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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낙랑군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가?>
한 무제가 우거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강역에 설치 했다는 낙랑군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늘날 역사학계 전반에서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민족의 진실된 역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로막는 단초이기 때문이다. 이 낙랑군이 처음으로 문헌기록에 수록된 것은 반고의 한서지리지이다. 우거조선의 강역에 설치된 낙랑군이라는 명칭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은나라의 도가 쇠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가서 그곳 백성들을 예의, 농잠, 방직으로 교화하였다. 낙랑 조선의 백성들은 8조를 금하였는데..”라는 한서지리지의 구절에서 낙랑조선을 주목하자.
반고는 왜 기자가 망명한 조선과 낙랑조선이라는 두 가지 명칭을 사용했을까? 한서지리지에서 기술한 순서로 보자면 먼저 기자가 조선에 들어가 교화했다고 하였으며, 이어 낙랑조선의 백성들에게 8조를 금하였다고 했다. 낙랑조선과 조선이 하나의 명칭이라면 굳이 조선을 구분해서 기술할 필요성이 없다. 따라서 낙랑과 조선은 다른 정치체이다. 그러나 주 무왕 시기 조선은 하나의 정치체를 갖춘 나라가 아니라 다수의 종족들이 연합 형태로 존재하다가,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있는 큰 고을인데, 동쪽으로는 예맥․조선․진번에서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라는 사기 화식열전에 따르면 점차 통합되어 하나의 정치체를 갖춘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한서지리지에 “현도, 낙랑은 무제 때 두었다. 모두 조선, 예맥, 구려의 만이(蠻夷)이다.”라고 하여 낙랑군이라는 명칭을 반고가 임의적으로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우거조선이 멸망하고 그 강역에 낙랑군이 설치 되었다는 한서 조선열전의 기록까지는 낙랑군에 대한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3세기 어환과 진수에 이르러 낙랑군에 대해 문제가 발생한다.
어환은 삼국지사전에 따르면 삼국시대 위나라 경조인이라고 하였으며, 배송지에 위(魏)에서 낭중(郎中)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때 유지기가 쓴 사통(史通)에 “진수에 앞서 위나라 경조인 어환이라는 사람이 남몰래 위략을 썼는데 그 기사는 명제에서 끝난다고 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어환이 편찬한 위략은 실제 하였다. 그러나 어환에 대해 알려진바가 거의없다. 그후 진나라 관리인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부족한 삼국시대의 자료를 어환의 위략으로부터 취하였다. 이로인해 위략은 타의에 의해 정사에 버금가는 가치를 부여 받게 되었다. 위략은 위나라에 관한 사항, 시간의 흐름 등을 구체적으로 적어놓은 역사서로 가치가 매우 높다고 일컬어지는데, 문제는 촉한에 관한 내용은 사실상 허구로 차있는 것들이 많아서 촉에 관한 평가 사료로는 적합하지 않다. 더욱이 위나라 북방에서 호령하던 오환과 동이에 관한 내용들은 기존의 사료를 바탕으로 간간히 전해오는 풍문을 엮어 기록한 것으로 허무맹랑한 내용이 많다.
어환은 위략에서 조선이 기자의 후손이라 했으며, 진나라가 들어섰을때 조선왕은 부(否)였다고 하였다. 사기 율서에 “진(秦)나라의 전성기 때부터 복종하여 신하가 되었는데, 뒤에 또 험준한 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는 진출하려고 꾀하였다.”라고 하였다. 사마천의 기록에는 조선이 진나라에 복종한 것으로 표현하였으나, 조선왕의 이름은 수록하지 않았다. 사마천은 조선이 멸망할 동 시기에 생존하였던 인물로 조선왕의 이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어환은 사마천과 반고도 수록하지 않았던 기자의 후손인 조선왕의 이름이 부(否)와 준(準)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도 기존의 사료를 바탕으로 어환 자신의 생각을 덧칠 하지 않았나 싶다. 아래 자료에서 분명해진다.
<위략>
뒤에 자손(子孫)이 점차 교학(驕虐)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해 2천여 리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그곳을 경계로 삼으니 마침내 조선(朝鮮)이 쇠약해졌다.
<사기 흉노전>
그 후 연(燕)나라에 현장(賢將) 진개(秦開)란 이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胡)가 그를 매우 신임했다. (연나라로) 되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東胡)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공격한 대상이 사마천은 동호라고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환은 조선이라고 한다. 진수는 이에 더하여 준이 연인 위만에게 쫒겨 바다로 들어가 한(韓) 땅에 거주하며 한왕이라 자칭했다고 하였고, 한나라 때는 낙랑군에 속하여 사시로 조알 했다고 한다. 진수가 말하는 한(韓)은 바로 마한이다. 이로써 낙랑군이 한반도에 상륙하였다. 후한서 한전에 “서기 44년 한(韓) 염사인(廉斯人) 소마시 등이 낙랑군으로 와서 공헌하니, 광무제가 소마시를 한나라의 염사 읍군으로 봉하고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사시로 조알 하도록 했다.”라고 하였다.
후한서 등을 인용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서기 44년 가을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광무제가 낙랑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기록 어디에도 광무제가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내용이 없다. 후한서의 오류를 지적하기보다는 왕건고려 최고 학자인 김부식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기 위함이다. 김부식은 대동강 유역을 낙랑군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씨조선에 들어와서는 사대주의에 입각해 더욱더 고착 되었다.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이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고착화 시키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후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탈을 시작하였다. 1890년대 청·일전쟁을 앞두고 대륙 침략 기운이 높아지면서 일본 동경제국대학 관변학자들에 의해 조선사연구가 시작되어 여기에서 이른바 만선사관이 날조되었다. 만선사관이란 만주가 한반도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 역사가 만주사의 일부라고하여 만주사에 대한 종속을 강조하는 것이다. 만선사관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나바 이와기치와 도리야마 기이치 등이 있다. 특히 도리이 류조는 청일전쟁 직후 지질학 조사를 위해 요동반도에 갔었다.
이 때의 조사에서 도리이 류조는 석목성 부근의 고인돌을 발견하였고, 이것이 그가 해외 조사에 힘을 쏟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05년 도리이 류조와 세키노 다다시 등이 만주일대를 조사하였고, 1909년 평양일보 사장인 시라카와 쇼지로부터 대형고분의 존재 이야기를 들은 통감부 촉탁인 세키노 다다시가 석암동 고분(전실분)를 조사하였다. 그 뒤 도쿄대 하기노 요시유키와 이마니시 류 팀이 이끄는 발굴단도 똑같은 형식의 석암동 을분을 조사했다. 이 두 번의 발굴을 주도한 세키노 다다시와 하기노 요시유키 등은 둘 다 고구려 고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듬해 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는 ‘이것은 낙랑고분이 확실하다.’고 반박하였다. 1912년 이마니시 류와 세키노 다다시는 평양 고분이 고구려 고분이라는 설을 폐기하고 도리이 류조의 학설을 좇아서 낙랑 고분이라는 설을 제시한다.
1913년 이마니시 류와 세키노 다다시는 대동강 남안의 밀집한 고분군에서 낙랑토성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낙랑예관(樂浪禮官)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와당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 봉니(封泥)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마니시 류는 평남 용강군 어을동에서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였다. 이후 일본 총감부는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본격적인 고적조사사업을 펼친다. 고적조사 개요를 보면 “한치군(漢治郡), 즉 한나라 식민지가 된 한사군 지역을 주로 조사한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 학자들을 통해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실증유물이 발견되면서 왕건고려부터 이씨조선까지 문헌기록으로만 생각했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1925년 조선총독부 직속으로 조선사편수회가 설치되자 이병도는 이마니시 류의 수사관보가 되어 조선사의 고려 이전 시기를 담당했다. 그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걸쳐 일본 학자들이 발행하던 사학잡지, 청구학총 등에 진번군고, 현도군 및 임둔군고, 패수고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모두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또한 이마니시 류는 1935년 출간한 ‘조선사의 길잡이’에서 한국사의 시작을 한사군부터라고 서술하였다. 이병도, 이기백, 노태돈 등의 학설은 대동강 유역이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라는 것이다.
사기 태강지리지에 보면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이라고 처음 주장한 인물이 만선사관을 주장하던 대표적인 학자인 이나바 이와기치라는 점과 이를 인용한 것이 이병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어째든 한 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라는 사실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일본인도 중국인도 아닌 우리 자신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몇몇 실학자들과 일제 시기 양심있는 학자들에 의해 잘못 인식된 역사관을 비판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현재 주류 사학계에서는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이라는 이마니시 류 등의 주장을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고조선 연구에 열풍을 일으킨 사람이 등장 하였으니, 그가 북한학자 리지린이다. 리지린은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북경대에서 유학하였다.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리지린은 1961년 북한으로 귀국하여 ‘고조선연구’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 리지린의 저서는 한국에 적극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이라는 이마니시 류 등의 주장과 이를 계승한 주류 사학계에 대한 반론이 시작되었다.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이라는 이마니시 류 등은 실증유물인 낙랑태수장 봉니와 점제현신사비를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증유물에 대해 반론을 펴는 사람들은 이마니시 류 등의 조작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실증유물이라함은 기본적으로 유물에 낙랑군을 유추할 수 있는 문자가 있어야 한다. 이마니시 류 등이 내세운 실증유물인 낙랑태수장 봉니와 점제현신사비에는 낙랑군을 유추할 수 있는 문자가 있다. 따라서 주류 사학계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유물이 조작이라는 주장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유물을 발견한 시기가 일제 강점기이며, 그 유물을 발견한 사람들이 만선사관을 부르짖던 동경제국대학 학자들이라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낙랑군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문자가 있는 유물의 발견을 어떻게 우연이라 할 수 있는지, 그후 낙랑군이라고 유추 할 수 있는 문자가 있는 유물이 왜 발견되지 않는지?
정인보는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낙랑군이라 유추할 수 있는 다수의 봉니에 대해 그 허실을 밝힌바 있다. 특히 낙랑대윤장 봉니는 논쟁의 중심이다. 왕망 시기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으로 바꾼 것과 낙랑군의 이름을 낙선군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낙랑대윤’은 있을 수 없으므로 봉니는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반박하는 사람들은 왕망이 관직명과 지명을 동시에 바꾼 게 아니고, 서기 9년 관직명을 바꾼 이후 5년 뒤인 서기 14년에 지명을 바꿨다는 것이다. 즉 5년 동안은 낙랑을 낙선으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였으므로 낙랑대윤장이라는 관인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서 왕망전를 보면 지명을 바꾸었다고 할 만한 구절이 없고, 본기나 열전 어디에도 낙선이라는 지명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한서지리지에만 수 많은 지명이 바뀐 것으로 나타난다.
서기 9년 신나라를 건국한 왕망은 황제의 인수를 지닌 사신들을 사방으로 파견하였다. 한서에 따르면 “동쪽으로 출발한 자는 현도, 낙랑, 고구려, 부여에 이르렀다.”라고 하였고, 이때 동북방으로 파견된자는 오위장 왕기(王奇)라 하였다. 그러나 오위장 왕기가 현도군, 낙랑군 고구려, 부여에까지 이르렀다는 문헌기록이 없어 자세하지 않다. 단지 이듬해 오위장 등 72인이 환국하여 보고하였다는 구절만 보인다. 한서에 등장하는 현도군과 낙랑군이 한나라의 군현이라면 굳이 고구려와 부여 앞에 기술할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다. 이는 한 무제때 설치한 낙랑군과 현도군이 한나라 영향권 밖에 놓여 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낙랑군이 왕망의 지시에 따라 관직명과 지명을 바꿀 이유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한서에 “왕망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오랑캐를 치고자 하니, 고구려 군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왕망이 억지로 보내니, 고구려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변방으로 나와 법을 어기고 노략질을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구려족 군사 동원을 담당한 군국은 요서군이었다. 이때 요서군 관직명이 대윤이라 하였다. 한서의 본기나 열전에서 낙랑군이 낙선군으로 바뀌어 기록된 실례가 없는 상황에서 한서지리지 낙랑군조에 왕망이 낙선이라 하였다는 기록은 무엇인가?
“이제 고구려의 이름을 바꾸어 하구려라 하니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 수 있도록 하라.”라는 왕망열전의 구절이다. 이를 반고는 한서지리지 현도군조에 고구려현은 왕망이 하구려로 고쳤다고 하였다. 왕망열전에서 종족의 개념인 고구려를 하구려로 격하시킨 것을 두고 한서지리지에서는 일개 군현의 이름을 하구려라고 개명했다고 하니, 이것으로 보아도 낙랑군을 낙선군이라 개명했다는 한서지리지 기록의 신빙성에 의심이 간다. 이러하기에 정인보는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낙랑군이라 유추할 수 있는 다수의 봉니에 대해 그 허실을 밝힌 것이다.
1913년 이마니시 류가 대동강 하류 지역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신사비는 1915년 3월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3매의 사진이 실려있다. 그런데 2매의 사진은 첫행이 ‘○○○○○午禾占單○○○’로 되어 있고, 동경공과대학장이라고 되어 있는 1매의 사진은 ‘○年四月戊午禾占單○○○’라 하여 ‘年四月戊’라는 네 글자가 삽입 되어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은 이 당시 동경공대 학장이 바로 세키노 다다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마니시 류는 세키노 다다시 일행과 떨어져 어을동 토성으로 갔다. 이곳에서 이마니시 류는 특별한 유물을 발견하지 못해 면장에게 뭔가 옛 물건이 없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면장에게서 옛 비가 하나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토성에서 400미터 떨어진 들판에 비스듬하게 세워져있는 비석을 발견한다. 이마니시 류는 다음날 다시와서 탁본을 뜨고, 평양으로 출발하여 세키노 다다시 일행과 합류하였다.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탁본 판독을 하였고, 점제현신사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려진 점제현신사비 3매의 사진을 비교하면 글자가 삽입된 것이 분명하다. 이는 점제현신사비문 내용이 조작 되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최근 북한의 고고학연구소에서 점제현신사비에 대한 화학성분을 분석하였는데, 점제현신사비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2천 9백만 년±1천 3백만 년이고 온천 화강암의 생성년대는 1억 4백만 년±1천 2백만 년이라 하였다. 이것은 점제현신사비 화강암이 그 근방의 화강암과는 돌의 나이에서 완전히 구별되는 다른 지방의 화강암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에대해 손영종 박사는 “점제비를 분석한 결과, 중국 랴오닝성 근방 화강석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낙랑군은 조선 반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처럼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증유물들이 상기와 같은 이유로 인해 조작 되었다는 주장에 동의 할 수밖에 없다.
실증이란 실제로 증거를 댈 수 있는 것을 이른다. 증거를 댈 수 없는 것은, 곧 허구이거나 거짓말(조작) 또는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실증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증은 객관적 인식이자 과학정신이다. 실증의 수단으로 대개는 문서 사료와 고고학적(물적) 사료가 거론된다. 그러나 특정한 시기나 사건을 유추 할 때, 고고학적(물적) 사료는 문서 사료에 비해서 제한적인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적(물적) 사료에는 반드시 문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면에서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물적) 사료의 가치는 크다 하겠다. 다만 고고학적(물적) 사료가 그 가치를 인정 받기 위해서는 문서 사료와의 비교검증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물적) 사료에 대해 일본학자들과 이를 계승한 주류 사학계는 문서 사료와의 정밀한 비교검증 없이 왕건고려부터 이씨조선까지 이어온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대동강이라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이제라도 이들은 아집과 권력적 역사관을 버리고 머리를 맞대어 문서 사료와의 정밀한 비교검증을 해야할 때이다. 비교검증 해야할 문서 사료의 기준는 반고의 한서를 비롯하여 그 이전에 편찬된 역사서로 한정한다. 이에 동명은 사기와 한서를 가지고 대동강 유역이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아니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기술 하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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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정도라면 낙랑군평양설 주장은 학문이 아니라 종교군요.
하하하하. 님이 이런 댓글을 다니 되게 웃기네요. 근거 좀 대세요. 궁금하면 알아보라는 말장난 치지 마시구요. 님 근거 없죠? 없는데도 자꾸 있다고 우기는거 보니 그 근거라는게 님 머리속에만 있는가 봐요. 60억 지구인이 모르는 단 하나의 근거가 님 머리속에 있다면 님이 비정상인겁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비정상인 겁니까? 애초부터 근거도 없이 무작정 못믿겠다는 댓글만 계속 적는거 보니 정말로 없나 보군요. 계속 그렇게 머리속 근거에만 의지한채 세상살면 재미나긴 하겠네요. 직장 생활은 잘하고 계신가요? 그런 사고방식으론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길텐데요?
@bergi10 님이 지금 낙랑군평양설을 종교처럼 믿고 행동하고 있는거 아시죠?
남이 직장생활을 잘하던 말던 그건 그쪽이 상관할 바가 아닌데.. 드디어 이제 인식공격까지 하시는군요. 종교인의 특징은 자신과 다른 주장을 못참고 반대하는 자를 어떻게서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죠.
지금 님의 행동이 그래요. ㅉㅉ
@bergi10 한심합니다 저희 아이들도 이 카페 보거든요 멀 배우겟어요 눈팅도 할만합니다
학계의 통설인 낙랑군평양설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면 적당한 근거를 대셔야죠. 저는 딱히 누군가(또는 특정 학설)를 지지하려는게 아니라 부르간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군요.
@달단 이런글 쓰기전에 제가 쓴글을 검색정도는 하셔야죠?
@bergi10 동명님 만큼의 필력이라도 보여주시고 비난하세요. 너무 어린 아이 같네요. 먼저 근거 대라 하지마시고 본인이 근거로 반박하면 되지 않나요? 다짜고짜 직장이니 근거니 하지 마시고 지성인 다운 대화를 보여주셔야지요. 안타깝네요.
@부르간不咸 그야 당연히 검색해 봤지요. 낙랑과 관련된 글 두어개가 뜨기는 하는데 어느정도 참고는 되지만 그래도 부족한것 같아서요...
@달단 님께서 의견을 올려주시면 참고하여 보완해 보도록 하지요.
상호간의 비방은 자제하시길 바랍니다.
낙랑군 위치가 변동되었었다는 추정의 근거는 사마천과 반고가 언급한 패수가 다르기 때문이고 낙랑군 위치를 사마천 당시는 란하, 반고 시기에는 요하 부근이라고 하시는 거지요?
그러면 반고 시기의 요동군 위치와 요하는 지금의 어느 지역이며 어느 강이였다고 보시는 건가요?
@동명
녜, 저 역시 반갑습니다. 한국고대사에 대한 님의 열정과 논지를 잘 보았습니다. 특히 낙랑군 언급이 진부하지 않으며 그 위치를 한반도 대동강 지역으로 볼 수 없다는 님의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에 더욱 반갑고 고맙기까지 생각되며 앞으로 즐거운 토론 기대해 봅니다.
본론; 굳이 요동군을 비정하자면 대릉하 중.하류 지역이라 하셨는데 이것이 또 저에겐 의문이군요. 반고는 분명히 요동군을 경유한 후 바다로 들어간 대요수를 지목하여 설명했고 이후 대요수는 2000 여년 동안 한국 고대국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패수 못지 않게 요수도 중요한데, 대릉하 중하류에 요수가 흘러야 한다면 비정이 아주 난감하군요.
나무곽무덤...귀틀무덤..벽돌무덤...그리고..적석 목곽분....이게 일반적인 흐름인가요...
아님 벽돌무덤에서 주구묘..외형상 전방후원분..그 안은 굴식 석실분으로 변한건가요...근데 별돌무덤에서 주구묘로 그건 아닌것 같고..그렇다고 외형상 전방후원분이고 그 안은 굴식 석실분으로 변한다는건 흐름이 너무 빨라서 믿음이 안가고..도대체 뭐가 뭔지...ㅜ.ㅜ
친일파 이병도가 해방이후 학계를 장악하고 그 제자들이 대학강단을 장악하여 식민사관을 확대 재생산하고 마치 정설이니 통설이니 강변하고 있습니다. 해방이후 친일청산 실패로 학계마져도 친일파들에게 장악되었고 식민사관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식민사관을 재생산하는 자들을 용납해선 안될터입니다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