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인연이 다 되었나 봅니다. ^^ () 그리고 논란 중 저의 험한댓글로 인해 눈쌀을 찌푸리실 횐님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죄송의 변을 올립니다.^^ () 모쪼록 이 곳 원불사 횐님들 항상 좋은 날 되시고 부처님의 자비와 가피가 늘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하면서 무연이는 떠납니다. 본래 없었던 것 처럼...^^()
무연님께 먼저, 아쉬운 마음이 앞서는 군요. 저 또한 너무 심하게 다그치지 않았나 싶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아울러, 이러한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신. 무연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글은, 이미 준비해 놓았던 질문이기도 하거니와,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어, 마지막 질문으로 올려서, 다 함께 고찰해 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토론에 임하는 무연님의 최후의 일격은, 종종 무상/고/무아의 3_특상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것이었습니다.
<무연님의 3_특상>
무연 13.07.11. 01:27 만일 연기법과 사성체가 실로 있는 법이라면... <제법무아>는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제법무아>의 가르침은 거짓말입니까?? 근데 행복님은 왜 제가 드린 질문에는 모른 척 하십니까?? 몇번이나 질문드렸는데 모른 척 하십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야비하군요. 나는 물을터이고 너는 대답해라... 대신에 너의 질문에는 모르쇠로 하겠다 이 뜻 입니까?? 그게 토론입니까??
무연 13.07.11. 02:05 제법무아란 제법은 있는데 거기에 '영원한 자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행복님 그렇다면 해탈의 법도 인연따라 흩어집니까?? 나아가 부처님의 과보도 무상한 것이고 허망한 것 입니까??
┗ 무연 13.07.12. 22:24 실론섬님의 말대로...<상주한다>함은 무상하다의 반대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부처님 법에는 2가지가 있다는 겁니까?? 2가지가 있다면 <제법무아>의 가르침은 거짓말이겠군요 이해가 안되세요??
무연 13.07.12. 22:38 그러니 답은 간단하지요. 그냥 무상인데 왜 저런 말을 했느냐? 나는 못 믿겠다 ... 그러면 됩니다.//실론섬님 진실한 법에는 항상함도 무상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무상이 진실이라면 아라한의 해탈도 무상하고 부처님의 지혜도 무상한지요?? 한번 말씀 해 보세요? 만일 무상하지 않다면 무상의 진리는 거짓말이요... 무상하다면 해탈도 열반도 부처님의 지혜도 무상한 겁니다.
┗ 무연 13.07.12. 22:48 이말은 즉 제행은 무상하지만 제행 무상이라는 진리는 무상하지 않다.//실론섬님 그러니까...제행무상과... 제행 무상이라는 진리는 무상하지 않다는 2가지 법이 있었군요. ㅋ 제법무아가 웃고 있습니다. 그렇게 편하게 알고 사세요. ^^
┗ 무연 13.07.16. 00:42 new 니까야를 공부하지 않는 불교는 불교가 아닙니다. //위밧자님... 그러니까... 초기경전에 무상 고 무아를 가르치는데... 아라한의 해탈이나...부처님의 과보도 무상합니까?? 답변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고따마 부처님의 3_특상>
"색수상행식은 무아('내 것이 아니요,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다.... 만일 색수상행식이 자아('내 것이다, 나다, 나의 자아다')라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색수상행식은 무아이기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 색수상행식에 대해서 '이와 같이 되기를,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색수상행식은 항상한(바뀌지 않는) 것인가? 무상한(바뀌는) 것인가? 무상한(바뀌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바뀌는)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무아의 특징경 S22:59)."
"제행무상('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제행개고('모든 형성된 것은 괴로움이다') 제법무아('모든 법은 무아다')(법구경 Dhp 40)."
<제법무아>
위에 인용된 경전에서, 고따마 부처님께서 사용하셨던, 무아라는 단어의 의미는 '내 것이 아니요,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이며, 자아라는 단어의 의미는 '내 것이다, 나다, 나의 자아다'입니다.
제법무아라는 4자성어에, 고따마 부처님의 무아의 정의를 적용한다면, 모든 법은 '내 것이 아니요,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입니다.
그러면, '내 것이 아니요,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닌' 이 모든 법들은, 항상한(바뀌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상한(바뀌는) 것일까요?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올바로 깨달은 분들이 거닐던, 옛 성과 옛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그 옛 길과 옛 거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8_정도이다...이것이...과거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이다(도시의 경 S12:65)."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시거나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잡. 299. 연기법경緣起法經)."
이 경전의 구절들을 통해서,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법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항상한(바뀌지 않는) 것이다'라고 고따마 부처님,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시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법무아란, '모든 법은 내 것이 아니요,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리고 그 법들은 항상한(바뀌지 않는) 것이다.'입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라(대반열반경D16:2.26)."
우리들도, 고따마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항상한(바뀌지 않는) 것이며, 항상 머물러 있는, 4_성제, 8_정도, 12_연기를, 자신 안에서 발견하여 그곳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제법무상/제행무상>
제행무상이 법구경에 등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제법무상'이라는 4자성어는 초기경에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위에 인용된, '색수상행식은 무상한(바뀌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을 설명하기 위하여, 억지로라도 4자성어로 바꾸면, '제법무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항상한(바뀌지 않는) 것이다'에 배치되는 듯한, 이 구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인용된 경전에서, 고따마 부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가? 변하는가?'라고 물으시면서, '변한다!'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무엇이 변한다는 것일까요? '색의 내용'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색이라는 법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색의 내용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수상행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컴퓨터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만 갖고 있다면, 너무도 자명한 내용들입니다만, 그러한 상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2,600년 전, 고따마 부처님께서는, 이 내용을 수행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바로, 신수관, 수수관, 심수관이라는 수행_방법을 계발하셨던 것입니다.
'색수상행식라는 법은 변하지 않지만, 그 내용들은 변한다'라는 개념이 바르게 정립이 되어야만, 비로소, 본격적인 수행단계인, 법수관으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단락의 결론은, '제법무상'이란, '법의 내용은 무상한(바뀌는) 것이다.'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제법무상'의 내용은, 색수상행식에만 국한되며, 온처계근제연에는 '제법무상'이란 4자성어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제법무상'이라는 4자성어는 초기경에 실재實在하지 않습니다.
제행무상은, '법들의 형성(모였다가 흩어짐)은 무상한(바뀌는) 것이다'라는 뜻이며, 별도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합니다.
<제법개고/제행개고>
제행개고와 달리 '제법개고'도 초기경에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위에 인용된, '색수상행식은 고苦인(괴로운) 것입니다.'라는 구절을 설명하기 위하여, 억지로라도 4자성어로 바꾸면, '제법개고'가 될 것입니다.
위에 인용된 경전에서, '그러나 색수상행식은, 무아('내 것이 아니요,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이기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 '이와 같이 되기를,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앞서서 설명 드렸던, '법의 내용은 무상한(바뀌는) 것'의 의미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지 않으니 '고苦인(괴로운)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고苦인(괴로운) 것'를 면할 수 있는 극단적인 두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이고, 두 번째 방법은 '변하는 방향대로 바란다.'입니다.
4_성제와 12_연기의 관통으로, 해탈하여 열반으로 들어간다는,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연 어느 쪽을 지향하고 있을까요?
첫 번째를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말하는 출가승들도 많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첫 번째 방법은, 종종 위정자들에 의한, 불교탄압의 빌미가 되곤 하였습니다. 속된 말로, '먹고 똥만 만들어 내는 인간들' 또는 '식물_인간'의 취급을, 출가승들이 받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방법과 두 번째 방법은, 그 시작이 매우 달라 보이지만, 그 끝은 동일하다는 점을, 이글을 통해서 특히 강조하고자 합니다.
'변하는 방향대로 바랄 수 있는 사람이란, 바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해탈하여 열반으로 들어간 성자들만이 가능합니다.
재가자인 저로서는,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은, 두 번째를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제법개고'란, '법의 내용이 무상한(바뀌는) 것이, 바로 고苦인(괴로운) 것이다.'입니다.
'제법무상'과 마찬가지로, '제법개고'의 내용은, 색수상행식에만 국한되며, 온처계근제연에는, '제법개고'란 4자성어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제법개고'라는 4자성어도 초기경에 실재實在하지 않습니다.
제행개고는, '법들의 형성(모였다가 흩어짐)은 고苦인(괴로운) 것이다'라는 뜻이며, 이 또한, 별도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합니다.
<끝맺음>
이상의 내용으로,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내세운, 무연님의 타박에 가까운 질책이, 애초에, 촛점이 잘못 맞춰져 있음을 아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는, 20년이상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종사한 경력이 있다 보니, 신수관, 수수관, 심수관의 세 단계는 담박에 통과할 수 있었고, 대념처경의 법수관 부분, 무아경, 초전법륜경, 8_정도_분석경등을 암송하면서, 열심히 공부_수행을 한 결과, 초기불교를 만난지 1년만에, 4성제 관통이라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신/수/심의 세 단계는, 전산학_개론 또는 EDPS_입문을 공부하시는 편이, 훨씬 빠를 수도 있습니다. 이 내용 또한, 수가록과 수가식_위빳사나_길라잡이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www.soogar.com).(끝)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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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대승_불교쪽에 계시다가 초기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신 분들은,
일단 먼저, 자신이 의지처인 대승_신앙을, 초기불교의 이론으로 강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조금 알았다 싶으면, 초기불교의 어설픈 지식으로 초기불교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초기불교쪽의 입장은,
종횡으로 엮여져서 물샐틈 없이 완벽한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의지하면,
전혀 수세에 몰릴 일이 없습니다.
조어장부 고따마 부처님께서 재세시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최소한의 언어소통이 가능한 수준있는 대승_불교인들이라면,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모두 귀의합니다.
실론섬님의 많은 역할을 기대합니다_()_
조금은 댓글을 쓰기가 망설여지지만 초기경전을 읽으시는 분과 초기불교에 입문하신 분들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싶어서 몇 자 적어봅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첫째는 용어의 정의와 올바른 개념 파악과 정립 없이는 경전 공부를 함에 있어 갈수록 어려움이 따른다.
둘째 기존의 한문표현의 방식을 외우고 습득하는 것을 조금 지양하고 초기경전에 나온 내용대로 숙지하시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팔리어까지 아시면 더욱 좋음)
기본적인 용어와 개념 정립이 되지 않으면 삿된 견해로 가기 쉬우며 바른 법과 유사정법(사이비, 외도의 법)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 계발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법무아라고 하였을 때 여기서 법은 두 가지 의미로 경전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법=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둘째는 법 = 구성요소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구성요소라는 것은 부분이라는 뜻을 함축하며 결코 전체 또는 실체라는 의미가 없음을 먼저 밝혀 둡니다.
물질이란 것은 항상한가? 무상한가?를
물질이라는 법(구성요소, 것)은 항상한가? 무상한가?로 바꾸어 보면 이해가 좀 쉬울 것입니다.
다시 물질(느낌, 인식, 상카라, 식)이란 법(구성요소)은 내 것이 아니며 나도 아니고 나의 자아(실체)도 아니다. 라고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제법무아에서의 법 또한 마찬가지로 구성요소라는 의미에서 파악하시면 됩니다.
모든 구성요소(법)들은 실체가 아니다.(모든 구성요소들에는 실체가 없다.) 또는 자아가 아니다.
이것을 초기경전에 나오는 것으로 정확히 말하면 “모든 형성되고 조건지워지고 만들어지고 태어난 것은 실체(자아)가 아니다.“입니다.
이것을 ‘욕계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 이 세계는 모두 형성되고 조건지워지고 만들어지고 태어난 것으로 결코 실체(자아)가 아니다(실체가 없다).’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세간하라, 세상을 벗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대승불자이신 ??님처럼 실론님과의 대화에서 아라한은 과보가 어떠하냐라는 둥, 제법무아에 위배된다는 등의 질문이 잘못된 것이고 기본 개념이 올바로 확립되지 않아 잘못된 견해를 계속 주장한다는 것을 파악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한문식의 표현에 너무 목매지 마시고 초기경전에 나와 있는 문구의 용어 파악을 먼저 하시고 개념을 확립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이렇게 외워서 끝내지 마시고
“모든 형성되고 만들어지고 조건지워지고 태어난 것은 변하고 무상하다(항상하지 않다.)
변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변하고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결코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며 실체(자아)가 아니다.”
이렇게 파악하시고 호지하는 것이 앞으로의 공부에 나을 것입니다.
다음은 수가님의 결론 제법무상 = “법의 내용은 무상(바뀌는) 것이다~초기경에 실재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씀에 관한 것인데 이것은 간단하게 제가 정의내릴 문제가 아니라 경전 속의 문구로 대신하고 다같이 생각해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1. 비법(악하고 해로운 것)을 지양하고 법(선하고 이로운 것)으로 가서 종국에는 법마저 초월해야 한다.(종국에는 비법과 법 모두를 초월하는 것이다.) -
2.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시설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으로부터의 여읨이 시설된다.
(이띠붓따까 - 태어나지 않는 것의 경 / 전재성 박사님)
3.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윈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우다나 - 빠달리가마의 품 / 전재성)
아직 갈 길이 먼 놈이라 명확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고
조금은 중구난방식의 글이라는 것 이해해주시길...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
1. 기본적인 용어 개념에 충실하자.
2. 교학과 더불어 위빠사나 수행처나, 사마타 수행처에서
법사님 지도아래 이론과 실제를 배워보자. 경전 이해가 훨씬 쉽다.
3. 초기경전을 읽고 배우고 실천하자.
주위 분들에게 초기경전을 널리 알리고 보급하자.
-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보답이자 의무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_()_
토론시, 무연님께서 애용하셨던 말 하나는,
'제법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생멸하거나 화합 상속한다'였습니다.
출처를 끝내 밝히시지는 않았지만,
저의 추측으로는 아래의 금강경 4구게로 짐작합니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金剛經, 32 應化非眞分 ?응화비진분, 무비스님역)
이구절을 초기불교 스타일로 약간 바꾸었던거 같습니다.
이것에다가 제법무아, 제행무상을 더하여
거의 무차별적으로 상대방을 몰아 세웠지요.
본문에서도 이미 소상히 설명드렸지만,
무연님은 제법무아, 제행무상, 제행개고의 의미를 정확이 몰랐던 것 같습니다.
수가님의 글과 참괴님의 긴 가르침의 글 고맙습니다.
그런데 무연님이 떠나셨나요? 영영 가시지는 말고 걍 한 번씩 오세요!! 여러분의 좋은 글 그냥 지나듯이 훓어만 보고 다니셔도 되지 않을까요^^?
사두.._()_
_()_ 저도 무연님께서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금강경식 초기불교
반야경식 초기불교
화엄경식 초기불교
법화경식 초기불교...등등
이러한 초기불교에 대한 공세적인 도전들이 지속되리라고 봅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