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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조금만 더 가까이 또는 멀리 보기 2 / 이종수 (시인)
다시 이야기는 조치원에서 시작되는 충북선을 타고 제천에서 잠시 쉬어 간다. 동서로 걸쳐진 충북선은 제천에서 중앙선과 영월과 태백을 지나 한 차례 스위치백식으로 고개를 넘어 강릉으로 이어진다. 내륙에서는 겪지 못한 내면과 밖으로 마치 바느질실마냥 드나드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내달릴 것이다.
만첩(萬疊) 산중의 고을답게 바람이 찬 제천은 경계의 고을이기도 하다. 중원에 가깝지만 말투를 보면 강원도에 가깝다. 남쪽이 닫히고 북쪽이 열린 충주와는 달리 북방의 냄새가 나며 활달한 편이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낸다는 속담처럼 일찍이 고향을 떠난 인재들이 많다. 시단을 이끌어가는 젊은 시인들이나 중견 시인들 가운데 제천 출신들이 많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시보다는 어머니의 뱃속만큼이나 널따랗고 따뜻하지만 다시 돌아갈 길 없는 고향의 노래를 낳았다.
팔 것 팔고도 먹을 맹큼은 남어야 써
남은 것이야 내년 농사 차지 아니겄나
어머닌 어린 열무밭에서 잡풀을 솎아 고랑에 두어 밟으시며 하루하루를 캐어 상에 내셨고,
- 이안, <열무밭> 부분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것처럼 열무밭은 어머니의 자궁만큼이나 널따랗다. 하루하루를 캐어 상에 내는, 그 풋내 나는 것들이 먹여 살린 삶을 생각하게 한다. ‘잡풀을 솎고 고랑에 두어 밟으시며’ 튼실하게 키워낸 열무를 뽑아내어 때가 되면 반찬 한가득 해서 보내는 손 큰 어머니의 밥상을 떠올리게 한다.
출세를 위해 인물을 보낸다고 하지만, 정작 출세하지 못하고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출세를 위해 떠나온 서울길이야 어쩔 수 없지만 떠나오면서 남은 빈 공간은 클 수밖에 없다.
내 친구의 어머니는 더이상 내 친구를 낳지 않는다
내 친구의 학교는 더이상 내 친구를 가르치지 않는다
내 친구의 바다는 더이상 내 친구와 놀지 않는다
친구의 마당엔 녹슨 경운기만 남고
친구네 학교엔 이승복 어린이만 남았다
학교 솔숲 사이로 바라보이는
수협창고는 파리나 키우고
자꾸 깎여나가는 해수욕장 모래밭은
파도만 키운다
친구는 집에도 없고 학교에도 없고
해 떨어지는 바다에도 없다.
친구는 이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함께 놀 친구가 없어서
오지 않는다.
친구가 없는,
심심한 마을을 지난다.
- 윤제림, <친구의 집을 지나며> 전문
친구가 없기에 마을과 학교와 바다마저 비어버렸다는 말은 외로움의 다른 말이다.
"꼭 좀 붙들어놓으시우, 꼬옥!"
지금쯤은 서울행 기차를 탔을
한 어머니를 기다리며
눈으로 붙들고 있는
꽃잎 하나.
지지 마라,
네 어머니 오신다.
- 윤제림, <꽃잎> 부분
유년의 모습처럼 보이는 꽃잎 하나에게도 눈시울을 던져 어루만지고 있지 않은가.
어젯잠 꿈에 고향엘 갔는데
집 앞 냇물에
버들치가 아주 여러 마리 놀고 있어
어찌나 반갑고 고맙던지
가까이 가 웅크리고 앉았지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그건 버들치가 아녔어
버들치 그림자였지
더 신기했던 건
두 손으로 손바가지를 만들면
이 그림자 물고기가 고대로 들어와서
곰심곰실 노니는 거라
할머니 보여드리려고
'어머이, 이것 봐유, 이 물고기 좀 봐유!'
소리치며 집으로 달려가다가 그만,
잠이 깼지 뭐냐!
지금은 충주댐
물에 잠겨 갈 수 없는 아버지
고향 이야기
곰실곰실 손이 가려워지는
꿈 이야기
- 이안, <아버지 고향> 전문
물에 잠긴 아버지의 고향도 자주 시인을 불러 세운다.
단장한 키에 풋풋한 살내 나는 여자를 데리고 모깃불 사이로 형이 보였다 어머니 맨발로 뛰쳐나와 형의 없는 손가락에 달려 우시고 여자가 성한 한쪽 손을 힘주어 잡는 동안,
나는 어둠의 등뼈에 환한 불의 얼룩을 놓는 별똥별과 마당에서 반짝이는 몇 개의 물방울이 만나 내 입에 닿는 묽은 어둠을 털며,
모깃불에 호오호오 숨을 부었다
- 이안, <유년의 마당> 부분
세상에 없는 사평역, 세파와 겨울 추위에 터진 손을 말리던 사람들을 위해 톱밥 한 줌 넣던 것처럼 유년의 마당을 떠올리는 어린 시인의 눈에 잡힌 저 형형한 그림자가 서려있는 제천을 지나며 자신의 고향을 떠올려보라.
고향은 또 다른 상념과 꿈 조각을 몰려다니기도 하다. 시인을 가로막고, 경계 짓기도 한다. 아주 낯낯한 얼굴로 찾아와 한 번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추렴해 가려고 하기도 한다.
내 꿈속에 오는 빼빼 마른 조상들은
왜 둘씩 셋씩 숨죽이고 앉아
한국식으로 육회를 먹나
피 묻은 쇠고기를 허겁지겁 맨손으로 떼어먹나
손등까지 싹싹 핥아먹고
굶주린 개들처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들 어디로 가나
얼굴도 모르는 수세기 전 사람들과 몸을 섞어
안개처럼 바람처럼
또 어디로 물려가나
육촌형님은 죽어서도 홀아비고
할머니는 날 전혀 모른다는 듯 웃고 있고
왜 조상들은 제사가 있는 날이면 꼭
상반신만 남아 꿈속으로 몰려다니나
귀신들도 국경이 있나, 정부가 있나
왜 나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증조부와 닮았나
고향을 한참 떠나왔고, 친척도 이젠 없는데
내 가느다란 팔다리마다 최씨들뿐이다
서른다섯 해를 살아도 내 몸엔 온통
가난하게 살다 죽은 최씨들뿐이다
최씨들은 왜 모두 얼굴이 길고
왜 웃을 때 당당하게 남을 똑바로 못 보고 웃나
우리가 죽어서 코끼리들처럼 서로 만난다면
그렇게 모여서 다들 어디로 가나
상아 같은 흰수염을 뽑아 쌓아놓고 우리는
또 어떤 가문에 나서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초원을 떠도나
- 최금진, <다들 어디로 가나> 전문
가난의 대물림에 조상 탓만 하는 최씨, 그 최씨들의 제사 때문일까. 시인에게는 멀리뛰기처럼 뛰어넘은 고향이자 친척마저 없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증조부와 닮았다가 참견하는 고향이야말로 코끼리처럼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연장선인 것일까. 코끼리들이야 먹어치울 풀에 따라서 드넓은 초원을 옮겨 다닌다고 하지만 시인은 자신을 붙들어매는 최씨와 고향의 집합 속에서 툴툴거리며 어디로 가는지 묻는 것일까.
저수지의 잉어들은 빠져죽은 사람 얼굴을 닮았지
건져 올려놓고 보면 영락없이
작년에 죽은 누군가의 이목구비가 달려 있었지
잉어들은 밤만 되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상류에서 알몸으로 목욕하는 달빛의 속살을 뜯어먹고
퉁퉁하게 살이 올랐지
- 최금진, <잉어떼> 부분
또 다른 구체적인 공간, 거대한 피라미드의 밑변이나 심리학에나 나올 법한 잠재의식의 저수지와 잉어떼. 그것들에 새끼 제비의 벌건 살점을 미끼삼아 던지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정확해진다. '펄떡거리는 누런 잉어비늘을 생으로 떼어 주머니에 넣어두고는' 뛰어드는 저수지의 '깊고 차가운 수압'이 '맨살의 우리를 뒤에서 안'고 누군가의 이목구비(최씨들의 고향이라고 하면 너무한가)를 닮은 잉어떼들이 발가락을 깨물고 다닌다니, <석회암지대>의 구멍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시인의 구체적인 단절의식이 보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출세하고자 떠난 고향에는 출세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것일까. 아니 출세하였다고 해도 현수막을 내걸고 속물자본주의를 내세우거나 가문의 영광처럼 헛물을 들이켜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마저도 논공행상처럼 따질 수밖에 없는 비정한 곳으로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순전히 어린 시절과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심심하면서도, 더 이상 친구를 낳지 않고 가르치지 않고, 해종일 깎여나가는 모래밭을 바라보고 있는 외로움의 실체일 것인가.
그러면 남은 자들만이 또 다른 시인이 되어 고향찬가를 부르는 것일까. 도피의 공간이자 죽음과 친숙한 공간이자 상처입어 움츠러든 날개로 '유일한 빛을 잃어버'린 '불확실한 인생'의 '기슭, 그리고 열쇠'인 것인가. 그렇다고 고향이란 비 맞은 장맛은 아닐 것이다. 진정 '대지'를 잃어버린 '우기의 여인숙' 에 숙박계를 적어 넣으며, '길이 다한 여인숙에서 구름 뜬 술이나 한잔 하면서/꽃 지는 창밖을 볼 것이다/때때로 수첩을 꺼내 도마령을 비추는 하현을 기록할 것이다/이 집도 절도 없는 정거장에서/다시 난 쓰디쓴 사랑을 할 것이다'(이용한)하고 적는 <길의 미식가>가 되면서도 어머니의 살문을 열고 나온 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대지'. 진정 어머니의 손맛을 찾아 이 시대의 궁핍함을 새롭게 써내려가는 시인의 임무를 생각하게 한다.
이제 기차는 석회암지대 영월을 지나 박철 시인의 시 ‘험준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세상의 끝, 막장을 떠올리게 하는 태백으로 향한다. ‘내 모든 삶을 유폐시키고 싶다는’ 욕망의 막장이자 검은 그림자를 깨물어 먹으며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의 절정에 오르는 곳.
상동까지 갑니다 물론 초행길은 아니지요 그곳엔 형 부부랑 세상에 난지 이제 열 달이지만 귀여운 조카가 있어요 그렇지만 누굴 만나러 가는 건 아닙니다 만남이란 기억 속에서 존재를 생소하게 하는 일일 뿐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될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아뇨, 어쩌면 저를 찾으러 가는 길이니 만나러 가는 건지도
흑백 화면처럼 뿌옇게 떠서 살아온 것 같아서요 방에서 뒤척일 때나 거리를 거닐 때나 저는 누군가 제가 살아 있다는 걸 깨우쳐 주길 기다리고만 있었거든요 아, 그것은 참 무료한 일이었어요 있을 이유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지 어느 날인가 저는 끝내 몸 안에서 제가 없어진 것을 느껴야 했
네? 아뇨, 한참 더 가야 해요
조카는 아주 이쁘고 말구요 어른처럼 길쭉하면서도 쬐끄만 손가락이 매력적이지요 그 애는 천정에 매달아 둔 모빌을 보면 요동을 치며 좋아하는데 가서 저도 몇 번 흔들어줄 겁니다 모빌을 움직일 때면 늘 기분이 새로워요 모빌이야 그게 제 일이니 그렇다 쳐도 사람들은 얼마나 흔들리며 삽니까 흔들리는 것부터 보고 자라는 조카가 걱정도 되지만 저보다야 어디 더할까요 그 까만 눈망울 앞에 서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한
예? 아니요, 태백이 종점이라니까요
저희 형 집이 그쪽으로 난 계곡 사이에 있어요 울창한 산숲 사이 줄기를 따라 오르면서 생소한 저를 만나기엔 아주 적격입니다 다녀와서 새로 시작어, 벌써 내려요? 태백은 종점 예, 저는 상동이요 바깥 날씨가 꽤 찰텐데, 그럼 조심해서 어쩌죠? 너무 저 혼자 주절댄거 (저 혼자 저혼자……)
- 한인수, <상동 가는 길>
태백을 지나 동해로 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구간을 지나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기형도의 ‘조치원’에서 보았듯이 혼자 떠나는 길에 만난 또 다른 화자나 자신에게 낯설음을 해소하면서 말이다.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가슴속에 묻어둔 여자 같은 오이도/문득 가보고 싶다, 그 섬에 가면/아직도 귀 밝은 까마귀 일가가 살고/내내 기다려준 임자를 만날 것 같다/배밭 지나 선창 가 포장마차엔/곱게 늙은 주모가 간데라 불빛을 쓰고/푸지게 썰어주는 파도 소리 한 접시/소주 몇 잔 곁들여 취하고 싶다/삼십여 년 전 서너 번 뵙고 타계한/지금은 기억도 먼 나의 처조부/오이도(吳利道) 옹도 만날 것 같은 오이도/내 마음 자주 뻗는 외진 성지를’(임영조, <오이도>)와 비슷해 보이는 ‘마음 속 성지는 변방에 있다’는 선언과 함께 유배란 말도 서슴지 않고 연결시킬 수 있었던 곳과는 달리 이곳은 아픈 곳이다.
영주에서 동해로 가다가
태백 작은 마을에서 국수를 먹었다
우뚝우뚝한 산 아래 그늘진 마을
눈이 쓸쓸히 내리는 날
한겨울에 냉이를 넣은 칼국수
작은 가게 안에는 사람 하나 없고
연탄난로가 냉랭히 앉아 있었다
어린 날 사북으로 간다고 말한 것은
내 모든 삶을 유폐시키고 싶다는 욕망이었음을 고백한다
신발을 방 안에 들여놓고 자야 하는 사북 여인숙
긴 형광등을 두 방이 함께 써야 하는 그곳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검고 검은 세상의 그림자를 조금씩 깨물어 먹었다
그곳에서 추방되어
먼 나라를 떠돌다 이제 다시
사북 언저리에서 후춧가루를 듬뿍 친
칼국수를 먹으며
과연 내 삶은 옳은가
물어보는 것이다
눈송이는 점점 커져
이제 오도 가도 못 하는 산협 마을에서
내 멱살을 잡는 한 푼어치 평화와
또다시 힘겨운 싸움을 하였다
- 우대식, <태백에서 칼국수를 먹다>
한 편의 시를 건너뛰어 만난 태백은 잠깐 거쳐 가는 곳이지만 아픈 곳이다. 강이 시작되는 시원이면서 아직도 검은 물을 흘려보내는 막장 깊숙이 진폐의 숨소리를 들먹거리고 있는 곳이다.
산길을 베고 누운 고목 절터에는
이끼와 벌레들이 자기들끼리 법당에 빠졌다
곳곳에 구멍을 뚫어 집을 지었던 부리 단단한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집 떠난 구멍들이
누군가의 눈처럼 그윽하다
돌무더기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이마를 훔치는 산 중턱 바람 소리로 들려
그 중 가장 평평한 돌 위에 앉아본다
길이란 이렇게 나무 두어 그루 가로질러 걸치기만 해도 지워지는 것을
애써 지울 필요 없다는 것을 물소리 끝에 물려 내려가는 산은 알 것이다
큰 강이 되어 구절양장의 땅을 만져주며 넉넉한 품새가 된다는 것을
이윽고 길이란 닳고 닳아 지워지는 고통의 길이 아니라
강물처럼 깊어지며 잊는 것이라는 것을
까마귀 한 마리 또 다른 고목의 숨통 위로 큰 날개를 덮는다
- 이종수, <태백>
8월호 월간지 부록 같은, 산중입니다
저녁에 떠난 슬픔은 느닷없이
던져진 기억을 기웃거립니다
언제나 나는 당신의 나쁜 놈,
당신의 적막함이었죠
페이지마다 총총 그늘진 발자국뿐입니다
추억의 행간을 건너온 —,
빨래 거품 같은 구름의 날들
끝내 기록할 수 없었던 딱딱한 서른 살의 강물
집 나간 그리움은 단풍나무 숲에서 5분간 정차합니다
짐짝 같은 영혼이 육체를 밀고
몸 밖의 낡고 헐거운 풍경을 건너
이쯤에서 이제 지나간 당신을 폐차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세상에선 내가 너무 늦었으니,
늦은 것에 대해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기다리는 것이지만,
기다림 다한 길들은 여기서 다 저뭅니다.
- 이용한, <통리행>
많은 시인들이 고통을 우회적으로 노래했으나 현장에서 겪은 아픔에는 가 닿을 수 없는 관념의 고목이기 쉬웠다. 끝없이 고쳐 쓸 수밖에 없는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멀리’ 바라보는 고뇌의 원근법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물감을 칠하면 색은 나오지만 그것만으로는 회화의 색채가 아닙니다. 색 자체의 의미, 힘을 감각적인 문제로 포착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색의 내용이나 의미가 없다면 회화의 색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랬던 것처럼, 어둠을 모르면 빛이 나올 수 없는 법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이행해가는 단계가 그 사람 내면에 없다면 색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고뇌의 원근법>에서 서경식과 야노 시즈아키 대담 중에서) 하고 말한 대목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탄가루 돌가루가 새떼처럼
광부들의 심장을 노리고 달려든다
방진마스크 낡아빠진 그 방패로는
막아낼 수 없는
공포의 새떼 죽음의 새떼
힛치콕의 새
새들은
광부의 몸 속 깊이 숨어들고
허파 위에다 둥지를 틀고
날카로운 부리로 생몸뚱이를 쪼아
광부의 몸은 꼬챙이로 말라가고
광부의 숨결은 자꾸만 가빠진다
생목숨이 깨어지고 부서질 때보다
몇 배나 무섭고 두려운 건
진폐증이라 불리는
이놈의 새떼의 날카로운 부리
세계의 어느 조류백과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놈의 새떼는
어둡고 비좁은 지하막장에
무리를 지어 서식하면서
인간의 폐를 쪼아 먹고 산다
모기보다 훨씬 작다
독수리, 아니 콘도르보다 훨씬 크다
아직 새의 크기조차 알지 못하는
눈부시다는 현대의학 현대과학
그러기에 한번 쪼이면 치료불가능
진폐병동에서 벌써 몇년째
아내의 계호 받던 환자 하나가
오늘 아침 산소호흡기를 떼어버렸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어린애처럼 가벼워진 몸뚱아리를 안고
서러운 눈물 펑펑 쏟는 아내
눈물도 말라버린
울어줄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병실에 남은 동료 환자들
가슴으로 울면서 기도를 한다
“광산이 없는 나라
진폐증 없는 세상에서 다시 만나세
- 성희직, <진폐증 환자>
철저하게 바로 보고 예쁘지만은 않은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고뇌가 작품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서경식의 말이 맞다.
고향이 마침내 업종변경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땅 어느 곳의 역사가 20년밖에 안된다는 것은*
거리의 구멍가게가 노래방으로 바뀌듯
어느 순간에 이곳도
까페로 변할 지 모른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합니다
이미 태백산, 함백산 모두
눈썰매장으로 단장했습니다
산등성이를 부드럽게 타고 내려오다 보면
폐허가 된 사택들과 고무판화처럼 정지된 저탄장들을
꿀꺽 하고 넘겨버릴 수 있지요
더 이상 아프다는 건 거짓입니다
산과 강은 진통제를 먹고
포크레인에 다시 한 번 몸을 내주고
아이들은 눈썰매를 타러 산에 오릅니다
아버지의 마른 기침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아버지도 업종변경을 하여
한두 달씩 막노동을 나가고
눈썰매는 더욱 신이 납니다
고통은 이미 철지난 옷입니다
기차가 산 줄기를 타고 굴 속으로 향할 때 내려다 본 고향은
정말 나의 까페였습니다
문짝 떨어진 빼곡한 사택에서 향수를 느끼다니!
고향이 업종변경을 하니
내 마음 속 가슴 저리던 고향도
변경되었습니다
* 조세희의 『침묵의 뿌리』중에서
- 김경미, <태백에서>
태백(太白)의 뜻을 그리려면 아픔을 이해해야 하고 막연한 색깔과 문장만으로 꾸미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신마저 버리고 고목이 되어 몸에 기록하는 시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몸집은 크지만 속이 비어 항상 가볍다
저 많은 슬픔들 담아두기에는 나도 벅차다
세월에 지친 그늘 쌓이고 또 깊어져서
키가 커버린 내 그리움은 자꾸 먼 데를 본다
나는 내 죽음까지도 지켜보기 위해 천 년을 산다
비바람 눈보라 천둥 번개가 어떻게 나를 때리는지
햇볕과 안개와 구름이 어떻게 내 몸 어루만지며 가는지
어떻게 사상이 쫓기는 자와 쫓는 자를 만들어내는지
삶과 죽음을 어떻게 순식간에 바꾸어버리는지
나는 다만 내 살갗에 기록하고
사람들이 다 내려간 뒤의 적막함과
혼자 우는 울음과 피 말리는 두려움과 절망을
내 거죽에 써놓을 뿐이다
내 몸은 갈수록 질기고 단단해져서
살은 마르고 뼈마디만 굵어간다
어느 사이엔가 내 몸은 밑동부터 갈라져 나가
벌어진 틈으로 저 아랫녘 세상의 바람이 넘나들기도 한다
늘 혼자여서 쓸쓸한 영혼이 때로는 떠도는 영혼들을 불러모아
사이좋게 또는 무겁게 가라앉아 도란거린다
기록이 많아져 큰 주름 잔주름이 자꾸 늘어가지만
우듬지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워 하늘의 말씀들에 귀 기울이고
뿌리는 깊게 뻗어 대지의 다스운 숨결 길어 올린다
큰 덩치가 비록 거칠고 엉성하지만
나는 죽어서도 꼿꼿하게 천 년을 살겠다
- 이성부, <태백산 고목 한 그루가 남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