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덕수의 일생)
장덕수의 일생에 대한 나무위키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옮겨 본다.
장덕수는 1894년 12월 10일 황해남도 재령군 남율면 강교리 나무리벌의 몰락한 양반이면서 농사꾼인 장붕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진남포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황해도 해주 연희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연희보통학교 졸업 후 급사로 취직하였으나 그만두고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판임문관시험(判任文官試驗)에 합격하였다. 조선총독부 판임관(判任官)에 임용이 되었으나 1912년 판임관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중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한 후 일본에서는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으며 와세다 대학의 문학 강의록과 정경과 강의록으로 독학하였으며, 1912년 가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하였고 1913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를 수료하고,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이후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했다.
1920년 4월 1일경에는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동아일보의 창간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동아일보의 제1대 주필에 취임하였고, 그해 6월 조선교육회 결성에 참여하여 평의원을 지냈다. 이어 가을 경성부에서 사회혁명당 참여, 12월 조선청년연합회 창립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21년 5월에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대회를 열고 국내 대표를 초청했는데, 참석한 이봉수(李鳳洙)를 통해 국내에 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자금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그가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게 되고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의 지도자인 장덕수는 1922년 4월에 쫓겨났다.
1923년 4월에 도미 유학길에 오르면서 경유한 도쿄에서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 단체와 선을 긋게 되고, 13년간 미국에서 체류했다. 1923년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 신문학과에 입학해 수학하였고, 1924년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신문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뉴욕으로 건너가 1924년 10월부터 1936년까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수학하였다.
유학 직후 그는 허정, 이기붕 등과 한국인 유학생 친목단체에 조직에 참여, 북미한국인유학생총회의 부회장에 선출된다. 유학생활 하는 동안 그는 허정, 이기붕, 조병옥 등을 만나 사귀었고,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서재필 등과도 만났다. 1925년 이승만 등이 조직한 대한인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아르헨티나의 사발라(Zabala) 선수를 꺾고 우승하였다. 8월 25일 동아일보의 기자 이길용이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운동복에 달린 일장기를 삭제한 채 보도했다. 이를 일장기 말소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9일자부터 무기정간처분을 당하였다.
1936년 9월 25일 이길용은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했다. 사장 송진우,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薛義植)은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동아일보 부사장 장덕수도 정간 중이던 1936년에 귀국하여 사퇴하였다.
장덕수는 1930년대 내내 송진우와 함께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공보국을 방문하여 동아일보는 조선인의 여론을 대변하는 몇안되는 언론이며 조선인의 입임을 지적하여 폐간 조치만은 막아달라며 설득과 로비 등을 벌였다. 동아일보는 약 9개월간의 장기정간 후 1937년 6월 3일자로 속간되었다. 1936년 12월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흥업구락부는 1925년 3월 23일 서울에서 조직된 기독교 및 기호파(畿湖派) 계열의 항일비밀결사로,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인동지회의 국내지부 역할을 하였다. 신흥우·이상재·구자옥·유억겸·이갑성·박동완·안재홍 등의 인물들과 종교인·변호사·교육자·의사·실업인들로 구성되었다. 장덕수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와 동시에 장덕수는 독립운동을 후회한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보성전문학교에 제출하고 사직했다. "조선민족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직한다.“
장덕수는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합법적인 공간하에서 독립운동 활동과 사회운동에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나,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에 따른 동아일보 정간 처분과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어용단체에 참여해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섰다.
1942년부터 그는 미국의 라디오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이는 미국의 소리 방송에 이승만이 출연,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방송을 하였고, 그는 송진우, 장택상, 안재홍, 여운형, 김성수, 장택상 등과 같이 이를 비밀리에 청취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허위보도로서 각 학교의 지원자가 속출한 듯이 전하였고, 각계 지도층 인사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학병 지원 권유의 담화문이라는 것을 연일수록 보도하였다. 그러나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학도병 징집 실적이 좋지 않자, 총독부는 각 학교의 교수들을 소집하여 훈시한다. 장덕수는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척하면서 칼럼 기고 압력을 기피하는 등의 수동적인 저항을 하였다.
1943년 겨울 총독부의 오오노 학무국장과 단게 경무국장이 보성전문 전임교수 전원을 당시 부민관에서 열린 만찬회에 초대하고 학병 강요를 하고자 출석을 지시했었다.[29] 이 자리에는 당시 친일로 유명한 한국인 기업인 한상룡, 조병상도 참석했다. 1945년 초 조선총독부에서 요시찰로 분류된 인사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자, 그는 비밀리에 지하로 은신하였다.
해방 이후 장덕수는 1945년 9월 6일 한국민주당 계획부장, 1945년 9월 22일 한국민주당 외무부부장,[34] 1945년 12월 23일 애국금헌성회 중앙위원, 1946년 1월 24일 비상국민회의주비회 준비위원,[36] 1946년 5월 1일 한국민주당 외교조사, 1946년 6월 21일 미국·필리핀 독립기념 축하준비회 외교부장, 1946년 7월 3일 한국여론협회 정치위원장,[39] 1946년 10월 19일 한국민주당 정치국장(정치부장), 1947년 10월 14일 한국민주당 정치부장(연임) 등을 역임하였다.
1946년 8월 24일 황해회(黃海會) 위원장 장덕수는 공산혁명, 조선공산당, 김일성, 공산주의 등을 비난하면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국민주당은 빠졌는데 우익정당 통합의 일환으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 시도에 김성수는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반대하였다. 통합하는 것은 당을 통째로 임시정부에 갖다 바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진영이 분열되었다. 5월 30일 이승만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방문한 한민당 장덕수에게 참가보류를 강경히 주장하였다. 6월 4일 반탁진영 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참가 불참 여론이 반반으로 갈렸다. 이때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한 단체와 대표는 한국민주당 장덕수, 大韓勞總 전진한, 靑年總同盟 유진산, 全靑 이성수(李成株), 全女總盟 황애덕(黃愛德), 獨促婦人會 박승호(朴承浩), 天道敎輔國黨 이진해(李鎭海), 己未獨立 류홍, 儒道會 이재억(李載億), 黃海會 함석훈(咸錫勳)이었다. 장덕수는 1747년 6월 10일 한민당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적극 참가해야 함을 역설하고 다녔다. 조병옥은 '미소공동위 참가문제 때문에 그가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정치적 촉망이 많았다'고 평하였다.[64] 조병옥은 '한때 항간에 와전되어 오해를 산 바 있는 소위 (장덕수의) 군정연장설은 순전히 근거없는 낭설이며, 좌익과 중간파 또는 나의 정적들의 모략에서 지나지 않았던 것을, 나는 지금도 자신 있게 증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에 미국, 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47년 8월 12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양진영의 반목으로 완전 결렬되어, 한국에 독립적·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이 무산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한민당 간부들과 제헌 국회 공천 문제를 의논하고 있을 때 각각 경찰 제복과 검정 외투를 입은 김석황 등 두 명의 청년이 찾아온다. 동대문경찰서에서 왔다며 의심을 무마한 이들은 M1 카빈으로 장덕수를 두 차례 저격한다. 장덕수는 백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절명한다.
1948년 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1980년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이 쓴 한국의 친일파 99인,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에 수록되었다.
(장덕수 암살)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장덕수가 자택인 청설장(聽雪莊)을 방문한 박광옥, 배희범(裵熙範)의 동대문경찰서 경찰관 등 범인들이 쏜 카빈 소총 두 발을 맞고 백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1947년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범인 박광옥, 배희범을 체포하였고, 1948년 1월 16일 수도청장 장택상은 장덕수 살해 혐의로 한독당 중앙위원인 김석황을 체포하였다.
범인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다. 배희범은 연대상과 2년생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김석황은 한독당 중앙위원이자 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이자 대한보국의용단(대한독립의용단) 단장이자 임시 정부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2월 26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은 김석황, 조상항(趙尙恒), 신일준(辛一俊), 손정수(孫禎洙), 김중목(金重穆), 최중하(崔重夏), 박광옥, 배희범, 조엽(趙燁), 박정덕(朴鼎悳)이 장덕수 피살 사건의 범인이라고 발표하였다.
1948년 3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 제1회 공개재판에서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였다.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1948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
1948년 3월 8일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는 북미합중국대통령 트루만의 명의로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에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하였다. 같은 날인 3월 8일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김주석 부하에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범죄로 김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김구는 1948년 3월 미군 군사법정에서 증인 신문을 받았다. 1948년 3월 12일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심문을 받았다. 김구를 심문한 미군정청 군법무관들은 대위, 소령, 중령급이었다. "(問) 선생의 제자격인 피고인들이 진술한 것마다 왜 한결같이 선생과 관련한 내용으로 부합 일치될까요? (答) 알 수 없지요.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됩니다." "(問) 누구의 모략이란 말이요? (答) 그것을 이루 다 말하자면 모단체나 개인에 관한 것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리가 없다.“고 했다.
장덕수가 암살되자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 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고 했다.
미군정이 수사하여 밝힌 사실에 의하면 암살 명단에는 고하 송진우를 비롯하여 장덕수는 물론 낭산 김준연(金俊淵), 윤치영 등 포함하여 27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한민당이거나 그와 관련이 깊은 인사들이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그럼에도 만약 김구를 체포한다면 거족적으로 군정에 대항하겠다고 하지에게 선언했다. 이 일로 한민당은 김구를 두둔하는 이승만에게도 석연찮은 눈으로 보게 되었다(나무위키 인용).
장덕수 암살과 관련한 자료 및 과거, 현재의 언론 보도 등을 그대로 옮긴다.
[박태균의 버치보고서]에는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고, 소련군과의 협조가 폐기된 상황에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위원회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1947년 내내 미군정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에는 보수세력 중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핵심 브레인이던 장덕수가 현역 경찰이 포함된 2인의 암살범들에게 살해된 것이다.
버치는 장덕수가 암살된 후 열흘이 지나 버치는 하지 사령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12월2일 나는 김성수, 백남훈과 함께 장덕수와 긴 회합을 가졌다. 하지 장군을 비난하는 이승만의 캠페인과, 총선과 관련된 이승만의 주장에 대한 한민당의 태도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나는 남상훈을 통해서 11월29일 저녁에 이들이 이승만을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한민당의 수뇌부는 이승만에게 그를 지원할 수 없다고 알렸고, 이승만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노여워했다고 한다. 그는 문을 잠그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을 그와 국가의 반역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모임에 대해서 장덕수는 이승만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말을 하지에게도 했기 때문에 버치가 이 내용을 하지에게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1947년 12월 4일자 경향신문 기사는, 이제 의문의 열쇠 하나가 풀린다. 1948년 5월10일 총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 한국민주당은 정당으로 유일하게 참가했다. 이승만은 자신을 ‘국부’라고 하면서 일개 정당의 대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정당에도 발을 담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상황에서 국회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민주당을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은 여당이 아니라 야당이 되었다. 김도연 재무부 장관을 제외하고 한국민주당 소속의 어느 누구도 이승만 정부에 입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민주당은 1949년 과거 김구와 같이 일했던 신익희와 손을 잡고, 정당명도 민주국민당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이승만이 왜 한국민주당과 손을 잡지 않았는가는 하나의 의문이다. 그런데 위의 문서는 그 의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이승만은 1947년 말의 시점에서 자신을 지지할 수 없다는 한국민주당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따라오지 않는 사람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한국민주당과 협력할 이유가 없었다. 1948년 3월17일자 문서(‘UN Report’ 버치문서 박스 5)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선거 이후에 이승만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12월2일 월요일 김성수, 장덕수, 그리고 4명의 다른 한민당 대표들이 나와 점심을 가졌다. 농지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월2일 저녁, 내가 떠날 때 장덕수는 따로 나에게 와서 김성수가 그 자신에 대한 암살 계획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알렸다. 김성수는 그러한 계획에 대해서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필자주: 버치가 한국민주당 관계자들을 만난 날이 장덕수가 암살된 날과 동일한 날로 되어 있다. 이 문서의 날짜는 미국 본토의 시간에 맞춘 것이다. 암살사건이 저녁 6시15분에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버치와 만난 직후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버치 컬렉션의 다른 문서에도 미국의 시간에 맞추어 보고한 경우가 많이 발견된다.)
이 문서에 의하면 버치는 장덕수가 암살되기 직전 그와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될 경우 미군정은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이 주도권을 갖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여운형의 암살 때와 마찬가지로 장덕수 암살 이전에 이미 암살에 대한 소문이 퍼진 상황이었다. 단지 그 대상이 장덕수가 아니라 김성수라고 오해를 했을 뿐이었다. 아래에서 ‘장덕수의 암살’ 문서가 계속된다.
‘12월5일 저녁 나는 장택상에게 그의 친구인 장덕수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전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박광옥과 배희범이 실질적인 범인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의 조사에서 그들의 암살 의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장택상은 그들의 동기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들은 극우들이다. 그들은 고위층 사람들에 의해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너는 내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이다. 이번에는 그 범죄자가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암살자들은 지시에 의해 행동했고, 진보와 지성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김구의 식솔들로부터 들어온 믿을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김구와 이승만은 11월30일 회합을 가졌다. 김구의 집에서 회합이 열렸다. 엄항섭도 참석했으며, 나의 정보원에 의하면 알려지지 않은 몇몇 사람들도 참여하였다.’
경향신문 기사는, 장덕수 암살 사건이 준 가장 큰 충격은 현직 경찰이 직접 암살에 가담했다는 것과 함께 이들의 암살 수법이 매우 대담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장덕수의 부인은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범죄 사건과 달리 암살범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본 사람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얼굴이 알려져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던 것일까?
다른 암살사건과 공통점도 있다.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은 송진우와 여운형, 그리고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이에 대한 직접적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랬다. 장택상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 전체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장택상의 아버지는 임시정부에 대한 정치자금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에게 피살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장택상의 집안 내력이 그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조준호는 서울 지역을 잘 알고 있고 많은 접촉이 있는 비정치적인 인물이다. 나는 다른 버전의 정보를 그로부터 받았다. 그가 직접적으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김구의 친구들은 김구가 장덕수의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나는 김구의 친구 관계에 대해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정당들은 서로를 헐뜯고 김구는 장덕수에게 일본의 주구라고 말했고 장덕수는 김구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너무나 바보같다고 말했다). 김구의 친구들이 김석황을 암살의 범인으로 비난했다고 조준호가 말했다. 김석황은 김구가 좋아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암살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엄항섭에게 김구가 장덕수와 김성수의 죽음을 승인했다고 말을 잘못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장택상은 재판에서도 정의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덕수의 유령에게 시달리는 김구’라는 프레시안 기사는, ‘남한 총선거 후 남북통일’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이승만과 ‘생각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게 된 김구는 이승만과 재결합하는 수순을 하나하나 밟고 있었다. 그러나 1947년 12월 2일 저녁 7시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가 제기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이 쏜 총에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이 사건을 겪으며 완전히 헤어진다.
장덕수 암살은 건국 전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무수한 폭력과 테러 가운데 가장 파급력이 큰 사건이었다. 1945년 12월 30일의 송진우 그리고 1947년 7월 19일의 여운형 암살사건도 정치적 파장이 적지 않았지만, 두 사건은 모두 신탁통치와 좌우합작 논란이 한창일 때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1947년 12월의 장덕수 경우는 이 두 문제가 정리되고 UN 감시 하의 총선거가 확정된 시점에서 발생했다.
이 시점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선거관리를 위한 치안 확보가 중요했다. 치안이 확보되지 못해 민의를 대변할 선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면, 가뜩이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논란의 중심에 서곤 했던 미군정의 정당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우려가 있었다. 더욱이 일사불란한 북한의 정부수립 과정과 비교해 정부가 출범도 못하고 있던 남한에서는 총선거를 치르는 과제가 온전히 미군정 책임이었다.
1948년 3월 15일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장덕수 암살사건 군사재판 법정에 두 번째로 출석한 김구가 증인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발언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자신을 죄인으로 보면 기소하여 체포하던지, 증인이라 보면 자신은 더 할 말이 없으니 퇴정하겠다’고 말하며 재판에 협조하지 않았다.
다행히 경찰은 재빨리 범인 검거에 성공했다. 이틀 만인 12월 4일 암살의 주범 박광옥(23세)과 공범 배희범(20세)을 체포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4일 보도). 경찰청장 장택상의 판단이 주효했다. 암살 현장에 있던 장덕수의 부인 박은혜가 총을 쏜 사람이 ‘경찰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하자, 장택상은 즉시 경찰에 비상소집 명령을 내렸다. 소재 파악이 안되는 경찰을 좁혀가자 종로경찰서 소속 경사 박광옥의 정체가 드러났다. 현장에 같이 있던 공범 배희범도 동시에 검거되었다. 그는 연희대학 3학년을 휴학한 현직 교사였다.
이어서 박광옥의 전세방에서 발견된 사진에 있는 최중하(최서면), 조엽, 박정덕 등도 검거했다. 이들은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 거사 직전 찍은 사진을 본떠 태극기를 배경으로 수류탄을 들고 "나는 조국 대한의 완전 독립을 위하여 혁명단원으로서 내 생명을 바치기로 서약함. 민국 29년 [1947년] 8월 26일. 대한혁명단 000"이라고 쓴 혈서를 가슴에 붙인 사진을 남겼다. 누가 봐도 임시정부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김구의 추종자들이었다.
암살의 배후를 추적하던 경찰은 1948년 1월 16일 국민의회 동원부장이며 한독당 중앙위원으로 김구와 각별한 사이인 김석황(54세) 체포를 마지막으로 공범자 10명 전원 검거를 발표했다. 김석황은 검거 당시 사건의 궁극적 배후 확인에 결정적 단서인 김구 앞으로 쓴 편지를 부치지 않은 채 가지고 있었다
(김교식, 1983, ‘정치 테러리스트 김지웅’ 『월간조선』 2월호)에서는. 선거를 위한 치안유지에 민감했던 미군정은 기소와 재판을 미군의 사법체계에 따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송진우와 여운형 암살범들에 대한 재판이 민간법정에서 이루어져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다는 비판이 거셌었다. 만약 이 사건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된다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1948년 2월 21일 미군 검찰은 검거된 10명 전원을 기소했다. 기소된 피의자 중 가장 급이 높았던 김석황은 1948년 3월 8일 법정에서 ‘김구로부터 지시받은 일이었다’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김구에 대한 조사 나아가서 그를 입건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두고 논란은 더욱 거칠어졌다.
사건 초기부터 김구 배후설에 무게를 두고 있던 미군정은 고민 끝에 정치적 접근을 선택했다. 소환의 방식을 나름 배려했다. 미군정 검찰총장을 역임한 이인은 임정 주석 김구를 사건 피의자로 입건하면 민심 격화를 수습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증인으로 부르되 미국 대통령 트루먼 명의로 소환장을 발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인, 1974, 『반세기의 증언』 명지대 출판부).
마침내 김구는 미국 대통령에 대한 예의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명분을 세워 법정에 출두했다. 1948년 3월 12일 그리고 15일 두 번에 걸쳐서였다. 법적으로는 피의자가 아닌 증인 신분이었지만, 정치적인 파장은 어머어마했다. 김구가 이 사건에 공식적으로 연루되어 법정에 나타나는 순간부터 그의 정치적 지도력은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그가 남한을 포기하고 북한에 간 것은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된 순간부터 이미 예비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소환장을 받아든 김구는 고민 끝에 "이승만에게 자신이 법정에 출두하지 않아도 되도록 손을 좀 써 달라고 정중한 편지를 인편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회답을 대신해서 "김주석이 이번 사건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주석 부하 개인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주석에게 누를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는 담화만 발표했다
『삼천리』 9권 4호에서는, 1948년 3월 12일 군사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한 김구는 당당을 넘어 오만했다. 법정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김구는 장덕수 암살에 대한 교사를 추궁하는 법정 질문에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등의 말을 반복하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3월 15일 공판에서도 김구는 같은 자세로 검사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결국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김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장덕수 암살사건의 여파는 컸다. 1947년 12월 12일로 예정되어 있던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대회가 합동하는 집회의 허가가 보류되었다. 국민의회 간부가 장덕수 암살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장택상 경찰청장이 내린 결정이었다 (손세일, 2015 『이승만과 김구』 7권: 96). 신탁통치 반대로 뭉쳤던 이승만과 김구가 점령군 철수 그리고 총선거 방식을 두고 갈라서던 끝에, 한국 문제의 UN 이관을 계기로 모처럼 재결합하던 흐름은 여기서 끝장이 났다. 이후 이승만과 김구는 결별의 수순을 밟았다.
설산(雪山) 장덕수 (1894~1947).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에 ‘자유의 발달’을 강조한 창간사 ‘주지(主旨)를 선명하노라’를 26살에 썼다. 장덕수는 한민당을 이끄는 김성수의 두뇌였을 뿐만 아니라, 반목하던 이승만과 하지 그리고 김구 모두가 인정하는 정치인이었다. 동시에 그는 1923년부터 미국과 영국에 유학하며 노사가 분규를 극복하고 산업평화를 달성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연구해 컬럼비아 대학에서 1936년 ‘산업평화의 영국적 방법론’ (British Methods of Industrial Peace) 이란 박사논문을 쓴 학자이기도 했다.
하경덕’ 『한국사회학』 50집 2호에서는, 1937년부터 보성전문에서 교수로 일한 학자 장덕수의 업적은 최근 최선웅에 의해 다시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설산 장덕수의 마르크스주의 국가관 비판 연구’ 2008년 『사총』 67호; "장덕수의 사회적 자유주의 사상과 정치활동, 2013년 고려대 박사논문). 장덕수는 1928년 하버드에서 받은 사회학 박사학위를 1930년 ‘사회법칙’ (Social Law) 이란 영어책으로 출판하고 1931년부터 연희전문에서 교수로 일한 하경덕과 함께 한국에 사회학을 최초로 도입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자유일보 기사는, 일제 말기 학병을 권유한 이유로 오늘날 좌익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이 문제는 좌익의 비난이 없는 여운형 그리고 김규식도 마찬가지였다. 좌익이 선택적으로 비난하는 인물들은 모두 그만큼 좌익의 아픈 데를 찌르는 비중 있는 인물들이란 사실을 드러내 줄 뿐이다.
뉴데일리 기사는, ★9월에 한민당(한국민주당)을 결성한 국내파들은 임시정부환영회를 구성, 생활대책을 강구하였다. 한민당수 송진우는 친구이자 광산왕 최창학의 저택 경교장을 김구 일행에게 주기로 합의하고, 모금을 통해 900만원, 경방 김연수가 500만원을 임정 측에 제공한다. 그런데 임정의 모 인사가 “부정한 친일파 돈은 안 받겠다”고 했다. 주는 것 다 받으면서.
12월 12일 저녁, 한민당은 김구 김규식 이시영 등 임정요인들을 초청, 종로 국일관에서 ‘봉영회’(환영대회) 개최를 위한 간담회 겸 만찬을 베풀었다.
술잔이 돌면서 임정 측 해공(海公) 신익희가 대뜸 독설을 터트린다.
“국내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총독부에 크든 작든 협력한 친일파들이다”
환영 자리는 금방 싸움판으로 변했다.
한민당 장덕수가 벌떡 일어나 항변한다.
“임정이 그런 색안경을 끼고 우리 국민들을 보다니…해공, 그럼 난 숙청감이로군”
고하(古下) 송진우가 가세하였다..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게 된 임시정부를 누가 모셔왔기에 그런 소리를 하오? 우리가 임정을 국민들이 떠받들게 하려는 것은 3.1운동 법통 때문이지 개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오. 당신들이 중국에서 무슨 짓을 해먹고 살았는지 우리가 모르는 줄 알아?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 고통은 우리보다 적었을 거요. 하여간 환국했으면 힘을 합해 건국에 힘쓸 생각부터 해야지, 그런 말은 앞으로 삼가시오. 해외에서 헛고생들을 했군. 쯧쯧.”
임정환영대회는 19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에서 성대하게 치뤄진다.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마침내 ‘신탁통치 5년’ 발표가 나왔다.
28일 경교장 긴급대책회의. 양측 발언 요지를 보자.
★김구 한독당=미군정을 엎어버리고 임정이 독립을 선언, 통치권을 행사해야한다.
‘반탁 국민총동원 위원회’ 결성. 9대 강령 발표.
*신탁통치 순응자는 반역자로 처단하자.
*대한 임시정부를 절대 수호하자.
*외국 군정의 철폐를 주장하자.
★한민당 송진우=신탁통치안을 보지도 않고 서두르면 안된다. 미군정과의 충돌은 피하는게 좋다. 미국이 물러가면 남한은 조직이 막강해진 공산당 세상이 될 것이고 소련이 남북한을 먹을 것. 이를 막으려면 미국의 힘이 최소 2년쯤 필요하다. 무작정 흥분하지 말고 냉정하게 전략을 세워야한다.
임정 한독당 사람들은 “집어 치우라. 매국노 아니냐”며 고함을 지르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연이틀 맞서던 양측 회의는 30일 새벽 4시경 일단 휴회하고 송진우는 원서동 자택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캄캄한 겨울 새벽 6시경, 송진우 방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청년들이 권총을 송진우에 난사하고 도망쳤다. 송진우는 13발중 7발을 맞고 숨졌다. 범인 1명이 잡히고 나머지는 전국에 수배된다.
그러나 미군정도 정계도 시선은 모두 김구에게 집중되었다. 왜냐하면, 김구가 중국에서 밀정과 친일파등 30여명을 살해할 때 동원한 비밀테러조직이 귀국하여 지하활동을 재개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구는 새로운 이름의 청년조직도 만들었다.
한겨레 기사는,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인기 정치인이자 좌우합작운동의 중심에 있던 여운형이 쓰러졌다. 파출소 앞에 서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 나와 여운형의 자동차를 정지시켰다. 암살범은 후면 범퍼에 올라타 여운형의 심장을 저격했다. 그의 죽음은 곧 분단을 의미했다. 남과 북의 정치세력, 모스크바 3상 협정 지지 세력과 반탁 세력을 묶을 중심축은 여운형밖에 없었다.
시사오늘 기사는, <암살>은 해방정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정치지도자 5인의 암살 사건을 다뤘다. 암살범들의 증언과 관련 회고록, 뒤늦게 공개된 미군정의 자료와 러시아 비밀문서에 기반해 분단으로 귀결된 ‘비극의 서막’을 조명한다. 자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미·소 간의 이해를 조정하고 좌우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한 결정적 순간에 그 중심에 선 정치인이 암살되면서 현대사가 뒤틀렸다는 데 지은이들은 주목한다.
해방된 지 한 달도 안 돼 발생한 현준혁 평양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의 암살을 시작으로, 정국을 뒤흔든 ‘신탁 방법론’을 두고 대립하던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 미군정의 단독정부 추진을 지지하던 이승만의 반대편에 선 여운형, 김구를 법정에 세우며 이승만을 최대 수혜자로 만든 한국민주당 실세 장덕수, 이승만의 최대 정적 김구가 잇따라 피살됐다. 이 암살에는 모두 ‘극우 테러’ 조직인 백의사가 연루됐다. 암살범은 이북 출신의 반공 성향 20대 행동대원. ‘친일’ 경찰과 군의 고위간부가 배후로 거론됐다. 책은 현대사의 불행이 “악질 친일파가 반공을 앞세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테러를 악용한 데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뉴시스 기사는, 1947년 5월 24일 서울 필동에 있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인 브라운 소장 관저에서 열린 제2차 미소공위 개최 축하 연회에 참석한 여운형(왼쪽부터) 근로인민당 위원장, 김규식(金奎植) 과도입법의원 의장,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 통역으로 활동한 이묘묵(李卯默), 스티코프 통역, 테렌티 스티코프 미소공위 소련 측 수석대표, 허헌(許憲) 남조선노동당 위원장이 환담하고 있다. 당시 신문에는 김규식이 불참한 것으로 보도됐지만 오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나마 ‘화기애애한’ 좌우 정치인의 만남은 이 행사가 마지막이었다. 몇 달 뒤 이 행사에 참석한 여운형과 장덕수가 암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암살의 대상이 된 인물은 좌파 정치인 중 가장 대중적으로 명망이 있던 근로인민당 위원장 여운형이었다.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경 여운형은 당시 유숙하고 있던 서울 종로구 명륜동 정무묵(사업가)의 집에서 나와 리무진을 타고 계동 자택으로 향했다. 그는 4개월 전 자택이 폭파 테러를 당해 주변의 권유로 그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여운형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를 향하여 서서히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 혜화동 파출소 옆에 서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후진을 시작했다. 리무진은 속력을 늦추어 좁아진 공간을 비켜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차 뒤쪽에서 한 젊은이(한지근)가 권총을 겨누고 달려와 세 발의 총을 쏘았다. 여운형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향년 61세였다.
정치적으로 여운형 암살은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를 겨냥한 정치 테러였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해방 후 이북에서 9월 3일 발생한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서기 현준혁(玄俊爀) 암살, 12월 30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宋鎭禹) 암살 등은 표면적으로 백의사와 극우 청년단체가 주도했지만, 여운형 암살사건부터는 ‘공권력’이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덕수 암살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여운형 암살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47년 12월 2일 이번에는 ‘우익의 본산’인 한국민주당을 이끌던 설산(雪山) 장덕수 정치부장이 자신의 집에서 현직 경찰과 대학생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향년 54세였다.
뉴시스 기사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된 후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미군정으로서는 한국 내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던 한국민주당의 책임자 암살로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군정은 과거 송진우·여운형 암살사건에 신속하고 강력하게 대응했다.
문제는 용의자들이 장덕수 암살 목적으로 1947년 8월 ‘대한혁명단’을 조직했는데, 이들이 모두 대한학생총연맹 소속이라는 점이었다. 이 단체는 1947년 6월 발족할 때 김구 한국독립당 위원장을 총재로, 한국독립당 간부 조소앙(趙素昻), 엄항섭(嚴恒燮)을 명예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또한 한국독립당의 중앙위원인 김석황이 암살범들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됐다. 체포되기 전 김석황은 김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군을 배경으로 하고 임정 법통을 무시하는 도배들이 무죄한 사람을 다수 체포하여 죄를 구성하려 하니 이런 통탄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소생이 숨어다님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임정을 타도하고 선생을 모함하려는 화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당시 장덕수는 2차 미소공위 참가와 단독 선거 문제로 김구와 대립했고, 단독 선거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암살의 배후로 이승만과 김구를 모두 의심했지만 나타난 결과는 편향적이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암살사건 다음날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장덕수가 두 명의 경찰 복장으로 가장한 사람들에게 암살되었다. 조병옥과 장택상은 공산주의자들의 지시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승만이 그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장덕수는 이승만을 비난했으며, 비난할 것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미군정 정보참모부는 이승만과 장덕수가 사건 3일 전에 만났을 때 ‘어떤 문제’로 크게 논쟁을 벌인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사 결과는 한국독립당에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됐다. 총을 쏜 현직 경찰에 대한 조사는 거의 이뤄지지 않은 채 경찰 수사는 김구와 한국독립당에 집중됐고, 결국에는 김구가 직접 특별재판 법정에 증인으로 두 차례나 나가야 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후에 김구, 조소앙, 엄항섭 등 한국독립당 간부들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이 났지만, 김구로서는 암살사건의 배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증인으로 공개 재판정에 섰다는 자체가 엄청난 정치적 타격이었다.
김구에 대한 특별재판 출두요청서는 이례적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이름으로 발부됐다. 1948년 3월 11일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하면서 김구는 자신을 배후로 지목하는 것은 모략이라면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 씨의 명의”로 출두장이 왔기 때문에 국제 예의를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재판정에 나간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재판정에서 그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사흘 뒤인 15일 다시 증인으로 출두한 그는 “내게 대해서 법정에서 이렇듯 죄인 취급을 함에는 나로서 이 이상 말할 것이 없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종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으니 바로 나를 죄인이라 보면 기소를 하여 체포장을 띄워 잡아놓고 하시오. 내가 증인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으니 나는 가겠소”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1948년 2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는, 여운형 사후 통일정부 수립을 적극적으로 이끈 사람은 김구였다. 사실 김구는 이승만과 함께 여운형의 반대파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민족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던 김구는 좌우를 아우르는 여운형의 노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승만과 함께 우익의 대표 지도자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협력과 견제를 반복했을지언정, 장덕수 암살사건이 있기 전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을 때조차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장덕수 암살사건을 기점으로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1947년 12월 2일, 한민당 정치장관 장덕수가 피살되자 경찰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다. 우파 정당들의 통합 운동 당시 김구와 장덕수가 반목했던 일이 있었고,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도 두 사람 사이에 고성이 오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암살 용의자들인 박광옥과 배희범이 자신들을 ‘김구의 추종자’라고 밝히고,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한 것’을 암살 동기 중 하나로 언급하면서 김구에 대한 의심은 커져갔다. 이에 김구는 자신이 법정의 증언대에 서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이승만에게 요청했지만, 결과적으로 김구는 미군정 재판에 소환당해 4시간 반이나 심문을 받는 등 ‘말할 수 없는 수모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일을 계기로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론을 철회하고 남북협상론을 들고 나왔다. 이는 사실상 김구가 그동안 고수해왔던 임시정부 법통론을 포기하고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대단결 노선으로 선회했음을 의미했다. 이렇게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이승만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정적(政敵)이 된다. 한때 호형호제(呼兄呼弟)했던 두 사람이 원수가 된 셈이다.
김구 씨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고 제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요지의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중략) 나의 유일한 염원은 천만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설하련다. 삼팔선을 메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이때부터 김구는 적극적으로 북한과의 협력에 나섰다. 5·10 단독선거가 임박한 4월 19일에는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규식과 함께 북행길에도 올랐다. 그러나 김구의 북한행은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김구가 임시정부 법통론을 내세우며 우익 노선을 걷는 동안 북한은 이미 체제를 공고화하고 있었고, 북한은 김구와 김규식을 그저 이용하려 할 뿐이었다.
매일경제 기사는, 미군 군정재판소와 6.25직후 우리 법정에서 이루어진 장덕수암살사건,국회프락치사건, 서민호살인사건, 부역자 재판 등 현대사의 격동기에 이뤄졌던 판결문들이 대거 행방불명된 사실이 밝혀졌다.
대법원의 "법원 1백년사 편찬위" 윤재윤 판사는 30일 "92년부터 전국의법원-검찰청 기록보존소및 각종 간행물 등을 통해 중요사건 판결문을 수집하고 있으나 45-53년 간의 판결문이 대거 사라진 사실을 발견했다"고밝혔다.
45년 9월7일 맥아더장군의 "범죄 또는 법규위반"포고령에 따라 설치돼 48년 5월까지 3년 가까이 운영됐던 미군 군정재판소의 명칭은 "점령군군율재판소". 이 재판소가 담당한 중요 사건의 하나가 48년의 "운산 장덕수 암살사건"이나, 이 사건의 판결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당시 한민당 정치부장이던 장덕수선생은 현직 경찰등에 의해 암살됐으나 미군정은 백범 김구선생이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오해, 그를 법정으로 출두시켜 집요하게 추궁했었다.
50년 "부역자 사건" 판결문도 행방이 아리송하다. 당시 정부는 전쟁 직후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별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 전쟁기간중의반국가적-비인도적 범죄 처단을 위해 9.28 서울 수복후 51년 1.4후퇴전까지 서울지법에서만 무려 3천6백건의 판결을 내렸으나 단 한쪽의 판결문도 찾지 못했다.
세계일보 기사는, 사건 해결 과정에서 경찰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인다. 경찰은 이듬해 4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직감’으로 암살범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한다는 게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 암살범들이 “범행 당시 사용한 권총을 경찰 당국에 바친”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암살범들이 범행 도구를 경찰에 바쳤다는 것, 총을 받고도 경찰에서 아무런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 모두 납득하기 어렵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이끌었던 여운형 암살사건에서 경찰의 등장은 더 또렷하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었을 때 경호원이 범인을 뒤쫓았다. 그런데 현장에 있던 경찰이 경호원을 끌어안았다. 경찰도 범인을 쫓고 있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범인은 사라졌다. 미군정은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이 여운형의 암살을 기도한 사람들은 체포하지 않고 경호원을 범인으로 몰아가려 한다”고 판단했다.
책은 “공권력의 축인 경찰의 ‘정치 암살’ 개입은 해방 정국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암살의 배후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난관을 조성했다”며 “배후 규명, 처벌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이후 우리 정치사에서 발생한 많은 암살과 테러, 의문사에 또다시 공권력이 동원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빠지지 않은 이름, ‘김구와 이승만’
책은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암살사건의 ‘중요한 공통점’ 중 하나로 “김구, 이승만이라는 최고 지도자의 이름이 항상 거론되었다는 사실”을 꼽았다. 굵직한 정치 이슈의 중심에 있었고, 희생자들과는 직간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혀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1947년 12월 2일 발생한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 암살은 대표적인 사례다.
장덕수의 죽음은 미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미군정의 의지대로 정국을 이끌 한국측 파트너로 장덕수를 꼽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전례없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고, 배후로 김구를 지목해 법정에 세웠다. 미군정, 한국민주당과 대립하며 남한 단독선거에 불참하고, 남북연석회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시점에 재판에 불려 나와 암살의 배후로 거론되면서 김구가 입은 정치적 타격은 컸다.
미군정은 이승만에게도 강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군정 책임자인 하지 중장이 “이승만이 그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는 미군정 문서는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이승만은 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장덕수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앞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이승만에게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은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과 같은 결과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책은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지도자는 이승만이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도자는 김구였다”며 “장덕수의 죽음 직후 이승만은 별다른 무리 없이 단독정부의 정권을 장악했다”고 분석했다.
페리스코프:티스토리에서는, 1948. 1. 16. 김구가 과연 장덕수 암살의 배후? 라는 글에서, 장덕수 암살 관계로 수배 중이던 김석황이 사건 달포 만인 1월 16일 체포되었다. 수도청장 장 총장은 고 장덕수 살해사건에 관하여 16일 중간 특별발표를 하였는데 그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16일 새벽 4시 10분에 고 장덕수 살해관련범인 김석황(54, 한독당 중앙위원, 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 대한보국의용단장)은 광주군 중대면 오금리 민병만(47) 방에서 수도청 형사 최난수 경위에게 체포되어 방금 수도청에 인치되어 있다. 우자는 금번 장 씨 살해사건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고 또 추측컨대 해방 전후 좌우익 요인 살해사건에 관해서도 우자의 취조에 따라 그 암운이 일소되고 그 배후의 흑수(黑手)도 법망에 걸려 조선 정계를 명랑케 할 것같이 보인다. 경찰로서 가장 취미 있게 생각함은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일건인데 이 서한의 내용은 마치 차천자(車天子) 식이다. 이 자들의 안중에는 조국도 없고 민족도 없고 다못 일개인의 권리욕에 눈이 뒤집힌 모양으로 대개 범죄는 이와 같은 과대망상증 환자에서 많이 나는 것 같다. 이 자들을 소탕치 않으면 좌우를 막론하고 금후 유위한 조선 요인들이 많이 살해될 것이므로 경찰은 이들의 소탕을 목표로 전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자료대한민국사>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1948년 1월 17일”로 표시된 기사인데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로 확인되는 <동아일보>, <경향신문> 동일자 기사는 이와 대략 같은 내용이지만 똑같지는 않다.)
장택상의 담화문은 비서나 직원을 시키지 않고 손수 작성한 것이 많은 것 같다. 치졸한 속마음이 여과 없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이 발표도 그렇다. 김석황 “배후의 흑수”라는 것이 김구를 겨냥한 말 같은데, 이제 김석황을 체포해 김구를 걸고 들어갈 빌미를 잡게 되었다고 신이 난 것이다. 장택상이 김구와 김석황 등 임정 인사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딸들이 쓴 그의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창랑 장택상 기념사업회 펴냄) 120-122쪽 “임정 인사의 고자세”에 드러나 있다. 임정 환국 직후 한민당 인사들이 죽첨장으로 김구에게 인사드리러 갔을 때의 일이다.
국내 정치인의 대표로 고 송진우-김성수 씨를 위시하여 고 조병옥-백관수-김준연-허정 씨 등과 나까지 6인이 이분들을 만나려고 최창학 씨 집으로 찾아갔다. 그 날 날씨는 영하 15~16도나 되는 몹시 추운 날씨였다. (...) 우리는 추운 날씨에 장구한 시간을 섰기도 어렵고 하여 할 수 없이 문 밖 맨땅 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
약 1시간 반 후에 이 자가 나타나더니 “주석이 바쁘시니 더 기다리라.”고 명령하다시피 말하고는 그대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3시간을 추운 날씨에 맨땅 위에 그대로 앉아서 기다렸다. 6시가 좀 지나자 자칭 주석 비서격이라는 김석황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
김이 들어간 지 약 30분이 지나서야 웬 중국 옷 입은 자가 하나 나타나더니 우리들을 옥내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자를 따라서 일본식으로 된 최창학 씨 집 2층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석 김구 씨는 좌석에 앉은 채로 요지부동, 우리 여섯 사람의 큰절을 차례로 받았다. (...)
이것이 국내에서 정치에 마음을 두었던 우리들의 임정 인사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나는 인상이 나빴다. 그리고 나의 임정 인사에 대한 그 나쁜 인상은 미군정 3년간을 통하여 일관하였다.
조금만 유의해 읽으면 화자의 성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이다. 11월 하순에 기온이 무슨 영하 15도씩이나 내려갔겠는가. 그리고 김구가 아무리 거만하다 해서 세 시간 넘게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했겠는가. 기다릴 만한 장소가 안에도 충분히 있는 큰집인데.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했을 것이고 부득부득 우기고 버티니까 할 수 없이 만나준 것 아니겠는가. 빤한 사실을 뒤틀어서 상대방을 욕하려는 비뚤어진 심사가 눈에 훤하다.
속은 뒤틀려 있어도 장택상이 김구에게 정면으로 대들 엄두는 감히 내지 못했을 것이다. 김규식에게도 값비싼 담뱃대를 자기 집 가보라고 갖다 바치며 자기 진심을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눈물까지 글썽였다는 장택상 아닌가.(<송남헌 회고록: 김규식과 함께한 길>(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88쪽) 속으로 벼르고만 있다가 이제 미군정의 힘을 빌려 김구와 김석황을 괴롭힐 길을 찾아 환희작약하고 있는 것이다.
발표문 중에 ‘차천자’는 왜 나오나. 차천자는 1920년대에 성세를 떨친 보천교 교주 차경석(1880-1936년)의 별칭이다. 김석황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하는 편지가 김석황이 김구 앞으로 쓴 것이었다. 이것이 김구의 사건 연루 증거가 된다고 생각해서 득의양양한 장택상이 김구의 위세를 차천자에 비유한 것이다. 미군정 고위층은 이 편지를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었는데, 장택상은 김구의 연루 사실을 흘리기 위해 차천자를 갖다 댄 것이다. 원조 빨대다.
1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대권을 잡으시오’ 모 정계요인에게 주는 괴이한 서한도 압수”란 제목으로 이 편지 내용을 소개한 기사도 실렸는데, 편지 내용은 삭제되어 있다. 기사의 남아있는 앞부분은 이런 내용이다.
김석황은 암살사건이 돌발하자 곧 그 종적을 감추었던바 서울 시내는 물론 남조선 전역에 걸쳐 경찰에서는 물샐 틈 없는 수사망을 펴고 있던 중 작 16일 사건 발생 45일 만에 체포된 것인데 체포 당시 지니고 있던 모 정계요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구절을 보더라도 이번 사건은 그 이면에 기괴한 사실이 숨어있다는 것이 추측된다. 즉 서한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먹칠을 당하고도 <동아일보>는 부득부득 편지 일부를 지면에 올리고야 말았다. 1월 20일자 제2면의 40퍼센트를 점하는 큰 기사로 김석황 체포 경위를 밝히는 중에 살짝 끼워 넣은 것이다. 김구를 욕보이려는 장택상과 한민당의 의지가 합쳐진 성과다. 이 기사에는 사건 자체와 별도로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어서 길지만 모두 옮겨놓는다.
“고 장씨 사건 연루자 김석황 체포 경로 - 서제(庶弟)와의 불화가 단서”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 씨 암살사건에 관련되어 한국독립당 중앙위원, 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 보국의용단장인 김석황이 지난 16일 새벽 광주서 체포된 사실은 이미 보도된 바이어니와 그 체포의 경로를 들으면 엽기적 흥미를 일으키는 점도 없지 아니하여 이 사건의 중대성을 더한층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김석황에게는 서제 김모가 있는데 그 불화야말로 금번 김석황 체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김석황은 황해도 출신으로 전에 광산을 경영한 바 있었는데 이 때에 운이 좋아서 30만 원의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 서제는 형이 졸부 된 것을 보고 물론 그저 있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형 김석황은 단돈 천원밖에 주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30만 원에서 천원을 떼어내 주었으니 그도 물론 적지 아니한 돈이지마는 서제의 마음에는 이것이 철천의 한으로 맺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분풀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때는 왔다. 장덕수 씨 암살사건이 발생하자, 김석황은 도피하여 버렸다. 서제는 그 형 김석황을 잡기 위하여 수십 일간 경찰에 협력한 것이다. 그리하여 백방으로 그 형의 종적을 살피는 것이었다.
경찰에서는 김석황의 애첩 이숙자(가명)에게 두 명의 형사를 미행시켰는데 금월 2일에 이숙자는 경북여관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있다가 나왔다. 그래서 형사 한 사람은 종로서에 와서 다수 경관의 응원을 얻어가지고 경북여관을 포위하고 엄밀한 가택수색을 해보았으나 하등의 수확도 없었고 객실이 7, 8이나 되는데 다만 한 사람의 장님을 발견하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형사들은 이 장님을 붙들어서 “지금 왔던 여자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더니, 장님이 말하기를 “자기 남편이 관려(官戾)가 있어서 어느 곳에 있는데 그대로 거기 있어야 좋은가, 혹 그 자리를 옮겨야 좋은가?” 하고 물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경찰에서는 이 사실을 김석황의 서제에게 보고하였더니 서제는 김석황이 서울시내에는 있지 않다는 것을 단정하고 여러 가지로 연구한 결과 뚝섬 국방예비대 연대 내에 그 둘째 아들과 같이 있겠다고 말하였다. 김석황의 서제의 이 단정에 의하여 15일에 경찰에서는 뚝섬 국방경비대로 갔었다.
그랬으나 국방경비대에서는 경찰의 수색을 거절하고 들이지 아니하였다. 경찰에서는 수도청장 장택상 씨가 직접 나서서 미인 장교 6명과 통위부 미인 고문 프라이스 씨에게 교섭하여 통위부 소속 미인 장교 두 명과 함께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장 외 수십 명의 경관을 인솔하고 뚝섬 국방경비대 연대로 가서 무난히 가택수색을 하였으나, 김석황 부자는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다수의 미인 장교까지 출동시켜 가지고 자신 있게 나갔던 경찰의 면목은 전혀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미인 장교들은 “이런 일도 있어야 재미있지 않으냐?”고 말하여서 수도청장을 위로하는 듯 빈정대는 듯 말하였다. 수사대 일행은 허탕 짚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최난수 경위 한 사람은 남아있겠다고 고집하였었다. 그래서 형사 두 명을 남겨주고 전부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더군다나 미인 장교들까지 대동원하여 가지고 김석황을 체포하러 나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장 수도청장은 마음의 둘 곳을 아지 못하여서 전전반측하여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15일은 지나고 16일이 되었다. 새벽 세 시 반이 되었다. 전화소리가 땔~ 하고 들렸다. 수화기를 손에 잡아 드니 최난수 경위의 목소리였다. “김석황 잡았습니다!” 하였다. “어디 있느냐?” 하였더니 “광주 있습니다!” 하였다. “어찌된 일이냐?” 물었더니 “네~” 하고 대답하고 그 경로를 말하였다. 그 경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최난수 경위는 수사대 일행을 보낸 후에 국방경비대 중대장을 만났다. 그래서 말하였다. “당신도 애국자이고 나도 애국자가 아니오? 그래서 우리가 건국에 협력하기 위하여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 오늘은 장덕수 씨 살해범인 김석황이가 꼭 여기 있는 줄 알고 수도청장 이하 다수 경관이 외국인 장교 여러 사람과 같이 오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런데 허탕을 잡고 가니 우리 꼴이 무엇 되었습니까. 나는 당신의 애국심에 호소합니다. 당신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어서 범인을 내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애원하였다.
그래서 중대장은 최난수 경위의 성의에 움직였다. 그래서 흥분된 어조로 대답하였다. “네, 나는 소의(少義)를 버리고 대의(大義)를 살리겠소. 이리 오시오.” 하고 최 경위의 손을 잡고 한 곳으로 인도하였다. 거기는 김석황의 둘째 아들이 국방경비대의 군복을 입고 불을 쪼이고 있었다. 최 경위도 본래 잘 아는 얼굴이라 감별하는 데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김석황의 이 아들에게 수갑을 질러서 동행을 요구하였다.
김석황의 큰 아들은 이 병영에 소위로 있는 터이라 그래서 연락이 되었던 모양이다. 수갑을 질려서 동행의 최촉을 받은 김석황의 아들은 말하였다. “나를 잡아갈 것이 무엇 있소. 내 아버지 있는 곳을 대리다!” 하였다. 그래서 짚차는 광주군을 향하여 밤 장막을 뚫고 질주하였다. 광주군 중대면 오금리 민병만의 집이었다. 거기서 김석황은 소대성(蘇大成)이처럼 코를 골고 꿈나라에 잠겼던 것이었다. 밤 두 시가 지난 때이었다. 그래서 김석황은 무난히 경관들에게 취박되었다.
김석황을 체포한 후에 물론 그 신체수색이 있었다. 그 주머니 속에서 미발송의 편지 한 장이 발견되었는데 김석황은 그 편지를 장택상 경무총감에게 보내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편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선생님께서 대권을 잡으실 때까지 소생은 유리개걸(遊離丐乞)하기로 하였습니다. 복원(伏願) 선생님은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대권은 반드시 선생님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선생님은 천명을 받으셨으니 소생은 잡힐 리가 만무합니다. 이 박사와 한민당 찬역배가 음모를 하오니 선생님은 특별히 신변을 조심하십시오. 대권이 이 박사에게 가면 인민이 도탄에 빠지고 애국자의 살상이 많이 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대권을 추호도 사양치 마시고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운운”
이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면 아무리 생각하여보아도 장택상 씨에게 보내려고 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차천자적 백백교도적 광신자들로부터 조선 민중이 해방되어야 민주주의국가의 성립이 용이하게 될 것이다.
김석황의 동생이 수십 일간 경찰에 협조하는 동안 어디에서 묵고 있었을까? 경찰서 유치장이 아니었을까? 뚝섬에서 피의자의 아들에게 수갑을 채웠다는 얘기를 보니 피의자의 동생이라 해서 더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 같지 않다. 그 아들놈은 경찰이 제 아버지 찾는다고 자진해서 있는 데를 알려주었겠는가? 뚝섬에서 몇 시에 붙잡혔는지 몰라도 새벽 두 시에 오금리 도착하기까지 혼날 시간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병신이나 되지 않았으면 다행이겠다.
최난수 경위의 성심어린 호소가 중대장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협조에 나서게 했다는 이야기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최난수는 노덕술과 함께 앞서 정판사사건에서도 대활약을 했고 장차 반민특위 파괴 공작에도 앞장설 인물인데, 그가 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지 이상하다. 1937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에 그가 군산경찰서 순사부장으로 나오는 기사가 하나 있다. 노덕술은 순사부장 진급 10년 만에 경부로 승진했는데, 1937년에 순사부장이었던 최난수가 1945년까지 경부 승진을 못하고 있었던가? <친일인명사전>의 경찰 출신자 수록 범위는 경부 이상이다.
체포된 김석황(1894-1950)은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하고 상해 임정에 참여했는데 무장항쟁에 힘을 쏟고 군자금 조달 활동을 많이 벌였다. 1920년 말 일경에 체포되어 5년간 복역했다.(선고는 10년) 해방 후 한독당 중앙위원과 국민의회 동원부장으로 활동했고 1946년 6월 23일의 반탁시위를 배후 교사한 혐의로 엄항섭과 함께 체포당한 일이 있었다. 김구 세력의 행동대장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김석황 등의 재판 과정에서 김구는 증인으로 출정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고 검찰과 재판부는 그가 장덕수 암살의 진정한 배후라는 심증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김석황은 1948년 3월 2일에서 4월 21일까지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특별군정재판을 통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복역하다가 개전 직후 인민군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북일보에서는,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 암살사건의 공통점은 배후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타협이나 대화 보다는 내 주장과 다르면 적이고 같으면 동지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횡행했던 정국의 비극이었던 겁니다.”
지난 4일 전주 우석빌딩 7층 회의실에서 열린 (사)한민족 대외 관계사 연구소(이사장 장세균)의 초청 강연에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가 초대됐다.
이 교수는 '암살 사건을 통해서 본 해방 정국'를 주제로 한 강연을 통해 "해방 정국 암살 사건은 정치적 공백을 크게 만들었다"며 "정치적 승자와 역사적 승자는 다르다는 교훈을 안겨주었으나, 그 인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김구를 예로 들면서 독립운동에 공을 세웠으나, 건국을 방해한 김구가 암살당하면서 후대 대중과 역사가들로부터 동정심을 유발해 좌파 세력과 좌파 언론에 의해 지나치게 과대 포장됐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어 "건국의 업적을 이룬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4·19 학생 의거로 인해 독재자가 됐고, 대한민국의 건국에 가장 공적이 묻혀진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라고 덧붙였다.
張德秀(장덕수) 事件公判(사건공판)이 부산일보에 게재되었다. 그 내용은, 昨年(작년) 十三日(십삼일) 張德秀氏殺害事件(장덕수씨살해사건)에 關聯(관련)한 金錫(금석)황 外(외) 趙尙相(조상상) 申一俊(신일준), 孫禎秀(손정수) 金重穆(금중목) 崔重夏(최중하) 박光玉(광옥) 等(등) 九名(구명)에 關(관)한 美國軍事委員會(미국군사위원회)는 二日(이일) 上午(상오) 九時(구시) 三分(삼분)부터 中央廳(중앙청) 第一會議室(제일회의실)에서 首席審判官(수석심판관) 헤롭 大佐(대좌) 以下(이하) 六名(육명)의 軍事委員(군사위원)과 檢察官(검찰관) 스탈 少佐(소좌) 모멘 大尉(대위) 立會下(입회하)에 官邊辯護人(관변변호인) 빌스 大尉(대위) 私選辯護人(사선변호인) 金溶植(금용식) 康巨福(강거복) 鄭近永(정근영) 三氏(삼씨) □席下(석하)에 開廷(개정)되었다
먼저 檢察官(검찰관) 모맨 大尉(대위)로부터 共同行爲(공동행위)로서 一九四七年(일구사칠년) 十二月(십이월) 二日(이일) 故意(고의)로 張德秀氏(장덕수씨)를 殺害(살해)하였다는 事實(사실)에 對(대)하야 美二十四軍(미이십사군) 憲兵司令官(헌병사령관) 노-이 少佐(소좌)가 署名(서명)하고 하-지 中將(중장)의 命令(명령)에 依(의)하야 軍事委員會(군사위원회)를 開廷(개정)하게 된 것이다라는 말이 있은 다음 同事件(동사건)은
一(일), 一九四七年(일구사칠년) 八月(팔월) 十四日(십사일) 故意(고의)와 不法的(부법적)으로 張德秀(장덕수) 安在鴻(안재홍) 裵熙範(배희범) 三氏(삼씨)를 殺害(살해)할 것을 共謀(공모)한 事實(사실)과
二(이), 一九四七年(일구사칠년) 十二月(십이월) 二日(이일) 張德秀氏(장덕수씨)를 殺害(살해)한 事件(사건)의 두 가지로 나누어 있다는 事實(사실)을 說明(설명)하자 被告(피고) 박光玉(광옥)으로부터 五分間(오분간) 休廷(휴정)할 것을 要求(요구)하여 五分間(오분간) 休廷(휴정)하고 再開(재개) 各被告人(각피고인)에 對(대)하야
二(이), 項(항)에 對(대)한 有罪(유죄) 無罪間(무죄간)에 어떠케 生覺(생각)하고 있는가를 審問(심문)하였는데 金錫黃(금석황) 趙尙相(조상상) 申一俊(신일준) 孫鐘秀(손종수) 金重穆(금중목) 崔重夏(최중하) 等(등)은 제各己(각기) 一(일), 二(이), 項(항) 各項(각항) 全部(전부)에 全然(전연) 關聯(관련)이 없다는 것을 主張(주장)하였고 박光玉(광옥)은 美國(미국) 國旗(국기) 밑에서 軍事委員會(군사위원회)의 再版(재판)을 받을 何等(하등)의 理由(이유)가 없으니 그 點(점)을 明確(명확)하게 한 다음에야 말하겟다고 말하였고 裵熙範(배희범)은 朝鮮(조선)의 法廷(법정)이 嚴然(엄연)히 있는데 美軍委員會(미군위원회)의 裁判(재판)을 받을 何等(하등)의 理由(이유)가 없다고 各各(각각) 主張(주장)하였으나 裁判長(재판장)은 各各(각각) 無罪(무죄)로 主張(주장)하는 것으로 認定(인정)한다고 말하였다
趙燁(조엽) 박鼎悳(정덕) 亦是(역시) 無罪(무죄)를 主張(주장)하였는데 여기서 十分間(십분간) 休廷(휴정)하고 同十時(동십시) 十(십)오分(분) 再開(재개) 檢察官(검찰관) 스틴 少佐(소좌)로부터 다음과 가튼 要旨(요지)의 起訴理由(기소이유) 說明(설명)이 있은 다음 同十一時(동십일시) 四十五分頃(사십오분경) 休廷(휴정)하고 下午(하오) 二時(이시)부터 續開(속개)하기로 되었다
一九四七年(일구사칠년) 八月(팔월) 中旬頃(중순경) 京苑(경원)호텔 十五號室(십오호실)에서 張德秀(장덕수) 安在鴻(안재홍) 裵恩熙(배은희) 三氏(삼씨)를 獨立運動(독립운동)의 叛逆(반역)자라고 殺害(살해)할 것을 金錫(금석)황 申一俊(신일준) 孫鐘秀(손종수) 等(등)이 共謀(공모)하였는데 그 理由(이유)로서는 當時(당시) 國議(국의)에서는 微笑共委(미소공위)에 協力(협력)할 것을 反對(반대)하였는데 歷代(역대)의 最高幹部(최고간부)인 前記(전기) 三氏(삼씨)는 美蘇共委(미소공위)에 協力(협력)한 □□ 하였기 때문에 三氏(삼씨)는 國議(국의)에서 地目(지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京苑(경원)호텔에서의 이 會合(회합)에서 金重穆(금중목)은 □□的(적)으로 三氏(삼씨)를 殺害(살해)하겟다고 말하였고 이 자리에서 박光玉(광옥) 以下(이하) 被告(피고)들은 朝鮮革命團(조선혁명단)을 組織(조직)하였는데 그들은 血書(혈서)로서 誓約(서약)하였다 太極旗(태극기)를 위에 두고 한손에는 手權(수권)□을 들고 가슴에는 血書(혈서)를 부치고 찍은 司津(사진)은 金九氏(금구씨)를 갓다주었다 趙(조)엽 박□□은 其後(기후) 무서워서 同(동)□을 脫退(탈퇴)하였다
同年(동년) 十月(십월) 十二日(십이일) 박光玉(광옥) 裵熙範(배희범) 等(등)은 다시 暗殺計劃(암살계획)을 세었다 金錫黃(금석황)은 大戰(대전)에까지 가서 趙(조)기섭으로부터 十月末頃(십월말경)에 拳銃(권총)을 얻어왓다 그는 박光玉(광옥)에게 주었다 金重穆(금중목)은 手榴彈(수류탄) 一個(일개) 崔重夏(최중하)는 二個(이개) 金錫黃(금석황)은 手榴彈(수류탄) 二十個(이십개)를 주었다는 것이 發表(발표)되었다 一九四七年(일구사칠년) 十二月(십이월) 二日(이일) 박光玉(광옥)과 裵恩熙(배은희)는 張德秀氏(장덕수씨)가 親舊(친구)와 가치 저녁 食事(식사)를 했다는 □□□에게 報告(보고)하고 夕食代(석식대)로 七百圓(칠백원)을 申一俊(신일준)에게서 바다가지고 저녁을 먹은 다음 下午(하오) 六時(육시) 十五分(십오분) 張德秀氏宅(장덕수씨택)에 갓다 마당에 十四歲(십사세) 可量(가량) 되어 보이는 女子(여자)가 있어 張德秀氏(장덕수씨)를 나오게 해달라고 말하었는데 夫人(부인)이 이 말을 듯고 나왓다가 다시 물어가서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나왓는데 얼마 後(후)에 總(총)소리가 남으로 가보니 張氏(장씨)는 업더젓고 犯人(범인)들은 逃走(도주)하였으나 夫人(부인)은 犯人(범인)의 印象(인상)을 알었다 □□ 四回(사회)나 射擊(사격)하였으나 失彈(실탄)이 나오지 안었고 彈丸(탄환)은 檢査(검사)한 結果(결과) 박이 가지고 있다는 拳銃(권총)과 同一(동일)하였다 夫人(부인)은 張氏(장씨)를 업고 白病院(백병원)에 갓으나 張氏(장씨)는 임이 死亡(사망)하였다
現場寫眞(현장사진)을 八枚(팔매) 가지고 있다 下午(하오) 七時(칠시) 三十分頃(삼십분경) 犯人(범인)들은 京花旅館(경화여관)에 돌아가 崔重夏(최중하)에게 報告(보고)하러 갓는데 金重穆(금중목)은 기뻐하였다 崔重夏(최중하)가 없었음으로 其(기)의 어머니에게 報告(보고)하고 맛나게 하여 달라고 하였는데 崔(최)이 어머니는 逃亡(도망)갈 經費(경비)로서 一金(일김) 五千圓(오천원)을 주었다 犯人(범인)들이 漢陽病院(한양병원)에 갓는데 崔母(최모)는 따라와서 張氏(장씨)를 殺害(살해)한 사람이니 □□□ 달라고 要請(요청)하였다 崔(최)는 그날 저녁에 逮捕(체포)되였고 申一俊(신일준)은 十二日(십이일) 金夕(금석)황는 十六日(십육일) 逮捕(체포)되였다 當時(당시) 金夕(금석)황은 金九氏(금구씨)에게 보내는 便紙(편지)를 가젓섯는데 檢査(검사)는 證據品(증거품)으로 가지고 있다 共謀事件(공모사건)은 어느 事件(사건)이든지 證據(증거)를 全部(전부)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以上(이상)의 證據(증거)만으로도 充分(충분)하다고 生覺(생각)한다 趙燁(조엽) 박鼎悳(정덕)은 殺人(살인)에는 無關(무관)하다 一九四七年(일구사칠년) 二月二日(이월이일) 張氏殺害事件(장씨살해사건)은 全世界(전세계)가 注目(주목)하고 있는 重大(중대)한 事實(사실)이기에 特別(특별)히 公平(공평)한 裁判(재판)이 있기를 □□ 바이다
(장덕수와 활동과 관련된 몇 가지 사실 정리)
○ 1921년 5월에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대회를 열고 국내 대표를 초청했는데, 참석한 이봉수(李鳳洙)를 통해 국내에 자금을 보냈다.
○ 1923년 4월에 도미 유학길에 오르면서 경유한 도쿄에서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 단체와 선을 긋게 되었다.
○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어용단체에 참여해 그 단체에서 주관하는 시국 강연에 적극 나섰다.
○ 1942년부터 그는 미국의 라디오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장덕수는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척하면서 칼럼 기고 압력을 기피하는 등의 수동적인 저항을 하였다.
○ 1945년 초 조선총독부에서 요시찰로 분류된 인사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자, 그는 비밀리에 지하로 은신하였다.
○ 1947년 6월 10일 한민당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다.
○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 1947년 8월 12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양진영의 반목으로 완전히 결렬되어, 한국에 독립적·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이 무산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위 사실로 비추어보면, 장덕수는 와세다대학 재학 중에 상해 고려공산당 대회에 자금을 보낸 사실이 있고 이후 아나키스트 박열 등으로부터 폭력을 당한 후 사회공산주의자들과 관계를 끊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938년부터 1942년 사이에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시국강연을 하였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소극적인 친일을 하다가 일제로부터의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은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덕수의 한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선언하면서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는데 이는 강대국을 밀어내고 반대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1947년 8월 12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양 진영의 반목으로 완전히 결렬되어 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하기 어렵다고 보고 1947년 9월 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덕수가 친일을 한 시기는 1938년부터 1942년 사이다. 장덕수에게 이러한 過가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비판과 함께 정덕수가 이 나라 독립을 위해 한 활동 등에 대한 功에 대해서는 존중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장덕수 암살과 김구)
장덕수 암살에 김구가 관련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언론 보도, 자료, 공판기록 등에서 암살자들이 한독당 당원들이란 점, 미군정에서는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는 점, 공판과정에서 김석황이 김구에게 보내기로 한 편지가 압수된 점, 김석황의 진술서에 김구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점을 들어 장덕수 암살에 김구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그러나 김구는 검석황 등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가서 암살 관여에 대해서 부인을 하고, 미군정청은 이승만에 대해서도 암살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김석황 등 10명만이 공모하여 장덕수를 암살한 것일까. 아니면 김석황 등의 암살을 지시하고 사주한 인물이 있는 것일까.
장덕수의 암살만큼이나 궁금한 것이 9. 28. 서울 수복 후 1951년 1.4. 후퇴 전까지 서울지법에서만 무려 3천6백 건의 판결을 하였으나 단 한쪽의 판결문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공산 부역자에 대한 판결문을 파기 또는 은닉한 것일까.
##### 장덕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언론 보도, 자료, 재판기록 등을 그대로 옮겨보았다. 판단은 각자에게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