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은 신라, 백제, 가야, 왜를 복속시킨 다음 해상교통의 요지인 대마도에 10국으로 구성된 연립정부인 임나연정을 설치하여 수군(水軍)을 두고 백제, 왜, 신라, 가야를 통제하였다.
「영락(永樂) 10년(A.D 400년)에 3가라(加羅)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註 임나연정 지칭)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烈帝)가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十年三加羅盡歸我自是海陸諸倭悉統於任那分治十國號爲聯政然直割於高句麗非烈帝所命不得自專也」桓檀古記 高句麗本紀」桓檀古記 高句麗本紀
「전략..뒤에 임나(任那:註 임나연정 지역 지칭)를 병합하여 연정(聯政)을 세워 이를 통치케 하였다. 3국은 바다에 있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後倂于任那聯政以治三國在海七國在陸」桓檀古記 高句麗本紀
임나연정의 역할 중 백제와 일본열도 사이 해상통로 통제는 A.D 404년에 왜(구태백제)가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대방계를 공격하는 등 초기에는 통제에 실패하였으나 후에는 대체로 성공하였다.
임나연정의 역할 중 왜 통제는 A.D 404년에 일본열도로 피신한 구태백제 지배층이 왜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대방계를 공격하는 등 초기에는 실패하였으나 후에는 대체로 성공하였다. 대화왜(大和倭)는 임나연정 시기에 임나왕(任那王)의 요구에 따라 임나(任那)에 신(臣) 또는 장군(將軍)들을 보내었고, 임나(任那)에 파견된 일본부(日本府) 장군들은 임나왕(任那王)의 지시를 받았다.
임나연정의 역할 중 신라(新羅) 통제는 초기에는 성공하였으나 후에는 실패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미사흔(未斯欣)을 임나연정에,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각 인질로 보내고 임나연정과 고구려에 복속하였으나, A.D 418년에 인질로 가 있는 복호(卜好)를 고구려로부터 돌려받고, 같은 해 가을 임나연정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未斯欣)을 몰래 빼내 온 후부터 고구려와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다.
눌지마립간(訥祗痲立干) 2년(A.D 418년) 봄 정월 왕의 아우 복호(卜好)가 고구려에서 내마(奈麻) 제상(提上)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이 왜국(倭國:註 대마도 임나연정)에서 도망해 왔다. 二年 春正月王弟卜好自高句麗與堤上奈麻還來秋 王弟未斯欣自倭國逃還」
- 광개토대왕 사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A.D 416년에 중국동해안지방의 전 백제분국 장군들이 도로 백제에 복귀함으로써 고구려가 중국동해안 지방을 상실한 것과 A.D 418년에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 등은 장수왕의 통치술에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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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건 보실 필요 없구요,, 한단고기 고구려본기라고 한자로 써있는 부분에서 열제(烈帝)라는 용어가 나와 있습니다. 위에 출처에 직접 들어가 보시죠. 제가 끌어다 쓴 글이 틀린 글이라 하시면 할말 없구요,,ㅡㅡ
제 의견에 대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환단고기> 자체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은 이상, <환단고기>를 근거로 삼는 것은 널리 지지를 얻기 힘듭니다. <환단고기> 이외의 근거를 찾아 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와는 조금 별개인데, 발해가 칭제한 것은 분명한 것 같더군요. 지난 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보니까 글이 새겨진
첫댓글 한단고기의 내용보다는 광개토태왕릉비문 내용에 더 신뢰를 둬야 합니다. 결정적으로 고구려 인들이 직접 만든 태왕비문에는 칭제한 흔적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자체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은 이상, <환단고기>를 근거로 삼는 것은 널리 지지를 얻기 힘듭니다. <환단고기> 이외의 근거를 찾아 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와는 조금 별개인데, 발해가 칭제한 것은 분명한 것 같더군요. 지난 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보니까 글이 새겨진
발해 유물 중에서 발해 황제와 발해 연호(함화咸和), 그리고 발해 황제 밑의 왕의 존재를 알려 주는 것이 있습니다. (글 내용은 함화 XX 년에 발해 허왕부의 관리였던 자가 자기 어머니를 위해 이 불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칭제가 그렇게 중요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어떤자료에 신뢰을 줘야한다는 것보다 칭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고구려 최고권력자 명칭은 왕 이나 태왕이었고, 중화의 명칭은 황제였을뿐입니다. 왕이 황제보다 아래라고 생각하지면 안됩니다.
광개토태왕릉비가 아니라.. 광개토태왕비입니다...
음,,그 비는 원래 능비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