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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 명장 곽자의(郭子儀, 697년∼781년)
10월 7일, 토번군은 장안으로 접근한다. 토번이 편교(便橋, 서위교, 섬서성 함양시 서남쪽)을 건넜다는 소식을 들은 곽자의가 급히 장안으로 귀환했으나 당대종은 이미 섬주(陝州)로 파천을 결정하고 장안을 떠난 상태였다. 거기다 이렇게 황제가 피신하자 황제를 호위하던 금군이 뿔뿔히 흩어졌으며, 사생장 왕헌충이 이끄는 400여 기병이 황제를 버리고 다시 장안으로 들어와 풍왕 이공 등 10여명의 왕들과 함께 토번으로 귀부하려 들기도 했다. 심지어 이 왕헌충은 “지금 주상께서는 동쪽으로 옮기셨고 사직에는 주인이 없는데 영공께서는 자신이 원수이시니 폐위시키고 세우는 일은 한 마디 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여 곽자의에게 당대종을 폐위시키고, 같이 있던 황실 출신 왕들 중 1명을 황제로 세우자고 설득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곽자의는 그를 나무라고 왕헌충의 병력을 인수, 당대종이 거하는 행재소로 이동해 호송하게 하고, 자신은 기병 30기로 후방에서 이를 엄호한다. 때마침 하북에 있던, 어조은이 지휘하는 신책군까지 섬주에서 당대종과 합류하면서 간신히 당황실은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다. 10월 9일, 토번은 장안을 장악한다. 장안에 입성한 토번은 오던 와중에 억류한 광무왕 이승굉을 황제로 임명하고, 백관을 두면서 한림학사였던 우가봉을 재상으로 삼기까지 했다. 이후 토번은 장안을 심하게 약탈했다고 전한다.
10월 12일, 당대종은 섬주에 도착했고, 흩어졌던 백관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다. 기병 30기로 어가를 엄호하던 곽자의는 어숙천(御宿川, 장안의 서남쪽을 흐르는 강)에서 산을 끼고 돌아 동쪽으로 이동, 남전(藍田, 섬서성 남전현)을 지나다가 원수도우후 장희양 및 봉상절도사 고승과 합류했고, 지휘병력은 1,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후, 곽자의는 왕연창을 상주(商州, 섬서성 상주시)로 보내 장안에서 파천하면서 흩어진 6군(금군)의 이탈병들을 긁어모으고, 무관(武關)의 방어병력까지 끌어 모아 간신히 4,000여 명으로 군을 증강시켰다. 이 병력을 가지고 곽자의는 혹시라도 토번이 섬주로 나아가 황제를 위협할까봐 남전 근처인 칠반에서 4일 동안 머물며 토번군을 감시하다가 그제서야 이탈한다.
겨우 병력을 4,000이나 모은 곽자의였으나, 20만에 달하는 토번군을 장안에서 쫓아내기는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곽자의는 이 정도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장안 탈환에 나선다. 당대종은 토번이 동관을 넘어 동진할 것을 두려워해 곽자의를 행재소로 불렀으나, 곽자의는 이에 대해 “신은 경성(장안)을 수복하지 않으면 폐하를 알현할 수 없으며, 만약에 남전으로 군사를 내보내면 오랑캐는 반드시 감히 동쪽으로 향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표문을 답신으로 보내고 남전으로 가서 토번을 견제한다. 때마침 부연절도판관 단수실이 부연절도사 백효덕을 설득하는 데 성공, 관서(동관 서쪽) 절도사 중 유일하게 병사들을 이끌고 섬주로 가서 행재소로 합류, 병사들을 모아 서진하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어려움이 약간씩 풀려가기 시작한 것이 다행일 것이다.
때마침 토번군이 장안에서의 약탈품을 본국으로 보내면서 전력이 어느 정도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이에 곽자의는 좌우림대장군 장손전서로 하여금 200여 기의 기병을 이끌게 하고 한공퇴로 파견, 토번군의 정황을 염탐하게 했으며, 제오기에게 경조윤의 직책을 맡겨 이 병력의 물자 공급을 전담하게 하고, 보응군사 장지절로 하여금 후발대로써 장손전서를 지원하게끔 한다. 여기에 과거 광록경이었던 은중경이 의병을 1,000여 명 모아 남전에 와서 곽자의와 합류했고, 곽자의는 그 또한 장손전서의 지원군으로 파견한다. 이러한 당군의 기동은 토번군의 측면을 교란하는 행위였으며, 장손전서가 허장성세를 벌이자 토번군은 이를 퇴로차단을 목적으로 하는 위협으로 여기고 군대를 슬슬 뒤로 빼기 시작한다. 여기에 더해 곽자의가 상주에서 규모를 알 수 없는 대군을 이끌고 도착한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장안내부에서 토번군에게 전염병이 옮게 되었다. 20만 대군을 지탱할 보급품도 토번 본토에서 중국까지 오는데 수개월이 걸렸다. 결국, 토번군은 장안에서 철수한다.(10월 21일) 단 수 천명의 병력만으로 그 자신의 명성에 힘입어 20만 토번군을 퇴각시킨 것이다.
토번의 대병력이 철수하자 왕보라는 자가 무리 2,000여 명을 모아 장안을 점거하고 횡포를 부렸고, 지금 전력으로 장안 입성은 무리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곽자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기병 30기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무리 2000여명이 곽자의가 온다는 소리에 항복해버렸고 왕보를 불러낸 후 참수해 버리기도 했다. 이후 당대종은 이러한 사태의 책임을 물어 정원진을 삭탈관직하고 시골로 쫓아 보낸다. 이 소식을 듣고 부연절도사 백효덕과 빈녕절도사 장온기가 기현까지 전진하자 곽자의는 그들을 불러 장안으로 들어오게 해 장안 내를 안정화시킨다. 그리고 당대종은 곽자의를 경성유수로 삼았다.
토번의 침공은 비록 저지되었으나, 그 피해는 적지 않았다. 토번측은 스스로 말하기를 양주, 감주, 숙주를 점령했고, 공격한 10곳 중 8곳을 함락했다면서 기세를 올리고는 본국에 전승비까지 세워 이를 자랑했다. 돈황이 버텨냈고, 봉상 또한 봉상절도사 손지직이 수비하고 있는 것을 진서절도사 마린이 기병 1,000여 명으로 구원하여 간신히 지켜낸 게 그나마 큰 전과였다 할 수 있다. 이러한 토번의 대대적인 침공을 수천의 병력만으로 되돌린 곽자의의 공적은 실로 다대한 것이었으며 그 명성도 더욱 올라갔다. 이때 이후 곽자의는 어조은이나 정원진 등의 참소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 위신이 올라가게 된다. 이후 이 모든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된 정원진에 대한 탄핵이 이루어졌고, 정원진은 이를 두려워하여 토번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낙양 천도를 계획했다. 이에 당대종 역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곽자의는 토번을 막아내지 못한 건 인재를 잘못 써서지 이 땅의 지리적 위치가 나빠서가 아니다고 강하게 반발했고, 누구보다도 강한 위상을 지닌 곽자의가 이렇게 강한 반대를 한 것으로 인해 결국 천도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 당대종은 곽자의의 초상화를 능연각에 그려놓기까지 할 정도였다.
안록산, 사사명의 대란에 뒤이은 토번의 장안 점령 사건이 종결되었으나, 아직 당나라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 뒤이어 복고회은의 난이 일어난 것. 764년 1월 말, 사사명의 난 진압의 최고공로자이자 당대에 그 위세가 비길 데가 없다는 평을 들었던 복고회은이 결국 토사구팽의 위기감 속에 반란을 일으킨다. 자신과 그 아들, 복고창이 이끄는 삭방군을 움직여 태원을 공격한 것이다. 이에 당 조정은 삭방진에서 몸을 빼내 당 조정에 돌어온 이포진의 조언대로 1월 20일, 곽자의에게 관내ㆍ하동 부원수ㆍ하중절도사직을 내려 전면에 내세운다.
삭방진의 여러 사졸들이 곽자의를 마치 아버지처럼 여기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반란을 진압하려 한 것이다. 실제로 이 소식을 듣자 복고회은을 따르던 삭방군의 병사들이 “무슨 면목으로 분양왕(곽자의)을 볼 것인가.”고 말하며 사기가 추락하고 대규모 이탈자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곽자의가 하중에 도착하자 그에게 추가로 삭방절도대사직을 내린다. 복고회은은 사기가 떨어진 삭방군을 이끌고 태원을 공략하나 결국 실패하고, 물러나서 유차를 공격하나 이 또한 실패한다. 거기다 그의 아들이었던 삭방행영절도사 복고창이 휘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결국 300기의 기병만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탈, 영무에 위치한 삭방진의 처소를 지키고 있던 혼석지를 살해한 후 영무를 장악한다. 그리고 뒤에 남겨진 삭방진의 병사들은 곽자의가 오자 전부 귀부하고, 곽자의가 온 것을 기뻐했다. 복고회은의 당시 위상을 생각하면 정말 가볍게 끝나버린 셈이다. 그러나 영무를 점거한 복고회은은 재기를 시도한다.
복고회은의 반란은 생각보다 간단히 끝났으나 복고회은은 포기하지 않았다. 삭방진의 처소가 있는 영무를 점거한 복고회은은 아직 곽자의가 장악하지 못한 삭방군의 남은 병력들을 끌어 모아 상당한 병력을 다시 확보한다. 당대종은 그런 그에게 본디 반란 의도가 없던 것을 알고 있으니, 반란을 그만두고 귀부한다면 그동안의 공적에 따라 그를 용서하고 하북부원수 및 삭방절도등사직은 해체하지만 태보 겸 중서령, 대녕군왕직은 그대로 유지시켜주겠다고 약속하며 그를 회유해 보지만 복고회은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복고회은도 삭방군의 병사들만으로는 어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 결국 그는 토번과 위구르라는 외세를 끌어들이는 길을 택하고 만다.
복고회은의 요청에 따라 토번, 위구르가 움직인 것은 764년 8월이었다. 두 세력을 합쳐 12만이라는, 강력한 전력이 복고회은의 요청에 따라 당나라의 영내로 진입한다. 토번, 위구르는 중앙아시아 및 북방 초원지대를 주름잡는 강대한 세력이었으므로 당항족 등 자잘한 중소 규모 이민족들은 당과 토번, 위구르의 충돌에 휘말리거나 또는 떡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분위기를 살피게 된다.
이러한 복고회은의 역습에 대한 당의 대응은, 당연하게도 곽자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 이미 764년 7월에 곽자의에 필적하던 이광필이 사망하면서 사실상 곽자의 외에는 복고회은, 토번, 위구르의 연합군을 막아낼 인물이 없었다. 따라서 곽자의는 관내부원수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봉천으로 나아가 각지의 제장들을 지휘하면서 복고회은과 이민족 연합군의 방어를 총지휘하게 된다. 이때 당대종은 곽자의에게 어떻게 복고회은을 막아낼 건지 묻자 곽자의는 “복고회은은 본래 신의 편장과 비장이어서 그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신의 부곡이었으니 반드시 차마 서로 칼끝을 겨누지 못할 것이며 이로써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임을 압니다.”라고 답하여 상당히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당대종은 곽자의를 믿고 그에게 북도빈녕ㆍ경원ㆍ하서이래통화토번사직에 충임한다. 직후, 곽자의는 토번군이 빈주까지 내려와 압박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아들인 삭방병마사 곽희의 지휘 하에 10,000여 명을 증원군으로 파견했고, 곽희는 빈녕절도사 백효덕과 함께 10월, 복고회은이 위구르와 토번군을 이끌고 공격해온 것을 방어해낸다. 이후 복고회은이 빈주를 우회, 곽자의의 본영이 있는 봉천까지 압박해 들어오나 곽자의는 이 또한 어렵잖게 방어한다.
이후 반격을 생각한 곽자의는 10월 7일 밤에 건릉(당고종의 능묘) 남쪽으로 군을 이동시켜 포진한 후 다음날 아침 복고회은ㆍ토번ㆍ위구르 연합군이 방심한 상태로 진격해 오는 것을 한 번의 기습으로 격퇴한 후, 재차 수비태세를 취했고 이에 복고회은의 요청으로 왔던 토번, 위구르군은 크게 피해를 입어가면서까지 싸워줄 이유는 없다고 여겼는지 흩어져 자기 세력권으로 되돌아갔다. 저 두 세력이 없이는 이길 자신이 없던 복고회은도 영무의 자기 근거지로 후퇴한다. 이후 곽자의가 귀환하자 당대종은 곽자의에게 상서령 직을 내리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곽자의는 상서령 직이 당태종이 맡았던 관직이라 이후 관례적으로 비워놓는 직책이고, 또한 옹왕 이괄이 사사명의 난을 평정하고 황태자가 된 뒤에야 맡았던 직책임을 언급하며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복고회은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복고회은은 반란의 기치를 아직 접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당나라를 들어 엎으려 시도한다. 이를 위해 복고회은은 위구르와 토번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일대의 이민족 대부분을 봉기시키기 위해 사자를 보내 유세를 펼친다. 그리고 1년여에 걸친 공작 끝에, 이 일에 성공한다. 765년 9월, 회흘ㆍ토번ㆍ토욕혼ㆍ당항족ㆍ노랄 등으로 이루어진, 수십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이민족 군대가 당나라의 영토로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특히 토번은 이 일에 많은 공을 들였는지, 2년 전의 장안 공격 당시 토번군을 지휘했던 장수들에다 10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단독으로 투입했다.
이 시기 토번의 인구가 150만∼200만 사이고, 자국 내의 전 병력을 동원해도 40만 정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투자인셈. 물론 그에 못지않은 세력인 위구르도 충분한(최소한, 후에 토번과 지휘권분쟁을 대놓고 벌일 수 있는 수준까지) 전력을 투입했다. 이런 양대 세력이 대규모 병력을 움직인 것이 여타 이민족들의 행동을 결정하게 한 요인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동안 당은 뭘 하고 있었나, 간단히 말해서 제 몸 추스리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764년의 침공이 저지되었다고는 하나 지속적으로 위협이 상존해 있었기 때문에 관중∼서북변은 계속 계엄 상태나 마찬가지였으며, 하북 일대의 절도사들은 사실상 통제불능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을 강제적으로 굴복시키려고 해도 서북변에서의 위협이 너무 커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기껏해야 검남절도사(사천성 일대가 관할구역) 엄무가 성도 근처까지 장악해가던 토번을 다시 밀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오히려 토번이 복고회은에게 보내는 병력의 규모만 늘릴 뿐이었다. 결국 남은 길은 그나마 통제하에 있는 절도사들을 불러 모으고 여타 지역의 절도사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는 길 뿐이었으며, 실제로 여러 절도사들과 그들의 병력을 불러 모으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으니 대비를 안 한건 아니지만, 복고회은이 불러 모은 병력과 비교하면 열세가 현저했다.
이들 이민족 지원군들이 도착하자 복고회은은 다시 남하한다. 이에 곽자의는 저들 이민족들이 모두 기병이니 쉽게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각지의 제도 절도사들(위의 거론된 6명)들로 하여금 요충지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고 당대종에게 건의하고, 이는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복고회은이 남하하던 중에 병사했다.(...) 이에 복고회은이 직접 지휘하던 군대는 지휘권 분쟁이 일어나면서 완전히 행동을 멈춘다. 그러나 이미 이 전쟁은 복고회은이 죽었다고 해서 끝날 영역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다. 토번과 위구르를 비롯한 이민족들은 복고회은이 죽었다고 해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특히 당군의 방어선을 뚫고 나아갈 수 있었던 토번과 위구르는 아예 장안까지 재차 공격을 가할 의도를 명백히 드러내 보였다.
9월 15일, 토번군은 봉천까지 전진한다. 봉천에는 곽자의의 분영이 있었으나 때마침 곽자의는 하중에 가 있어 삭방병마사 혼감과 토격사 백원광이 이를 맞아 방어한다. 이 소식에 장안에는 계엄령이 떨어졌고 ,모든 절도사들을 장안 주변의 요충지에 배치, 당대종 스스로도 금군인 6군을 거느리고 금원까지 나아간다. 9월 21일에는 제서를 내려 친정을 공표하고, 22일에는 장안 내의 모든 남자들을 단결(민병대)병으로 편성하며 장안성의 성문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금군의 주력인 신책군을 지휘하던 어조은은 아예 황제를 하중으로 옮기려고까지 시도하나 대신들의 반발로 이 또한 실패한다.
다행히도 17일부터 25일까지 큰 비가 내려 기병이 주력인 토번군은 전진하지 못하고, 기다리다가 결국 후방으로 물러났는데 돌아가면서 지나는 지역을 철저히 약탈해 수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 10월 1일이 되자 토번군의 퇴각은 확실해 보였고, 다시 경연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안도감이 퍼진다. 그러나 빈주에서 위구르군과 합류한 토번군이 다시 서진하면서 위기감이 더더욱 고조된다. 10월 3일, 토번ㆍ위구르 연합군이 봉천을 지났고, 10월 8일에는 곽자의의 본영이 있는 경양을 포위한다. 이들 지역은 장안에서 2∼3일 거리에 불과할 정도로 가까운 지역이었다. 거기다 기병이 주력인 이민족 연합군에 비해 당군은 보병이 중심이었고, 때문에 각지의 방어 요충지에 병력을 나누어 배치해야만 해서 이때 경양에 있는 곽자의 자신은 수천여 명만을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위구르는 복고회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토번과 지휘권 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때문에 경양을 포위할 때 토번군과 군영을 공유하지 않고 서로 반대편으로 가서 주둔한다. 곽자의는 이 사실을 파악하고 위구르를 설득해 보려고 하나 위구르측의 반응은 ‘곽자의는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니냐.’였다. 그러면서 만약 곽자의가 진짜 이곳에 있는게 맞다면, 직접 와서 자신들에게 그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시켜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곽자의는 결단을 내린다. 위구르의 요구대로, 직접 위구르의 진영에 가서 저들을 설득하기로.
곽자의가 말하였다.
“지금은 중과부적이니 힘으로써 이기기는 어렵다. 옛날에 위구르와 약속을 맺은 것이 아주 후하였는데, 몸을 빼내어 가서 그들에게 유세하여 싸우지 않고 떨어뜨리는 것만 못하다.”
제장들이 철기 500을 선발하여 호위하며 따르게 하라고 청하였더니, 곽자의가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충분히 해가 될 만하다.”
곽희(곽자의의 아들)가 말고삐를 잡고 간하였다.
“저들은 호랑이나 승냥이입니다. 대인께서는 나라의 원수이신데 어찌하여 몸소 오랑캐의 밥이 되십니까?”
곽자의가 말하였다.
“지금은 싸운다면 부자가 함께 죽고 국가는 위태로워진다. 가서 지극한 정성으로 그들과 더불어 말하여 혹 다행스럽게 좇는 일을 나타나게 된다면 사해의 복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몸을 죽여서 집안을 온전하게 하겠다.”
채찍으로 그 손을 치고 말하였다.
“가라.”
드디어 몇 명의 기병과 함께 문을 열고 나가면서 사람을 시켜서 큰 소리로 전하게 하였다. ❮자치통감❯
그리고 이렇게 성을 나간 곽자의는 사실상 홀로, 위구르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위구르측은 안사의 난 시기부터 곽자의에게 상당한 호감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곽자의는 이러한 호감을 바탕으로 협상을 성공시킨다.
“영공(곽자의)께서 옵니다.”
위구르가 크게 놀랐다. 그들의 대수(최고지휘관)인 합호록도독 약갈라는 가한의 동생인데, 활을 잡고 화살을 매겨가지고 진 앞에 서 있었다. 곽자의는 투구를 벗고 갑옷을 벗었으며 창을 던지고 나아가니, 위구르의 추장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다.”
모두 말에서 내려서 늘어서서 절하였다. 곽자의 역시 말에서 내려서 앞으로 나가서 약갈라의 손을 잡고 그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너희 위구르는 우리 당에 큰 공로를 세웠고 당에서 너희에게 보답한 것이 역시 야박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약속을 등지고 깊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경기에 있는 현을 침입하고 압박하여 전에 세운 공로를 버리고 원수를 맺고 은덕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신하를 돕고 있으니, 얼마나 그것이 어리석은가? 또 복고회은이 임금을 배반하고 어머니를 버렸는데 너희 나라에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지금 몸을 빼내어 왔는데 너희가 나를 잡아서 죽이면 나의 장사들이 반드시 죽기로 하여 너희들과 싸울 것이다.”
약갈라가 말하였다.
“복고회은이 나를 속이고 천가한이 이미 안가(晏駕, 황제나 제왕이 맨 마지막에 타는 수레, 사망을 나타내는 단어)하였다고 말하고 영공(곽자의) 역시 연관(捐館, 사는 집을 버린다, 사망을 나타내는 단어)하여 중국에는 주군이 없다고 말하니, 내가 이리하여서 감히 그와 더불어 온 것입니다. 지금 천가한께서 상도(장안)에 계시고 영공께서도 다시 여기에서 군사를 총괄하시며 복고회은도 역시 하늘이 죽인 바 되었으니 우리들이 어찌 영공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곽자의는 이어서 그에게 유세하였다.
“토번은 무도하여 우리나라에 혼란이 일어난 틈을 이용하여 구생(장인과 사위 관계) 사이의 가까움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리 변방을 물어뜯고서 우리의 기전(도읍 주변)에 불을 놓고 분탕질하니, 그들이 약탈해 간 재물은 다 실을 수도 없고 말과 소 그리고 여러 가지 가축은 길이가 수백리에 이어져 있고 들에 잔뜩 퍼져있는데, 이것은 하늘이 너에게 내려준 것이다. 군사를 온전히 하고 우호관계를 계속 이어가며 적을 깨뜨려서 부유함을 가져가는 것은 네가 계산해 보면 여기에서 어느 것이 편할 것인가? 잃어서는 안 될 것이오.”
약갈라가 말하였다.
“나는 복고회은에게 오도되어서 공에게 잘못한 것이 정말로 깊은데, 지금 청컨대 공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토번을 치는 것으로 사죄하겠습니다. 그러나 복고회은의 아들은 가돈(위구르의 황후)의 형제이니, 바라건대 그를 내버려 두어 죽이지 마시오.”
곽자의가 이를 허락하였다.(중략)
곽자의가 땅에 술을 붓고 말하였다.
“대당 천자 만세하소서. 위구르 가한 역시 만세하소서. 두 나라 장상 역시 만세. 약속을 어기는 사람의 몸은 진지 앞에서 운명할 것이고 가족은 멸절하리라.”
술잔이 약갈라에게 이르자 역시 땅에다 술을 붓고 말하였다.
“영공이 맹세한 것과 같소.”
이에 여러 추장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전에 두 명의 무사가 이번 행차는 안온하여 당과 싸우지 않을 것이며, 한 명의 대인을 만나고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과연 그러합니다.”❮자치통감❯
이때의 일을 다룬 것이 ‘학봉일고(鶴峰逸稿)’에 나오는 ‘단기견로도(單騎見虜圖)’라는 시이다. 일이 이렇게 굴러가자 토번은 충격을 받고 군을 이끌어 야반도주. 위구르는 바로 그 뒤를 쫓았고 곽자의도 기병대를 동행시켰다. 결국 10월 15일, 영대의 서쪽 벌판에서 따라잡힌 토번군은 당-위구르 연합군에 의해 대파 당했고, 전사자 50,000, 포로 10,000의 피해와 함께 그동안 약탈해온 재물과 사람들을 다 토해놓고 돌아가야만 했다. 이러고도 모자라서 국경선 근방인 경주의 동쪽에서 추가로 공격받아 참패를 맛봤다. 티베트 역사상 가장 최대의 피해가 바로 이때의 패배이다. 이후 위구르군 지휘부는 조정에 들어가 당대종을 알현했고, 당대종은 창고를 탈탈 털어서 비단 10만필을 모아 선물로 건내 주는 것으로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의 약속을 보답했다. 위구르가 동맹을 맺고 토번이 기록에 남을 참패를 맛보았다는 소식에 여타 이민족들은 일제히 철수했다. 이제 남은 것은 복고회은이 이끌던 구 반란군 세력. 곽자의는 이들이 이민족들에게로 도주하지 않게끔 설득 공작을 폈고, 때마침 당대종이 적절하게 예전에 세운 공로에 따라 죄를 사면한다고 약속하자 모두 당나라에 항복, 그 군대는 당군에 흡수되었다. 이것으로 복고회은의 난은 위구르와의 동맹과 토번의 참패라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