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김문홍 영화 속을 걷다 (62)
아내의 환영과 함께 집을 나서다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
김 문 홍
인간의 품위를 지니며 죽는다는 것
나이 든 사람들은 항상 주위의 죽음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이 노환에 의한 죽음이든 병으로 인한 죽음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도 거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건 예외 없이 밀어닥치는 것이 죽음이란 걸 아는 까닭이다. 대상 자체가 확연하게 인지될 때의 ‘무섭다’는 감정보다는, 대상 자체가 불분명한 데에서 오는 원초적인 ‘두려움’의 감정이라서 더욱 그렇다.
죽음에서 가장 바라는 것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든 한결같이 건강하게 잘 살다가 잠자듯이 한순간에 죽는 것을 바란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희망대로 죽음을 맞을 수 없어서 더욱더 불안하고 애가 타는 것이다. 병상에 누운 채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즉,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면서 아름답게 삶을 끝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죽음을 늘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고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언젠가 죽는다는 건 자연계 순환의 법칙이다. 어린 것은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고, 나이가 들면 반드시 그 끝을 맺는다는 건 피할 수 없는 질서이다. 생각하고 말과 글을 쓰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답게 그 끝을 맺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외부의 강압으로 죽음을 재촉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엄두를 낼 수 없다. 세상에 나오는 건 차례가 있지만 떠나는 건 차례가 없고, 죽음이 언제 내게 밀어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늘 죽음을 두려워하고 대면하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품위를 지니면서 죽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안타깝다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를 논쟁의 대상으로 내놓은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2012, 127분)는 우리에게 잠시 잊고 있었던 죽음의 문제를 느닷없이 제시한다. 인간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와, 그 곁을 지켜야 하는 사람의 윤리적 태도가 어떠해야 되는가의 문제를 제시하고 가치 갈등을 시험하게 한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는 발표될 때마다 논쟁거리를 제시해 왔다. 그는 칸영화제의 총아이다. <피아니스트>(2001)로 심사위원 대상을, <히든>(2005)으로 감독상을, 그리고 <하얀 리본>((2009)으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3년 뒤, 또다시 <아무르>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어 세계영화계의 부러움을 샀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자기파괴적 충동이라는 인간의 심연을, 정치적 상황의 치부를 중산층의 일상에 접목시키거나, 독일 사회의 권위주의와 파시즘을 은유적으로 묘사해 논쟁거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아무르>는 종래의 주제의식에서 조금 벗어나, 죽음에 대한 문제를 연극적인 기법과 형식으로 제시해 인간의 원초적인 윤리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결론부터 제시한 뒤, 플레시백 기법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집안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긴다는 주위의 신고로 경찰관과 소방관이 문을 따고 조르주와 안느 부부의 집으로 들어간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고 안느의 시체만 꽃장식에 휩싸여 침대에 누워있을 뿐이다. 이처럼 영화는 서사의 결론부터 관객에게 제시해 놓고,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가슴 아프고 슬픈 조르주와 안느 부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원인과 과정을 훑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 다음의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조르주와 안느 부부의 집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연극적인 콘셉트를 차용하고 있다. 그리고 주연배우 역시 <남과 여>로 유명한 82세의 장 루이스 트레티냥이 남편 조르주 역을, 85세의 엠마누엘 리바가 아내인 안느 역을 맡고 있다. 그러니까 작중인물의 역할을 실제의 나이대의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집안의 침실, 거실, 현관, 부엌 등의 공간을 오가며 연기하는 2인극 형식이기 때문에 출연 배우들의 호흡과 앙상블에 의지해야 할 만큼 출중한 연기력이 요구되고 있기도 하다.
안느에게 피아노를 교습하던 청년이 상젤리제 극장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부부는 집으로 돌아온다. 두 사람이 음식을 먹고 있던 중 어느 순간 안느가 초점 잃은 눈과 무표정한 얼굴로 정신을 놓아 버린 사건으로 불행이 시작된다. 뒤이어 안느가 병원에 입원하고 끝내는 사지 마비와 언어 장애까지 겹치면서, 서사의 대부분을 병마와의 투쟁과 헌신적인 간호에 할애하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과 감정의 균열을 다루고 있는데, 안느는 남편의 헌신적인 간호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조르주는 인간적인 품위를 잃어가는 아내 안느의 모습에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물을 마시지 않겠다고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안느가 머금고 있던 물을 뱉어내고, 그런 안느의 고집에 조르주가 뺨을 때리는 장면이 그런 역설적인 사랑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조르주가 물이 꽉 차 있는 복도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는 악몽을 꾸거나, 죽음을 은유하는 비둘기가 마당으로 향한 창을 통해 들어오자 투덜대며 이를 창밖으로 내쫓거나, 집안 곳곳에 걸려 있는 명화들이 인서트로 끼어드는 장면,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는 집안 곳곳의 풍경 등은 아내의 간호에 지쳐 가는 조르주의 심신의 풍경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딸 에바(이자벨 위페르 분)가 초죽음 상태의 엄마 모습을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시킬 것을 요구하지만, 조르주는 병원에 보내지 말라는 안느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다.
안느는 안느 대로 조르주에 대한 죄책감과 인간적인 품위를 잃어가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역겨워한다. 그녀는 식사를 하다 말고 남편에게 사진 앨범을 갖다 달라고 한다. 어린 날과 젊은 날 자신의 앳된 모습을 살피던 그녀가 혼잣말처럼 “인생은 참 긴 것 같아.”라고 푸념한다. 이쯤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은유적 발언이다. 놀라 그녀를 지겨보는 조르주에게 안느는 “그렇게 날 관찰하지 마”라고 힐책한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사랑하는 이에게 들켰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환영과 집을 나서다
조르주는 말없이 누워있는 안느에게 초등학교 시절의 캠핑 얘기를 꺼낸다. 이야기 끝에 그는 비참한 표정으로 울먹이며 베개로 아내를 질식사시키고 만다. 안느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듯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본능적인 반사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외출해서 꽃을 사 들고 들어오던 조르주는 현관으로 날아 들어온 비둘기를 발견한다.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그는 안간힘 끝에 비둘기를 잡는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은유적 상징을 통해 그는 비로소 그녀의 죽음을 자신의 가슴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조르주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의 딸 에바에게 보내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편지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안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앞으로의 행로에 관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내용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심리적 동기를 변명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편지를 끝낸 조르주는 문득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안느를 발견한다. 아마 두 사람은 외출을 서두르고 있는 모양이다. 안느는 조르주에게 곧 끝내고 나갈 테니 미리 외출 준비를 하라고 이른다.
조르주가 잠옷 바람으로 아내를 뒤따라 가려고 하자, 안느는 외투를 입고 나오라고 채근한다. 이 장면은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의 뒤를 따르려는 조르주의 죽음에 대한 은유적 상징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 같다. 살아있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환영을 따라 집을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엔딩 시퀀스도 다분히 상징적이다. 외출에서 돌아온 딸 에바가 부모가 살던 집으로 들어와 거실에 앉아 주위를 휘둘러 본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물러나면서 에바의 모습을 원경으로 집으며 영화가 끝난다. 사랑하는 부모가 이 집에서 서로 사랑하다 죽음의 과정을 치르고 떠났듯이, 에바 역시 남편과 함께 이 집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다가 그녀의 부모와 같은 과정을 밟을 것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 중에 누가 먼저 병들어 드러누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들 또한 그러한 죽음의 의식을 치르면서 어떻게 죽는 것이 인간적인 모습인가를 고민하고 아파할 것이다.
지금까지 논쟁거리의 영화를 발표했던 미카엘 하네케가 죽음의 문제를 이 영화를 통해 심도 있게 접근한 것을 보면, 감독 역시 인생을 알 만큼 나이가 들었고 사회와 인간을 보는 시각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조르주와 안느를 연기한 두 원로 배우의 원숙한 연기가 아니었으면, 또한 인간을 보는 시각이 원숙해진 감독의 웅숭깊은 철학이 아니었으면 이 영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은 보는 내내 심사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은 언젠가는 자신들에게도 밀어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 숙연해질 것이고, 인생을 살 만큼 산 노년들은 어떻게 죽는 것이 인간적인 품위를 지키는 것일까에 대해 두고두고 깊이 생각하며, 지금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은 연민의 충만을 깨달으며 안쓰러운 눈길을 보낼지도 모른다. 극장 밖을 나서는 관객들은 한결같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라, 서로 사랑만 하기에도 인생은 무척 짧으니 어느 한순간이라도 사람의 감정을 잃지 말자, 삶을 아름답게 끝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등등의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처지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로 마음이 착잡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헌신적인 사랑을 쏟겠다고 함부로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그 감정만은 놓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다잡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올바른 예의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왜냐면 우리는 생각하고 말할 줄 아는 인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이다. (계간 <문장> 2022년 겨울호)
첫댓글 영화를 보고싶게 만드는 평입니다.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걸까요?
나이가 들면서 이런 물음을 해봅니다.
누구나 남의 도움받지 않으면서
살다가 가고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어요.
헌데 아프면 그것이 힘들 거예요.
조르주가 느낀 절망감, 안느가 느끼는 상실감..
다 공감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