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월木月 선생 / 이시영
성심여고 후문에서 산천동 깔그막 용산성당 올라가는 길,
누가 뒤에서 "이 군!" 하고 불렀다.
돌아보니 키 큰 목월 선생이 거기 서 계셨다.
"이 군, 시는 그렇게 쓰면 안 된데이." 반가움에 왈칵 달려갔더니
선생은 안 계시고 웬 낯선 청노루힐빌라.
전차 종점 가까운 원효로4가, 낡은 제과점 봉투를 든 선생께서
길을 건너고 계셨다. "선생님!" 하고 불렀더니 돌아서시며
"이 군인가? 들어가제이". 거기서 가까운 낡은 2층 목조 적산가옥.
삐걱이는 계단을 올라 다다미방에 앉으며 말씀하셨지.
"이 군, 시는 그렇게 쓰면 안 된데이." 지난주 드린 시에 일일이
붉은 밑줄 친 노트를 돌려주며 하시던 말씀.
오늘도 산천동 그 고갯길 오르며 문득 돌아본다.
"이 군!" 하며 부르는 소리 있을 것 같아.
- 이시영 시집 <나비가 돌아왔다> 2021
구용丘庸 선생 / 이시영
인사동이나 그 어디에서 만나 인사드리면 나보다 더 허리를
굽히셨다. "아이구, 평안하신지요?" "아 선생님 저 제자입니다.
말씀 낮추세요" 해도 소용없었다.
수업 시간이면 그 마른 몸매에 '청자' 한 가치를 맛있게
태우며 말씀하셨지. "님이여, 들으시나요, 내가 눈 감는 소리를,
(……) 님이여, 들으시나요, 내가 다시 눈 뜨는 소리를……"*
릴케의 <형상시집> 속의 한 구절을 외며 "바로 이 눈 감는
소리를 듣는 것이 시"라고. 그리하여 나는 구용 선생 하면
그의 대표작인 <삼곡三曲>보다 릴케가 먼저 떠오른다.
제자를 향해 허리 굽히시던, 그 만상에 대한 경배와 함께.
* 릴케의 <정적> 부분 (- 20세기 시집, 구기성 옮김, 1958)
- 이시영 시집 <나비가 돌아왔다> 2021
소주 반병 / 이시영
고故 임영조 시인이 내게 말하기를, 김종삼 시인은
소주 반병 값이 떨어지면 늘 용산에 있는 태평양화학 사보
<향장香粧> 편집실로 찾아와 그와 오규원 시인에게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많아야 2,3천 원이었을
그날의 소주 반병과 담배 한 갑 값. 그것으로 일용할
양식을 삼은 그는 관악산으로 무교동으로 남대문시장으로
온종일을 나대다 날이 어두워지면 길음동 산동네로
돌아갔다고 한다.
- 이시영 시집 <나비가 돌아왔다> 2021
고故 신현정을 생각함 / 이시영
현정이는 죽을 때 무슨 소릴 내었을까
오리처럼 꽥꽥거렸을까 아니면 그냥 씨익 웃었을까
칫솔질하다가 하나님더러 "네끼 이×"이라고 소리친 적 많아
가서 야단맞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거기 안 가고 경기도 남양주시 왕숙천 어디쯤 자전거포 앞에서
지나던 복슬개의 앞다리를 쓰다듬고 있을까
- 이시영 시집 <나비가 돌아왔다> 2021
[출처] 목월木月 선생 외 / 이시영|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