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 김구』 책에 대하여
김구에 대해 우리가 배워왔던 것은, 일제로부터 조선이 망하자 중국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관여하다가 주석이 되어 항일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끈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순신 장군과 비교를 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어떤 독립운동가보다 위대한 인물인 것으로 배워왔다.
이와 달리 김구에 대해 해방 전후의 행보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비판과 관련된 것 중 대표적인 것이 김구가 이끌던 한독당의 비밀요원 안두희에 의해 사살된 것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 정안기 씨는 『테러리스트 김구』|라는 학술연구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제국주와 맞선 독립운동가와 다른 김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건국 이후 어떤 정권도 김구에 대한 비판한 사실이 없고 1987년 노태우 정권 당시 이루어진 9차 개헌에서는 김구로 대표되는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이 개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에 맞춰 김구는 어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신성시 된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김구로 귀결되고, 독립운동은 김구로부터 시작되어 마무리된 것처럼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그런 김구가 어떤 인물인지, 임시정부 시절부터 해방 이후 발생한 살해 사건 중 많은 것들이 김구의 지시에 의해 발생한 것이고 이는 테러라는 것이다.
정안기 씨는 김구에 의해 이루어진 많은 테러 중에 일본제국주의 대한 테러는 단 두 개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하나는 이봉창이 1932년 1월 8일 일본 제국 도쿄 경시청에서 쇼와 덴노 일본왕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져 살해를 시도한 폭탄을 투척한 사쿠라다몬사건이다.
또 하나는 윤봉길이 1932년 4월 29일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이겼다고 주장하며 상하이시 훙커우 공원)에서 쇼와 덴노 탄생 기념 행사와 전승 기념 행사를 가졌다. 전날 구파 백정기도 중국인 아나키스트 왕야차오의 도움을 얻어 나름대로 계획했지만 입장권을 얻지 못해 실패한 사건이다(나무위키 인용).
정안기 씨는 이봉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테러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주저하고 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1896년 2월 안악으로 돌아오다가, 치하포(鴟河浦)의 객줏집에서 상인으로 변복하고 밀정 활동을 하던 일본군 특무장교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발견하고는 국모의 원수 갚는 일의 하나로 그를 처단하였다고 쓰고 있으나 정안기 씨는 김구가 체포되어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김구가 살해한 사람은 대마도 사람으로 약장수이며, 천 냥의 돈을 빼앗은 강도살인 사건이라고 하고 있다. 이날 김구는 약장수를 죽인 후 뼈와 살을 가르고 죽은 자의 피를 마시기까지 하였다고 비판하면서 민비 살해범을 죽인 것처럼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또한, 김구는 1894년 19세의 나이로 동학농민운동 제2차 봉기에 황해도 동학군 접주가 되어 700명의 총군(銃軍)을 거느리고 수천 명의 황해도 동학군과 함께 해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에 패하여 도주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정안기 씨는 김구가 동학의 접주가 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일부 자료에 의한 당시 동학군은 민가를 급격하여 돈과 곡식을 빼앗는 등 강도질을 하였다고 한다.
정안기 씨는 이 책에서, 김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해방 후 국내에 들어와서도 테러에 관여한 테러리즘에 의한 테러를 자행하였다고 쓰고 있다. 이 학술연구 책에 대해 좌익들은 뉴라이트가 이승만을 미화하고 독립운동을 자체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을 하고 있으나 이 책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김구가 알려진 대로 독립운동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김구라는 인물이 중국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한 것인지에 대한 것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김구가 정적과 자신을 반대하던 독립운동 인사 등에 대한 암살에 관여한 것이 사실인지 등에 대해 독립운동 관련 서적, 독립운동 관련 인물의 자료, 중국, 일본의 자료 등을 참고하여 하나하나 밝혀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