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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53
7월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연중 제1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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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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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iFmtyID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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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대는 존귀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메시아로서 다양한 모습 가운데 가장 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절망가운데 앉아있는 한 인간을 일으켜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살기등등한 살인마들, 당장이라도 던지려고 움켜쥐고 있는 큰 돌, 그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져 있는 한 가련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자칫 잘못 끼어들다가는 같이 돌팔매질당할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목숨까지 내거십니다. 당신 온 몸으로 그녀를 보호하시며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오도록 일으켜 세우십니다.
절대 해서는 안 될 나쁜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따가운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세관에 앉아있던 한 측은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하류인생에 대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조직폭력배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취미는 살상이요 특기는 공갈협박이었습니다. 잘못 건드리다가는 뼈도 못 추리는 상종하지 말아야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리에게 다가가십니다. 새 인생을 제안하십니다. 그를 암흑의 세상에서 광명의 세상으로 건너오게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짧은 공생활 기간 내내 틈만 나면 하셨던 일이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이었습니다. 심연의 고독에 힘겨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살아있지만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하고 점점 죽어가고 있던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부여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예수님 사도직의 첫 단계는 인간 각자가 지니고 있던 고유한 가치를 되찾아주는 일이었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대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새롭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그대의 삶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그대의 인생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그대는 존귀합니다. 그대는 일어서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분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에 주저앉아 울고 있습니다. 울며 애통해하는데 그 누구 하나 위로하는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 그분의 사상, 가치관, 행동방식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손을 내밀어야겠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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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스승이 없는 사람은 나침반 없는 선장과 같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FGbUTdQS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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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영향을 받는 이들은 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제자들은 우리 자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인리히 힘러’란 독일 사람은 딸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습니다.
“언제나 품위 있고 용감하며 관대하게 살아야 한다.”
하인리히 힘러는 1941년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를 지휘하고 유대인 대학살의 실무를 담당하는 주동자였습니다. 그가 1943년 나치 친위대에게 한 연설에서는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을 절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음은 그 연설의 내용 일부입니다.
“나치의 친위대들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직하고 품위 있고 충실하며 동지애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동지들에게만 해당합니다. 러시아인이나 체코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는 아무 상관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다른 민족의 아이들을 납치해 우리를 위한 노예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독일인들은 이 세상에서 인간 동물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압니다. 우리 고유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그들에게 결코 희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짐승들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다른 민족들을 짐승 취급하는 아버지를 스승으로 둔 딸은 잘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와 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들을 동물처럼 이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까요? 자신이 배운 것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우리는 또한 누군가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훌륭할 제자일수록 또한 누군가의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어떤 스승이 되느냐는 내가 누구를 스승으로 삼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전에 있었던 본당 젊은 부부가 잠깐 찾아와 함께 식사한 적이 있습니다. 5살,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두 아들을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큰아이는 남자답게 생겼고 둘째는 약간 여성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보는 순간부터 큰아이가 더 착해 보였습니다. 부모님들도 첫째가 더 착하다고 했습니다. 식사할 때도 둘째는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습니다. 아빠가 안고 있었는데 아빠가 밥을 먹을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부족하게 받은 것입니다. 밥 먹다, 돌아다니다, 울다, 웃기를 반복했습니다. 반면 큰아이는 장난감 하나 가지고 얌전하게 놀았습니다..
부모가 말해주었습니다.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 부모는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서 약혼자 주말 봉사까지 하였습니다.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54일 기도를 바쳤고 그 기도가 끝나는 날 아이가 들어섰으며 그 이후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함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반면 둘째를 가질 때는 살림이 어려워져 아내까지도 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아기를 위해 기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아기를 위해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사랑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육체적으로 먹이기 위해 영적인 돌봄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을 때 그렇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하나만 알고 그것만을 위해 힘을 쓸 때 진정으로 아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지 않게 하는 분이 지금 나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나의 스승이 누구냐에 따라 나에게 배우는 이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오늘은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이탈리아 중부 지방 누르시아에서 태어난 성인은 480년 최고의 스승이 몰려있는 로마에서 공부하기 위해 올라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들에 환멸을 느껴 수비아코라는 산속으로 들어가 동굴 속에서 3년 동안 성경만 읽습니다.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규칙으로 수도원을 세웁니다. 이 수도원은 서방 수도회의 시초가 된 것을 넘어서 유럽 전체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1500년이 넘게 그분의 가르침을 따른 제자들은 숫자를 가늠할 수 없게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승이 있다는 것은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차피 누군가의 선장이 되어야 한다면 나의 나침반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유대인들 속담에 “길 가다가 넘어져 책과 옷이 더럽혀지면 옷보다 책부터 먼저 닦아라.”란 말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나의 스승이 누구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나에게 주어진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의 스승을 명확히 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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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24-33 : 육신만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25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에 우리가 그분과 같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자신을 스승이나 주님보다 더 높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하시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다(요한 15,15 참조). 그들이 예수님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제자들에게는 더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자들의 위협이나 모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이 심판 날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나오는 “어두운 곳”, “밝은 곳”, “귓속말”, “지붕 위”(27절)라는 말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둠이고 밤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높은 곳에서 선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28절)고 하신다. 육체적으로는 죽일 수 있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분은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28절)이시다. 이 멸망은 묵시록에서 “두 번째 죽음”(20,6)이라고 하며 이 죽음은 지옥에서 겪게 될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새는 창조물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것이다. 아주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그 참새조차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알고 계시다는 뜻이다. 이렇게 미물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알고 계시겠는가?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섭리로 돌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참새의 생명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보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절)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도 아무 소용없다.
고백의 뿌리는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은 믿음의 열매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한, 뿌리는 가지나 잎을 만들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라고 하셨다. 마음의 믿음이 없다면 입으로 고백할 수 없으며, 마음의 믿음도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하여 입으로 늘 고백의 씨앗을 뿌리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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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많은 경우에 경외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은 “영광과 자랑”이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물”이며 “지혜의 뿌리”로 표현됩니다(집회 1장 참조). 반면에 다른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근심은 걱정을 낳고 걱정이 심해지면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세상에서 오는 두려움은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두려움이라는 같은 말이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다릅니다. 같은 두려움이지만 다른 두려움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위축시키고 겁먹게 하는 두려움이지만, 다른 하나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기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 약함은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의탁하게 합니다. 약한 것이 문제라기보다 그것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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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에 대한 세상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비슷한 사례를 통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1918년에 오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이 조금 넘었는데 1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인구가 1억 명 이상 줄었다고 합니다. 스페인 독감 이후에 나타난 각국의 현실은 인건비의 상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젊은이가 많이 사망해서 그만큼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이민정책의 변화라고 합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은 해마다 이민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스페인 독감이 발생한 후에 이민자는 2만 명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이동을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이민자를 제한하는 정책을 더 강하게 펼치겠다고 합니다. 난민의 이동도 어려울 것입니다. 무역에서도 보호무역이 대두되었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무역으로 인한 독감의 전파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보호무역을 강화하겠다고 합니다. 관세를 늘리겠다고 합니다.
100년이 지났고, 우리는 코로나19의 팬데믹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선택을 계속 할 수도 있습니다. 이민을 제한하고, 국경을 닫고, 보호무역으로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경제적인 손실이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지구촌은 일일 생활권이 되었고, 무역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있습니다. 우리 몸의 혈관이 막히면 건강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됩니다. 혈관을 열어주지 않으면 큰 병이 생길 수 있고,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혈관이 막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막힌 혈관은 꼭 열어 주어야 합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치료제와 백신이 나올 것입니다. 긴급재난지원으로 막힌 경제의 혈관을 열어주었습니다. 유럽연합은 기금을 모아서 코로나19로 국가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에 무상으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민을 제한하고, 국경을 닫고, 보호무역으로 전환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연대하고, 협력하여 막힌 경제의 혈관을 열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대책과 정책이 국제적으로 모범이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랜 박해를 겪었던 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얻었고, 당시 세계의 최강대국인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물들어 올 때 배를 띠운다는 말처럼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행정, 전례, 제도는 앞선 로마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팍스로마나(Pax Romana)의 시대는 곧 팍스카톨릭카(Pax Catholica)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고, 교회가 늘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제도적인 교회는 발전하고, 성장하였지만 은사의 교회, 성령의 교회, 영성의 교회의 모습은 조금씩 퇴색되어갔습니다. 오늘은 수도회 창설자인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기념일입니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는 교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제도적인 교회에는 반드시 은사와 성령 그리고 영성이 함께 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새는 두 개의 날개로 하늘을 날아갑니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원하는 방향으로 날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교계제도와 영성입니다. 교회가 세속의 권력에 의지할 때, 교회가 양적인 성장에만 몰두할 때, 교회가 영적으로 무기력해질 때마다 수도회는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이것이 2000년 가톨릭교회에 함께 한 수도회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교계제도를 통해서 조직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영성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영성은 자유롭습니다. 교계제도의 ‘틀’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배움이 적은 사람도,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도 영성이 깊을 수 있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나이가 많아도, 여성이어도, 남성이어도 영성은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우리의 몸은 혈관을 타고 피가 흘러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교계제도는 영성이 함께 해야 하느님나라를 향하여 나갈 수 있습니다. 영성이 없는 교계제도는 활력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교계제도와 함께하지 않는 영성은 자칫 이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베네딕토는 그 이름대로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의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 생활을 추구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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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지 말아야 할 말들>
마태오 10,24-33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말들>
지쳐 쓰러져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전에는
할 만큼 했어
라는 말은
하는 것이 아니야
온통 가로막혀
한걸음 아니 반걸음조차
내딛을 수 없기 전에는
여기까지 온 게 어디야
라는 말은
하는 것이 아니야
마지막 숨을 거두며
살아서는 넘을 수 없는
선을 넘기 전에는
이게 나의 한계야
라는 말은
하는 것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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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백남국 요한 신부님]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0,24-33)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피정을 갔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며 바닷가를 거니는데 한 녀석이 질문을 합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을 본 적이 있나요?”,
“아니.”
잠시 침묵 후, 그냥 있으면 신부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아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 분이시란다, 바람처럼.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지. 선선한 바람이 불 때 얼마나 기분이 상쾌하니. 그처럼 하느님이 우리 가까이 오시면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지. 행복한 마음이 들거든 하느님께서 너를 휘감고 지나가시는 것이라 생각하렴.”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몸을 비틀면서도 묵주를 들고 내 뒤를 따라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행복했습니다. 행복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제 말대로 하느님께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시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이 하느님을 내 곁에 모시고 온 것이겠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그냥 누군가가 사랑스러울 때, 마음이 평화로울 때, 기분이 상쾌할 때가 있으면 ‘아, 하느님께서 나를 스쳐 가시는구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행복한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물론 어떨 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처럼 하느님을 느끼기 힘든 때도 있겠죠. 그러나 뜨거운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선선한 바람은 불기 마련입니다. 조금만 잘 참아보십시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두시는 주님께서 곧 당신을 스쳐 지나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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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인간이 하느님의 거룩함 앞에 서면 두 가지 원초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황홀감’과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현을 목격한 이사야가 그 황홀경에 빠지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여기며 두려워하는 모습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자신의 근원인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있다는 죄의식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거룩함을 마주하기에 부끄러운 인간의 속됨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자신이 숨기고 있는 것이 드러날까 두려워 사람들을 기만하고, 자신을 숨기며, 오히려 남들의 죄악의 실상을 파헤치고 폭로하여 그들보다 낫다는 위선의 그림자에 숨어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이 진리를 이길 수 없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숨기려는 죄악의 현실을 뜻하지 않은 순간에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의 어리석은 자만심과 교만을 꺾으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십니다. 부끄러운 죄를 숨기기보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 하느님의 완전함과 거룩함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의 용서를 청하며, 하느님의 도구로 자신을 써 달라는 보속의 삶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내 신변의 위협 때문에, 내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행여 누가 볼까 신자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가는 모습 속에 우리의 속됨이 드러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현현 앞에 죄인임을 느끼면서도, 그분의 부르심에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하느님의 현존 앞에 서는 연습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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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UCLA 브루인스팀을 이끈 농구 코치 존 우든은 14차례나 내셔널 챔피언십 타이틀을 거머쥐었습니다. 이 기록은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할 정도로 대단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존 우든 코치를 마법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코칭 비법은 무엇일까요? ‘기본 원칙에 충실하라’라는 것입니다. 매 시즌 우든이 라커룸에서 처음 하는 일은, 자기 선수들에게 발에 물집이 잡히지 않게 양말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선수라면 웃어넘길 가르침이지만 이를 통해 그의 선수들은 발에 물집이 거의 없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다른 선수들의 발이 화끈거릴 때 그의 선수들은 시작할 때처럼 쌩쌩했습니다.
기본 원칙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나갈 때, 자신이 원하는 것도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특별한 결과만을 원합니다. 단적인 예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상상만 합니다.
주님의 기본 원칙은 ‘사랑’입니다. 이 원칙을 철저하게 따르신 주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그 밖에 자신의 어려운 문제 해결에 대해서만 기도만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세상이 아닌 하느님임을 분명히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은 육신을 죽이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영혼은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어떤 영혼이나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가치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세우신 기본 원칙이 중요합니다. 하찮아 보이는 참새라도 함부로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사랑 넘치는 하느님이시기에, 참새보다 더 귀한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인간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진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는 세상 안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철저하게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면 나머지 원하는 모든 것이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안다고 증언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전혀 모르는 사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증언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할 때, 주님의 기본 원칙인 ‘사랑’을 항상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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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곡>
어머니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이제까지 제가 출판했던 책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책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계시더군요. 정작 이 책들을 쓴 아들은 부끄러워서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머니는 아들이 쓴 책이라고 잘 보관하고 계셨습니다. 이 책들을 펼쳐보다가 눈물이 터졌습니다. 20년 전에 출판했던 책이야 어머니가 그래도 젊었을 때였으니 책 읽는 것이 힘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80이 넘어가면서 시력이 좋지 않아졌으니 책 읽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그런데도 책에는 정성껏 그리고 꼼꼼하게 다 읽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이 잘 보이지도 않고, 또 눈도 매우 아프셨을 텐데…. 아들 책이라고 억지로 읽으시려고 했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책 글씨 좀 더 키울걸…. 삽화를 더 많이 넣을걸…. 이제 후회하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이 책이 어머니께 또 다른 고통을 드렸음을 깨닫습니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늘 아픕니다. 그러나 그 아픔도 기뻐합니다.
자식 역시 부모 때문에 늘 아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아픔으로 괴로워합니다.
이 모습을 하느님께도 똑같이 보이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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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멋지고 아름다운,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
-성 베네딕도 예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주님을 경외하여라!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9-11)-
바로 그 좋은 모범이 성 베네딕도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자랑은 참 아름답고 깊은 전례에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부족한 강론을 많이 보완해 주는 고마운 전례입니다. 교보문고에서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말을 바꿔 ‘신자가 전례에 참여하고 전례가 신자를 만든다.’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전례화란 말도 있듯이 아름다운 전례 은총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줍니다.
‘늘 옛스럽고, 늘 새롭게(ever old, ever new)’ 하는 전례 은총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게 생각되는, 지금도 생생히 살아 있는 듯이 생각되는,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유럽의 수호자이자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의 사부 성 베네딕도입니다. 이 모두 기억이 있어 가능하니 기억의 은총, 기억의 힘이 참 고맙고 위대합니다. 미사 입당송에 이은 어제 저녁 성무일도 찬미가와 후렴을 노래하며 저절로 나온 “참 멋지고 아름다운,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 이란 고백을 그대로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베네딕도는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생활을 추구하였네.”-입당송
-“스쳐가는 세속의 행락등지고, 주님 찾는 보람을 한껏 누리며
천사들과 한노래 부르는 영복, 끝이 없어라.”-찬미가 2절
-“사부 성 베네딕도는 세상의 명예보다 그 고통을 바라고, 주를 위하여 수고하기를 더 원하셨도다.”-후렴1
-“주의 복된 증거자는 천사다운 생활로 세인들에게 선업의 거울이 되셨도다.”-후렴2
-“모든 의인들의 얼로 충만한 베네딕도는 모든 수도 가족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후렴3
참 아름다운 찬미가 셋 후렴들은 그대로 성 베네딕도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1500년전 성인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살아 현존하는 분처럼 느껴지는 성인입니다. 참 사람 만나기 어려운 작금의 시대에 참 좋은 멋진 분, 참 아름답고 거룩한 참 사람 하나 만나는 기분입니다. 참 일생일대의 크고 중요한 일이 참사람의 내가 되는 것입니다. 기념, 기억할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 분발 노력하여 성인이 되라고 있는 성인축일입니다.
특히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대한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소개를 바탕한 성무일도 독서후 계응송도 성인의 면모를 잘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슬기로운 절제와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했도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도다.”
어떻게 하면 성 베네딕도처럼 참 멋지고 아름다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런지요? 바로 오늘 두 독서와 복음이 답을 줍니다. 주님을 닮은 성 베네딕도처럼 우리도 주님을 닮아 참 멋지고 아름다운,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고전古典같이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첫째, 지혜의 삶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정말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 최대의 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의 죄, 무죄의 병, 무지의 악입니다. 모든 불행도 비극도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바로 무지에 대한 처방이 지혜입니다. 그러니 지혜를 사랑하십시오. 지혜의 연인이 되십시오. 참 멋지고 아름답고 거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잠언도 주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슬기에 네 마음을 모은다면. 네가 예지를 부르고 슬기를 향해 네 목소리를 높인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지혜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선사되는 참 좋은 선물이 지혜요 슬기요 지식입니다.
둘째,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사람은 지혜의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콜로새서 말씀도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그리스도를 닮아 사랑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평화를 사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사랑의 찬미가를 바칩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감사와 사랑은 그대로 이웃에게로 흘러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합니다.
셋째, 섬김의 삶입니다.
사랑의 섬김입니다. 섬김의 겸손, 섬김의 환대, 섬김의 아름다움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가 바로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섬김의 중심에 섬김의 모범인 주님이 계십니다. 참으로 흙처럼 겸손히 섬길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하십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주님은 우리 한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현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멀리 밖에서 주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섬기시는 주님을 찾아 만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성은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뿐이요, 직무와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참 영성의 잣대도 섬김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참 멋지고 아름답고 거룩한 성 베네딕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람인 성 베네딕도입니다. 우리 필생의 과제가 지혜와 사랑, 섬김의 예수님을 닮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그대로 닮은 성 베네딕도 아빠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지혜의 사람, 사랑의 사람, 섬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끝으로 길다 싶지만 오늘 복음 전 부속가를 나눕니다. 라틴어 원문이든 우리 글이든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성 베네딕도 예찬입니다.
-“새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대축일
성총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미음속에 울리네
동쪽길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성조 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태양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과 같도다
작은 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 건진 성 분도를 엘리사 예언자로 알도다
무죄 덕행 요셉같고 장래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그의 생각 지극하여 예수님의 영복소에 우리 인도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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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두려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9장을 보면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 15,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 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 10,31)고 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분명 ‘아니오’ 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 때에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 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 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례명을 받은 선택받은 신앙인의 품위를 지켜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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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물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예수님은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을 명확히 가르십니다.
죽음을 포함해 육신에 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는 본능적, 감정적으로 위협이 될 수는 있으나 영원한 생명을 믿는 이에게는 극복해야 할 피조물일 뿐이지요. 육신과 영혼 모두를 소유하신 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경외하고 사랑해야 할 분이시지요.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기사입니다.
"주님을 뵈었는데 ...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 날개 ...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이사 6,1-2)
이사야는 환시 중에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 주위에는 사랍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모시는 존재로 알려진 어떤 혼합적 존재라 하는 사랍들의 행동에 머무릅니다.
여섯 날개 중 둘은 얼굴을 가리는데, 감히 주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지극한 경외심을 표현하지요. 날개 둘은 발을 가렸다는데, 고대 중동 언어에서 발은 성기를 완곡하게 표현한다고 하네요. 즉 주님 앞에 감히 내놓기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는 것입니다. 나머지 두 날개는 온전히 날아다니는 제 역할에 충실합니다. 이는 주님 주변을 맴돌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과 경배를 드리는 모습을 상징하지요.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들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거룩한 주님의 현현 앞에서 예언자가 두려움에 싸여 외칩니다. 아마도 그 순간 그에게는 일생을 거쳐 행한 죄스런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을 겁니다. 이 은혜로운 주님과의 만남의 순간, 아무리 예언자지만 그 역시 나약한 인간인지라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불결함을 바라봅니다. 부정한 이, 죄인은 주님을 뵐 수 없으니 그에게는 남은 것은 죽음 뿐입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이사 6,7).
예언자의 두려움을 감지한 사랍이 "제단에서 타는 숯"을 가져와 그의 입에 댑니다. 주님을 뵈온 이 영광의 순간은 자기 죄악에 자지러져 무너질 때가 아닌 거지요. 숯은 불과 열기로써 그의 "더러운 입술"을 정화합니다. 이 행동은 매우 의미심장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제단에서 타는 숯"은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떠올려 줍니다. 그분은 불타는 사랑으로 스스로를 바치셔서 백성의 죄를 씻으신 분이시지요. 이 희생 제사는 매 미사 때마다 나눠지는 성체와 성혈이고, 또 말씀입니다. 그분은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을 바쳐 우리를 정화하고 또 성화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복음 속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당신이 모든 걸 감내하고 구원하신다는 보증이 담겨 있습니다. 불결한 우리 입에 닿아 다시 깨끗하게 하는 숯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예언자에게 하셨듯, 그분은 우리를 쓰시기 위해 우리 두려움의 근거인 자기 비난과 자기 검열의 죄의식을 태워버리십니다.
"두려워하라!"
그리고 예수님은 오직 하느님만을 경외하라고 하십니다.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난 경외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벌을 주기 위해 잘못을 포착하려 주시하는 냉혹한 심판관이 아니라 참새 한 마리의 안위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런 분께 우리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사랑으로 정화된 예언자는 조금 전과 백팔십 도 다른 태도로 변화됩니다. 영예로운 만남 앞에서 자기의 부정과 불결함에 두려워 떨던 이가 주님께 먼저 파견을 청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비로소 제 질서를 찾은 겁니다. 실패와 몰락, 상실과 소외, 박해와 죽음에 대한 인간적 두려움은 주님을 가리고 제 죄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들지만, 하느님 사랑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를 사랑의 투사로 변모시키지요.
이제 복음 속 제자들도 독서의 예언자처럼 힘 내어 길을 나설 것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더 이상 자기 죄와 약함을 향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선택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미움과 박해와 죽음의 길을 갈 것입니다. 사랑과 경외가 그 길에 동행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날마다 우리에게 와 닿는 주님의 말씀과 성체가 날마다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가슴 설레는 주님과의 이 접촉은 뜨거운 일치로 이어지지요.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영혼에게 두려움은 없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묵혀둔 두려움과 근심을 훌훌 털고 용기를 내어 주님께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 우리는 진정 귀하답니다. 주님께서 벗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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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야서 6,8)
어린 시절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흔히 볼수 있는 장면 하나.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아이들이 서로 앞다퉈 손을 들고 "저요저요!" 하는 장면이 오늘 문득 떠오르네요.
그대는 어떠셨는지요? 적극적으로 손을 드셨나요? 저는 좀 소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어떠세요? 좀 달라지셨나요? 하느님께서는 오늘 그대에게 물으시네요.
"내 신부름 갈 사람?"
"예! 저요." 하며 손 드실래요?
아니면 누가 손 드나 둘러만 보실래요? 그것도 아니면 못 들은 체 그냥 엎드려 있을래요?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일을 대신할 심부름꾼이 필요하시답니다. 그대여, 오늘은 그대가 하느님의 파발꾼이 되어 보시지 않을래요? 오늘 누군가가 그대의 힘과 봉사를 요청하면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심부름꾼이 되어 달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그때 그대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그렇게 하느님 체험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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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참 멋지고 아름다운,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
-성 베네딕도 예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주님을 경외하여라!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9-11)-
바로 그 좋은 모범이 성 베네딕도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자랑은 참 아름답고 깊은 전례에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부족한 강론을 많이 보완해 주는 고마운 전례입니다. 교보문고에서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말을 바꿔 ‘신자가 전례에 참여하고 전례가 신자를 만든다.’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전례화란 말도 있듯이 아름다운 전례 은총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줍니다.
‘늘 옛스럽고, 늘 새롭게(ever old, ever new)’ 하는 전례 은총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게 생각되는, 지금도 생생히 살아 있는 듯이 생각되는,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유럽의 수호자이자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의 사부 성 베네딕도입니다. 이 모두 기억이 있어 가능하니 기억의 은총, 기억의 힘이 참 고맙고 위대합니다. 미사 입당송에 이은 어제 저녁 성무일도 찬미가와 후렴을 노래하며 저절로 나온 “참 멋지고 아름다운,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 이란 고백을 그대로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베네딕도는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생활을 추구하였네.”-입당송
-“스쳐가는 세속의 행락등지고, 주님 찾는 보람을 한껏 누리며
천사들과 한노래 부르는 영복, 끝이 없어라.”-찬미가 2절
-“사부 성 베네딕도는 세상의 명예보다 그 고통을 바라고, 주를 위하여 수고하기를 더 원하셨도다.”-후렴1
-“주의 복된 증거자는 천사다운 생활로 세인들에게 선업의 거울이 되셨도다.”-후렴2
-“모든 의인들의 얼로 충만한 베네딕도는 모든 수도 가족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후렴3
참 아름다운 찬미가 셋 후렴들은 그대로 성 베네딕도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1500년전 성인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살아 현존하는 분처럼 느껴지는 성인입니다. 참 사람 만나기 어려운 작금의 시대에 참 좋은 멋진 분, 참 아름답고 거룩한 참 사람 하나 만나는 기분입니다. 참 일생일대의 크고 중요한 일이 참사람의 내가 되는 것입니다. 기념, 기억할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 분발 노력하여 성인이 되라고 있는 성인축일입니다.
특히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 대한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소개를 바탕한 성무일도 독서후 계응송도 성인의 면모를 잘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슬기로운 절제와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했도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도다.”
어떻게 하면 성 베네딕도처럼 참 멋지고 아름다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런지요? 바로 오늘 두 독서와 복음이 답을 줍니다. 주님을 닮은 성 베네딕도처럼 우리도 주님을 닮아 참 멋지고 아름다운,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고전古典같이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첫째, 지혜의 삶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정말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 최대의 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의 죄, 무죄의 병, 무지의 악입니다. 모든 불행도 비극도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바로 무지에 대한 처방이 지혜입니다. 그러니 지혜를 사랑하십시오. 지혜의 연인이 되십시오. 참 멋지고 아름답고 거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잠언도 주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슬기에 네 마음을 모은다면. 네가 예지를 부르고 슬기를 향해 네 목소리를 높인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지혜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선사되는 참 좋은 선물이 지혜요 슬기요 지식입니다.
둘째,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사람은 지혜의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콜로새서 말씀도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그리스도를 닮아 사랑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평화를 사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사랑의 찬미가를 바칩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감사와 사랑은 그대로 이웃에게로 흘러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합니다.
셋째, 섬김의 삶입니다.
사랑의 섬김입니다. 섬김의 겸손, 섬김의 환대, 섬김의 아름다움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가 바로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섬김의 중심에 섬김의 모범인 주님이 계십니다. 참으로 흙처럼 겸손히 섬길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하십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주님은 우리 한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현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멀리 밖에서 주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섬기시는 주님을 찾아 만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성은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뿐이요, 직무와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참 영성의 잣대도 섬김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참 멋지고 아름답고 거룩한 성 베네딕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람인 성 베네딕도입니다. 우리 필생의 과제가 지혜와 사랑, 섬김의 예수님을 닮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그대로 닮은 성 베네딕도 아빠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지혜의 사람, 사랑의 사람, 섬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끝으로 길다 싶지만 오늘 복음 전 부속가를 나눕니다. 라틴어 원문이든 우리 글이든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성 베네딕도 예찬입니다.
-“새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대축일
성총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미음속에 울리네
동쪽길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성조 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태양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과 같도다
작은 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 건진 성 분도를 엘리사 예언자로 알도다
무죄 덕행 요셉같고 장래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그의 생각 지극하여 예수님의 영복소에 우리 인도하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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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uAicM0C3wE&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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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31)
우리의 소중함을
뜨겁게
일깨워주십니다.
두려움을
치유하는
소중함입니다.
복음은
귀하디 귀한
우리 존재의
기쁜소식입니다.
부족해도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귀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소중함의 가치는
믿음의 가치입니다.
귀한 존재이기에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냅니다.
하느님을
만납니다.
소중함으로
우리 삶을
되찾아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귀한 오늘이며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더 귀한
소중함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치유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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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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