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스만 제국6 - 헝가리와 로도스섬을 점령한 위대한 군주 쉴레이만 1세 대제!
1520년에 쉴레이만 1세가 오스만제국의 10대 술탄으로 즉위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피비린내 나는 황위 계승 전쟁을 거친데 비해 그는 외아들인지라 그런 혼란 없이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했으니..... 오스만 역사에서 황위 계승 분쟁없이 즉위한 경우는 쉴레이만이 유일합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쉴레이만 이외에 위베이스 라고 한명 더 있기는 한데, 문제는 위베이스의 생모가 아들을
낳기 전에 하렘에서 쫓겨나 재혼을 했다는 것이니.... 이 경우는 황위 계승권을 주장할수가 없는데,
그래도 혈통상 동생인 것은 맞으므로 쉴레이만이 보호해 주어 이후 바그다드 대총독에 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쉴레이만 1세 긴 재위 기간(1520 ~ 1566) 이 끝날 무렵, 제국 영토는 3대륙에 걸쳐 227만 km²에 달했으니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부터 1566년 쉴레이만 1세 사망 시까지의 시기를 고전기
라고 하며 이 시기의 제국은 한번 떴다 하면 모든 국가를 긴장시켰을 정도로 유럽의 최강국으로 군림했습니다.
오스만 제국 최전성기를 이룩해 대제(大帝) 로 불리는 쉴레이만의 이름은 그 유명한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튀르키예어 표기이며..... 로도스 섬과 헝가리 왕국을 정복하여 서유럽 국가들
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종교 개혁 혼란기 와중에 서유럽을 제패한 카를 5세와 라이벌로 대립합니다.
해군을 양성하면서 해적 출신의 하이르 앗 딘을 제독으로 고용해 프레베자 해전에서 베네치아
공화국등 해군을 격파해 향후 40여년간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의 패권을 쥐게 되었는데
다만 빈 공방전과 몰타 공방전에서는 패배하여 유럽 가톨릭 세력을 결딴내는데는 실패합니다.
그는 정복군주와 동시에 문무 다방면에 조예가 깊고 예술을 애호하는등 명군주의 면모를 모두 갖춘 술탄으로,
심지어 적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사 조차도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무너뜨린 인물" 이라며 그를 찬양했으며 그리고 "작렬하는 천둥과 번개의 모습과도 같다." 라고 비유했습니다.
11살때 할례 의식을 치르고 어머니 곁을 떠나 랄라 lala 라는 감독관에게 교육받으면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를 배우고 15세에 아나돌루 에얄레트 산하 마니사의 총독을 지냈으며...... 17살대 셀림 1세
에게 코스탄티니예 총독 ‘카이마캄'(kaymakam) 으로 임명되었으며 에게해의 사루칸 총독으로 지냈습니다.
총독 시절 치안을 바로잡고 ‘카눈나메 kanunname (오스만 세속 법전)’ 을 제정했으니 여기서 즉위 전 통치
경험을 얻었고 부황이 사망하자 26세 라는 젊은 나이로 별다른 저항 없이 술탄의 제위에
올랐는데, 제국 10대 황제니 무함마드의 동료도 10명이었던 관계로 무슬림들에게 행운의 숫자로 여겨집니다.
과거 셀림 1세의 맘루크 왕조 정복 때 오스만에 항복한 태수 잔비르디 알 가잘리는 원정에 공을 세워, 정복후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오스만의 신하가 되었으나 마음으로는 충성하지 않았고 황제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술탄을 자칭하고 금요 예배에서 오스만 황제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시리아에서 오스만 관료와 군대를 몰아내고 주민들에게 오스만식 의복을 입는 것을 금했으며 군대를 일으켜
다마스쿠스 요새를 점거하고 베이루트와 트리폴리를 점령했지만 정작 반란에 동참할 거라고 기대했던
이집트에서 아무런 동요도 없었던데다가 사파비 제국의 황제 이스마일 1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당합니다.
일단 군사를 일으킨 잔비르디 알 가잘리는 알레포 공격에 나섰지만 보름동안 공격했음에도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고, 이윽고 쉴레이만이 파견한 진압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으니 후임 시리아 총독으로는 예니체리 지휘관 출신 아야스 메메드 파샤가 임명되었습니다.
1세기전 증조부로 정복군주였던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옮겨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긴 했지만, 쉴레이만 1세는 제국의 영역이 여전히
성에 차지 않다고 생각했으니.... 메흐메트 2세가 못 다한 정복 사업을 완성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유럽 정복 전초전으로 벨그라드 공략에 나섰는데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인 벨그라드 헝가리 왕국의
영토로 오스만 제국과 접한 헝가리 남부의 요새들 가운데 중요한 곳이니,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에 있어 최대 걸림돌로 증조부 메흐메트 2세가 대패하고 후녀디 야노시에게 전사할 뻔한 곳이었습니다.
1521년 2월 쉴레이만은 10만 군대로 진격하니 벨그라드의 헝가리군도 항전했지만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오스만의
깃발 아래 점령당했으며 성 내부의 정교도 세르비아인들이 가톨릭인 헝가리인과의 분쟁 끝에 오스만 군대에
성문을 열어준 것이니..... 헝가리인은 몰살당했고 세르비아인들은 코스탄티니예의 페트라 지구로 이주되었습니다.
왕 중의 왕, 군주 중의 군주 동로마와 트레비존드의 존귀한 황제,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의
강력한 제왕, 유럽과 아시아의 최고 지배자, 메카와 알레포의 통치자, 예루살렘의 왕,
모든 바다의 지배자인 술탄 쉴레이만이 로도스 섬의 구호 기사단장 필리프 드릴라당 에게 인사를 전하노라.
로도스의 신임 기사단장이 된 것을 축하한다. 섬을 부강하게 만들어 전임자들 보다 더 큰 영예를 얻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짐도 그대의 호의를 기대하는 바이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짐의 소중한 벗이 되어 짐과 더불어 환희를 누리게 될 것이다. 짐은 페르시아, 예루살렘,
아라비아, 이집트를 정복한 부황의 뒤를 이어 지난해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인 벨그라드를 정복했노라.
이교도들을 공격하자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였으므로 방비가 잘된 다수의 도시들을 거저 얻다시피 하고
주민들을 불태우거나 칼로 베어 죽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만들었노라. 승리를 거둔 짐의 군대는
겨울 숙영지로 보내고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으로 개선하려는 바다. - 1521년 쉴레이만 1세가 보낸 선전포고문.
1년이 지난후 에게해의 요충지 로도스 섬을 공격했으니 부황이 공략하려다가 미처 이루지 못하고 사망한 곳으로,
성 요한 구호 기사단이 긴 세월 장악하며 요새화시킨 상태였으니 구호기사단은 해상 교역의
요충지 로도스에서 해적질을 벌이며 오스만 제국이 아라비아 반도와 교류하는 것을 번번이 차단하고는 했습니다.
흔히 말해지는 기사단은 3개가 있는데..... 하나는 독일의 튜튼기사단이요, 둘은 프랑스의 템플 기사단이며 셋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성요한 기사단이니,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023년에 이탈리아
나폴리 남부 아말피와 살레르노의 상인들은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여행자를 보살피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이집트 칼리프의 허락을 받아 1048년에 예루살렘에서 의료봉사단을 조직 하여 순례자들을 보살펴 오다가
1080년 부터는 귀족의 자제인 수도사 들이 참가하였으며 수도사들의 참가가 늘면서
훗날 성요한 기사단은 이탈리아인으로 부터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인 들에게로 주도권이 넘어 가게됩니다.
1099년 십자군 전쟁이 터지면서 병원 봉사단은 전투 기사로 변신해 싸워서 동방에 예루살렘
왕국등 5개의 기독교 왕국 을 건설하고 기세를 올렸었는데.... 살라딘을 비롯한
아랍인들의 반격으로 결국은 11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이후에도 전투를
계속했으나 마침내 1291년 이스라엘 북부 아코(아크레) 가 함락되자 키프로스로 후퇴합니다.
1187년 십자군 성전 기사단 레이날이 카락성주가 되자 아랍과 평화협정을 무시하고 대상을 약탈하니 아랍인들이
살라딘의 휘하로 단결해 티베리아성을 공격하자..... 기독교 예루살렘 왕국의 왕 기 드 뤼지냥은 아랍군을
격퇴하기위해 출격했다가 갈릴리 호수 못미쳐 하틴전투에서 대패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아크레로 후퇴합니다.
3차 십자군에 참가한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 가 조카를 아크레 성주로 앉히기 위해 기 드 뤼지냥
을 키프로스로 쫓아 버렸는 데...... 1291년에 이슬람의 반격으로 아크레가 함락되어
요한 기사단이 키프로스섬으로 후퇴했을 때 키프로스 왕은 그 뤼지냥의 후손 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 키프로스섬에서도 더이상 버티기가 어려워지자 1308년 비잔틴제국 관할의 로도스
섬으로 후퇴한후 비잔틴제국의 보호 를 받다가..... 이듬해에 변심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아예 로도스를 빼았아서 성요한 십자군의 요새 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후 요한 기사단은 함대를 조직하여 지중해 동부에서 이슬람 상선을 습격하는 해적질로
악명을 떨치며 오스만 터키 등 이슬람 세력과 최전선에서 싸웠으니... 전성기에는
터키 서부 해안의 보드룸을 점령해서 성채를 쌓고는 동부 지중해를 제패하기도 했습니다.
로도스섬에는 검소하기로 유명한요한 기사단장실의 벽에는 다른 장식은 없이 “FERT
FERT FERT" 세 글자만 새겨져 있으니....... 불어로 ”참고 견디라"
는 뜻이니?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 오직 인내만이 살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요한 기사단이 1309년 무력으로 로도스섬을 손에넣고 이슬람과 싸운이래 200년의 세월이 흘러 1522년
오스만 터키의 술탄 술레이만이 로도스 정벌에 오르니..... 이슬람 해적이기도한 콜토글루가
지휘하는 300척의 전함이 섬을 봉쇄한 가운데, 1522년에 10만 대군이 로도스섬에 상륙하게 됩니다.
이에 귀족의 자제인 성요한 기사단 600명은 출신 지역에 따라 이탈리아, 프로방스, 영국 및
아라곤으로 나뉘어 붉은십자가가 새겨진 은색갑주를 입고 성벽 위에 정렬하는데 요한
기사단은 기사에다가 병사들을 합쳐도 5천이 안되는 군세로 유럽 세계의 지원을 간절히
기다리며 5개월 동안의 처참한 공성전 끝에 오스만 터키군 수만명을 사살하는 등 분전합니다.
이때 유럽에서는 독일과 스페인에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북이탈리아 지배를 놓고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전쟁중에 있었으며.... 영국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해 프랑스군의 후방을 노리는
상황이었으니, 설사 독일 황제에게 여유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영내의 프로테스탄트 신교도 척결이 급선무 였습니다.
원군이라고 해 보아야 베네치아 함대 몇척이 전부인 상황에서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로도스성은 함락될수
밖에 없는데.... 해상봉쇄가 이어지는 가운데 대포와 석궁, 불화살과 상벽 밑을 파서
폭발시키는 지뢰 공격에 대해 석궁과 대포 그리고 화염방사기인 그리스의 불로 무려 6개월 을 버팁니다.
마침내 기사단장 릴라당 이하 성요한 기사단이 항복을 하니 오스만의 술탄 술레이만은 대국의 군주답게
통 큰 은혜를 베푸는데... 예전에 이집트 왕인 살라딘이 예루살렘성 함락후 기독교인들을
재산까지 포함해서 모두 살려서 보낸 것 처럼, 크나큰 자비를 베풀어 기사단과 기독교도들을 방면합니다!
과거 기독교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성을 함락한후 항복한 이슬람과 유대인들을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사전
약속을 저버리고 전원 살륙했던 것과는 비교되는 바이니!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준다는 약속을 어긴데
대해서는..... 설사 하느님과 십자가에 서약을 했었지만 이교도와의 약속은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나요?
이때 십자군은 노인과 여자에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살아있는 것은 짐승까지 죽였으니.... 이는 더렵혀진
성지는 피로써만 정화할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쉴레이만 1세는 기독교도는 무자비하며
약속이나 신의를 지키지 않지만 ,이슬람교도는 자비심을 베풀고 신의를 중시한다는 헛된 자만심 일러나?
이때야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후일 오스만 튀르크제국이 살려서 보낸 요한 십자군이 몰타섬에 웅거하자
그 성요한 기사단을 치기 위해 4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뼈아픈 패배를 하는 것이라.....
마치 항우가 자만심에서 홍문에서 유방을 놓아준 것이며, 또 송양지인 (宋襄之仁) 을 보는 것도 같네요!
송나라 양공은 적은 군대로 대군인 초나라와 싸우는데 송군이 강변에 먼저 도착했고 늦게 온 초군이
강을 건너자 공자 목이는 "적은 많고 아군은 적습니다.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합니다."
송양공은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해선 안 되오."
결국 초군이 강을 건너 진을 친 후에 전투가 벌어졌으니.... 송군은 정정당당하게(?) 참패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는 요한 기사단이 대포를 제외한 일체의 무기류와 성물이며 재산까지 모두 싣고 가는
것을 허락하다 보니 배가 모자라는지라.....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터키의 배 까지
선심쓰듯 제공해 주어 멀리 크레타 섬 까지 실어다주는 배려를 해 줍니다? 성군 났네! 성군났어?
예전에 살라딘이 재산 까지 가지고 가도록 허락한 예루살렘왕국의 지도자와 병사들은 아코(아크레) 에
또아리를 틀고 살라딘에 극렬 저항했는데.... 로도스섬을 떠난 성 요한 기사단은 유럽 각지를
전전하며 러시아 까지 밀려갔다가 천신만고끝에 스페인왕 카를로스 1세의 계산적인
지원으로 1523년에 기사 200명이 몰타섬에 정착하니.... 오스만의 서진을 저지하는 선봉대가 됩니다.
성 요한 기사단은 몰타섬에 또아리를 틀고 이슬람 상선을 습격하는 해적질을 하는 가운데 오스만
황실의 여자까지 나포되자 화가 치민 오스만은 요한 기사단이 보급을 받은 크레타
섬을 공격해 점령했으며, 이후에도 요한 기사단의 해적질이 멈추지 않자 드디어 칼을 빼 듭니다!
1565년 5월 18일 오스만 튀르크 술탄 쉴레이만 1세는 이탈리아의 로마를 점령하기 전에 먼저 이탈리아 남부에 섬인
몰타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4만명의 대병력으로 침공 해오자 기사와 병사를 합쳐 8천명에 불과한
성 요한 기사단은 처절하게 싸워 함락되기 직전인 9월이 되자... 유럽 지원군이 도착하는지라 오스만군은 후퇴합니다.
만약에 오스만 투르크가 저 몰타섬을 차지해 불침 항모인양 요새로 만들고는 이탈리아를 공격하기 시작
했으면 지중해는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을 것이니... 쉴레이만 1세가 로도스섬
에서 저들을 몰살사키지 않고 살려서 보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니! 원래 은혜는 원수로 갚는 법 입니다.
몰타의 성요한 십자군은 기적 처럼 이슬람세력의 서진을 막아내 유럽을 구했는데....
훗날 1798년에 영국이 차지한 인도를 뺏기 위해 그 중간에 자리한
이집트를 정복하러 가는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아 함락되어 본거지를 잃게 됩니다.
하지만 유럽으로 물러난 성요한 기사단은 로마 바티칸의 배려로 거처를 마련하고는
전 세계 여러나라에 대사를 주고 받는등 21세기 오늘날 까지도 30명의
신부와 8천명의 기사를 거느린 어엿한 국가(?) 로서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성 요한 기사단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함께 싸운 성전기사단은 레반트의 요새 도시로 마지막
십자군의 거점인 아크레(아코) 가 함락된후 프랑스로 후퇴하였으나.... 명성을
흠모한 유럽인들이 토지와 재산을 기부하니 소유한 수도원만 무려 3천개를 헤아렸다고 합니다?
그 재산과 영지 및 명성을 탐낸 비열한 교황과 프랑스 왕 필립 4세 에 의해 1314년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잔인한 고문을 당한후 몰사죽음으로 멸족을 당했으니.... 프랑스왕으로서는 왕권 확립을
위해 자국의 영내에 큰세력을 요절내었던 것이니, 그럼 요한기사단은 그보다는 사정이 낫다고 해야 하나?
독일의 튜튼 기사단은 아크레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후 헝가리에 침입한 이슬람 세력 오스만군을
격퇴하고 폴란드왕의 요청으로 폴란드 동부에서 리투아니니등 야만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기사단령 을 세웠으니, 후일 프로이센의 모태로, 다시 말해 독일 제국의 시초가가 됩니다!
로도스의 기원으로는, 제우스가 태양신 헬리오스에게 분배한 섬으로 “태양의 섬” 이었으나 사랑하는 님프(요정)
의 이름인 로데(장미) 를 붙여 “로도스 섬” 이 되었다고 하는데, 고대에 로도스 항구에는 20m의 태양광선을
나타내는 방사형 관을 쓴 헬리오스 의 동상이서 있었는데 그는 불전차를 타고 동쪽에서 서쪽 으로 달렸다고 합니다.
로도스 섬의 역사를 살펴 보자면.... 395년 동로마제국 의 영토였으나, 654년에는 아랍인이,
1082년 부터는 베네 치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다시 비잔틴제국 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1309년에 성요한기사단의 수중에 떨어지고 1523년에 오스만 터키에 점령당합니다.
20세기들어 로도스섬 주민들이 터키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에는 이탈리아에 점령당하고
2차세계 대전 때는 독일군에 점령 당햬으며......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터키 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리스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영토는 전쟁의 승리로 늘어난다는?"
|
|
첫댓글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 한다
건강(建康) 가득한 멋진 시간(時間) 되시기를 기원 합니다
💘 ╭🌼
╰)💜
🌹🌻 (╭🍀
"송양지인" 이라고 했는데.....
저 오스만의 술레이만대제가 그러했으니!
이때 요한 십자군을 몰살시켰다면
그후 몰타섬에서 패하지 않았을 것이고....
몰타섬을 차지한 오스만제국은
유럽 지중해 세계를 장악헸을 것입니다.
인정을 베푼게... "은혜는 원수로 갚는다" 고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