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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성복, 한국사에 대한 가장 지적인 반응
백일홍에 투사한, 이 젊은 투사는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공훈처럼 내걸었으나 폭풍보다 무서운 '시간'에 마침내 목을 내밀고 좁은 마당을 피로 덮는다. 투쟁이 백일홍의 의지였는지 엄혹하게 정해져 있는 그 한계선인 백일의 시간을 구현하는 이름값일 뿐이었는지, 묻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모른다.
더뷰스 시의맛 : 이성복 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1. 1990년 느낌은 어떻게 왔는가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이성복 '느낌'
느낀다는 것.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것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이하고 놀랍다. 도대체 느낌은 어디서 오는가.
사물을 만날 때, 계절을 만날 때, 언어를 만날 때, 상황을 만날 때, 혹은 어떤 질감을 대할 때,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답답하고 기쁘고 좋을 때, 어떤 생각을 할 때, 노래를 부를 때, 삶의 구석구석이 느낌 아닌 것이 없다.
느낌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안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안과 밖이 서로 통하여 감응하는 것 같기도 하다.
느낌이 일어나는 처음을, 막막하던 나뭇가지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저 시인. 느낌이 사라지는 지점을 그 꽃이 다시 후드득 져버리는 것 같다고 말하는 저 시인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느낌의 감동과 전율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느낌은 어떻게 남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사라진 자리에 생긴 지워지지 않은 얼룩과도 같단다. 하. 그렇구나. 대상은 사라졌는데 남아 있는 무엇. 우리에겐 그 수많은 이름 없는 느낌들이 들어앉아 있는지 모른다.
흐느낌이란 말이 있다. 느낌보다 감정의 진폭이 미세하게 커져서 울음으로 되어 가는 것이 흐느낌이다. 느낌과 울음 사이 흐느낌이 있다. 흑흑거리듯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는 흐느낌은, 종이를 얼룩지게 하고 비틀어지게 한, 느낌의 작은 몸부림에 소릿값을 준 것 아닐까.
이 시는 이성복의 세번째 시집 '그 여름의 끝' 맨처음에 실려있다. 이 시집은 1990년 6월15일에 나왔고 그 한달 전에 쓴 자서(自序)가 적혀있다.
"세번째 시집을 엮으면서 역시 나는 내 그릇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내게 주어진 일은 남은 시간 동안 불과 몇 밀리라도 비좁은 그릇을 넓혀가는 것이리라.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내 잘못은 아닐 것이다. 마음 속의 스승들께 부끄러운 책을 바친다."
그해 나는 조선일보에 있었고 저 시집이 나온지 넉달 뒤쯤에 결혼을 했다. 강경대 치사사건이 일어났던 건 이듬해 4월26일이었다. 억압의 공기가 서울을 가득 메우고 있던 날들, 코리아나호텔 자줏빛 커튼 휘장을 목에 감고 뛰어내리는 나의 환영을 가끔 보기도 했다.
그 신문사의 많은 이들이 젊은 편집기자의 결혼을 축하하여 봉투에 돈을 아낌없이 넣어주었고, 그 뒤에 나는 그곳에서 나와 몇 백 미터 떨어진 호암아트홀에 있는 중앙일보로 옮겼다. 당연히 부조금 들고 튄 괘씸한 후배가 되었다. 그 무렵에 나는 이 시집을 열심히 들고 다녔고, 거듭해서 읽었다.
시집의 뒷면에는 38세 이성복이 시의 행간에 감도는 기분들의 여분을 씻어내지 못한 듯 적어놓았다.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유독 왜 슬픔만이 세상 끝까지 뻗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슬픔 뒤에 다시 슬픔이 남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슬픔은 범속한 나뿐만 아니라, 세상 이치에 두루 통해 있는 성인들까지도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성인의 슬픔은 온통 슬픔 전체일 뿐, 다른 무엇의 기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에도 본래 짝지을 것이 없다고. 하늘이 천둥 번개를 친 다음 노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언제 시체가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더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지껏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생각되었던 슬픔은 한 장의 덮개 그림처럼 떨어져내렸다. 벽도, 덮개 그림도 허깨비일 뿐이며, 그것들이 비록 양파 껍질처럼 거죽이면서 동시에 속이 된다 할지라도 허깨비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허깨비 온통 허깨비 전체라면, 허깨비 아닌 실체가 따로 있겠는가."
억눌린 혀를 느낀다. 그 무렵, 그 시간을 숨쉬는 시인이 붙들고 있었던 낱말 혹은 그 말들의 머리가 누에머리처럼 잠시 갸웃거린다.
"슬픔은 온통 슬픔 전체일 뿐, 다른 무엇의 기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어떤 스승이 규정할 때, 그와 나는 슬픔을 극복하는 기쁨, 기쁨으로 이어진 전체 회로의 일부로서의 슬픔, 기쁨에 어깨를 기댄 슬픔 같은 대대(對對)적 개념에 매몰되어 있던 자신이 구출당하는 듯한 기분은 있었지만, 그것이 문제 인식을 진화하게 하거나 슬픔을 다른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다는 것을 슬며시 깨닫고 있었던가.
슬픔으로 표명된 것, 시대를 읽는 총체적 감관(感官)에 포착된 것. 그게 이성복에는 꽃과 피였다. 피는 것과 피로 물들이는 것. 이 시집에 든 연작(連作)은 그 정황을 보여준다.
어두워가는 산을 가리키며 당신이 아니, 저기 진달래가... 저기도, 저 너머에도...당신이 놀라 가리킬 때마다 어둠과 피로 버무린 꽃이 당신 손끝에서 피어났습니다
그때 당신이 부르기만 하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서 나는 처음 꽃피어날 것 같았습니다.
이성복 '어두워지기 전에.1'
꽃나무들은 물감을 흘리며
일렬로 걸어갔습니다
소박한 연등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갔던가요
혼례의 옷에 죽음의 빛이 묻어 있었습니다
한결같이 사람들은 흰빛 향기로 웃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그대를 보고 또 보았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저의 눈빛은 흐려지고
늘어진 꽃나무 사이 그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성복 '어두워지기 전에.2'
'어둠과 피로 버무려진 꽃'은 그대와 나, 혹은 우리가 피운 것이어야 했다.
정원에 서있는 두 개의 꽃나무 중에서 하나만 가져가라고 당신이 말할 때, 이성복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시 '두개의 꽃나무' 중에서) 잎이 좋은 나무와 가지가 탐스러운 나무. 잎이 좋은 건 현실이고 가지가 탐스러운 건 미래일 수도 있다. 시인이 대답을 못한 건, 현실도 갖고 싶고 미래도 갖고 싶기 때문이다. 당연한 마음이지만, 그때의 조건들은 오로지 '선택'이었다. 둘 다 가지겠다는 건, 정원을 헐벗게 하는 것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1'은 현실을 선택하는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둠과 피로 버무린 꽃이 손끝에서 피어나고,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서 처음 꽃피어나기도 하는 그 현실. 피를 묻히고 죽음을 각오하는 투쟁이다.
'어두위지기 전에.2' 미래를 선택한 자의 비극일지 모른다. 혼례의 옷에 죽음의 빛이 묻어있는 것. 상복을 입은 사람들의 흰 빛 향기.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를 따지는 심문. 저의 눈빛은 흐려지고 그대는 보이지 않는 부끄러움과 굴절의 통증. 꽃은 피었지만, 피는 사라진 침묵의 정원. 통렬하다. 읽을 때마다 방금 생긴 상처처럼 욱씬거리는 데가 있다.
이 시집의 끝에 실린 시는, 어떻게든 갈급하고 다급한 청춘이 무엇으로든 급히 완결짓고자 한 자취일지 모른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백일홍에 투사한, 이 젊은 투사는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공훈처럼 내걸었으나 폭풍보다 무서운 '시간'에 마침내 목을 내밀고 좁은 마당을 피로 덮는다. 투쟁이 백일홍의 의지였는지 엄혹하게 정해져 있는 그 한계선인 백일의 시간을 구현하는 이름값일 뿐이었는지, 묻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모른다.
절망을 끝내는 방식이, 그때 우리에겐 이렇게 왔던 것 같다. 투쟁의 피는 장엄하게 그 여름을 장식하는 소품이었는지 모른다. 희망이 투쟁의 온전한 전리품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백일홍의 시간'같은 것이 이뤄낸 자체 소멸의 완결이라는 것. 그게 그때는 절망보다 더 아픈 일이었기도 하다.
2.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이성복은 언어에 온전히 얹힌 것이 시가 아니라 언어가 겨우 물고 있거나 방금 떨어뜨린 것이 시라는 걸 자주 보여준다.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이성복 '아주 흐린 날의 기억'
새들이 가득 날아간다. 시커멓게 하늘거리며 혹은 나풀거리며 묵직하게 거대한 수의(壽衣) 하나로 일대를 덮는 것처럼 압도적이다.
그 아래 나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본다. 저 수의 아래 나는 무덤에 누운 자가 된다.
이 죽음이여, 그래도 하늘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저 새들을 밀어젖일 순 없지 않나. 관 뚜껑을 밀어 수의를 벗기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문득 새들의 대오가 끝나고 그 뒤에 훤한 하늘이 따라온다.
수의의 끝자락이 나풀거리며 옮겨갈 때, 나는 마치 '관 뚜껑을 미는 힘'과 같은 전심전력으로 하늘을 직면하는 쾌감을 느낀다.
죽은 자의 팔뚝에 근육을 일으켜 세울 만큼 답답하고 고통스런 흑암의 하늘 앞에, '죽어도 죽지 않는 근육'이 벌럭거리고 있다. 이토록 젊은 내면이 사지(死地)를 통과하던 때가 있었다.
주먹만한 작은 고양이 발을 핥는다 발가락을 핥는지, 발바닥을 핥는지 눈치도 안 보고 핥는다 버스를 기다리던 중학생 하나 농구화 신을 발을 들이대니 고양이는 무심코 고개를 젓는다
아까부터 나는 사는 것을 바라본다 발가락과 발바닥 사이 아주 낮은 삶을,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하는 근질거리는 헌 생채기 같은 것을
이성복 '고양이'
이 시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눈에 선한 풍경과 흔한 장면과 익숙한 일들. 아주 작은 고양이, 너무 작아서 발가락을 핥는지 발바닥을 핥는지 분간하기도 하려운데 그걸 열심히 핥는다. 아무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짓궂은 아이가 내 신발도 핥아보라고 하자 고개를 흔든다.
저 어린 고양이의 발가락과 발바닥 사이에, 그가 꼭 핥아야만 좋을 가려움 같은 것, 혹은 아픔 같은 것이 있다는 것.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하여 가려워지기 시작한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사는 것, 원하는 것, 해야하는 것과 내가 사는 것, 원하는 것, 해야하는 것이, 참으로 다른 일인가. 그것이 사소한가. 내가 위대한가. 내 삶의 근질거리는 헌 생채기는, 저 고양이가 스스로 위무하는 그 자리와 다른 것인가.
달빛 없는 수풀 속에 우리 어머니 혼자 주무시다가 무서워 잠을 깨도 내 단잠 깨울까봐 소리없이 발만 구르시다가, 놀라 깨어보니 어머니는 건넌방에 계셨다
어머니, 어찌하여 한 사람은 무덤 안에 있고 또 한 사람은 무덤 밖에 있습니까
이성복 '어머니.2'
시가 짧고 내용이 단순해보이지만 여기엔 뫼비우스의 띠같은 공간들이 이어져 있다. '혼자 주무시다가 무서워 잠을 깬 어머니'는 잠의 바깥인 현실에 있다. 그런데 나는 자고 있어서 내 단잠을 깨울까봐 무서워도 속으로 발만 구른다. 여기까지 읽으면 나는 '잠' 속에 있다. 어머니는 깨어있고 나는 자고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꿈이다. 나는 놀라서 깨어보니, 어머니는 건넌방에 계신다. 나는 깨어있고 어머니는 주무신다. 누가 자고 누가 깨어있는 것인가.
나는 꿈에서 무덤 속에 든 어머니를 뵈었고, 어머니는 무덤 속에서 꿈을 깨어 옆에서 잠든 나를 깨울까봐 기척을 하지 않고 누워있다. 무덤이 잠이고 현실이 깨어나있는 것인가. 혹은 현실이 잠이고 무덤이 깨어있는 것인가. 분명한 건, 한 사람이 깨어있을 때 한 사람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무덤 안에 있는 사람이 어머니인가, 꿈으로 나타나는 분이 어머니인가. 꿈을 꾸는 내가 무덤 안에 있고, 꿈에 나오는 어머니는 무덤 밖에 있는가. 무덤 안에서 꾼 어머니의 꿈에 옆에서 자고 있는 내가 무덤 밖에 있는 것인가. 이 경계(境界)와 분리와 단절은 무엇인가. 그 차원이나 벽을 넘나드는 것, 우리가 '그리움'이나 '보고싶음'이라 말하는 그것.
며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눈물 흘리는 짐승들이 슬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기를 먹었습니다 넓적넓적 썰은 것을 구워먹으니 맛이 좋았습니다 그날 아침 처형당한 간첩의 시체라고 했어요 한참을 토하다 고개 들어보니 입가에 피범벅을 한 세상이 어그적어그적 고기를 씹고 있었습니다
이성복 '역전(易傳).1'
이념에 대한 분별과,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돋우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본연의 정체성과 본질의 문제를 칼로 베듯 구획하는 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해보는 요즘이다.
이념이나 신념이나 혹은 역사적인 불행으로 강화된 감정들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지니는 것이 옳고 바른 것인지에 대한 꾸준한 성찰은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소중한 행위가 아닐까 싶다. 덜한 것이 비겁이라고 여기지만, 지나친 것이 행한 광기들이 더 많은 우행과 퇴행을 낳은 역사를 돌이켜볼 필요는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기는 강한 정치'보다 '품어내는 큰 정치' 가 필요하다. 포용이야 말로 힘이고 그릇이며 자부심이다. 미래도 그것을 원하지만 과거 또한 지금쯤이면 그런 결말을 바라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성복의 '간첩 고기'는 편 먹고 저능화하는 어리석음과 강박과 사나움을 직격하는 한 점의 '말'고기다. 젓가락으로 집어서 쓰윽 건넨다. 이런 고기 좋아하는가. 한번 먹어보게.
3. 남해금산, 피그말리온의 사랑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남해금산'
보리암에 올라가 그 바다를 보았다. 이성복이 바위 속에 들어있는 바다, 그를 사랑하는 여자가 그 속에 들어있다가 빠져나간 바위.
바위에 한 사람이 묻혀 있고 하늘이 그를 비췄다 파도가 그를 묻었다 한다. 이 이미지는 왠지 섬뜩하면서도 오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위는 그냥 바위일 뿐이다. 하지만 바위를 깎아 조각을 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한 여자를 볼 수 있다. 그가 자신이 보는 여자만 남겨두고 겉의 돌들을 깎아내면 바위는 여자가 될 것이다. 피그말리온처럼, 형상이 확정되고 그 나머지의 가능성을 벗어버린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위를 깎아내지 않은 채 여자를 바라보기만 한다면 여자는 바위 안에서 포즈를 바꿔가며 늘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형상을 아직 빚지 않았으니 그 안에서는 자유로운 것이다.
여자는 바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바위를 벗어나는 순간 형상을 눈에 보이게 빚을 수는 없어진다. 여자는 바위 속에서 수천수만의 형상과 움직임을 보이지만 바위 밖을 나올 수 없는 수형자이다.
바위 속의 여인을 발견한 이성복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빛에 견딜 수 없어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 또한 바위가 되었으니 바위 속은 달콤한 안방이다. 비좁은 안방에서 서로 지지고 볶다 보니 미움도 생기고 원망도 돋아났다. 여자는 울면서 그만 바위를 떠나버렸다. 여자가 떠난 바위 속에서 이성복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바위 속의 여인을 발견한 시인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빛에 견딜 수 없어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 또한 바위가 되었으니 바위 속은 달콤한 안방이다.
비좁은 안방에서 서로 지지고 볶다 보니 미움도 생기고 원망도 돋아났다. 여자는 울면서 그만 바위를 떠나버렸다. 여자가 떠난 바위 속에서 남자는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라진 여자를 묵묵히 생각하며 단단하고 캄캄한 속에서 내내 견딜 뿐이다. 단순하고 강렬한 사랑의 이미지가 젊은 내겐 왜 더할 나위 없는 리얼리티로 느껴졌던가.
바위 속에 들어있는 남자.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는 남자.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는 남자. 그 사랑의 바위에 꼼짝없이 갇혀 생애라는 영원을 감옥살이하는 남자. 왜 나는 그걸 나라고 여겼던가. 나는 왜 여기 태어나 갇혀 있는가. 그는 왜 다른 세상에 있는가. 어이없고 답답한 일이다.
보리암에서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며 내내 그 생각을 했다.
몸 위에 내려
몸을 숨겨주는 것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려
살며시 팔을 빼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엄마처럼
몸은 잠시 사라졌다
돌아오는 것
이성복 '측백나무 잎새 위에 오는 눈'
몸은 잠시 사라졌다, 돌아오는 것. 측백나무 잎새 위에 눈이 내려 측백나무를 잠시 가리듯. 그렇구나.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살며시 팔을 빼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엄마처럼. 엄마도 사라지지 않았고 측백나무도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다.
하지만 '잠시'여서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잠시'를 확인했다고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라지는 것이 잠시인지, 돌아오는 것이 잠시인지도 알 수 없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내 생에 있었던 엄마의 온기나, 내 가지를 덮었던 눈의 의상은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이 '잠시'라는 굴레를 통해, 몸을 돌리고 숨을 돌리는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생겨나는 까닭이 없었다면 사라지는 까닭도 없을 것이다. 생겨나는데 온 우주가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사라지는 데에도 그런 애를 쓸 일이 없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찾지 않아야 한다는 것. 모르는 것에서 아는 것을 측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푸른 허공에 티끌 하나가 바람에 자지러지듯 날아올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떨어지는 그 의미의 무게로 곁이 없이 서있는 자기를 가끔 쳐다봐야 한다는 것. 시를 읽으며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을 늘이고 있다.
노숙자 할머니 한 분에게 그토록 마음을 기울이며 도움을 주려고 나선 어느 분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이도 잊고 눈물을 줄줄 흘린다. 그분에게도 '잠시'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무상의 한 가운데서 이 깊은 공명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4. 청도의 물결과 정선의 몸과 혼
그 봄 청도 헐티재 넘어
추어탕 먹으러 갔다가,
차마 아까운 듯이
그가 보여준 지슬못,
그를 닮은 못
멀리서 내젓는
손사래처럼,
멀리서 뒤채는
기저귀처럼
찰바닥거리며 옹알이하던 물결,
반여, 뒷개,뒷모도
그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윷말처럼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
그 하얀 물나비의 비늘, 비늘들
이성복 '죽지랑을 그리는 노래'
지슬못의 '옹알이하던 물결'과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 하얀 물나비의 비늘, 비늘들'의 이미지가 왜 신라의 죽지랑과 그의 죽음을 눈꺼풀 안으로 담아내던 득오와 이어졌는지 알 수 없다.
수많은 생생한 맥락이 지워진 역사적 기억의 한 순간이, 현실 속에서 기이한 공명과 변주를 이루며 사라지는 순간 속에 다시 아로새겨지는 장관을 보여준 것일까.
가버린 봄날 돌아보니
모든 것이 울음이고 슬픔이오
그 아름다운 모습 다 버리고
얼굴이야 나이 들어서라곤 하지만
눈의 흰 자위 돌아간 까닭은
득오가 싫어서 그런 것이오?
화랑이여 슬픔으로 따라가는 길
저 무덤골 주무실 밤을 어쩌나요
빈섬 평역(評譯) '모죽지랑가'
그 먼 날의 허망한 길들, 윷말의 반여나 뒷개나 뒷모도와 같은 주어진 형식을 가감없이 실천하는 속내없는 삶의 방식처럼 생생한 비린내도 남기지 못한, 언어들이라고 이성복은 모죽지랑가를 슬퍼했던가. 몇번이고 시를 읽고 다시 읽어본다. 까닭없이 슬프고 아름답다.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이성복의 '정선'
태어나기 전에도 내 몸이 되기로 예정된 것이 있었을 것이고, 그때도 내 혼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무엇이 어디엔가 흘러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태어났고 몸과 혼이 한데로 모여들어 혼이 제 몸을 보고 제 몸이 혼을 생각하는 애틋한 생명뭉치가 되었다. 다시 나는 죽어, 몸은 무엇인가 되어가고 있을 것이고 내 혼은 다시 꿈틀거리며 어디론가 흘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내 몸과 내 혼이 만났던 잠시 동안의, 이것만을 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몸이 이동하는 공간과, 몸이 자신의 배터리를 조금씩 방전하는 시간의 정해진 길 위에서, 우린 정말 한 뼘도 비켜설 수 없는 것일까. 그 한 뼘을 비켜서면, 운명 따위에 개의하며 굴종하는 존재로 살지 않았어도 될 일 아닌가.
몸과 마음이 저 가고싶은 길로 원없이 떠돌아 다닌다면, 안개와 바람처럼 스미고 흐르고 사라질 수 있다면, 이 한심하고 처절한, 생의 애착 따위는 없을 것 아닌가.
이성복은 아리랑 위에 얹혀 흐르며 노는 정선 땅이 되어서 호쾌하고 분방한 저 시를 천하에 뱉는다. 사북에는 정선의 혼이 노닐고 있고 황지에는 정선의 몸이 흐르고 있으니 외발가마에 혼을 태우고 아우라지에서 깻묵같이 흩어진 몸을 건져 합체해야 정선 아라리 한바탕 춤과 노래가 되리라. 이 훤칠한 상상의 키와 시적 자아의 스케일이 얼마나 좋은지.
톱니바퀴 위에서 시간을 밀어온 답답한 내 운명도, 어느 날 저렇게 길을 벗어나 산산이 해체되어 정선처럼 놀 수 있다면.
한때 저 시에 취해서, 정선을 헤매던 시절이 있었다. 흰 구름 흩어진 봄날 수면 위의 사북, 아니 황지. 갈퀴 사이로 새나가던 주소들. 푸르고 푸른 제 피에 취해서, 시력이 뭉개질 듯 짙푸른 수면으로 미끄러져가던 넋의 꿈을 꾸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내 뜻이 아니라, 이 생명의 한 옹이가 휘돌아가면서 만들어내는 달콤하고 괴롭던 현기증같은 것임을 뒤늦게 발견한다. 그 미쳤다는 사랑도 다 그 소용돌이에서 움켜쥐었던 작은 시간의 분말이었던 것을 문득 돌아본다. 터무니 없이 아름답다, 생의 저 결절.
더뷰스 시의맛 리뷰어 이빈섬 isomi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