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 ＜앙팡 테리블＞ 5화

[아고라]

　“너, 너 뭐야….”

　정민상고 앞 오락실. 한 사내가 막다른 벽에 몰려 주저 앉았다. 바닥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사내의 코에서 쉴새없이 흐르는 코피 때문이다. 사내는 대충 바닥을 더듬거리다 손에 잡힌 쓰레기통을 집어 던졌다.

　“너 뭐냐고, 이 새끼야!”

　가볍게 그것을 피한 박 은솔이 볼멘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 편 벽으로 날아간 쓰레기통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이로써 벌써 다섯번째 학교였다.

　“하나같이 어중이 떠중이들 뿐이구만.”

　“…….”

　“한 학교의 짱이라는 놈들이 왜 죄다 이 모양이야?”

　뒤에서 몸을 사리며 구경하던 정 보통이 슬쩍 한 마디 던진다.

　“그러게 내가 그랬잖아. 괜히 시간낭비하지 말고….”

　“닥쳐라.”

　“…….”

　“재미없다. 다음 학교로 가자.”

＊＊＊

　대헌고 1학년 교실. 점심시간이 끝나는 쉬는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시끌벅적했다. 사내의 주머니에서 문자를 알리는 진동소리가 울렸다.

　「잠깐 화장실로 와바」

　문자를 확인한 사내의 눈이 일순간 휘둥그레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 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덜컥 겁부터 났기 때문이다. 구 슬을 괴롭히던 여자아이들은 학부모까지 대동해 사과한 결과 퇴학만은 면할 수 있었는데, 그날 이후 언제 구 슬을 괴롭혔냐는 듯 사이좋게 지내기 시작했다. 유 익한이 퇴학 대신 내건 조건이었다. 사내는 평온해 보이는 구 슬을 주의깊게 한 번 살피고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냐, 남 태평?”

　“자, 잠깐 화장실 좀….”

　익한과 있었던 일은 일절 누설 금지였다. 교실을 나온 태평이 재차 주위를 살피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텅 빈 화장실의 마지막 칸 위로 담배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저긴가? 조심스럽게 다가간 태평이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 봤지만 그닥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안에서 먼저 태평의 존재를 눈치챈 듯 예고없이 문이 열렸다. 기겁하며 뒤로 물러선 태평은 익한의 얼굴을 보고나서야 안심했다. 익한이 다 피운 담배를 변기에 버리며 손가락을 까닥해보였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왜, 왜 부르셨어요?”

　“요즘 슬이는 좀 어때?”

　“그, 그야 잘 지내죠….”

　“그래?”

　익한이 안도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하얀색 봉투였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태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예요?”

　“3년치 보험료.”

　“네?”

　“3년동안 학교에서 구 슬의 안전을 책임지는 데에 대한 보험료.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 대한 보험금은 나한테 뒤지게 맞는 걸로 하자.”

　“3, 3년이나요?”

　“왜. 불만있어?”

　“그게 아니라….”

　“모든지 확실한 게 좋잖아? 넌 그 돈 받은 이상, 슬이가 졸업하는 순간까지,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 애 지켜야돼. 왜, 너무 급박해서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상황 있잖아. 이를테면… 그래. 만약 슬이가 학교 앞에서 차에 치일 것 같다고 쳐. 그럼 네가 대신 차에 뛰어드는 거지. 까짓거 죽기야 하겠냐? 뭐, 형이 병원비정돈 내줄게.”

　“혀… 혀엉….”

　태평은 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익한이 뱉은 말을 주워 담을리도 만무했다.

　“그럼 난 간다.”

　허무하게 익한을 보낸 태평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러다 슬쩍 봉투를 열어보고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야… 무슨 학생이 이런 돈을 갖고 다녀?”

　누가 볼세라 봉투를 마이 안주머니에 넣은 태평이 슬금슬금 화장실에서 나왔다. 마침 교실을 나온 구 슬이 그런 태평과 마주쳤다. 갑자기 의욕이 넘치는지, 태평은 싱글벙글하며 물었다.

　“어디 가냐?”

　“으응?”

　“어디 가냐구.”

　구 슬은 누군가 말을 거는 게 어색한지 별안간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화, 화장실….”

　태평이 머쓱하게 웃었다.

　“넌 좋겠다. 든든한 빽이 있어서.”

＊＊＊

　영하를 웃도는 날씨에 황량하기 그지없는 고수부지. 그곳에 성륜고의 전교생이 집결했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연장을 챙겨 들고서 말이다. 검은 캡모자를 깊이 눌러쓴 아진이 새로 감은 테이핑을 확인했다. 유독 그녀만 교복을 입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아진이 드럼통에 올라서자 술렁이던 분위기가 일순간 가라앉았다. 아진은 눌러썼던 모자를 잠시 벗었다. 여자치고는 강렬한 눈빛이 사내들을 압도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대헌고는 소수정예야. 단합만 잘 되면 우리가 이긴다.”

　그 때 마침 고수부지 위에 도착한 대헌고 무리의 야유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역시 한 손엔 연장을 들고 있는 상태였다. 다시 모자를 눌러 쓴 아진이 가늘게 뜬 눈으로 무리속에서 익한을 찾아냈다. 익한은 언제나처럼 건들거리며 무리의 중심에 서있었다.

　“오랜만이네, 누나.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든 거 아냐? 그래도 한 때는 꽤 가까운 사이였는데.”

　“미친놈. 헛소리 집어쳐라.”

　너무도 진지한 아진의 태도에 익한은 폭소했다. 마치 놀리는 듯한 그의 행동에 아진의 심기가 한층 더 불편해졌다. 하지만 익한 또한 계속 장난만 칠 심산은 아닌 듯했다. 잠시 후 익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헛소리 집어치란다, 얘들아.”

　익한이 고개를 까닥하기 무섭게, 성륜고와 대헌고가 맞붙었다. 인원수만 봤을 땐 성륜고가 훨씬 앞서 있었다. 익한이 스텐드에 앉아 맨솔 한 갑을 꺼냈다. 그의 여유는 괜한 호기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전세가 역전되는 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진의 표정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확연히 드러난 실력의 차이에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다.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익한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재미없는 결말이네. 너무 뻔하잖아.”

　아진의 눈빛엔 증오와 분노를 동반한 온갖 감정이 응어리처럼 뭉쳐 담겨 있었다. 분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 익한에게 진다는 것은 말이다.

　“이제 알겠냐? 꿀벌들이 암만 모여서 단합해봤자 말벌한텐 상대가 안 돼. 열심히 일한 일벌들을 이렇게 혹사시키면 쓰나.”

　“그 입 닥쳐, 이 건방진 새끼야.”

　익한이 스텐드에서 일어나 단숨에 평지로 내려왔다.

　“말벌한테서 벌집을 지키려면 여왕벌이 직접 나서야지.”

　이들이 앙숙이 된 계기는 아주 오래 전, 노 아진이 태어나고 이듬해 바로 유 익한이 태어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당시 아진의 가족은 현 국무총리의 집에 얹혀살며, 아버지는 기사, 어머니는 가정부 노릇을 했었다. 그런데 아진이 걷기 시작할 무렵 익한이 태어났고, 아진은 갖 태어난 주인집 아들에게 엄마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익한의 생모가 그를 낳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아진은 남몰래 익한에 대한 증오를 키워갔다. 아진의 부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익한의 집에서 지내지만, 아진은 성륜고에 입학함과 동시에 독립한 상태였다.

　“그럼 덤벼.”

　아진이 발의 보폭을 넓히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걸치고 있던 바람막이를 느긋하게 벗은 익한이 결전을 치른 사내들에게 말했다.

　“너넨 물러나 있어.”

　거센 바람 때문에 허공에 던진 바람막이가 마구 펄럭이며 날아갔다. 곧 아진과 마찬가지로 싸울 태세를 갖춘 익한이 손가락 두개만 까닥해보였다. 채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양쪽 다 자존심이 팽팽했다. 아진은 이를 바득 갈았다. 언제까지 기다리기엔 한시라도 빨리 익한을 이기고 싶었다. 끝내 신경전에서 밀린 아진이 익한을 향해 먼저 발을 내딛었다.

＊＊＊

　“성륜고 짱을 안다고?”

　그 시각 구 산은 호연과 함께 집근처 바에 있었다.

　“응. 구 원 여자친구였으니까.”

　“원이형 여자친구?!”

　“구 원이 흑룡회에 들어가기 전까진 그랬지.”

　“자, 잠깐. 그러니까… 성륜고 짱이 여자라는 소문이 진짜였단 말야?”

　호연이 아연실색하며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구 산이 턱 언저리를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구 원이 3학년 때 1학년이라고 했으니까, 지금은 아마 3학년일 거야. 성륜고는 대대로 일진회 우두머리가 퇴학당하는 전통이 있어서, 철저히 정체를 숨기고 있다고 들었어. 이름이… 그래. 노 아진이라고 했었지.”

　“노 아진?”

　“응. 서울을 제패한 구 원을 때려 눕히겠다며 1학년 때 지문고에 쳐들어왔었대. 결과는 뭐 뻔했겠지. 그래도 근성 하난 인정할만 했다고… 구 원이 그랬어.”

＊＊＊

　벌써 몇분째 익한은 주먹 한 번 쓰지 않고 있었다. 싸운다기보다 아진의 일방적인 공격을 익한이 피하고 있는 격이었다. 익한은 전의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재빠른 몸놀림 앞에서 아진은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양 주먹 모두 꼼짝없이 잡힌 아진이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익한은 사뭇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진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어렸을 땐 누나한테 참 많이도 당했는데. 홧김에 던진 리코더에 정통으로 맞고 쌍코피나 질질 흘리질 않나. 킥보드 안 태워준다고 협박해서 아빠 주머니까지 털었지. 근데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치, 누나?”

　참다못한 아진이 무릎으로 익한의 중심부위를 가격했다.

　“아 씨발!!”

　익한은 못견디겠는지 아랫입술을 깨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지켜보고 있던 사내들은 마치 자기가 맞은 양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누나 미쳤어? 나 고자되면 누나가 책임질 거냐고!! 아 진짜!!”

　바닥에 주저 앉은 익한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원망스런 눈초리로 아진을 쳐다봤다. 아진은 그제야 비로소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러게 누가 봐주래?”

　“뭐?”

　익한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으며 일어났다. 그리곤 일순간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아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진은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익한은 아진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듯 말했다.

　“착각하지마.”

　“…….”

　“내가 아무리 망나니여도, 날 키워준 유모 딸을 개패듯 팰 생각은 없어서 그런 거니까.”

　순간 아진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흔들렸다.

　“하나뿐인 딸이 서울제패한다고 가출한 것도 속상한데, 밖에서 맞고 다니면 얼마나 더 속상하겠어.”

　“그만 지꺼려… 유 익한.”

　“흑룡회를 이어받아서 부모님 호강시켜주고 싶은 맘은 알겠는데, 누나는 참 재수가 없어. 나같은 걸 적으로 뒀으니 말이야. 분명히 말하지만 누나는 서울제패 못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누나한테 제안 하나 할까?”

　익한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만 일선에서 물러나. 손떼라고.”

　“무슨 헛소리야?”

　“그럼 누나네 부모님 퇴직시켜줄게. 퇴직금 두둑히 챙겨서.”

　익한의 말은 아진의 화를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아진은 남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걸 무엇보다 싫어했으니 말이다. 아진이 다시 한 번 익한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엔 피하지 않은 익한이 담담하게 주먹을 받아냈다.

　“내가 왜 너를 싫어하는지 알아?”

　적중률은 떨어지지만 주먹 하나는 맵다. 익한은 피식 웃으며 터진 입술을 매만졌다.

　“바로 그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만심 때문이야. 넌 항상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지껄이지. 겨우 부모 하나 잘 만난 것 뿐이면서.”

　“누나야말로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지 마. 겨우 부모 하나 잘 만나서, 내가 그것 때문에 내가 어떤 피해를 봤는지 누난 모르잖아?”

　“피해? 네 입에서도 그딴 말이 나오냐?”

　그 때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화가 조금 새어나간 모양이다. 상황을 감지한 익한이 다시금 냉정해졌다.

　“아무튼 이걸로 끝내. 누난 나한테 진 거야.”

　“웃기지마.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말이 안 통하네, 진짜.”

　“진심으로 나랑 싸우고 싶게 해줘?”

　“뭐라는 거야.”

　“구 슬이랑 아직도 사귀냐?”

　“누나가 걔를 어떻게 알아?”

　시기적으로 익한과 구 슬, 그리고 아진과 구 원의 만남은 비슷했다. 구 원은 그 때나 지금이나 아진을 만나면 자신의 가족을 주제삼는 일이 많았는데, 배다른 동생이란 구 슬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비록 같은 중학교를 다니진 않았지만 익한과 한 집에 살았던 아진은 구 슬이 그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렸다. 비록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떻게 아는 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너 대신 그 애한테 화풀이할 수도 있다는 게 중요하지.”

　진심이 아니었다. 단지 익한을 도발하기 위해 아진이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익한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한 번 해봐. 어떻게 되나.”

　아진은 미처 다른 대안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사내들을 이끌고 돌아서는 익한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끝난 게 아니야. 반드시 널 박살내고 말 거니까 각오하고 있으라고.”

　노 아진에겐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졸업하기 전까지 서울을 제패해야만 구 원과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

　대헌고의 정예멤버들이 커다란 가라오케 룸을 가득 채웠다. 그 사이엔 간혹 야한 차림의 여자들도 보였다. 그들은 저마다 술잔을 기울이거나 노래를 부르며 신나는 한 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상석에 앉은 익한만은 예외였다. 익한은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만 주시했다.

　‘너는 아버지가 총리니까 별 일 없겠지만 우린 아니야. 퇴학은 물론이고 소년원에 들어갈 게 뻔하다구… 익한아. 진짜 친구로써 이렇게 부탁한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네가 시킨 짓이라 해줘. 벌이라면 너한테 받을게. 네 분이 풀릴 때까지 얼마든지 때려도 좋아…….’

　여기까지 떠올린 익한이 네모난 양주병을 통째로 들이켰다. 그럼에도 성이 차지 않는지 테이블이 깨질듯 세게 내려놓자, 그의 상태를 파악한 사내 한 명이 서둘러 노래를 취소시켰다. 사내는 익한을 향해 익살스럽게 말했다.

　“왜 그래, 익한아? 노래가 맘에 안 드냐?”

　다른 사내들도 뒤늦게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행동이 오늘따라 익한을 거슬리게 했다. 익한이 상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산하고 갈테니까 너네끼리 놀아라.”

＊＊＊

　밤늦게 귀가한 구 산이 허겁지겁 다시 밖으로 나왔다. 구 슬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 산은 큰 소리로 구 슬을 부르며 동네방네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핸드폰을 꺼내 구 슬에게 전화했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잠시 후 핸드폰 너머로 자신의 잘못을 아는지 주눅이 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미안, 오빠….”

　“어디냐니까?”

　“그게….”

　“빨리 말 안 해?”

　그 시각 구 슬은 으리으리한 저택의 대문 앞에 서있었다. 대문 옆에 걸린 명패엔 ‘유 중호’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구 슬은 교복 대신 제법 신경쓴 듯한 옷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 때 멀리서 익한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를 발견한 구 슬의 입가에 전에 없던 미소가 번졌다. 그 사실을 알리 없는 구 산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구 슬 너! 어딘지 말 안 해?”

　”오빠 미안!”

　“뭐?”

　“내 걱정말고 먼저 자!”

　전화를 끊은 구 슬이 다급하게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곤 걸어오는 익한을 주시하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소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익한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당황한 구 슬이 서둘러 익한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오빠! 익한오빠!”

　익한은 못들은 척 빠르게 걸었지만 뛰어오는 구 슬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

　“왜 도망가?”

　뜨끔한 익한이 괜한 성질을 부린다.

　“내가 언제! 너야말로 왜 남에 집 앞에 서있냐? 내 앞에 얼쩡거리지 말라고 했잖아!”

　“거짓말.”

　“뭐?”

　“오빠가 하는 말 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아니거든?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서 꺼져!”

　익한은 구 슬을 밀쳐내려 했지만 애처로운 구 슬의 눈빛에 그만 마음이 약해져버렸다. 익한은 일부러 구 슬의 시선을 피했다.

　“그럼 왜 나한테 신경쓰는데?”

　“너한테 신경쓴 적 없어. 몇푼 되지도 않는 돈으로 호들갑 떠는 게 꼴사나워서 그랬을 뿐이야. 그런 애들한테 찍소리 못하고 있는 너도 답답하고.”

　“…진심이야?”

　“그래.”

　“그렇구나…….”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는 구 슬의 반응에 익한은 도리어 당황한 기색이었다. 익한이 눈만 돌려 구 슬을 바라봤다.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군 구 슬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뭐?”

　구 슬은 슬프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빠가 이렇게까지 날 싫어하는지 몰랐어…. 나 정말 눈치가 없나보다. 한심해… 진짜.”

　익한의 팔을 잡고 있던 작은 손이 떨어져 나갔다.

　“잘 지내. 익한오빠.”

　멀어지는 구 슬의 뒷모습을 보며, 익한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던 중 구두밑창이 떨어졌다. 집까지는 아직 한참을 더 올라가야 했기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구 슬은 쭈그리고 앉아 망가진 구두를 살폈다. 그 때 익숙한 신발이 구 슬의 시야에 잡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구 산의 굳어진 얼굴이 보였다. 그에 기가 죽은 구 슬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구 산은 그런 구 슬을 추궁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말 없이 구 슬의 앞에 등을 보이며 앉을 뿐이었다. 구 슬은 잠시 망설이다가 구 산의 등에 엎혔다. 그 뒤 오랫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트린 건 구 슬이었다.

　“오빠.”

　“왜.”

　“나…… 학교 그만 둘래.”

　“…….”

　구 산은 자신의 등이 축축해지는 걸 느꼈지만 일부러 모른척했다.

　“고집부려서 미안해….”

＊＊＊

　다음날 아침.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하섬고등학교. 시끄러운 3학년 교실에 아침조회가 시작되자, 점잖아 보이는 남자교사가 교탁 앞에서 외쳤다.

　“조용조용! 오늘은 전학생이 있다.”

　전학생이란 말에 잠시나마 조용해졌던 교실이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곳곳에서 전학생의 성별을 놓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 때 담당교사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 앞문이 열렸다. 순식간에 교실은 평정을 되찾았다. 전학생이 교단에 올라오자 남자교사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 교탁을 차지하고 선 전학생이 지긋이 학생들을 훑어봤다. 눈이 마주치는 학생마다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을 피했다.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키에 위압적인 체격을 지닌 남자였다. 그는 구수한 부산사투리를 구사했다.

　“황 규봉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복병이 서울에 나타났다.

글씨체 어떤게 제일 보기 좋나요? 

굴림? 돋움? 10포인트? 알려주세요..ㅠ ㅠ

30일 재생기간 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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