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는 미군과 한국군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거품을 물 그런 인물이다. 2000년 6.15에 역적 김대중이 평양에 가서 헌법을 유린해가면서 연방제 통일에 제 맘대로 서명해놓고 왔다. 강정구는 그 해 8.15에 평양에 가서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조국을 통일하자’는 글을 방명록에 남겼다. 이는 적화통일을 하자는 명백한 뜻이다.
성공회대 한홍구와 함께 주월 한국군을 양민의 피를 즐기는 학살자들이요 값싼 용병이라 욕을 했고, 박정희를 매국노라며 온갖 날이 선 비난을 퍼부어온 사람이다.
그가 노무현 정부의 노골적인 적화정책에 힘을 입어 ‘곧 바뀌어 질 세상’(?)에서 기득권을 얻어내려는 심산에서인지 또다시 기염을 토하고 있다. 그가 한 최근의 말을 정리해본다.
1. “6.25는 북한이 시도한 통일전쟁이다”
2. “통일전쟁인 6.25에 외세인 미국이 개입했고, 미국이 아니었으면 한달 이내에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달성됐을 것이다”
3. “한미동맹이 없었더라면 친일파 청산, 통일국가 수립, 민족정기 확립 등 해방공간의 민족사적 핵심과제들이 좌절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한반도의 자주적 역사 행로를 막고 평화권을 빼앗아 간 전쟁 주범은 미국과 주한미군이다.”
4. “한·미 군사동맹은 철폐돼야 하며 한미관계는 한중, 한일 관계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우호친선협력관계로 바뀌어야 한다.”
5. “미국의 개입으로 공산화되지 않았다고 잘 됐다고들 하는데, 당시 조선 사람들은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를 훨씬 좋아했다. 1946년 미군정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공산·사회주의 지지가 77%였고 자본주의 지지는 겨우 14%였다.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당시 조선사람 대부분이 원하는 것이면 응당 그 체제를 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6. “한국사회의 기성 주류는 일제 40년, 미국 신식민지 지배 60년 등 100년간 노예 노릇을 해 이제는 자신들이 자발적 노예주의자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한미동맹을 폐기해야 한다.”
7. “한미동맹은 본질적 속성상 반민족적, 예속적, 반(反)평화적, 예속적, 반(反)통일적이며, ‘한국전쟁 때 미국이 남한을 도와 줬으니 우리도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보은론(報恩論)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해방 직후 77%의 한국인들이 공산주의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 대다수 국민의 요구는 이승만에 의해 묵살됐다. 김일성이 그런 이승만을 무찌르고 공산주의 통일 위업을 달성하기 전쟁을 했으며, 이 전쟁은 통일을 위해 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했다. 미국만 개입하지 않았다면 통일전쟁은 한달 안에 끝났을 것이고, 통일이 빨리 되었다면 그 후의 희생은 치르지 않았어도 됐을 불필요한 희생이었다. 미국은 통일의 적이다. 한미군사동맹은 하루속히 피기해야 한다.”
경찰은 이번 주 내에 기소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필자는 ‘광주사태 배후에 불순환 좌익의 선동이 있었다“는 말 한미디에 광주 경찰-검찰-법관들에 의해 백주의 린치를 당했다. 수갑을 뒤로 채우고,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하면서 5시간 동안 안양에서 광주로 압송했다. 그 후 최성필 검사실에서 2시간 동안 취조를 하면서도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수갑을 뒤로 채우고 10분을 견딘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그 때 상한 어깨로 인해 지금도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경찰-검찰은 왜 강정구에게는 이리도 미아리고개 끌려가듯 다리를 절고 있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경찰청장 실, 서울지방경찰청장실에 항의 전화해야 하지 않을까?
당시의 광주 인물들을 기록해 놓았다.
1. 광주지방검찰청 최성필 검사, 김용철 조사관
2. 광주 서부경찰서: 이일남, 박찬수, 이규행
3. 광주지방법원 영장실질심의 정경현 부장판사
4. 광주지방법원 구속적부심 김용출 부장판사
5. 제1심 재판장: 전성수, 판사: 조재건 윤영훈
6. 제2심 재판장: 박삼봉 판사: 박강희 박정수
광주의 만행: 이런 광주가 민주회의 성지라니!
저는 2002.8.16일 및 8.20일에 각기 동아일보 및 문화일보에 [대국민 경계령! 좌익세력 최후의 발악이 시작됩니다]라는 애국적 광고문을 냈습니다. 국민에게 시국을 자세히 설명하는 4,500자의 칼럼형 광고였습니다(첨부참조). 김대중 대통령을 골수좌익으로 부각시켰습니다. 많은 국민들로부터 격려를 받았지만 호남인들로부터는 도끼로 머리를 두 쪽 내겠다는 등의 험한 전화와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민주당은 2회에 걸쳐 성명서를 내 정부에 강경대응을 주문했고, 오마이뉴스는 저를 정신분열증환자로 매도했습니다. 서울지검이 이를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입건한다는 내용이 광주일보에 실렸습니다. 2003.1.28일, 1심 선고를 하기 전에 재판장이 말해 둘 게 있다며 서두를 꺼냈습니다.
서울지검으로부터 본건과는 다른 사건을 본 사건에 병합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으나 본 재판부는 이를 병합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 하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은 본 사건을 정치적 사건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사건은 순수한 명예훼손 사건입니다.
광주지법이 김대중 정부의 시녀 노릇을 한다는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김대중에 대한 명예훼손사건을 병합해달라는 서울지검의 요구를 기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사건이 선거에 방해가 되는 세력에 대한 집중 탄압행위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이회창을 험담하는 사람들은 잡혀가지 않고 노무현을 험담한 사람이나 정권 재창출에 해가 될 사람들만 500명 정도 잡혀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저에 대한 탄압에 나선 존재들입니다. 제1진으로 5.18단체가 나섰습니다. 5.18부상자회 회장 김후식이 2002.8.20일, 11명의 조폭을 이끌고 올라와 다수의 경찰이 보는 앞에서 경찰을 능멸했습니다. 경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제 사무실을 부수고 건물주에게 협박을 가하면서 “사무실을 거두어들이겠다”라는 각서까지 받아갔습니다. 안양 제 거처로 달려와 수많은 아파트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차를 부수고, 대문을 부수고 무력시위를 하였습니다. 주민들로부터 빈축을 받자 이들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일제히 허리를 굽혀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라고 일제히 외쳤다 합니다. 모두가 맞춘 듯한 검은 유니폼과 검은 군화를 신고 있었다 합니다.
제2진이 오마이뉴스와 MBC 손석희였습니다. 이들이 매체를 통해 저를 공격했습니다. 손석희씨가 “현직 대통령을 드러내 놓고 빨갱이라고 하시는데 한가지 근거라도 대보십시오”라고 다그쳤습니다. 저는 “김대중은 23세에 노동당에 가입했고,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했으며, 대통령이 되어서는 알게 모르게 적장에게 군자금을 대주면서 지뢰제거, 남침통로건설 등 남한의 안보를 통째로 허문 확실한 좌익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아침 7:30분 인기포로를 청취하는 국민에 생방송 되었습니다. 훗날 손석희씨는 MBC에 들린 제게 “지난 번 선생님 대문에 어려움을 받았습니다”라며 씁쓸하게 말한 바 있습니다.
제3진은 광주검찰이었습니다. 최성필검사가 앞에 나섰습니다. 체포사유도 저지르지 않았고, 구속사유에도 해당하지 않는 저를 무단 폭력으로 체포했습니다. 2002.10.22일, 16:00시에 최성필 검사실 조사계장 김용철이 광주 서부경찰서 순경 3명(이이남, 박찬수, 이규행)을 이끌고 제 아파트에 무단 침입했습니다. 운동 후 샤워를 하고 팬티바람으로 있는 저를 옷도 입지 못하게 하면서 무작정 끌어내려 했습니다. 종이조각과 신분증을 눈앞에 슬쩍 스치게 하면서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조폭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들은 수갑을 뒤로 채운 채 5시간을 차에서 린치했습니다. 온갖 저질스러운 욕설로 언어폭력을 가했습니다. 우익새끼들은 모조리 죽여버려야 한당께, 야 이 개새끼야, 네깟놈이 무얼 안다고 감히 5.18을 건드려, 뭐 이런 사가지 없는 개새끼가 있어, 야, 이 새기야, 이회창으로부터 얼마나 받아 챙겼냐, 이런 새끼가 무슨 대령 출신이야, 이런 새끼가 무슨 육사 출신이야, 대령질 하면서 돈은 얼마나 챙겼냐, 부하 꽤나 잡아 처먹었을꺼다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저질적 언어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뺨도 때리고 머리도 쥐어박았습니다. 한 30차례 됩니다. 김용철과 이일남이 가장 악질적이었습니다. 야, 이 새끼야, 네깥놈은 죽여도 표도 안 날꺼다, 네깥놈이 때렸다고 말해도 증인이 있냐, 증거가 있냐?.
저를 아기는 사람들이 나중에 말하더군요. 자식 같은 놈들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게 가장 분하고 창피하다. 그런 걸 폭로하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랬다. 김영삼씨, 김대중씨 그리고 수많은 인사들이 지하실로 끌려가 매를 맞고 욕을 들으면서 수모를 당했으리라 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이 떠돌았습니다. 누구는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풀려 나온 후 자존심 때문인지 그들이 당한 고문과 수모에 대해 일체 함구합니다. 그래서 경찰과 검찰은 이러한 약점을 악용하여 마음껏 수모를 가하고 린치를 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를 국민에게 낱낱이 고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국민이 검사들을 감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4진은 광주법관들입니다. 2002.10.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의를 맡은 부장급 판사 정경현은 저의 변론을 맡은 광주출신 변호인에게 “변호인은 광주 시민들에게 무슨 욕을 들으려고 서울 사람의 재판을 맡았소”라며 신성해야 할 법정에서 감정의 날을 세웠습니다. 변호인이 피고인의 경력과 훈장 받은 사실들을 나열하자 “시끄럽소, 지저분한 심문은 집어치우시오”라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변호인은 66세, 재판장은 1957.01.25일생입니다(전남 함평). 광주출신 변호인이 법정에서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그분은 아직도 이 수모를 잊지 못하고 계십니다.
정경현 재판장은 피고인인 저를 노려보면서 “당신이 광주에 대해 무얼 아요?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구속영장은 발부됩니다. 이상이오”. 저는 할 말이 있으니 발언권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매우 못마땅해 하면서 “구속영장은 발부되니 말해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구속사유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구속 요건에 해당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들으려 하지도 않고 불과 두 마디 정도 듣고서는 “시끄럽소”라고 노려보았습니다.
10월30일, 구속적부심 재판이 열렸습니다. 김용출 부장판사(1959.02.08 전남 장성출신)가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나의 형님도 아무런 죄 없이 계엄군에 가서 몇 시간 동안 고초를 받고 왔소. 이런 건 어떻게 해석해야 되요?”. 재판장인 나도 피고인인 당신에게 감정이 있다는 표현이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민주화의 성지라고 하는 광주의 판사였습니다. 하는 행동들을 보면 감정의 집단이요 폭력의 집단인데,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러라 억압합니다.
수갑을 뒤로 채운채 5시간을 이동하고 1시간 동안 조서를 받았습니다. 팔과 등에 손바닥 두께만큼 부어 올랐습니다. 그 부기는 거의 4개월이 지나서야 가라앉았습니다.
저는 5.18단체들이 저지를 폭력행위를 서울지검에 고소했습니다. 서울에서 다뤄야 할 사건이 또 광주로 갔습니다. 최성필 검사가 형식적으로 이들을 무혐의 및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습니다. 서울에서 다뤄야 할 두 개 사건을 모두 광주로 가져가 광주시민은 대접해주고 서울시민은 학대했습니다. 광주가 점령군 사령부였습니다.
1980년 김대중씨는 재판장에게 선처를 해 달라고 빌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최고의 존칭을 써가면서 선처를 빌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들에게 선처를 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죄없이 잡혀온 것도 억울하고 분한데 붉은 세력으로 보이는 저들에게 부탁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광주의 1심 재판장과 2심 재판장이 마지막 변론을 종결하면서 제게 묻더군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를. 통상 재판장은 선처를 바란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합니다. 저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차라리 감옥을 더 살 지언정 선처해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첫댓글 잘봐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