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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야호♬ (lil_ili@hanmail.net)
친정 ★ 야호스토리(http://cafe.daum.net/yahof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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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손님>
4
"네, 수고했어요."
윤준의 옆에 앉아있던 중년의 사내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혼자서 거의 30분 동안 연기를 한 것 같은데 살짝 벽에
걸린 시계를 훔쳐보니 고작 5분 남짓이었을 뿐이었다.
나름 잘 해낸 것 같은 기분에 살짝 웃으며 내 맞은 편을 쳐다보았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거나 진지한
표정으로 서류에 체크하는 것과 달린 윤준은 생글생글 웃으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 연기가 마음에 들었나? 왜 저렇게 웃지?
"최후의 자기 홍보라든가,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뚫어져라 쳐다보는 윤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져서 살금살금 시선을 옮기려는 찰나, 윤준이 먼저 말을 내뱉었다.
그가 내뱉은 말에 다른 심사위원들도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았다.
물론 그 시선의 주인공이 된 나는 당혹스러움과 긴장 그리고 얘가 나한테 왜이러나 싶은 마음에 손 끝이 달달 떨렸지만.
"아...뭐...그냥...열심히 하겠습니다?"
"흠, 무난한 대답이지. 의문형이라는 것만 빼면."
윤준은 생긋 웃더니 자신의 서류에 무언가 가볍게 적어내려갔다. 윤준이 펜을 내려놓을 때까지 다른 심사위원들과의
가벼운 질의응답이 오고갔다. 연기를 왜 하고 싶으냐, 이 배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의 통과의례처럼 느껴지는
질문들이라서 나도 통과의례처럼 대답해주었다. 윤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들 모두가 '무난한 대답'이었다.
"이정도면 될 것 같네요. 수고 많았어요. 결과발표는 일주일내에 합격한 당사자에게만 연락이 갈 겁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아까 내 연기를 멈추게 했던 중년 사내의 마무리 멘트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려세웠다. 가볍게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못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부여받은 미션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에 마음은 가벼웠다.
오디션 분위기 보고하는 것도 완벽했고, 내 생물학적 성별도 들키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디션장 밖으로 나가기 직전, 문을 열어주는 직원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윤준과 두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씨익, 윤준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가더니 마치 뭔가를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왜저렇게 봐?
"대기번호 9번."
"네, 넷?"
느닷없이 윤준이 나를 불러세우자 다른 심사위원들도 살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윤준을 쳐다보았다. 윤준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심사위원들의 시선 사이로 오로지 나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윤준의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진심으로 너를 위해서 하는 얘긴데..."
예쁘게 휘어지던 윤준의 입꼬리가 차츰차츰 자신의 원래 위치로 돌아오고 있었다. 언제나의 왕자님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윤준은 살짝 말꼬리를 흐리더니 물끄러미 날 쳐다보았다. 톡톡, 그의 손끝이 조용히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다신 이쪽 계열에 얼씬거리지마. 열심히 하겠다는 의문형의 각오도 얘기하지 말고."
"..."
"네가 한 건 연기가 아니야. 넌 연기를 못하는게 아니라 할 줄 모르는 애야."
"그건...!"
"네가 무슨 이유때문에 이 오디션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배우가 꿈은 아닐거야. 배우가 꿈이라면 넌 결코 의문형의
각오를 해서도 안되고, 심사위원이 물어본 질문에 그렇게 뻔하게 대답해서도 안 돼. 심지어 오디션이 끝나고 나갈 때
심사위원 눈치를 살펴 볼 여유도 가져서는 안 돼. 너를 제외한 다른 여덟명의 참가자들은 모두 오디션이 끝난 뒤 격한
감정을 가지고 나갔어. 자신을 향한 분노, 나를 향한 분노, 슬픔, 아쉬움... 너는 그 무엇하나 가지고 있지 않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얼음처럼 굳은 자세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준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모습에 윤준은 피식, 가볍게 웃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마치 '넌 안 돼.'라고 거절하듯이.
"네가 쉽게 얻은 아홉번째 대기자 자리를 꿈꿨던 수많은 배우 지망생들을, 너는 오늘 짓밟은 거야. 그렇다면 적어도
너는 열심히 했어야 했어. 우리에게 '연기'를 보여주려는 노력은 했어야 했지."
"..."
"다신 배우를 꿈꾸는 사람들을 짓밟지마. 너한테는 쉬운 기회가 그들한테는 목숨이 달린 일이었을수도 있어."
지독하리만큼 무거운 침묵이 오디션장에 꾸역꾸역 차올랐다.
윤준은 나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휙 돌렸다. 그리고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상태로 너무나 경쾌하게 말했다.
"수고했어, 나가봐요."
"...수고...하셨습니다..."
끼이익-하고 낡은 소리를 내며 오디션장의 문이 닫혔다. 오디션장 밖으로 나와 멍하니 서있다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꾸역꾸역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와서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네가 한 건 연기가 아니야. 넌 연기를 못하는게 아니라 할 줄 모르는 애야.'
'수많은 배우 지망생들을, 너는 오늘 짓밟은 거야. 그렇다면 적어도 너는 열심히 했어야 했어.'
'다신 배우를 꿈꾸는 사람들을 짓밟지마.'
경쾌하게 울리던 윤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남아 끊임없이 반복되고, 또 반복됐다.
"...토 할 것 같아..."
주체할 수 없을만큼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왕자님 앞에 발가벗겨져 던져진 거지처럼, 너무 부끄러워서 두 번 다시 왕자님을 보고싶지 않을정도로.
*
"낙원아, 이모가 뭐 사왔는지 볼래~?"
"아, 이모..."
"네가 오늘 진짜 잘해줘서 이모가 기분이 좋아서 글쎄...꺄아악! 낙원아 너, 머리가, 머, 머리가 왜이래? 무슨 일이야!"
마트에서 한아름 장을 본 듯 요란하게 들어오는 이모를 마중하기 위해 현관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환하게 웃으며
날 향해 고개를 돌리던 이모는 그제야 내 상황을, 내 모습을 파악한 듯 장바구니를 떨어트리며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이모, 이건 그냥 오디션 때문에..."
"여자애가 머리가 이게 뭐야! 이건 저기저기저기 산골하고도 구석에 사는 애들도 안할 법한 머리잖아! 오디션? 오디션이
왜? 누가 너한테 목숨걸고 하랬어? 이게 뭐야! 이걸 어떻게 수습할거야!"
"모자를 벗으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여자인 거 들킬까봐...아이 참, 이모도 진짜 오버스럽다니까. 머리는 또 자라요.
이건 내일 아침에 미용실가서 다듬으면 돼요."
"그래도 아깝게...머리 찰랑거리는 거 예뻤는데..."
오디션때문에 내가 머리를 잘랐다는 사실이 꽤 미안했는지 이모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내 덥수룩한 머리를 계속
쓰다듬고 어떻게든 정리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모가 내 머리를 쓰다듬을때마다 바닥에는 아주 자잘한 머리카락 부스러기가 떨어질 뿐이었다.
내가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머리카락을 잘라냈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듯.
"와~ 나 안그래도 배고팠는데! 맛있는 거 해주려고 장봐온거죠? 뭐해줄거에요?"
"낙원아..."
"이모, 정말 괜찮으니까 머리 얘기 이제 그만해요. 그보다 나 임무 괜찮게 수행한거죠? 이제 엄마 만나게 해줄거죠?"
이모는 소리내어 대답하는 대신 날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듯한 미소였지만, 적어도 그 미소가
거절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나 또한 이모를 보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이내 이모는 장바구니를 식탁 위로 올리더니 장봐온 것들을 하나둘씩 식탁위에 올렸다. 고기부터 과자까지 없는 게
없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우와."
"뭘 감탄하고 있어. 다 네가 먹을건데. 쳐다보고만 있지말고 이거랑 이거는 냉장고에 넣고 저거는 김치 냉장고에 넣어."
"네!"
"그리고 오늘 정말 잘해줬어. 고마워, 네 덕에 오디션 분위기가 어땠는지 실감나더라. 살벌했겠어."
"네, 그래도 앞에 여덟명이 가진 열정은 칭찬하더라구요."
"응? 누가?"
"왕자...아, 아니 윤준이요."
"그래? 그래도 아주 인간미 없는 녀석은 아니었네. 너는? 그녀석이 너는 칭찬 안해줬어?"
멈칫.
야채를 냉장고 안에 넣던 손이 나도 모르게 멈춰졌다. 잠시 멍하니 냉장고 문을 연 채 서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윤준의 말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머리속을 빙빙 돌고있는 것만 같았다.
"칭찬이라기보단 조언을 해주더라구요."
"조언? 윤준이?
"네."
"뭐라고 했는데?"
다시는 얼씬거리지 말라는 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꿈을 쉽게 짓밟지 말라는 말.
내가 너무 부끄러워져서 어딘가로 숨고 싶게 만들었던 그 말.
"...비밀이에요."
그래서 입 밖에 낼 수 없는, 너무나 비참했던 말.
"얘는, 재미없게. 것보다 낙원이 네가 보기에는 누가 될 것 같니? 캐스팅."
"글쎄요. 다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집에 돌아가던데. 그래도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1번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1번? 그 뾰족하게 생긴 애? 어머, 낙원아. 걔는 안 돼. 걔도 구색 맞추려고 그냥 아는 사람 추천받아서 넣어준거야.
걘 작가가 원하는 비주얼이 아니야. 오히려 작가가 원하는 비주얼은 네가 더 가깝지."
"네? 에이, 이모 농담도..."
"아니야. 진짜야. 그 배역이 소년의 느낌도 나고 여자의 느낌도 나는 캐릭터거든. 그래서 작가 입맛에 맞는 배우를 찾는게
어려워. 배우 입맞에 맞으면 윤준이 싫어하고, 윤준 입맛에 맞는 배우는 없고. 피디님만 중간에서 죽어나더라고."
"하하, 이모도 중간에서 죽어나잖아요."
"정답! 요점은 그거야. 내가 너무 피곤해."
"누가 합격했는지 결과 나왔대요?"
"아니, 안그래도 오디션 끝난 시간 맞춰서 연락했더니 피디님이 아직 모르겠다고 내일 회사에서 보자고 하더라고."
"아, 그렇구나...나중에 발표나면 저도 알려주세요. 궁금하니까. 그리고 저 꽤 수고했잖아요."
일번부터 팔번까지, 내가 본 사람중에 누가 왕자의 눈에 들었는지 사실 궁금하긴 하다. 내가 연기를 못하는 게 아니라
연기가 아닌 것을 했다는 걸, 사실은 연기를 할 줄 모른다는 걸 단박에 알아낸 윤준의 눈에 띈 '진짜' 배우가 궁금하다.
샐죽 웃으며 이모에게 넌지시 부탁하자 이모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 혹시라도 낙원이 네가 합격했다고 하면..."
"이모,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네버, 절대, 죽어도 없어요."
"어? 뭘 정색을 하고 그래? 농담이야, 농담!"
"농담으로도 하지 마세요. 왕자님이 들으면 저 죽을지도 몰라요."
"응? 왕자님?"
"네, 왕자님이요. 저 사형시킬걸요?"
이모는 미국에 왕자가 어디있냐며, 재치있는 농담이라고 깔깔 웃었지만, 어째서인지 앞으로 두 번 다시 윤준을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꼭 체한 것처럼.
*
"수고 많으셨어요. 커피 드릴까요? 아니면..."
"아 녹차로 부탁드립니다. 커피는 밤새 너무 마셨더니 마시고 싶지 않아서요. 으으."
이사의 방에 들어온 피디는 살짝 피곤한 표정으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난 뒤 곧바로 소파 위에 추락하듯 드러누웠다.
예의에 어긋날만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피디가 밤새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사는 별다른 말없이
자신의 비서를 불러 녹차와 커피를 갖다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음, 어려운 질문인데...긍정적인 대답과 부정적인 대답 중에 무엇이 듣고 싶으세요?"
피디의 말에 문을 닫고 돌아선 이사가 생긋 웃었다.
"우리 드라마가 망하지 않을 대답을 원해요."
"오, 그게 말이죠...캐스팅의 윤곽은 드러났는데 문제가 있어요."
"또 무슨 문제가 있어요? 준이가 또 싫대요? 내 윤준 이자식을..."
"아니에요. 사실 준이는 오디션때 아주 잘해줬어요. 오디션이 끝난 뒤 심사표를 내면서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단 한 명만 아니면 된다고 했죠."
"그럼 선택권이 여덟명이나 있는데 뭐가 문제에요?"
"일단 먼저 보시겠어요?"
피디가 가방에서 서류 한뭉치를 꺼냈다. 총 다섯개의 종이 뭉치에는 각각 맨 앞장마다 심사위원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이사는 힐끔 피디를 쳐다보다가 제일 먼저 피디의 것을 집어 들었다.
"전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줬어요. 연기는 다 비슷해서 이미지가 맞는 사람에게 점수를 좀 더 줬죠. 이게 준이가 체크한
심사서류에요."
이사는 피디의 것을 한번 훑어본 뒤 준의 것을 건네받았다. 낙원이 1번부터 8번까지 모두 초토화되어 울면서 나가거나
저주하면서 나갔다고 하길래 엄청 심하게 심사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1번부터 8번까지, 준은 그 누구의 심사서류도
점수를 체크하지 않았다.
"누구도 평가할 수 없었대요. 진심으로 연기가 하고 싶어서 연기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자기는 그냥 그걸 보는 게
즐거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중에서 누구를 뽑든 상관하지 않고 동의하겠다고 했어요."
"9번은..."
"준이가 보기에 그건 연기가 아니었대요. 연기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거겠죠. 최하점이에요."
"...그런 것 같네요."
1번부터 8번까지의 대기자들에게는 플러스 점수도 마이너스 점수도 주지 않았던 준이 9번 대기자의 서류에는 마이너스
백이라고 적어두었다. 그 옆에 '실격, 얘만 아니면 됨'이라고 적어두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이사는 나지막이 웃으며 서류를
덮었다. 9번 대기자라면 오디션을 위해 머리를 더벅머리로 만들어버린 자신의 조카니까 말이다.
"...윤준의 조언을 얘기 안해준 이유가 있었군."
"네?"
"그냥 혼잣말이에요. 자, 다음에 제가 봐야할 건 뭐죠?"
"이거요. 작가가 체크한 심사서류에요."
피디가 긴 한숨을 내쉬며 이사에게 서류를 건넸다. 작가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힐끔 확인한 이사는 아무렇지 않게 서류를
넘기다가 점점 굳어지는 표정을 어쩌지 못한 채 당혹스러운 듯 맨 마지막 페이지를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준이랑 정확하게 반대애요. 1번부터 8번까지는 모두 최하위점, 심사 불가라고 적혀있는데 오직 9번한테만 점수를
줬어요. 강한 어필이에요. 작가는 9번이 아니면 안되겠다는거죠."
"대체 왜요? 1번부터 8번까지의 애들도 나쁘지 않아요. 특히 연기가 비슷하다면 비주얼 괜찮은 애들이 중간 번호에..."
"아니요. 작가가 원하는 비주얼을 만족시켜준 인물은 단 한 명이에요. 9번 대기자. 소년과 여인 사이, 정확히 그렇게
얘기하더라구요. 오디션이 끝나고 난 뒤, 준이가 나가고나서 작가가 말하더군요.
9번이 아니면 더이상 대본을 쓰지 않겠다고. 오직 9번이어야만 자기가 글을 쓸 수 있다고. 자신이 생각한 것과 완벽히
어울리는 배우를 앞에 두고 다른 배우를 쓸 수가 없대요. 다른 배우를 뽑으면 절대로 글이 써지지 않을 거래요."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래요?"
"아시잖아요, 그 작가 자기가 내뱉은 말은 절대로 지킨다는 거. 그리고 원래 좀 또라이인거."
"맙소사. 9번은...걔는 곤란해요 피디님."
이사가 인상을 확 찡그리며 피디에게 말했다.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 보였으나 간혹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끝이 현재 그녀의 긴장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사실 9번한테 최고점을 준 건 작가만이 아니에요."
"그럼 또 누구요? 피디님도 최고점 주셨어요?"
안될 말인데.
이사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피디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피디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웃더니 이사가
아직 확인하지 않은 다른 심사서류를 슥 앞으로 내밀었다.
"한소에요."
"네?"
"한소도 심사에 참가했어요. 배우 중에 준이만 특혜처럼 오디션 심사를 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소를 불렀어요.
현정이는 해외에서 광고 찍고 있었거든요."
"한소도 9번한테 최고점을 줬어요?"
"네, 최고점을 줬어요. 물론 준이가 최하점 준 걸 알고 저한테 자기가 최고점 준거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만요."
"한소는 준이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니까요. 그럼 한소 의견은 기각할 수 있어요. 저는 준이가 또 문제 일으켜서 배우들
사이에 불화 일어나는 거 정말로 원하지 않아요. 차라리 작가를 설득하세요 피디님."
"어...그건 좀 곤란해요 이사님."
"왜요? 피디님은 작가 설득 잘하시잖아요.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충분히 그러실 수 있..."
"그러고 싶지 않아요."
"...네?"
피디의 말에 이사가 말하던 것을 멈추고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의 미간에 잡힌 내 천(川)자 모양의 주름이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얼마나 신경쓰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피디는 이사를 바라보며 여유있게 녹차를 한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 걱정 마세요. 저한테 좋은 방법이 있으니 제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피디의 말에 작가가 다시 되물으려던 찰나, 똑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이사가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문이 벌컥 열렸고 한 손에 커피를 쥔 준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피디님, 이사님 저 찾으셨다면서요? 오디션 결과 나왔어요? 몇번이에요? 누구에요?"
"어, 방금 결정됐어. 작가님이랑 한소 그리고 나와 이사님의 의견을 모두 합쳤어."
"누구에요?"
"그 전에 나도 네게 물어볼 게 있어 준아."
피디가 반쯤 누워있던 몸을 소파에서 일으켜세웠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이사와 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준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준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피디를 바라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새로 합류한 배우를 만나고 싶어서 당장이라도
달려갈 법한 표정이었다.
"준아 넌 우리 드라마가 산으로 가는 막장 스토리가 아니길 바라지? 작가님이 처음 시놉시스대로, 초반 시나리오대로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글을 끝까지 쓰길 바라지?"
"당연하죠. 막장 드라마를 찍고 싶어하는 배우가 어디있어요? 가뜩이나 이거 시놉시스도 좋은데. 그래서 제가 몸값
낮추고 출연을..."
"그럼 넌 우리 드라마를 위해서 네 욕심을 조금 더 버리고 희생할 수 있니? 몸값 얘기가 아니야. 더 큰 걸 포기할 수
있냐는거야."
"뭐를요?"
"한소는 이 드라마의 이미지에 맞는 배우가 되기 위해 거액의 광고를 거절했어. 현정이는 어떤 연예매체와도 인터뷰를
하고 있지 않아. 아마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될 배우는 드라마 방영 기간 내내 그 어떠한 자기 홍보도 하지 못해.
너도 그들처럼 배우가 내세울 수 있는 무언가를 희생할 수 있니? 예를 들면 너만 고집하고 모두가 반대하는 일에 대해
네 고집을 꺾고 그들의 의견을 따른다거나..."
피디가 슬쩍 흘린 말에 이사는 그제야 눈치 챈 듯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피디와 준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는
피디 뒤에서 준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된다고 대답하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준은 이사를 보지 못한 듯 가벼운
실소를 내뱉으며 피디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죠. 저만 고집 부릴 일이 뭐가 있어요? 전 현장에서 모든 스탭의 얘기에 항상 귀 기울이는데."
"그 말, 약속할 수 있지?"
"네."
"그럼 네가 지금 당장 해줘야할게 하나 있어."
"뭔데요? 예능 나가서 하하호호 웃기?"
준의 말에 피디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가방에서 새로 얇은 서류를 하나 꺼내 준에게 건넸다. 준은 아무생각 없이
서류를 받아들었고, 준이 서류를 확인하는 순간 준과 이사 모두 표정이 굳어버렸다.
"대기번호 9번, 가서 데려와. 그리고 네가 가르쳐. 너 빼고 모두가 동의한 우리의 마지막 배우니까."
***
전격발탁!
야호♬
(+혹시나, 혹시라도, 지금 상황으로는 안계실 것 같지만 업쪽을 받으실 분들은 ‘♬’ 해주시면 됩니당!)
첫댓글 팬카페 회원이에요~ 인소닷에도 올라올줄이야;
완전 재밌어요~~~ 어떤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지 무지무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