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ansferal into the Kingdom
왕국으로 옮겨짐
What a marvelous change Christ’s sacrificial act had produced for his disciples and what a marvelous entry into a genuinely new relationship it introduced. Christ does indeed have a spiritual “nation” over which he rules, but it is composed of all persons on earth who have put their faith in Him and who render submission to Him as the spiritual Head and as the sole mediator between themselves and God.55 Organizational subjection and boundaries and numerical growth have nothing to do with this. Nor are they related to the fulfillment of the Messianic prophecies. These have indeed seen fulfillment, but in a more extensive and far different way than the Watch Tower organization’s explanations present.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행위가 그의 제자들에게 실로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로 말미암아 진실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도록 기적과도 같은 힘을 제자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리스도는 실로 그가 다스리는 영적인 "나라"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믿음을 두며 영적인 머리로서 그리고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그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된다.55 조직에 대한 복종이나 규정 그리고 조직의 수치적 성장은 이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또한 메시아적 예언의 성취와도 관련이 없다. 이러한 메시아적 예언들은 실로 놀랍게 성취되었지만, 현재 워치타워 조직의 설명과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This transferal of God’s servants into Christ’s kingdom is in no way tied in with organizational affiliation, nor with the date 1914. It extends all the way back to the first century and Christ’s providing redemption through the sacrifice of himself . The Scriptures show that his disciples had even then been “delivered from the authority of darkness” and “ transplanted into the kingdom of the Son of his love.”56 The apostle Paul could therefore say of God: 이와 같이 하나님의 종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기워지는 것은 결코 조직의 소속이나 1914년 연대와는 관련이 없다. 그것은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구속(救贖)의 마련을 제공한다. 성경은 그의 제자들이 "어둠의 권세로부터 옮겨"지게 되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워졌다"는 것을 알려준다.5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
He raised us up together and seated us together in the heavenly places in union with Christ Jesus.57 또한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와 함께 일으키시고 하늘에 함께 앉히셨습니다.57 |
He did not speak of this as future but used the past tense—“raised,” not “will raise”; “seated,” not “will seat”—in describing the spiritually lofty position that their transferral into “the kingdom of the Son of his love” had effected. Because of their delivery from “the authority of darkness” they were now as if seated with the heavenly king, God’s Son. 그는 이것이 미래라고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워지는 데 영향을 미친 영적으로 고양된 위치를 묘사할 때, ㅡ "일으킬 것이다"가 아니라 "일으켰다"; "앉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앉았다"라는 과거시제를 사용했다. "어둠의 권세"로부터 그들이 구출되었으므로 그들은 마치 하늘의 왕인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 같았다. Jesus had said, “Happy are the mild-tempered ones, since they will inherit the earth . . . . Happy are the peaceable, since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58 As a result of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and their faith in the power of this, His followers had now become “sons of God” and therefore also became joint-heirs of Christ and heirs of God, to whom ‘the earth and its fullness’ belongs.59 Because they were now adopted into God’s royal family, the apostle could speak in the present tense when saying to his fellow Christians: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온화한 사람은 행복하다. 땅을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 . 평화로울 수 있는 자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58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그 권능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서, 그의 추종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이며 땅과 그 충만함'이 속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59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왕 같은 가족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사도는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때 현재의 시제를 사용할 수 있었다: |
All things belong to you, whether Paul or Apollos or Cephas or the world or life or death or things now here or things to come, all things belong to you; in turn you belong to Christ; Christ, in turn, belongs to God.60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 있는 것이나 오게 될 것이나,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60 |
In similar vein, the apostle Peter wrote, also in present tense:
사도 베드로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현재시제로 썼다:
You are “a chosen rac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for special possession, that you should declare abroad the excellencies” of the one that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61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 겸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이고, 특별한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탁월하심을 여러분이 널리 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61 |
They were not merely priests of God but “royal” priests, and the term “royal” in the Greek (basileios) is from the same root as the word for “kingdom” (basiléia). Peter states that the Christians to whom he wrote were already at that time a “kingly priesthood” or a “kingdom of priests.”62 At Revelation 1:6, John therefore employs the past tense in saying of Christ that “he made us to be a kingdom [made of us a royal house, NEB], priests to his God and Father.” All this certainly must be considered in understanding later expressions in the book of Revelation, as when Revelation 5:10 says: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이었고, 그리스어로 "왕 같은"(바셀레이오스)이라는 용어는 "왕국"(바셀레이아)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왔다. 베드로의 편지 수신자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 당시 "왕같은 제사직" 또는 "제사장들의 왕국"이었다고 말한다.62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6에서 요한은 "우리가 왕국과 자신의 하나님 아버지의 제사장이 되게 해 주신" 그리스도에 관해 한 말에 과거시제를 사용하였다. 이 모든 것은 요한계시록 5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에서 나중에 나오는 표현을 이해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You made them to be a kingdom and priests to our God and they are to rule as kings over the earth.63 당신은 그들이 우리 하느님의 왕국과 제사장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은 왕으로서 땅을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63 It may be noted that the New World Translation here reads “over the earth,” yet the Watch Tower’s own chart in the front of the Kingdom Interlinear Translation shows that the Greek preposition here used (epi) has the fundamental sense of “upon” not “over” (Greek hyper). While epi can be rendered as “over” when the context calls for such a change from its fundamental sense, that change, as can be seen, is hardly a required one here. Virtually every other translation thus reads “on the earth” or “upon the earth.” 여기서 신세계 역에는 "땅을"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왕국 행간 역 앞쪽에 있는 워치 타워의 자체 차트는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 전치사 (에피) 가 "땅을(over)"(그리스어 하이퍼)이 아니라 "땅에서(on)"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문맥이 근본적인 의미로부터 그러한 변화를 요구하는 경우로 보고 "~을"(over)로 번역되었지만, 살펴 본 것처럼, 그 변화는 여기서 요구된 것이 아니다. 사실상 다른 모든 번역본은 "땅에서"(on 또는 upon)로 되어 있다. Whatever the case, all the earlier-quoted apostolic statements clearly demonstrate that Christ’s disciples on the earth were already “a kingdom and priests of God” in a spiritual sense. They were part of God’s royal family, sons of the King, and the King’s power acted on them and through them. Their royal position as sons of the King of the universe did not express itself in earthly majesty or material wealth, nor in any exercise of political power, or of dictating to others as though exalted above and superior to them.64 But their Father, to whom “the nations are as a drop from a bucket; and as the film of dust on the scales,” to whom “all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are being considered as merely nothing, and [who] is doing according to his own will among the army of the heavens and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had, in his Sovereign authority, empowered them as his royal representatives to accomplish his mission on earth, to speak out his kingly decrees and judgments.65 Long ago Jehovah commissioned Jeremiah to “be over nations and over the kingdoms, in order to uproot and to pull down and to destroy and to tear down, to build and to plant.” He did that, not by placing Jeremiah as a literal ruler over them, but simply by ‘putting his words in Jeremiah’s mouth,’ for God’s word is powerful, irresistible, and what he foretells is as good as done.66 Having spoken to mankind by prophets, God has now spoken to us by his Son and the word or message spoken by him was itself to serve as a “judge” toward all mankind.67 That Son, from his ascension onward, has exercised “all authority in heaven and in earth,” and his disciples and joint heirs on earth have the royal privilege of making his word known. Presented free from alteration or adulteration, that word has its own resultant judging effect.68 As disciples of his Son, they serve in the confidence that God’s sovereign power backs them and sustains them, and that there is nothing on earth that He cannot or will not use for their blessing and support, for they are part of his royal family. They will never lack anything they truly need to continue on and fulfill their purpose on earth; they will never lose anything of genuine and lasting value. For: 어느 경우이든, 앞서 인용된 모든 사도의 진술은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미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이자 제사장"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실 가족의 부분이며, 왕의 아들들이며, 왕의 권능이 그들 위에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작용했다. 전우주의 왕의 아들로서 그들의 왕 같은 위치는 지상의 위엄이나 물질적인 부나,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것처럼 타인에게 명령하는 정치적 권력의 행사로 표현되지 않았다.64 그러나 "나라가 양동이의 한 방울의 물처럼, 그리고 저울 위의 먼지와 같은 존재밖에 되지 않는",그들의 아버지에게 "땅의 모든 주민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자신의 뜻에 따라 하늘의 군대와 땅의 주민들 사이에서 행하시며, 자신의 주권으로 그들을 자신의 왕 같은 대표자로 권능을 부여하시어 땅에서 임무를 수행케 하시며, 왕의 명령과 심판을 발하게 하셨다."65 오래 전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임명하시어 민족과 왕국들을 뿌리뽑고 허물어 멸망케 하시고 해체시키며 건설하고 심을 것을 명령하셨다. 그는 예레미야를 그들의 문자적인 통치자로 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레미야의 입에 그의 말을 집어넣는' 것으로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거부할 수 없으며, 그가 예언한 것은 행해진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66 예언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그가 한 말씀이나 메세지는 그 자체가 모든 사람에 대해 "재판장"의 역활을 하였다.67 그 아들은 승천 이후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을 행사했으며, 그의 제자들과 공동 상속자들은 그의 말씀을 알릴 수 있는 왕 같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그 말씀들은 변화나 불순한 요소가 없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심판의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68 그의 아들의 제자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의 권능이 그들을 후원하고, 지지하며, 그들이 그의 왕실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들의 축복과 지지를 위해 사용할 수 없거나 하지 않을 어떤 것도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땅에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어떤 것도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진실되고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어떤 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He who did not spare his own Son, but gave him up for us all —how will he not also, along with him, graciously give us all things? . . . Who shall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Shall trouble or hardship or persecution or famine or nakedness or danger or sword? . . .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 neithe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69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시다면, 누가 우리를 대항할 수 있겠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꺼이 포기하신 분이ㅡ어떻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혜롭게 주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는가 ? 역경이나 고난이나 박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 . . . 결코 그럴 수 없다,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한 그분을 통해 더 큰 정복자가 되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악마도, 현재도, 미래도, 어떤 권능도, 높음도, 깊음도, 그외 어떤 피조물일찌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69 This is indeed the best of news for those who see the superior and crucial value of spiritual blessings. That genuine good news is, lamentably, obscured when people are instead encouraged to focus their thoughts and desires on essentially material benefits perpetually depicted as “just ahead” in a substitute good news of human conception. 이것은 영적 축복의 더 우월하고 결정적인 가치를 깨닫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좋은 소식이다. 한탄스럽게도, 어떤 조직에 의해 그 본질이 물질적 혜택에 대한 사고와 욕망에 초점을 영속적인 것으로 두도록 고무시킴으로써 이렇게나 진정한 좋은 소식이 "목전의" 물질적인 이익이라는 인간관념의 좋은 소식으로 대체되어 가려진다. Witnesses, if they give the matter any thought, can hardly fail to recognize that the good news as presented in the first century is a different version from what they are accustomed to hearing and reading and speaking at the doors, as if the original version had become somehow outdated, outmoded, not suited to the present. The apostle Paul said to the Corinthians that, when coming to them, he had “decided not to know anything among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impaled.”70 If any traveling Watch Tower representative today were to make such a statement he would immediately be viewed with suspicion as though of a different religion. If a speaker at a meeting were simply to paraphrase one of Paul’s letters, such as his letter to the Ephesians, without first informing his audience that this is what he was doing, he, too, would be viewed as “sounding strange,” speaking a different language than what his listeners were accustomed to and as though representative of a different religion. I believe anyone reviewing that inspired letter and thinking on the matter would acknowledge this as true. 증인들은, 만약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약간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마치 원래의 버전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낡아서 현재에 맞지 않게 된 것처럼 생각되어, 1세기에 제시된 좋은 소식이 호별방문에서 그들이 듣고 읽고 말하는 데 익숙한 것과는 다른 버전이 되었다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그들에게 갈 때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하였다.70 만일 오늘날 여행하는 워치타워 대표가 그러한 발언을 한다면, 그는 당장에 다른 종교에 소속된 것으로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집회에서 연설자가 청중들에게 바울의 편지들 중 하나 이를테면 에베소서와 같은 편지의 내용을 바울이 과거에 행했던 것이라는 것을 청중에게 먼저 알리지 않고,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면, 그도 또한 청중들에게 익숙지 않은 다른 언어로 말하는 "낯선 소리"로 간주되어 다른 종교에 소속된 대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영감 받은 편지들을 검토하고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사실로 인정할 것이라고 믿는다. Remarkably little time is spent in consideration of the grand Christian teachings earlier presented, and this is not surprising since they are viewed as applicable to less than one per cent (actually only twotenths of one percent [00.2%]) of the organization’s total membership.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회에서는 앞서 제시된 웅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고려할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특히 주목할 만하지만,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르침이 조직 전체 성원의 1%(실제로 1%의 십분의 2 [0.2%]) 미만에 적용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The Life-Changing Power of the Good News 인생을 변화시키는 좋은 소식의 힘 Today’s world and the existing political rule of earth undeniably produce many problems, irritations, frustrations, hardships, even sufferings, for us all. But all of them together pale by comparison with the disastrous, humanly inescapable and irremediable effects upon us of the rule of Kings Sin and Death.71 In the first century the good news was that those placing faith in Christ’s ransoming act might now become free from the burdening sense of guilt their sinful state had induced, that their sins were fully forgiven and they were reconciled to God and at peace and in friendship with Him. Far more, they were now accepted by Him into his family as His children, sons of the Most High. 오늘날의 세상과 현존하는 지구의 정치 질서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문제들, 짜증, 좌절, 고난, 심지어 고통의 아픔까지 안겨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모두 합치더라도 죄와 죽음이 왕 노릇의 결과로 나타나는 비참하고 인간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고 치유할 수도 없는 영향과 비교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71 1세기에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의 대속 행위에 믿음을 둔 사람들이 이제 그들의 죄악이 초래한 무거운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죄는 온전히 용서되었고, 하나님과 화해되고, 평화하게 되었으며, 벗 관계가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이제 예수에 의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인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졌다. The repetitive sacrifices made under the Law Covenant and by means of a special priestly class had constantly served as a reminder of sin, with its accompanying sense of guilt, and no matter how many sacrifices the people had made over the years there was always the realization that this was still insufficient to actually attain righteousness and the reward of life for them. But now with his one sacrifice Christ had put an end to any further need for sin-atoning sacrifices.72 Now God’s servants could offer up a totally different form of sacrifice, sacrifices of praise and of love. These were expressed, not in deeds done according to procedures and regulations, but in deeds which were motivated freely and spontaneously from the heart, with no sense of atoning for sin, or working off its debt and accompanying sense of guilt thereby. Those first-century Christians had entered into “God’s rest,” with such struggling, repetitive efforts at proving their own righteousness now a thing of the past.73 율법 계약 아래서 특별한 제사장 반열에 의한 반복적인 동물 희생은, 죄의식을 동반한 채 끊임없이 죄를 기억나게 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것이 실제로 의에 이르러 자신들을 위한 생명의 보답을 받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속죄의 동물 희생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72 이제 하나님의 종들은 전혀 다른 형태의 희생, 곧 찬양과 사랑을 바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행위들은 절차와 규정에 따라 행해진 행위로가 아니라, 죄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하거나, 빚을 갚아야 한다거나, 그에 따른 죄의식을 동반함이 없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동기를 부여받아 표현된 행위였다. 그러한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으며, 율법 아래서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반복적으로 하던 노력은 이제 과거지사가 되었다.73 Before this, access to God’s presence as symbolized in the Most Holy of the temple, was limited to the few, the priesthood. Anyone else attempting to draw near by entry therein did so at peril of his life. But now that Christ had become their High Priest in heaven at God’s right hand, his followers could all, personally and individually, “have boldness for the way of entry into the holy place by the blood of Jesus” and were actually encouraged to “approach with freeness of speech to the throne of undeserved kindness,” without having to rely on any human intermediaries in doing so.74 No more were they under a Law Code, one that constantly reminded them of their weakness and failure to measure up to its perfection, for now God’s laws were written in their minds and hearts. They would no longer need a specialized priestly class to teach them to know Him, for they would all, “from the least one to the greatest one,” know Him and He would no longer “call their sins to mind.”75 Service to Him could be, as never before, a genuine source of joy. 이전에는 하나님의 임재로 상징되는 성전의 지성소에는 소수의 제사장 직분만이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제한되었다. 그 외의 사람들이 그곳에 가까이 가려고 하는 것은 그의 목숨을 거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의 우편에서 그들의 대제사장이 되었으므로,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직접, 그리고 개별적으로 "예수의 피로 담대하게 거룩한 곳으로 들어 갈" 수 있었고, 실제로 "과분하신 친절의 왕좌로 말의 자유를 가지고 나아가라"는 격려를 받았다.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더 이상 율법 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중재자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성령의 법이 그들의 정신과 마음에 기록되었으므로그들의 약함과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던 율법 아래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전문화된 제사장 반열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 가장 작은 자에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그분은 더 이상 "그들의 마음에 죄를 기억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75 그분에 대한 봉사는, 결코 전에 없던, 진정한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For the vast majority of Jehovah’s Witnesses the power of the good news is regrettably robbed of much of its gladdening and strengthening force. The greatness of what God through Christ has already done for us, the overriding significance of Christ’s victories over sin, death, the world and its ruler, the blessedness of the relationship opened up to all of mankind who will exercise faith in him, are seriously minimized. All this is the result of the organization’s efforts to uphold its teaching of two classes of Christians, with one class, the immense majority, having no standing with God on their own but only by virtue of association with the other class. The original good news, and all that it offers now, is restricted as applying to just a few thousand persons and, in effect, is placed in the background and overshadowed by the gospel of “soon to be enjoyed,” “just around the corner” material and physical benefits. The great mass of the membership are told that entrance into the New Covenant, and even the present full forgiveness of sins producing a righteous standing and sonship with God, are not yet for them. The Watch Tower teachings have, in effect, turned back the clock for them so that their situation remains much like that of persons before Christ’s coming and ransoming act. It is as if these millions of the so-called “great crowd” class were still in the time of the Old Covenant when even within the nation of Israel the people were divided into a priestly and a non-priestly class. Thus the four million or so “non-anointed” are told that they have approach to God and a standing with Him only through having a relationship with the “anointed” currently of the organization.76 This would mean that these in effect thereby act as a priesthood mediating on behalf of all the others to make them acceptable to God. The offerings of service the latter make have no validity unless made in that context.77 Christ is declared to be Mediator only for the 8,000 or so “anointed” remaining on earth, not for the millions of others associated.78 여호와의 증인 대다수의 경우, 유감스럽게도 좋은 소식의 기쁨과 그 소식이 불어 넣어 주는 용기를 상당 부분 빼앗기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하신 일의 위력, 죄와 죽음과 세상과 그 지배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가장 중요한 의미, 그를 믿게 될 모든 인류에게 열려진 관계의 축복은 심각할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두 반열에 대한 가르침을 유지하려는 조직의 노력의 결과로서 한 반열은, 엄청난 다수를 이루지만 스스로의 노력이나 힘이 아닌 오직 소수인 나머지 한 반열과의 연합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원래의 좋은 소식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제공하는 것은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어지며 결과적으로 배경으로 작용하여 "목전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혜택을 "곧 누릴 수 있는" 복음으로 빛을 잃게 된다. 대다수의 성원들은 새 계약에 들어가는 것과, 의롭게 하는 죄의 완전한 용서를 받지 못하며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지는 것이 아직은 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워치타워의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대속의 행위를 하기 전의 사람들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게 유지되도록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았다. 이 수백만의 소위 "큰 무리" 반열은 이스라엘 민족 내에서 제사장 반열과 제사장이 아닌 반열로 나뉘었던 구 계약의 시대와 같은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지 않은" 4백만 명 정도의 사람들은 그들이 현재 조직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과 관계를 가짐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다가 설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76 이것은 사실상 이러한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도록 중재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후자가 행하는 봉사의 예물은 그러한 맥락에서 행해지지 않는 한 아무런 유효성이 없다.77 그리스도는 수백만 명의 연합된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상에 남아 있는 8,000명 정도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만을 위한 중재자로 선언된다.78 A Reversion to Old Covenant Circumstances 구 계약의 시절로 돌아감 Under the Old Covenant, the priesthood served as a superior court where all difficult matters were to be decided, and their decisions were binding, as the Law stated: 구 계약 아래에서는 제사직은 모든 어려운 일이 결정되어야 하는 상급 법원으로서, 율법에서 정한 대로 구속력을 지니고 있었다: They must hand down to you the word of the judicial decision. Then you must do in accordance with the word that they will hand down to you from the place which Jehovah will choose; and you must be careful to do according to all that they instruct you. In accordance with the law that they will point out to you, and according to the judicial decisions that they will say to you, you should do. You must not turn aside from the word that they will hand down to you, to the right or to the left.79 그들은 반드시 당신에게 사법적 판결의 말을 전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당신은 그들이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당신에게 넘겨 주겠다는 말씀을 따라서 행하여야 한다. 당신은 그들이 당신에게 지시한 모든 것을 따라 하여라. 그들이 당신에게 지적할 법과 그들이 당신에게 말할 사법적 결정에 따라, 그렇게 해야 한다. 당신은 그들이 당신에게 전할 그 말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벗어나서는 안 된다.79 No better description could be given of the view Jehovah’s Witnesses today take toward decisions handed down to them by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and its Governing Body, who stand for them as if in the position of the Old Covenant priesthood. In Crisis of Conscience reference was made to an expression used by some traveling overseers who, after holding up a green Watch Tower publication, said that ‘if the organization tells us this book is black, then, brothers, it is black!80 I would have thought that such a blatant advocating of blind credulity, a statement so utterly devoid of intelligence, would soon have disappeared, recognized for what it was and dying from its own stupidity. Yet years later persons who have corresponded with me and who are as yet associated with the organization relate this same expression being used in their area, not only in the United States but in other countries, including Australia.81 Back in the year 1541, in his writing Exercitia spirituali, the founder of the Jesuit order, Ignatuius Loyola, wrote: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이 워치타워 조직과 그 통치체가 내린 결정에 대해 구계약 하의 제사장 직위에 있었던 시절보다 더 잘 묘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심의 위기>에서는 녹색의 워치타워 출판물을 들고서는, "형제들이여, 만일 조직에서 이책이 검정색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검정색이다!"라고 말하는 일부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사용한 표현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80 맹목적인 신뢰에 대해 그렇게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머리가 완전히 텅 비어 있는 진술로서 곧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것이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자체의 어리석음이 스스로를 죽이게 만드는 결과를,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몇 년 후에 나와 연락이 되면서 여전히 그 조직과 연합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같은 표현이 미국뿐만 아니라 호주와 같은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81 15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예수회의 창립자인 이그나 티우스 로욜라의 저서 『심령수행(心靈修行 ; Exercita spiritulia)』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We should always be disposed to believe that that which appears to us to be white is really black, if the hierarchy of the Church so decides. 우리는 교회의 위계질서가 우리에게 흰색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검은색이라고 결정한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믿을 수 있어야 한다. |
Today, few Catholics would agree with Loyola, yet these words describe the precise mentality developed among many, if not most, of Jehovah’s Witnesses, particularly among its traveling overseers. 오늘날, 로욜라의 의견에 동의하는 카톨릭 신자는 거의 없지만, 이런 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 특히 여행 감독들 사이에서 흔히 존재하는 사고방식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Another popular expression that has “caught on” with some traveling representatives and elders is, “If the organization tells us to jump, our only question should be ‘How high?’” Similarly, to those who question the truthfulness and Scripturalness of certain teachings, the cliché‚ used in reply by some of these men is, “I would rather be wrong with the organization than be right and be alone.” This surrender of all personal judgment not only says something of the type of persons who are viewed as “qualified” for responsibility by the organization. Because such incredibly shallow clichés and calls for blind, unthinking obedience are not forcefully repudiated by either the organization or by the great majority of hearers, it also reveals the degree to which the organization and its Governing Body now are viewed as equivalent to the priesthood of ancient Israel. Those expressions to all intents and purposes repeat the words of the Old Covenant, “You must not turn aside from the word that they will hand down to you, to the right or to the left.” The organization with its Governing Body stands where the Aaronic priesthood stood. It is as if the liberating Messiah had not yet come. 여행하는 대표나 장로들에게 유행하는 또 다른 표현은 "조직이 우리에게 높이 뛰기를 하라고 하면 우리는 얼마나 높이 뛰어야 되죠?"라고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가르침이 성서적으로 진리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사용되는 상투적인 문구는 "나는 내가 옳아서 혼자 외롭게 되기 보다는 틀리더라도 조직과 함께 있는 것이 낫겠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적 판단을 버림으로써 조직의 책임을 질 "자격있는" 사람의 유형으로 여기게 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천박하고 상투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조직이나 대다수의 청중에 의해 강하게 반박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는 현재의 조직과 그 통치체가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에 해당되는 정도를 상당히 반영한다. 의도나 목적을 가진 이러한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당신은 그들이 당신에게 전할 그 말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벗어나서는 안 된다." 라는 구 계약의 말씀을 똑같이 되풀이하여 말하는 셈이다. 그 조직은 통치체와 더불어 아론계 제사장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것은 마치 율법에서 자유케 할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다. In some respects the position of these millions of the so-called “great crowd” is less than that of non-priestly Israelites, for they are likened by the Watch Tower publications to “spiritual Gentiles.” The Gentiles living in Israel, if approaching God’s temple, had to stop at a wall in the Courtyard of the Gentiles, a wall containing the inscription “Let no foreigner enter inside of the barrier and the fence around the sanctuary. Whosoever is caught will be responsible for his death which will ensue.”82 Whereas, through his death, Christ tore down the wall dividing Jews and Gentiles, a wall that caused persons to be “excluded from citizenship in Israel and [to be as] foreigners to the covenants of the promise,”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erects a new wall, spiritually dividing the “anointed spiritual Israelites” (today numbering some 8,600) from the spiritual Gentiles (numbering into the millions), and placing the latter in a figurative Courtyard of the Gentiles.83 For a Gentile to cross the dividing wall in that courtyard was considered a desecration. For any “non-anointed” person to cross the spiritual “wall” the Watch Tower doctrine erects —as by partaking of the emblems at the Lord’s evening meal (an act which Scripturally signifies nothing more or less than an expression of faith in the ransom sacrifice), or by viewing themselves as in the new covenant Christ mediated on behalf of mankind —would be treated as a similar “desecration,” an invasion of a holy precinct. 소위 "큰 무리"라고 불리는 이 수백만의 사람들의 신분은 어떤 면에서 비제사장 계열의 이스라엘인들보다 낮다. 왜냐하면 그들은 워치타워 출판물에 의해 "영적 이방인"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사는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가까이 가면, "성소 둘레의 울타리와 벽 안으로는 외국인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라. 누가 잡히더라도 그 결과로 일어나는 죽음에 책임이 있을 것이다."라는 글구가 적힌 이방인의 뜰 안에 있는 성벽에서 멈춰야 했다.82 그리스도께서는그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 영주권으로부터 배제되고 약속의 계약에 따라 외국인이 되게 했던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벽을 허물었"으나 워치타워 조직은 "기름부음 받은 영적 이스라엘 자손" (오늘날 팔천육백여 명으로 계수됨)을 영적 이방인(수백만으로 계수되는 큰 무리)으로부터 분리시켜 후자를 상징적인 이방인의 뜰에 둠으로써 새로운 벽을 세웠다.83 구 계약에 따르면, 이방인이 그 뜰의 분리시키는 벽을 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기름부음 받지 않은" 자가 워치타워 교리가 세운 영적인 "벽"을 건너는 행위는ㅡ주의 만찬에 표상물(성서적으로 단지 대속 희생에 대한 믿음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일 뿐인 행위)을 취함으로써, 즉 그들 스스로를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중재한 새로운 언약 안으로 들어온 것으로 간주되게 함으로써ㅡ 성소를 침입하는 것과 같은 "신성 모독"으로 취급된다. Even the Christian Scriptures, they are told, were not written for, or directed to, them but for and to “the anointed.” Paradoxically, all the responsibilities in those Christian Scriptures somehow are applied by the organization to these millions of “non-anointed” members, while the chief privileges are withheld. In a sense, the upsidedown view of the organization makes it appear as if being a joint heir of Christ, a position only the so-called “anointed class” are said to occupy, is a privilege less demanding in its requirements than that of the “great crowd class.” The “anointed” ones enter into their privileged position as justified sons of God right away, and at their death, in some cases after only a relatively few years of “service,” have their inheritance assured and at God’s day of judgment are immediately accepted into God’s presence —not a thousand years later. Not so with the “great crowd” class. “Their time” has not yet come and, if they would see it, they must not only labor dutifully under the organization’s direction but thereafter endure a “great tribulation.” Nor is this the end, for after this they are in effect under trial for a thousand years, since the millennium is represented as a “thousand-year judgment day.” Christ’s sacrifice brought believers out from under law into God’s undeserved kindness or grace. According to the Watch Tower view, those surviving Armageddon go back under law, as the book “Babylon the Great Has Fallen!” God’s Kingdom Rules! states in its explanation of Revelation 20:12, 13: 심지어 신약 성경의 기록들까지도, 그들을 위해 쓰여지거나, 그들에게 지시된 것이 아니라, 단지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위해 그리고 "기름부은 받은 자들"에게 쓰여졌다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신약 성경의 그 모든 책임은 어떻게 해서든 이 수백만의 "기름부음 받지 않은" 성원들에게 적용시키면서, 동시에 주요 특권들은 보류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조직의 전도(顚倒)된 시각은, 소위 "기름부음 받은 자들"만이 차지하는 신분인,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이, 그 요구조건에서 "큰 무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요구조건 보다 느슨하고 쉽게 얻어질 수 있는 특권처럼 보이게 한다.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죽음에 이르러 즉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비교적 몇년간 "봉사"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심판 날에 그들의 유업을 보장받아ㅡ천 년이 지난 후가 아니라ㅡ즉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큰 무리 반열에게는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의 때(온전한 구원의 때:역자)"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만일 그들이 그 때를 보고자 한다면, 그들은 조직의 지시 아래서 힘들게 의무적으로 봉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후 "큰 환란"을 통과해야 한다. 이후에도 아직 천년이란 세월이 그들 앞에 시련기로 남아 있으므로 아직 온전히 구원된 상태가 아니다. '밀레니엄'이란 기간이 천년 기간의 심판의 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자신에게 믿음을 둔 자들을 율법 아래서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 곧 은혜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 워치타워의 해석에 따르면, 아마겟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큰 바빌론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왕국이 통치한다!>라는 책에서 설명된 대로 율법 아래로 다시 돌아간다. 요한계시록 20:12, 13의 해설에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The “scrolls” that the apostle John saw opened are not the record of the past earthly life of the people standing before the judgment throne, but are the law books of Jehovah. That is, they are the publications setting forth his will for all people on earth during Christ’s millennial reign. After what is written in these law “scrolls” has been published and made known, the people will be judged by what laws and instructions are found written in those scrolls “according to their deeds,” not their deeds committed in this life or before the scrolls were published, but their deeds afterward as long as they are on judgment. 사도 요한이 본 두루마리들은 심판대 앞에 서 있는 백성들의 과거 지상에서의 삶의 기록이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서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밀레니엄 통치 기간 동안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분의 뜻을 나타내는 책이다. 이 율법 "두루마리"에 쓰여진 것이 펼쳐지고 선포된 후에, 사람들은 그 두루마리에 씌여진 대로 나타난 율법과 가르침에 의해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될 것이다. 이 두루마리가 펼쳐지기 전에 저지른 행위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심판을 받고 있는 동안 그리고 그 후에 이루어진 행위에 따라 심판될 것이다. All through the judgment day of a thousand years Jehovah’s Judge, Jesus Christ, can execute the sentence of destruction on any human proving himself incorrigible. But by this judgment day all men will have the opportunity to learn righteousness. (Isaiah 26:9; 2 Peter 3:8) Even if they prove obedient and learn righteousness during the thousand-year judgment day of Christ, they will yet have to pass the final test of unswerving devotion to Jehovah’s universal sovereignty after the thousand years are ended, at which time Satan and his demons will be loosed. Then they will stand without benefit of an intermediary before the One seated on the “great white throne,” hence on their own responsibility. If they pass this decisive test with faithful obedience to Jehovah God, the Universal Sovereign, first then will he as the Supreme Judge of all write their names in the “scroll of life,” thus authorizing them to enjoy perfect human life forever in the Paradise earth.84 여호와의 임명된 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년의 심판 기간 내내, 고칠 수 없는 죄악임이 증명되는 모든 사람에게 멸망의 선고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이 심판 날에 의를 배울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사야 26:9; 베드로 3:8) 그리스도의 천년 심판 날에 순종하고 의를 배우더라도, 천년이 지난 후에도 여호와의 우주 주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사탄과 그의 악령들이 풀려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크고 흰 왕좌"에 앉은 분 앞에 중재자의 도움 없이 서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의 책임에 따라 서게 될 것이다. 그들이 먼저 우주의 주권자인 여호와의 충실한 순종으로 이 결정적인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생명의 두루마리"에 적어서, 그들이 낙원이 된 땅에서 영원히 완전한 인간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이다.84 It seems incredible that any organization can rationalize such an imaginative reversal of matters, or how they can justify their assuming the right to “adjust” the good news of the first century, in effect “rewriting the script” so as to accommodate it to fit the doctrinal system they have developed. Certainly the international proclamation, in which they replace the first-century good news with their own twentieth-century version thereof, does not qualify as fulfilling Jesus’ prophecy about the preaching of the good news to all nations. When he said, “This good news of the kingdom will be preached in the whole world,” he clearly referred to the good news as he presented it and as it was thereafter presented by his apostles and disciples, not some rewritten script of that good news to be found nineteen hundred years later only in publications and magazines of a particular religious movement. That original good news, heard in the first century, remains the “everlasting good news” that needs no updating, and is the basis for “the faith that was once for all time delivered to the holy ones.”85 어떤 조직이 문제의 상상력 넘치는 반전을 합리화할 수 있고, 그들이 어떻게 그들이 1세기의 좋은 소식을 "조정할" 권리를 맡을 수 있는지, 그들이 개발한 교리 체계에 맞게 그것을 수용하도록 사실상 "대본을 다시 쓰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도저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들이 1세기 좋은 소식을 새롭게 만들어 20세기 버전으로 대체된 국제적인 선포는 모든 국가에 좋은 소식을 전파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는 "왕국의 이 좋은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고, 그 뒤에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기록한 대로가 아니라, 1900년이 지나서 비로소 그 좋은 소식의 일부를 특별한 종교 운동의 출판물과 잡지에만 다시 고쳐 쓰라고 하지 않았다. 1세기에 전해진 그 원래의 좋은소식은 엎데이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 "영원한 좋은 소식"으로 머물며, "거룩한 사람들에게 영원히 전해졌던 믿음"의 기초가 된다.85 |
55 1 Peter 2:4-9; 1 Corinthians 11:3; 1 Timothy 2:5, 6.
55 벧전 2:4-9; 고전 11:3; 딤전 2:5, 6.
56 Colossians 1:13.
56 골 1:13.
57 Ephesians 2:6.
57 엡 2:6.
58 Matthew 5:5, 9.
58 마태 5:5, 9.
59 Romans 8:14-17; Galatians 3: 29; 4:4-6; 1 Corinthians 10:26; Psalm 24:1; 1 Corinthians 10:25,26.
59 롬 8:14-17; 갈 3: 29; 4:4-6; 고전 10:26; 시 24:1; 고전 10:25,26.
60 고전 3:21-23; 롬 8:17; 갈 4:6, 7.
61 벧전 2:9.
62 This understanding of the Greek phrase is also indicated by the Greek Septuagint rendering of Exodus 19:6, where the Hebrew expression “a kingdom of priests” appears; see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Vol. 5, page 57.
62 그리스어 구절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히브리어로 "제사장들의 왕국"이라는 출애굽기 19:6의 그리스어 70인역으로도 나타난다. <해설자의 그리스어 성서> 57쪽을 참조하라.
63 As the interlinear reading of the Kingdom Interlinear Translation of the Greek Scriptures shows, the verb rendered “to rule” is in the present tense in Greek: “they are reigning.”
63 그리스 성서의 왕국행간역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통치하다"라는 동사는 그리스어로 현재 시제이다: "지배하고 있다."
64 Compare 1 Corinthians 4:8; Revelation 3:17, 18.
64 고린도전서 4:8; 계시록 3:17, 18을 비교하라.
65 Isaiah 40:15, 17; Daniel 4:35; Acts 17:30, 31.
65 이사야 40:15, 17; 다니엘 4:35; 사도행전 17:30, 31.
66 Jeremiah 1:9,10; Isaiah 55:11; 44:26; Romans 4:17.
66 렘 1:9,10; 이사야 55:11; 44:26; 로마 4:17.
67 Hebrews 1:1, 2; John 12:48.
67 히브리서 1:1, 2; 요한 12:48
68 Matthew 28:18-20; Acts 13:44-48; 28:23-28.
68 마태 28:18-20; 행13:44-48; 28:23-28.
69 Romans 8:31-39, NIV.
69 롬 8:31-39, NIV.
70 1 Corinthians 2:1, 2.
70 고전 2:1, 2.
71 Romans 5:21.
71 롬 5:21.
72 Hebrews 10:1-4.
73 Hebrews 4:3, 10.
74 Hebrews 4:14-16.
75 Hebrews 8:10-13; Galatians 4:6-9.
76 Watch Tower publications have applied the words in Zechariah 8:23 as to ‘ten men out of all the languages of the nations taking hold of the skirt of a Jew,’ as applying to the “great crowd” of non-anointed persons who have figuratively taken hold of the skirt of the “anointed remnant” of Jehovah’s Witnesses, and, utilizing Revelation 3:9, the publications say of these non-anointed ones that “They come to Jesus’ anointed brothers and ‘bow down’ to them, spiritually speaking, because ‘they have heard that God is with them,’” and they “minister to these anointed ones.” See Revelation —Its Grand Climax At Hand!, page 60, 61; also the Watchtower of January 1, 1988, page 16; Worldwide Security Under the “Prince of Peace” (1986), pages 88, 89.
76 워치타워 출판물들에서는 스가랴 8:23에서 큰 무리가 기름부음 받은 남은 자의 치맛자락을 붙드는 것에 적용해 왔다.이 비유에 의하면 `그들은 기름부음 받은 형제자매에게로 와서, 영적으로 그들에게 엎드려 절을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보조하여 봉사한다. <요한계시록—그 웅대한 절정이 다가왔다!>(60, 61면; 또한 1988년 1월 1일자 파수대 16면, <평화의 군왕> (1986년, 88, 89면)을 참조하라.
77 Contrast Exodus 30:30-33; Leviticus 2:1, 2; 5:10; 17:1-5; Numbers 4:15, 17, 18; 18:7 with 1 John 2:20; Hebrews 4:14-16; 8:1, 2, 10-12; 10:19-22; 13:15, 16.
78 The Watchtower, August 15, 1989, pages 30, 31.
78 파수대 1989년 8월 15일 30, 31면
79 Deuteronomy 17:8-13.
79 신 17:8-13
80 Crisis of Conscience, pages 344, 345.
80 <양심의 위기> 344, 345 면
81 The person who communicated this information from Australia immigrated there from Germany. He wrote that on hearing this expression of the organization’s authority to make “green” become “black,” stated by a district overseer at a meeting for elders, he murmured to himself, “Heil Hitler!”
81 호주로부터 이 정보를 전달한 사람은 독일에서 그곳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그는 "녹색"을 "흑색"으로 만들려는 조직의 권위에 대해 장로들의 모임에서 한 지역 감독자가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을 듣자, 그는 속으로 "하힐 히틀러!"라고 중얼거렸다고 기록했다.
82 See the Watchtower October 1, 1972, pages 606, 607; December 1, 1972, page 721, 722; Insight on the Scriptures, Vol. II, pages 1079, 1080.
83 Ephesians 2:11-18, NIV.
83 엡 2:11-18, NIV.
84 See “Babylon the Great Has Fallen!” God’s Kingdom Rules! pages 644-46. The more recent book Revelation —Its Grand Climax at Hand, page 296, similarly says of the survivors of Armageddon, “their judging must continue through the thousand years as Jesus keeps on guiding them to ‘fountains of waters of life.’”
84 "큰 바빌론이 무너졌다!" 하나님의 왕국이 통치한다! 644-46 면을 참조하라. 더 최근의 책 요한계시록 그 웅대한 절정이 다가왔다! 296면에서도 아마겟돈의 생존자들에 대해 비슷하게 말한다. "예수께서 계속해서 그들을 '생명의 샘'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심판은 천 년 동안 계속되어야 한다."
85 Revelation 14:6; Jude 3.
85 계 14:6; 유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