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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간 통치하면서 조국근대화의 기반을 닦아 놓았던 朴正熙(박정희) 前(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30년이 됐다.
필자는 경향신문 정치부 차장이던 1974년 4월부터 1978년 11월까지 청와대를 출입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을 취재했다. 필자는 청와대에서 열린 오찬·만찬·간담회나 청와대 대변인의 공식·비공식 브리핑 등을 현장에서 메모했다가 신문사로 돌아와 正書(정서)한 것을 지금까지 보관해 왔다.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비망록’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자료들은 박 전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이념, 정책방향, 개인적인 생각 등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을 맞아 당시의 비망록을 최초로 공개한다. (注: 북한과 중국은 당시의 표현을 살려 북괴·중공으로 표기했음. 질문자 이름을 특별히 표기하지 않은 경우 질문자는 필자이며, “ ” 안의 발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발언임.)
◎ 1976년 10월 20일 청와대 출입 기자단과 오찬 중앙일보 梁泰朝(양태조) 기자의 파리특파원 발령 및 동양통신 葛天文(갈천문) 기자의 정치부장 승진 축하를 위해 마련된 자리. “통치에서 중요한 것은 養民과 敎民”
박정희 대통령: “양 기자의 특파원 전출을 축하합니다. 축배를 듭시다. 佛語(불어)는 할 줄 알겠지요? 근혜하고 불어로 말해 봐요.” ―대통령께서 프랑스 방문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초청이 와야 가지. 초청이 와도 못 가요. 파리는 사진으로 봐도 깨끗한 도시지.” ―방위산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탱크를 우리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소. 또 이와는 별도로 미군이 쓰던 M48 탱크에 105㎜ 포를 달고 있어요. 지금 ○○공장에서 일부 만들고 있는데 북괴가 가진 탱크는 문제도 안돼요. 독자적인 개발을 위해 서독의 기술을 도입하고 있는데 미국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것을 막고 있소. 우리가 서독 기술을 도입하니까 이제 와서 M60 탱크를 주겠다고 합디다. 미국은 우리가 하면 못하게 하고 개발하면 주겠다고 심술을 부려요. 북괴는 현재 탱크를 1년에 40~60대 만드는 것 같소.” ―얼마 전에 프랑스 르몽드紙(지)와 기자회견을 했는데 어떠셨습니까. “그 친구(르몽드지 퐁텐 주필을 지칭) 만나보니 좀 좌경화한 지식인 같습디다. 서면 질문서를 낸 다음에 보충 질문을 하겠다고 해서 만나 주었더니 이것저것 막 물어봅디다. 서면 질문에서도 아니꼬운 질문을 몇 가지 뺐어요. 첫째는 김일성과 만나지 않겠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북괴와 미국이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는 질문이에요. 밉광스러운 질문을 하더군. 또 金大中(김대중) 사건의 상세한 경위를 설명해 달라고 해서 ‘그건 당신들이 더 잘 알지 않느냐? 구라파 신문에서도 1년 이상 보도했는데 잘 알고 있을 것 아니냐?’고 말하고 ‘내가 얘기해 주겠다’고 한 후 설명해 주었어요. 일본에 있는 김대중을 어느 단체가 서울로 데려왔는데 외국에서는 한국 정보기관이 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잘 모른다는 것이며, 이 문제로 인한 韓日(한일) 간의 문제는 일단락된 것이다’라고 설명했어요. 퐁텐 주필은 무엇이든지 우리를 북괴 식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어요. TBC(당시의 동양방송)의 奉斗玩(봉두완)씨가 퐁텐을 데리고 지방시찰을 했어요. 도중에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운동회를 보여 달라고 해서 가 보니 마침 점심시간이라 떡과 과자, 밥을 쌓아 놓고 먹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거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 놓은 것 아니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봉두완씨가 화를 내면서 ‘여기에 오는 것은 당초 스케줄에도 없던 것인데 무슨 소리냐?’고 쏴붙였다고 해요. 내가 퐁텐에게 ‘북한 사회가 어떻더냐?’고 물었더니, 퐁텐은 ‘내가 보기에는 잘살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북한 주민은 그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대답합디다.” ―大豊(대풍)으로 쌀이 남아돈다고 하는데 쌀로 막걸리를 만들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아도 崔珏圭(최각규) 농수산부 장관에게 연구해 보라고 했어요. 막걸리를 만들어도 문제가 있어요. 다음에 쌀이 모자랄 경우 막걸리를 못 만들게 하면 정부가 朝令暮改(조령모개)라고 비난을 받게 될 거요. 쌀로 막걸리를 만들면 1년에 190만석이 소비되지요. 대신에 밀가루 수입이 줄어들고 또 농민 건강에도 좋을 거요. 지금 시판하는 막걸리는 배탈 나기 좋지.” ―忠孝(충효)사상에 관해 질문. “학교에서 배운 것은 모두 지키게 마련이에요. 우리가 5000년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에 바탕이 있어요. 그냥 놔두면 미국의 풍속을 배워 충효사상이 퇴색합니다. 국민을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養民(양민)이고 둘째가 敎民(교민)입니다. 백성을 먹여살려야 하지만, 또 가르쳐야 하고 정신면에서 지도해야 해요.” ―컬러 텔레비전 방영은 언제쯤 시작될까요. “MBC, TBC 모두 컬러 방영이 준비되어 있지? 컬러 텔레비전을 방영 못해 안달이 났겠지(일동 웃음).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농촌에는 흑백 텔레비전이 많이 들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바꾸면 농가 부담이 늘어요. 애들이 졸라서 안 살 수 없어요. 몇 해 지나면 자연히 가능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정책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이 컬러 텔레비전과 자동차예요. 자동차도 풀어 놓으면 너도나도 다 타고 다닐 겁니다. 지금 현대자동차에서 수출하고 있는데 실질소득보다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해요.” ―송효빈 한국일보 기자: 이번에는 改閣(개각)이 꼭 있을 것 같습니다(일동 웃음). “개각에 왜 그리 관심이 많소? 송 기자, 장관 시켜줄까? 문공부 장관 어때요? 그런데 문공부가 힘든 자리예요. 언론을 다루고 종교문제, 심지어 문화재 문제까지 다뤄야 해요.” ―문화재 보수사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문화재는 3, 4년만 있으면 거의 다 정화되고 내년에 중요한 것은 다 돼요. 콘크리트로 만들어야 오래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나무로 만들어서 後世(후세)에 가면 거의 없어져요. 지금 계란색을 칠하고 있는데 근혜 아이디어예요.” ◎ 1977년 3월 3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오찬 박근혜 큰 영애 참석 “카터의 인권문제 제기는 방법이 졸렬”
―시국 관련 구속자 석방 문제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내무장관 보고가 ‘교회에 尹潽善(윤보선)씨 부인(孔德貴 여사-편집자 주), 또 李姬鎬(이희호·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편집자 주)씨 등이 모여 무엇을 한다고 하기에 막았는데 외신기자들에게 유인물을 주었다’고 해요. 나에게 보내는 건의문을 뺏어 온 것을 보았는데 ‘박정희 귀하’라고 써서 나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양입디다. 또 ‘귀하가 하는 정치는 나라를 망치는 정치’라고 썼습디다. 옛날 같으면 혼을 내라고 했겠지만 미친 사람들 하는 짓이라 웃고 말았소. 문제는 외국에 기대는 事大主義(사대주의)입니다. 지금도 미국에 편지를 보내 고자질하고, 전화를 걸고 외신기자들을 집에 초청해서 헐뜯고 합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구속자들이 석방될 것이라고 축하파티를 열더니 안되니까 카터가 취임하면 석방될 것이라고 믿고들 있는데, 어림도 없어요. 카터가 압력을 넣을 것으로 기대하는 모양인데 손톱도 안 들어갈 겁니다. 그들이 외국에 대해 우리나라를 헐뜯고 하니까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거예요. 미국이 자기들 조국인 모양으로 아는데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국력입니다.” 큰 영애(박근혜): “지금까지 아버님이 하시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는 반대를 받더라도 하고 난 다음에는 잘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나는 當代(당대)의 평가보다도 후세 史家(사가)들의 평가를 염두에 둡니다. 당대에 영합하려다가는 아무 일도 못해요. KBS 연속극 ‘왕도’가 끝났는데 그 내용은 世宗(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의 얘기예요. 당시 集賢殿(집현전) 학자들은 모두 반대하고 申叔舟(신숙주)만 찬성했어요. 학자들의 반대로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무슨 글을 쓰고 있겠소.” ―미국에서 카터 행정부가 출범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카터가 취임한 지 한 달 좀 넘었는데 그가 도덕성을 부르짖고 있으나 미국 자체 내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아요. 소련(지금은 러시아)의 인권을 얘기했다가 반발을 받고 있는데 ‘SALT(전략무기제한협정)를 앞두고 상대국의 신경을 돋워서 일이 될 게 없어요. 인권문제를 얘기하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봐서 돌려서 얘기해야지 그런 식으로 하면 안돼요. 방법이 졸렬해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목사나 신부가 할 일입니다. 인권 얘기를 하지만 왜 크메르(캄보디아-편집자 주)의 수백만 명 학살이나, 월남의 인권은 외면합니까. 공산국가라고 해서 못한다면 왜 공산국인 소련이나 체코 얘기는 합니까. 분명히 얘기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인권문제가 없어요.” ―얼마 전 서울시에서 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밝혔는데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직 후보지를 정한 바 없으나 여기저기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 실무자 얘기로는 백지에 계획을 세워 후보지에 그대로 옮겨 건설하면 된다고 합디다. 계획을 세우는 데 2, 3년은 걸립니다. 서울시청에서 그 계획을 밝힌 것은 서울시 인구가 매년 마산시만큼 늘어나 답답해서 숨통을 트자는 뜻에서 한 것이요. 심리적 효과도 있을 테고 또 장기적으로 보면 수도를 옮기는 수밖에 없어요. 서울 인구를 800만명 정도로 묶어 놓고 수도를 옮겨야 해요. 올 봄에 임시국회가 열리면 법을 만들어 이 법으로 地價(지가)를 묶어 놓고, 나중에 후보지를 정해 이 법 공포 당시의 지가에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서 사들이면 돼요. 후보지를 일반에서는 어디로 봅니까? 신탄진은 공장이 있고 주택들이 밀집해 있어서 안되고, 진천은 물이 없어요. 행정수도를 세워도 한꺼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지 않은 부처부터 들어간 후 나중에 청와대가 들어가면 돼요. 또 한곳에 모두 모일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건물을 지어 8차선의 하이웨이로 5분 정도의 거리로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있어요.”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에서 새 수상이 들어서면 한 번씩 하는 얘기예요. 앞으로도 계속 분쟁거리로 남아 있을 겁니다. 일본 신문사 비행기가 오는데 격추시킬 수도 없어요. 비무장 비행기를 격추시키면 더 큰일이 돼요. 물론 일본 전투기가 오면 쫓아내야 하지만. 그래서 독도에 기관포를 설치해서 일본 비행기에 위협사격을 가하라고 했소.” ―지만 군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는데요. “지만이가 육사에 들어가니 청와대 식구가 또 하나 줄었어요. 어제 육사에 가 보니 얼마나 규율이 엄하고 선배들이 당당한지 신입생들은 기가 죽어 있더군. 육사에서 4년 동안 배우면 일생에 큰 도움이 되겠지요. 우리가 육사 2기인데 그때에는 한 반에 나이 많은 사람도 있고 해서 규율이 지금 같지 않았어요. 지만이가 육사 입교 전에 머리가 덥수룩해서 머리를 깎으라고 해 나중에 빡빡 깎고 왔는데 눈물이 좀 핑 도는 것 같습디다. 어제 내 옆에 와서 뭐라고 ‘꽥’ 소리를 지르던데 아주 달라졌어요(KBS 기자에게 육사 입교식 때 육사 생도 정장을 한 지만 군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 ―지방순시에 대해 질문. “이번에는 전국을 죽 돌지 않을 생각입니다. 한 군데 돌고 올라와서 중앙의 일을 보다가 또 내려가는 식으로 하려고 해요. 이제는 예전과 달라서 죽 여행을 하면 힘이 들어.” ◎ 1977년 3월 11일 金東祚 외교특보, 미군 철수대책 보고 1977년 3월 9일 카터 美(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주한미군을 4~5년에 걸쳐 철수할 계획임을 공표했다. 다음은 林芳鉉(임방현) 청와대 대변인이 브리핑한 내용이다. ―김동조 특보: “앞으로 미국이 공식으로 협의를 요청해 오면 각하가 지난번 기자회견에서 제의하신 불가침협정 수락 후 미군 철수문제를 거론하고 북괴가 이것을 수락할 때까지 미군이 있어 달라고 요청하면 어떻겠습니까?” ―박정희 대통령: “여보시오. 카터 발언이 공식통보나 다름없는데 이제 무슨 그런 얘기를 하는 거요? 기정사실로 알고 자주국방이 현재 어디까지 와 있나 국방부에 알아보기나 하시오.” ◎ 1977년 3월 15일 주한미군 철수대책 정부·여당 연석회의에 대한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오프 더 레코드) “미군이 간다고 김일성이 쳐들어온다는 생각은 잘못”
―박정희 대통령: “카터의 얘기를 일응 공식통보로 받아들이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지금 그들을 붙잡고 ‘더 있어 달라’, ‘기간을 연장해 달라’고 교섭을 벌이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사실 30년 동안 미군이 이 땅에 있었으면 오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더러 가지 말라고 야당 등을 내세워 데모를 벌이고 해야 소용없는 일이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국민들이 미군이 간다고 불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일제 때 압제를 받았고 6·25 후 미국의 정치·문화·제도가 들어와 국민들 사고방식 저변에는 미국의 생활습관이 물들어 있어요.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정리할 때도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진통을 겪더라도 이것을 뿌리 뽑으려 하던 참인데, 마침 미군철수를 계기로 순리에 따라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군이 간다고 金日成(김일성)이가 쳐들어온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김일성은 미군이 있어도 자신이 있으면 쳐들어오는 것이고, 또 미군이 없어도 자신이 없으면 쳐들어오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미군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학생에게 가정교사가 있으면 든든하겠지만 어디 가정교사가 학생 대신 시험을 치러 주겠습니까. 이제 우리도 체통을 세울 때가 되었습니다. 60만 대군을 갖고 있는 우리가 4만명의 미군에게 의존한다면 무엇보다도 창피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의 자주국방력도 이만큼 컸고 지금이라도 전쟁을 하면 승산이 있는데 굳이 미군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미군이 나가는 것은 전쟁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모양인데, 그렇게 겁이 나면 휴전선 근처가 아니고 제주도나 부산에 가 있으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이번에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입니다. 첫째는 내가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불가침협정을 북괴가 수락하면 미군 철수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제의했는데 이 문제는 일언반구도 없이 불쑥 철군계획을 발표한 때문입니다. 둘째는 아무리 계획을 발표한다고 해도 군대를 빼는 것은 군사기밀인데 은밀히 얘기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발표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또 우리나라 인권문제를 얘기하는데 지난 1971년 한미관계가 아주 좋았을 때에도 미 제7사단을 뽑아갔어요. 그때에 김대중 사건이 있었습니까? 무슨 인권문제가 있었습니까? 방위세도 미군이 나갈 것에 대비해서 만든 것이오. 우리가 지금 미군을 계속 있어 달라고 조를 바에야 무엇 때문에 국민에게 부담이 되는 방위세를 만들었겠소? 그러나 5년 시한으로 되어 있는 방위세를 그 시한이 끝나도 없애지 않고 세율을 낮춰서라도 계속 존속시켜야 하겠습니다. 미군이 나가면 당연히 작전권을 인수받아야지.” ◎ 1977년 6월 19일 한국신문협회·방송협회 회장단으로부터 원호성금을 전달받고 환담 “만사 미국 눈치 보는 것부터 고쳐야” ―曺增出(조증출) 부산일보 사장: 일부 항간에서는 구속자 석방을 하비브가 다녀간 것과 연관 지어 얘기하는데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 하비브(전 주한 미국대사, 당시 국무부 정무차관-편집자 주)가 자기들 내부 일로 왔다고 하더군요. 30분간 만났는데 통역시간을 빼면 10여 분간 얘기한 것밖에 안돼요. 인권 얘기는 없었어요. 하비브를 구세주로 아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그런 버릇 고치기 전에는 안됩니다. 만사를 미국 눈치 보는 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당당한 자주독립국가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앞으로 개전의 정이 있으면 관대한 조치를 언제든지 할 수 있겠지만 사대주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항복을 받고 내주겠습니다.” ―李桓儀(이환의) 경향신문·MBC 사장: 일본 요미우리신문 보도를 보면 1981년 이후의 철군계획은 미정이고 핵무기는 잔류한다고 했는데 그런 것이 있습니까. “대변인으로 하여금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브리핑해 주어서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1978년에 6000명, 80년에 9000명 빼는데 여기에서 더 적어질지 모르나, 이것은 두고 봐야 합니다. 핵 잔류문제는 우리가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해 있고 또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해 주는 범위 내에서 우리가 자체개발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핵우산을 거둬가면서 우리더러 핵개발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이치에 닿지 않는 얘기지요. 이번에 안보협의회 때 이 문제도 어떻게 하려는지 들어봐야 하겠습니다. 우리 국군의 정신戰力(전력)과 전투력이 막강합니다. 우리 국군에게 고마운 점이 있습니다. 미군과 30년을 함께 생활해 왔는데 히피도 없고 마약도 피우지 않는 것을 보면 고마운 일입니다. 김일성이가 내려와도 저지할 수 있습니다.” ―金南中(김남중) 전남일보 사장: 미국 내 反韓(반한)단체들은 얄미운 놈들입니다. 정부에서는 反美(반미)감정이 고조될까봐 신중히 하고 있는데 신문에서 비판해야 합니다. 미국 내에 한두 명이 간판만 짊어진 반한단체가 34개나 된답니다. “미국이 본래 유럽에서 종교적·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피난을 와 만든 나라이기 때문에 건국정신으로 보아 망명처를 제공하는 것은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사리사욕이나 개인적인 名利(명리)를 추구하는 자까지 보호하는 것은 납득이 안 갑니다. 못된 자를 감싸는 것이 미국 사회입니까. 국가를 배신하고 민족을 욕되게 하는 배반자는 후손들까지도 낯을 못 들고 다니고 주위에서도 사람 취급을 안 하게 될 것입니다.” ―조증출: 농민들 간에는 각하께서 저렇게 세게 나가시는 것을 보니 우리가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농민들은 우리가 월남전 막바지에 월남에서 훔쳐 왔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CIA(중앙정보부)가 그것도 못하겠느냐고 생각하고 있지요(일동 폭소). ◎ 1977년 8월 23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 만찬 “李哲承 당수는 소신 있는 정치인”
“申道煥(신도환) 신민당 최고위원이 미국에서 귀국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유학생들이 ‘유사시에는 고국에 달려오겠다’고 한 말에 감격했다고 기자들에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문에는 신 최고위원의 얘기가 한 줄도 나지 않았어요. 다른 신문은 몰라도 경향과 서울신문은 왜 안 쓰지요? 李哲承(이철승) 신민당 대표가 東京(동경) 발언(1977년 8월 초 일본을 방문한 이철승 신민당 대표가 요미우리신문과의 기자회견에서 ‘국가의 존립이 위협 받고 있는 이때에 자유에 한계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야당도 유신체제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가리킴-편집자 주)으로 곤욕을 치르는 모양인데 이 당수는 소신 있는 정치인입니다. 야당 정치인 중 자세가 된 정치인은 趙炳玉(조병옥) 박사, 柳珍山(유진산), 이 당수 세 사람입니다. 유진산씨는 나를 만났을 때 당당히 얘기합디다. (朴東宣·金炯旭 문제에 대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떠들 테면 떠들고 알아보려면 알아보라지. 우리는 일체 신경 쓸 게 못 되요.” ◎ 1977년 9월 14일 특별보좌관·수석비서관들과 만찬 “김대중 사건은 새카맣게 모르는 사건인데 누명 써”
“미국이 우리가 박동선을 보내지 않겠다는 방침을 이제는 안 모양이지? 신문에 미국의 방침이 바뀌었다고 보도했다면서?(미국이 자워스키를 보낼 것이라는 보도를 뜻함.) 내가 지금까지 세 번이나 터무니없는 누명을 썼어요. 첫째는 내가 金鍾泌(김종필)이를 시켜서 4대 의혹사건을 지시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김대중 납치를 내가 직접 지시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이번 박동선 사건을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것은 지금 그것을 아는 사람이 이 자리에 없지만, 김대중 납치사건은 내가 보고 받았을 때 나도 깜짝 놀랐던 사건이요. 나는 그때 조총련이 장난친 것이 아닌가 걱정했었소.”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 제가 말씀드리지요. 김대중 납치사건을 각하께 말씀 드리니까 정말 각하께서도 깜짝 놀라셨어요. 각하께서는 그때 김대중씨를 조총련에서 납치한 것이 아니면 김대중 자신이 벌인 자작극으로 분석하셨습니다. 각하께서는 김대중 자작극이면 언젠가는 김대중씨가 나타날 것이므로 괜찮겠지만 조총련이 한 짓이라면 큰일이라고 걱정하셨습니다. “정말 그 사건은 새까맣게 모르는 것인데 내가 누명을 썼어요. 이번 박동선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 1978년 1월 11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오찬 “한 선거구에서 두 명 뽑으니 여야 의원 좋아해”
“목감기로 인해 말을 안 하겠으니 여러분이 말을 많이 하세요. 의사가 말하지 말 것, 바람 쐬지 말 것, 담배 피우지 말 것, 술 마시지 말 것 등을 얘기하고 있는데 하나도 못 지키고 있어요. 서울의 버스 안내양에게 방한복을 해 주었는데 지방의 버스 안내양 1만5000명에게도 해 줘야겠어요. 버스 안내양도 친절해야 하지만 승객들도 친절히 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내양에게 욕을 하고 또 때리기까지 하는데 그런 일은 없어야 해요. 버스업체들을 조사시켰는데 어떤 경우는 안내양 숙소에 불도 때지 않고 또 여러 가지 업체를 갖고 있어서 버스업에 소홀하기 때문에 이번 상반기까지 시정하지 않으면 버스업체를 빼앗아 성실한 업자에게 주도록 할 생각입니다. 후지TV 회견을 봤더니 내 얼굴을 너무 클로즈업시켜서 어떤 때는 콧구멍이나 주름살까지 다 보이도록 찍었더라고요. 또 화면에 얼굴 전체가 나오지 않고 얼굴 한 가운데만 나오도록 찍었는데 무슨 그런 일이 있소? 조총련이 각 집을 찾아다니며 ‘몇 월 몇일 몇 시에 박 아무개 회견이 방영되는데 일체 보지 말라’고 강요하는 바람에 오히려 모르고 있던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고 합디다. 북한을 다녀온 스웨덴 인사가 이번에 우리나라에도 다녀갔는데 북한은 외교관들이 기피한다고 합디다.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인데 설마 그렇게 못 살 곳이냐’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 얘기를 들어 보니까 한심한 모양입니다. 북한에 있는 외국공관은 대개 1인 공관인데 2~3명씩 가 있다고 해요. 왜냐하면 혼자서는 답답해서 못 살기 때문에 한두 명을 더 데려다 근무한다고 해요. 북괴 통계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작년에 알곡 생산이 8000만t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5000만 섬이 넘어요. 그런데도 식량난을 겪고 있어요. 통계를 자꾸 늘리다 보니까 이제는 도로 끌어내릴 수도 없고 해서 허위통계가 계속되는 겁니다. 일본의 후쿠다가 쓴 ‘조선반도에 관하여’라는 글을 읽어봤는데 ‘통계가 올라가다가 전에 썼던 통계를 도로 쓰거나 또는 어떤 해에는 통계가 나오지 않는다’라고 했어요. 북한의 통계는 믿을 수 없는데 정보부에서는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고 있어 잘 맞지 않아요. 선거의 해라고 하여 관심들이 많은 모양인데 정치하겠다는 사람들만 떠드는 것이고 일반 주민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어요. 국회의원 선거는 내년 봄에 있을 텐데 벌써부터 시끄러워요. 선거 빨리 해버릴까?(일동 웃음) 법적으로는 국회의원 선거를 언제부터 실시할 수 있게 되어 있나요?(기자들이 9월 1일부터라고 대답) 선거를 조용하게 치를 생각입니다. 與野(여야) 의원들은 누가 1, 2등이 되든 상관없이 공천만 받으면 대개 당선되니까 의가 좋아요. 서로 무소속을 견제한다고 합디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것이 우리 선거제도의 묘미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정치不在(부재)다, 뭐다 하는데 작년의 국회를 보면 할 말을 다 합디다. 다만 국정감사권이 없다고 해서 그러는 모양입니다. 여당도 내 눈치를 봐서 그렇지, 국정감사권을 갖고 싶어하지요. 아마도 투표를 하면 모두 국정감사권 부활을 찬성할 거요. 마치 御史(어사) 출두하는 기분으로 국정감사를 하지. 선거를 옛날식으로 하면 안돼요. 선거 때만 되면 판잣집이 늘어나는데 이제 그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영합하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歐美(구미)와 일본의 정치가 그렇습니다. 특히 영국은 勞組(노조) 때문에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막상 표를 얻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영합하는 발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노조를 어느 정도 제한하고 있지만 앞으로 어느 단계에 가면 이것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西歐(서구)의 경우는 더욱 어렵지요. 농촌취락개선사업으로 농촌이 변모해 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너무 빨갛고 파랗게 지붕을 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해요. 알아보니까 농민들 스스로 그런 색을 칠한다고 하는데 파란 지붕에 빨간 줄을 긋는 등 어울리지 않는 지붕색이 있어요. 차차 시정이 되겠지요. 또 농촌 취락도 대지를 대머리 벗기듯 밀어내지 말고 농촌의 아담한 풍경을 살려 집을 짓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농촌도 몇 년 안 가면 보기 좋고 부유한 농촌이 될 것입니다. 웬만한 농가는 서울의 집보다도 더 좋아요.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막걸리에 물을 타는 행위를 철저히 막으세요. 高在一(고재일) 국세청장에게 얘기해서 물을 못 타도록 단속하라고 하세요. 아마도 술도가에서는 그대로 나오는데 소매상에 오면서 타는 모양인데 16도짜리 술에 물을 자꾸 타면 결국 나중에는 물에 물 탄 술이 되지 않겠소. 제2종합청사를 과천에 짓는 것은 새 행정수도와 별도로 하는 것입니다. 새 행정수도가 서더라도 서울이나 근처에 그대로 남을 기관들도 있으니까 아무 관계가 없어요. (김 비서실장이 금년에 외환보유고 규모가 68억 달러가 될 것으로 외국에서 주시하고 있다고 설명하자) 5·16 이후 외환 보유고는 겨우 2억 달러였지요. 외화가 많아서 걱정이지만 전쟁을 대비해서 외환을 많이 갖고 있어야 합니다. 북괴와 단기전을 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계산해 보니 20억 달러가 됩니다. 한 30억 갖고 국제경기 한번 해볼 만하지. (조크) 이번 신년 휘호에 天下誰安 忘戰必危(천하수안 망전필위)라고 쓴 것은 손자병법에 있는 것이요. 有備無患(유비무환)도 손자병법에 있는 내용입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는 망합니다. 근혜하고도 얘기했지만 우리나라가 근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많은 병폐가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을 안 지키는 것이지요. 늦게 와서도 미안하다는 말조차 없어요. 둘째는 부녀자들이 옷을 잘 입고서도 싸울 때 보면 동네가 떠나라고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 거예요. 셋째는 초상 때 너무 곡을 하는 것 등입니다. 이런 것은 고쳐나가야 해요. 외환이 늘어나서 우리도 해외여행을 풀어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그러나 조총련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일본인 관광객이 우리나라에 와서 별로 많은 돈을 쓰지 않는데 우리도 해외에 나가면 그렇게 많은 외화가 들지 않을 것입니다.” ◎ 1978년 3월 31일 기자단 외국여행 환송 오찬 “미국의 81억 달러 무상원조 필요 없다” “기자단의 외유를 축하해요. 나도 오라는 데가 있는데 가고 싶지 않아요. 中東(중동)에는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김동조 전 주미대사의 미 의회 증언 문제에 관해) 미국사람들이 암만 떼를 써도 안돼요. 김동조 증언이 아니면 81억 달러 無償(무상) 원조를 안 준다고 얘기하는 모양인데 우리도 그런 것 필요 없어요. 81억 달러를 한목에 준다는 것 아니고 미군이 철수할 때마다 조금씩 준다는 거요. 우리는 그것을 안 줘도 좋다는 입장입니다. 미군이 나갈 때 장비를 안 준다면 우리 돈으로 사면 될 것 아닌가. 다만 김동조 증언은 조사가 아니고 그들이 일을 끝맺는 데 지장이 있으니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물어 왔을 때 그런 일이 없었다든지, 전혀 사실무근이라든지 하는 것을 회답하는 거야 어떨지 생각 중이에요. (카터·티토 간의 미·남북한 3자회담 논의에 대해) 한마디로 우리에게 아무 이익이 없는 거예요. 외무장관이 스나이더 주한 미 대사에게 물으니 ‘그런 일 없다’고 부인해서 ‘절대로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얘기해 놓았어요. 티토와 김일성이가 짜고 한 것 같은데 미국도 3자회담에는 약간의 흥미가 있는 것 같아요. 3자회담은 월남전 패망 때의 파리협상과 같은 것인데, 남북이 직접 얘기하지 않고 우리가 미국 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키신저가 얘기하는 4자회담 정도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은 합니다. 왜냐하면 6·25 때 우리와 미국이 중공·북괴와 싸웠으니까. 얼마 전에 일본 사람이 북괴에 갔었는데 북괴 생각이 미국과 1 대 1로 협상하다가 도중에 한국대표도 참석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한국대표도 남한의 현 대통령을 바꾼 정부의 대표로 한다는 속셈이 있다고 전합디다. 아마도 김일성은 월남전 협상이 잊히지 않고 있는 모양이에요. 남북 간에 얘기를 안 하고 미국과 얘기한다는 게 있을 수 없고 어떤 경우이든 우리가 찬성하지 않으면 그만이오.” ◎ 1978년 근혜 양 컵 테니스대회 끝난 후 저녁식사 “내 나이에 테니스는 좀 무리인 것 같다”
(동해안 간첩선 침투 문제에 대해) “어제 동해안에서 간첩선을 격침시키고 15명 중 8명을 생포했소. 알아보니 어선인 것 같아요. 생존자들은 모두 우리 경비정에 대해 발포한 일이 없다고 한답디다. 우리 경비정에 총구멍이 뚫렸는데도. 그래서 중앙정보부장더러 8명을 한방에 두지 말고 따로따로 격리시켜 조사해 보라고 했어요. 우리 경비정이 망원경으로 보니까 어선에 김일성 사진이 붙어 있었다고 해요. 간첩선이면 위장을 했을 텐데 김일성 사진 붙인 것을 보니까 어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동해안 해변 가까이까지 접근해 오다가 해변에 ‘샘표간장’이라는 간판이 붙은 것을 보고 도망가다가 우리 경비정에 둘러싸여 격침된 것이지요. 15명 중 7명이 죽고 나머지는 나무 조각에 매달려 있는 것을 건져냈어요. 우리 쾌속정도 이제는 상당히 빨라요. 남해안에서 침몰시킨 간첩선의 경우 그들 배도 빠르지만 우리 쾌속정이 40노트 이상으로 달려갔지요. 동해안 어선의 경우 조사해서 어선이 분명하다면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하기야 우리 어선 수원호가 백령도 근처에서 북괴에 의해 납치되어 간 적도 있어서 복수를 해야 하겠지만 어부들이면 인도적 견지에서 돌려보내는 게 좋을 겁니다. (KAL기 소련 무르만스크 불시착 사건 관련 담화문 발표에 대해) 당시 KAL 승객이 헬싱키에 돌아왔을 즈음에 내가 감사하다는 담화를 발표했지요. 당시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소련에 대해 감사하다는 담화를 발표할 것까지는 없지 않으냐, 승객들이 서울에 돌아온 다음에 발표하면 어떻겠느냐’는 얘기들을 했어요. 그러나 승객들이 돌아온 다음에 발표하면 김이 빠지는 것이고, 또 승객들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소련을 비난하게 되면 내가 소련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지요. 담화를 발표한 것은 순전히 남아있는 승무원 2명을 빼내기 위한 것이에요. 그런데도 소련과 관계 개선을 노린 것이다 뭐다 하고 해설들을 하던데 그것은 아닙니다. 세계 각국에서 소련의 처사를 비난하고 있는 판에 피해자인 우리가 고맙다고 하니까 소련도 승무원을 빨리 돌려보낸 �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pn=1&num=58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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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도 잊지를 못합니다 다시한번 근혜님이 마무리를 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모두힘을 합쳐서 다시한번더 그때의 영광를 위해 노력해야겠읍니다.
다가올 그날을 위해 차분하면서 겸손이 스스로가 이겨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