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포와 망해사
왕명으로 절을 지어주고 아들 처용에게 벼슬 내려 막강해진 호족 세력 견제
개운포의 일몰.
혜공왕이 숙부 김양상과 김경신의 손에 죽고 난 뒤 신무왕이 왕좌에 오를 때까지 74년 동안 10명의 왕이 바
뀌었다. 숙부가 조카를, 조카가 당숙을 죽이는 골육상쟁 끝에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 왕좌는 ‘피를 먹는 하마’
였다. 진골이라면 누구든지 칼부림 끝에 왕이 됐고 먼저 자리를 차지한 왕은 뒤좇는 이의 칼을 맞고 무덤 속
으로 들어갔다.
신무왕대에 들어서야 왕의 자리가 안정됐다. 신무왕 이후 5대째 평화적 정권 이양이 이뤄지고 있었다. 태자
에게 이어지거나 왕의 유조에 따라 계승됐다. 헌강왕대에는 태평성대가 펼쳐지는 듯 했다. “서울에서 해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잇닿아 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생황소리와 노래가 도로에서 끊이지 않았고 바
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왔다”고 『삼국유사』‘처용랑 망해사’ 조는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도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내가 듣기로 지금 민가에서 집을 기와로 덮고 띠풀로 지붕을 이지 않
는다 하고 밥을 숯으로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하였다. 민공이 대답하기를
“저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한 뒤 아뢰기를 “주상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래로 음
양이 조화롭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을 먹을 것이 풍족하고 변경지역은 잠잠하고
도시에서는 기쁘게 즐기니 이는 전하의 어진 덕이 불러들인 바이옵니다”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그대들의 보좌에 힘입은 것이지 내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가 헌강왕의 나이가 16,17세쯤 됐다. 태평성대의 공을 신하들에게 돌리기는 했지만, 사춘기 소년왕의
말에 자부심이 뚝뚝 돋아난다. 왕은 꽃피는 춘삼월에 개운포(開雲浦)에 놀이를 나갔다. 산과 들에 개나리
진달래 피어 꽃놀이하기 딱 좋은 때였다. 왕이 물가에서 쉬는데 대낮에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었다. 일관은 용이 변덕을 부려서 그런 것이니 좋을 일을 행해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왕이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왕은 자신이 잠시 길을 잃은 포구를 구
름과 안개가 걷힌 포구라는 뜻으로 개운포라 이름했다.
개운포와 처용암.
개운포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인데 울주군 온산읍 처용리와 경계하고 있다. 울산만에서 외항강을
따라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곳은 약 6000년 전 신석기 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 세죽마을로 불렸다. 국책사업으로 김양식을 했는데 김양식에
대나무발을 사용했다. 대나무발이 ‘세죽’이다. 밥벌이가 마을 이름으로 굳었다. 예전에는 세죽에서 천연기념물
인 목도 동백섬까지 배 타고 노는 선유가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었지만 70년대 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서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황폐화되면서 집단 이주했다. 근처에 온산항 처용항 온산공단이 있으며 맞은 편
에는 울산신항과 용연공단이 들어서 있다. 바다가 거대한 항만과 공단에 가로막히고 둘러싸여 있지만 지금도
포구만 놓고 보면 시골스런 풍경이 여전히 아름다운 갯목이다. 한때 이곳이 김양식과 뱃놀이 사업하며 탄탄한
삶을 이어가던 마을이라는 걸 증명하듯 세죽마을 옛터비가 쓸쓸하게 서 있다. 포구에 고깃배와 요트가 정박해
있고 바다 가운데 숲으로 덮인 작은 섬, 처용암이 보인다. 처용이 나왔음직한 그 숲섬은 갈매기 놀이터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처용암.
용을 위해 절을 지어주겠다는 왕의 공약이 먹혔다. 동해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환영 공연을
펼쳤다. 덕을 찬양하고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왕은 동해용의 아들 한 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그 이름이
처용이다. 서울로 돌아온 왕은 처용에게 각별한 대접을 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여 마음이 흔들
리지 않도록 발을 묶었다. 급간 벼슬까지 내렸다. 급간은 6두품 이상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이다. 파격적 발탁
인사였다.
그런데 왕은 왜 개운포로 행차했을까. 왕궁에서 개운포까지는 60km 정도 되는 먼 길이다. 수레를 탄 채 뒤따
르는 인력을 거느리고 그 먼 길을 가자면 하루는 꼬박 걸리는 길이다. 정말 그저 춘삼월 꽃놀이를 즐기기 위
해서일까. 동해용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치밀하게 짜인 스케줄에 의해서일까. 왕이 먼 행차를 하는 데
아무런 계획이 없을 리가 없다. 특별한 이벤트를 계획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왕이 개운포에서 만났던 동해의
용을 지방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울산은 도성으로 공급되는 소금의 주요 루트이며 국제 교역항이다.
신흥귀족이 개운포 일대를 장악한 뒤 무역질서를 교란하고 소금 진상을 거부할 경우 태평성대에 큰 흠집을
남기게 된다.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었다는 기록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상당한 복선을
깔고 있다. 드러나지 않은 숨은 이야기가 있음이 분명
하다.
세죽 옛터비.
막강하게 몸집을 키워나가는 호족을 어떻게 처리해야겠는가. 왕은 달래서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쪽으로 생각
을 굳혔던 것 같다. 개운포로 찾아가서 그대들을 위해 왕명으로 절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이야기는 잘됐다.
호족이 기뻐하며 풍악을 울리며 흥을 돋웠다. 왕은 호족의 아들 처용을 서울로 데려가 벼슬살이를 시키겠다고
말했다. 일종의 상수리제도다. 기인제도라고도 한다. 지방호족의 자제를 중앙에 인질로 둔 제도다. 숙위라고도
한다. 신라의 김인문이 당나라에 들어가 조공하고 숙위로 수년간 머물러 있던 그 시스템이다. 이제 호족의 발목
을 단단히 묶었다.
망해사지 대웅전.
왕이 약속대로 동해 용을 위해 지은 절이 망해사(望海寺)다. 울주군 청량면 율리 영축산 동쪽 자락에 있다.
옛 망해사는 19세기 후반에 폐사되고 현재의 절은 1962년에 지었다.
망해사석비.
대웅전과 요사체가 있으며 보물 제137호인 망해사지 석조부도 2기가 있다.
망해사지 석조부도.
석조부도는 전형적인 신라하대 부도양식인 팔각원당형으로 동쪽 부도가 3.4m 서쪽 부도가 3.3m 크기다.
이름은 망해사인데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영축산은 신라 불국토이다. 문수사가 있는 곳이라고 문수산이라
고 부르기도 한다. 신문왕과 관련된 영축사도 있고 『삼국유사』 ‘피은’ 편에 나오는 낭지 지통 연회 세 스님
이 머문 곳도 영축산이다.
한편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온 처용은 살기가 팍팍했다. 아내가 역신과 바람이 났다. 외출했다가 밤늦게 집
에 돌아왔다가 간통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눈물을 머금은 채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현장을 빠져나왔다.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로리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건만 앗음을 어찌하리고.
역신은 처용에게 꿇어앉아 사죄했고 사죄의 뜻으로 처용의 그림만 보아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처용은 벽사진경(벽邪進慶)의 아이콘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