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1)
창 4:1-7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1-7 [아벨을 살해하는 가인] 아담이 아내 하와와 함께 잠자리에 들어 하와가 아이를 가졌다. 그가 가인을 낳고는 `하나님께서 돌봐주셔서 내가 사내아이를 얻었구나' 하며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다. 2) 그 뒤 하와는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 되었다. 3) 얼마 뒤 가인은 농사 지어 거두어들인 곡식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 4) 그때 아벨도 자기가 돌보던 양이 새끼를 낳자 그 가운데에서 첫 번째 것을 잡아 가장 좋은 부분을 여호와께 제물로 바쳤다. 여호와께서는 아벨을 흐뭇하게 여기시고 그가 바치는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다. 5) 그러나 가인은 좋게 여기시지 않고 그가 바친 제물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가인은 너무도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다. 6)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셨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느냐? 어째서 안색이 변하였느냐? 7) 네가 잘하였다면 어째서 내가 네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어째서 고개를 들지 못하느냐? 네가 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죄가 네 마음의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가 급기야는 너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리라.'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로 가인이 분노하여 아벨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1-4)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가인의 이름 뜻은 소유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벨의 이름은 공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인과 아벨이 자라면서 자신의 은사와 취향에 따라 직업을 갖게 됩니다. 한 사람은 농사꾼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양을 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이들은 각각 수고한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그 제물을 동시에 받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받으신 아벨의 제사에서는 제사 드린 사람과 제물을 동시에 받으셨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리는 제물의 차이로는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 행위 속에 두 가지 수식어가 눈이 띕니다. “첫 새끼”와 “기름진 것으로” 입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그의 삶의 고백이 담겨져 있던 것입니다.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5-7) 가인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합니다. 가인의 제물에 문제가 있었더라면 제물을 먼저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드린 제물도 함께 거절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는 뜻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가장 먼저 했던 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에 빠진 사람들이 드러내는 당연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가인의 삶과 그의 제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삶이 동반된 제사를 받으십니다. 그러나 이유와 상관없이 이어 분노해 있는 가인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당신이 드리는 제물의 관심보다 그 제물을 드리는 당신에게 집중하고 계십니다. 아벨의 제사처럼 온전한 예배자가 되기 위한 삶의 고백들이 당신에게 필요합니다.
평소 인터뷰하기 어려운 배우로 소문난 배우 신하균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습니다. 그를 향해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이웃집에 신(神)이 산다면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아무 것이나 다 들어줄 수 있어요.” 그는 배우니까 연기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거나 더 많은 돈을 벌게 해달라고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이사 가지 마세요.” 이었습니다. 당신 옆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옆에 계셔서 당신의 피할 곳과 힘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마세요. 성령 하나님이 당신 옆에 계속해서 머무실 수 있도록 기도로 붙드세요.
< 설 교 >
분노조절장애 치유
김필곤목사 / 창 4:5-7
오늘은 “치유” 시리즈 여섯 번째로 “분노조절장애 치유”에 대하여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분노는 삶에서 항상 동반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양한 상황에 대해서 느끼게 되는 강렬한 정서반응입니다. 짜증, 화, 흥분, 노발대발, 부아, 성남, 성가심, 역정, 발끈함, 약오름, 열받음, 신경질, 성질 급함, 욱함, 언짢음, 뚜껑 열림, 격양, 분개, 격분, 격노 등 다양한 말로 표현됩니다. 대부분 운전하다가 갑자기 끼어드는 차로 화가 난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성도들은 잘 참으니까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화나는 것은 희로애락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의 하나입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거나 공평하게 대우받지 못하거나 불의한 일을 보거나 손해를 보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존심이 상할 때 화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언젠가 좌회전을 하려고 대기하고 있는데 뒤에 있는 차가 빵빵거렸습니다. 그래도 신호등이 파란 신호라 가지 않고 서 있으니까 그 차가 우측으로 빠져 직진하면서 차문을 열고 욕을 하여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운전자를 보니 당시 제가 섬기고 있던 교회의 성가대원이었습니다. 성가대원 10년 해도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화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대부분 화는 15초 사이에 최고조에 오르고 15분 이상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제는 끼어드는 차로 화가 나면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계속 추적하고, 차 앞에 세워 정차를 시킨 후 폭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분노가 자신을 해치고 상대를 해침으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런 경우는 분노를 조절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도박하고 싶은 충동, 게임하고 싶은 충동, 술 먹고 싶은 충동, 죽고 싶은 충동 등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폭력적 성향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는데 이런 것을 분노조절장애라고 합니다. 의학적 용어로는 간헐적 폭발성 장애입니다. “내 것을 빼앗길 때(자산)”, “나의 구역이 침해당할 때(영역)”, 그리고 “사람을 잃었을 때(관계)” 분노가 생기는데 일반적으로 정신과에서 진단하기를 6세 이상으로 일주일 2번 이상 3개월 넘게 폭언을 하거나 1년에 3번 이상 폭력을 쓰면 간헐적 폭발성 장애를 의심해봐야 한다고 합니다. 윗집에 아이들 발자국 소리가 난다고 칼 들고 찾아가면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운다고 패면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꼭 폭력적으로 표줄 되지 않고 억눌린 분노로 무기력감, 스트레스, 좌절감, 반감 등이 반복되어도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분노는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감정 중 하나지만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자주 반복되거나 폭력성을 동반한다면 '분노조절장애'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뇌의 편도체는 감정을 느끼고 전전두엽은 감정을 조절, 통제하는데 술에 취하면 알코올이 전전두엽을 기능을 마비시켜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고 술 먹고 분노를 폭발하여 기물을 파괴하는 것을 보는데 술도 먹지 않았는데 일주일에 2번 정도 폭언을 하고, 1년에 3번 정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면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정신과에서 일반적으로 간단하게 진단하는 간헐성 폭발장애 자가 진단표가 있습니다.
11가지 질문인데 이런 것입니다.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성격이 급하며 금방 흥분하는 편이다.
(2) 내가 한 일이 잘한 일이라면 반드시 인정받아야 하며 그러지 못하면 화가 난다.
(3) 온라인 게임에서 본인의 의도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난 적이 여러 번 있다.
(4) 자신이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좌절감을 느낀다.
(5) 타인의 잘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꼭 마찰이 일어난다.
(6)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7) 화가 나면 상대방에게 거친 말과 함께 폭력을 행사한다.
(8) 화가 나면 주변의 물건을 집어 던진다.
(9) 분이 쉽게 풀리지 않아 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10) 내 잘못도 다른 사람의 탓을 하면서 화를 낸다.
(11) 중요한 일을 앞두고 화가 나 그 일을 망친 적이 있다.
1~3개이면 감정 조절이 가능한 단계이고 4~8개이면 감정조절 능력이 약간 부족한 단계이며 9개 이상이면 분노조절이 힘들고 공격성이 강한 단계이고, 9개 이상에 해당할 경우는 전문가와 상담을 통한 약물치료, 인지행동치료 등을 고려해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분노조절장애는 혼자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정신적인 질병에 속합니다.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는 뇌의 전두엽이 손상됐거나 일시적으로 기능이 떨어졌을 때 분노가 제어되지 못하고 행동으로 발현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과에서는 감정 기복이나 충동을 조절해주는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 감정 조절 훈련 등을 통해 치료해 줍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아마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할 정도의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분노 조절을 잘하지 못하고 분개하고 몹시 성을 내 어려움을 당한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아동 학대, 학교 폭력, 데이트 폭력, 폭행, 살인 등 대부분 사건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노의 지뢰밭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분노를 잘 조절하고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면 치유받을 수 있을까요?
1. 분노조절장애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파괴적인 분노를 죄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상황을 자신의 왜곡된 인지로 해석하지 말고 타인의 시각,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반응해야 합니다(6).-하나님은 분노의 원인인 인지 왜곡을 고쳐주심으로 치유해주십니다.
분노를 나누어 보면 개인적 분노와 집단적 분노, 충동적 분노와 습관적 분노, 죄악된 분노와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분노에도 죄악된 분노가 있을 수 있고 의로운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집단적인 분노에도 죄악된 분노가 있을 수 있고 의로운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충동적 분노는 화가 나는 상황이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다혈질과 같이 화를 잘 참지 못하고 쉽게 분노를 폭발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이런 충동적 분노도 의로운 분노가 있을 수 있고, 죄악된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습관적 분노는 목적 달성을 위해 분노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학습한 결과 화를 내지 않을 상황에서도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떼를 쓰고 부모는 과잉보호하다 보면 습관적 분노조절장애자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고 폭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노는 대부분 죄악된 분노입니다.
그런데 죄악된 분노, 자신에게 해가 되고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병적인 분노는 왜 생기게 됩니까?
분노조절장애는 생물학적 원인에 의해 생길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도전이나 위협, 상처, 무시, 소홀, 부당한 처우, 공격 등을 느낄 때에는 사람은 화내고 방어하고 싸우는 본능적 요소가 있습니다. 이때 공격적인 호로몬인 프로락틴, 테스토체론, 노르에피네프린 등이 증가됩니다. 분노라는 흥분 상태가 되고 아드레날린이 증가됩니다. 그러면 혈압이 높아지며 심장박동수가 증가하고, 위협을 인지하고 이에 적합하게 반응하기 위해 신체기관이 대처반응을 준비합니다. 편도체에 들어오는 자극들은 전전두엽에서 과거의 기억과 비교되고 반응, 기대 해석되면서 조절이 됩니다. 과거에 학습된 것과 일치할 때 분노반응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분노는 불안 불편, 긴장 분개, 좌절 등의 감정과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발생한다고 합니다.
분노는 심리적 원인에 의해 생길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서는 크게 쾌의 정서와 불쾌의 정서로 구별됩니다. 쾌의 정서는 욕구 만족의 결과이고 불쾌의 정서는 욕구 불만족의 결과입니다. 인간은 욕구 충족을 위해 노력하다가 자신의 기대, 목표, 욕망이 무너지면 좌절하며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욕구 충족이 안 되면 분노가 생깁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 대접받지 못할 때, 먹고싶은 욕구가 좌절될 때 등 분노가 생깁니다.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때도 분노가 생깁니다. 동물이 자기 영토를 공격당할 때 분노하는 것처럼 자동차 운전을 하는데 끼어들면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대인관계에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생깁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할 때 분노가 생깁니다. 친구에게 부모에게 자식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무시당하면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손해를 보았을 때, 목적을 이루는데, 방해를 받았을 때 분노가 생깁니다. 위협이나 해를 받았다고 느낄 때 분노가 생깁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법이 평등하지 못할 때 정의가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될 때 분노가 생깁니다.
그런데 모두가 이런 대우를 받는다고 분노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분노조절장애를 앓는 것도 아닙니다. 분노는 왜곡된 인지구조 때문에 분노는 생길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나타난 결과입니다. 사건은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하고 반응하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장하면서 유전과 환경에 따라 비합리적 인지 구조, 왜곡된 신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부모와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어떤 사건에 터무니없이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감정을 폭발하게 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꼭지가 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이마고”라고 말합니다. 반영하고, 인정하고, 공감하는 이마고 부부 치료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어린 시절에 생긴 이마고를 반영하고, 인정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에게 물린 사람이 개를 만나면 두려워하듯이 자동적 사고가 생겨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가장 우선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어떤 사건을 인지하고 반응하는 스키마, 프레임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이마고에 관련된 상처가 건드려지면 즉, 비난이나 거절, 무시 등을 당하게 되면 현재 사건에 대한 적절한 분노보다 훨씬 더 큰 분노로 폭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상처는 분노 유발의 가장 강력한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언어적 학대를 받은 사람은 직장 다니며 상사가 충고하면 과도하게 분노를 합니다. 어머니에게 어릴 때 습관적으로 분노를 퍼부음 받았다면 자신도 자식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분노를 퍼붓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감각에 예민한 부분이 있는데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윗층에서 발소리만 나면 참지 못하고 분노가 폭발한다는 것입니다. 정보를 잘못 처리하는 것입니다. 임의적 추론, 선택적 추상화, 지나친 일반화, 과장과 축소, 흑백 논리,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준이 자신입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상황을 바라보며 분노하는 것입니다. 거절감, 열등감을 갖게된 것입니다. 자신이 거절당하고 존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생기게 됩니다. 상대와 비교하며 자아존중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왜곡된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에서의 주도권의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완벽주의 자일수록 분노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내 마음대로 안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되면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에게 화를 내고 그것을 풀기 위해 술을 먹기도 하고 각종 중독에 걸리기도 하며 심하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면 자신을 헤칩니다. 그 원인이 타인에게 있다고 하면 그 분노 에너지는 타인에게로 향하며 언어 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심하면 살인을 합니다.
파괴적인 분노의 원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내 마음대로”라는 자기 기준으로 해석하고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해석과 판단의 기준을 바꾸면 반응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차가 끼어들면 분노가 생기는데 내가 가는데 왜 방해하느냐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확장시키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이 급한 일이 있겠구나? 남의 입장에서 서보면 생각이 달라지고 반응이 달라집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더욱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그 사람에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있구나라고 시각을 확장시키면 전혀 해석와 반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조절장애에 걸리지 않으려면 평소에 타인의 시각,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지왜곡을 바꾸어야 합니다. 바르게 해석하고 판단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세요. 가인이 분노를 품었습니다(5). 몸시 분했습니다. 안색이 변할 정도로 심하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때 가인의 분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처방을 내리시고 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왜 분노하는냐? 왜 안색이 변했느냐? 이유를 물어보고 계십니다. 분노의 원인을 진단하여 치유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지왜곡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질병은 원인치료를 해야 완전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증상만 치료하면 완전 치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분노하여 동생을 죽이려는 그의 분노조절장애를 치유하기 위해 극단적 행동이 나오지 않도록 원인치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은 상황을 보고 분노하는 그에게 너 지금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분노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당하게 대우해 주었는데 자신은 부당하게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네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고 너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고 분노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대우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때문에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 마음이지 자기가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제사를 받지 않은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은 모르고 동생 때문에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는 분이십니다. 이미 가인의 마음은 열납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믿음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히 11:4), 자신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 앞에 합당한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에게 분노의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해로운 분노의 원인의 자신의 죄 때문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야 분노로부터 파생되는 불행을 미리 방지할 수 있습니다. 분노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할 때 분노의 문제는 종식이 되는 것입니다. 분노의 악한 고리가 끊어지고 더이상 불행한 결과로 발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해로운 분노를 어머니 때문이라고 아버지 때문이라고, 아내 때문이라고, 남편 때문이라고, 누구 때문이라고 자꾸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탕자의 형은 아버지가 동생을 사랑하니까 분노합니다. 성실하게 일한 자신에게 모든 재산을 주어야지 왜 탕자가 된 동생에게 주냐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성대한 잔치 한 번 안 해주고 왜 탈선한 동생이 돌아오니까 잔치를 해주냐는 것입니다. 평소에 열심히 교회를 위해 충성하던 사람이 문제가 생기면 선봉에 서서 분노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나도 니느웨가 망하지 않으니까 심히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분노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화부터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파괴적인 분노, 해로운 분노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7절에 보십시오. 죄라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분노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이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여러 부분에 심각한 불행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잠27:4)”라고 말씀합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잠14:17)”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14:29)”라고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잠29:11)”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욥19:29)”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욥5: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라고 물었을 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는 “나는 처음부터 내 동생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거짓말을 덧붙여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은 분노를 인정하고 분노를 풀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할 것을 말씀하지만(7) 그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지 못하고 동생을 살해해 버립니다. 그리고 결국 여호와 앞을 떠나(창4:16) 자신이 주역이 되는 하나님을 반항하는 성을 쌓고(17) 자기만의 세계를 꿈꾸며 척박한 땅에서 분노로 가득 찬 인류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2. 분을 품지 말고 분을 다스림으로 분노조절장애로 파생되는 불행한 인생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노의 과정이 파괴적으로 나가지 않도록 치유해 주십니다.
화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분노는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생존 수단입니다. 인간의 기본 감정인 희로애락(喜怒哀樂)가운데 하나인 '노'(怒)에서 연유된 감정입니다. 분노는 사랑, 흥분, 슬픔, 두려움, 불안, 평안과 같은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주어진 대표적인 감정입니다. 그 자체가 옳다거나 그릇 되다고 할 수 없는 기본적인 감정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표출되느냐가 의롭고 창조적인 분노가 될 수 있고 해로운 파괴적인 분노가 될 수 있습니다.
의로운 분노는 분노 자체가 죄는 될 수 없습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심히 노하는 장면이 출11장 4-8절에 나옵니다. 9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약속했다가 다시 번복합니다. 마지막 재앙을 선포하고 심히 분노합니다. 이런 분노는 단순하게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자에 대한 거룩한 분노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하면서 분노하는 장면이 느5:1-10에 나옵니다. 고리의 이자 놀이를 하고 백성을 착취하는 지도자들에 대하여 분노하며 책망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 군대를 향하여 거룩한 분노를 하고, 예수님께서 성전을 장사꾼으로 소굴로 만든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며 쫓아냅니다. 이러한 분노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유익한 분노이며 통제받는 창조적인 분노입니다.
'강한 불쾌감'으로 표현되는 파괴적인 분노는 그 강도에 따라 가볍게는 짜증나고 약이 오른 상태부터 원한, 분노, 분개, 격분, 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문제는 이 분노가 감정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괴적으로 발전하는 데 있습니다. 분노를 느끼면 얼굴이 빨개지고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세지며 핏대가 오릅니다. 분노는 적개심과 함께 행복의 파괴자, 많은 중병의 주요 원인되어 버립니다. 우울증, 비능률, 교통사고, 재정적 손실, 결혼 생활의 갈등, 강간, 살인, 가정폭력, 전쟁 등으로 발전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가인이 심히 분노합니다. 그 분노가 어떻게 발전합니까?
(1) 안색이 변합니다(5) 분을 품으면 화병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화병은 정신은 물론 육체와 생활에 큰 손상을 입힙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됩니다. 분노의 감정은 신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듀크 의대 연구 결과에 의하면 보통 사람에 비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20%가량 높다고 합니다. 심장병의 주요 발생 요인은 담배 술보다 분노가 더 큰 원인이라고 합니다. 월프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분노를 느낄 때의 위장의 점막은 충혈되고 운동이 증가되며, 위산 분비가 많아져서 마침내는 위, 장출혈과 궤양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하버드 의대의 연구에 따르면 가장 화가 났던 장면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도 좌측 전두엽 부위의 혈액순환이 감소한다고 합니다. 혈액순환이 잘 안 되면 뇌세포 활성이 떨어지고 그때부터 뇌의 손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미국 존즈.홉킨즈 대학 연구진이 1,000명을 조사한 결과, 걸핏하면 화내는 사람들은 55세 이전에 심장병에 걸릴 가능성이 3배, 심장마비는 5배 높았다고 합니다.
(2) 공격을 하게 됩니다(8).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공격하여야 하는데 사람을 공격하여 아벨을 쳐죽입니다. 분노가 자라면 결국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해로운 분노 에너지가 자신에게 향하면 자신의 몸을 해치게 되고 해로운 분노가 타인에게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3) 마음이 강팍해집니다(9). 뻔뻔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분노의 노예가 되면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조절장애에 빠지면 양심이 무디어집니다. 좋지 않은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고,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체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주어진 일을 원만히 수행하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관계를 단절해 버립니다.
그릇된 이유로 분노하게 되면 분노가 우리를 다스려 버립니다. 분노조절장애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우리 삶의 주요한 특징이 되어 버립니다. 곱씹어 속상해하고, 자신이 부당하게 대접받은 것에 대하여 계속해서 기억하고, 화가 나지 않은 척하면서 자기를 분노케 한 사람을 심하게 비난하며 힘없는 엉뚱한 대상을 공격하며 상처를 입히면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가 발전하여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그 고리를 끊고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죄의 소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범죄행위로 발전하지 않도록 분노가 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분노를 다스려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에베소서에서는 어떻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 4:26-27)" 직역하면, ‘분을 내어라, 그러나 죄를 짓지는 말라, 해가 너의 분 위에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분을 낸다고 할지라고 해가 지기 전에는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습관화 되고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분을 내라고 권장하는 말은 아닙니다. 참을 수 없어 화를 낼 수 있으나 그것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분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정서이지만 감정에 이끌려 쉽게 분노를 표현하다 보면 서로 아픔을 경험하게 되고 죄를 범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라도 마귀가 틈타도록 분을 품고 있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귀는 중상하고 비방하는 자입니다. 분노에 빠지는 것은 마귀에게 자유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분노가 죄가 되도록 분노를 처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분노를 관리하라는 말입니다. 모세는 의분으로 애굽사람을 처 죽였습니다. 의분으로 십계명을 부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므리바에서 백성이 물 때문에 원망할 때 분노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분노 자체보다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의분이라고 혈기, 폭언, 폭행, 살인을 하면 안 됩니다. 분노가 이기적인 미움과 원한 보복으로 드러날 때 무서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분을 품으며 복수를 계획해서는 안 됩니다. 가능한 한 속히 해결해야 합니다(시4:4). 해가 지도록 품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는 잘 다스려야 합니다. 분노가 마음을 분노의 노예로 만들도록 자리 잡지 못하게 하고 노가 일어나 자라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는 심령의 상태, 복수심을 가진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시, 그 분을 처리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분노가 파괴력을 가지고 이성을 마비하고 신앙을 무기력하게 하고 자제력을 상실하게 하여 분노의 노예로 삼을 수 있도록 방치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분노의 감정은 15초 후면 시들어지고, 대부분 15분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때를 분노가 파괴적으로 언어를 통해, 행동을 통해 나가지 않도록 심호흡을 하며 15번을 세는 것입니다. 그 분노의 감정이 마음 속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운동으로 풀어 버리는 것입니다. 분노의 상황을 피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다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분노를 말하면서 에베소서에서는 바로 성령 충만을 말씀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분노가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우리의 감정을 분노의 노예로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엡5:18절을 보십시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 마음을 성령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뿐아니라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분노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찬양하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분노조절장애에서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여야 하며(딤전 2:8), 감독들에게는 ‘급히 분을 내어서는 안될 것을 가르쳤(딛1:7).”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위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는다(마 5:22)”고 하였습니다. 다툼을 금하고 노하기를 더디하라고 말씀합니다. 부드러운 말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원수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3. 분노의 에너지를 선을 행하는데 사용함으로 분노조절장애로부터 치유받아야 합니다(7).-하나님은 분노를 창조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치유해 주십니다.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노가 죄를 짓는 도구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분노를 처리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1) 내적 억제형 (2) 외적 표출형 (3) 자기 주장적 표현형입니다.
1) 내적 억제형은 분노를 의식적으로 억제하는 방법입니다. 끼어들기 하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렇다고 양반 체면에 싸울 수 없고 핸들을 잡고 그 사람 목이라고 생각하고 목 비틀 듯이 가는 것입니다. 복식호흡하고, 근육 이환 훈련을 하며, 재미있는 것을 상상하고, 세수를 하고, 차를 마시며 내부적으로 삭히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고, 아니면 기대가 좌절되어 화가 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되 불쾌한 감정이 무절제한 행동이나 말로 발전하는 것을 막고 분노를 절제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한다고 했습니다. 단기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억제하면 결국 분이 쌓여 화병이 되고 그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까지 해치게 됩니다.
2) 외적 표출형은 파괴적 반응으로 분출시키는 것입니다. 화나면 폭언을 퍼붓고 끼어들기 하면 개 아들이라고 욕을 하고, 가지 않고 서 있으면 자리 펴고 자고 가라고 한마디 합니다. 그것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차를 세워놓고 싸우고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공기총으로 쏩니다. 이 방법이 가인이 쓴 방법입니다.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들에 나아가 아우를 쳐 죽입니다(8). 분노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1) 동생을 잃습니다(8). 가족을 잃는 손실을 보게 됩니다. (2) 살인 죄인이 됩니다(8). 인류 최초의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3) 형벌을 받습니다(11).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아 효력을 얻지 못합니다. 땅에서 유리합니다. 외롭습니다. 아무도 상대를 해주지 않습니다. 13절에 보니 형벌이 중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4) 외로움에 빠집니다(12절).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 옆에 가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주변에서 마음이 멀어집니다. (5)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14). 피해자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쌓이게 됩니다. 폭군 쳐놓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6) 모두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부모인 아담과 하와에게 상처를 주고 후손들 우리까지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분노는 전염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화를 잘 내는 자와 어울리지 말고 쉽게 성내는 자와 사귀지 말라(잠22:24,25)고 말씀합니다.
분을 품고 있는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라고 했습니까? 7절에서 말씀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분을 품고 있는 그를 향하여 선을 행치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마음을 지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엎드려 먹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죄지을 기회를 노리는 것입니다. 분으로 악을 행하면 분노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분노조절장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분노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분노를 건설적으로 발산해야 합니다. 죄의 방법이 아니라 분노를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발산해야 합니다.
3) 자기 주장적 표현형으로 분노를 풀어야 합니다.
분노를 무시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억압한다고 억압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를 무시하고 억누르면 문제는 더 악화되고 곪아터질 뿐입니다. 폭발시킨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다 결과적으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를 해칩니다. 남을 해칩니다.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자신을 병들게 합니다. 정직하게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통해 일어나는 감정을 조절하라는 것입니다. 문제와 사건 자체에 묶이면 분노는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와 사람을 분리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용서하라고 합니다.
4) 성경적 방법으로 창조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선한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분노 일기를 쓰고, 소리를 지르는 것가 같은 건강한 방법으로 화를 발산하고, 걷기, 청소하기, 수영, 농구 등과 같은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명상하기, 성구 암송,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 등과 같은 좋은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한나가 원통한 일을 당할 때 우리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풀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기도의 통로를 주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억울하게 갖혀있을 때 찬양한 것처럼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 사람 보는 것 아닙니다. 분노가 폭발될려고 할 때 사람보는 것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노의 노예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참 해방을 주십니다. 분노조절장애를 치유해 주십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분노조절장애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파괴적인 분노를 죄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상황을 자신의 왜곡된 인지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6).-분노의 원인, 하나님은 인지 왜곡을 고쳐주심으로 치유해주십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분을 품지 말고 분을 다스림으로 분노조절장애로 파생되는 불행한 인생을 만들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과정 해방, 하나님은 분노의 과정세서 죄를 짓지 않도록 치유해 주십니다.
3. 하나님은 분노의 에너지를 선을 행하는데 사용함으로 분노조절장애로부터 치유받기를 원하십니다(7).-결과 해방, 하나님은 분노의 에너지로 선을 이루도록 치유해주십니다.
갈등의 시작
창 4장 1~15절 / 김상복목사
여러분은 195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존 스타인벡이 쓴 '에덴의 동쪽'이라는 소설을 아실 것입니다. 그 3년 후에는 영화로 만들어져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작년에는 우리 교회의 나연숙 권사님이 쓰신 ‘에덴의 동쪽’이라는 작품이 MBC에서 미니시리즈로 방영되었습니다. 제가 TV를 잘 안 보는데 우리 권사님이 쓰셨기 때문에 빠짐없이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문제는 에덴동산 같은 좋은 가정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이혼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혼을 제일 많이 하고 출산율도 제일 낮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가정들이 흔들리고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에덴동산에서 결혼했을 때는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그들의 가슴속에 죄성이 생기고 악한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되자 부부의 관계가 힘들어졌습니다. 살을 맞대고 살면서도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자 아담은 “숨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왜 숨었느냐?” “겁이 나서요. 저를 혼자 있게 그냥 놔두시지 왜 여자를 만들어서 저와 결혼하게 하셨습니까? 물론 제가 처음에는 좋아서 그 여자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건 옛날이야기고요, 하나님이 저와 같이 살라고 하신 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 잘못은 없습니다. 마귀의 잘못이요 제 아내의 책임입니다.” 하와는 ‘그 여자’가 되었고 시작은 참 좋았는데 부부 사이는 힘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우리 시대 제 부모님도 자녀 9명을 낳으셨는데 그 시대에 천년을 산 아담과 하와 부부는 자녀를 얼마나 많이 낳았겠습니까! “어떻게 천년을 살아?” 하시겠지만,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그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죄가 들어가 사람의 인자가 파괴되어 겨우 천년을 살게 된 것입니다.
가인을 낳고 아담과 하와는 매우 기뻤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 온 가족이 기뻐했습니다. 한 인간이 태어났으니까 기뻐할만하죠. 인간은 영원한 존재요, 우주 전체를 다 합한 것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하와도 첫 아들 가인을 낳고 너무 기대가 커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절)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아들을 얻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한국어와 영어의 번역문입니다. 번역자들이 어떻게 번역할지를 몰라서 말을 좀 보탠 것입니다. 구약성경 히브리어 원문의 문자대로 하자면 “내가 여호와 아들을 낳았다”입니다. 번역자들은 ‘여호와’는 하나님을 이르는 것인데, 여호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었다”는 해석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아들을 낳았다”는 무슨 말인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앞으로 후손을 낳을 것인데, 악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고 파멸시켜버릴 구원자가 너를 통해서 나올 것이다.” 악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세상을 이길 최후 승리자, 죄에서 인간을 구원할자가 하와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는, 즉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 예언입니다. 이것을 ‘원복음’(Ur-evangelium)이라고 합니다. 하와는 이 예언을 듣고 얼마 있지 않아 임신을 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구원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아이가 바로 그 아이 이구나!” 얼마 후에 아들이 태어나자 하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메시아, 구원자, 여호와, 그 아들이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기뻐했던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가인이 태어났을 때 너무 기뻐서 “여호와 아들을 내가 낳았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어서 알듯이 하와의 아들 가인은 여호와 아들, 구원자, 메시아가 아니라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동생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그는 가정에 엄청난 고통과 불행을 불러왔습니다. 가족문제가 생겼습니다. 부부 사이가 나빠지자 형제 사이도 나빠져서 결국은 그렇게 기뻐하며 여호와 아들이라고 불렀던 아들이 동생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죽을 때까지 평생 얼마나 큰 고통을 느꼈겠습니까!
여러분도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몹시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나의 삶 속에 부모의 가슴을 찢고 부모를 섭섭하게 하고 괴롭히고 한숨을 짓게 하는 가인의 모습은 없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부분이라도 이런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서서 우리 부모들이 기뻐했던 그 아들과 딸들이 되도록 변해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 형과 동생 사이에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옛날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전쟁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야곱이요 아랍은 에서입니다. 형제지간의 전쟁입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은 또 무엇입니까? 같은 언어, 같은 문화, 같은 민족, 형제지간입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처럼 우리는 아직도 남북 간에 휴전상태로 있으면서 서로 해칠까봐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금강산 구경을 가서 생각 없이 해변을 걷다가 뒤에서 쏜 총에 맞아 숨지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았는데 여동생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고 84세 된 노모만 맡겨 버립니다. 생활비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형제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살인적 가인이 있고 희생양 아벨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형이 사장입니다. 동생이 머리가 좋아서 좋은 상품을 연구하여 만들어 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회사가 잘 안 됐습니다. 3년 정도 배당금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 그 물건이 잘 팔려서 큰돈을 벌기 시작하자 형은 계산방식을 바꿔서 동생에게는 한 푼도 안 주고 이익금을 혼자서 다 챙겼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가인이 있고, 희생을 당하는 아벨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어딘가 가인의 모습이 있다면 곧 회개하시고 돌아서야 합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내 가정을 깨고 형제간의 관계를 깨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여기저기 있습니다.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여호와 아들"이 동생을 죽이는 일이 있습니다. 가정의 불화입니다.
가인은 어떤 존재입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만 삽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나의 발전과 성공과 인기를 위해 존재하고 내가 잘 살기 위해 그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이 우주와 역사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 멋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가인아,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제가 어떻게 압니까? 난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 왜 동생을 죽였어? 너 한 번 죽어 볼래?” 하시지 않고 그저 좋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가인이 ‘내가 동생을 죽이고 묻어버렸지. 내가 어쩌다 이런 일을 했나?’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님, 제가 동생을 질투해서 제 동생을 때려죽이고 저 밭에 묻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이다니요! 용서해주세요”라고 회개했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터인데, 가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난 몰라요!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동생을 지키라고 나를 첫 아들로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동생은 동생이고 나는 나입니다. 내 동생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난 내 맘대로 살 것입니다”라고 반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할 때에도 친구들이나 각종 사건, 또는 목사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살인자라도 회개하고 돌아서면 새 인생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새롭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여러분, 가인은 동생을 지켜야 하는 자가 맞습니다. 형이 동생을 지켜줘야지요. 언니가 동생을 지켜줘야지요. 우리는 가족입니다. 가족이 어려움을 입을 때 지켜주는 것이 마땅하지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나만 잘 살면 그만이지 가족에 대한 책임을 왜 나에게 묻습니까?” 자기중심적이요, 이기주의요,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묻습니까? 회개하라고 묻는 것이지요.
이런 종류의 사람은 하향적인 인간이 됩니다. 하향적인 인간이란 고개를 떨어뜨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죄가 분을 일으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5절). 잘못은 자기가 저질러놓고 자기가 화를 냅니다. 죄는 인간의 가슴을 무겁게 만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7절). 그래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삽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우리 속에 가인의 모습이 보일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을 통해, 환경을 통해,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면 바로 돌아서십시오. 돌아서지 않으면 결과는 파멸뿐 입니다. 방황하는 인간, 하향적인 인간, 파괴적인 인간이 되어 결국은 동생뿐만 아니라 온 가족을 망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 우선주의입니다. 상향적인 존재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얼굴을 들고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두 종류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이기적, 인본주의적으로 자기 유익만 추구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은 가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벨은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4절).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데 농부인 가인은 자기가 농사지은 곡식을 드렸고 아벨은 양을 드렸습니다. 양을 드리되 “양의 첫 새끼를 바쳤다”고 했습니다. 몇 마디 안 되는 단어이지만 이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양을 키우기 시작한 아벨이 자기가 기른 양이 처음 새끼를 낳자마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양이 첫 생명을 낳았다. 이것을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첫 새끼를 드린 것입니다. 세 번째 새끼도 아니고 몇 년 후에 낳은 새끼도 아니고 첫 새끼를 먼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언제나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기도를 합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에게 또 하루를 주셨군요. 지난밤에도 저를 지켜 주셨군요. 이 아침에 저에게 건강을 주시고 제 발로 걸어서 하나님의 교회에 갈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직장을 얻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능력 주셔서 그동안 공부하게 하시고 능력을 갖추어 이곳에서 일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교회 젊은이들 중에서 직장을 얻어 첫 월급을 받으면 그것을 저에게 가져오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이것이 제가 태어나서 처음 받은 월급입니다. 한 달 일하고 받은 첫 월급을 하나님께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저 헌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젊은이가 헌금을 안 해도 다른 교인들이 얼마든지 헌금합니다. 소중한 것은 그 젊은이의 마음이요 태도요 그의 삶의 모습입니다.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도 하나님이요, 나에게 부모를 주신 것도 하나님이요, 나로 하여금 부모를 통해서 공부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요, 나에게 능력 주셔서 공부를 감당하게 하시고 이제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다녀서 월급을 받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이 직장이 하나님께서 주신 직장임을 알고 제가 이 직장에 하나님의 은혜로 반드시 축복이 되고 이 직장의 사람들이 나 때문에 복을 얻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아벨입니다.
양의 첫 새끼, 첫 열매, 첫 아들, 첫 수입을 놓고 우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이 모습이 바로 신본주의(神本主義)요, 아벨 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단순히 창세기의 이야기가 아니며 이 두 종류의 사람은 오늘도 이 땅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찬송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살려고 하는 결단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요 아벨의 은혜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우리 욕정대로,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살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선을 도모하며 살 것인지, 내 가정의 행복을 이뤄가며 살 것인지, 이것을 날마다 선택하며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 우선주의는 상향적인 인간을 만듭니다. 적극적인 선을 행하면서 미리 악을 막아 가는 것이 선한 삶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7절). 문 밖에 죄라는 맹수가 한 마리가 엎드려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나오면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잡아먹고 나를 망치고 나를 해치고 내 가정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죄입니다. 마귀와 악과 세상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해치기 위해서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여러분에게 달려들어 공격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죄와 악과 사탄과 세상의 욕정에 물어 뜯겨서 고통을 당합니까? 우리의 가정을 파괴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금만 잘못하거나 기회를 주면 죄는 문 밖에 엎드려 있다가 여러분에게 달려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7절)고 했습니다. 죄라고 하는 맹수의 소원은 나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죄를 다스릴 것인지, 죄가 너를 지배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너의 선택이요 너에게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가인과 아벨이나 아담과 하와에게만 자유와 선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도 오늘 자유와 선택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존중히 여기시고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셔서 선과 악을 택할 수 있고, 하나님과 마귀를 택할 수 있고, 행복과 불행을 택할 수 있는 선택권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시간에 가인이 원했더라면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는 죄를 다스리라”는 말을 들은 가인은 오히려 죄를 다스리지 않고 화를 내며 동생을 들로 데려가 때려죽이고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렸습니다. 죄를 다스리라고 했는데 오히려 죄에게 잡아먹혔습니다. 죄에게, 욕정에게, 분노나 질투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됩니다. 잡아먹힙니다. 악을 저지르고 망합니다. 가정들이 어지러워집니다.
큰 결정이나 큰 선택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매일 크고 작은 선택의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택할 것인지 세상을 택할 것인지, 악을 택할 것인지 선을 택할 것인지, 사랑을 택할 것인지 미움을 택할 것인지,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아무도 여러분 대신 선택해 줄 수 없습니다.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 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은총 주셔서 가인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요일3:12-15). ‘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너희는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을 가슴에 모신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셔서 모두 사랑이신 하나님을 가슴에 모시고, 그 사랑이 여러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족들에게 흘러나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형이 동생을 때려 죽였습니다.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야 할 형이 동생을 죽이는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종종 아벨이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선을 도모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손해를 보는데도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 달 전에도 나이지리아에서 무슬림들이 250명의 기독교인을 죽였습니다. 지난주에는 인도에서 또 2명을 죽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냥 모여서 예배를 드렸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도모하며 살려고 하는데도 사탄과 악이라는 맹수 때문에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재판장입니다. 하나님께는 정의가 있습니다. 정의의 하나님은 반드시 정의를 행사하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피해도 참고 견디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선을 베풀며 용서하는 것이 아벨의 후손들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 주셔서 아벨의 축복이 우리 가정에 꼭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가인의 종교와 아벨의 종교
창 4장 1~8절 / 피영민목사
서론
인간은 왜 병들고 죽느냐? 하와가 뱀에게 속아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와의 남편인 아담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우리를 원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습니다. 죄와 사망이 인류에게 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 저주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위대한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은 '원복음'이라고 불립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후손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복수와 단수 두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offspring’은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을 다 가리키는 것으로 복수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seed’는 단수를 의미합니다. 즉, 창세기 3장 15절의 앞부분에 나오는 후손은 복수이고 뒷부분의 후손은 단수인 것입니다. 복수를 의미할 때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대대로 적대감을 가지고 갈등하게 될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단수를 의미할 때는 사단이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말씀의 의미를 얼마나 깊이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가인이라고 붙였습니다. 가인은 히브리어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아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아들을 얻었다. 이 아들이 여호와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본인을 하나님 즉, 여호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보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는 메시아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낳고 여호와라고 한 것은 바로 메시아를 얻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낳고 또 아들을 낳아 아벨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벨이 가인의 아우인 것은 틀림없지만 둘째 아들인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자녀를 또 낳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4절에 보니까 아담이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고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90살이 되어 경수가 끊어져 출산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이삭을 낳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런 기적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800년 동안 계속해서 낳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이 둘째 아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벨이 죽고 나서 하나님이 셋을 주시고, 셋 다음에 800년 동안 자녀를 낳았다고 했으니 둘째 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는 방식은 구원역사에 중요한 인물들만 기록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빼버리기 때문에 둘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벨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허무’입니다. 아벨을 낳을 때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헛되다는 것을 깨달아서 아벨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담과 하와는 가인이 메시아일 것이고 아벨은 별로 의미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자식 중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지 않으시고 그냥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낳았다고 생각했던 자녀를 쓰시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다윗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이새와 그 아들들을 초청했는데 이새가 다윗은 부르지도 않습니다. 다윗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여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볼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하나님이 크게 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메시아가 아니고 마귀에게 속한 뱀의 후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말씀하신대로 이 둘 사이에 적대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적대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결국 둘 사이의 적대감은 인류 최초로 살인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의 유사점이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가인과 아벨의 유사점
먼저 가인과 아벨은 세 가지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은 모두 종교적인 존재였습니다. 사람은 뱀의 후손이든 여자의 후손이든 모두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 3절에 보면 세월이 지난 후 가인과 아벨은 각각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은 공동번역을 보면 ‘때가 되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제물을 드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왔을 수도 있고 추수할 때가 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아무리 종교를 외면하고 없애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학교는 없어져도 종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종교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가 싫다고 하는 그 사람도 종교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종교를 갖고 있는 종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냐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는 종교냐 그 차이 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렸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것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유화’(宥和, propitiation)라고 부릅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도 유화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 사기를 쳐서 에서가 받을 축복을 모두 가로챘습니다. 그 뒤 형이 무서워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밧단아람이라고도 불리우는 하란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아내를 넷씩이나 얻고 자녀를 열두 명이나 얻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제물을 얻어서 돌아오는데 에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것입니다. 20년 전에 자신의 축복을 빼앗은 아우를 그냥 두지 않겠다며 진노의 진군을 해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양떼와 소떼 중에서 일부를 먼저 앞으로 보냅니다. 그것을 받고 형의 진노가 누그러지길 바랬던 것입니다. 사람이 성질을 내다가도 누가 좋은 선물을 주면 진노가 풀리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쓴 정책이 바로 유화정책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양심 속에 죄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제물을 드렸다는 점이 두 번째 공통점입니다.
셋째, 두 사람 모두 제물이 하나님에게 열납되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가져갔는데 받지 않고 물리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가인과 아벨도 하나님이 제물을 열납해주시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피가 없는 곡물로 제사를 드린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양을 죽여서 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열납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기 제물은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인은 심히 분노하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왜 분노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가인은 아벨을 향해서 분노했고 자기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해서도 분노했습니다. 가인의 종교는 하나님이 거절하셨고 아벨의 종교는 하나님이 열납하신 것입니다.
Ⅱ. 가인과 아벨의 차이점
가인의 종교와 아벨의 종교의 차이점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은 내면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4). 아벨은 믿음이 있었지만 가인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까? 아벨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메시지를 믿었고 가인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메시지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하나님에게 오려면 짐승을 죽여서 피를 흘려야 올 수 있다는 것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아벨은 믿었고 가인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의 내면이 달랐던 것입니다.
둘째, 내면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외면적으로 제물의 차이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미국의 대 신학자인 프린스턴의 신학교수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가 한 사람의 내면과 외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내면의 믿음이 있었으므로 피의 제물을 드린 것이고 가인은 내면에 믿음이 없었으므로 피가 없는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5). 하나님은 가인이란 사람도 열납하지 않으셨고 그 제물도 열납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셋째, 두 사람은 속한 자가 달랐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아벨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 3:12). 가인은 마귀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마귀에게 속하여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속했습니까? 마귀에게 속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중간은 없는 것입니다. 가인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피가 없는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피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Ⅲ. 갈등의 결과
하나님이 가인의 종교를 물리치시고 아벨의 종교를 열납하시니 가인이 성질을 내고 안색이 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가인이 분노하자 하나님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느냐며 악을 행하였으니까 낯을 들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 중에도 부모 앞에서 도망가고 부모 얼굴을 안 보려는 사람은 틀림없이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선을 행치 않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낯을 들지 못하는 것이라며 선을 행한다면 낯을 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가인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데 왜 계속 그 종교를 고집하느냐며 종교를 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는 종교는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로 바꿔야 합니다. 종교를 바꾸지 않고 믿음 없이 살면 죄가 맹수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그 사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는 종교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국 죄에 사로잡혀서 죄를 짓고 살다가 죗값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음에도 종교를 바꾸지 않았고 결국 죄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 4:8). 가인과 아벨은 갈등을 겪지만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일방적으로 아벨을 미워해서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벨이 가인을 미워했다는 이야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여자의 후손들의 마음속에는 분노나 미움이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분노와 미움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하고 있다면 그것은 뱀이 준 마음인 것을 알고 갖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리어 축복해야 합니다.
결 론
인간이 살아가면서 종교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적인 갈등 같아보여도 사실은 종교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종교를 삶의 변두리에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쫓아내려고 해도 종교는 삶의 변두리로 쫓겨나지 않습니다. 종교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종교는 우리 삶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는 종교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로 바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낯을 들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종이 되어 살다가 스스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믿음은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생각을 글로 적어보면 첫 페이지와 끝 페이지의 내용이 모순되고 다 틀립니다. 읽어볼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구원의 길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죗값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이 죄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만 제물로 받으시지 흠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우리의 죗값을 갚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되셨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는 제사를 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받으시고 이제부터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악한 마귀에게 속하여 악한 마음을 품고 살다가 저주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인의 종교를 따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아벨의 종교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은 우리 신자들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신자를 미워하면 안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증거입니다.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으면 그것이 하늘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상은 예수님을 믿고 고생한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을 믿고 핍박받은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항상 복음 앞에 살아야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교만해지려고 할 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교만이 겸손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에게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생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과 원수 노릇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 삶에 끊임없이 적용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를 믿고, 그 종교를 귀중히 여기시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창 4장 1~10절 / 김서년목사(벧엘교회)
우리 옛말에 ‘사촌이 논을 사면 어떻게 된다’는 그런 말이 있지요. 이 말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렇다고 여기십니까?
우리 사람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공통된 습관 가운데 아주 고치기 어려운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나?”하고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과 나를 비교해서 실망도 하고 고민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좀 못 먹고 못 입어도,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을 때에는 나는 아무런 괴로움도 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서 저보다도 연세가 높으신 분들은 모두 다가 6․25때 피난살이하던 기억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 때를 돌이켜 보세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까?
그러나 그 피난길에서 그 굶주림과 고생을 하였어도, 한 사람도 인생살이에 대해 불행을 논하거나 심각히 고민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당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때에 비교해서 지금 사는 우리들을 한번 살펴보세요. 비록 아직 집을 장만하지 못하여 셋방에 살거나 전셋집에 산다고 해도, 우리 모두가 그 때에 비하면 몇 십 배나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있으며, 몇 백 배나 더 잘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에 비해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 몇 십배 몇 백 배나 더 행복함을 느끼며 살고 있어야 할 것인데,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현재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있어도 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입고, 더 잘 먹으며, 더 좋은 집에서 살면, 나는 마치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사람 마냥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어느 사회학자는 “상대적 빈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이 상대적 빈곤관념 때문에 사람들은 남에게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이 불행을 느끼는 큰 병의 실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에 나타나는 가인의 경우가 바로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계시지요. 그가 누구입니까? “인류 최초의 살인자!!” ― 왜 그는 살인자가 되고만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원인을 보게 됩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동생에게 너무 신경을 쓰며, ‘비교하고 경쟁하려는’ 여기에서부터 죄악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 자기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경쟁하는 이 마음 때문에,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자기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만 것이지요.
먼저 본문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서로가 다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음으로 농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었음으로 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두 사람 다 모두 ‘자기의 소산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제사는 받으시고, 다른 한 사람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는가?”―우리는 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먼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보다는 양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를 더 좋아하시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그 ‘제물’ 때문에 곡식은 거부하고 양을 받아들이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과연 그렇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양을 드리는 번제가 아니라서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사를 드리는 방식을 소상히 말해주고 있는 레위기에 보면, 양을 드리는 ‘번제’뿐 아니라 곡식을 제사로 드리는 ‘소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사야 1장 11절과 12절 말씀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하나님께서는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라고 해서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신 것은 그들의 제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여러분, 자세히 읽어보세요. ‘아벨의 제물’―‘가인의 제물’이라고 쓰여있지 않습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 그리고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 ‘아벨’을 받으시기에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며, ‘가인’을 받지 않으시기에 ‘그가 드리는 제물’을 따라서 받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들의 ‘마음의 자세’가 원인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드린 제사’란 어떤 제사였을까요? 여러분은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 원어로 보면 ‘믿음’이란 이 단어가 ‘진실’과 ‘충성’이란 단어와 철자 하나 틀리지 않은 동일한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진실’이며 ‘충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중심’을 바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이 ‘중심’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은 어떠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바로 이 말씀을 토대로 해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가인이 어떠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을까?’ 하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인은 처음부터 제사를 드릴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동생 아벨이 제사를 드리니까 자기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형식만을 갖추어 정성이 없이 드리지 않았나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 있는 것처럼 “이웃이 굿을 하니 덩달아 굿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늘 주위의 눈치만 살피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드린 예배’가 아니라, ‘형식만 갖춘 예배’가 되어버리고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 ― 그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호세아 6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미가서 6장 8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번제나 수양의 기름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고, 사랑을 베풀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예배하는 이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에 임하는 나의 중심! 나의 정성! 나의 마음가짐!! ―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가인은 깨닫지를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의 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드려지지 못한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그 예배가 자기 중심을 드리는 것이며 믿음으로 드린 것이기에 하나님께 열납 되었다면, 가인의 제사―그 예배는 남이 하기에 체면상 따라하는 것으로서 자기의 중심이 드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믿음이 없어서 상달되지 못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에 얼마나 힘을 기울이는가? 얼마나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 말씀을 생활화하는 ‘아멘’으로서 삶에 연결시키고 있는가? 헌금 속엔 얼마나 나의 진심이―바른 신앙고백이 담기고 있는 것인가?!!
믿음이 없는 제사, 진실이 없는 행위!! ―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을 보면, 여기에 또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몹시 분하여 하였고, 그뿐 아니라 안색까지 변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어찌하여 분하여 하며 안색이 변했느냐? 네가 선을 행했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굉장히 뼈가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네 자신이 더 잘 알텐데 왜 안색이 변했느냐?”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문제’이지 ‘아벨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이든 먼저는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문제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말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직선적인 관계에 있어야 할 자신이, 그 관계가 잘못 되었다면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거나, 누구를 원망하며 분을 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인이 아벨에게 화를 내고 그에게 분풀이를 한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눈치를 보며 원망을 하게 되면, 거기에서부터 우리 인간의 자기 상실은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불행이 있게 되고 원망이 있게되는’ 원형적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물론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불신앙과 정성이 없었기 때문이지 아벨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벨의 제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랬더라면 가인을 아무런 괴로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벨의 것은 받아들여지니 그 사실에 분을 내며,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있는 문제의 그 책임을 오히려 아벨에게 돌리며 얼굴색을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런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잘된 일은 언제나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며, 잘못된 일은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며, 혹은 환경을 탓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를 보니까, 아이가 뭘 좀 잘하면 다 자기를 닮았다고 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또 공부 좀 못하면 ‘네 애비를 닮아서’ ‘엄마를 닮아서’ 또는 ‘조상 잘 못 만나서’ 네가 이렇게 요 모양이라고 원망하는 말들을 하더군요.
그러나 겸손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잘하든 잘못하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지 그 누구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약하여 지거나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부족함과 나 자신의 정욕 때문이지, 그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을 원망하고 핑계하며, 책임을 남에게로 돌리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간의 ‘깊은 죄성’이 있는 것입니다.
밀턴이 지은 ‘실낙원’이란 책을 보면, 우리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이렇게 재미있는 상상을 하고 있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늘나라로부터 쫓겨나서 돌아다니다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이제 자기가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갈 기회를 영영 못 가질 것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인간을 범죄토록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들도 범죄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시 하늘로 부르실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사탄의 마음이 바로 가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순간 아담은 그 죄를 하와에게 전가시켰습니다. 하와는 또한 그 죄의 책임을 뱀에게로 전가시켰습니다. 바로 이 버릇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우리 인간의 ‘죄의 버릇’이 아닙니까?
자기가 지은 잘못을 남에게로 할 수만 있으면 전가해 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불의’가 ‘죄’가 되는 것은 저기에 ‘의’가 있기 때문이며, 내가 ‘거짓된 사람’이 된 것은 여기에 ‘진실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요한복음 3장 19절은 이렇게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 그래서 의인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악한 사람은 그 옆에 착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사람도 죄를 범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로 인해서 바로 ‘자기의 악함’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이지요.
가인을 보세요. 내 제사가 정죄 당한 것은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인의 마음이었습니다. “저 아벨만 없으면 아무 일 없을 텐데……!” 그래서 아벨을 죽여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또 자기의 불의를 정당화해 보려고 하는 가인의 이 마음! ― 그것은 바로 질투하는 마음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 때문’이라고 핑계하거나 누구를 미워하거나 하기 전에, 언제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다음 장면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왜 이 같은 질문을 하셨겠습니까? 몰라서 물으신 것입니까?
아니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벨이 죽은 것을 몰라서 물으신 질문이 아닙니다. 바로 가인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 것이며, ‘네가 아벨과 지금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 하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책임’과 ‘그 관계’를 물으신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가인은 매우 유감스러운 대답을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 이것은 아주 그럴듯한 논리의 대답입니다.
너는 너 자신이지 네 아우, 네 이웃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없다. 이웃의 가난이, 다른 사람의 잘못이 어찌 내게 책임이 있는가? 나는 나로서 나만 선하면 되고, 내가 내 자신에 대한 책임만을 지면 되지 않는가? 우리 주위에는 자기에 대한 책임도 못 지는 자가 수두룩하지 않는가?
그래서 가인은 말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바로 이런 순간이 얼마나 무서운 순간인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책임 회피의 대답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죽어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세요. 부모된 자로서 자녀에게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녀에게 평생에 씻지 못할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때로는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서도 진실하게 살지 못함으로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시키기도 하며,
또 앞으로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에게 대한 전도의 길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너무나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도하는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어떤 그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말하여, 그래서 그 사람 때문에 교회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경우를 여러분 심각히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그 사람들의 영혼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 이것은 바로 살인입니다!!
우리는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이 죽어갔을까?’ ‘나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셨는데, 내가 마땅히 발했어야 할 향기로서의 책임을 하지 않음으로 얼마나 많은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 죽고 있는가?!!’ ―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인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고 책임 없는 대답을 할 때에 하나님은 무섭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너에게 책임이 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혹 “나는 가인처럼 아벨을 죽이는 일 같은 것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이웃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괜찮다”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꼭 ‘내가 한 일’에 대한 책임만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일’과 함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한 것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물으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으세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 물음은 직접적 나의 행동에 대한 피해자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입히게 된 피해자, 나아가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 때문에 입게 되는 피해자에게도 적용되는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나는 혹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며, 마음을 아프게 하며, 이웃을 잃어버리며, 궁극적으로 그 영혼을 죽게 하는 살인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 자신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꼭 칼 같은 흉기가 아니더라도, 말로 살인하며 붓으로 살인하며 행위로 살인합니다. 내가 던지는 말,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행동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
성경은 이런 것을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 혼자서 믿고 천당가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덕을 끼치고 유익을 끼치고, 우리 주님을 닮아 온유하며 겸손하기에 더욱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지못해서 믿는 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그 귀한 은총을 이미 받은 우리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기에, 그 사랑의 역사가 내게서 넘치기에, 그래서 그 은혜에 살고 그 은혜에 보답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적극적으로 건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여기에 적극적으로, 또한 구체적으로 대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 벨
이동휘목사 / 창 4:1-10 (히 11:4)
1.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입니다. 하나님이 최종 심판자시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동기와 말과 행동을 살펴보시고 평가하실 때, 우리는 아벨처럼 칭찬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의 형 가인처럼 유죄 선고를 받을 것인가?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에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었는지, 어떤 일을 했었는지를 보지 않습니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오직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의인’(義人)인지, 아니면 죄 사함을 받지 아니한 죄인인지만을 구별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가인은 성장하여 농사하는 자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 즉 곡물을 제물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 원문을 찾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는 원문에 “양 무리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는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와 달리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최상의 정성과 겸손히 회개하는 깨끗한 심령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온전한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의 제물에는 자신의 정성어린 마음과 회개하는 깨끗한 마음, 즉 온전한 믿음이 담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믿음의 장>으로 불리우는 히브리서 11:4에 의해 밝혀지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또한 가인의 악함과 아벨의 의로움은 요한 일서 3:12에서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이렇게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들을 먼저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깨끗하고 의로운 마음,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예배)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와 믿음으로 드리는 의로운 제사였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의로운 제사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의 회개할 줄 모르는 교만한 기도”가 아니라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며 다만 가슴을 치는 세리의 겸손한 회개의 기도를 말합니다.(눅18:9-14)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아벨처럼, 최고의 정성과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을 드려 열납되는 예배를 드리는 의로운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가인과 아벨은 둘 다 좋은 아들이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가인의 중심은 마귀에게 속해 있었던 반면, 아벨의 중심은 하나님께 속해 있었습니다. 아벨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의로운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싶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의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믿음을 통해 오는 의를 말합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은 그 믿는 대상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고, 믿는 사람의 삶의 가치가 다른 것입니다. 돈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의 가치와 그 사람의 가치가 돈의 가치와 같습니다. 권력이나 명예, 지식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의 가치와 그 사람의 가치가 권력이나 명예, 지식의 가치와 같습니다. 사람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의 가치와 그 사람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와 같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나뭇잎을 엮어 옷을 만드는 노력으로는 죄를 덮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죄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혀주시므로, 무죄한 동물이 희생되어 피를 흘림으로써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해 ‘가죽옷’을 입히신 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여기셨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의의 옷’을 입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란 죄 사함을 얻어 구원받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죽옷’은 ‘구원의 옷’이라고 합니다. 이사야61:10을 보겠습니다.
(사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아벨은 부모를 통해 믿음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배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본보기를 따랐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근원적인 진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불순종과 죄악을 범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아니하고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려는 기만 속에서 몇 개월을 보낸 후,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시32:3-4)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그리고 “(시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참으로 복 있는 자는 그 죄가 가려진 자,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임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3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교훈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바울 사도는 이를 한 마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아벨이 합당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그의 믿음을 높여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벨의 믿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칭의)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못 본 척하시고, 그 죄상(罪狀)을 깨끗하게 지우시는 거래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첫 조상에게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느냐, 못받느냐’(칭의,稱義)는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것은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이었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받는데’에는 큰 희생이 따라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2. 가인은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습니다. 겸손히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의’를 믿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자신의 죄를 가리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로운 행동은 자신의 죄를 가리고자 하는 거짓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의로운 척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물을 바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물러나 자기 형제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예물을 제단에 두고 나가 먼저 형제들과 화해하려 노력합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아벨은 그의 믿음 때문에 마음과 삶의 변화를 경험했고, 선한 성품과 착한 일이라는 결과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회개하지 않으므로 죄가 그 마음에 왕노릇하여 위선과 기만에 내둘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삶에 채워지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삶이 되었습니다.
(롬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따라서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는지 여부는 여러분 삶에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열납은 죄 사함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납되지 아니한 제사는 죄가 그냥 남아있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아니하므로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아니하면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의로운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당연함에도 도리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악한 마음이 탄로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다시 말하면 “네가 왜 얼굴을 들지 못하느냐? 그것은 네가 바르게 제물을 드리지 않았음을 네가 잘 알기 때문이 아니냐? 네가 옳은 것을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없이 드린 제사에 대해 분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롭지 못한 행위를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권고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악행을 회개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으로 가인의 범죄가능성을 경고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 어느 때보다 범죄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마음의 죄를 잘 다스리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몹시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들로 나가 아우를 죽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우려대로 가인은 마음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거침없이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고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회개하기는커녕 뻔뻔스러운 항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완강하게 끝까지 범행일체를 부인하고 은폐하려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회개를 촉구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그래도 뻔뻔한 가인에게 결국 형벌이 떨어졌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결국 가인의 후손들은 땅에서 최고로 번창하는 듯 했지만 노아의 홍수 심판 때에, 단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하고 모두 멸망당했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성도 여러분의 예물과 예배가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3. 그렇다면 가인은 왜 동생을 죽인 것이겠습니까? 요한일서3:12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 가인의 행위는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ale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떨고 있지만 죄를 회개하므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러나 가인은 귀신들처럼 떨지도 않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지만 의로운 행동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가인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것이었습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죽은 믿음은 속이는 믿음입니다.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기만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회개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회개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회개없는 신앙생활은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킵니다. 회개하며 사는 사람이 참된 믿음으로 사는 성도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은 성도들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 관계를 지속하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 즉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로 탄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는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빛 안에 있는 생명이 피조물과 함께 하여 영원한 생명이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그 몸은 여전히 똑같은 육체이고 그 육체가 사는 세상도 똑같은 세상이지만, 영적으로 그 몸 안에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함께 있어,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가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자기 자신이 먼저였지만, 예수 믿은 후에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합니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전에는 자기 자신이었지만, 예수 믿은 후에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전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사랑했지만 예수 믿은 후에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이웃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예배를 드린 아벨을 “의인 아벨”이라 부르셨습니다. 아벨은 성품에 있어서나 행실에 있어서나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예배를 통해 입증했습니다.
(마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4. 하나님의 의는 아벨의 삶과 예배에서뿐 아니라 그의 죽음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아벨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의로운 예배로 인해 순교당한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마터’(martyr) 는 ‘증거’(마르튀스,μ?ρτυ?)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바꿔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므로 ‘순교자’가 되리라는 뜻입니다.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12 제자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순교당했습니다. 죽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순교자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위한 순교자, 죽음으로서 하나님을 증거했고,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순교자였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받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데 가편 투표를 던지고,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울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묻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되묻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이에 예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26: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울을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너무나 크신 사랑과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울은 복음 전도의 사명을 받기 전의 이름이고 바울은 그 이후의 이름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택한 그릇”이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를 핍박하던 자신을 용서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어 복음 전도의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자신을 “빚진 자”로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며 반드시 빚을 갚지 아니하면 안되는 “빚진 자”로 고백한 것입니다. 로마서1:14-17을 보겠습니다.
(롬1:14-17)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이 ‘배운 자나 못 배운 자,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높은 자나 낮은 자’ 등 모든 인류에게 ‘복음에 빚진 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빚진 자”로 고백한 것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유명한 인도의 성자 선다싱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있었습니다. 마침 산중턱에 산불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불을 끄려고 몰려 있었습니다. 선다싱이 그곳으로 가까이 가다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불이 붙은 어떤 나무를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선다싱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나무 위에 있는 어린 새들의 둥지를 가리켰습니다. 새 둥지 위에는 어미 새가 어쩔 줄 모르고 슬피 울며 빙빙 날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 새들을 살리고 싶은데 불길이 너무 사나워서 그저 보고만 있습니다.” 드디어 새들의 둥지에도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제 어미 새가 단념하고 날아가 버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어찌 된 일입니까? 날아가 버릴 줄 알았던 그 어미 새는 불타는 새끼들을 날개로 감싸고서 그 불을 막다가 그만 불에 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안타까운 죽음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다싱은 이 어미 새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말할 수 없이 크고 깊어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한 마리의 어미 새가 자기의 새끼들을 사랑하여 불 가운데 그 몸을 던지듯, 죄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 인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그 몸을 저주의 십자가에 던지셨습니다.” 십자가 예수 앞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사랑과 은혜에 빚진 자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으로부터 벗어날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은 모두가 다 ‘사랑의 빚진 자’인 것입니다. ‘사랑의 빚’은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안드로 크루스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노예라 하면 한낱 주인의 재산에 지나지 않는 미물과도 같은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안드로는 크나큰 실수를 저질러 주인에게 얻어맞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를 실컷 두들겨 패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주인은 노예를 죽여 버리겠다며 벼르고 있었습니다. 이 말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안드로는 살기 위해 결국 도망칩니다. 그러나 막상 도망 나와 보니 그가 발붙일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법에 의하면 도망친 노예가 잡히게 되면 원형극장에 들어가 굶주린 사자와 싸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안드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인적이 드문 야산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굵고 큰 가시에 찔려 신음하는 사자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사자의 가시를 뽑아주고 상처를 싸매 주었습니다. 이런 계기로 사자와 친해져 그는 사자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숲속을 지나던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의 신분이 밝혀지고 그는 붙들려 원형극장에 서게 되어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굶주린 사자가 쏜살같이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드로는 기쁜 환성을 지르며 달려가 사자를 다정스럽게 포옹하였습니다. 그 사자는 다름 아닌 숲속에서 만나 함께 살던 사자였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그는 자초지종을 간절히 하소연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은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자유를 허락해 달라고 일제히 외쳤습니다. 마침내 안드로는 노예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어 사자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야생의 사나운 짐승이라도 몸에 박힌 가시를 빼주고 보살펴 준 안드로의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과연 어떠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과연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찬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벨 그는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아벨처럼 참된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이 되셔서, 죽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창 4장 1~10절 / 김서년목사
우리 옛말에 ‘사촌이 논을 사면 어떻게 된다’는 그런 말이 있지요. 이 말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렇다고 여기십니까?
우리 사람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공통된 습관 가운데 아주 고치기 어려운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나?”하고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과 나를 비교해서 실망도 하고 고민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좀 못 먹고 못 입어도,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을 때에는 나는 아무런 괴로움도 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서 저보다도 연세가 높으신 분들은 모두 다가 6․25때 피난살이하던 기억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 때를 돌이켜 보세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까?
그러나 그 피난길에서 그 굶주림과 고생을 하였어도, 한 사람도 인생살이에 대해 불행을 논하거나 심각히 고민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당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때에 비교해서 지금 사는 우리들을 한번 살펴보세요. 비록 아직 집을 장만하지 못하여 셋방에 살거나 전셋집에 산다고 해도, 우리 모두가 그 때에 비하면 몇 십 배나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있으며, 몇 백 배나 더 잘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에 비해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 몇 십배 몇 백 배나 더 행복함을 느끼며 살고 있어야 할 것인데,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현재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있어도 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입고, 더 잘 먹으며, 더 좋은 집에서 살면, 나는 마치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사람 마냥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어느 사회학자는 “상대적 빈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이 상대적 빈곤관념 때문에 사람들은 남에게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이 불행을 느끼는 큰 병의 실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에 나타나는 가인의 경우가 바로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계시지요. 그가 누구입니까? “인류 최초의 살인자!!” ― 왜 그는 살인자가 되고만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원인을 보게 됩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동생에게 너무 신경을 쓰며, ‘비교하고 경쟁하려는’ 여기에서부터 죄악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 자기에게 충실하지 못하고, 경쟁하는 이 마음 때문에,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자기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만 것이지요.
먼저 본문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서로가 다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음으로 농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었음으로 양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두 사람 다 모두 ‘자기의 소산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제사는 받으시고, 다른 한 사람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는가?”―우리는 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먼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보다는 양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를 더 좋아하시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그 ‘제물’ 때문에 곡식은 거부하고 양을 받아들이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과연 그렇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양을 드리는 번제가 아니라서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사를 드리는 방식을 소상히 말해주고 있는 레위기에 보면, 양을 드리는 ‘번제’뿐 아니라 곡식을 제사로 드리는 ‘소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사야 1장 11절과 12절 말씀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하나님께서는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라고 해서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신 것은 그들의 제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여러분, 자세히 읽어보세요. ‘아벨의 제물’―‘가인의 제물’이라고 쓰여있지 않습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 그리고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 ‘아벨’을 받으시기에 ‘그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며, ‘가인’을 받지 않으시기에 ‘그가 드리는 제물’을 따라서 받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들의 ‘마음의 자세’가 원인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드린 제사’란 어떤 제사였을까요? 여러분은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 원어로 보면 ‘믿음’이란 이 단어가 ‘진실’과 ‘충성’이란 단어와 철자 하나 틀리지 않은 동일한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진실’이며 ‘충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중심’을 바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이 ‘중심’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은 어떠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바로 이 말씀을 토대로 해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가인이 어떠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을까?’ 하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인은 처음부터 제사를 드릴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동생 아벨이 제사를 드리니까 자기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형식만을 갖추어 정성이 없이 드리지 않았나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옛말에 있는 것처럼 “이웃이 굿을 하니 덩달아 굿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늘 주위의 눈치만 살피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드린 예배’가 아니라, ‘형식만 갖춘 예배’가 되어버리고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 ― 그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호세아 6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미가서 6장 8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번제나 수양의 기름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고, 사랑을 베풀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예배하는 이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에 임하는 나의 중심! 나의 정성! 나의 마음가짐!! ―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가인은 깨닫지를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의 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드려지지 못한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그 예배가 자기 중심을 드리는 것이며 믿음으로 드린 것이기에 하나님께 열납 되었다면, 가인의 제사―그 예배는 남이 하기에 체면상 따라하는 것으로서 자기의 중심이 드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믿음이 없어서 상달되지 못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에 얼마나 힘을 기울이는가? 얼마나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 말씀을 생활화하는 ‘아멘’으로서 삶에 연결시키고 있는가? 헌금 속엔 얼마나 나의 진심이―바른 신앙고백이 담기고 있는 것인가?!!
믿음이 없는 제사, 진실이 없는 행위!! ―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을 보면, 여기에 또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몹시 분하여 하였고, 그뿐 아니라 안색까지 변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어찌하여 분하여 하며 안색이 변했느냐? 네가 선을 행했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굉장히 뼈가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네 자신이 더 잘 알텐데 왜 안색이 변했느냐?”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문제’이지 ‘아벨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이든 먼저는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문제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말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직선적인 관계에 있어야 할 자신이, 그 관계가 잘못 되었다면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거나, 누구를 원망하며 분을 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인이 아벨에게 화를 내고 그에게 분풀이를 한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눈치를 보며 원망을 하게 되면, 거기에서부터 우리 인간의 자기 상실은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불행이 있게 되고 원망이 있게되는’ 원형적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물론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불신앙과 정성이 없었기 때문이지 아벨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벨의 제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랬더라면 가인을 아무런 괴로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벨의 것은 받아들여지니 그 사실에 분을 내며,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있는 문제의 그 책임을 오히려 아벨에게 돌리며 얼굴색을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런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잘된 일은 언제나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며, 잘못된 일은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며, 혹은 환경을 탓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를 보니까, 아이가 뭘 좀 잘하면 다 자기를 닮았다고 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또 공부 좀 못하면 ‘네 애비를 닮아서’ ‘엄마를 닮아서’ 또는 ‘조상 잘 못 만나서’ 네가 이렇게 요 모양이라고 원망하는 말들을 하더군요.
그러나 겸손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잘하든 잘못하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지 그 누구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약하여 지거나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부족함과 나 자신의 정욕 때문이지, 그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을 원망하고 핑계하며, 책임을 남에게로 돌리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간의 ‘깊은 죄성’이 있는 것입니다.
밀턴이 지은 ‘실낙원’이란 책을 보면, 우리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이렇게 재미있는 상상을 하고 있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늘나라로부터 쫓겨나서 돌아다니다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이제 자기가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갈 기회를 영영 못 가질 것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인간을 범죄토록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들도 범죄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시 하늘로 부르실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사탄의 마음이 바로 가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순간 아담은 그 죄를 하와에게 전가시켰습니다. 하와는 또한 그 죄의 책임을 뱀에게로 전가시켰습니다. 바로 이 버릇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우리 인간의 ‘죄의 버릇’이 아닙니까?
자기가 지은 잘못을 남에게로 할 수만 있으면 전가해 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불의’가 ‘죄’가 되는 것은 저기에 ‘의’가 있기 때문이며, 내가 ‘거짓된 사람’이 된 것은 여기에 ‘진실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를 요한복음 3장 19절은 이렇게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 그래서 의인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악한 사람은 그 옆에 착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사람도 죄를 범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로 인해서 바로 ‘자기의 악함’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이지요.
가인을 보세요. 내 제사가 정죄 당한 것은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인의 마음이었습니다. “저 아벨만 없으면 아무 일 없을 텐데……!” 그래서 아벨을 죽여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또 자기의 불의를 정당화해 보려고 하는 가인의 이 마음! ― 그것은 바로 질투하는 마음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 때문’이라고 핑계하거나 누구를 미워하거나 하기 전에, 언제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다음 장면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왜 이 같은 질문을 하셨겠습니까? 몰라서 물으신 것입니까?
아니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벨이 죽은 것을 몰라서 물으신 질문이 아닙니다. 바로 가인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 것이며, ‘네가 아벨과 지금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 하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책임’과 ‘그 관계’를 물으신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가인은 매우 유감스러운 대답을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 이것은 아주 그럴듯한 논리의 대답입니다.
너는 너 자신이지 네 아우, 네 이웃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없다. 이웃의 가난이, 다른 사람의 잘못이 어찌 내게 책임이 있는가? 나는 나로서 나만 선하면 되고, 내가 내 자신에 대한 책임만을 지면 되지 않는가? 우리 주위에는 자기에 대한 책임도 못 지는 자가 수두룩하지 않는가?
그래서 가인은 말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바로 이런 순간이 얼마나 무서운 순간인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책임 회피의 대답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죽어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세요. 부모된 자로서 자녀에게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녀에게 평생에 씻지 못할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때로는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서도 진실하게 살지 못함으로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시키기도 하며,
또 앞으로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에게 대한 전도의 길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너무나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도하는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어떤 그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말하여, 그래서 그 사람 때문에 교회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경우를 여러분 심각히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그 사람들의 영혼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 이것은 바로 살인입니다!!
우리는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이 죽어갔을까?’ ‘나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셨는데, 내가 마땅히 발했어야 할 향기로서의 책임을 하지 않음으로 얼마나 많은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 죽고 있는가?!!’ ―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인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고 책임 없는 대답을 할 때에 하나님은 무섭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너에게 책임이 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혹 “나는 가인처럼 아벨을 죽이는 일 같은 것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이웃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괜찮다”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꼭 ‘내가 한 일’에 대한 책임만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일’과 함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한 것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물으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으세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 물음은 직접적 나의 행동에 대한 피해자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입히게 된 피해자, 나아가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 때문에 입게 되는 피해자에게도 적용되는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나는 혹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며, 마음을 아프게 하며, 이웃을 잃어버리며, 궁극적으로 그 영혼을 죽게 하는 살인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 자신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꼭 칼 같은 흉기가 아니더라도, 말로 살인하며 붓으로 살인하며 행위로 살인합니다. 내가 던지는 말,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행동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
성경은 이런 것을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 혼자서 믿고 천당가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덕을 끼치고 유익을 끼치고, 우리 주님을 닮아 온유하며 겸손하기에 더욱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지못해서 믿는 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그 귀한 은총을 이미 받은 우리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기에, 그 사랑의 역사가 내게서 넘치기에, 그래서 그 은혜에 살고 그 은혜에 보답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적극적으로 건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 크리스챤인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여기에 적극적으로, 또한 구체적으로 대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
이삼규목사 / 창 4:1-12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그중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와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해서 참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 예배가 되려면 무엇보다 성령님과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참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려면 우리 안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에게 찾아와 마치 거울에 반사되듯이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가 아닌 다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내 삶 속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 있음을 내가 안다면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 내 안에 조금도 없을 때 비로소 그분은 나의 예배를 온전히 기뻐하십니다.
가인의 예배
오늘 본문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믿음으로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사는 열납 하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제물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벨과 그의 제물’ 그리고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물보다 중요한 것이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보시기 전에 그 사람과 그의 동기 즉 마음의 자세를 더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가인은 자신과 제물이 열납 되지 않자 분노하였습니다.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의 본색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가인은 예배를 드리기는 했지만 그의 예배가 열납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의 소속이 문제였습니다.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였습니다. 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개역개정][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마귀가 악한 자입니다. 가인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 즉 마귀의 종 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예배에는 세 가지 중대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첫째, 가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분이 주권적이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가인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심각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 가인은 그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서도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는 그와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없이도 그분이 자기를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태평하게 믿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셋째, 가인은 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것을 아주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가인뿐만 아니라 가인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의 기록을 자세히 읽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용의가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 때문에 세상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인간은 인생 최고의 목적과 기쁨,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가인이 드린 예배는 부적절하고 무의미한 예배였습니다. 이것을 지금의 신약시대에 적용하여 말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속죄의 필요성을 가르치기를 거부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런 교회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공허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몹시 공허하고 무의미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도 한 가지 불길한 결핍 요소를 들라면 바로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충분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정도로 충분히 아름답고 웅장합니다. 예복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 음악, 시(詩), 그림, 웅변술, 엄숙한 말투, 좋은 음향시설,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예배자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종종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감동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와 회중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알지도 못하고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여기에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걸려 있다는 점입니다. 가인을 보십시오. 가인은 예배를 잘못 드림으로 버림받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삶으로는 그분을 예배하지 않는 일을 쉽게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여러분의 삶이 예배하지 않는다면, 결국 여러분의 입술도 예배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전부, 즉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 사랑, 순종, 충성, 행위, 생명, 이 모든 것들이 예배에 동참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의 각 부분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공허한 예배 가운데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단적인 예배를 뜻합니다. 이단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진리를 전부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들은 거부하는 편협한 사람입니다. 삶의 각 부분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단적인 예배, 즉 사마리아인의 예배인 것입니다.
‘자연 예배’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시(詩)입니다. 그것은 장엄한 자연을 즐기며 명상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숭배하는 자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눈과 귀가 아닌 마음을 미(美)에 집중시킵니다. 당신의 귀가 미에 집중할 경우 그것은 음악이 되고, 당신의 눈이 미에 집중한다면 그것은 미술이 됩니다. 그러나 음악이나 미술 없이 아름다운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몰아의 경지를 예배라고 착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종교 음악을 예배로 착각합니다. 마음을 고양시키고 영혼을 거의 몰아의 경지에 몰아넣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예배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공허한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예배들이 존재하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예배들을 받지 않으십니다. 종교적인 체험이라 해서 하나님이 전부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교인들끼리 어울리면서 서로 따뜻한 우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와 찬양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해서 그것들이 참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참 예배가 되려면 무엇보다 성령과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방식대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예배하라!”라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또한 그것은 회심과 중생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오직 머리에 ‘장엄함’이라는 혹을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구속과 관계없이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회심하지 않고서도,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으면서도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분명 종교적 체험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말씀드렸고, 하나님도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그 경험이 구원과 관계가 없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잘못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는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입니다. 성령님이 없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님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분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분의 감동의 불을 끄고, 그분의 인도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겠다는 생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이단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아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십니다.
준엄한 메시지
먼저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배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는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예배드리지 않고 단지 종교적 활동에 몰두하면서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언젠가 착각에서 깨어날 때 말로다 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교육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사람이 복음에 따른 실천적 삶을 소홀히 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각 사람은 곧 거룩한 봉사의 책무를 강하게 느껴서 봉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순종과 선행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일보다 예배가 앞서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입니다. 이 순서를 우리는 뒤집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상(理想)은 우리가 최대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시간, 장소, 달, 해를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예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눈길과 마주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이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신다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이십니다. 우리 영혼의 눈이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눈길이 우리의 눈길과 마주칠 때 바로 여기 이 땅에서 천국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교회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 있든지 무릎을 꿇고 있든지 임종의 고통 가운데 있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개인 기도의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오래 묵상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출석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고 다른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해줄 것입니다. 봉사, 일, 활동은 모두 선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의 뿌리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적 습관입니다. 이런 내적 관조(觀照)가 있을 때 비로소 다른 일들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내적 관조의 훈련을 거듭하면, 우리 육신의 눈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우리의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에게는 ‘육신의 눈’이라는 시각 체계와 ‘영혼의 눈’이라는 새로운 시각 체계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잡다한 것들이 우리가 그분에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에게로 향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사실을 압니다. 위로가 되는 점은, 영혼의 습관이 거듭되다보면 얼마 후에는 더 이상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영적인 반사작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그런 예배, 아벨이 드려서 열납 되는 그런 예배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배가 우리의 삶속에 영혼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운전하다가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합니까? 자동적으로 오른 발이 브레이크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자동 반사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영적인 반사 작용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창 4장 1~8절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여러분 응접실 카펫이 더러워지면 임시로 다른 천으로 덮어서 가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카펫 전부를 씻어야지 일부분을 가려놓아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는 사망의 죄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사망의 죄를 지었는데 아담이 일시적으로 그 죄를 짐승의 피로써 덮을 수는 있으나. 영원히 그 피를 가지고서는 덮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구적인 해법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 죄악을 임시로 덮는 것도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짐승의 피로써 덮어야 되는 것입니다. 죄지은 것은 죽어야 죄값을 청산합니다. 사람이 죽는 대신에 임시로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서 덮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겨냈을 때 벌거 벗은 채로 내쫓지 아니하시고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만들어 입혔는데 짐승을 잡기 위해서는 피를 쏟아야 되지 않습니까? 피흘림이 없이 가죽을 어떻게 벗깁니까? 피를 흘리고 임시로 가죽옷을 만들어서 입힌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임시로 죄에서 가리움을 받아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짐승의 피를 흘려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은 농산물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농산물로써는 죄를 덮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벨은 양의 새끼를 잡아서 피를 흘리고 기름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임시적이라도 죄를 덮어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인 것입니다.
<본론>
1. 죄의 값은 사망
죄의 값이 사망이기 때문에 그렇게 죄가 무섭습니다. 원래 죄의 근원은 사람이 아닙니다. 마귀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사람이 생기기 전에 천사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천사장을 가브리엘, 미가엘, 루시퍼 세 천사장을 세우신 것입니다. 가브리엘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이고 그 다음 미가엘은 전쟁하는 천사이고 루시퍼는 찬양하는 천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는 천사인데 이 루시퍼가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찬양 드릴 것이 있느냐 하나님과 나도 이콜이 될 수 있겠다. 하나님과 똑같이 앉아서 우주를 통제하고 천사를 다스리는 자가 되겠다. 잘못된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이 거기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절대 믿음과 순종을 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서서 자기를 섬기고 하나님과 대등하게 행동하려고 하다가 그는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14장 12절로 15절에 하나님께서 루시퍼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계명성이 바로 루시퍼라는 것입니다.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별은 천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뭇 천사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북극 집회는 하나님이 불러서 회의를 하는 곳인데 그곳의 상좌를 자기가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함께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스올이란 음부를 말합니다. 지옥을 말합니다. 바로 하늘에서 루시퍼는 그가 따르는 천사 1/3을 데리고 타락해서 공중에 권세를 잡고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세상을 지을 때 빛이 있으라 하시고 보기에 뭐라고 했습니까? 좋았더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궁창을 지으시고 좋았다는 말 안하셨습니다. 다른 것 지었을 때는 다 주님이 좋았다 했는데 궁창을 지었다는 것은 타락한 천사가 궁창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그 궁창을 좋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은 나쁘게 본 것입니다. 오늘날도 반역의 흑암의 왕궁을 세운 공중권세 잡은 원수 마귀는 공중에 진을 치고 자기 나라를 가지고서 하나님을 참소하고 인류의 고통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공중의 권세를 잡고 거기에서 온 세상의 안 믿는 사람들을 손에 잡고 죄악을 짓도록 이끌어 가고 있는 원수마귀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은 처음 지음을 받을 때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타락도 언제나 그보다 더 무서운 비극을 가져온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왜 하나님이 구태어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나요? 여러분 형상과 모양을 어디서 봅니까? 거울보면 내 형상과 모양이 저렇구나.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은 누구를 봅니까? 여러분을 보면 하나님이 아, 저가 내 형상과 모양이구나. 그만큼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천사처럼 만들지 않았나요? 왜 동물처럼 만들지 않았나요? 왜 다른 것과 같이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었느냐.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으로 여러분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대상으로 여러분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잘 만들었겠습니까? 우리도 아무나 사랑합니까? 길거리를 가다가 아무 여자나 있으면 남자가 너 나 사랑하자 그럽니까? 또 여자가 아무 남자나 지나가는 사람 만나서 당신 나 사랑합시다 그렇게 합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택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탁 들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과학자들은 말하기를 3초내에 생긴답니다. 나는 안그렇지 싶은데... 여하간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와 좋아하는 여자를 교제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랑은 혼자로써 사랑은 못해요. 혼자서 어떻게 사랑합니까? 상대가 있어야 사랑하지요. 하나님의 상대가 바로 여러분인 것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상대가 여러분인 것이므로 여러분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지 않습니까?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기 때문에 여러분을 사랑하는데 이만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만큼 사랑합니다. 어린아이 때 부모님이 애들 보고 너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엄마,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면은 이만큼 사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압니까? 이만큼 사랑합니까? 한없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이 자기 사랑하는 대상으로 여러분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은 정말 영광스럽기 한이 없습니다. 그런 여러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했으니 그 반역과 타락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습니까? 사랑해주는 것만큼 반역하면은 반역에 대한 원한이 커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고 순종해야 될 것인데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 대가는 죽음인 것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고 육체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순종과 믿음으로 살아야 되겠는데 하나님이 선악과로 시험해 보셨어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했는데 먹으면 마귀를 따라가서 사망의 종이 되는 것이고 선악과를 거역하면 생명과를 따먹고 영원히 하나님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생명과를 따먹지 아니하고 사망의 세력을 가진 원수 마귀의 꾐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이라는 것은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를 내가 마음대로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내가 좋으면 내가 내 마음대로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내가 나쁘면 나는 안따라갑니다. 좋다 나쁘다의 권리를 내가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안에서도 자녀들이 부모들이 좋다는 것을 따라가야 되고 나쁘다는 것을 하지 말아야 가정이 평안한데 부모에게 반대해서 부모가 나쁘다는 것을 자기 좋은 대로 행하고 부모가 좋다는 것은 자기가 나쁘다고 안하고 하면 가정에 불순종이 들어와서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인정이 있는 집안에는 남편이 좋다면 아내도 따라가고 아내가 좋다면 남편도 따라가고 서로 좋다는 것에 일치하는 마음이 있는데 남편이 좋다면 아내가 싫다. 남편이 싫으면 아내가 좋다. 그러면 서로 상대가 대결이 되고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하나님 한분 밖에 절대주권자가 없는데 하나님이 좋다면 다 좋다고 따라가야 돼요. 하나님이 싫다면 다 싫어해야 해요. 어떠한 사람들은 말하기를 정의를 위해서 나는 이 세상에 정의를 실천한다. 여러분 정의가 뭡니까?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고 그런 것이 정의입니까? 아닙니다. 정의는 뭐냐,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정의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정의는 하나님밖에 안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다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쁘다면 나쁜 것입니다. 사람 눈에 아무리 좋게 보여도 하나님이 좋지 않다 하면 좋지 않은 겁니다. 사람 눈에 아무리 나쁜 것 같아도 하나님이 좋다면 좋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의 시험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하나님이 죽으리라고 했는데 마귀는 먹으면 너도 지혜를 얻어 하나님처럼 되니 좋다고 말하니까 하나님이 나쁘다는 것을 아담과 하와가 좋다고 따먹고 난 다음에 하나님과 대결되어서 하나님께 쫓겨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반역을 택한 아담의 죄의 문제는 사망입니다. 하나님께 쫓겨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육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반역을 선포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나가고 싶으면 이제는 그냥 못나가요. 죄의 값은 사망으로 죽음이 딱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나갑니까? 자기가 죽어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존재도 없어지니까 자기 대신해 짐승을 죽여서 임시로 죄를 덮고 임시로 덮은 그 보혈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밖에는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대리 죽음과 피흘림을 통해서 우리는 일시적으로 죄를 덮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2. 가인과 아벨의 제사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바로 거기에 다른 것입니다. 가인은 내 마음대로 제사 지냈으면 되었지 하나님이 무슨 잔소리가 많아. 내가 제사 드리면 받으십시오. 내 농사지어 가지고서 좋은 곡식으로 제사 드리면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 기뻐하십시오. 타락한 인의 지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아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피로써 죄를 덮어야 나에게 나온다. 그 말을 마음에 두고서 양을 잡아서 피를 흘려서 죄를 덮고 하나님께 나가니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아서 아벨하고는 대화를 해주시고 가인은 물리쳤습니다. 가인이 화가 났다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동생의 재물은 듣고 내 재물은 안받아 줍니까? 너는 너 중심으로 인생을 살고 네가 선악을 선택해서 살기 때문에 나와 관계가 없지 않느냐. 그러나 아벨은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의 죄를 통회 자복하고 그 대신 죽음으로써 피를 흘려서 그 죄를 덮고 믿음과 순종으로 나오기 때문에 내가 아벨과 대화하지 않느냐. 하나님은 아벨을 사랑하고 가인을 싫어했습니다. 가인이 화가 나서 아벨을 들에서 몰래 쳐 죽였습니다. 살인죄를 지은 것이 가인인 것입니다. 바로 가인은 창세기 4장 2절로 5절에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야훼께 드렸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인본주의적인 반역의 제사, 선악과에 대한 회개가 없는 제사,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믿음과 순종의 제사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 했는데 창세기 4장 4절에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야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그는 선악과를 따먹은데 대한 철저한 회개를 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것을 순종해서 자기 대신해서 양을 잡아서 죽여서 피를 흘려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진노를 일시간에 덮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구약을 보면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갈 때 제사가 있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
하나님께 나갈 때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속죄제사는 원죄를 덮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원죄를 덮어야 나가는데 그 속죄 제물없이 하나님께 아무도 못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보면 언제나 하나님께 나가려면 속죄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계명에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의 죄를 속죄받기 위한 제사로 의무적인 제사인 것입니다. 속죄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무슨 제사를 드리냐면 속건제사를 드립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속건제사, 속건제사는 허물의 제사입니다. 속죄제사는 원죄입니다. 내가 안지은 죄인데 우리 조상 아담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다 죽었으니까 그 원죄에 대한 제사를 드리고 피를 흘리고 나가야 되는데 속건제사는 내 개인의 제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내가 이웃에 상처를 입히고 내가 율법을 어긴 죄, 내 개인의 죄를 덮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의 유전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 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우리 원죄도 있지만 내 자범죄가 있지 않습니까? 속건제사는 내 자범죄에 대한 제물을 또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내 죄를 자백하고 자범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기쁘고 좋은 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감사를 드릴 때 드리는 제사가 뭐냐면 번제입니다. 번제는 온전히 태워서 향기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솔로몬이 산당에 가서 1천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습니까? 그것 번제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은 많이 드릴수록 좋았습니다. 부자들은 백마리의 짐승을 천마리, 만마리도 드려도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과거에 제사드릴 때 꼭 세가지는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 반드시 드려야 되는 것은 속죄제사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속죄제사, 두 번째 제사는 내 개인의 죄를 청산하는 속건제사입니다. 속건제사. 셋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즐겁게 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번제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번제. 피흘림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죄는 피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원죄를 흘리는 데도 피를 흘려야 되고 자범죄를 내가 지은 것도 피를 흘려야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기쁘심을 주는 것도 피를 흘려서 제물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강수와 같은 짐승의 피도 인간의 죄악을 임시로 듣기는 하나 죄를 씻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카펫트가 더러워졌는데 임시로 작은 것으로 덮어 놓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완전히 카펫트를 빨지 않고는 카펫트가 깨끗해지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을 완전히 예수님의 보혈로 씻기 전에는 일시적으로 짐승의 피로써 덮어 놓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로 9절에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율법하에서 드리는 속죄제, 속건제, 번제는 할 수 없이 일시적으로 사람들과 하나님이 교제하기 위해서 드리기 위해 흘린 피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 사람이 지은 죄를 짐승의 피로써 어떻게 청산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죄는 사람이 씻어야 되는데 사람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어줄만한 깨끗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래서 죄 없는 사람이 태어나야 되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입니다. 주여, 나를 위해서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성경은 말한 것입니다. 우리 제물이 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실 때부터 우리에게 무슨 훌륭한 선생이 되기 위해서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이 세상에 병이나 고쳐주고 귀신이나 쫓아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에게 죄를 사하기 위한 재물이 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여러분 놀라운 은총인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재물이 되기 위해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재물이 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나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을 지어 놓고 난 다음 또 새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지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한번 애인을 가졌으면 영원한 애인이지 중간에 갈아치우지 않습니다. 사람은 애인을 자꾸 갈아치우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을 한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으면 영원입니다. 영원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 여러분이 타락해서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하고 놀아나니 하나님의 가슴이 얼마나 아픕니까? 사람들이 타락해서 마귀와 바람을 피웁니다. 한없이 마귀와 바람을 피우고 돌아다니니 하나님 가슴이 얼마나 아픕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다시 용서하고 품에 품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하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어느정도 알려면 하나님이 여러분 위해서 당한 고생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자식을 위해서 온갖 굳은 일도 싫지 않다고 다 일을 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고난을 통해서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당한 것 보십시오. 몸을 찢고 피를 흘리고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주에서 버림을 당하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참은 것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바람 피우는 우리를 사랑해서 다시 하나님이 보혈로 씻고 하나님 백성으로 품에 품기 위해서 주님이 그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엄청난 사랑입니다. 여러분, 인간으로써 여러분 깨닫지 못할 거에요.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자식이 압니까? 못 깨닫습니다. 어제도 어떤 분이 한분 나에게 와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어머니 살았을 때 어머니 사랑을 내가 몰랐는데 어머니 세상 뜨고 난 다음 내 나이가 이제 예순이 넘고 나니까 어머니 사랑을 깨닫는데 조금씩 어머니 사랑을 깨닫고 어머니 그리워져도 이제 어머니는 세상에 있지 않다고 눈물을 글썽 거렸습니다. 사람들도 부모가 세상을 뜨고 난 다음에 나중에야 자기가 그 고생을 하면은 부모 사랑을 깨닫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으로써 도저히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 사랑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여하간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의 피로써 구원을 받게 됨은 잃어버린 자식을 다시 품에 품고 잃어버린 애인을 다시 품에 품었으므로 우리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면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몸부림을 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여기 하나님이 오셔서 여러분 가만 계시니까 귀에 안들리니까 모르지만 하나님이 너무나 좋아서 아이구 좋다. 참 좋다. 내 자식들, 내 애인들, 내 아내, 내 사랑 다시 돌아왔으니 참 기쁘다. 이렇게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할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이 가까울수록 좋은데 하나님의 사랑하는 대상이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을 우리는 감사해서 아버지 품에 자꾸 더 깊이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사랑했는데 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육신의 남편, 육신의 아내, 육신의 부모, 육신의 자식 사랑하는 그 사랑은 견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끝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오히려 이 땅에 살면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으면 그것 다 청산해 버리고 캐묻지 아니하시고 뛰어나와 얼싸안고 사랑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될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4.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
예수님은 아담의 그 모든 죄악을 다 청산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로 11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해야 돼요. 하나님도 여러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뛰어나가서 좋은 옷을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 먹고 즐기자. 예수 믿는 신앙은 먹고 즐기자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즐거워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즐거워하시는데 우리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해야 돼요. 예수 믿고 즐거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슬픈일이 너무 많아도 너무나 하나님은 이젠 즐거워하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요한일서 2장 2절에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온 세상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 다 주님께 돌아오기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와 타종교의 다른 점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기독교는 아벨의 제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짐승의 피를 흘려서 하나님께로 임시에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 영원히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러나 타종교는 가인의 제사인 것입니다. 기독교 이외에 다른 종교는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나가고 자기 마음대로 구원받겠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흘림이 없이 오는 것은 가인의 제사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주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벨의 피를 완성한 예수 그리스도 이름 이외에 어떠한 이름도 우리 죄를 청산할 수 없습니다. 죄가 없는 자가 죄인을 대신해서 죄를 청산할 수 있는데 이 세상에 죄 없이 태어난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 없이 33년 동안 살다가 우리의 제물이 되어서 대신 십자가를 걸머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할 대속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죄제물, 속건제물, 번제물이 되셨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시고 또 개인적으로 지은 속건제물이 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번제물이 되셨다.
히브리서 10장 10절로 18절에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십자가에서 한번 드림으로 우리를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영원이라는 것은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를 합친 것이 영원인데 예수님의 한번 제사는 우리의 영원한 과거의 죄를 다 청산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봐서 영원히 사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70년, 80년 살았지요. 그러나 그 죄는 아무것도 아니고 여러분 영원한 과거를 다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미래를 다 용서해 주시고 예수님의 죄의 용서의 보혈의 효과는 만점인 것입니다. 보혈의 효과가 얼마나 큰지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에 다 청산해버리고 다 씻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이 세상이 끝나고 마귀가 지옥으로 던져버림을 당하고 새하늘과 새땅이 될 때까지 주님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할렐루야~ 한번 제사로 여러분은 예수 믿으면 온전케 되었습니다. 나는 아직 온전하지 못한다. 아직도 거짓말도 하고 아직도 도둑질도 좀 하고... 혹시 세상을 따라가기도 하고 이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온전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았을 때 안경을 끼고 보세요. 예수님 보혈의 안경을 끼고 보기 때문에 죄가 안보이는 것입니다. 보혈의 안경을 벗으면 안되지요. 주님은 영원히 그 보혈의 안경을 끼고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으므로 성령이 와서 야~ 돌아서라. 아버지는 너를 온 유대인이 보는데 너 사실 온전하지 못하지 않느냐. 그러면 회개하라. 깨끗이하라.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다고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온전히 의롭다고 하시고 온전히 거룩하다 하시고 온전히 거룩한데 보니까 성령이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따라 말씀하세요. 그들이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라. 주님이 여러분의 죄와 불법을 기억 안하겠다. 하나님은 기억만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안 기억하는 것도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한번 잊어버리면 영원히 잊어버려요. 여러분의 불법과 죄를 영원히 잊어버리고 다시 기억하지 앉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보면 옛날을 자꾸 따지잖아요. 너 옛날에 어떻게 했지. 저렇게 했지 따지는데 하나님은 한번 여러분 예수 믿고 회개하고 나온 죄는 한번 용서했으면 잊어버립니다. 하나님 그 과거에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세요. 과거에 뭐 지었지? 하나님이 모르십니까? 전지전능하신데... 나는 과거는 다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과거는 다 하나님 앞에 청산하고 잊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대할 때도 자꾸 꼬지꼬지 옛날을 캐물어서 그를 상처 주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줘버렸기 때문에 제사 드릴 필요없다. 속죄제사나 속건제사 드릴 필요가 없다. 과거 없는데 무슨 죄를 짓느냐. 더럽지 않은데 왜 빨래를 해? 더러운 것이 없어졌으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믿고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의가 뭐냐.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은 죄를 한번도 안 지은 것처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일생에 죄를 한번도 안 지은 상태가 의로운 상태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가슴펴고 당당히 나올 수 있는 자격 부끄러워서 이렇게 움츠리고 나갈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자격 이것이 의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함을 선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선악의 절망의 저주를 다 청산하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먹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선악과를 따먹은 절망으로 인한 저주를 예수님의 보혈로 다 청산하신 것입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것도 다 청산하시고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병들었던 것도 주님 다 청산하시고 땅을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것도 다 청산하시고 삼중축복을 예수님을 통해서 얻게 된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도 이제는 잘되고 강건하게 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역사를 예수님 십자가 보혈로 다 덤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5절로 58절에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살을 떼서 주시고 피를 흘려 먹이실 것 같으면 얼마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보통 사랑을 해서 내 살을 베어서 주고 내 피를 뽑아서 마시게 하겠습니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를 흘린 것은 그 살을 우리에게 먹이고 그 피를 우리에게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살때부터 벌써 천국이 임하여 천국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 올라갈 때 기다리는게 아니라 이땅에 사는 동안에 벌써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마음대로 감사하며 나가고 성령받고 병고침 받고 저주에서 해방되고 영생의 기쁨을 가지고 삼중축복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체험을 갖고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잊어버려야 될 것도 있고 잊지 말아야 될 것도 있는데 과거 용서받은 죄는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의 주는 은택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뭐냐.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죄는 이미 한번 용서했으면 씻어버렸으니 그 씻어버린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말라. 그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한 두가지 병이 아니라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독수리는 회갑이 되면요 먼 산위에 올라가서 바위에 앉아서 날개를 바위에서 막 때립니다. 때리고 입 주둥위를 바위에 막 치면 주둥이가 빠져 버려요. 털이 다 빠집니다. 그러면 태양을 쳐다보고 반짝반짝 눈을 반짝 거리면서 쳐다보고 있으면 입부리가 새로 나와요. 그리고 난 다음 털이 새로 나와요. 그래서 새청춘을 얻어서 뾰루룽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입니다. 독수리를 회갑을 당하면 재회춘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면 여러분의 심신이 재회춘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하사 따라 말씀하세요. 내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살아갈수록 좋아지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어떻게 된다구요? 좋아지고 모레는 더 좋아지고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더 좋아지고 명년은 금년보다 좋아지고 죽고 난 이후는 살아있을 때보다 더 좋아지고 그러니 우리는 좋은 일만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배로운 피로 얼마나 큰 축복을 주셨던지 좋은 일만 우리가 기대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죽으심을 통하여 흘리신 피의 절대적 승리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이 절망을 다 청산해버렸기 때문에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남아온 것은 희망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허물에서 씻음을, 병에서 고침을, 저주에서 해방을, 죽음에서 영생을 주시는 희망인 것입니다. 그 변치 않는 희망이 우리의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앙 즉 희망, 예수 안 믿는 것은 절망 즉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찬 꿈을 가지고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어릴 때 생각이 지금 가끔 가다가 저는 납니다. 우리 할머니하고 저는 자랐기 때문에 추운 겨울날 이브자리를 자꾸 제가 차지요. 발로 차고서 배를 내놓으면 할머니가 자다가 몇 번이나 깨어 일어나서 내 이브자리를 목까지 이렇게 덮어 주면서 “야 이놈 자식아 배탈 나겠다. 왜 자꾸 이불을 차냐.” 그러면서 몇 번이나 이브자리를 끌어다가 목까지 덮어줘요. 어떤 때는 할머니가 여름철에 빨래를 해서 빨래를 개잖아요. 옆에 배를 다 내놓고 제가 쿨쿨 자면은 홑이불을 덮어주면서 이 배탈나려고 또 이런다. 배를 덮고 자야지. 그러면서 배를 덮어 주십니다. 그래서 할머니만 기억하면 겨울에도 이불을 덮어 주시고 여름에도 홑이불로 배를 덮어 주고 자고 배탈난다고 걱정하던 할머니가 기억하는데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여러분을 덮어 주시면서 배탈난다. 언제나 보혈 아래 있으라. 보혈을 떠나지 마라. 보혈 떠나면 배탈 난다. 그렇게 하시는 주님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을 늘 덮어주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은혜로 사랑으로 덮어서 이 세상에 상처입지 않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 한번 따라 읽으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죄를 자꾸 들춰내면은 끝이 없어요.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위선의 죄를 하나 더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져서 용서한 것은 여러분 우리를 다시 들춰내면 하나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 용서한 것이 완전치 못합니다. 내가 완전케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으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의롭지 않아도 이 세상에 정의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정의지 사람이 행하는 것이 정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단단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보기에 상당히 정의로운 하나님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주의 정의로운 정의는 한분밖에 안계십니다. 하나님만이 정의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의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청산하시기 위해 얼마나 고난당하신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가 온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피의 종교,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종교인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화평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과 이제는 예수의 보혈로 화목이 되어서 언제나 아버지 하고 달려가면 빨리와 빨리와 빨리와. 주님은 언제나 여러분을 환영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치료하시고 생활을 고쳐주시고 육체를 치료하시고 여러분의 짐을 져주시는 우리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로 48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먹은 것입니다. 영생을 죽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무엇이냐.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영생은 하나님과 같은 생명이다. 세상 생명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생명이요 하나님과 원수된 생명이요 지옥으로 떨어진 생명이지만 우리는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얻었으므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 함께 있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선악과의 절망의 저주를 청산하고, 생명과이신 예수님을 먹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교만은 다 청산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내놓고 내 마음대로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고 나가는 인간중심의 인본주의는 청산되었습니다. 사망은 다 철폐되었습니다. 이제는 생명과이신 예수님을 먹고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과 동일하게 형상과 모양으로 닮아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으면서 주님 품에서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내 사랑하는 자, 내 사랑하는 아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주님의 사랑하는 자식이요, 주님의 애인이요, 주님의 아내요, 주님 최고로 사랑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없이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없이 하나님은 혼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만드시고 난 다음 타락하니까 끝까지 따라와서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서까지 여러분을 도로 구속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또 사랑해주고 또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두손들고 하나님 믿고 순종하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어 하나님 안에 우리가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함께 사는 영원한 존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나의 직업은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것
창 4장 1~2절 / 이정선목사(타우랑가한인교회)
이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들이 있습니다. 아주 흔한 직업도 있고, 아주 희귀한 직업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직업도 있고, 싫어하는 직업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편하면서도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좋아하겠지요. 그러나 좋은 직업은 편하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자기 적성에 맞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초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최초의 인간이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면 금방 답이 나오겠지요.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의 직업은 무엇이었습니까? 딱 꼬집어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모든 일을 다 해야 했을 테니까요. 일할 사람이 자기밖에 없잖아요. 모든 일을 해야 했던 것, 사실은 그것이 아담의 직업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관리인, 즉 매니저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직업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지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슶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아담은 매니저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담 혼자서 모든 일을 해야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일이 나누어지고 전문화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직업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내가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한 부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 직업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합니다. 직장에 나가면 당장이라도 사표를 쓰고 싶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집에 와서 보면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으니 참고 직장생활을 한단 말이에요. 언제부터 일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짜증나는 일이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세계, 그리고 그 세계를 관리하는 일 역시 멋지고 즐거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리해야 할 창조세계가 우리 인간에게 저항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리한다는 멋지고 수준 높은 일로서의 직업의식은 잊혀지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한 호구지책으로서의 직업의식이 우리의 삶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담의 직업은 관리자라는 광범위한 명칭으로밖에 말할 수 없지만, 아담의 두 아들들에 와서는 특정한 직업들이 대두되었습니다. 큰아들 가인은 농부였고, 작은아들 아벨은 목축업에 종사하였습니다. 농사는 인간사회에서 가장 근본적인 직업입니다. 우리 인간이 먹어야 하는 음식은 농사를 지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농자는 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습니다. 농사 짓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농사 짓는 사람이 없으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굶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직업 중에서 농사 짓는 것은 땅을 경작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는 가장 일차적인 관리자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면 식물도 무성해지고, 그에 따라서 동물들도 번성하게 됩니다. 그런 곳에서는 인간의 삶도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반면에 땅이 메마르고 척박하면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두 사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인간의 삶도 피폐해집니다.
직업이 분화되면서 맨 처음 나타난 것이 농사 짓는 일이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농사 짓는 일은 다른 모든 직업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근본적인 직업입니다. 오늘날 아무리 산업이 발달하고 사회가 다양화되었다 해도 농업을 포기한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생존을 위한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식량을 스스로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긴 꼴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쓰는 물건의 90% 이상이 중국산일 것입니다. 그러나 먹는 것만큼은 중국산을 꺼리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건강이나 목숨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당 한구석에다 텃밭을 일구어서 자기 식구들 먹을 만큼의 채소를 키우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사람은 손에 흙을 만지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흙에 가까이 있을 때 가장 편안합니다.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을 보면서 창조주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을 길렀습니다. 가장 급한 농사 짓는 일은 해결되었으니까 그 다음에 필요한 일로 넘어가야겠지요. 농사 짓는 일이 땅을 관리하고 식물을 돌보는 일이라면, 양을 치는 일은 동물을 돌보는 일입니다. 이 땅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사는 것이 동물들이고, 인간은 그 동물들과 함께 공존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더 이상 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야생동물입니다. 그러나 인간문명의 확장으로 동물들의 생존은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미 멸종되어 없어진 동물들도 있고, 지금도 멸종의 위기에 처한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땅이 인간을 향하여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것처럼, 동물들은 인간을 해치고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물들을 싸워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싸워서 쫓아내야 할 종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간은 동물들과 대화하며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관리자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양고기를 먹으려고 양을 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먹는 것은 가인 담당이었습니다. 아벨이 양을 쳐서 젖을 먹었는지, 아니면 털을 깎거나 가죽을 얻으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벨이 양을 쳤다는 것은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일로서 동물들을 돌보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을 돌보면서 생명의 신비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도 창조주를 만나는 곳입니다.
나중에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쫓겨납니다. 그런데 그의 후손들 중에는 음악가도 나오고 대장장이도 나옵니다. 여러 가지 직업이 분화하고 전문화되면서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또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되어 쫓겨났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리해야 하는 업무와 책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꼭 농사를 짓고 양을 쳐야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직업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궁극적으로는 창조세계의 관리자로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일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을 창조세계의 관리자로 임명하셔서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정면으로 반항하고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환경을 파괴하거나 인간을 압제하는 데 관여하여 일을 하는 것은 아무리 많은 돈을 버는 일이라도 해서는 안 되겠지요.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롬 8:19)이라고 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투쟁은 결코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름이면 더워서 못살겠고 겨울이면 추워서 살기 어렵습니다. 지진에 놀라고 홍수에 겁을 먹습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공포로 다가옵니다. 자연도 인간이 무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에서 살던 동물들은 살 곳이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 빨대를 꼽아서 두고두고 웅담을 채취할 만큼 잔인하게 동물들이 혹사당합니다.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의 밀림은 매년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투쟁에서 양쪽 다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피조물들, 즉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할 수밖에요. 인간에게 자연을 잘 관리하라고 책임을 맡겼는데 오히려 착취하고 파괴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얼마나 신음을 하고 있겠습니까? 이것이 아담의 범죄에서 시작된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 죄인들이 하나님의 구속하심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창조세계를 잘 돌볼 수 있는 제대로 된 관리자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가 꿈꾸었던 메시야의 세계, 새롭게 회복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는 사자가 어린양과 함께 풀을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합니다(사 11:6-8).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직업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거나 인간을 압제하는 일에 종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직업에 복을 주셔서 즐겁게 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고 회복하는 일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상석과 말석
인명진목사 / 창 4:1-8 빌 2:5-11 눅 14:7-11
세상에서 어려운 일 중에 하나가 타인들 앞에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사람들, 소위 세상에서 한 자리 차지한다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자리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것입니다. 자리의 배치가 생산성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국가안보에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이 자리 배치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한번 앉고야마는 자리 배치를 왜 이렇게 중요하게 여길까요? 아마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리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 동네에서 잔치가 열리면 어디서 알고 왔는지 각설이들이 꼭 찾아왔습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 않고 또 왔네! 이 노래처럼 어김없이 각설이들이 잔칫집에 찾아왔습니다. 이들의 자리는 항상 정해져 있었습니다. 문간 옆에 멍석을 깔아놓은 자리가 저들의 자리였습니다. 음식을 차려주면 아무 말 없이 먹고 그냥 갔습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를 찾아오는 각설이들은 자존심도 대단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종종 행패를 부리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너무나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잔칫집에 초대받아 가게 되거든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품위나 사회적 자리에 따라 상석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상석에 앉아 있는데 잔치집 주인이 와서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이 앉아야 한다면서 자신을 말석으로 앉히면 그 수모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은 말석에 앉아 있는데 잔칫집 주인이 와서 상석으로 모시고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이 말씀은 어떤 시각으로 들으셨습니까?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으셨는지요? 공연히 잘난 척하다가는 큰 수치를 당할 수 있으니 처세를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읽으셨는지요? 둘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만 맞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겸손하라 것만은 아닙니다. 처세를 잘 하라 것만도 아닙니다. 말석은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고, 상석은 부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다종교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들이 겸손하게 자세를 낮출 줄 안다면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졌겠지요. 입으로는 겸손을 말하면서 구원과 진리는 독차지 하고 있는 것처럼 군림하기도 하고, 함부로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을 겸손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누군가 앞에서 겸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말석에 앉는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도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상석을 떡하니 차지하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말석보다는 상석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못하게 평가받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정치권에서는 노골적으로 남을 깎아내리고 자기를 치켜세웁니다. 직장에서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빨리 승진하면 속상해 하고 그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까지 가집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낮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실제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괜히 낮추었다가 낮춘 만큼 손해 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기 존재감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부단히 노력합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작한 장로교회가 우리나라에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세계 어떤 나라보다 우리나라에서 장로교가 번성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약 70%가 장로교회입니다. 나머지 30% 교회도 그 직제를 보면 장로교 직분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양한 교파의 간판을 달고 있는데 그 직제는 장로교 직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한국에서 장로교회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나라의 서열문화와 장로교회의 직분제도와 유사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 다른 세계 어떤 나라에도 없는 서리집사까지 다양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직분을 서열화 시켜서 목사와 장로는 상석이요, 집사와 성도는 말석이라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정신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은 자명합니다. 한국교회가 직분의 서열화 때문에 성장했다면 한국교회는 직분의 서열화 때문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상석과 말석의 자리 개념이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은 죽어야 되는 순서입니다. 교회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은 목사입니다. 그 다음은 장로 권사 안수집사 순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제일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을 상석에 앉혀놓은 것입니다. 제일 많이 죽어야 할 사람에게 직분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이 죽어야 하고, 교회를 위해 많이 울어야 하는 순서가 직분의 순서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병들었습니다. 직분을 서열화 하고, 계급화 했습니다. 직분은 섬김입니다. 자리는 헌신입니다. 기독교정신은 겸손입니다. 섬김과 헌신 그리고 겸손은 온데간데없고 자리만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죽어가는 신호입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유연한 것은 죽지 않습니다. 굳어있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자신의 몸을 드려서 죽기까지 섬기셨던 예수님의 섬김 정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같은 경우에는 겸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본질상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 속사람이 겸손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겸손하다고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 어떤 모임에서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찾아 앉을 때 우리는 겸손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실제로 겸손한 게 아니라 겉모양으로만 겸손한 척할 수 있습니다. 말은 “제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하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속과 겉이 아무런 차이가 없이 겸손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겸손이 아니라 상식과 교양으로 겸손하게 보이는 영악한 기술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의 비천한 자리에 내려가는 본질적 겸손에 접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겸손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상대적인 겸손, 기술적인 겸손만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말석은 기술이나 교양이 아닙니다. 처세술 또한 아닙니다. 상대적인 겸손은 어느 순간에 폭발해서 오히려 교만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문제는 그 집에 수종병 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종병은 현대 의학으로 말하면 신장이 좋지 않아 몸이 심하게 붓는 병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자주 행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안식일 법을 어기는지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당장 건져내야 하지 않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무언가 신앙의 본질에서 충돌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은 어떤 모임에서나 서열에 따라서 자리의 순서가 정해졌습니다. 종교적인 권위나 연배에 따라서 달라졌겠지요. 그런 순서는 단순히 자리에만 해당된다기보다는 사회 전체 질서를 가리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의 서열이 강조됩니다. 군대가 아니라하더라도 이등병에서 장군에 이르기까지 피라미드식 위계질서에 따라 움직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도 역시 이런 위계사회에서 좋은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이런 위계질서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예술가나 시인이나 종교인들은 사회조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상석과 말석의 자리 구분은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현재는 낮은 자리이지만 조금 참고 노력하면 윗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는 꿈과 야망을 안고 살아가는 게 바로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개인에 따라서 그 강도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큰 틀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왜 우리는 말석에 앉기는 싫어할까요? 왜 사람들은 상석에 앉기를 좋아할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문명이 병든 탓인가요, 아니면 우리 인간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인가요? 양쪽 다 이유가 있겠지요. 문명은 접어두고, 인간 본질이라는 차원만 본다면 인간성 본질의 타락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이유로 가인의 안색이 변하고 화가 낳습니다. 화가 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인간성입니다.
자신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동생의 제사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자기의 자리에 동생이 앉은 것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현대문명은 그것을 경쟁으로 포장시켜 잘못된 인간성을 더욱 자극합니다. 이런 인간성을 정당화 하면 할수록 인간성은 점점 더 파괴되어 갈 것이고, 세상살이는 점점 더 힘들어 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상석에 앉을 생각을 하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신앙적인 요구는 우리의 현실과 대립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요구를 모른 척하든지 아니면 위선적인 겸손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말석에 앉으라고 했지만 그건 그렇게 사는 게 좋다는 뜻이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은 아니라고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억지로 말석에 앉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속마음으로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우리가 겸손을 가장한 위선자로 살도록 주신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범적인 삶이나 세상살이의 요령을 가르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가르치신 분은 공자입니다. 공자는 좋은 뜻으로 사람들에게 처세술을 가르쳤습니다. 바르게 살아가야 할 기준들을 제공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복음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공자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십자가와 연결된 절대적 겸손이 아니라 공자의 처세술 수준인 상대적 겸손을 말해 왔습니다.
오늘 말씀은 처세술이나 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룬 삶의 요약입니다. 예수님이 삶의 지혜와 도덕, 윤리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것을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조금씩 다듬고 길들여서 괜찮은 사람, 교양이 넘치고 겸손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말석에 앉아서 겸손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반드시 상석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 사회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말석에 앉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사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요즘처럼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에서 낮은 자리에 앉는 사람은 오히려 무시당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낮추는 만큼 낮아진다.” 이런 점에서도 오늘의 본문이 단순히 겸손에 대한 도덕적인 가르침이나 처세술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입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오늘 비유 이야기에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과 주인이 나옵니다. 상황이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초대받은 사람이 상석에 앉았다가 말석으로 밀려나는 경우와 말석에 앉았다가 상석으로 올라가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의 행동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인은 상석에 앉은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말석에 앉은 사람을 윗자리로 올렸습니다. 이 주인의 행동은 곧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와 왕의 잔치 비유에서 보듯이 중심은 주인입니다. 그 모든 상황은 주인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는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이 모두 한 데나리온 씩 받았습니다. 그게 바로 포도원 주인의 뜻이었습니다. 왕의 잔치 비유에서는 원래 초청받았던 사람들이 소도 사야하고, 장가가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 초청을 거부하자 길거리에 나가 지나가던 사람들을 닥치는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인은 자리를 마음대로 옮기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이 비유의 결론인 11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이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상석과 말석을 판단하는 분은 주인, 즉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과 교만, 말석과 상석, 낮은 자리와 높은 자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실제로 누가 겸손한 사람이고 교만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약간 구별할 수는 있겠지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거꾸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실제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게 늘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자랑할 게 없는 사람인데도 아주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꾸로 남에게 자랑할 게 많은 사람인데도 겸손한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누가 그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신다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하나님만이 말석에 앉은 겸손한 사람과 상석에 앉은 교만한 사람을 구별하고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전권을 가리킵니다. 그분에게만 진리가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주제와 연결해서 설명한다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말석과 상석의 기준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아는 상석과 말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 사장은 상석이고 수위는 말석입니다. 연봉을 10억 받는 CEO는 상석이고, 2천만 원 받는 노동자는 말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가치판단입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우리가 넘어서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만이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런 고정관념에 완전히 반대되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서신서의 말씀 빌립보서는 “그리스도 찬미가”라 불리는 말씀입니다. 절대적 비천의 상징인 십자가와 절대적 높음의 상징인 부활을 노래합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조차도 그 길을 피하고 싶어 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서 우리와 온 인류를 살리는 구원의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낮아지는 사건을 통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겸손이 교양도 아니고, 말석에 앉는 것이 처세술도 아닙니다. 이 낮아짐이 없으면 신앙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어찌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예수님이 죽임 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세상의 논리로 본다면 십자가에서는 구원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처절한 파멸과 실패로 끝나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생명으로도 그 비슷한 것을 찾아낼 수 없는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이 바로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가 가장 낮은 끝자리라고 한다면 부활은 가장 높은 윗자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이 사건을 토대로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너무 관념적인 교리이기 때문에 이렇게 각박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 별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만 믿고 있으면 기독교인으로 최선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현실성으로 와 닿지 못하면 신앙의 능력은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종교적 의미에서 구원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딸로 이 세상을 살게 하는 권세요, 능력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2천년 전에 예수 안에서 일어났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매일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 참된 자유와 평화의 능력은 다른 데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주어집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 당신도 피하고 싶었던 말석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일을 당할까 해서 두렵습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가장 낮은 말석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명예와 자존심, 또는 재산이나 건강을 잃는 것인가요? 그런 것들은 모두 소중합니다. 가능하면 여러분이 그런 걸 잃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걸 잃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크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힘을 내십시오. 이미 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걸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판단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올리시는 그 하나님 판단에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맡기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참된 상석의 자리에 앉혀주실 것입니다. 그 자리는 나 혼자만 사는 자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생명의 자리요, 부활의 자리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처세술로서의 겸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살아가십시다. 낮추고 높이는 것도 하나님의 권세 안에 있는 줄 믿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걸어서 가십시다. 그리하면 우리를 참된 의미에서 상석에 앉혀주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말석에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벨의 믿음: 예배
이윤재목사 / 히 11:4, 창 4:1-7
아벨의 믿음: 예배
한 유대인 랍비가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아주 바쁘게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랍비가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어디를 그렇게 빨리 가시오?” 남자는 뒤도 안 돌아본 채 말했습니다. “행운을 잡으러 갑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참 어리석소. 지금 행운이 당신을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는 데 당신은 행운보다 너무 빨리 달리고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의 특징은 부지런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부지런한 나머지 행운보다 먼저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열심인 나머지 하나님보다 더 열심히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목표를 안다면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한 해 목표는 분명합니까? 하나님이 한 해동안 우리 모두가 열매맺는 큰 나무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올 한 해는 놀랍게 열매맺는 한 해입니다. 그것이 학업이든, 사업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세상적이든, 영적이든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믿음에 굳게 서야 감사함이 넘칩니다”. 믿음에 굳게 서기 위해 우리는 지난 주부터 히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사람, 아벨입니다. 4절을 다시 읽겠습니까? 히11:4, “믿음은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는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을 예배와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우리 생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믿습니까? 시27:4절입니다. “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우리 생의 최고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트란드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숭고한 것이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다”. 영국의 C.S.루이스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워지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배하려고 태어났다.” 오늘 아벨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돌아봅시다. 말씀을 통해 올 한 해 우리가 최고의 예배자가 되고 예배를 통해 또한 우리 믿음이 자라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예배는 어떻게 시작될까요?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로 시작됩니다.
오늘의 주인공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창4장에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에덴을 쫓겨난 후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둘은 하는 일이 달랐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농부가 되고 아벨은 양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농사와 아벨의 목축은 고대 사회의 두 가지 생활방식을 말합니다. 어느 것이 우월하고 어느 것이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직업의 귀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직업에 대한 태도에 귀천이 있을 뿐입니다. 골3:23에도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범죄만 아니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이 주신 일로 알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어느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4:3에 “세월이 지난 후에” 했습니다. 이 말은 “때가 되어” 이 말입니다. 사람이 어리면 예배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이 뿐 아니라 영적으로 어려도 예배할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자라면 예배를 알게 됩니다. 예배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어야 예배를 드립니다. 왜 예배는 믿음과 관련될까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았으면 그를 높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분이 나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알았으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면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예배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예배하고 예배한만큼 믿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자라서 하나님앞에 예배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같은 예배인데도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고 아벨의 예배만 받았습니다. 둘이 똑같이 예배드렸는 데도 왜 아벨의 예배는 받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은 것일까요? 흔히 말하듯이 가인은 농산물로 예배하고 아벨은 동물로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제사와 관련하여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농사밖에 짓지 못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예배할 때마다 양이나 소를 밖에서 사와야 합니까? 그러다가 구하지 못하면 예배도 드리지 말아야 합니까? 문제는 예물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가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니티”입니다. 이 말은 직역하면 “내가 얻었다. 내가 획득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직접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를 짓고 에덴을 떠나면서 일하는 고통과 해산하는 수고를 죄의 대가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와는 가인을 힘들게 낳았습니다. 너무 힘들어 “카니티” 했는 데 이 말은 “아, 힘들다. 애 낳느라 죽을뻔 했네” 하는 뜻입니다. 이 말이 더 발전해서 “내가 낳았다, 내가 얻었다, 내가 회득했다” 뜻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가인의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강조된 말은 “내가”입니다. “내가 고생하고, 내가 힘들었고, 내가 수고했고, 내가 낳았고, 내가 얻었고”, 가인의 이름은 이렇게 지어졌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예배와도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창4:3절에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다“말을 히브리어 원어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가인은 자기 밭에서 자기가 거둔 곡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가져갔다“. 여기서 ”자기“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 말속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와 하나님이 제물이 받지 않았을 때 가인이 화를 낸 이유가 나타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자기 것을 드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힘들게 농사해서 얻은 자기 것,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인에게는 은혜의식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는 생각이 없이 모든 것이 ”카니티“, ”내 것이다. 내가 힘들게 농사지었다. 내가 얻었다. 그래서 내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예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까운 것을 드렸는데 하나님이 안 받았다. 그럴 수 있나? 내가 어떻게 지은 것인데? 내가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밤잠을 자지 않고 지은 것인데 이것을 안받다니? 그럴 수 있어?” 그래서 가인이 분노하여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을 통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무엇이 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롬5:1-2절을 또 드립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나아간다”는 말은 왕을 만나려고 궁정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궁중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최 누구처럼 아무 때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은혜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았습니다.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얻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농사한 곡식때문이 아닙니다. 곡식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왕이 볼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정성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목회자도 장로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은혜로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나아간다”는 말이 신약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롬5:2절에 나오고 엡2:18, 엡3:12에 나옵니다.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댐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 그래서 감히 왕이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은혜, 이것이 예배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에서 회당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매주 토요일, 안식일에 드리는 회당예배는 그 뒤에 탄생한 기독교 예배의 원형입니다.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남녀노소, 모두 가족이 함께 드립니다. 둘째, 성경읽기와 기도를 중심으로 2시간 이상 드립니다. 셋째, 그 시간동안 내내 서서 예배드립니다. “서서” 드린다는 것에 저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 의자에 앉아서 드리지 서서 드릴까? 의자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차마 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서서 드리는 예배를 “아미다” 예배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도 “아미다”는 “선다”는 뜻입니다.
서서 드리는 예배의 원형은 옛날 성전의 지성소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에서 예배할 때 먼저 이방인의 뜰을 거쳐 성전구내에 들어가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을 거쳐 지성소로 나아갑니다. 문을 여러 개 거쳐 하나님이 임재하는 성소로 나아갑니다. 그 성소에 들어가면 빽빽한 구름과 연기로 하나님의 쉐키나, 임재가 있어서 감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얼굴을 들수가 없는 데 어떻게 앉습니까? 그래서 서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몸만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일어섭니다. 죄인인 내가 감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들어오다니. 그 은혜가 너무 크고 황송해서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미다’, 섭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 “왕되신 주앞에 나 경배합니다. 주님만 찬양받기 합당하시니 큰 존귀와 영광 홀로 받으소서. 오, 주앞에 나아갑니다”.
이렇게 자격없는 자를 부르셔서 왕되신 하나님앞에 나아오게 하신 은혜를 입으면 어떻게 예배할까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축사의 마지막 부분이 있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가 제 마음에 항상 두는 두 마디 말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픈 채로 머무십시오. 그리고 어리석은 자로 사십시오. 배고파야 채우고 어리석어야 겸손합니다”. 하나님앞에 예배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Stay hungry!, 하나님앞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서십시오. Stay foolish! 하나님앞에 어리석고 겸손한 자로 서십시오. 예배는 은혜입니다. 은혜없다면 예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하나님앞에 나왔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드려야 합니까? 예배의 부정적인 요소를 가인이 보여줬다면 예배의 긍정적인 요소를 아벨이 보여줍니다. 가인이 농산물로 예배드린 반면에 아벨은 양을 잡아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예배는 예물의 문제가 아니고 예배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어떻게 예배드렸을까요? 창4:4절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아벨은 양을 잡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이 부분이 더 자세히 번역되어야 합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아벨도 자기가 기르는 첫 새끼 가운데서 가장 좋은 부위를 골라 제물로 가져왔다”. 그냥 양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양의 첫 새끼를 드렸는 데 그나마도 그중에서 가장 좋은 부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가진 최상의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름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히브리어 “아벨”은 “하벨”에서 왔습니다. 하벨은 “숨, 호흡”이란 뜻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숨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숨쉬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이 “하벨”에서 “아벨”이 나왔는 데 아벨은 “헛되다”는 뜻입니다.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할 때 “헛되다”는 말이 “아벨”입니다. 그러면 아벨이 왜 헛되다는 말입니까?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서 하나님 떠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 마치 숨과 같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살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 순간 한 순간 사는 데 하나님 떠나면 ”아벨“, 그때부터 우리는 헛된 존재입니다. “그러니 주여, 나를 떠나지 마시고 나와 영원히 함께 하옵소서“.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오는 은혜를 입은 성도가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 없으면 저는 못삽니다. 저는 아벨입니다. 하나님의 하벨, 생명이 없으면, 아벨, 나는 헛되고 헛된 존재입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시인 정호승을 좋아합니다. 그가 쓴 시중에 “어느 벽보판 앞”이란 시가 있습니다. 어느날 그가 길을 지나가다가 그가 현상수배범이 걸린 전단지를 보고 쓴 시입니다.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내 얼굴이 있었다./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처진 게/ 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딩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우리는 보통 무엇을 무엇을 한 죄를 죄로 봅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그러나 죄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무엇을 한 죄도 있지만 무엇 무엇을 안한 죄도 있습니다. 젊은 때는 무엇 무엇을 하는 것만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먹으면서 보니까 안한 것이 더 많습니다. 부모에게 젊은 때같이 불효는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더 자주 전화하고, 더 살펴드리지도 못합니다. 아내를 보면서 젊을 때처럼 자주 다투지만 않지만 그렇다고 여기 저기 아플 때 더 다정하고 위로하며 의지하지 못합니다. 그때 “아, 내가 더 사랑해야 하는데 바쁘다고 못하고, 나이는 먹어가는 데 언제 사랑하나? 미안하다” 생각합니다. 아들에게, 딸에게 더 사랑한다는 말을 못한 죄, 목회자로서 교인들이 아프고 고통당할 때 더 가까이 있어주지 못한 죄, 정호승이 말한대로 “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는 얼마나 큽니까? 사람앞에 이러한 데 하나님앞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툭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뻔히 죄인 줄 알면서 죄짓는 것은 그만 두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데 사랑하지 않은 죄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평생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해서 장로, 권사, 목사로 세우니까 첫 사랑 다 잊어버리고 예배도 제대로 못 드리고 심지어 십일조도 제대로 못하면서 하루하루 겨우 사는 우리, 나이는 먹어가고 은퇴는 다가오는 데 언제 하나님을 섬기려는지, 참 한심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하나님앞에 “아벨”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한 시도 못사는 존재들 아닙니까?
요즘 제가 배운 노래중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악보).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이 고백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예배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요소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양을 잡아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예배의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아벨의 시대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법도 없고 전례도 없고 제단이나 성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것은 노아였습니다. 그뒤 출애굽시대에 성막이 만들어 지고,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지어져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시대는 누구도 동물을 잡아 예배한 적이 없는 데 아벨이 처음으로 양을 잡아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벨의 예배가 두고 오는 모든 시대 예배의 표준이 되고 모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는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하며 희생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시대의 성막이나 솔로몬 시대의 성전제사에서 양이나 소를 잡아 드린 것은 훗날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을 예수님을 예표한 것으로 예배의 본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희생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예배의 중심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이 있습니까? 한국교회 침체의 원인을 분석하는 사람중에는 한국교회 예배의 타락을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배의 가장 큰 타락은 예배가 하나님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어땠어?” “응, 은혜 많이 받았어.” “아니, 별로였어. 찬양도 지루하고 설교도 그렇고 그랬어”. 하나님께 드린 예배가 별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어떻게 그렇고 그럴 수가 있습니까? 목회자는 신자들의 입맛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인터테인먼트 예배를 추구하고 신자들은 자기 몸을 드리기보다 예배를 통해 오로지 자기 만족이나 위로만 받고 있습니다. 조금만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치는 설교”, “표적 설교”라고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예배를 찾아 주일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다니는 교회 방랑객이 10만 가량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배드리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배보러 다니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의 희생양,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은혜는 예배를 통해 내가 받는 결과요 선물이지만 은혜받는 것이 예배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앞에 예배자로 부름받았을 때 이미 은혜받았습니다. 예배는 행복해야 하지만 느낌이 좋아야 행복한 예배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추구해야지 느낌이 좋은 예배를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나에게 무엇을 하라(do)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하신 일(done)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어린양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을 아벨은 예배드린 후 가인에게 죽았다는 것입니다. 히11:4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양을 잡아 예배하고 자신도 산 제물로 내놓고, 그래서 아벨의 예배는 예수님의 예배를 닮았습니다.
오래전 미국에서 차를 몰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방송에서 한 여성이 나와 찬양하는 데 제가 너무 눈물이 나와 사고날까 봐 차를 옆에 세웠습니다. 찬양은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였습니다. 목소리로 볼 때 흑인인듯한 그 여성의 찬양은 그날 제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님이 우리의 중심에 있습니다. 예배의 중심도 피묻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어린 양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예배는 자기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를 통해 배울 마지막 교훈이 있습니다. 창4:4-5절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아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여기 “아벨과 그의 제물”이란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드리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물보다 우리 자신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벨의 예배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제물을 받기 전에 먼저 아벨을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예배도 문제는 제물이 아닙니다. 제물보다 먼저 받지 않은 것은 가인 자신입니다. “가인과 그가 드린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배의 근본적인 문제는 예물의 문제가 아니고 예배자의 문제입니다. 실컿 예배는 드렸으나 나를 드리지 못한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나를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롬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 “산 제물”이 나옵니다. 구약의 예배는 동물을 잡아 드린 희생제사였습니다. 양이나 소를 드릴 때 반드시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반드시 양이나 소,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희생제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입구에 제사장이 서서 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은 아예 입장도 못하게 했습니다. 둘째는 희생제사는 양이나 소로 하되 반드시 1년된 수컷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암컷은 새끼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아마도 보호했던 것 같지만 1년된 수컷이 동물로는 최상의 상태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좋은 것을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33살, 인생의 최고 절정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마지막은 제물을 드리되 반드시 살아 있는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죽은 것을 드리거나 죽여서 드린 것이 아니라 산 것을 드리고 다음에 죽였습니다. 레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1년된 소나 양의 수컷을 끌고와 먼저 회막문에서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의 안수를 받은 후 번제단에 올려 불살랐습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안됩니다. 이것이 롬12:1절의 “산 제사”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드릴 희생제물이 있나요? 하나님께 나올 때 무엇을 드리고 무엇을 희생하시나요? 구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예물드리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 정성을 다해 예물을 준비하십시오. “사랑하지 않고 줄 수 있지만 주지 않고는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주지 말래도 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예배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참 따분하고 길고, 성가대 찬양은 그게 뭐야? 아, 오늘 은혜가 없었어”. 이 말을 듣던 고등학생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헌금시간에 주섬 주섬 호주머니 뒤져서 겨우 천원짜리 한 장 헌금하시고 예배에 대하여 뭘 기대하세요?”. 아들이 썩 잘한 말은 아니지만 제대로 예배드리지 못한 아버지를 깨닫게 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우리는 예배때 이것 저것 받기만 바라지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생각은 잘 안합니다. 어떻습니까? 예배시간을 잘 지킵니까? 우리 교회 권사님중 하남으로 이사간 분이 계십니다. 이 권사님이 교회오는 데 약 2시간 정도 걸립니다. 집에서 버스타고 지하철 가고, 지하철 두 번 갈아타고 판교역으로 와서 걸어서 교회까지 2시간, 그런데도 항상 일찍 옵니다. 수원 화성 향남에 사시는 장로님도 2시간 걸립니다. 버스로, 지하철로, 걸어서, 그런데도 늦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업을 하는 데 사업상 이권이 걸려 있는 만남이라면 1시간 늦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친구와 영화보러 간다면 20분 늦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해외여행가기 위해 공항간다면 30분 늦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는 늦습니까? 하나님이 영화보다 사업보다 여행보다 못합니까? 어떤 분은 설교가 다 끝난 다음에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는 안 드리고 예배끝나고 사람만나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배자가 아닙니다. 구경꾼입니다. “10분 일찍 옵시다”. 적어도 예배전에는 도착합시다. 그래서 온전한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립시다. 시간도, 정성도, 물질도, 찬양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배드린만큼 살고, 세상 또한 우리가 예배한 만큼 변화됩니다. 예배의 수준이 내 영적 수준이고 그 시대 교회가 드리는 예배의 수준이 곧 그 시대의 영적인 수준입니다. 한 해동안 예배 잘 드리겠습니까?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임을 믿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부르신 은혜를 받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희생의 은혜를 찬양하겠습니까? 최고의 은혜를 받았으니 최고의 희생으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까?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인명진목사 / 창 4:1-12, 롬 12:14-21, 막 12:28-34
2017년 여름은 유난히도 폭염이 길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올해의 여름이 가장 길고 더웠던 것 같습니다.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지 않아 여름이라도 에어컨을 잘 틀지 않았지만 이번 여름에는 에어컨과 선풍기를 끼고 산 것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더위 때문에 매일 밤을 설치기도 하면서 삶의 리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 어느 해보다 아침과 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 가을의 전령사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가을의 기다림이 간절했던 만큼 가을이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쉬이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듯이 말입니다.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지나도 더위는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소낙비와 함께 언제 여름이 있었느냐는 듯이 갑작스럽게 가을이 다가왔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는 것을 몸으로는 빨리 느끼는데 마음으로는 더디 느끼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대하고 기다리던 것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면 깜짝 놀라면서 받아들입니다. 긴 폭염 때문에 예전보다 더 기다렸던 가을이요, 갑자기 찾아온 가을이기에 반가운 손님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런 반가운 가을 손님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격분케 하는 사건이 지난 주중 사람들의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정치권의 이슈와 소용돌이에 파묻혀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는 사건이지만 설교자인 저에게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한 지방 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실 텐데 한 택시기사가 손님을 태우고 운행을 하다가 갑작스런 심정지가 일어나 운전 중에 사망한 사건입니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택시 안에 승객이 보인 무관심과 비인간적인 행동은 공분을 사기에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이 택시 안에 타고 있던 부부는 119를 부른다거나 경찰에 신고하다거나 아니면 응급조치를 한다거나 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두고 해외 골프여행을 떠났습니다. 119에 신고하는데 전화비가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경찰에 신고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이 사건의 보도를 들은 국민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한 채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택시 승객을 처벌해야 된다는 격앙된 반응으로 나타났습니다. 사후약방문처럼 우리나라도 선한사마리아인의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비정한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목적지까지 태워다주기 위해 수고하다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마음의 콩 한쪽도 나누어 줄 수 없는 사회,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단 1분도 내어줄 수 없는 미친 사회를 보는 같았습니다.
이런 비정한 사회의 부메랑이 바로 나에게, 나의 아들에게, 우리의 손녀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이웃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면 내 생명도 결코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전화 한통 해주지 않는 사회,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단 1분도 내어줄 수 없는 비정한 사회가 과연 사람이 사는 사회입니까? 오늘 이 사회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동생의 핏소리를 외면하고 하나님 없는 땅, 에덴의 동쪽으로 도망간 가인이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이렇게 비정하고 살 떨리는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덴의 동쪽을 살고 있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사람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두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두 눈은 세상만 보는 눈이 아닙니다. 한쪽 눈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한쪽 눈으로는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저의 한 쪽 눈에는 인간성을 잃어버린 세상이 보였고, 다른 한쪽 눈에는 인간성을 회복하라는 성서의 세계가 보였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보는 우리의 두 눈에 무엇이 보여야 합니까? 오늘 이런 사회를 향해서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창세기 이야기는 범죄 한 사건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과거의 사건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늘 우리의 인간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휘말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이 첫 번째 범죄이고, 이어서 형이 동생을 죽인 것이 두 번째 범죄입니다. 아담의 죄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라면, 가인의 죄는 인간관계를 단절시킨 사람 앞에서의 범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가 아담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죄가 퍼져나갔고, 이 죄의 권세는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사회적 측면에서 본 죄는 부부를 남남으로, 형제를 원수로, 친구와 이웃을 경쟁자로, 다른 민족과 나라를 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죄는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만 멀어지게 한 것이 아니라, 부부 사이를 남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어느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꼬리를 물고 또 다른 범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 한 피 받고 한 몸 이룬 형제끼리 살육전을 벌이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과 아름다운 세상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죽임과 타락과 저주의 대상으로 뒤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서는 인간이 범죄 한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최초로 던진 질문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이 질문은 아담 한 사람에게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에게, 어제의 인간에게,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존재,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신 앞에 설 때에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진 질문만은 아닙니다. 역으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살았던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던졌던 질문입니다.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당하거나, 극심한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욥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는가?”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겪을 때 “하늘도 무심하시지!” 했습니다. 하나님만 인간을 향해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한 상태에서 자녀를 낳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아들을 낳았는데 가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두 번째도 아들을 낳았는데 아벨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두 형제는 서로가 다른 문화를 개척해 나갑니다. 가인은 정착해서 농사를 짓는 농민이 되었습니다. 아벨은 목초지를 따라서 다니는 유목인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인류의 문화의 두 축이 되는 농경문화와 유목문화를 말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가인은 농민의 조상이 되고, 아벨은 유목민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이 두 형제는 부모의 영향을 따라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각각 예물을 준비하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나갔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이어서 곡식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아벨은 목축하는 사람이었기에 양의 처음 난 새끼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제사의 문제로 두 사람은 생의 기로를 달리하게 됩니다. 거절당한 가인의 제사와 즐겨 받으신 아벨의 제사를 놓고 후대 사람들은 많은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결국은 하나님을 향해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마음을 품자 사랑의 대상이었던 동생이 질투의 대상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척되고 아벨만이 사랑의 대상이 된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어긋난 가인의 마음은 동생 아벨에게 질투와 분노로 이어집니다.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 “몹시 분하였다.”고 성서가 증언합니다. 그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분하다 못해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자 얼굴과 마음이 일그러졌습니다. 가인의 분노와 안색이 변한 얼굴은 아우를 죽이려는 충동으로 몰고 갑니다. 이제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아우”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원수”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인은 분노를 가눌 수 없어 아우를 들로 유인하고서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일 때 ‘들’로 유인했습니다. ‘들’은 굉장히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관계가 파괴된 장소, 범죄가 일어난 장소, 증인이나 목격자가 없는 장소입니다. 성서는 우리의 인간성과 관련시켜서 자신만 살아남기 위해 이웃을 죽이는 장소를 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죽어가는 택시기사를 내팽개친 승객만이 아니라 오늘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이웃이 죽어도 관심이 없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이웃도 눈 깜짝하지 않고 해를 끼치는 가인의 들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이웃과의 관계를 너무도 쉽게 망각하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바로 곁에 있는 이웃이 죽어가는 데도 뻔뻔하게 가인처럼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반문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범죄 할 때마다 인간끼리 공동체 의식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증인 없다고 하면서 범죄를 저지릅니다. 또한 증인이 있어도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아우 아벨’이라는 말이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벨이 가인 다음에 태어났으니 아우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일곱 번이나 “아우 아벨”을 반복하면서 인류가 형제성을 띤 공동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만의 세상이 아니라, 너만의 세상이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얽혀 있는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 없이 동생 없고, 동생 없이는 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너인 아우를 죽임으로 형제공동체가 깨어졌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에 이 아벨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죽임 당한 아벨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숲 속에 몸을 숨긴 아담을 찾으시던 바로 그 하나님이 무지하고 보잘 것 없고 가엾은 아벨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아벨이 보이지 않는 것이 가인의 탓인 줄 아신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책임을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네 이웃이 어디 있느냐?”
범죄 한 아담에게 말씀하신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하는 인간의 위치를 말씀하십니다. 범죄 한 가인에게 말씀하신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물으신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의 죄라면 가인의 죄는 관계를 파괴시키는 죄악입니다. 한 피 받고 한 몸 받은 동생을 원수로 만드는 죄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랑의 관계마저 깨트릴 수 있는 영악한 죄인입니다. 잘못된 자아의식은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형제공동체마저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가인은 뻔뻔스럽게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변명과 책임 회피의 항변을 늘어놓습니다. 아벨의 죽음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저에게 이 이야기는 “나는 모릅니다. 내가 택시기사를 보호하는 자입니까?” 소리처럼 들려집니다. 이웃이 배가 고프고, 사랑이 그리워서 죽어 가는데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마음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동생의 피로 얼룩진 땅에 가인이 안주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고 유리 방랑하게 만드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정착한 곳이 어디입니까? 창세기 기자는 ‘에덴의 동쪽’ 이라고 말합니다. ‘에덴의 동쪽’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에덴동산’이 아닌 에덴 동편으로 사람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에덴의 동쪽’이란 하나님 없는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에덴의 동쪽’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자진해서 거절한 땅이 에덴의 동쪽입니다. 은혜를 거절하고 자기 힘 믿고 살고, 밟고 밟히는 세상이 에덴의 동쪽입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회가 에덴의 동쪽입니다. 자기를 태워다주던 택시기사가 죽어 가는데도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에덴의 동쪽 666번지입니다.
하나님도 이웃도 잃어버린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한 서기관에게 “최고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서 신구약의 모든 계명을 축약해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계명을 아담에게 던졌던 질문, 가인에게 던졌던 질문과 비교해 보면 보다 더 명확하게 성서의 메시지가 드러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아담아! 하나님 앞에 서 있으라. 사람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첫째 계명입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가인아! 동생을 사랑하라. 사람아!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둘째 계명입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에게 던진 질문이 하나님 앞에 책임적 존재로 서야 하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사람 가인에게 던진 질문은 이웃 앞에 책임적 존재로 서야 하는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인간성이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연설문 한편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난 2004년 7월 오바마 대통령이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 때 행한 연설문입니다. 단순한 연설을 뛰어넘어 한편의 신앙고백을 듣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무명 정치 신인에 불과하던 오바마가 이 연설로 말미암아 미국 전역의 스타로 부상하게 된 일명 시카고 연설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저에게 영광스런 날입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이 연단에 서 있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는 케냐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으로 유학을 온 외국 유학생입니다. 그는 염소를 치면서 성장했고 양철 지붕으로 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의 아버지, 저의 할아버지는 노예였습니다. ....
만일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닐지라도 그 사실은 제게 중요합니다. 만일 어딘가에 약값을 지불하지 못하는 노인이 의료비와 월세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녀가 제 할머니가 아닐지라도 제 삶마저 가난하게 만듭니다. 만일 어떤 아랍계 미국인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체포당했다면, 그것은 제 시민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
저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다. I am brothers keeper. 저는 제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I am sisters keeper. 이것이 바로 이 나라를 작동하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인적인 꿈을 추구하지만 미국이라는 하나의 가족으로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럿으로 구성된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습니다. 힘의 논리로 약자를 무참하게 짓밟고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옆에 이웃이 죽어가는 데도 “네가 이웃을 지키는 자입니까?” 반문하는 살벌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절한 땅, 이웃과의 관계를 거절한 땅에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형제를 지키는 자로 말입니다. 자매를 지키는 자로 말입니다. 여러분의 아우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아우의 소리를 들을 때, 이웃의 소리의 들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형제를 지키는 자로, 자매를 지키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열납된 예배와 거부된 예배
이기복목사 / 하늘문교회
2018년 1월 둘째 주일을 맞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신년주일 저녁부터 신년축복성회가 열려 년초부터 은혜 받고 영적으로 무장을 하였습니다. 또한 지난 한 주간은 1월 첫주 전교인 새벽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금년 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고 눈도 많이 와 아주 안 좋은 환경 중에도 열심을 다하여 부흥회에 참석을 하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신앙의장부들입니다. 올 한 해도 1년 내내 365일 은혜가 충만하여 날마다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요즈음 지구촌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생겨 그 피해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지역에서는 폭설과 강풍이 불어닥쳐 도시가 마비되고 비행기가 무더기로 결항하는 등 큰 재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는 극심한 가믐으로 사상 최대의 산불이 나 엄청난 임야를 태우고 인명 피해를 입히더니 지난 주간에는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가 나고 난리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시아인 중국의 중 동부지역에서도 폭설로 인하여 큰 재난을 당하였고 프랑스에서는 태풍이 불어 강이 범람하는 재난이 겹쳤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주간은 일주일 내내 눈이 내렸고 강추위가 엄습하여 상당히 추운 날씨였습니다. 이 모든 원인이 북극에서 오는 재난인데 그 원인이 지구 온난화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기상이변이 오니 요즈음 악성 독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독감을 앓은 사람들은 흔히 말하길 “죽살이쳤다”고 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각별히 건강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북한의 핵위협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한반도의 겨울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여기로 하면서 차단되었던 남북의 대화의 문이 열려 한반도에 화해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아직은 이르지만 제발 비핵화까지 결실이 오길 갈망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금년도 우리교회 표어는 “예배생활 승리하여 인생의 성공자가 되라”입니다. 이 표어 아래 년초부터 예배생활을 새롭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동안 소홀해진 예배생활을 새롭게 갱신할 때가 되었습니다. 금년부터 5대 예배중 최소한 한 가지라도 새롭게 도전하여 예배의 회복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작년 2017년도 한 해 동안에 5대예배와 4대 예배를 성공한 성도가 28명이나 됩니다. 5대 예배란 주일 낮, 저녁, 수요예배, 가정속회 그리고 새벽기도회입니다. 5대 예배를 성공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크고 위대한 일입니다. 믿음과 건강과 환경의 복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생활의 타락에서 온 것입니다. 즉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예배생활이 형식화 되고 습관적인 차원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고 적의 침략으로 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사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즉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예배생활의 갱신과 회복이었습니다.
였을 때는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회개하며 예배를 회복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싸워 주시고 적들을 물리쳐 주셔서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록으로 나온 인류 최초의 예배드린 기록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을 말하는 창세기 1-2장은 우주 만물의 시작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니라”로 시작을 했습니다. 성경 첫 장에 하나님이 계시냐 아니 계시냐를 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2장에 최초의 가정의 시작을 말씀했습니다. 그것이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짝지어 주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야기입니다. 즉 최초의 인간의 범죄에 대한 말씀으로 그 좋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그리고몇 남자는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면서 노동의 고생을 하게 되었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최초로 예배를 드린 말씀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이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4장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예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나란히 제단에 나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과 예배는 받아 주시고 가인의 제물과 예배는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도 주일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성전으로 나아옵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는 얼마나 될까요? 동시에 거부되는 예배와 예물도 꽤 많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적인 인생이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각 사람마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신과 비결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많이 배워야 성공한다고 하여 기회 있는 대로 열심히 배우려고 합니다. 과거에는 땅과 집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근면하고 열심히 노력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심지어는 밤낮없이 일을 합니다. 그 유명한 나폴레온은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없다”며 하루에 세 시간씩 잠을 자고 열심히 뛰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를 잘 가져야 성공한다고 하여 인맥, 학연, 지연을 총동원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줄을 서고 호의를 베풀고 야단합니다. 외모가 중요하다고 하여 성형수술을 하고 처세술을 배우고 하는데 그 결과는 배신감을 느끼고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요즈음은 벼락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다니면 더 멀리 날아가듯 성공의 신기루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태초에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였으나 범죄한 이후에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연결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관계에 있어서 예배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인간의 성공과 불행의 판가름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생활입니다.
교회도 예배가 살아 있으면 그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이고 예배가 죽은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같은 일이 곧 예배입니다. 이것을 간과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거나 형식적으로 드리고 죽은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예배가 이렇게 중요한 것을 깨달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그런 사람은 예배의 매 순간마다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요 시간도 물질도 모든 것이 예배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고 예배를 실패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사탄 마귀입니다. 이 시대에 유명한 신앙인이요 성경학자인 마틴 로이드 존슨 박사는 영국교회가 타락한 근본 이유가 예배의 타락으로 진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교인 영국교회가 타락한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강대상이 중앙에서 한 쪽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설교자들이 강대상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를 간증자들이 차지한 것이라고 분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교회가 부흥되고 나라가 강성해 지면 잘 된 때를 보면 예배가 살아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먼저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갱신이 앞서야 합니다. 예배의 회복이 최우선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는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그러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타락한 영국교회나 화란의 청교도들이 영국을 탈출하여 신대륙인 미지의 땅 미국으로 이주를 한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자유 곧 예배를 바로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1776년 가을에 102명의 청교도들이 목선인 메이훌라워호를 타고 죽음을 무릎쓰고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에 도착을 한 것입니다. 가장 추운 겨울에 도착을 하여 추위와 배고픔과 질병으로 많은 동료들을 잃었으면서도 제일 먼저 행한 일은 예배당을 짓고 학교를 짓고 공공시설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예배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축복을 받아 오늘의 미국을 세우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의 위협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주일날 일도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조상에게 드리던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만 타협했다면 핍박 받지 않고 순교하지 않고 신앙생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예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와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와 제물은 받으셨을까요? 성경에 구체적으로 그 해답을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와 제물을 받으신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 예배는 먼저 그의 마음과 자세가 중요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 형 가인과 동생 아벨이 나란히 나가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상상만 해 보앋 얼마나 아름답고 좋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걷 모양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물과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의 몸과 마음의 자세였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제사를 드린 다음의 마음이나 행동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가인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드렸다면 자기의 예물과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하여 분개하고 화를 낼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부족함을 성찰하고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이 하나님이나 동생의 잘못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는 자세를 가졌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동생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에 대하여 몹시 불쾌하게 여겼고 더 나아가 분하여 안색까지 변하였습니다. 본문 5절에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몹시 분하여”란 말은 “심하게 분노하였다” “또는 강하게 화를 냈다(it was very angry)”는 뜻입니다. 그리고 “안색이 변하였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이펠루 파나유”인데 그 뜻은 “마음에서 분노가 타오른다”는 의미입니다. 얼굴색이 변하고 우르락 부르락 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마음이나 자세는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아주 방자하고 불손하고 경솔한 자세입니다.
오히려 회개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자세가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이러한 모습은 죄인들의 일반적인 태도요 모습입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더 큰 소리를 치고 화를 내고 심하면 물건을 집어 던지고 야단을 합니다. 이러한 가인의 모습은 오늘날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나 어떤 회의를 할 때도 보면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못한 것을 진신으로 뉘우치고 회개해야 하는데 오히려 변명을 하고 안색이 변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악담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의 마음과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 1서 3:12절에 요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자기의 잘못이나 악함을 가리기 위하여 얼굴색이 변하고 심히 분노하였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아우를 주인 것에 기인하지만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의 내면에 악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예배는 형식이나 예절보다도 그 의미와 자세가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은 이를 잘 대변합니다. 바리새인은 청산유수로 기도를 하였고 자기의 공덕을 나열하고 큰 소리를 치며 심지어 저 한 쪽 구석에서 훌쩍거리며 소리도 못 내고 기도하는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제단 앞에 나오지도 못하고 뒤에 앉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물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열납하신 기도는 세리의 기도였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3절에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절에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가인이나 아벨이 드린 제물의 종류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물이 식물이냐 곡식이냐 조류냐 아니면 동물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제물을 바칠 때는 제물만 바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도 함께 바쳐야 합니다. 나도 제물과 함께 하나님께 바쳐져야 온전한 제물입니다. 그러나 땅의 소산물이 곡식과 양의 첫 새끼를 드리는 그 마음이나 자세는 엄연히 다릅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물이라고만 했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성별된 소산물이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단지 땅의 소산물 중에 아무 것이나 여호와께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제물의 구별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양 중에도 첫 새끼를 성별하여 드렸습니다. 출 13:2절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아벨은 양의 기름을 드렸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동물의 기름을 음식으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향기로운 번제로 태워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의미는 ㄱ징 좋은 것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최상의 것을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물을 드릴 때에도 있는 것 중에 아무 것이나 하나 드리는 것과 최상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냥 가진 것 중에 아무 것이나 드리는 것과 하나님께 드리려고 성별하여 드리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촌에 어떤 농부가 소를 기르는데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한 마리는 얼룩 송아지이고 한 마리는 누런 황색 송아지였습니다. 농부는 너무나 기뻐 아내에게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말하길 얼룩이나 황색 송아지 중에 어느 송아지를 하나님께 드릴 것인지 구별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말하길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 결정해서 드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난 다음 그 지역에 짐승 전염병이 돌아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냠편이 부인에게 와서 한탄을 하면서 “여보, 오늘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송아지가 죽었어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 우리는 무엇을 제물로 드리던지 정말 성별하고 최상의 것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우리에게 최상의 것을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가장 귀한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재능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주일 예배를 드려도 가장 소중한 가운데 시간인 11시에 예배를 드렸고, 하루 중 첫 시간인 새벽시간을 드렸고 저녁예배도 7시나 8시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알고 보면 이 시간들이 가장 소중한 황금의 시간입니다. 성도들은 헌금을 드려도 가장 가치 있는 돈을 준비해서 드렸습니다. 지금은 5만원권이 생겼지만 과거에는 1만원짜리가 가장 큰 돈인데 주일 헌금은 1만원을 들렸습니다. 이것이 같은 제물이지만 가장 귀한 것 최고의 것을 드리는 자세요 믿음입니다.
3.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히 11:4절에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지금도 말하느니라” 창세기 본문에는 이러한 말씀이 없지만 신약에 와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장에서 이렇게 증언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배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또는 엄숙하게 예배를 드려도 믿음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열납되지 않습니다. 히 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없이 행하는 것은 하나의 행사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인은 무엇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당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은혜를 받고 너무나 기뻐서 자기 밭을 팔아 하나님께 받치겠다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밭을 팔아 돈을 받고 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부부가 의논을 하길 이룹만 해도 많으니까 일부는 농속에 감추어 두고 일부만 가지고 가서 사도들에게 가서 드렸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이것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도나 누가 아나니아 부부에게 밭을 팔아 바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은혜받고 결정을 하고 결국은 시험에 들어 하나님을 속이다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은 신실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 당연합니다. 예배마저 위선과 거짓으로 드린다면 그것은 정말 잘못된 신앙입니다. 또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정직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4. 예배를 드린 다음이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린 다음부터가 예배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린 사람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온전한 예배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만약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아주 경건하고 온갖 정성을 다 하면서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생활에서 예배자의 참된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목사가 가장 어려운 것이 설교한 말씀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많은 비난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당에서의 기독교인과 사회나 직장에서의 기독교인의 차이와 괴리라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경우를 보십시오. 예배를 드린 사람이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들에 있을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우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가인에게는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나 들판에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9절에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죄를 짓고도 모르는 척 핑계를 하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칩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생활로 연결된 예배입니다. 예배 시간도 중요하지만 예배를 드린 다음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안색이 변하거나 시기와 질투가 앞서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