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사랑의 봄날, 그 노래
소피, 그녀는 파리 상제리제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저택에서 자랐고,
아침이면 운전기사가 명문사립학교에 데려다 주었고,
주말에는 근교 승마클럽에서 말을 탔으며,
저녁에는 늘 고급와인과 함께 정찬이 차려졌다.
상류층 귀족이나 다름없었던, 그녀의 삶은, 동화속 이야기와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18세기이후 대대로 내려오는 와인하우스를 가진, 와인 수출회사를 운영하였고,
와인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였다.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라, 프랑스의 혼이 담겨 있으며, 가문의 긍지"라고, 늘 말씀하셨다.
1980년대 후반, 세계 와인시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산 와인이,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칠레산과 호주산이 유럽시장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버블로 인하여, 고급 와인시장이 활성화되었다.
이에 그녀의 아버지는, 프리미움 와인에 과감하게 투자하였다.
그러나, 1989년초, 일본의 버블붕괴가 시작되어, 프리미움 와인시장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녀의 아버지 회사창고에는, 수십억 원치의 와인이 쌓여 있었고, 결국 파산 선언을 하게 되었다.
200년 이상된 기업이 무너졌고, 상제리제 저택은 은행에 넘어갔으며, 그녀의 가족은 외곽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가야 했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렸고, 아버지는 매일 위스키만 마셨다.
소피는 소르본대학 법학부에 다니면서, 생텀미셀 거리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거기서 수많은 유학생들을 보면서, 그동안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활력을 느꼈고, 시야도 넓어졌다.
이곳에서 그녀는 운명의 그 사람, 한국인 청년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사람은 교환학생으로 파리에 왔으며, 매일 오후 3시에 찾아와, 구석자리 창가 테이블에 앉아, 의학서적을 펼쳐놓고 공부하였다.
그가 지쳐 보이면, 그녀는 카페오레 한잔을 갖다주곤 하였다.
어느 날 그가 창밖을 보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무슨 음악을 듣고 있냐?"고 그녀가 물어보니, 이어폰을 건네주었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백만송이 장미"였다.
그 노래의 음율이, 그녀의 마음에 절절히 와닿았다.
그가 가사를 설명해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백만송이 장미를 피우고 싶다"는, 순수하고 절실한 마음을, 표현한 노래라고 하였다.
공부가 끝나면, 그들은 테이블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이룩한 급속한 경제발전 이야기, 88 올림픽으로 한국이 세계에 이름을 알린 이야기,
그의 고향 태안의 아름다운 바다이야기 등을 하였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꿈 이야기 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작은 병원을 여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했다.
농어촌 지역에서 의료혜택을 받기 힘든 분들이 많다고 했다.
가족이 갑자기 아파도, 1시간씩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해서, 어릴 때에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봄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사이도 깊어졌다.
퇴근 후, 두사람은 생텀미셀 거리를 함께 걸었고, 센강변에서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었고, 그녀는 프랑스어의 정확한 발음을 가르쳐 주었다.
서로 너무 다른 환경의 두사람은,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새로운 사랑에 빠져 들었다.
거의 매일 만나서, 파리의 거리와 루브르 박물관 앞을 거닐었으며, 몽마르트 언덕에 올라, 파리의 야경을 감상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녀의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따뜻하고 연녹색 잎들이 짙어가던 어느 봄의 오후, 뤽상부르 공원에서,
그가 지금까지 자라왔던 이야기, 의사가 되기 위해 무척 치열하게 공부했던 이야기,
교환학생으로 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이야기 해준 것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문학에 대해 이야기 했고, 그는 한국의 시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 중에서도, 이별을 시로 승화시킨,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그녀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고, 기억에 오랫동안 남았다.
1989년 6월 여름의 문턱에서, 그에게 군입대 통지서가 날아왔다고 했다.
마지막 2주동안, 1초가 아까워서, 매일 아침마다 만나, 하루를 이야기하고, 점심은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으며,
저녁에는 센강변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며, 미래의 꿈을 이야기 하였다.
마침내 드골공항에서 아무런 약속도 없이, 이별을 하였다.
군입대하여, 3년간 군의관으로 근무해야 했기때문에, 아무런 약속도 못한 것이리라.
그는 백만송이 장미 카세트테잎을 선물로 주고, 한국으로 떠났고, 그것이 35년간의 기나긴 이별이 되었다.
소피는 몇달간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 다음해 봄에 딸을 낳았다.
그후 방송국 인턴이 되었고, 마침내 "France 2" 방송국의 메인 앵커가 되었다.
2024년 봄, 방송국에서 퇴근하여, 현재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딸의 집에 방문하였는데,
뜻밖에도 "백만송이 장미"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현관에서 주저앉아, 한참동안 울고 있었다.
딸이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래서 소파에 앉아,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진실을, 드디어 딸에게 말해 주었다.
그동안 K-팝과 K-드라마에 빠져있던 딸은,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찾아가 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딸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하였고, 고속버스를 타고 태안으로 갔다.
딸이 태안의 병의원 리스트를 다 뽑아와서, 며칠동안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랬더니, 어느 약국의 노약사님이, 그가 운영하는 병원의 이름과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 병원에 찾아가 보니, 그사람 아들이 진료를 보고 있었고, 그는 의료봉사를 가서, 다음날 온다고 했다.
그 다음날 일찍 찾아가 보니, 그가 병원문을 열고 있었고, 딸이 "아버지" 라고 부르니, 그가 소피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람의 아내는 3년전에 사별했다고 했고, 지난 35년간 한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그에게 환자 한사람 한사람이, 장미 송이라며, 최선을 다해 살아 왔다고 했다.
소피는 파리에 돌아가서, 방송국 일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현재 태안의 작은 집에서, 그와 함께 살고 있다.
딸은 한국과 프랑스간의 문화사업을 하고 있으며, 소피는 한국의 방송국에서, 프랑스어 강의를 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가장 긴 이별과 50대후반의 감격적인 재회, 다시 사랑하며... 다시 행복하며...
인종을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한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파리에서의 사랑,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
이보다 더 가슴아픈 이별이 있었던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