고 있다. 누구에게나 물어보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 수가 많아지기를 원하는가, 지성인의 수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사회에서 교회는 지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성과 윤리성을 갖춘 지성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로 바뀌었다. 만일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도에게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죄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바치지 않아도 죄는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피해를 입히는 것은 죄다. 그것이 주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라고 설교했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좀 더 좋아지지 않았겠는가. 누가 뭐라고 말하든,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도덕성 상실과 윤리적 가치의 존귀성을 회복시켜주지 못한다면 교회는 언젠가 버림받는 때가 올 것이다.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본래 목적이 아니다. 교회가 여러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적 위치를 차지하긴 하지만, 교회로부터 시작해 교회로 끝나는 게 기독교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교회주의가 되면 모든 인간을 위한 진리가 교회를 위한 교리로 대체된다. 일부 교회에서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의무보다 교회에 대한 봉사를 더 요청하기도 한다. 여러 그리스도인이 예수께서 그렇게 간절히 요청했던 하나님 나라는 외면하고, 한 번도 가르친 바 없었던 교회주의를 따르는 게 현실이다.
정신적 지도자, 특히 종교계 지도자라면 나와 교회보다는 진리와 국가를 더 위하고 걱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이 좋은 예다. 두 사람은 우리가 존경하는 민족적 지도자이자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분들은 민족과 국가를 사랑했고, 자기 목숨이나 인생보다 겨레의 자유와 행복을 더 소중히 여기고 삶 전체를 바쳤다. 이런 신앙이 있기에 이들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이자 지도자가 됐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 정신적 지도자를 바라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27) 31년의 교수생활 마침표… 최루가스 자욱했던 고별강연
강연 당일 독재정권에 맞서 학내 시위
후배 교수들의 연기 요청에도 강행
데모하던 학생들까지 참석 강의실 꽉 차
김형석 교수는 1985년 연세대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사진은 김 교수(오른쪽)가 퇴임 후 한 행사에서 같은 해 숭실대에서 정년퇴임한 안병욱 교수와 함께한 모습.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1985년은 31년간의 교수 생활을 끝내는 해였다. 연세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했다. 그해 9월 퇴임기념예배를 맞기 전까지 5월엔 연세대 신앙강화주간 강사로 강의하고 7~8월엔 미주 동포를 위한 강연여행도 하며 바쁘게 보냈다. 퇴임예배가 있던 기간에 안병욱 숭실대 교수도 은퇴했기에 우리 소식은 신문과 방송 등에서 기사화됐다. “두 교수의 퇴임은 사회적 이벤트”라고 평하는 보도도 있었다.
9월 13일에는 나의 퇴직기념 강연회가 문과대학 1층 101호실에서 열렸다.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맞선 학생운동이 활기를 띠던 때였다. 마침 그날 대학 설립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학생 데모가 있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교내 여러 곳을 점거한 상황이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여러 발의 최루탄이 발사돼 캠퍼스 전체가 혼란스러워졌다. 후배 교수들이 강연회를 연기하자는 의사를 전해왔다. 하지만 다른 일정 때문에 연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몇 명이 참석해도 좋으니 강행하기로 했다. 이날 강연 내용은 역사와 윤리, 시간의 구조에 관한 것으로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약속한 2시가 돼 강의실에 들어서보니 교실이 초만원이었다. 의자에 앉지 못한 학생은 벽에 기대 있었다. 신문사 기자들도 보였다. 데모를 하다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 쓴 학생들도 참석해 실내는 매캐한 냄새로 가득했다. 나 역시 재채기를 하면서 강의실에 들어갔다. 밖에서는 여전히 데모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강연회는 성황리에 마쳤다. 마치고 돌아오면서 ‘30년간의 대학교수 생활이 실패하지는 않았구나’란 생각에 위로를 받았다.
결과는 모르겠으나 대학에 머무는 31년간 정말 많은 일을 했다. 훗날 기록을 보니 81년 한 해에만 설교 100여회, 방송 142회, 기업체 강연 208회, 일반 강연 116회 등을 했고 두 권의 책을 위한 원고 2400장을 남겼다. 이전에는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나 결코 자랑스러운 일은 못 된다. 한 가지 일에 더 정성을 쏟았다면 뜻깊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30여년을 이렇게 일했으니 헛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위안이 들기도 한다.
대학에서 벗어나 새 출발을 한 지 36년이 됐다. 교육계에 몸담았던 수필가이자 신앙인으로 지내오며 그리스도인다운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 힘썼다. 신앙인으로서 신앙적 기준과 인간으로서의 기준, 두 가지 삶의 척도를 신경 쓰며 살아왔다. 바로 경건과 성실이란 가치다. 서양 중세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성실한 사람은 악마도 유혹하지 못하며 하나님도 그를 버리지 못한다.” 기독교 사회였던 당시에 이런 말이 나왔다는 건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성실한 사람 찾기가 힘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성실한 사람이 경건성을 더하면 신앙인이 된다. 인격을 갖춘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됨으로써 거듭난 신앙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28) 한국의 미에 눈뜨고 도자기·민화에 반한 20년 세월
서구적인 것에 더 익숙한 환경에서 성장
우연히 조선 초기 옛 도자기에 마음 뺏겨
민화로 관심사 넓히며 더 깊이 빠져들어
김형석 교수는 1960년대부터 백자와 민화를 감상하는 데 취미를 붙였다. 사진은 김 교수가 70년대에 자택에서 옛 도자기를 감상하는 모습.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일본 유학 중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도쿄의 도립미술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덕에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의 작품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여러 전시회를 보며 어렴풋이 회화 속에 스며든 예술성 비슷한 걸 느꼈다. 세계일주여행 중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을 다니며 교과서에서 배운 예술 작품을 보면서도 그랬다.
이런 이유에선지 1960년대부터는 서울에서 매해 열리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빠지지 않고 관람했다.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의 그림이 좋았다. 박수근의 그림도 인상 깊었다. 나중엔 운보 김기창과 인연도 있어 그의 그림에도 흥미를 느꼈다. 문인화를 보기 위해 관련 책을 보다가 우연히 조선 초기 도자기에 마음을 뺏겼다. 60년대 후반에는 인사동이나 장안평, 청계천에 가면 옛 도자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쯤부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인사동 일대의 도자기 가게를 찾아 구경하는 재미를 붙였다.
나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잘 모르고 자랐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제국주의식 교육을 받았다. 이후엔 서양철학을 하는 바람에 한국적인 것을 찾아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문화 속에 자라 서구적인 것에 더 많이 노출됐다. 그런 내가 옛 도자기에 밴 한국의 아름다움과 정감을 느끼면서 그간 비어있던 정서의 여백을 채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도자기에서 민화로 관심사를 넓히면서 더 깊은 한국의 미를 깨닫게 됐다.
옛 도자기와 민화, 골동품 등 한국적인 것에 관심을 쏟는 세월은 20년 정도 이어졌다. 골동품에 관심을 두면 소장 욕구도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재정적 여유가 없었으므로 친구들에게 소장을 권하곤 했다. 나는 금전적 가치는 없어도 우리 선조의 얼과 삶의 흔적이 담긴 물품을 모아보자고 생각했다. 값어치 없는 도자기도 우리 선조, 그것도 서민이 쓰던 것 아닌가. 값이 있는 고귀한 골동품은 개인이 아닌 박물관이 소장해 여러 사람에게 소개되는 것이 옳다는 게 내 소신이다.
한국 도자기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조선시대 백자다. 백자의 흰색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게 다채로울 수 없다. 그 백색 속에는 무한한 깊이가 있다. 백자를 보면 우리 선조의 고결한 성품, 순박한 정서, 꾸밈을 모르는 순수성, 흰옷을 좋아한 전통이 그대로 느껴진다. 도자기 못지않게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건 민화다. 운보의 집에 갔을 때 오늘날 추상화가가 그린 것과 별 차이가 없는 듯한 민화를 봤다.
내가 갖고 있던 민화 몇 점은 주변 애호가나 박물관에 기증했다. 400여점의 도자기는 모두 강원도 양구의 근현대사박물관으로 보냈다. 일부는 양구 인문학박물관에 재현된 내 방에 전시돼 있다. 시간이 허락되면 종종 그 방에 혼자 앉아 내 손을 떠난 도자기를 찾아본다. 그 자리에 앉으면 내가 살던 옛 고향 집에 온 것 같은 포근함을 느낀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29) 어린 시절 자주 쓰러져… 모친 “스물까지라도 살았으면”
오래 살지 못할 거란 생각에 서원 기도… 주님의 일에 정성 쏟으니 건강 뒤따라와
김형석 교수가 지난 16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를 갖고 건강 비결을 소개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가까이 느끼며 지냈다. 자주 까무러쳤다 깨어나 부모의 근심을 샀다. 어릴 땐 동네에서 뛰어놀다 갑자기 쓰러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면 친구들이 밭에서 일하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장손이가 쓰러졌다”고 전했다. 어머니는 허겁지겁 밭에서 나와 나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의식을 찾고 눈을 뜨면 내 얼굴은 어머니의 눈물로 젖어있었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지”라고 물으면 나는 “아프지 않아”라고 답했다. 어머니에게 미안해서 하는 말이긴 했지만, 정말 아프지 않았다.
이런 내게 어머니는 평소 “네가 스무 살까지 사는 걸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진료 받으런 간 의사에게선 “이 애는 아버지가 의사여야 살아갈 텐데”란 걱정스러운 조언도 들었다. 내가 살던 고향 마을 앞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저 무덤이 있는 곳에 나도 잠들게 될 것이다. 부모님은 슬퍼하시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다 잊어버리겠지. 내 인생도 끝나고….’ 병약했기에 감수성이 풍부해져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오래 살지도 못하고 중학교도 가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자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부탁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제게 중학교에 가도록 해주시면 건강하게 사는 동안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건강을 허락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4세 때 드린 기도였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건강이 꽤 좋아졌다. 대학생이 되고서도 건강을 위해 조심스러운 생활을 했으나 나빠진 적은 없었다. 25세 때 해방을 맞았는데, 이때부터는 건강 생각을 따로 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렇다. 누구보다 허약하게 나고 자랐지만,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의사들은 이런 나를 보며 “교수님 같은 분이 많으면 의사들은 다 실업자 되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동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많은 일을 했는데, 아파서 일을 못 한 경우는 없었다. 심한 감기에 걸렸는데 사흘간 강연한 적도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건강이 아닌 일하는 걸 목적 삼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주변 친구를 보면 나이가 들어 건강을 첫째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안병욱 숭실대 교수도 80대 후반이 되니 “이 나이가 되니 건강이 최고”라고 말했다. 옳은 말이지만, 내겐 아니었다. 안 교수에게 “나는 일이 최고야”라고 답했다.
70년 가까이 일을 위해 모든 정성을 쏟았다. 일이 삶의 목적이 됐고, 건강은 뒤따라오는 그림자처럼 여겼다. 건강을 위한 인생이 아니고 ‘이렇게 살았더니 건강해졌다’는 체험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건강해지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다. 신체적 건강이 전부가 아니다. 가치 있게 사는 사람이 건강하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30) 내 인생 황금기는 75세 전후… 소명·사랑 다하려 노력
신앙인에게 주어진 소중한 과제는 부르심 받을 때까지 소명 감당하는 것
김형석 교수는 “인생의 황금기는 75세 전후”라고 말한다. 사진은 김 교수가 2018년 강원도 양구군 양구인문학박물관에서 인문학을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1962년 초여름 미국 하버드대에서 봄 학기를 마칠 때였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폴 틸리히 교수의 하버드대 종강식에 참석한 일이 있다. 학교 측은 틸리히 교수가 하버드대를 떠나 5년간 시카고대에서 강의를 계속한다고 밝혔다. 틸리히 교수는 78세까지 교편을 잡는 셈이다. 부러운 일이었다. 우리 사회는 회갑을 맞으면 인생을 마무리하는 나이라고 여겼다. 교수들도 ‘회갑기념논문집’을 출간하는 걸 자랑스러워하던 때다. 미국인이 ‘인생은 60부터’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20년쯤 지나 60대가 돼 일본을 몇 차례 방문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제2의 인생’, 즉 ‘60 이후의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화제였다. 대개 남성은 60세에 은퇴하기에, 이 시기에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70~80대에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일본 사회는 크게 3가지를 권고했다. 첫째, 공부를 계속하라고 했다. 둘째와 셋째는 독서와 취미생활이었다. 공부와 독서는 노후 정신적 성장과 행복에 큰 도움이 되며 취미활동을 제2의 인생 과제로 삼으면 성공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 나는 각각 숭실대와 서울대에서 퇴임한 안병욱 김태길 교수를 만나 ‘인생의 황금기’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우리 셋 모두 80세 넘게 살아왔는데, 계란 노른자처럼 인생에서 알찼던 나이대가 언제인지 궁금했다. 우리는 60세부터 75세까지라는 데 공감했다. 처음엔 50세부터라고 생각했지만, 일은 열심히 해도 인간적 미숙함이 적잖은 시기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공자의 교훈대로 60세부터는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 지도자의 품격을 갖출 수 있고, 사회인으로서 자신감도 가질 수 있다. 이 나이대에는 노력만 하면 여러 면에서 성장할 수 있다.
내가 76세 때 90세를 넘긴 정석해 연세대 교수를 모시고 지방으로 간 일이 있다. 정 선생이 문득 “가만있자, 김 교수 나이가 어떻게 되더라”고 물었다. 내가 나이를 답하니 그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좋은 나이올시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70대 시절을 회상하다 나온, 부러움이 담긴 고백이었다.
100세를 넘긴 지금 누군가 인생의 황금기를 묻는다면, 나는 75세 전후라고 답할 것이다. 노력만 한다면 80대 후반까지 연장할 수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87세까지, 김태길 교수는 89세까지 그랬다. 안병욱 교수는 92세 때 TV 인터뷰를 했다. 이런 모습이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희망이 돼야 할 것이다.
지금껏 세상적 관점에서 제2의 인생을 논했으나, 신앙인에게는 이런 인생관이 낯설지 않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과제는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며 작은 사랑이라도 나누려 노력하는 데 있다. 나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맡긴 일을 하기 위해 매일 아침 일어나 저녁에 잠드는 하루를 보낸다. 주님의 지게꾼으로서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사랑을 나눠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을 뿐이라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31) 허위·폭력 몰아내고 진실·사랑 가득한 사회로…
사회 만연한 사회악·질서파괴 범죄
가치관 상실이 문제의 근본 원인
법보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김형석 교수는 지금 우리 사회에는 “정직과 진실로 사회악의 병균을 제거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사진은 김 교수가 인문학 강연을 하며 준비한 친필 메모.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대학을 떠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학과 학문이 사회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회와 국민이 대학과 학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사회적 가치관과 정신의 후진성에 관한 책임을 외면한다면, 사회도 인문학에 관한 관심을 소홀히 할 것이다. 병든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의사와 같은 위치에 머물렀던 과거를 부끄럽게 반성해 보는 게 지금의 내 심정인지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사회에 만연한 사회악과 질서파괴의 범죄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가치관의 상실이다. 오래전부터 철학자가 윤리를 논하고 지금도 종교인들의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으나 정신적 빈곤에서 오는 사회악은 증대하는 실정이다. 지금 필요한 일은 정직과 진실로 우리 일상에 가득한 사회악의 병균을 제거하는 일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정직의 상실이 사회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다고 지적했다. “죽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자”고 호소했을 정도다.
지금 우리 현실은 어떤가. 정직한 지도자를 찾아보기 어렵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어른을 만나기 힘들어졌다. 거짓말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지 못한 책임을 나부터 인정하는 자세가 솔직한 태도일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묻지 않고 선입견이나 이기적 판단을 강요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같은 사실을 두고도 야당일 때는 악이라고 주장하다가, 여당이 되면 그걸 선이라고 바꿔 말하는 정치인도 있다.
허위를 진실로 조작하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선 인간을 수단 삼을 수 있다는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범하는 이들이다. 공산주의가 왜 버림을 받았는가. 허위를 진실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선한 목적이라도 허위 수단을 정당화한다면, 선한 목적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또 하나의 사회악은 폭력이다. 예로부터 이어진,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그중 하나다. 아동학대 사례는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 언어적·정신적 폭력을 가하는 집단은 어디에나 있다. 우려스러운 건 허위를 앞세우고 정신적 폭력을 일삼으면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다. 과오를 뉘우치기보다 정당화하는 집단과 정권이 있다는 게 문제다. 과거 나치 독일과 소련 정권, 우리 동포의 절반인 북한 정권이 그렇다. 종교적 사상의 위대함은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 하지 않는 데 있다. 잘못을 은폐할 뿐 아니라 선으로 위장하는 개인과 사회는 허위의 대가를 모면할 수 없다.
진실을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고 법보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남을 심판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인정하고, 인생은 짧지만 겨레의 역사는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하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의 허위와 폭력을 몰아내고 진실과 사랑의 역사를 개척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역경의 열매] 김형석 (32) 휴전선 밑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제2의 고향
양가 두 아들이 양구의 유지들과 협의… 새로 조성되는 용머리공원에 기념관 마련
2012년 12월 개관한 강원도 양구인문학박물관의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전경.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강원도 춘천 한림대학교에는 안병욱 숭실대 교수의 아들과 내 큰아들이 교수로 재직했다. 현 안동규 부총장과 김성진 철학과 명예교수다. 아마 철학과에 있던 내 아들보다 경영학과의 안 교수가 활동 분야가 더 넓었던 듯싶다. 춘천의 북쪽인 양구의 유지들과 협의해 안병욱 교수와 나를 위한 기념관을 장만키로 한 모양이었다. 양구의 유지들이 새로 조성되는 용머리공원에 문화적 공간을 남기고자 고민하다가 안 선생과 나를 떠올린 것 같다. 우리 둘은 90세가 넘었으나 실향민이어서 갈 곳이 없으니, 북한 땅에서 가장 가까운 휴전선 밑에 자리 잡도록 돕자고 합의를 보고 시작된 게 양구인문학박물관 내 조성된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이다.
2012년 4월, 뒤늦게 아들에게 소식을 들은 나는 작업이 진행 중인 양구를 찾았다. 이전에는 양구에 들러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새로 꾸며지는 공원에 2층 건물이 세워져 인테리어가 진행되고 있었다. 분에 넘치는 사랑에 고마운 마음이 솟아올랐다. 이제 양구는 안 선생과 나의 더없이 고마운 제2의 고향이 된 셈이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시인 화가 음악인 소설가를 위한 기념시설은 많아도 철학자를 기념하는 곳은 찾기 힘들다. 우리나라 역시 철학도를 위한 기념관은 처음이어서 참 송구스러웠다. 그것도 막역한 친구인 안 선생과 함께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해 5월 나는 양구 분들과 집에서 요양 중인 안 선생 댁을 방문했다. 이날 방문이 나와 안 선생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안 선생 병이 깊어지기 전에 개관식을 서두르려 했으나, 2시간 거리를 왕복하긴 무리가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 선생 댁을 떠날 때 “나 갈게요”라면서 손을 잡았더니, 안 선생도 예전처럼 밝게 웃으며 “또 봅시다”라고 답했다. 안 선생 아들의 배웅을 받고 나서 큰아들 차에 올랐는데, 왜 그런지 계속 눈물이 났다. 일 많은 세상에 나 혼자 남는 것 같았다. 그해 12월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개관식이 열렸지만, 안 선생은 참석하지 못했다.
2013년 10월 안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다. 김태길 선생이 간 지 4년 뒤다. 나는 두 날개를 잃은 새같이 됐다. 안 선생은 한때 나와 통화하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셋이 릴레이로 뛰고 있는데, 아마 김 선생이 마지막 주자가 될 거 같아. 누구도 순서는 모르지만….”
이 말대로 내가 마지막 주자로 남게 됐다. 안 선생 장례식에서 송별사를 맡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안 선생 옆에 잠들기 전에 조국의 통일 소식을 접하게 되면, 내가 제일 먼저 그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게는 또 하나의 짐이 지워졌다. 양구 분들을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돼야겠다는 책임이다. 첫 한 해 동안은 매달 철학의 집에서 강의했다. 이듬해에는 안 선생을 대신해 흥사단에서 강연했다. 지금도 양구군민을 위해 나와 내 제자, 후배 교수들이 강의를 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33) 안창호상·유일한상·인촌상… 값진 상 연달아 수상
90대 중반 이후 크고 작은 상 많이 받아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도 많을텐데…’
송구스러운 마음에 ‘의미있게 살자’ 다짐
김형석 교수가 2017년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열린 제12회 유일한상 시상식에서 수상하고 있다.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오래 살다 보니 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않을까 싶어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지성을 갖춘 예술가나 교수, 종교계 지도자가 명예욕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을 향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게 된다.
성결교의 정진경 목사에게 들은 이야기다. 정 목사는 친구지만 존경스러운 부분이 많은 분이었다. “목사님 설교가 참 좋은데, 은퇴하면서 설교집 한두 권쯤은 남기고 싶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정 목사는 “그러지 않아도 부끄러운 설교를 계속해왔습니다. 글로 남겼다가 훗날 독자들이 읽고 실망할 모습을 생각하면, 그렇게 어리석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대체로 명예를 앞세우는 사람은 더 소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평생을 노력해도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기 마련이며, 학문하는 사람은 자기가 완성됐다고 믿지 않는다. 하물며 성직자까지 명예를 탐낸다면 세상이 어찌 되겠는가.
대학에 적을 둔 사람들은 명예학위에 관심을 두는 편이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받으려는 사람도 있다. 때로 학위를 사고파는 일도 있다. 하지만 명예학위를 받을만한 사람이 아닌데 받으면, 주는 대학도 명예롭지 못하고 받은 이도 안 받는 것만 못한 경우가 생긴다. 내가 대학에 몸담았기에 이런 예를 들었지만, 사회적으로 확대하면 세상 문제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상 받기를 좋아한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예외가 없다. 상에 대한 욕망과 기대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상 받는 게 인생의 목적은 아니지 않은가. 진심으로 일하고 봉사한 대가로 주어지는 마음의 표시가 상이다.
나는 사회적 의미가 있는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상을 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본 적도 없다. 대학에서 정년퇴임할 때 정부가 준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90대 중반을 넘기고부터 크고 작은 상을 받기 시작했다. 인제대에서 주는 ‘인성대상’은 심사위원이었던 친구 안병욱 선생의 추천으로 수상했다. 그 외에는 시상기관에서 수상자로 결정해줘 받은 상들이다. 그저 송구스러운 마음이다. 업적도 없고 특별한 직책을 맡은 일도 없었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저 “오래 사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란 뜻에서, 남은 세월도 사랑이 있는 고생을 해 달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상을 받곤 했다.
2016년에는 ‘도산 안창호 기념상’을, 이듬해에는 유한양행에서 주는 ‘유일한상’을 받았다. 같은 해 연말에는 ‘인촌상’을 받았다. 내가 존경하는 세 분을 기리는 상을 다 받았기에 이분들의 유지를 이어가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돼야겠다고 다짐한다. 한림대의 ‘일송상’, 숭실대의 ‘형남학술상’, 연세대 문과대학의 ‘연문인상’도 받았다. 부족한 사람이기에 더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34) 내가 가르친 철학과 현실 사이 큰 간극에 회의
‘철학이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되나’ 늘 자문
정신적·윤리적 빈곤서 오는 사회문제 많아
철학 비롯한 인문학적 소양 무엇보다 절실
김형석 교수가 펴낸 철학책 초판이 강원도 양구군 양구인문학박물관의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에 전시돼 있다.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철학 교수로서 내가 가진 고민은 ‘철학이 과연 우리 사회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가’였다. 철학이라는 상아탑 주변에 공원을 만들고 그 안에서 우리끼리 즐기며 정신적 자족감을 채우려는 과오를 범하는 건 아닌지 회의가 들 때도 있다.
언젠가 신문에서 접한 이야기다. 친구 김태길 서울대 교수가 철학을 전공한 아들이 해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학위논문이 무엇이었다고”라며 물었다. 인식론이라고 답하자 아버지는 “그게 우리 사회에 무슨 필요가 있나”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전공한 윤리학에 비하면 아들이 전공한 인식론은 철학계에서 훨씬 더 전통적인 과제다. 철학계에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현실감각으로는 ‘선진국 철학계에서 인식론은 학자 간 주요 과제지만, 우리 사회에서 무슨 도움이 되며 또 누가 공감해주는가’란 고민스러운 자기반성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철학계 대표적 학술지인 ‘철학’을 받아본다. 관심 있는 부분은 살펴보며 후배 학자의 노고에 고마움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이런 논문이 고뇌를 거듭하는 젊은 학생과 지성사회에 무슨 도움을 주고 있을까’ 자문할 때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가르친 철학과 사회적 현실 사이에는 큰 정신적 간극이 있는 것 같다. 마치 한강 이북에 있는 기관차가 한강 이남의 객차에 “여기 우리가 있는 곳까지 오라”고 말하는 것 같은 거리감을 느낄 때가 있다.
기관차가 직접 객차가 있는 곳에 가야 한다. 건너올 다리가 없으면 인문학 등 다른 학문의 협조를 얻어 다리를 건설하는 책임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기관차인 철학자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 임마누엘 칸트가 독일 철학을 개척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철학 문제를 제시하고 해답을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철학도는 주변 지성인이 공감하고 접근할 수 있는 우리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해답을 줘야 한다.
요즘 들어서는 대학보다 기업이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필요성을 더 강조하는 것 같다. 기업체 지도급 인사들이 회사 운영에서 정신적 가치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정신 및 윤리의식의 빈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일 것이다. 비슷한 예는 다른 데서도 보게 된다. 지성적 국민의 안목에서 보면, 국회의원에게 가장 결핍된 건 ‘인문학적 소양’이다.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아야 할 집단이기주의적 사고와 가치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회든 이기적인 목적으로 편 가르기가 성행하면 사회악이 증대될 뿐이다.
인문학적 사유는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 등 사회의 암적 요소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한다. 열린 사회로의 가치관 확립에 기여하는 것이다. 철학은 언제나 형이상학적 사유를 견지해왔다. 모든 사물과 현실의 근원적 과제를 탐구하려는 의도에서다. 모든 문제를 더 넓게, 멀리까지 관찰하려는 세계관도 수립해왔다. 인문학적 사유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우리 사회에 있다면, 창조적 가능성과 자유로운 희망의 역사를 언제든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35) 코로나로 사회 곳곳 문제… 기독교 정신 살아나야
교회주의 빠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 건설, 신앙 바탕으로 모범 보이며 희망 전하길
김형석 교수는 “기독교의 권위는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교회에 권위가 생긴다”고 말한다. 사진은 강원도 양구인문학박물관 내 김형석실에 재현된 김 교수의 서재 모습.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1919년 3·1운동에선 기독교인이 지도자 역할을 했다. 신앙적 양심으로 민족을 위해 일한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 선생이 대표적이다. 기독교가 국가의 희망과 미래를 위해 존재했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교회가 사회공동체로서 기본마저도 유지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사회에서 지도력을 잃은 지도 오래다. 기독교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100년 후 한국 기독교는 희망이 없겠다는 염려가 든다.
구약성경 시편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산 다윗의 고백은 자신부터 시작해 가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간구로 이어진다. 그러나 민족의 울타리를 넘진 못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란 표현이 나온다. ‘우리’라는 표현으로 민족·국가 단위의 신앙을 인류 전체로 확장했다. 교회의 사회적 영역이 세계가 된 셈이다.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해 인류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게 기독교 정신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가 민족 종교에 머물렀다면 인류 역사와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족 종교는 계명과 율법에 매여 과거를 지키는 데 힘쓰기 마련이다. 미래 창조의 역사적 종교, 이것이 예수의 뜻이고 우리에게 부탁한 바다. 이 책임을 맡은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적 존재가 교회인 것이다.
성경 속 예수는 교회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했다. 기독교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하나님 나라처럼 바꾸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100여년 전 이 땅에 온 서양 선교사도 교회만 짓지 않고 대학 등 교육기관과 병원을 곳곳에 세웠다. 인간애를 베풀고 사회에 봉사하는 게 기독교 정신이라고 여긴 것이다.
반대로 기독교가 교회주의에 빠지면 모든 사회가 교회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역사와 사회 속에서 판단 받을 수밖에 없다. 교회가 기독교 정신을 살려 우리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면 100년 뒤에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위해 일하는 이들로만 교회를 채운다면 유감스런 이야기이지만 100년 뒤 문을 닫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권위는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교회에 권위가 생긴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며 우리를 사랑했는데, 교회가 이웃 사랑을 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부활한 예수는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3번 물은 뒤 “네 양을 치라”고 말한다. 사랑의 사명을 부여한 것이다. 기독교는 사명의 종교다. 사랑의 사명의식이 없다면 교회도 기독교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은 지 1년이 넘었다. 전염병으로 사회 곳곳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에 모범을 보이며 희망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늘어나길 바란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36) 한반도 통일되려면 북한 동포 개방사회로 이끌어야
남북 교류 활성화로 장벽 없애야 가능
기독인은 북한 동포 인권에 관심 갖고
존엄성 지키며 통일되도록 노력해야
김형석 교수는 “북한 동포를 개방 사회로 이끌어 인도주의가 구현되도록 힘쓰는 것”이 기독교적 통일방안이라고 봤다. 사진은 강원도 양구인문학박물관에 전시된 김 교수의 사진.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더 늙기 전에 고향 북녘땅에 다녀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두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월드비전 이사로 활동할 때 방북 기회가 있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소속으로 평양을 방문해 칠골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대표기도를 하기로 했지만, 출발 3~4일 전 독감에 걸려 가지 못했다. 이후 평양과학기술대학 창립개교식에도 초청받았지만, 정치적 문제가 생겨 행사가 취소됐다. 결과적으로는 나를 위한 사랑의 섭리였다고 믿는다. 돌이켜보면 신체적 고향을 뒤로하고 진실과 사랑이 있는 정신적 고향을 찾아온 게 내 인생의 길이 아니었는가 싶다.
한반도 통일의 날은 언제 올 수 있을까. 통일은 대한민국 국민과 북한 동포가 하나로 합해야 이뤄진다. 분단의 세월이 길어져 대한민국 국민과 북한 동포의 거리가 지금처럼 멀다면 통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동포 사이엔 장벽이 없다. 잘못된 정권 탓에 동포가 분리돼선 안 된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북한 만큼 자유 없이 국민을 노예화한 사회가 없다. 세계는 그 책임을 북한 정권에 물어야 한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두 가지다. 북한 정권이 바뀌거나, 북한 정권을 배제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전에는 북한 정권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갔다. 핵무기를 만드는 북한의 전략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북한 사회가 자유 사회와 비슷해지면 자연히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북한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 비핵화가 이뤄지면 경제적 고립에서 벗어나 남북 교류가 활성화될 수 있다. 지금 정부는 북한 정권과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북한 정권이 바뀌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100년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북한 동포의 인권에 관심을 두고 이들의 존엄성을 지키며 통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통일 방법론의 순서는 이렇다. 첫째, 인적 교류다. 과거에 부분적으로 이뤄진 적이 있지만, 북한의 반대로 다시 문이 닫혔다. 둘째, 문화 교류다. 문화는 서로 공통점이 있는 분야다. 그다음이 경제 교류다. 정치는 맨 마지막이다. 경제 교류는 일견 막연해 보일지 모른다. 간단히 말해 북한이 중국처럼 경제 개방의 길을 택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정권이 무너질까 봐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 전통 및 사상과 정반대인 유물사관에 기초한다. 기독교를 거부하면서 생긴 사상이다. 기독교를 거부한 것은 결국 인간애와 사랑을 거부한 것이다. 세계는 열린 공존 사회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나 북한은 폐쇄 사회를 고수하고 있다. 사랑이 없는 정치체제 하에서 북한 동포는 아직도 남한 사람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해방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가 스스로 해체를 면치 못한 것은 폐쇄 사회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앞으로 개방 사회를 택할 수밖에 없고 민족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에 흡수될 것이다. 북한 동포를 개방 사회로 이끌어 인도주의가 구현되도록 힘쓰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선택이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37) 코로나로 힘든 시기…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 절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말씀처럼 서로 배려할 때 희망의 공동체 가능
김형석 교수는 “고통을 나눌 줄 모르면 더 큰 고통을 겪고, 기쁨을 함께할 줄 모르면 기쁨을 찾을 수 없다”며 코로나19 시대 공동체의식을 강조했다. 사진은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 삼익아트홀에서 열린 한섬공동체 포럼에서 강연하는 김 교수. 강민석 선임기자
100년이란 긴 세월을 살다 보니 우리가 한 개인의 일생이나 사회·민족의 역사를 너무 짧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느낀다. 한 청년이 미래를 설계하려면 20~30년은 내다봐야 하고 민족이나 국가의 장래를 보려면 적어도 30~50년, 멀리는 100년까지 봐야 한다.
1년간 겪어왔고 앞으로 1년 정도 더 겪을지 모르는 코로나19의 어려움은 개인으로 끝나거나 한 민족·국가의 역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생기면 오늘이나 올해, 이렇게 짧게 보지 말고 최소 10년은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코로나19에 관한 역사적 평가도 아마 50년쯤 지나야 정확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잖지만, 이럴 때 중요한 자세는 시련을 어떻게 이겨내 성장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고생 없이 편히 살기를 원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렇게 사는 개인이나 민족은 발전하기 힘들다.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 발전과 성장이 있고 역사의 교훈이 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문제이니 국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잘 대처할지를 고민한다면 더 희망적인 발전이 있으리라고 본다.
코로나19 사태에서 개인은 무엇을 배워야 할까.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주변인에도 치명적이다. 이를 보며 우리는 ‘사회인으로서의 나’ ‘이웃과 더불어 사는 나’ ‘시대의 고통을 같이 겪는 나’의 자세를 배운다. 이게 바로 공동체 의식이다.
최근 다중이용시설에 출입하는 이들, 미인가 기관에서 집단 교육하는 이들로 인해 코로나19가 확산되고 있다. 감염에 취약한 요양원이나 병원의 노약자를 고려하지 않는, 공동체 의식을 무시하는 처사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기독교기관이 공동체 의식을 무시하는 행동을 한 건 대단히 잘못이라고 본다. 종교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웃과 사회에 고통을 주는 건 신앙이 아니다.
최근 보도를 보면 코로나19 사태 수습에 정치 인생의 성패를 걸고 이를 이용하려는 정치인이 적잖다. 반면 소박한 우리 국민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려 애쓰고 있다. 고통받는 이웃을 돕기 위한 개인 기부가 예전보다 늘었다고 한다. 고통과 기쁨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복 받는 사람이다. 복을 나만 가지려 하거나, 너는 불행해도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사람은 버림받기 마련이다. 고통을 나눌 줄 모르면 더 큰 고통을 겪고, 기쁨을 함께할 줄 모르면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기독교는 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해왔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정의와 사랑, 두 가지 가치로 요약된다. 요즘 같은 위기일수록 가족과 교회, 민족과 인류가 서로 사랑하며 상호 인격을 높여준다면 희망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
***[역경의 열매] 김형석 (38·끝) 진실·사랑·희망 전하려 애썼던 삶 헛되지 않기를
사회적 문제 생기면 단편만 보지 말고 시야 넓혀 역사적 맥락으로 바라봤으면
김형석 교수는 “내 이야기를 기다리는 청중이 있고 그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글과 강연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100세 즈음 촬영한 사진.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올해 우리 나이로 102세를 맞았다. 지난해에도 글을 쓰고 강연하는 일을 계속해 왔다. 내 이야기를 기다리는 청중이 있고,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때까지는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다. 살아 보니 노력한다면 정신력은 늙지 않는 것 같다. 이제는 내 정신력이 점점 힘들어하는 몸을 지고 이끌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의 처음인 고향을 떠나 나그네가 된 지 75년이 넘었다. 그간 육신이 걸어온 길이 험준했지만, 정신적 여정은 더 괴로웠던 것 같다. 그래도 여러 사람의 사랑과 격려가 있었고, 소망스러운 책임이 있었기에 주어진 짐을 지고 먼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역경의 열매’를 연재하며 한 개인의 이야기로 100년 가까이 지나온 역사를 소개했다. 우리 민족 모두의 아픔과 문제를 함께 겪어왔기에 내 이야기가 사회나 교회, 특히 기독교 문제에 있어 많은 이의 공감을 얻지 않았나 싶다. 이번 연재로 여러 사회 구성원과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점에 만족하고 싶다.
나는 강연이나 설교할 때도 항상 결론을 직접 내려주지 않는다. 대신 문제를 던진다. 내가 내린 결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그저 내가 제시한 문제를 듣고 그 해결책이 내 생각과 같으면 성공인 것이다. 친구 안병욱 교수는 강연할 때 결론을 내려준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도 결론부터 내리고 강연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강연을 듣는 이들이 결론을 내리게 한다. 문제는 스스로 풀어야 자기 것이 된다. 내가 풀어준다고 해서 무조건 답은 아니다. 이번 연재도 이런 점에서 사회나 종교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국민일보는 사회 정치 기독교 등 여러 분야를 다루는 종합일간지로 특히 기독교인에게 많이 읽히는 것으로 안다. 바라는 바가 있다면 기독교와 관련된 세계 뉴스를 여럿 보도해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기독교인을 길러냈으면 하는 것이다. 한 가지 욕심이 더 있다면 역사적 맥락에서 지식을 전달해 달라는 것이다. 지식을 전할 때는 한 토막 사건만 조명하기보다는 역사적 맥락을 감안해 전달하는 것이 좋다. 우리 사회에선 문제가 생기면 역사적 맥락에서 이를 바라보는 이들이 드문 편이다. 시야를 넓히고 역사적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늘어났으면 한다.
지금껏 잠들기 전 일기를 쓴다. 일기 속 지난날을 돌아보며 무엇이 부족했는지 반성해본다. 그러면서 깨닫는 바가 있다. 나를 위해 산 삶과 일에는 남는 게 없다. 그러나 가족과 이웃, 직장에서 만난 이들과 더불어 해온 일과 삶은 행복했다. 사회와 역사, 민족과 국가를 위해 그간 쏟아온 정성이 우리 겨레의 희망이 됐으리라 믿는다. ‘일을 시작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완성하는 분은 하나님’이란 말이 있다. 진실과 사랑, 희망을 전하려 했던 일의 열매는 하나님이 거둘 것이다. 뿌려진 씨앗이 헛되지 않았으면 감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