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2: 4 횃불같고 번개 같도다 - 나 2: 5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나 2: 4 횃불같고 번개 같도다 -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 그 병거는 거리에 미치게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가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 )
이 말씀은 앗수르의 심판의 도구로 바벨론 군대를 사용하실 때, 그 군대가 강력하게 그들에게 사정없이 미치게 되니 사람으로는 막을 수 없는 공격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세력이든지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대항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소개한 바벨론 군대는 거리에서 미친 듯 달린다.
맹렬하고 거칠어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점령군이다.
그 모양은 횃불 같으며 빠르기는 번개같다.
이는 군대의 힘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멸망도 그렇게 신속할 것을 동시에 가르쳐주고 있다.
1]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병거의 달리는 모습이 매우 찬란하게 묘사되는 것은 그들의 무기와 전술이 뛰어난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힘을 침입자들에게 주시리라는 암시이다.
게다가 적들의 공격은 광야의 전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병거로 이루어진다.
* 수 17: 16, 18 - 16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 삿 1: 19 -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나 2: 5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 그가 그 존귀한 자를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예비하도다. )
이 때 앗수르 군대는 겁약(怯弱)한 군대가 되어 승산이 없다.
여기서 "그가"란 앗수르 왕을 가리킨다.
앗수르 왕은 바벨론과 그 연합군의 침략을 받고 "존귀한 자" 앗수르가 보유한 최정예 부대를 소집한다.
그러나 그들이 "엎드러질듯이"라 하여 침략군이 왔다는 소식과 소집 명령을 받고 자기 위치를 향하여 달리기는 달리나 겁약하여 엎드러질 듯 달려간다.
1]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5절의 ‘그는’ 니느웨 왕을 가리킬 것이다.
니느웨 왕은 존귀한 자들, 아마 그의 친위부대를 급히 동원하여 성을 방어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급하게 성을 방어하지만, 그 방어는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2]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본 절이 묘사하는 것이 누구인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혹자는 침략자를 묘사한다고 하고(NEB, Stonehouse, Wade, Taylor, Dalglish),
혹자는 그와 반대로 방어자를 묘사한다고 주장한다(S. R. Drive, A. B. Davidosn).
이처럼 모호하게 해석되는 이유는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의 히브리어 '이카쉘루' 때문이다.
이 단어는 뭔가에 걸려서 넘어지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급히 방어에 나선 앗수르 군대의 당황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일 수도 있고,
무거운 무기를 짊어지고 쳐들어오는 바벨론의 군대를 가리킬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막을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소케크'를 방어용 무기로 본다면 앗수르 군대가 방어 시설로 버티려고 애쓰는 동안 침입자는 이미 성벽 밖에 와 있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공격용 무기로 본다면(Keil) 성벽을 점령하려고 달려드는 침략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반되는 두 견해 가운데 문맥에 비추어본다면 후자의 것이 더욱 타당한 듯하다.
하나님이 파견한 군대에 대해 그들의 승산은 없다.
앗수르는 이런 일이 자신들에게 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판의 손을 높이 드실 때 그들의 모든 기반은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그러면서 당연하다기보다는 '왜 악인들이 이토록 오랜 기간 세상에서 악을 행하다 이제야 무너지는가'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고 바르게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선을 왜곡하며 그 자신의 본성을 거스려 살 수도 있다.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셨으나 그 자유(행위)에 책임이 있다.
사람의 모든 행위에 즉각적인 처벌이 따르면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다.
오직 복종만 강요될 뿐이다.
(2) 하나님의 놀라운 인애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악한 개인이나 국가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진멸할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오래 참으신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 9) 하였다.
(3) 심판의 단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불의는 반드시 종말이 있고 인생에게는 반드시 계산할 날이 온다.
하나님의 응보는 천천히 임하나 반드시 철저하게 임한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해 가신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모습은 눈에 남고, 멋진 말은 귀에 남지만
따뜻한 배려는 가슴에 남는다고 합니다.
오늘도 따뜻한 사랑 나누며 즐겁고 행복한 날 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