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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
수학은 인간이 만들어낸 숫자라는 기호임에도 세상의 정적(靜的)이고 동적(動的)인 변화를 계량(計量) 하는 학문으로 과학적 성취에 공헌해왔습니다. 고대 토지측량의 기하학도 아니며 우주의 운동을 증명하려는 근대 물리학도 지나 이제는 인터넷에 의한 통계의 정수(精髓)로 자리 잡았습니다. 관념적인 학문이 경제적 성과를 위한 미시(微視)/ 거시(擧視) 자료로 숫자화하고 있는 시절입니다. 과거에는 수학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학문의 영역에서 그 빛을 발해 왔으며 현실에서는 파리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오직 생각의 세계에서 상상의 창조적 영감에만 일조(一助)를 해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수학은 인간에게 인식의 전환을 일으켜주는 그로 인해 인간의 삶을 지시하고 간여하며 더욱더 분발하도록 유도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통계학입니다. 인간의 감정에 간여해 분노와 기쁨을 일으키는 근원이 되고자 규율하고 자처(自處) 하는 시절입니다.
수학에 천재가 존재하는 것은 음악에 천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순수 영감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에 나이 어린 천재가 드문 것은 무수한 삶과 자연에 대한 관찰과 경험과 사고를 종합하고 분석해 논리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고투적 과정으로 가득한 종합선물세트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수학의 세계는 현실에서 시작해 상상의 관념 세계를 거쳐 또다시 현실을 좌지우지하는 시절을 맞이했습니다. 수학적 구조를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의 얄팍한 심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돈을 계량하고 나이를 규격화하며 시간을 지시하는 기호인 것입니다. 기호에 의지한 삶이기에 모두는 거기에 노예가 되었으며 그것은 인공지능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숫자가 드디어 인간을 옥조이고 있는 시절입니다. 그것은 생각 속에서 즉 아무런 자연의 간여가 없는 무균실과도 같은 지구를 벗어난 우주적 상상의 공간에서 시작했으나 지금은 인간의 운명에 간여하는 현실적 공간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수리적(數理的) 활동은 현존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에서 숫자들이 활약상을 보여줍니다. 현실의 잡다하고 북적거리는 미세먼지와도 같은 현상을 단 하나로 집약하거나 공식화하고 숫자화함으로써 명쾌한 정의를 내리며 확고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이의 제기가 불가능하도록 증명까지 완벽한 체계를 형성합니다. 따라서 그 구조를 바꾸면 얼마든지 음양의 조화를 이룩할 수도 있습니다. 즉 상상의 세계이기에 거짓과 진실이 난무하며 의도(意圖)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개념의 분열과 파생(派生)과도 같습니다.
마치 평화라는 개념의 사전적 의미처럼 분쟁과 다툼이 없고 서로를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롭고/ 평온한/ 상태가 인류가 목표로 하는 가장 완전(完全) 한 상태라 말하기도 하지만 그 너머 세계의 생각에서 볼 때에 그것은 목표라는 미래 세계를 향한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공상의 영역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즉 현실의 평화는 그 반대로서의 무력의 힘이 자신을 지킬 충분한 능력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는 음양의 조화와도 같은 또 다른 차원의 현실지향적인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미래는 기술(記述)로서의 기록으로 존재가 제한되어야겠으나 현실로서의 차용으로 수용하려는 착각을 몰고 왔습니다. 현실은 차별이 존재하는 완벽하지 않은 변화의 현장일 뿐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추억하듯이 미래 또한 상상의 세계일 뿐이며 현실의 잡다한 미세먼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유치의 인간들은 현실의 고단함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 미래를 현실로 도입합니다. 이루어지는 것은 꿈이 아니며 그것은 현실에서입니다. 모든 역사적 평화의 시기는 그런 무력의 완성이 실현된 현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억압의 현장에서 고통의 현장에서의 갈망하는 평화는 현실의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현실의 세계와 상상의 공간을 연결하는 개념과 같이 수학은 공준(公準, postulate)이라는 명제에서의 연역을 통해 수많은 정리(定理, theorem)들이 탄생했습니다. 개념이 필연에서 유출된 것으로 여기듯이 공준 또한 필연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경제적 동물의 기본 공준은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며 뜨거운 용광로처럼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무수한 정리들은 현실 세계에서의 개념 자체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인간의 욕망으로 변질시켜 수많은 가식적이고 낭만적인 정리들을 생성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미래의 얼굴은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에서의 숨 쉬는 얼굴이 진정 인간의 얼굴일 뿐입니다. 미래의 얼굴을 주장하면 할수록 그것은 원인으로서의 공준을 없애버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억지스러운 가짜 정리로 대치하는 꼴을 보일 뿐입니다. 결국 세상을 합리적인 수학적 사고(思考) 즉 논리적으로 볼 것이냐 경험적인 감각적 느낌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인식을 달리합니다.
수학의 정리들이 현실을 대신해 수리철학(數理哲學) 적으로 작동할 때에 경험의 세계에서 보자면 관념적이기에 그것은 생각의 세계에서 진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수학적 가치가 현실에 기준으로 작동하고 가치 근거로 작동할 때에 인간의 삶은 경험의 혼란에 빠지며 감각의 오류로 착각의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규격화되고 증명되어야만 하는 구조적인 틀 속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결혼은 직업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아이는 키워줄 육아 담당자가 따로 있어야 하며 서로 간의 친교는 주제가 있어야만 즉 동호회 모임이어야만 가능해집니다. 자연이 주어왔던 우연은 사라지고 인공이 펼쳐내는 필연에 근거한 삶만이 가능하기에 우리는 현실을 미래로 이전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를 적폐로 몰아야지만 원망에 근거한 자신만의 가짜 존재감이 생성됩니다. 경험을 축소시키며 자신을 선험적 개념으로 수학적 계량으로 대치합니다.
작금의 시절은 합리적 선험주의가 수학적 인공지능과 함께하며 더욱더 수학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다 못해 욕망까지 부채질하며 숫자가 일상으로 파고들어 서로가 적대시하며 살아가야 하는 분열된 세상을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수리적(數理的) 통계의 대상이자 요소(要素)가 되었습니다. 금본위제 화폐제도는 이미 오래전에 폐기되었으며 수리적 통계라는 절대적 가치로서의 공식들이 세상의 황금을 대변하는 대변자로 등장했습니다. 수리적 통계가 주재(主宰) 하고 있는 시절입니다. 사람의 존재를 존재 자체로 대면할 수 없도록 유혹의 손길을 뻗쳐 경제적 가치에 함몰되도록 인도하는 데에 숫자가 대단한 공헌을 한 것입니다.
분열을 조장한 것은 수로 체계화되고 공식으로 인도되어 무한하게 뻗어가는 합리적 수리의 세계입니다. 특히나 수학은 가설의 세계를 전제하며 부등호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맞춤형 자화자찬에 근거하는 학문입니다. 결국 수리철학(數理哲學, Philosophy of mathematics)은 종합과 분석의 합리적 선물세트인 것입니다. 현실은 인공지능의 영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땀 흘림의 노동은 상상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것은 현상과 실험으로 시작해 그 결과가 보편적 법칙으로 변환되는 진보적 가치의 증명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현실에서 보이는 무수한 현상으로부터 상상과 추론으로 어떤 기준으로서의 명제를 추출한 다음 그것을 하나하나 분석해 가다 보면 저절로 어떤 귀결점으로서의 결론에 다다라 그것을 일반화함으로써 세상의 법칙이나 원리가 수학적 공식으로 창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과 스스로 조화를 이루어야 인간다운 인간이듯이 사회 또한 각자의 인간들의 조화에서 스스로의 구조적 존립 의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념과 수리적 정리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지 그 목적은 아닙니다. 조화야말로 진정 인간 삶의 최상의 가치이자 하느님이 인간 사회에 선물한 종합적이고도 분석적인 선물세트의 주인공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1+1=2라는 수학적 공식을 누구나가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수학적 계량의 세계와 인간의 감성적 세계는 그 비교조차 불가능한 전혀 다른 세계이자 양립할 수 없는 질서와 차별이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여기서 1이라는 개념으로서의 본질은 세상의 하나를 지시합니다. 즉 나 자신이 1입니다. 그런 존재론적 시각에서 보자면 수학적 덧셈이라는 원리는 인간의 존재를 벗어난 현실이 아닌 세상을 설계하도록 인도하는 세계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일 때에 또 다른 하나는 존재가 불가능합니다. 나 자신 + 나 자신 = 두 개의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존재로서의 세계에서 덧셈을 허구입니다. 그렇다고 곱셈도 불가능합니다. 존재의 세계에 계량의 척도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숫자로서의 덧셈은 인간의 인식을 벗어난 세계에서나 가능한 공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개념의 세계입니다. 기호의 세계입니다. 감성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 나라는 고유의 존재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또 다른 존재로서의 나는 불가합니다. 나 이외에 세계는 무한하기에 더 이상의 1은 존재 불가입니다. 그러나 수학에서는 보편적으로 가능합니다. 그것이 가능하기에 합리적 계산이 가능하며 그것은 세상의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이성적 독재(獨裁) 세계인 것입니다. 1은 오직 하나이면서도 수학의 세계에서는 무한한 1이 가능합니다. 동일한 1들이 넘쳐납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수의 세계는 현실이 아니며 관념적인 세계입니다. 즉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 속의 세계이기에 현실에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해야 마땅하겠으나 우리는 숫자의 형식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수리 철학적 세계에 빠지기도 합니다. 간편성과 편리성은 인간을 인공지능의 세계로 인도해왔습니다. 결국 수학적 세계는 세상을 자기 멋대로 재단해 규격화시켜가는 편리를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개발을 위해 구속을 요구하는 독재자의 모습이며 강압적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시절의 변화에 따라 삶의 방식은 변화해왔으며 그 활동으로서의 사회적 질서와 삶의 질서 또한 계량적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바뀌어왔다고 보여 집니다. 지금은 조상의 전통적 질서를 세상의 기준으로 삶고 살아가는 시절이 아닙니다. 질서의 근거는 현실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문화적 질(質)에 있습니다. 수학적 양(量)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도 합니다. 우리의 창조적 시각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인류 최초의 것도/ 어느 순간 갑자기 땅 위로 솟아난 것도 아니며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진행되어오던 것이 한순간에 발아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윤회의 시각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즉 돌고 도는 세상일뿐이지 새로운 창조로서의 절대성은 불가하다는 것이지요. 씨가 발아하기 위해서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비바람을 견뎌내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보적인 시각은 자신들의 이념으로서의 신념이 세상의 새로운 씨앗이며 세상을 새롭게 발아시켜 꽃피울 수 있다는 시각을 절대화합니다. 그 너머 세계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러한 욕망은 당연히 그것으로 혜택을 받을 계층을 동반해야 가능하기에 과거의 반복만을 몰고 옵니다. 그것은 순수한 진보적 시각을 벗어난 정체적 시각에서 가능할 뿐입니다. 고속도로처럼 달려가는 세상에서 차를 세운다는 것은 죽음을 예고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복지의 위험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어왔기에 새롭고 신선한 것도 아니겠으나 유독 우리는 그것을 새로운 마중물로 신선함으로 여깁니다. 결국 그 결실에서 모두는 분열을 자초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설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조선조 오백 년이 성리학이라는 윤리와 도덕을 앞세운 왕조 정치를 펼쳐왔겠으나 90%에 달하는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무기력하게 스러져갔을 뿐이며 가렴주구의 대상으로 노예처럼 살아왔을 뿐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윤리도덕은 아무런 목숨도 담지(擔持) 하지 못하는 오히려 더욱더 빈곤과 수탈의 도구로써 매진해왔을 뿐입니다. 이념은 항시 역습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왔습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 없다는 내 탓의 시각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갈 올바른 시각의 관점이라 여겨집니다. 내 탓이라는 용기야말로 인간을 열정에 이르게 하겠으나 남 탓하는 원망은 그 반대급부로서의 게으른 무기력에 이르게 합니다. 남을 탓하며 자신의 신세한탄을 정당화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노력을 감쇄시키며 결국 남 탓의 세상을 전도하는 꼴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한번 인식된 개념을 인간을 지울 수 없다는 각인의 고통 또한 간직합니다. 한번 단맛을 보면 결코 쓴맛이나 밍밍한 맛에 길들여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식의 무서움은 그처럼 굴레로 씌워 놓으면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험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철학적 세계에 대한 새로운 자극과 경험으로서의 탐구에 따른 새로운 인식적 이해가 주어져야지만 면역력이 생겨날 뿐입니다. 어깨에 굳은살이 배 긴 사람에게 공짜를 주면 그 사람은 공짜에 길들여지기보다는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또 다른 노력의 반열에 이를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지만 그런 경험적 바탕이 없는 사람들에게 공짜를 주면 바로 중독되는 증상을 보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적 삶을 망가트려갈 뿐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극복할 만한 역량이 갖추어져야지만 가능한 조건인 합니다. 순종이나 거부의 몸짓에는 대안이 없거나 역량 부족의 어린아이의 한계성이 있습니다. 새로운 질서는 누구도 시행해 본 적이 없기에 불안과 시행착오의 고통이 당연히 따릅니다. 전통을 답습하는 주입식 교육의 무서움은 고통의 시간을 마취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을 극복할 만한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가 한계 탈피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질서가 이미 과거서부터 있어왔던 즉 시행해 본 적이 있는 시행착오의 반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질서의 도입과는 무관한 고집의 남용이 될 것이며 시민적 거부감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규율에 따름으로써 잘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심리적이고 유기체적인 활동으로서의 구조를 갖추고 있기에 그러한 거부적 느낌이 일어난 사회는 새로운 질서를 성취할 가능성은 점점 소멸해가고 원망에 근거한 분열사회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내 탓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만한 인간적 역량이 부족한 심사(心事)의 온정적 표출일 뿐입니다. 거기에 원망하는 마음까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질서를 파괴한 이미 질서에서 벗어난 사회적 이탈자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그런 용서를 모르는 집단들이 세상에 나설수록 세상은 질서를 벗어나 어지러워지는 혼돈의 시대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원망을 적극적으로 노출하기보다는 개념을 도입시켜 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윤리도덕적인 가치를 주장함으로써 상대에 대한 질타에 가격의 힘까지 실어주기도 합니다. 그들의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심사는 그처럼 겉으로 미소 지으며 속으로 칼을 가는 부류의 인간들이 되어갑니다. 가장 해악적인 방식이 그런 인간들의 복수극입니다.
어린 싹들은 거기에 부화뇌동하며 볼모로 잡혀 자신의 삶의 근거조차도 미련 없이 털어내면서 이념에 열중하고 그들의 신념에 심정적 동조를 애국적 참여로까지 여깁니다. 삶의 모든 것을 외부적 이념이나 윤리도덕으로 가꾸어갈수록 스스로의 운명은 아무런 감각을 유지시킬 수도 없도록 마비되어 갑니다. 그러한 심리적 만족 하에서는 더 이상의 도전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으니 우리끼리 편하게 살자는 내부적 인식론으로 단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경직성을 이룩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윤리 도덕적인 에너지에 모든 사회적 현상을 대입시킴으로써 인간의 도리라는 삶의 방식만을 최대화시킴으로써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한 즉 이성적 시각의 발현으로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시각 내지는 관점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더욱이나 그러한 이성의 시각으로 얻어지는 지성의 냉철한 분석과 종합으로 새로운 현상을 직시하려는 노력 자체를 전통적 가치의 파괴로 여기며 경원시해왔습니다. 오히려 멸문지화의 위험에 처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라는 세계는 그런 지식을 기반으로 살아갈 만큼 안일한 세상이 아님을 우리는 수없이 사회적으로 노출되는 문제들을 보며 누구나가 느낄 수 있습니다. 자아가 소멸된 공동체의 문제는 아무리 계몽적인 노력을 기울여도 화수분처럼 사건사고가 전통으로 대물림하듯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무수한 땜질적인 처방과 대처에 비난적 시각을 보이면 그들은 삶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억울해합니다. 눈앞에 시각이 멈춘 공동체의 운명은 시절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결국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대한 치열함이 결여됨에 의해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오히려 땜질 처방을 영구 처방으로 인식하도록 자신의 인식을 변화시킴으로써 편안해 하는 지경입니다.
시간과 더불어 고통도 잊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아무리 큰 사건사고들도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고 또다시 반복되어 찾아오는 사건사고에 또다시 반복되는 대책과 원성을 반복합니다. 영구적인 슬픔은 이념의 세계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반추(反芻) 적 슬픔은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나에게서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배부르면 머슴밥 짓지 말라고 합니다. 바가지로 밥 먹는 며느리 보고 많이 먹는다고 구박하는 것이 시어머니의 관점이자 도리입니다. 누구는 말합니다. 그런 현상을 사회적 냄비 현상이라고. 그런 세계에서는 온정을 과장하며 안일한 인식만을 보여줄 뿐 냉철하게 원인을 뚫고 들어가는 인생의 투철함과 현실의 예리함은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나약한 우리 몸에 새겨진 선험적인 전통적 질서에 의해 차단되어 불가능한 도전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의식이라는 거대하고 깊은 심연의 덩어리를 현실세계로 끌어올릴 수 없듯이 조상의 선험적 전통에 지배당하는 한 자기답게 살아가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처럼 안일함은 무서운 본성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누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다가가 보려는 노력 자체를 우리는 조상에 대한 불효막심으로 치부해버리며 혼외 자식으로 기꺼이 외면합니다. 실체에 다가가려는 서양의 시각을 가질수록 개념 속 인식들은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고 아우성치며 비판해 삶을 소외로 옥조이고 있는 시절입니다. 서양의 투철한 인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실천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 어떤 동조자도 우리의 주변에서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결국 혼자 외치는 노비의 자식이 되어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힐 뿐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본질을 벗어나 개인의 치기까지 모두 까발리며 어떻게든지 매장시키려는 분노를 사회적 동조로 이끌어내기까지 합니다.
우리에게 순수함은 바보의 다른 용어가 된지 오래입니다. 욕망의 삶을 올바른 삶이자 경쟁에서 앞서가는 삶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서 그런 삶은 나약한 인간의 자기합리화로 매도(罵倒) 해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대부분은 순수하게 살아왔다는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친밀함을 핑계로 주변에 자신 있게 말합니다. 눈치로 개성을 채워야 살아갈만합니다. 말 한마디로 패대기치는 능력을 우리는 똑똑하고 영리하다고 합니다. 가진 게 없는 속이 텅 빈 사회에서는 남에 대한 결점을 가짐이 능력이고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유도해갑니다. 마치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로 세상을 살아가듯이 편리함을 위해 복잡 미묘한 관점을 버립니다. 인간성을 매도하다 못해 매몰시키면서도 그것을 인간의 동물적 욕망으로 치부하며 세상을 투쟁의 장으로 변형시킵니다. 서양에서 그런 행위들은 신을 거스르는 인간의 오만이자 저질스럽고 비천한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현실은 인연이고 인연은 타협이며 타협은 부조리를 낳아 결국 모순 사회를 형성해갑니다. 그러한 연쇄 고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무능력자로 낙인찍힐 뿐입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자신이 우월하게 살아가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고 태연하게 거짓을 진실로 치환시킵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합니다. 자신의 못남을 투쟁의 대열에 동참함으로써 얼버무립니다. 침소봉대는 물론이요 호언장담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목소리 큰놈이 장땡입니다. 이 세상에 논리로서 성취하지 못할 것이 얼마나 될까요. 똑똑한 인간일수록 냉철한 논리로 거짓을 현실의 진리로 전환시키는 능력이 대단합니다. 사회는 그런 경향의 인간들에게 관료로서의 능력자라고 높이 평가하기까지 합니다. 사기를 쳐도 논리로 뒷감당이 됨에 의해 어느 누구라도 책임에서 벗어날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논리에 기반을 두는 보고서(報告書)입니다. 어수룩한 사회는 그런 논리를 동원해 원리를 압박함으로써 조리(條理) 있는 사회를 형성하기까지 합니다.
논리가 길을 잘못 들면 결국 인간의 삶을 지배해버립니다.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실제적 현상마저 판단을 달리합니다. 인간의 인식능력은 모든 영역에 걸쳐 이해할 만큼 광대하지가 못합니다. 어느 한 분야에서의 전문가로 나설 수 있을 뿐입니다. 맹목적인 믿음으로서의 신념은 너무나도 허술하기에 그 어느 분야에서도 기반을 다질 수조차 없습니다. 오직 개념의 나열에 따른 세상의 겉모습에 도취될 따름입니다. 개념은 모든 영역에 존재하지만 인간은 어느 한 영역에서 자기에게 끌리는 개념의 가치만을 주의 주장으로 내세울 때에 우리는 맹목적 인간이라고 표현합니다. 맹목적인 인간은 너무나도 굳건한 이념에 취해있기에 오히려 다가가기가 쉽습니다.
그들은 과거를 무시하고 미래를 확정합니다. 그런 확정된 시각을 논리로 재생해내는 능력이 있기에 그들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끝도 없이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나 외부에서 볼 때에 그런 맹목적인 인간들은 너무나도 강직하기에 오히려 신뢰하는 마음마저 일어납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을 우리는 맹목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러한 불확실함을 확실함으로 보여주기 위해 논리를 도입하고 수치로서 검증받으려 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확약 받고자 합니다. 결국 삶과 현실을 벗어난 그들의 논리는 자가당착에 빠져들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이질적 현상들 앞에 그들은 더욱더 투쟁의 열기를 지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회의 전말(顚末)은 순환적 회귀에 빠져듭니다. 그들은 소멸의 한 장(場)을 장식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세상을 실험실로 삼아온 죄과이자 그들의 장식적(裝飾的) 노고이기에 현실과의 괴리감으로 세상을 벗어난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거름이 아니라 오염이었습니다.
현실의 대상에 대한 인식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어떤 논리적 시각을 전개하고자 하면 과정과 결론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전제(前提)에 대해서까지도 의심의 눈길을 보냅니다. 전제는 개인의 고유한 세계 즉 창안이며 취향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관여하거나 비판할 수 없으며 표절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기질이자 시각의 원천이고 관념의 출발점입니다. 그것을 비판하거나 표절하려 함이야말로 조상을 욕보이는 짓이며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어리석음의 재현일 뿐입니다. 전제에 대한 비판보다는 자신만의 고유의 시각을 보여줌이 우선이라 하겠으나 텅 빈 내부를 욕망으로 채워버린 상황에서는 그런 인식적 능력 자체가 소멸되어 없다는 것이 사회적 문제입니다. 투쟁만이 만사(萬事)가 되어가는 만능 사회가 형성됩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불필요한 소모적 비용들은 그런 허무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한 인간들이 그려내는 허무적 상황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허무를 진실로 받아들이다 못해 인륜적인 도덕과 윤리로 승화시켜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비장함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처럼 비장함이 개인의 노력 없는 허무를 달래는 인간 삶의 비장의 무기이자 허무를 대체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비장함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도 기꺼이 거기에 함께 동참합니다. 우리 사회는 인간미가 서로를 껴안아줘야 살아갈 수 있는 무능 사회입니다. 그처럼 보편적인 신이 없는 사회는 허무합니다. 그런 허무를 인간미로 달래는 것에 대해 누구도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터전의 선물이자 조상의 운명입니다. 하찮은 개인의 시각으로 그런 운명적 세계를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서술적으로 나열해 볼 뿐입니다.
그런 운명적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박한 인간들로 사회는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회일수록 독선이 활개 치며 의존적 삶에서 진리를 찾으려 애씁니다.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만 몰두하는 자기답게 살아가는 인간이 사라집니다. 그런 인간은 주변의 동료들을 힘들게 합니다. 다들 쉬는 시간에도 일하려 하고 눈치 없이 집에까지 일을 가져가 무언가 배우려 하고 알려고 합니다. 그런 인간일수록 대부분 사회의 조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관점을 실현시키려 합니다. 당연히 조직에 도움이 되는 창안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은 직장의 분위기를 모른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습니다. 직장은 분위기의 사회였지 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로 때려잡지 못합니다. 눈치도 없이 거대한 창안을 제시하면 주변의 동료 선배들은 무능력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는 꼴이 되다 보니 모두가 혈안이 되어 저지하고자 애씁니다.
개인의 치열한 노력에 의해 창안된 것이 사회적으로 매도되고 비판받아온 것은 그처럼 조직의 도덕적 윤리에 희생되어 온 것이 우리의 비장한 슬픈 본성인 것입니다. 아예 창조 자체를 거부하는 민족이 우리의 본성일지도 모릅니다. 이씨 왕조의 오백 년이 그것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 자체를 본성적으로 싫어하는지도 모릅니다. 모방의 사회도 못 되는 표절의 사회를 누구나가 선호합니다. 진실의 고통을 내보이면 누구나가 싫어하며 오직 사탕발림을 진실로 느끼며 보이스-피싱에 감격하고 고마워합니다. 사기가 천박한 우리의 능력이자 국민성입니다. 대한민국은 조상이 물려준 유구한 역사를 사기로 간직한 사기 공화국입니다. 그저 내 발바닥이 따스하면 그것이 진리이며 내 이웃과 같은 생각과 동조하는 모습을 하면 그것이 이웃사촌인 것입니다. 닫힌 사회는 무조건적인 동조(同調)를 공동체 누구나가 조상을 담보로 강요함에 의해 동질사회를 구성합니다.
그런 세계에는 사기꾼이 창궐하고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후진국 병의 근원에 닿아있습니다. 사회 공동체 모두가 망각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후진국 병을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면서 사건사고가 터지면 해당자만을 비판하거나 애매한 희생양을 찾아 원한을 해소하려 하고 거기에서 분석적 원인을 찾으려 애씁니다. 사회 자체가 사건사고에 노출되어있음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겉보기 평화만을 갈망해댑니다. 공직자의 업무 중 사고의 대부분이 전문성의 부족과 상황 파악의 예리함을 도덕적 충실함으로 잘못 인식한 너무나도 안일한 일상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실제 원인을 윤리도덕적인 양심의 뒤에 숨김으로써 스스로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스스로가 잃어버린 것입니다. 스스로가 원인에의 탐구를 향한 치열함이 없는 사회는 모두가 사건사고에 간접적 원인 제공자들입니다. 그런 무관심이 일상사로 자리 잡고 반복되어도 왜 그런지에 대한 심층적 논의는 전혀 없습니다. 냄비 속의 개구리 신세가 우리의 전통사회의 진정함입니다. 자신은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모두에게 있는 이상 원인에의 탐구는 사회적으로 죄악에 가까운 반역죄이자 역모일 뿐입니다. 실체에 다가가 보려는 노력 자체를 우리는 누구나가 거부합니다.
우리의 관료체계는 거꾸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이 모든 것을 휘둘러 간섭해야 하부구조의 노동자들은 순종적으로 따르는 위계적이고 윤리적인 지시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즉 시키는 일이나 하면 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시키지 않는 것을 하면 절대로 안 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대통령이 잘해야지만 나라가 융성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의 시각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런 구조에서 하부구조는 시키는 일마저도 대충 해야 건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서 회의감(懷疑感)이 싹틀 수도 있습니다. 모두 안 하는데 나만 한다는 소외의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추진 과정에서 무수한 경멸적 시각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눈치 빠른 관료사회는 누구나가 알고 있습니다. 조직의 의리와 단결만이 전부인 것입니다. 부하들이 성과를 내면 오히려 안면을 몰수합니다. 무능력이 최고의 능력이고 독보적 창안의 제시는 사표를 써야 할 역적의 대열로 밀려납니다. 조선조 오백 년의 전통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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