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60)
어머니의 죄를 사랑으로 품다
오모리 타츠시의 <마더>
어머니로서의 본질적 속성
예나 지금이나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과거의 어머니가 무 조건적인 사랑이었다면, 오늘의 어머니는 그 ‘무조건’에 다소 이기적인 계산이 다소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가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성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유전자는 그대로 핏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어머니와 자식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빠져 있을 때, 어느 어머니가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자식을 내팽개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자식을 먼저 구할 것이다.
모성의 본질적 속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모성은 문명과 문화의 우열이나 차별에도 구별되지 않는다. 문명과 문화가 뒤진 오지 국가의 어머니는 문명국가의 어머니보다 어머니로서의 모성이 뒤질 것이라는 생각은 크나큰 착각이다. 오히려 오지 어머니들의 모성이 문명국가의 그것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전혀 뒤지지 않을 것이다. 문명국보다 더 질기고 강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시적 본능이 문화적 계산보다 강하고 크다는 일반론의 원칙에서 볼 때는 분명 그럴 것이다. 이처럼 어머니의 모성은 예와 지금, 지역의 차이와는 상관없는 보편타당한 진리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신문 지상이나 방송을 통해 나쁜 어머니로서의 옳지 못한 모성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강한 거부감을 가진다. 아울러 모성의 배반적 상황에 역겨움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던 보편타당한 진리가 무화되어 버리는 느낌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나쁜 어머니를 표상으로 내세운 영화 한 편이 있어 가히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국화와 단두대>(2018), <일일시호일>(2019)로 널리 알려진 일본의 중견 감독인 오모리 타츠시가 만든 넷플릭스 개봉작인 <마더>(2020, 오모리 다츠시 감독, 127분)가 바로 그런 영화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헌신과 사랑으로서의 지극한 모성을 송두리째 배반하고 있는 영화이다. 자식에 대한 책임감이나 헌신적 사랑은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힘든, 그야말로 모정의 막장 드라마에 가깝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끔찍한 역겨움의 감정을 내내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장면 장면이 모성의 역겨움으로 가득하고,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거의 백치에 가까운 어머니의 막장 서사로 넘쳐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어머니의 부도덕성에 한 마디 거역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아들의 무기력한 모습에 화가 치밀 수도 있을 것이다. 끝내는 나쁜 어머니의 사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죽이고 돈을 훔치는 아들의 살인 행각에 치솟는 분노와 함께, 지금까지 자신이 굳게 믿고 있던 모성의 배반적 상황에 맥이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도 죄가 되느냐’는 아들의 무기력한 변명을 위선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은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어떻게 대해 왔는가를 더듬어 보며 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백치에 가까운 모성의 무기력증
동양적 수묵화에 가까운 아름다운 다도의 세계를 통해 일상의 아름다운 정중동의 풍경을 그린 <일일시호일>(2019)의 오모리 다츠시 감독이, 거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어머니의 무책임한 패륜적 행위를 만들었다는 것이 거의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 변신을 하고 있다. 감독은 모성의 무책임한 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줄 뿐 내용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놓고 있다.
남편과 이혼한 채 초등학생 아들 슈헤이(오쿠다이라 다이켄 분) 와 함께 무절제하게 사는 어머니 아키코(나가사와 마사미 분)는 거의 백치에 가깝다. 일상의 무절제함과 윤리적 책임 의식을 방기한 도덕적 해이,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없이 행동하는 것은 백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키코는 다니던 직장마저 팽개치고, 아들이 결석하고 있는데도 나무람 없이 아들과 함께 비윤리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심지어는 어린 아들 슈헤이가 함께 있는 데에도 역시 무책임한 떠돌이 남자인 료(아베 사다오 분)와 살을 섞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료와 함께 기거하며 패륜적 행위를 일삼는다. 사채업자에게 고리의 돈을 빌려 유흥비로 탕진하는가 하면, 여동생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서도 친정 부모를 찾아가 거짓으로 돈을 빌려달라고 행패를 부린다. 심지어는 아들을 방기한 채 집을 나갔다가 전화로 아들 슈헤이에게 차비를 보내달라고 한다. 일주일 후에 그녀는 무책임한 떠돌이 남자 료를 데려오기도 한다. 아들 슈헤이 역시 엄마의 현실에 대한 무감각한 시각과 무책임에 전염되어 엄마의 그런 행위에 대해 비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수용하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한다. 엄마의 무책임한 윤리의식에 대한 무기력한 반응인지, 아니면 자신 역시 엄마의 자장 속에 휘둘려 옴짝달싹 못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녀의 방탕한 일상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감독의 태도는 냉정하고 극사실주의적인 시각을 유지한다. 관객에게 그녀의 방탕하고 무절제한 행위를 보여주기만 할뿐 모든 해석은 삼가고 있다. 즉, 묘사하고 서술하기만 할 뿐 이에 대한 해석과 비판은 관객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건전한 상식과 윤리 의식을 지닌 관객이라면 아키코의 이러한 비윤리적 행위에 아연실색한 채 화가 치밀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들 슈헤이의 엄마에 대한 어정쩡한 대응에 짜증과 분노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슈헤이는 그런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키코는 슈헤이를 전 남편에게 보내 수학 여행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오게 한다. 아버지는 슈헤이에게 자신과 함께 있을 것을 권할 때 슈헤이가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하며 그 제의를 거절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엄마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키코가 선악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고, 조직사회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없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점은 분명하다. 아들 슈헤이 역시 그런 엄마의 비윤리적 자장 속에 갇혀 판단력이 흐려져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린 여동생을 구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그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를 리는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슈헤이의 엄마에 대한 사람은 아무런 조건이 없는 맹목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의 슈헤이가 엄마에게 의존적이었다면, 어느새 청소년으로 자라 여동생까지 두게 된 그는 역설적으로 가장의 역할과 더불어 어머니의 모성을 대신하는 존재로 거듭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헤이가 할머니를 죽이지 않으면 여동생인 후유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엄마의 협박에 그는, 자칫 잘못하면 이나마 버텨온 가정마저도 산산이 부서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칼을 들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쁜 모성애에 대한 윤리적 회복의 역설
만약 이 영화가 나쁜 엄마의 전형인 아키코의 패륜적 행각으로만 서사가 진행되었더라면, 오히려 정상적 삶을 희구하는 관객의 숨통은 꽉 막혀 윤리적인 질식사의 불운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청소년으로 자란 슈헤이의 엄마에 대한 무 조건적인 사랑은 그런 막힌 숨통을 트는 방어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또 하나 슈헤이에게 대안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무딘 윤리적 감각을 일깨워 준 보육원 출신의 가정주부 아야(카호 분)의 대체적 모성 역시 이 영화의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아야는 살인을 저지른 슈헤이에게 누가 시켜서 살인을 지질렀느냐고 묻는다. 그녀의 질문은 아키코의 사주에 의한 살인이라는 전제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런 아야에게 슈헤이는 “전부 제가 했어요. 엄마가 시키지 않았어요. 저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그녀의 의혹을 묵살한다. 왜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느냐고 아야가 묻자 슈헤이는 “엄마는 혼자 살지 못하잖아요? 달리 어쩌겠어요. 엄마를 사랑하는 게 나쁜 일인가요?”라고 오히려 반문하며 의혹에 대한 궁금증에 쐐기를 박는다. 슈헤이를 면회하러 온 아야는, 여동생 후유카가 ‘오빠 슈헤이가 엄마를 사랑한대요.’라는 말을 하더라고 전해준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슈헤이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평온함에서 우리는 가족의 복원에 대한 그의 희망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달리 어쩌겠어요?’라는 슈헤이의 반문에서 관객은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 형태가 정상적이건 아니면 비정상적이건 가족은 가족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역설적인 가족의 풍경을 통해 가족의 정상적 회복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뒤틀리고 왜곡된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상처받고 곪아 있는 가족의 추한 모습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모성 역시
비윤리적이고 무절제한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다. 그러나 일견 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족 역시 상처투성이고 곪아 있다. 다만 그러한 환부가 위선적인 방패막이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곪아 있는 환부가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오히려 평온하고 안락한 가정의 모습일수록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기감을 더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가족이라는 외피를 둘러쓰고 있지만, 실제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더 곪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집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자신의 방으로 칩거하는 이기적인 소통 부재의 모습, 보이지 않는 가족 간의 대화 단절과 균열, 한 번 틀어지면 좀체 회복하기 어려운 구성원 간의 갈등과 불신은 어느 가족에게나 도사리고 있다. 이 영화처럼 속을 까발려 보여주지 않고 있을 뿐이 아닐까?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 물보다 더 진한 피로 연결되어 있을수록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한다. 한 번 틀어지면 거의 회복 불능인 것이 가족이고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한다는 하나의 반면교사인 셈이다. 다만 그것을 역설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계간『문장』2022년 여름호)
첫댓글 어제 영화를 찾아 보았습니다.
머리에 먹물이 들수록
더 비정해지는 세상.
슈헤이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네요.
그렇지만 자기 인생은 결국 감옥행.
찾아간 아야에게
'여기가 더좋다. 밥을 먹을 수 있고 책을 볼 수 있어서.'
누구에게는 의미없는 일상이지만
누구에게는 귀한 하루입니다.
나쁜 남자 연기를 한 '류'에게는 연기상을
주고 싶었어요.
좋은 평 올려주신 김문홍 선생님!
명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