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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2)
창 4:1-7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설 교 >
아벨처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 창 4:1-7
지금부터 약 190여년 전에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라는 마을에 살던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의 가정은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는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했다. 그 소년은 찬송이 연주될 때 오르간 뒤에서 바람 넣는 일을 했다. 어느날 그 소년은 예배시간에 오르간 뒤에서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로버드 모펫(1795-1883)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선교헌금을 드리고 싶었지만 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소년은 선교헌금시간에 헌금바구니를 껴안고(위에 앉아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는 가난하기 때문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헌금 대신 저의 몸을 드리겠습니다. 저의 몸을 받아 주옵소서”
하나님은 그 어린 소년의 믿음과 중심을 받으셨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서 이 소년은 의과대학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었고, 자신의 고백대로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한 시대 동안 위대하게 쓰임 받았다. 그 소년이 바로 데이비드 리빙스턴(D. Livingstone, 1813-73)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배자에게 보시는 것은 그의 나이나 몸의 상태나 혹은 그의 손에 쥐어진 어떤 것들이 아니라, 그의 중심(中心) 이다.
얼마 전에 서울 상도동에서 상도유치원 땅의 기초가 무너져서 건물전체가 기울어졌던 일이 있었다. 그와같이 우리 인생에도 전체를 지탱해 주는 기초가 있는데, 그것은 예배다. 그래서 마귀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예배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또 설령 예배의 자리에 나왔다 해도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서 방해를 시도한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4장에 보면, 예배의 기초가 견고했던 사람과 사단의 미혹에 속아서 그렇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이름은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다.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2-5)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을까? 그 원인이 바로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의 핵심이고, 회복해야할 부분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서 “제물”이라는 말에 무게를 두고 해석한다. 예를들면 아벨은 양을 잡아서 피의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물을 드렸으므로 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의 제자 중에는 곡물의 가루를 드리는 소제(素祭)라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꼭 피의 유무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라고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첫 새끼와”라는 말에서 “첫”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일리는 있으나 온전한 해석은 아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자꾸 제물의 종류나 순서나 액수같은 외형적인 것들에 방점을 두고 강조하면, 신앙이 율법적으로 흐르게 되고, 심하면 기복적인 신앙관이 형성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오늘 본문 4-5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 중요한 원인이 되는 핵심 단어를 발견할 있다.
“4 ...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Abel and his offering)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Cain and his offering)은 받지 아니하신지라...”(4-5절)
이 말씀에서 “아벨과”와 “가인과”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들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고,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고 했다. 이것은 가인도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예배하는 사람의 손에 쥐어 있는 그 어떤 것들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을 먼저 보신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평생동안 우리들이 예배할 때 잊으면 안될 너무나 중요한 점이다.
그러면 아벨의 중심에는 도대체 뭐가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의 제물과 함께 그를 받으셨을까? 또 가인의 중심에는 뭐가 없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이 말씀을 보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 나올 때, 그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는가? 믿음(Faith)이 있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가인은 믿음으로 제사하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그의 제물의 종류나 피의 유무나 첫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주님 앞에서 섰느냐 안섰느냐의 문제였다. 아벨은 예배에 나오기 전에 이미 평상시부터 그는 참된 예배자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있었다. 아벨의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말씀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렇다면 이 말씀 앞에서 우리들이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해서 나올 때, 어떤 마음의 상태와 어떤 믿음으로 나왔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예전에 타지역에서 사역할 때도 그랬고 우리 지역에서 전도할 때, “돈 없어서 예배 못드린다”, “돈없으면 교회 못다닌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분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생각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아벨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마음에 중심에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을 찾으신다. 히브리서 11장 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이처럼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상(축복, 응답, 은혜, 은사 등)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높임을 받기만 하시고, 그냥 끝내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벨이 가졌던 “믿음으로”이라는 말을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구체적으로 “영과 진리로”라는 말씀으로 풀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사람)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Worshipers)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Worshipers)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백화점 왕’이라고 불리는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1838~1922) 장로는 이처럼 하나님의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로 자신을 드리기를 힘썼던 사람들 중의 하나다. 워너메이커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벤저민 해리슨’에서 체신장관직을 제의 받았을 때, 그가 “만약 주일성수와 주일학교 교사를 못한다면 저는 장관직을 수락할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서두에 언급한 리빙스턴처럼 워너 메이커도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10살 때 성경 한 권을 구입하기 위해서 1년 반 동안 아버지의 벽돌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가 15살 때 그는 하루에 2시간씩 성경을 읽겠다는 것과 주일성수할 것을 결심하고 이후에 평생 동안 그 약속을 지켰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년의 믿음의 중심을 받으셨고, 그를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사용하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은 예배하러 나온 모든 사람들의 믿음과 중심을 보신다. 이것이 축복의 성패가 되는 중요한 영적인 요소다. 하나님은 절대 남녀노소, 재물이나 건강의 유무 또는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온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은혜와 축복을 주신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는지, 혹시 내 속에 회복해야할 가인과 같은 요소는 없는지 돌아보자.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잘 이해하고, 아벨처럼 평생 변치 말고 믿음으로 주님께 참된 예배자의 모습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되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윤사무엘목사 / 창 4:1-7, 25-26, 롬 12:1-2, 요 4:22-24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후에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을 돌렸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돌렸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이들은 “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제가 잘못해서 그렇습니다”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 이들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었기 때문에 경건성이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를 자복하면 할수록 사죄의 은총을 깊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수록 우리의 죄를 더욱 철저하게 자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0) 했습니다.
아담이 아내를 하와라 이름했습니다. 창 2:23에서는 남자('ish)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isha)라고만 했는데 범죄하고 나서 아내를 ‘하와’(Hawah)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옷이란 의미도 있지만,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 짐승을 죽여 피를 흘려야 합니다. 책임을 전가하고 회개를 거부하던 아담과 하와에게 다시 한번 회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니 마침내 이들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인생이 할 일은 회개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항상 우리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회복이 되려면 죄를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요나서 2장에 보면 요나의 문제는 철저한 회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목숨 하나 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감사 전에 회개를 원하십니다. 요나서 3-4장을 읽어보아도 요나는 니느웨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반대하고 그 성이 속히 무너지기를 끝까지 바랐던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풍랑이 일어나 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죽을 뻔 했으며,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가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거절한 것에 대한 회개는 하지 않습니다.
회개 없는 예배와 기도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의심하고 불안했던 생활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세상에 눈을 돌린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님께 기도하기를 ‘생각나지 않는 죄 조차도 하나 남김없이 생각나게 하시어 주님 앞에 철저히 자백하게 하옵소서’ 해야 합니다. 또 간구하기를 지금도 하나님께서 저의 예배를 받아주시지 않으신다면 제가 고쳐야 할 부분, 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시고 철저히 시정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배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고 근본된 토지를 갈아서 식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아담과 하와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는 가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벨이었습니다. 가인(Cain)이란 뜻은 ‘얻었다’ (to have), ‘직업적인 사람’, ‘대장장이’(아라비아 언어)인데, 소유형의 이름입니다. 농사지으면서 땅의 권세를 추구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보다는 땅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물질도 명예도 얻어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칭찬을 받아야 적성에 풀리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자기의 희생과 정성과 순종은 하지 않고 인정과 칭찬에만 눈이 어두워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이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거나, 더 나은 상급을 받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합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고 중독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의 동생 아벨(Abel, Hebel)이란 뜻은 ‘헛됨’(vanity)인데,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은 결국 헛되다는 것이고 헛되지 않는 하나님의 것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려는 의인의 모습입니다. 아벨은 부모로부터 들었던 에덴동산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하고 하나님 편에 속해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두 형제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농사한 것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가지고 왔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니 그 제물 앞에 그 제물을 드린 사람 즉 아벨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어떤 제물을 드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평소의 삶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게 했느냐가 예배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준비를 경건하게 한 사람의 예배는 그렇지 않는 사람과 다릅니다. 아벨은 이 한 예배를 위해 오래 전부터 기도하고 준비하여 키워 둔 가장 좋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성별하게 구별하였을 것입니다. 양의 피를 흘릴 때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내 대신 죽는 양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하면서 주 앞에 왔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한 주간 동안 주일 예배를 경건하게 드리려고 매일 기도로 준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헌금을 정성껏 준비해야 합니다. 철저히 회개하면서, 예배드릴 전날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예배드리는 시간에 최상의 건강 상태와 맑은 정신과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교회 오는 발걸음부터 은혜를 받습니다. 성전에 앉는 순간부터 신령한 은혜가 쏟아지고, 찬송부르는 태도가 다르고, 기도와 말씀이 떨어질 때 아멘 아멘 하며 예배 도중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체험했던 것과 같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이 넘치고, 치유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성령충만의 경건성이 채워집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돌리는 예배자의 모습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면서 상상할 수 없는 축복과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이것이 아벨의 예배입니다.
마지못해서 참석하는 예배자, 한 주간 내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생활을 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앉아있는 예배자, 마음속에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면서 남에게는 경건한 척 하고 예배당에 앉아 있는 예배자, 몸은 여기에 있지만 생각과 관심은 교회 밖에 있는 예배자, 내 자신이 이삭처럼 산제물이 되어 번제단 위에 앉아 있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 핑계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주님의 몫,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내 몫으로 마음 속으로 원하는 예배자, 이런 자들이 바로 가인의 예배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함께 예배를 드려도 어떤 사람의 예배는 기쁘게 받으시고 어떤 사람의 예배는 사양(no thanks), 거부하신다는 것을 조심하십시다. 매주일 가인적인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아벨적인 예배를 드리십시다.
가인과 그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느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6-7) 여기서 우리는 가인적 예배의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가인은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과 아벨에게 화를 냅니다. 진정 화를 내야할 대상은 자신인데 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문제점을 명확히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의 삶 속에 선을 행하지 아니하기에 늘 죄성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죄의 소원을 안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는 방법은 선을 행하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사탄은 불순종하게 만들고 악을 행하게 조정을 하나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조정 못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를 다스려 버려야 합니다. 죄의 유혹이 올 때 ’사단아 물러가라‘ 외치며 모든 것을 훤하게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Coram Deo) 내가 서 있음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지적을 해 주실 때 가인이 할 일은 바로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가 선을 행하지 못했으며, 죄의 소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저가 죄를 다스리도록 도와주십시오. 화를 내고 안색이 변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라는 기도를 했더라면 가인은 동생 아우를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기는 마귀적입니다. 누구를 시기하기 시작하면 하나님도 뵈이지 않습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린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그의 핏소리가 하나님께 호소되었습니다. 물론 그 영혼은 천국으로 갔습니다. 인간으로 천국에 간 제 1호가 된 셈입니다.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천국에 갑니다.
예배를 잘못 드린 가인은 회개하지 않고 동생 살해까지 하여, 부모가 에덴에서 쫓겨나 갈던 땅마저 더 이상 효력을 주지 않고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그래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 아비에 그 아들.... 오히려 자기만 위하면서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고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고만 불안해합니다. 살인은 또 다른 살인을 낳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구원의 표를 이마에 주시면서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칠배의 벌을 선언하십니다. 구원의 표가 있기에 가인은 살해당하지 않고 에덴 동편 놋땅에 거하며 자손을 낳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가 회개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뜻대로 땅의 예배, 탐심의 예배를 드리다가 실패한 것을 알고 참된 예배자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자를 죽인다고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중단되지 않습니다. 마치 꿈꾸는 자 요셉을 자신들의 손으로 처리한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마저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가인의 자손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 사이에 셋을 주셨는데 아벨 대신에 주신 아들이었습니다. 셋이란 이름의 뜻은 ‘선택 받는 자’입니다. 아벨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친히 택하여 세운 참된 예배자 셋을 통하여 의인의 계보가 이어집니다. 셋-노아-셈-아브라함-야곱-유다-다윗-예수 그리스도... 셋이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 불렀을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창 4:25-26)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배의 행위를 말합니다.
아브라함도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 21:33) 또 이삭도 브엘세바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창 26:25)
셋 시대에 하나님께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겸손히 고백하며 기도와 찬양, 감사와 경배가 있는 공예배를 드렸습니다. 셋의 자손들은 가인의 자손들과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음을 말합니다. 셋은 참된 예배자로 장수하였고(912세) 그의 후손들까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목적은 예배입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아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계 7:11-12) 초대교회, 사도들, 제직들, 성도들은 순교를 각오하고라도 예배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예배하도록 지어 주셨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하나님의 예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후 노아-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를 의인들은 드려왔습니다. 오늘도 이런 예배를 드릴 자를 찾고 계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속에서 우리는 세가지 종류의 예배를 발견합니다.
첫째, 예루살렘 예배는 화려한 성전 건물 속에서 율법대로 드려지는 예배를 말합니다. 형식이 강조된 예배입니다.
둘째, 그리심산 예배는 혼합 예배로 진리를 떠난 예배입니다.
셋째,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로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아벨의 예배, 셋의 예배, 에노스의 예배를 말합니다. 구원과 축복이 있는 예배입니다.
주일날 예배는 드리지 않고, 결혼식장 가고, 동창회 모임 나가고, 등산가면 모두 다 예배 실패자들입니다. 가인은 예배라도 드렸습니다. 가인보다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예배는 우리 인생의 승리와 실패의 가늠자입니다. 예배의 성공자들은 사자굴에 던져지고, 공산당의 총탄앞에서도 예배를 중단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벨처럼 죽더라도 바로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러나 가인적 예배, 죽은 예배, 예배를 드리지 않는 자는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했다해도 지옥에 갑니다.
아벨-셋-에노스-에녹-노아로 이어지는 예배를 우리도 자여손에게 전하도록 자녀들을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는 자들로 훈련시키고 실천하시는 여러분들과 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과 거짓 종교의 최초의 싸움
스테반황목사 / 창세기 4:1-8
인간의 최초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서 크게 범죄하였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은 죄로 오염되었습니다. 죄에 오염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노예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이를 원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사람이 죄인이며 죄의 노예라는 확실한 증거로 죽음을 듭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2절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선포합니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결과로서 이제 모든 사람은 죄성을 지니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은 아담이 낳은 자녀들은 이제 하나님의 모양이 아니라 죄로 부패한 아담의 모양으로 태어난다고 진술합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 5:3-5).
아담의 후손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범죄한 아담의 모양과 형상, 곧 부패한 죄성을 갖고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우리가 확인했지만 죄성의 뿌리는 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 존재하려는 교만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나하더니 주께 무관심해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0-12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인류 가운데 오직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이 성령을 통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여자의 그 씨로 나심으로 죄성을 물려받지 않고 태어나셨으며, 주님은 또한 모든 마귀의 유혹을 이기시고 죄를 범하지 않으심으로 죄가 없으시다고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으로부터 원죄를 물려 받지 않으시고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의 무흠 상태로 태어나신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나신 둘째 사람이라고 칭합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영광에 이른 완성된 사람이 되신 것을 성경은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5-46).
그리하여 부활하셔서 영광에 이르신 마지막 아담에게 믿음으로 속하게 된 자들은 새로운 인류를 구성합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 안에서 누리며 부활 소망을 갖고 살다가 주의 재림 때에 영광의 부활의 몸을 입고 새하늘과 새땅을 유업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니,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라고 진술합니다. 이미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동침하매”에서 원어 (야다)는 “속속들이 알다, 체험적 지식을 갖다, 서로 하나가 되듯이 깊게 알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부부간의 육체적인 하나됨을 통해 정신과 영적인 부분까지 서로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애정을 나누는 인격적인 교류를 말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결혼을 하고 동침함으로 첫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아이를 ‘가인’이라 하였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또는 “그가 약속하신 그 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와가 자신의 지은 죄로 인해 온 세상과 인류에 비참과 저주가 임한 것을 알고 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그 후손”을 기다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 씨가 오면 자신을 속여 비참케 만든 마귀의 머리를 때려 그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이 은혜 언약을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낳은 첫째 아들이 여자의 그 씨인줄 알고 ‘가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직 죄의 본질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삶의 비참을 느끼며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 자책하며 회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의 결과를 평생 맛보면서 장차 오실 그 씨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한편, 여자의 그 씨인줄 알고 가인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맏아들은 자라나면서 점점 불순종과 불경건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이 여자의 그 씨는커녕 자신들이 지은 죄의 열매라는 것을 깨닫고는 마음이 비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자녀를 낳도록 피조된 아담과 하와는 본성적으로 부성애와 모성애가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가인의 부패와 교만과 반항과 죄악을 접하게 될 때 그들의 마음은 찢길 대로 찢겼습니다. 그들은 죄악된 가인을 키우면서 그들이 에덴 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몸소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한 열매로 태어난 가인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이 땅의 삶은 과거의 에던처럼 보람있고 기쁨으로 충만하지 못했습니다. 맏아들로 태어난 가인은 부모에게 오직 고통만 가져다 주었지 기쁨을 안겨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죄가 들어온 이 땅의 삶은 허무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담와 하와는 그들의 죄의 열매로 인한 끝없는 비참과 실망과 고통을 느끼며 한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키우면서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삼손처럼 회개합니다. 그들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신들이 무서운 괴수였던 것을 느끼며 평생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담과 하와는 또 다른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삶이 힘들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서 그의 이름을 ‘아벨’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호흡’ 또는 ‘헛됨’이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헛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더욱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 씨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전도서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는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임을 알려주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여자의 그 씨가 없다면 이 세상은 행위 언약의 저주 밖에 남지 않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런데 아벨은 가인과는 달리 놀랍게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앙을 본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담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그 씨는 우리의 죗값을 치러줄 희생 양이라는 사실을 가장 소중히 마음에 새겼습니다. 죄성을 갖고 태어난 아벨 자신도 하나님을 만나 뵈려면 아담과 하와처럼 여자의 그 씨를 믿고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믿고 알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벨이 믿음이 깊은 것을 보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사랑스럽던 믿음의 아들 아벨이 맏아들 가인에게 살해 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아들 아벨이 형에게 살해 당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담과 하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의 결과는 허무 정도가 아니라 지옥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이처럼 죄는 가정과 사회 공동체에 지옥을 가져다 주는 파괴범입니다.
한편, 우리가 이미 다룬 것처럼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행위 언약을 어긴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의 현상을 보여주실 때 먼저 동물의 죽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동물의 죽음을 보며 충격을 받으면서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행위 언약을 어긴 인류에게 실제로 죽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죽음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놀랍게도 행위 언약의 저주 아래서 태어난 큰 아들 가인이 둘째 아들 ‘아벨’을 죽임으로 실제 죽음이 나타났습니다. 이 죽음은 인간 사회에서 드러난 첫 번째 죽음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사건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죽은 아벨의 시체를 보았을 때 얼마나 참람함과 고통을 느꼈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첫번째 시체입니다. 하나님의 행위 언약과 관련한 심판이 아담과 하와의 죄의 열매로 태어난 가인의 손에 의해 집행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우리 모두를 소름 끼치도록 만드는 무서운 사건입니다.
오! 죄를 짓지 않기 바랍니다. 죄를 지을 때는 기가 막히게 황홀한 순간 같지만, 단 한 순간의 죄 떄문에 인생 전체에 임할 비참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한없기 크고 깊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처음 살인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습니까?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습니다. 3절을 보니 “세월이 지난 후에” “제물을 바치는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멸망에 처하였지만 주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힌 사건과 더불어 구원을 얻은 후에 주께 구별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창세기 기사에서 찾아보면 일단 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가인이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 때문에 심히 분을 낸 것입니다. 이에 주께서는 “왜 분을 내느냐 왜 안색이 변했느냐”라고 지적하시며 가인이 큰 범죄를 저지를 것을 미리 아시고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그러면서 여호와께서는 가인과 아벨을 비교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창 4:7).
지금 이 말씀은 왜 여호와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요컨대,
“가인 너는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아벨은 선을 행하였다.”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이 말씀의 배경으로는 오직 가인과 아벨의 제사 기사 밖에 없습니다. 즉, 가인이 악을 행하는 것과 아벨이 선을 행하는 것은 오직 제사와 관련된 것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인과 그의 제사는 악을 행한 것이고, 아벨과 그의 제사는 의를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가인과 그의 제사는 악하고 아벨과 그의 제사는 의로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에 우리는 그들이 드린 제사에 집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그들의 제사를 묘사합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라”(창 4:3-4).
자,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리면 악한 것입니까? 사실, 모세의 율법을 보면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합법적입니다.
23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26 네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지라
](출 34:23, 26)
그러면 가인과 그의 제사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하나님은 그 제사를 악하게 보시고 가인과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를 알려면 아담과 하와가 얼마나 무서운 죄를 하나님 앞에서 범하였는지를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말을 듣고 마귀 편에 서서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을 무너뜨렸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행위 언약에 따라 반드시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시고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무 뒤에 숨어서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비참과 공포와 절망에 빠져 있는 그들을 찾아내어 복음을 전하여 주십니다. 그 복음은 그들의 모든 실패를 회복할 수 있는 은혜의 약속이었습니다. 즉, “여인의 (그) 후손이 오면 아담과 하와로 그렇게 비참한 멸망의 죄를 짓게 만든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곧바로 그 후손을 기다립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아담과 하와가 첫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약속을 믿고 여자의 그 씨를 기다린 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3장 21절을 보면 복음의 약속을 믿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이 만들어 입고 있던 무화과 나뭇잎 치마를 벗기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이 행위에는 복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 가죽 옷이 아닌 천사의 옷도 주실 수 있고, 영원히 썩지 않는 다른 물질의 옷도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히 동물을 죽이시고 그 동물을 벗기셔서 가죽 옷을 주신 것은, 앞으로 역사 속에 오실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로 우리의 죄악을 덮어 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복음의 행위였습니다. 이는 우리의 죗값을 위해 피를 흘린 하나님의 어린양의 의의 옷이 그들의 죄로 인한 부끄러움과 공포를 영원토록 가려줄 것을 보여주는 청사진이었습니다. 즉,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알려주신 복음은 여인의 그 후손으로 오시는 분은 그분의 피를 흘려 그들의 죗값을 치르게 될 하나님의 어린양인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그 어린양을 믿고 기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늘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립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여기서 첫 새끼를 드렸다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쳤다는 뜻이고 기름으로 드렸다는 뜻은 양을 죽이고 그 피를 흘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사의 결과는,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 제사를 받으셨는지 그렇지 않으셨는지는 아마도 엘리야의 번제처럼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왕상 18:38)을 태우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아벨의 번제는 받으셨지만, 땅의 소산으로 드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5절).
이때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사실 가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으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회개하고, 그리고 자신이 드린 제사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하나님께 물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고쳐먹고 바른 제사를 드렸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몹시’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즉, 분노와 불만이 그가 참을 수 있는 선을 넘어서 결국 얼굴 근육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가인의 모습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도전과 방자함이 가득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분노가 선을 넘어선 것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6절)
그러면서 자상하신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드린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너는 선을 행하지 않았다. 네 마음에 죄를 품었다. 그리고 네 멋대로 제사를 드림으로 죄를 저질렀다. 이제 그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가 너를 주관하게 되면서 너는 더 무서운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러니 큰 죄를 짓기 전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마음에 품은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내게로 진심으로 돌아와 바른 믿음을 갖고 행하도록 하라.”
하지만 가인은 회개는커녕 하나님을 향한 불만, 분노를 아우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드러냈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8절).
즉, 가인은 아벨을 죽일 의사를 숨기고 그를 들로 나오게 하여 아무도 없는 곳에서 돌로 쳐죽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간교하고 악한 행위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가인이 살인죄를 짓기 전에 하나님께서 “너는 선을 행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더 깊게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이 말씀은 가인이 선과 죄를 알고 있는데 선을 행하지 않고 죄를 품고 행했다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율법이 있기 전인데, 선이 무엇이며 죄가 무엇입니까? 선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요, 죄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인과 아벨에게 어떤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은 가인과 아벨이 아담과 하와로부터 받게 된 것인데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흠 없는 양으로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그대로 순종한 것이요, 가인은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자기 멋대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이미 그 제사 자체가 선을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죄가 된 것입니다.
지금 문제는 제사를 드리는 자의 마음에 성의와 정성이 있느냐 하는 그러한 감성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제사냐 아니면 내 멋대로 드리는 자기 의의 제사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이 사건에 대하여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가 정확하게 보고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히 11:4).
히브리서에서는 ‘믿음’과 ‘순종’이 호환되어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순종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벨의 예물에 대해 ‘의롭다’라고 증언하셨음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 말은 가인의 제사는 불순종의 제사이기에 악한 제사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사실은 이 제사를 드림으로 아벨은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은 것입니다. 이는 아벨 자신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아벨이 드리는 그 제물로 인하여, 그리고 아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벨은 의롭다 칭함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즉, 아벨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이에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정확하게 같은 내용입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얻습니다. 그런데 의롭다 칭함을 받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원한 제물인 하나님의 어린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고 지금은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그분을 의지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며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벨은 양의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니 이 뜻은 가죽을 벗겨내고 번제로 제사를 드린 것을 말합니다. 양의 피를 쏟아 부은 것을 뜻합니다. 아벨은 기억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최초의 복음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담과 하와처럼 여인의 그 후손이 올 것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복음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제사법에 따라“믿음으로” “양의 피”를 흘린 후 그 제물을 하나님께로 가져와 번제로 바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받으시고 아벨을 의롭다 칭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아벨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즉,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요인이었던 그의 제사는 지금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만이 하나님의 받으시는 제사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성경은 가인은 원래부터 사탄에게 속한 자요, 미움에 속한 자이며, 어두움에 속한 자라고 알려줍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도다”(요일 3:12)
즉, 아담과 하와의 복음 신앙을 아벨은 물려 받았지만 가인은 복음을 대적한 뱀의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이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떠난 것입니다. 이에 가룟 유다도 가인에게 속한 자요, 택함을 받지 못한 모든 불신자들도 가인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특히 외적으로는 기독교에 속하지만 바리새인처럼 위선된 거짓 신자들 역시 가인에게 속한 자들로서 반드시 가인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
이는 바리새인들이 가인처럼 확고 부동하게 사탄에게 조종 당하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가인의 세력을 이기고 우리가 여전히 의의 길로 다닐 수 있는 힘은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부터 흐르는 생수의 강, 즉 성령의 도우심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 약속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분의 제사장 직분을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가인과 같은 인본주의적인 예배는 하나님이 결단코 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 앞에 인간의 정성과 의로 나아오려는 그 어떤 시도도 주께서 보시기에는 악행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주 앞에 나아오기 전에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의로운 행위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모든 행위는 항상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행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가 없는 그들을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에게 속한 세상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 신자들을 미워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입맞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심히 무관심하며 심지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대적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마귀에게 속하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불의하고 악하지만 신자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잠 29:27).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미리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0:21-22)
[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 24:8-9)
[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라 ](요 15:18-20)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 중보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실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4-16)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더라고 믿음으로 담대하면 세상을 이긴다고 약속하십니다. 즉, 오히려 미움을 받는 상황에서 더욱 빛과 사랑과 의를 드러내면 많은 영혼을 주께로 얻게 되든지 혹은 주의 공의가 나타나 원수를 갚아 주실 것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과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미워하여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원시 복음을 선포한 직후 마귀가 하나님께 던진 첫 번째 도전입니다. 즉, 복음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요, 복음을 끊어내려는 마귀의 시도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에 대한 마귀의 역사, 곧 가인의 제사를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죄인된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복음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이 은혜를 알 길이 없습니다. 주께서 절망한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길은 눈과 귀와 마음이 늘 닫혀 있는 죄인된 인간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성령으로 복음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짓고 사람들에게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이러한 무한한 사랑을 쏟아붓는 은혜의 근거가 바로 “십자가 보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의 복음을 아담과 하와에게 원시 복음으로 들려 주셨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벨이 살해 당한 후에 더욱 자신들이 지옥에 합당한 존재인 줄 깨달으며 그럼에도 여자의 그 씨로 인해 죄사함을 받은 것을 알고 하나님의 그 은혜 때문에 눈물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은 감사와 찬양이 전부였습니다.
[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3:4-7).
사랑하는 여러분! 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도전하게 만들었던 사탄은 그 이후로 자신의 역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는 피 흘림을 통한 죄 사함의 길을 철저하게 막아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탄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행위 언약"을 파괴하도록 유혹하였지만 이제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회복시키려는 "피의 언약, 은혜의 언약"을 막는 것이 그의 최종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회복하시려는 “은혜 언약, 피의 언약,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든 왜곡시키거나 희미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는 그는 복음 전파만 막으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이에 죄가 역사 속에 들어온 이후, 인간이 사탄의 음성을 듣고 행하는 가장 큰 죄악은 놀랍게도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즉, 죄로부터의 참된 회복의 길인 복음의 음성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거짓 예배를 통하여 복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에게서 나타난 행위였습니다.
열왕기상하와 역대하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여로보암입니다. 이스라엘와 유다가 죄를 지을 때마다 성경은 그들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예배하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예배를 만들어 하나님께 나아가려 한 점입니다.
[ 26 (여로보암이)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31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32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33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왕상 12:26-33)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땅에서 "은혜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모든 종교 행위는 가인의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너무나 두렵고 무섭지 않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보다는 인간의 열심과 정성, 행위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실 것을 강요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 뿌리에 언제나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추종자들인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1:7-9; 갈 5:4).
사랑하는 여러분! 아벨은 아담과 하와에게 들은 대로 복음에 따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그의 피흘림의 제사를 통하여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제사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피의 언약, 은혜 언약, 복음”을 알고 믿은 아벨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어리석고 완고한 그에게는 어린 양의 보혈도 필요없고 하나님의 은혜도 필요없고 복음도 필요없습니다. 가인에게 속한 자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인간의 더러운 행위와 마음을 가지고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열정과 행위가 하나님을 충분하게 강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얼마나 참란된 행위이며 교만한 마음입니까? 한마디로, 가인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피"가 아니라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인본주의입니다.
그 후 성경은 가인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의 확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쪽으로는 하나님께서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이라는 아들을 보내심으로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대를 잇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벨 대신 하나님이 보내신 셋의 후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이미 모든 사람들을 향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조명하심을 통해 복음을 믿고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속량하시고 그 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의지할 때 사람이 중생하고 변화할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곳에서 인간의 끝없는 죄성과 완전한 절망과 불가능을 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그 위대한 아름다운 소식! 하나님과 단절된 완전한 절망에 있던 자들을 살려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실패하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처럼 사람은 어떤 제사를 드리느냐에 따라, 다르게 말하면, 어떤 종교를 취하느냐에 따라 의로움과 악함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바라며 받아드리실 수 있는 유일한 제사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 피를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그러나 그 피의 길을 거부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상태로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아들의 피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여인의 그 후손인 메시야시며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십니다. 그분의 피의 길 외에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으며, 그 아들의 생명 외에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으며, 따라서 아무리 인간이 노력하고 애써도 가인의 제사처럼 악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피의 방법을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으로써, 자기 멋대로 예배함이요, 자기 멋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가인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할 경우 바로 그 자리에서 불로 타서 죽게 됩니다.
오늘 가인의 제사를 보면서 이 땅의 교회들이 복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 마음 속에 아직 사탄의 음성이 남아서 가인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교만과 자기 의가 남아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나의 살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그 은혜와 사랑을 잊지 말고 어디서나 범사에 주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여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복음의 자녀들”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앞으로 가인의 시대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카톨릭이 다시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로마 제국 시대처럼, 중세 시대처럼, 일제 식민지 시대처럼, 거짓 종교를 따르는 자들과 세상 사람들은 아벨처럼 참 복음을 붙든 자들을 핍박하고 죽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인의 시대가 찾아올 때 아벨처럼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 시대가 우리가 살아있는 때에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은 배교에 대항하여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가인이 우리를 돌로 치려고 할 때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도록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지체들은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그리고 인생 마치는 그 날까지 복음을 꼭 붙들고,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 보좌 앞에 항상 담대히 나아가는 빛의 자녀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분노한 살인자
창 4장 1~10절 / 김상복목사
오늘은 ‘장애인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초창기부터 주일에는 ‘사랑부,’ 주중에는 ‘사랑의 학교’를 통해 장애인 사역을 해왔습니다. 이들의 예배를 돕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많은 선생님들이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랑부 사역은 우리 교회의 큰 축복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배우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장애에는 신체장애, 정신장애, 정서장애, 성격장애, 학습장애, 발달장애 외에도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독특한 성격 때문에 본인뿐 아니라 가정과 주위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데 학습장애로 집중을 못 하여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예기치 않은 일로 장애를 얻기도 합니다. 뇌졸중이나 교통사고로 장애가 생기기도 하고, 아무 일 없이 일생을 살았어도 70세를 넘으면 이런저런 장애가 찾아옵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눈이 침침해집니다. 귀도 잘 들리지 않아요. 관절염이 생겨서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젠가는 다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장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장애인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언젠가 장애를 겪게 될 것이니까요. 우리 주위에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댈 어깨를 내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주고, 그들과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해줘야 합니다.
최근에, 성격 장애와 특히 정서 장애를 가진 조승희라는 청년이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학생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미국 최악의 교내총기살인극을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으로 재미교포들은 혹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미국인들에게 반한감정이 일어나서 한미 관계가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한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큰 걱정입니다. 그런데 미국 언론은 한국이나 한국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건을 일으킨 조승희에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가 미국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그 가족을 불쌍히 여기고, 심지어 버지니아 공대 교정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와 함께 그의 추모비도 함께 세웠습니다. 그 추모비에는 “네가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다. 머지않아 네 가족이 평안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축복이 너에게…” 라는 글귀를 적어놓았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우리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해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와 인격, 문화가 부럽고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조승희는 어려서부터 말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물어도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영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학교수업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고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가 다녔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철없는 일부 아이들이 조승희의 외톨이 성격을 놀리고 모욕감을 주기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버지니아 공대 영문과에 재학 중인 우수한 아이였으나 그의 정서, 그의 영혼은 병들어 있었습니다. 좋은 머리만으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제가 미국에 오래 살면서 교포들과 사역했기 때문에 그 사회를 잘 압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 새벽에 일하러 나가서 밤늦게 돌아옵니다. 자녀들을 위해 미국에 갔는데 이민 생활에 적응하느라 막상 자녀들을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방치되었습니다. 자기들이 알아서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갑니다. 학교서 집에 돌아와도 맞이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채 1분도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어요.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 아이들은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도 먹지 못하고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지냅니다. 조승희 가족의 생활도 이랬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승희는 성장하면서 아이들과 잘 사귀지 못했고 놀림을 받고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이 아이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대학 수업시간에는 충격적 내용의 수필을 발표해서 교수와 학생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몸서리가 쳐지고 오싹해질 정도로 분노와 독기가 가득 찬 내용이었습니다. 다들 ‘어떻게 저런 글을 쓸 수 있나?’하고 이상하게 보았을 뿐 누구 하나 “너 요즘 어떠니?”하고 말을 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문과 교수 한 명이 이상을 느끼고 이 아이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학교 정신과 의사에게 보냈지만 의사는 문제가 없다며 아무 조치도 없이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조승희는 결국 32명을 죽이고 30여 명의 학생들에게 부상을 입히고 자살하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조승희는 NBC에 글을 보냈습니다. “내가 한 일이야. 그렇게 해야 했어. 오늘의 참사를 막을 방법은 수없이 많았지만 너는 결국 내 피를 보겠다고 결정한 거야. 너는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내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는 없었어.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너는 이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 피를 내 손에 묻히게 한 거야.” 그가 말하는 ‘너’가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는 부자들을 증오했지만 이것은 부자들만 놓고 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사탄인 것 같아요. “사탄이 결국 내 피를 보게 했다.” 그 속에 악령이 들어갔습니다. 그도 “너는 내 머리에 암 덩어리를 집어넣었고, 내 심장을 위협하고, 내 영혼을 항상 짓밟았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어. 내가 이러는 이유는 내가 아닌 내 아이들, 내 형제, 자매들을 위한 것이야!” 23살이 무슨 아이들이 있습니까? 살인은 마귀의 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8:44).
그 부모가 그를 낳았을 때 온 식구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전통적으로 아들을 바라는 한국에서, 첫 아이로 딸을 낳은 후 얻은 아들이니 혈통을 이을 아들이 생겼다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이 살인자로 끝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도 첫 아들, 가인을 낳았습니다. 너무 좋아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습니다. 국어성경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아”라고 했지만 히브리 성경을 그대로 번역하면 “내가 아들 구세주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네게서 날 후손이 마귀, 뱀의 머리를 찍어 인류를 구원할 것이요, 그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리라.” 하와는 자신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날 것을 이미 약속 받았습니다. 가인을 낳자 “이 아들이 바로 메시아로구나! 이 아들이 우리 가문을 일으키고, 하나님을 섬길 것이고 구원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내가 구세주를 얻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후일,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부모의 기쁨과 기대가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동생을 죽인 악마 같은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가인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제대로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빴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두 가지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가인은 제 마음대로 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두 유형의 혈통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릴 때 양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 너는 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해.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하고 곡식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야. 나도 내 나름대로의 종교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가인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감정, 사상, 생각, 욕망으로 살아온 가인이 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가슴 속에 가인이 들어있다면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가인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아벨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사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파멸입니다.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지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느 분이 저와 상담을 했는데, 성령에 충만해서 가족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에서도 그런 사람을 보았는데 한국에도 있더군요. 미국에서 제 학생이었던 공군 장교가 결석을 했습니다. 다음 주에 그를 만나 왜 결석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제 아내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제 아내에게 ‘네 남편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아내는 메모를 남겨놓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기 위해 2주 동안 전국의 친척, 친지 집을 다 다녔지만 성령께서 아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찾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너무 잘 믿어 가족과 멀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가 아니고 악마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헤어진 사람을 만나게 하고,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다투는 사람을 사랑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를 통치하시고 만유를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시지, 잘 살던 가족을 떼어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여러분이 혹시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졌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여러분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 그 어려운 관계의 문제를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십니다.
가인은 화가 났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일었습니다. 분노는 미움을 일으키고 미움은 죽음을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네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니라.” 사람이 왜 미워하게 됩니까? 화가 나고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조승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그의 사진을 보셨을 것입니다. 총과 칼을 들고 있는 그의 눈 속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회를 향한 분노, 심지어 교회를 향한 분노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는 나를 박해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총 주셔서 우리의 가슴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누이도 동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누이가 미국의 방송국과 버지니아 공대에 보낸 사과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동생은 제가 함께 자라고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사람을 제가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명 있는 누이마저 자기 동생을 잘 몰랐다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사랑했고 가깝고 평화로웠던 가족이었습니다. 저희 동생은 과묵했지만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동생이 이런 엄청난 폭력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아들을 몰랐고, 가장 가까웠던 누이도 동생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간에 충분한 대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분노가 있으면 그것을 내놓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지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니?” “그리고 나서는?”하면서 대화의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아이들이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딱 끊어 버리고 “넌 네 방에 가 있어!” “뭘 그따위 소리를 하냐?” “듣기 싫어!” 한다거나 “너는 왜 혼자만 끙끙대니? 말 좀 해, 말 좀!”한다면 누가 말하고 싶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바빠서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목회적 돌봄 훈련인 PACE훈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이 훈련을 받지 않으신 분은 매 학기마다 열리는 이 강의를 꼭 한번 들으십시오. 12주의 강의를 듣고 나면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돌봐야 되는지, 가족들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배워야 됩니다. 분노한 사람들, 낙심한 사람들, 실망한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이 변해야 됩니다. 말을 못하게 하고, 듣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주위에는 여러분의 귀가 필요한 사람,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가슴속의 분노, 실망, 상처, 슬픔, 외로움을 들어주고 살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교회 공동체와 우리 이웃에게 듣는 귀를 가진 사랑의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만일 조승희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한 마디라도 들었더라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아픈 자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그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주고, 그들의 분노를 들어 주고, 성령께서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사역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도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너를 기다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니 네가 죄를 다스려야 하느니라”(7절)고 경고했지만 죄를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조승희 역시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죄가 그를 다스려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는 때로 슬픔과 아픔, 상처, 외로움이 있습니다. 혼자 끌어안고 방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도 가인에게 “네가 그렇게 되면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아. 밭을 갈아도 그 땅이 효력을 내지 못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해 다니는 방황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속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갈라지고, 사람과 하나 되지 못하고, 결국 방황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갈 길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방황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로 분명히 방향을 정하십시오. 슬픔과 아픔과 분노를 혼자 끌어안고 있지 말고 예수님께 가지고 와서 “주여, 내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습니다. 참을 수 없습니다!”하고 여러분의 마음의 문제들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고 치유와 회복의 근본이 되어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창 4장 1~10절 / 김철현목사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 중에 뛰어난 것이 있다면 깨달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르게 바꿀 수 있고, 잘된 것은 더 나은 것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잠언에 보면"깨달음이 없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좀 더 깊이 생각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이래저래 겪는 일들이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것은 사건은 문제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사건에 대한 자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누가 어떤 일을 당했느냐를 가지고 큰 관심거리로 생각하고 회제거리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전부인양 떠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누가 무슨 일을 당했느냐는 그 일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가지고 두고두고 화두로 삼을 일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당한 그 일을 그가 어떻게 해결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훨씬 더 궁금해 하고 중심된 주제여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건보다는 그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더 중요시 여기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그가 도둑질한 것이 중요합니까? 지금 개과천선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고 성실히 살며 도둑질한 것 이상으로 남에게 베풀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지금 현재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실수로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을 했지만 그 실수를 실패로 이어가지 않고 지금은 성공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옛날의 실수보다는 지금의 성공을 더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실수와 실패는 다른 것입니다. 실수란 하나의 과정이요, 실패는 바로 결과입니다. 실패라는 것은 끝났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실수란 수없이 반복 되면서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과정으로써의 실수는 있지만 결론적인 실패는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용기를 가지고 일어 설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은 실수이지 결코 실패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실패했다고 함부로 진단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절망도 하지 마십시오. 실수라 여기고 다시 한 번 용기를 가지면 됩니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어떤 사람에게는 실패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실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패냐 실수냐 하는 것은 그 사건에 임하는 자세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끔 우리들이 많이 사용 하는 말이 있는데"하기 나름이다."는 말입니다."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네가 하기 나름이다."는 말처럼 세상에는 자동적으로 우연히 되는 일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고 잘되기도 하고 잘 안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에 따라 이 사건이 있게 된 원인을 깨달을 수 있고 그로부터 깨끗이 돌이키면 길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실수했다고 곧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쩌다가 실패라는 사건은 있을 수 있으나 실패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실패라고 하는 사건들을 통하여 더 건전하고 더 건강하고 더 바르게 더 생동력 넘치는 인격으로 바뀌어야합니다.
오늘 말씀에는[가인]이라는 한 인간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에게는 동생[아벨]이 있었습니다. 저들이 각각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사건이고 이 사건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이제 가인이 이 사건 앞에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가 어떤 태도로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좌우되고 이 순간 그가 무엇을 생각했느냐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과정에 대해서는 히 11장 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이 논리에 의하면 가인은 믿음 없이 드렸다는 얘기입니다.
자, 이 사건을 가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보는 대로 심히 분노합니다. 또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가인의 잘못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가인이 지금 이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분을 내고 안색이 변해야 합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누구보다도 자기가 잘 알지 않습니까? 설사 내가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니라면 아닌 거 아닙니까? 쓸데없이 원인을 생각합니다."동생 때문이다. 저 녀석이 잘 난척하는 바람에 하나님께 나만 욕먹는다."아니면"하나님, 하나님 도 문제가 있습니다. 나도 나름대로 신경 좀 썼습니다. 조금은 알아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아, 안 드리는 놈도 있는데 그마나 드렸으니 괜찮은 것 아닙니까? 뭘 그러십니까? 남들 보는 눈도 있는데..."여러분, 남들이야 뭐라고 하던 내 자신은 내가 압니다. 더군다나 내가 아는 나보다 더 온전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아십니다.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겁니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가인이 안색이 변하고, 분하고, 속에서 들끓습니다. 갈등과 고민 번뇌가 일어납니다. 나아가 문제는 이 결과가 다른 방향으로 분출됩니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재물을 다 받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가인이 안색은 안 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의 것은 받고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이건 질투로부터 시작된 분노입니다. 말하자면 내 제사를 받지 않아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동생의 제사를 받았기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이 사건을 하나님과 자기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벨과 자기의 문제로 보고 아벨을 들로 유인해서 돌로 쳐 죽였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사람에게서 해결하려고 했던 가인의 잘못된 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남을 탓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는 것을<이웃 지향 적 속성>혹은<타인 지향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누구 때문에"라고 하는 이런 속성은 정말 문제입니다. 여러분 생각하십시다. 내 문제는 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지 그 누구와의 관계도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이요. 이것이 신앙입니다. 가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명백한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받으셨으면 다시 하나님께 나와야지 왜 아벨은 생각합니까?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것에 대해 기분 나빠 할 것이 아니라 받지 않은 자신의 제사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발전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신의 문제 앞에서 타인지향 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을 혹시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할지 모릅니다."나는 문제가 없는데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당하고 있다."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많아집니다. 그 사람을 원망해 보기도 하고 세상을 탓해 보기도 하는 가운데 나는 안전지대에 들어가 있습니다. 원인 제공의 용의선상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편합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합니다. 남의 얘기 할 거 없습니다. 내가 어려워진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나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성실했습니다. 진실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겪는 어려움이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깨달으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욕합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이 일은 전적으로 나 때문이다."라고 나서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가끔 보면 무슨 사건이 하나 터졌을 때 총체적 위기라고 떠들썩합니다. 사회적인 문제요, 국가의 문제라고 떠듭니다. 요즈음 인터넷이 발달해서 무슨 이슈만 생기면 바로 댓글로 도배가 됩니다. 책임을 추궁하고 남을 비방하는 글로 빽빽합니다. 보면 맞는 말들입니다. 공감이 가는 댓글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올리는 는 사람의 그 속에는 비밀한 생각 하나가 숨어있습니다."적어도 내 책임은 아니다."라는 말로 들려질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는 해결이 없습니다. 차라리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사람은 조용하게 반성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모든 책임의 근본은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건의 원인은 오늘 제사 드린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겁니다. 가인이라는 이 사람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 없는 행위 속에 오늘 와서 제사만 드린 겁니다. 그러니 그 제사를 하나님이 안 받으신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제사를 안 받으셨다고 하는 이 사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이 사건으로 나타났지만 벌써 원인이 있었고 그 원인에 대한 결과가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당한 현실을 놓고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 나가다가 오늘 갑자기 잘못된 것처럼 생각 하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잘못된 채로 살아왔던 겁니다. 그것이 오늘의 이 결과를 낳은 것이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벌써부터 누적되었던 것이 오늘 와서 분출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만 십일조 생활 정직하게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당장 망하지 않고 괜찮은 듯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적 되어서 이제 와서 터집니다.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했어도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원인이 결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합니다. 봉사해야 되는 줄 알면서도 적당히 넘어갔더니 그렇게그렇게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몸이 삐끗하더니 이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에 거리끼면서도 괜찮다 싶었던 것들이 누적되어서 터졌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성경말씀처럼 새로운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있던 사건이 나타난 것뿐입니다. 이미 진행된 지 오래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뭔가 잘못된 것처럼 난리칠 것이 아닙니다. 벌써 고질적으로 수 년 전부터 쌓이고 쌓여서 있을 일이 있은 것뿐이요. 고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누구 책임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는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 마음속에 벌써 오래 전부터 있었던 타성 화 된 그것에 대해서 깊이 성찰해야 됩니다. 오늘 잘못된 내 믿음에 내일에 누적 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오늘의 불신앙이 십년 이십 년 쌓이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만약에 가인이 이런 생각을 했었다면 어땠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신 아벨의 제사는 도대체 어떤 제사일까?"하고 좋은 모델을 삼았더라면 좋지 않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가인 콤플렉스>는 혼자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다시 서야 해결 됩니다. 예수님은 많은 모순과 부조리한 사건 앞에서 기도하십니다."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나님께 맡깁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아주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임을 알고 조용히 그 어려운 십자가를 집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이상 누구도 원망하지 맙시다. 누구를 비판하고 저주하지도 맙시다. 누가 없어야 된다고 생각도 맙시다. 다 있어야 됩니다. 다 함께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문제는 내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창 4장 1~10절 / 김 조목사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하려 여기 모인 성도님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예배를 드리건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그렇지 못한 예배가 있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범죄한 연고로 에덴에서 추방 당하였고 땅도 저주를 받아 땀을 흘려야 토지 소산을 먹고 해산의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었으나 두 아들이 농사지은 가인은 소산물로, 양치기 아벨은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니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게 되어 가인이 극심한 분을 품고 얼굴 안색이 좋지 않게 되었다가 아벨을 쳐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극이 빚어지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오늘날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외면하셨을까요? 예배의 성공은 삶의 성공이요, 예배의 실패는 삶의 실패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사 곧 예배란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으로 예배 의식을 절대화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의식적 행위는 언제, 어디에서나 삶의 전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전인격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집단적으로 모여 예배하는 의식을 통해 진정한 예배 정신을 바로 깨닫고 바른 자세로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딤전6:16) 제사가 자신의 영달과 목록을 누리기 위해 절대자에게 뇌물을 바치는 행위가 절대로 아닙니다. 범죄한 인생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님이 열어 주신 제도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무엇을 얻고 느껴보겠다는 것으로 자신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벨 같은 제사를 드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시기 원하여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아벨의 제사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믿음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4-7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히11:4) 하셨으니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였으니 하나님이 열납 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제사”라 하여 제물의 질이나 양이 많고 좋아서가 아니라 5-7절에 가인이 극심한 분노와 불만으로 얼굴이 경직된 것 보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것은 네가 잘했다면 왜 떳떳하지 않겠느냐는 말로 잘못된 것 고치고 선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하니 제물보다 먼저 제사의 마음이 가인은 틀렸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갈멜산에 엘리야 초라한 모습에 비해 850명의 화려한 옷에 갖가지 악기로 소리치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의 제사는 곧 응답이 올 것 같으나 믿음 없는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러기에 예배에 제도, 시간, 장소보다 주님 보시고 영적으로 깊이 교제되어 드리는 믿음의 예배 드리는 사람 예배 시간 늦을 수 없고 다른 생각해서도 안되고 정성된 예물 드리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실 줄 믿습니다.
2. 회개와 희생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4절)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으니 이는 피 흘림이 있었던 것으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다 하셨으니 이는 3:21에 하나님이 범죄한 사람에게 짐승 잡아 가죽 옷 입혀 주신 것 죄인을 구속하시려 피 흘려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롬3:25) 아벨의 제사도 회개와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예배는 회개하는 마음과 나 위해 생명 주신 주님께 모든 것 드리고자 하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대하3:1에 솔로몬이 성전 건축한 곳이 모리아산이요,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었습니다. 창22: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곳이 모리아산이요, 대하21:7이하에 다윗이 인구 조사로 하나님께 범죄하며 3년 흉년, 3개월 나라 잃음보다 3일 온역으로 7만명 죽을 때 다윗이 굵은 베옷 입고 회개하며 제사 지낸 곳이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었습니다. 이렇게 성전도 회개와 희생의 장소 위에 세웠던 것입니다. 성도여! 우리의 예배에 진정 회개와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하고 싶은 일 다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언제 나아가겠습니까? 솔로몬이 왕이 되며 일천번제부터 드린 것 보고 최우선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 내어 놓고 회개하고 희생하는 예배에 승리자 되시기 바랍니다.
3. 가장 귀한 것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4절)
“양의 첫 새끼가 기름으로” 아벨이 제사했다는 것입니다. 양의 첫 소산이란 가장 좋은 것 구별하여 드린 것이요, “기름”이란 살찌다는 말로써 살찌고 기름진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의 것은 내것이라 하셨고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것(출23:16)은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 중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드리라는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 중에서 해방될 때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초태생을 죽임으로 해방시켰으니 초태생이나 장자를 대속하라(출13:15-16)는 것도 애국 땅 중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죄와 사망으로 사단의 종 되었던 우리를 구속해 주시어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그 은혜에 내가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나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정성 다하여 주께 시간도 예물도 재능도 드리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며 사명 다해 주의 일하고자 하는 정성으로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사 곧 예배는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를 하나님이 찾으신다고(요4:23)하셨고 복을 주셨습니다. 예배 드리는 장소를 예배당이라고하고 성전입니다. 내 몸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전 3:16, 6:19)하셨으니 나의 삶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하셨습니다. 진정 믿음으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며 진리로 행하며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십자가 생각하며 희생하고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리듯 가장 귀하고 좋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고자 하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고 예배 성공자에게 삶의 큰 성공자가 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성공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아벨의 순교 이야기
창 4장 1~10절 / 김명혁목사
지난 주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이야기를 하거나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 하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라고 말하는 술람미의 사랑의 고백을 들을 때 우리는 가슴이 뭉클 하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벨의 순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순교의 이야기를 하거나 들을 때도 가슴이 뭉클 하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이야기, 폴리캅의 순교의 이야기,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의 이야기를 하거나 들을 때 우리는 가슴이 뭉클 하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저는 아벨을 최초의 순교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벨은 믿음 때문에 그리고 그가 드린 향기로운 제사 때문에 형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믿음 때문에 그리고 제사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순교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6:9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했는데, 죽임을 당한 수 많은 사람들의 시조가 아벨이라고 생각합니다. 히12:24은 예수님의 피와 아벨의 피를 동격으로 취급하기까지 했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 라고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0년 8월 미국 라성 영락교회의 김계용 목사님이 40년 만에 북한을 방문하고 사랑하며 그리던 사모님과 자녀 손들을 그곳에서 만난 지 얼마 후 그곳에서 별세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김계용 목사님의 별세를 추모하는 추모예배가 그 해 10월 경에 서울에서 있었는데 그 때 한경직 목사님이 김계용 목사님의 삶과 죽음을 추모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계용 목사님은 설교로 말씀하셨고 삶으로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죽음으로 말씀하신다고 하시면서, 아벨이 지금도 죽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김계용 목사님도 지금 죽음으로 말하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아벨의 순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첫째,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사는 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농사나 장사가 나쁜 일은 아니지만, 양을 치는 목자의 일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가장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목자라고 말씀했고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면서 양을 먹이고 치는 선한 목자로 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벨은 아버지 아담처럼 양의 가죽 옷을 입고 다니면서 양을 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아벨의 삶을 기쁘게 받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창4:4). 양치는 목자의 삶은 하나님을 닮은 삶이고 누군가를 치고 먹이는 봉사의 삶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순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어야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애양원의 나환자 양들을 치고 먹이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벨의 양치는 삶은 우리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보여줍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본 받는 삶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를 먹이고 살리는 봉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을 희생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보여줍니다. 아벨은 아버지 아담처럼 양의 가죽 옷을 입고 다니면서, 양을 치는, 하나님 닮은, 봉사적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곡식이나 돈을 드리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양의 첫 새끼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부터 유월절 절기마다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예수님께서 스스로 어린양으로 하나님께 피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후 스데반도 야고보도 사도 바울도 손양원 목사님도 모두 어린양으로 피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가장 귀한 제사가 피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피 제사를 드린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아버지를 따라 양의 가죽 옷을 입고 다니면서 살았고, 양의 피로 제사를 드렸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피 제사로 드렸습니다.
아벨의 피 제사는 우리들이 예배를 드릴 때 어떤 마음과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할지를 가르쳐 보여줍니다. 우리들의 예배가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는 예배가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의 기도나 찬송이나 헌물 등 모든 예배의 제사가 우리들의 형식이나 의식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해서 드려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예배가 희생적인 예배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보여줍니다. 본래 제사라는 말은 희생을 의미했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롬6:13을 보면 우리의 지체를 죽여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배에는 희생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시간과 물질과 몸을 죽여서 드리는 희생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남은 것, 찌꺼기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리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배 중 최고의 예배는 자기 몸을 죽여서 드리는 순교의 예배입니다. 순교에는 생명을 바치는 희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아버지를 따라 양의 가죽 옷을 입고 다니면서 살았고, 양의 피로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고, 나중에 자기 자신을 피 제사로 드릴 것을 준비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아벨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를 했습니다.
아벨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피가 하늘을 향해 호소를 했다고 했습니다.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순교자의 피는 한번 흘리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피는 계속해서 흐르고 흐르면서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이 흘린 순교의 피는 예루살렘 교회를 파괴하려던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사망의 길로 달려가던 사울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흘린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던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한국교회를 살리는 구원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아벨이 흘린 아벨의 피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했다고 했습니다. 계6:9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지금도 흐르고 흐르면서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호소한다는 말입니까? “나를 쳐 죽인 형 가인에게 저주를 퍼 부어주시옵소서” 라고 아벨이 호소하는 것일까요?” “나를 돌로 쳐 죽인 사울에게 저주를 퍼 부어주시옵소서” 라고 스데반이 호소하는 것일까요?” “나를 총대로 턱을 부수고 마지막에는 나에게 총을 쏘아 죽인 저 악한 공산당에게 저주를 퍼 부어주시옵소서” 라고 손양원 목사님이 호소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처형당하실 때 하늘을 향해서 호소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늘을 향해서 호소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호소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나를 처형하는 저 악독한 로마 병정들에게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시어 저들을 진멸하시옵소서” 라고 호소하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면서 제일 먼저 호소하신 호소는 다음과 같은 호소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는 어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 가슴이 울며 통곡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호소하는 호소 소리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의 호소 소리들도 우리들의 호소 소리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순교자들은 이렇게 호소한다고 생각합니다. “형 가인을 유혹한 사탄을, 아니 아버지와 어머니를 유혹했던 저 사탄을 깨트려 주시옵소서” 라고 아벨이 호소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울을 유혹한 저 사탄을, 아니 예루살렘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저 사탄을 깨트려 주시옵소서” 라고 스데반이 호소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상에서 처형 당하신 주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저 사탄의 세력을 속히 깨트려 주시옵소서. 인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저 사탄의 세력을 어서 속히 깨트려 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깨트리는 때와 시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최초의 순교자인 아벨의 순교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아벨은 마지막에는 자기의 몸을 피 제사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치나 경제가 아닌 순교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복이 아닌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무력이나 정치력이 아닌 약함과 희생과 사랑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약함이나 희생이나 사랑의 죽음보다는 증오와 정복의 기운이 팽배 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치나 경제가 아닌 순교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지적하는 대로 우리는 지금 정치와 경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피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습니다. 주님께서 받아 먹으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을 마시라.”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으면 우리는 사탄의 세력을 이기게 됩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가 있게 됩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순교자들의 선배가 되시는 아벨 선배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순교자들의 최고의 모델이 되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들도 순교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제사
창 4장 1~12절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누구에게나 궁금해지는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다면, 두 사람의 제물 사이에는 분명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곡식으로 드리는 제물보다 짐승으로 드리는 제물이 더 하나님께 귀하게 여겨진다는 설명을 내놓았지만 성경적으로 설득력이 약합니다. 한 가지 수긍할만한 설명은 이런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고 한 데에서 사람들은 가인이 그의 농사의 수확물 중 특별히 좋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의 수확물의 일부를 드린 것으로 이해합니다. 반면에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한 4절에서 사람들은 아벨이 정성으로 제물을 드렸음을 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저 "양의 첫 새끼"라고 했지만 원문의 뜻은 아벨이 그의 "양 무리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와 달리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성과 겸손의 제사였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바로 아벨의 제물에 함께한 그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인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라고 할 수 없었고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 3절 말씀이 가인이 제물로 드린 것이 꼭 첫 번째 소산이 아니라거나 가장 좋은 곡식이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에 비해 더 나은 제사였다는 사실은 히11:4에 의해 밝혀지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여기서 우리는 가인은 의로운 자라 할 수 없었던 데에 반해 아벨은 의로운 자로 여겨졌음도 또한 알게 됩니다. 요일3:12은 가인이 악한 자였음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그리고 잠21:27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랴." 따라서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가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설령 가인이 드린 제사와 아벨이 드린 제사 사이에서 제물들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의 차이가 없었다 하드라도, 그 제사를 드리는 가인의 마음과 아벨의 마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의 제사였는가 악한 자의 제사였는가 하는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에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이었다고 미루어 보게 됩니다. 가인의 그러한 인간적 면모를 우리는 그 이후의 그의 일련의 언행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했습니다. "몹시 분하여" 한 것은 극도로 격앙된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며 종종 살인으로 나아가기 쉬운 심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안색이 변하니" 한 것을 많은 번역성경들은 "얼굴을 떨군 것"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7절에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신 하나님의 물으심과 잘 연결될 수 있는 번역입니다. 가인이 왜 안색이 변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그가 믿음도 없이 제물을 드렸음을 하나님께서 아신 것 때문에 안색이 변했을 것입니다. 그의 속마음이 탄로난 사실 때문에 안색이 변했고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 6-7절에 보면 그러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7절에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신 하나님의 물으심은 가인의 믿음 없이 드린 제사와 그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일로 인한 그의 분노에 대한 질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왜 얼굴을 들지 못하느냐? 그것은 네가 바르게 제물을 드리지 않았음을 네가 잘 알기 때문이 아니냐?"
어떤 번역들에서는 이 부분을 "네가 옳은 것을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인이 제물을 드린 일도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데 대한 그의 반응도 문제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인이 크게 분노하여 안색이 변하거나 얼굴을 들지 않고 "이제 나는 저 아벨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며 이제부터라도 바르게 행하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시고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과 고백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회개와 변화된 행위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신 것은 앞선 비신앙적 태도뿐만 아니라 뒤따라올지 모르는 범죄행위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행하지 않으면 언제나 죄에 사로잡힐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하신 말씀에서 "엎드려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기회가 오면 단숨에 덮칠 수 있도록 잔뜩 몸을 낮추고"웅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신 말씀 가운데 "죄가 너를 원한다"는 것은 힘을 모아 순식간에 달려들려고 노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죄가 언제나 덮칠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기회를 주지 않도록 잘 다스리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몹시 분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간직한 채 들로 나가 아우를 죽여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우려대로 죄는 순식간에 그에게 덮쳤고, 그는 거침없이 그의 아우에게 덮친 것입니다.
가인의 범죄성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가증스러움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더 크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에게 그의 죄를 자복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한 것입니다. 우선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대답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입니다. 그 다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한 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답하기를 거부하고 회피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더 노골적인 불평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레25:47-49에 보면 이런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 즉 누가 곤경에 처할 때 그를 그 곤경에서 구해줄 책임이 첫째로는 그와 이촌지간인 형제에게 있고, 그 다음은 삼촌에게 있으며, 그 다음은 사촌형제에게 있고, 그 다음에는 다른 친척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연히 자기에게 있는 일차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아우 아벨의 생업은 양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은 조금 바꾸어 보면 "내가 양 지키는 자의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입니다. 그 말 뒤에는 "지키는 것 잘 하는 사람이 자기도 잘 지키면 될 것 아닙니까?"라는 불평이 숨어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해 빈정거리는 소리로 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더 나아가 그 말 밑바닥에는 "양 지키는 사람 제물만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지키시지 왜 받지도 않으신 제물을 드린 나더러 지키라 하십니까?"라는 항변이 깔려있다고도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결과입니다. 그들의 범죄는 자신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땀 흘리며 일해야 하고 산고를 겪어야 하며 끝내는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도 친 형제 사이에서도 질투와 살인까지 저지르는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파괴는 곧바로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의 파괴로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한 번 시작된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죄는 계속되고 더 증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바를 상기시키실 때 그들의 죄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반항하기까지 했습니다.
셋째는, 가인의 불신앙과 범죄행위와 불손함 앞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으나 인간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이 분해할 때 찾아가셔서 달래기도 하셨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길도 가르쳐주셨으며, 또 다른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경고도 주셨습니다. 가인이 아우를 죽였을 때에도 그를 찾아가 말씀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 물으시며 그들의 죄를 상기시키셨던 것처럼 가인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처럼, 가인에게는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할 표를 주시며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창4:14-15).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의 중심을 가인의 범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죄지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과 은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우리는 이것을 아담과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는 단순한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록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동산으로부터 쫓겨난 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녀를 낳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하신 말씀,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신 말씀을 그들에게서 거두지 않으셨다는 은혜의 사실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비록 범죄한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를 유지하게 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믿음으로 바르게 드려진 아벨의 제물만 받으심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바른 신앙의 관계를 지키기를 원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끊임없는 범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벨과 같이 믿음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의 중심인 우리의 예배 또한 진정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몸은 예배당에 앉아있지만 마음은 악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어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와 예배로부터 이어지는 우리의 모든 삶이 참된 믿음 안에서 진실한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
창 4장 1~15절 / 김흥규목사
I.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를 반기지 않으셨는가?
창 4장은 인류 최초의 살인극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동생을 왜 죽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제사에 있었습니다. 두 형제가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지만 형인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물리치셨을까요?
많은 목사님들이 두 형제가 드린 제사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은 땅의 소산, 즉 땅에서 얻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이를 싫어하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짐승의 희생제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제사였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것입니다.
매우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양이나 송아지 혹은 염소와 같은 짐승들을 잡아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셨던 제사가 짐승의 희생제라는 해석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땅에서 난 곡식 제사를 아주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5대 제사 중에 하나인 '소제'라는 제사가 있었는데 이는 땅에서 난 양식을 드리는 제사였습니다(레 2: 1-16; 6: 14-23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짐승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곡식 제사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동물 제사만 열납하시고 식물 제사는 배척하신다는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본문 말씀을 아무리 조사해봐도 그 대답이 명확치 않습니다. 단 한 가지 희미한 단서가 있다면 3-5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3-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러분,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아벨과 그 제물'--Abel and his offering--이라는 부분과 '가인과 그 제물'--Cain and his offering--이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것은 아벨의 제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벨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아니, 순서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보다도 아벨이라는 사람을 먼저 열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물리치신 것은 가인의 제물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사람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아니, 순서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배척하시기 전에 가인이라는 사람부터 먼저 배척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근거로 볼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반기신 이유는 그 제사의 내용이 동물 제사였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조건 열납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반기지 않으신 이유가 곡식 제사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가인이 동물 제사가 아닌 땅에서 난 식물 제사를 드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사가 거부당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아마 두 형제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쪽의 제사는 받으시고 다른 쪽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이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봅시다.
II.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무엇인가?
(1) 두 형제는 인격과 삶이 서로 달랐습니다.
여러분,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사의 종류가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삶이 무엇을 제물로 해서 바치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아벨은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었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물보다 먼저 그의 신앙 인격을 열납하셨던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경우에는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 즉 가인이라는 인격이 문제였습니다. 이미 제사를 드리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가인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인의 마음 속에는 동생과의 묘한 경쟁심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잠복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아무리 좋은 제물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은 하나님의 의에 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 1서 3: 1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그렇습니다. 가인의 신앙 인격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본문에 너무나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동생의 제사는 열납되었지만 자신의 제사는 열납되지 않자 제일 먼저 안색이 변했습니다. 질투심과 분노가 마음 가득 차 올랐던 것입니다. 결국 시기심과 증오심을 이기지 못한 가인은 들판에서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까? 우리의 인격과 신앙과 삶이 함께 접목된 예배를 기뻐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사 1: 11-17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좋은 제물을 무수히 많이 바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되지 않으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삶이 서로 따로 떨어져 놀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힐책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5: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옳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왜 열납되지 않았습니까? 자기 동생에 대한 경쟁심과 시기심, 증오심을 품은 채 제물만 드렸기 때문입니다. 혹시 제물은 옳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이 삐뚤어졌던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 23: 3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아벨을 분명히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왜 반기셨습니까? 그의 마음이 정직했고 그의 삶이 경건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드린 제물 이전에 그의 인격과 삶이 온전했기 때문에 먼저 아벨이라는 의인을 받으셨고 제물은 저절로 열납하셨던 것입니다!
호 6: 6은 말씀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또한 시 51: 17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여러분, 마음이 떠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의로운 삶이 뒷받침되지 않은 예배는 열납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물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삶이 먼저 열납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 4: 23-24 참조)가 되게 하십시오!
(2) 두 형제는 신앙이 서로 달랐습니다.
본문에는 가인과 아벨의 신앙이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막연히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나 히 11: 4은 두 사람의 차이는 신앙의 차이였음을 매우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아벨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물을 고르는 일에 아주 신중했습니다. 정성을 다했습니다. 흠이 없고 가장 귀한 것을 골랐습니다. 양의 첫 새끼를 선택했습니다. 양 안에서도 가장 좋은 것 중의 좋은 것 기름을 성별해서 드렸습니다.
반면에 가인의 제사는 성의가 부족했습니다. 땅에서 난 소산물을 아무렇게나 바쳤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아니면 땅에서 얻은 곡식물을 바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양의 첫 새끼를 잡고 그 기름을 짜내서 바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수고와 정성을 요할 것입니다. 곡식물이 훨씬 더 쉽게 바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아벨이 바친 양의 첫 새끼는 장차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요 1: 36)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줍니다. 또한 양을 잡을 때 나오는 피는 장차 그리스도의 피를 예시(豫示)합니다. 그리하여 히 9: 2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양이 흘린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더더욱 흔쾌히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습니까? 아벨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으셨습니까? 믿음이 아닌 자기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예배를 열납하십니까? 믿음이 들어가 있는 예배입니다. 히 11: 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가 열납되기를 원하십니까? 신실한 믿음으로 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반기실 것입니다!
(3) 두 형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반응이 서로 달랐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인공은 아벨이 아니라 가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벨에 대해서는 겨우 몇 줄 정도 밖에 설명하지 않지만 가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인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했을 때 가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진짜 주제는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느냐 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은 분이시기에 주권(主權)을 가지고 계십니다(사 64: 8; 렘 18: 1-6 참조).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최고의 제사를 주님께 드린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안 받으실 수 있습니다. 열납하시느냐 열납하시지 않느냐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사안이지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제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신 이유를 아무리 잘 설명해도 그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열납하시고 않으시고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이 정말로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두 형제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초점을 가인에게 집중할 경우 가인은 세 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본문 5-6절을 보면 가인은 대번에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먼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인은 왜 자기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옳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가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부터 먼저 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동생인 아벨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품었습니다. 시기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살의(殺意)를 품게 된 것입니다. 이미 얼굴에서부터 가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어떻게 했습니까?
둘째로, 아벨을 죽였습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충고를 주십니다. 옳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에 죄가 가인의 마음 속에 들어왔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면서 죄를 다스리라, 즉 정복하라고 충고하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8절에 보면 들판에서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의 살인자요 친형제 살해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가인은 두 가지 죄를 저질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의 친동생을 죽였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가인이 "칼로 아벨의 목을 따서 죽인 것"--"sliced the throat"--으로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분노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 15: 19에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가 모두 마음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질투심과 분노 때문에 자기 형제를 살해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다음에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얼마나 뻔뻔스러운 태도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모습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습니다. 아마 가인은 팔짱을 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똑바로 쳐든 채로 하나님께 대들었을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나는 내 동생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잡아떼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여기에서 철저하게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책임(Irresponsibility)! 이것이야말로 아담과 가인을 거쳐 오늘 우리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있는 원죄의 가장 뚜렷한 속성인 것입니다!
자기의 범죄 사실을 부인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대십니다. 10절에 보면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에 대한 징벌을 주시는데 12절을 보십시오. 장차 가인이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내지 아니하며 가인은 땅에서 피하여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저주를 듣고서야 가인이 조금 정신을 차리는 듯 싶습니다. 13-14절을 보세요.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움에 떠는 가인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십니다. 15절에 보면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벌을 일곱 갑절이나 받게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죽임을 면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III. 가인 편에 설 것인가? 아벨 편에 설 것인가?
결론을 맺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그 이후 전개될 인류 역사를 요약해줍니다. 지구 한 모퉁이에 가인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공로와 행위를 높이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경쟁심과 시기심과 분노의 마음으로 가득찬 불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반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지구의 또 한구석에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아벨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들의 마음과 삶 전체를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의를 사모하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누구 편에 서 계십니까? 가인의 편입니까? 아니면 아벨의 편입니까? 가인의 후예가 되느냐? 아니면 아벨의 후예가 되느냐는 여러분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기왕이면 아벨 편에 서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시기와 질투는 모두가 죽음입니다
창 4장 1~15절 / 이일기목사
1954년 미국 오하이오(Ohio)州에서 세계적인 골프 대회가 열린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서 아놀드 파머(Palmer, Arnold Daniel, 1929.9.10~)라고 하는 25세 청년이 1등을 하였는데 그가 두 손을 들어 기쁨을 표현하자 모든 사람이 환호를 하였습니다.
그 곳에 14살 난 잭 니클라우스(Jack, Nicklaus William, 1940.1.21~)라는 소년이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역시 환호를 보내주면서 이렇게 마음에 다짐을 하였습니다.
"나도 빨리 커서 저렇게 골프계의 왕자가 되리라" 이후 6년이 지난 1960년에 전미(全美) 오픈대회가 열렸을 때 아놀드 파머가 1등을 하고 잭 니클라우스가 2등을 했습니다.
그 후로 계속 둘이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니클라우스가 파머를 이긴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또 파머가 이기고 어떤 때는 니클라우스가 이기고 이렇게 두 사람이 그대로 경쟁을 약 10년 동안 하다가 이제 한 세월이 다 갔습니다.
1992년 63세의 파머와 52세의 니클라우스가 대결을 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면서 저분들이 한 평생 저렇게 경쟁을 했으니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한 사람이 죽기를 바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두 사람 사이를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여전히 사이가 좋습니다. 그리고 파머가 니클라우스에게 귓속말로 하는 말이 "자, 우리도 나이는 이제 많이 먹었지? 참으로 고마우이 니클라우스" 하였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는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은 이렇게 둘이 경쟁을 한 평생 하였으면서도 그렇게 사이가 좋으냐고?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는 상대방이 없어져야 할 적수라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조력자가 된다고 생각을 하오. 저가 있으므로 내가 열심히 하고, 내가 있으므로 저가 열심히 하고 우리는 서로서로 도와주고 의지하면서 오늘에 이른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대단히 멋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보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08)고 했습니다.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이왕이면 짧은 세상을 살면서 명예로운 이름 하나만은 남기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형이 아우를 돌로 쳐죽였다고 했으니 이게 어쩐 일입니까? 실로 기가 막히는 일이에요.
예사 일이 아니기에 저는 오늘의 말씀 속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시기와 질투심이 이러한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0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0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0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 하신 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이 아벨에 대하여 살기를 품는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조용히 만나서 이보게 아우! 나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안 받으셨는데 아우의 제사는 받으셨으니 어떤 비결이 있어서 그런가? 그 좋은 길을 좀 가르쳐 주게나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벨도 아마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형님! 이렇게 해 보시지요 하며 나름대로의 방법을 제시하였을 것이고 그 조언을 따라 이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졌겠습니까? 그런데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한 일로 인하여 그 영적인 문제를 잘 못된 방향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신 일을 자기의 제사와 연관시켜 시기심과 질투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인이 처음부터 이런 시기심을 가진 아주 못 된 사람으로 태어났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01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0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하와가 가인을 낳고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노래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낸 대단히 귀한 존재인 것이죠.
물론 사람은 다 고귀하며 이 세상에 근본적으로, 생래적으로 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요. 사람은 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귀하나 문제는 그렇게 귀한 존재가 어느날 시기심에 사로잡히니 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요 땅을 치고 통곡할 일 아닙니까? 시기심과 질투심 이것 알고 보면 정말 무서운 겁니다.
이 무서운 시기심과 질투심을 "가인 콤플렉스" 라고 표현하면 어떨까요? 이 가인 콤플렉스는 하나님 앞에서 뼈를 깎는 기도가 뒷받침되어야만 해결되는 것으로서 이거 해결 못하면 서로가 죽게되고 공동체도 무너지는 아주 무서운 공멸(共滅)의 길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가인은 이 콤플렉스에 걸리자 아벨을 동생으로 보지 못하고 경쟁자로, 대적자로 보면서 마지막엔 아벨이 죽든지 아니면 없어지든지 해야 된다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죽어야 되고 죽여서 해결된다고 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가인은 앞으로도 계속 아벨이 존재하는 한 자신을 추월할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면서 결국은 그 시기심으로 인해 사망을 낳고 말았습니다.
대개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남이 잘 되는 것을 잘 보고 넘기지를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라 올라오는 싹과 같은 형제를 밟아 버리기를 잘 하지요. 상대방이 자기만큼 자랄까봐 추월하여 앞설까봐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고생하고 힘들게 살던 이웃과 형제가 모처럼 잘 될 때 우리가 가질 자세가 무엇이며 나보다 늦게 믿고 늦게 나온 사람이 더 신임을 받는 자리에 등장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웃이 형제가 경쟁자가 자신보다 잘 되길 기원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앞선 사람이 뒤진 사람을 끌어주고 선배가 후배를 격려하면서 나보다는 더 잘 할 거야 라고 격려해야 합니다.
잠 04: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잠 14: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2. 시기와 질투심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반항하게 됩니다.
0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가인은 형이고 아벨은 아우로서 구약성경이 기록 될 당시의 근동 지방에서 맏아들의 위치는 기력의 시작이라고 해서 대단히 중시하였습니다.
장자에게는 상속의 특권도 주어졌는데 신명기 21장 17절을 보면 상속에 있어서 장자는 다른 아들보다 두 배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맏아들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자이었기에 가인은 당연히 강자의 위치에서 동생을 돌보고 지켜주어야 할 신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시기심과 질투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위치를 이탈하였으니 이 얼마나 큰 죄악이냐 말입니다.
09절 말씀을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가인의 행적에 대하여 몰라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묻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왜 형의 위치, 장자의 위치, 강자의 위치를 벗어난 행동을 하였느냐 이 말인데 그에 대하여 가인이 뭐라고 대답을 하는지 보십시다.
09....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이제 가인은 심령이 대단히 거칠어져서 고요함과 평정을 잃은 체 하나님의 지적과 질문에 대하여 그저 뻔뻔스럽고 반항적인 대답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인 스스로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라고 말했는데 여기 지킨다는 말의 의미는 돌보는 자, 시중드는 자, 파수꾼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가인은 당연히 형으로서 마땅히 동생인 아벨을 돌보며 지켜 주어야 할 인간적 책임이 있는 자임에도 그 책임을 자기하고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형과 아우의 관계로 얽혀져 살고 있음을 아십니까? 이 관계성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됨을 드러내는 현장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강한 자이겠습니까? 상대방이 언제나 약한 자로만 있겠습니까? 상황이 바뀌어 내가 약한 자가 되고, 그가 강한 자가 되어 나를 도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여러분들에게 "네 아우 ○○○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반항적인 답을 하면 안 될 줄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아우를 잘 지키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롬 15:0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살전 0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만약에 가인이 아우 아벨을 잘 돌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그의 존재는 동생을 사랑하는 훌륭한 형으로 더 귀해졌을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합시다. 지킴을 받는 사람보다 지키는 사람이 복을 받고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섬기는 사람이 훨씬 더 높아지는 것 말입니다.
마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높아지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낮아져야 하고 명예를 얻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섬김과 돌봄의 사람이 되길 진정으로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보고 지켜야 할 아우는 누구입니까?
우선 우리보다 약하고 못한 사람들이 우리의 아우인데 우리 교회의 비극 사회의 비극이 바로 강한 자의 위치에서 약한 자를 돌아보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으며 약한 자를 죽이며 약한 자에게 형벌을 부과합니다. 법을 보십시오. 힘있는 사람들에게는 약하고 힘없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강합니다.
3. 시기와 질투심은 자신도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 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약자를 돌본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그것이 인생의 아름다움입니다.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 여러 면에서 핸디캡이 있는 사람, 경제적으로, 영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 이 모두가 다 약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위로하고 싸매 줌으로서 인생의 살맛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한 사람입니까?
어느 한 가지라도 남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강한 사람이요 많이 배우지 않았어도 상대방보다 물질이 좀 많다거나 아니면 육신이 더 건강하면 역시 그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강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성도 여러분은 어느 한 가지라도 남보다 나은 것이 있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강자라고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강자 됨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 강자의 길을 스스로 버리고 점점 파멸의 길로 들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0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셨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 03:09 ....네가 어디 있느냐 이었습니다.
그때에 아담이 하나님 그만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라는 이 한 마디만 했었더라도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전혀 무책임한 변명을 이렇게 하였습니다.
창 0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의 자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삽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0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0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이때 가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 실은 제게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라고.
그런데 그는 아벨을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0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여기서 가인이 하나님 제가 동생을 죽였습니다 했으면 살 길이 있었을 터인데 그는 오히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반항적인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의 결과로 인해 가인은 하나님의 성지에서 쫓겨나고 마는데(14절)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다는 것 이것보다 더 무서운 형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잃어버린다는 것 이것은 육신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시 27:0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시 143:07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마침내 가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욕망을 따라 파멸의 길로 떠나가게 되는데 전설에 따르면 가인은 그 후손 라멕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라멕이 사냥을 나갔다가 가인이 숲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짐승인 줄 알고 화살을 쏘았다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두 사람 다 진실한 대답을 했었더라면 어쩌면 역사가 바뀌어졌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제물을 다 받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아마 가인의 안색이 변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아벨의 것은 받고 자기의 것을 안 받으니까 아우를 죽이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질투라고 하죠. 시기와 질투,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길 때가 아주 많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보다 무서운 게 없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모두가 잘못되는 건데 내가 못 살아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잘 되는 게 배가 아파서 그래요.
모든 문제가 이 시기 질투 때문에 생기고 마지막에 신앙까지 잃어버리게 되는데 가인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남을 증오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비극을 맞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도 미워하거나 시기하기보다는 형제가 잘될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자기도 분발하여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미움과 시기 그리고 질투 다시 말하면 이 가인콤플렉스는 파멸의 길 가인의 길로 들어서는 덫이기에 걸리지 않도록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분노의 노예에서 자유로운 길
창 4장 1~15절 / 김필곤목사
운전하고 가는데 갑자기 옆에 있는 차가 끼어들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분노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가 생기지만 참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개 아들하면서 욕을 해대며 운전대를 상대방의 목으로 알고 비틀며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창문을 열고 "집에 가서 애나 보라"고 욕하다가 그것도 분이 안풀려 앞에 차를 세워 놓고 한 바탕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무덤덤하게 무시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급한 일이 있겠지 하며 사고나지 않도록 기도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어떤 스타일입니까?
우리는 늘 분노를 할 수 밖에 없는 현장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는 분노의 지뢰밭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화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봅니다. 체면 억압 문화 때문에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 깊이 품고 있다가 결국 분노의 노예가 되어 그것이 병이 되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듀크의대 연구 결과에 의하면 보통 사람에 비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20%가량 높다고 합니다. 심장병의 주요 발생요인은 담배 술보다 분노가 더 큰 원인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 약 80% 정도의 부부가, 마음에 숨겨놓고 쌓아놓고 있는 분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월프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분노를 느낄때의 위장의 점막은 충혈 되고 운동이 증가되며 위산분비가 많아져서 마침내는 위, 장출혈과 궤양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대장염의 96%가 분노때문이라는 보고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해치고 우리의 정서적 신체적 건강 뿐만이 아니라 영적 건강까지 해를 끼치는 이 분노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몽테뉴는 “분노는 기묘한 용법을 가진 무기다. 다른 모든 무기는 인간이 이를 사용하지만, 분노라는 무기는 반대로 인간을 사용한다.”호라티우스는 “분노는 일시의 광기이다. 그대가 분노를 제압하지 못 하면 분노가 그대를 제압한다.”라고 말했는데 분노를 방치하면 결국 인간의 분노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오늘 분노의 노예가 된 가인을 어떻게 처방하는가를 통해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배우길 원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의 가정도 분노의 노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은 아들 가인과 아벨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직업이 농사하는 자였고 작은 아들은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같은 아들이지만 직업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농사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큰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작은 아들 아벨은 양의 첫새끼를 잡아 그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이 받아 주었는데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았습니다. 이 때 가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을 한 번 같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심히 분했다고 했습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피가 거꾸로 도는 것같았습니다.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아무도 없는 들에 단둘이 있을 때에 아우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완전히 분노의 노예가 되어 결국 살인죄를 지는 그것도 동생을 죽이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런 해를 끼치는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요?
1.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분노의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6).-분노의 원인
분노는 개인적 분노와 집단적 분노, 죄악된 분노와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분노에도 죄악된 분노가 있을 수 있고 의로운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집단적인 분노에도 죄악된 분노가 있을 수 있고 의로운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의로운 분노 의분과 죄악된 분노 분노를 구분하는 것은 그 기준점에 따라 다름입니다. 자신에게 기준점이 있을 때는 대부분 죄악된 분노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점이 타인이나 공익 등에 있을 때는 의분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악된 분노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분노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욕구충족이 아니되면 분노가 생깁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 대접받지 못할 때, 먹고싶은 욕구가 좌절될 때 등 분노가 생깁니다.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때도 분노가 생깁니다. 동물이 자기 영토를 공격당할 때 분노하는 것처럼 자동차 운전을 하는데 끼어들면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대인관계에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생깁니다. 무시 당했다고 생각할 때 분노가 생깁니다. 친구에게 부모에게 자식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무시당하면 분노가 생기게 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손해를 보았을 때, 목적을 이루는데 방해를 받았을 때 분노가 생깁니다. 위협이나 해를 받았다고 느낄 때 분노가 생깁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법이 평등하지 못할 때 정의가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될 때 분노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노의 원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원인이 다 자기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차가 끼어늘면 분노가 생기는데 내가 가는데 왜 방해하느냐는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확장시키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이 급한 일이 있겠구나? 남의 입장에서 서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더욱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그사람에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있구나라고 시각을 확장시키면 전혀 의미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의 노예로부터 자유로워 질려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세요. 가인이 분노를 품었습니다(5). 그 때 가인의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처방을 내리시고 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왜 분노하는냐? 왜 안색이 변했느냐? 이유를 물어보고 계십니다. 분노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 지금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분노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네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고 너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고 분노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대우했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때문에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받고 안받고는 하나님 마음이지 자기가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제자를 받지 않은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은 모르고 동생 때문에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는 분이십니다. 이미 아벨의 마음은 열납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믿음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히 11:4), 자신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 앞에 합당한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에게 분노의 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너 회개하여야 진정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분노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할 때 분노의 문제는 종식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이 없습니다. 다 죄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 다 용서함을 받습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노의 문제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그것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편으로 받은 분노로, 어떤 사람은 아내로,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받은 분노로 평생을 화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용서의 복음, 화해의 복음, 능력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의 분노의 문제를 가지고 나올 때 진정 분노의 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미국의 중서부의 한 도시에 큰 전도집회를 하였답니다. 집회 앞서서 며칠 전에 도착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일제히 조간신문에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고 헤드라인 타이틀로 나왔다고 합니다. 무디가 바쁘다는 이유로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자들이 화가 나 악평을 했습니다. 이것을 본 무디의 참모들이 분노하였습니다. 무디 앞에 신문을 가지고 와서 이럴 수가 있느냐고 분노를 하였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신문기사를 쭉 읽어 보시더니 웃었답니다. "이 사람들 사람 잘못 봤구만, 나는 이 신문기사에 난 것보다 훨씬 더 악해. 나는 훨씬 더 교만하다고. 이 정도면 잘 썼구만."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겸손하라고 준 신호이니 더 기도하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사람의 모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2. 분을 품지 말고 분을 다스림으로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과정 해방
분노는 분노 자체가 죄는 될 수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분노는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생존 수단입니다. 인간의 기본 감정인 희로애락(喜怒哀樂)가운데 하나인 '노'(怒)에서 연유된 감정입니다. 분노는 사랑, 흥분, 슬픔, 두려움, 불안, 평안과 같은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주어진 대표적인 감정입니다. 그 자체가 옳다거나 그릇 되다고 할 수 없는 기본적인 감정입니다. '강한 불쾌감'으로 표현되는 분노는 그 강도에 따라 가볍게는 짜증나고 약이 오른 상태부터 원한, 분노, 분개, 격분, 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문제는 이 분노가 감정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분노를 느끼면 얼굴이 빨개지고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세지며 핏대가 오릅니다. 분노는 적개심과 함께 행복의 파괴자, 많은 중병의 주요원인되어 버립니다. 우울증, 비능률, 교통사고, 재정적 손실, 결혼 생활의 갈등, 강간, 살인, 가정폭력, 전쟁들으로 발전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가인이 심히 분노합니다. 그 분노가 어떻게 발전합니까?
1) 안색이 변합니다(5) 분을 품으면 화병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화병은 정신은 물론육체와 생활에 큰 손상을 입힙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정신 신체 의학연구 개척자인 월터 캐논박사는 [화의 구름]이있음을 발견하고 이 구름이 뇌신경에 모이면 눈에 핏발이서고 열굴이 붉게 상기되며 말을 더듬게 되는 증세가 생긴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박동이 불규칙해지며 피가 위와 장기에서 심장 중추 신경계 근육 등으로 역류한다. 소화관의 기능이 중지되고 간에 저장되어 있던 당분이 유출된다. 그리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공격을 하게 됩니다(8). 아벨을 쳐죽입니다. 분노가 자라면 결국 폭력과 살인으로 이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3) 마음이 강팍해집니다(9). 뻔뻔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분노의 노예가 되면 사람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가 발전하여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그 고리를 끊고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죄의 소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범죄행위로 발전하지 않도록 다스려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에베소서에서는 어떻게 교훈하고 있습니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 4:26-27)"
분노의 감정이 있을 수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분을 품으며 복수를 계획해서는 아니됩니다. 분노는 잘 다스려야 합니다. 분노가 마음을 분노의 노예로 만들도록 자리잡지 못하게 히고 노가 일어나 자라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는 심령의 상태, 복수심을 가진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시 그 분을 처리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분노가 파괴력을 가지고 이성을 마비하고 신앙을 무기력하게 하고 자제력을 상실하게 하여 분노의 노예로 삼을 수 있도록 방치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분노가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우리의 감정을 분노의 노예로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엡5:18절을 보십시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 마음을 성령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뿐아니라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 받으면 분노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3. 분을 가지고 선을 행함으로 분노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7).-결과 해방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분노가 죄를 짓는 도구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분노를 처리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1)내적 억제형 (2)외적 표출형 (3)자기주장적 표현형입니다.
1) 내적 억제형은 분노를 분노를 의식적으로 억제하는 방법입니다. 끼어들기 하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렇다고 양반 체면에 싸울 수 없고 핸들을 잡고 그 사람 목이라고 생각하고 목비틀 듯이 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고, 아니면 기대가 좌절되어 화가 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되 불쾌한 감정이 무절제한 행동이나 말로 발전하는 것을 막고 분노를 절제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한다고 했습니다. 단기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좋은 방법이 될 수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억제하면 결국 분이 쌓이게 되고 그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 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까지 해치게 됩니다.
2) 외적 표출형은 파괴적 반응으로 분출시키는 것입니다. 화나면 폭언을 퍼붓고 끼어들기 하면 개 아들이라고 욕을 하고 가지 않고 서있으면 자리 펴고 자고 가라고 한마디 합니다. 그것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차를 세워놓고 싸우고 그래도 분이 안풀리면 공기총으로 쏩니다. 이 방법이 가인이 쓴 방법입니다.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들에 나아가 아우를 쳐 죽입니다(8). 분노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1) 동생을 잃습니다.(8) 가족을 잃은 손실을 보게 됩니다.
(2) 살인 죄인이 됩니다.(8) 인류 최초의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3) 형벌을 받습니다.(11)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아 효력을 얻지 못합니다. 땅에서 유리합니다. 외롭습니다. 아무도 상대를 해 주지 않습니다. 13절에 보니 형벌이 중하여 견딜수 없습니다.
(4) 외로움에 빠집니다.(12절)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화내는 사람 옆에 가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주변에서 마음이 멀어진집니다.
(5)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 옵니다(14) 피해자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쌓이게 됩니다. 폭군 쳐놓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6) 모두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부모 아담 하와의 상처 후손들 우리까지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분을 품고 있는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라고 했습니까? 7절에서 말씀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분을 품고 있는 그를 향하여 선을 행치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마음을 지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엎드려 먹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죄지를 찬스를 노리는 것입니다. 분으로 악을 행하면 분노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분노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분노를 건설적으로 발산해야 합니다. 죄의 방법이 아니라 분노를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발산해야 합니다.
3) 자기 주장적 표현형으로 분노를 풀어야 합니다.
분노를 무시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억압한다고 억압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를 무시하고 억누르면 문제는 더 악화되고 곪아터질 뿐입니다. 폭발시킨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다 결과적으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를 해칩니다. 남을 해칩니다. 자신을 병들게 합니다. 정직하게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통해 일어나는 감정을 조절하라는 것입니다. 문제와 사건 자체에 묶이면 분노는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문제와 사람을 분리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용서하라고 합니다.
4) 성경적 방법으로 풀어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하나님은 분노도 예외가 아닙니다. 진리가 분노의 노예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한나가 원통한일을 당할 때 우리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풀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기도의 통로를 주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억울하게 갖혀있을 때 찬양한 것처럼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 사람보는 것 아닙니다. 분노가 폭발될려고 할 때 사람보는 것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노의 노예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참 해방을 주십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창 4장 1~15절 / 박조준목사
오늘 저녁 우리는 창세기 4장 1절 이하를 읽으면서 이것은 개념적이거나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여러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 중에 처음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예배를 드렸 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그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생활을 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했으므 로 땅의 소산에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이 드린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예 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제물은 기뻐하시지만 어떤 제물은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대결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쪽이 모두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엘리야의 제물은 하늘 에서 내려온 불에 의해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알신의 선지자들은 공연히 그들의 신을 부르기만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면 신비한 불이 그것을 태우 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서 하나님이 제물을 어떻게 받으셨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받지 않 으신 것을 나타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든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고 성경이 말씀했습니다. 이때 가인은 자기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일에 대하여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고, 분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기회를 보다가 동 생이 들에 나왔을 때 아무도 모르게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처음으로 기록된 살인의 역사입니 다. 그리고 그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그리고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사실 아벨이 그의 형 가인을 성나게 한 적이 없습니 다. 아벨은 단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을 드린 것뿐입니다. 사랑의 삼각관계에서 살인을 하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당황하게 됩니다. 성난 배우자가 현장에 나타나 필연적으로 삼각 관계 속에 있는 제 삼자를 죽입니다. 차라리 배우자를 죽이는 것이 더 적당할 것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생명은 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시기에 불타 오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벨을 가 장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해 합니다. 화가 나고 시기의 불이 타올라 가인은 동생 아벨을 때려눕힙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살인조차도 하나님의 자녀로부터 떼어놓지 못하는 일입니다. 살인자는 범 죄한 현장에서 손에 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의 친구십니다. 살인조차도 용서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재확인 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의 분노하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실입니다. 그 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십니다. 범죄한 가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첫번째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 눈앞에서 없어져라. 너는 살인자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대답은 아담의 대답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를 테 면 더 악질적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물음에 그 문제의 핵심에서 피해서 대답했습니다. 그러 나 가인은 하나님께 반항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여기 지키는 자 에 대해 가 인이 사용한 히브리어는 사람들에게보다는 오히려 동물에 대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목자는 염소와 양,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가축들을 지키는 자 입니다. 가인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목자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들면서 그의 무죄를 주 장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으므로 하나님이 받으셨고 가인은 믿음이 없이 제사를 드렸으므로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책임은 하나님께 있 는 것도 아니요, 동생 아벨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책임은 가인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러 나 가인은 자신의 불신앙을 반성하지는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기보다 의로운 동생 아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나아가서 그를 죽였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여러분, 우리 죄의 중심부에는 순결을 가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는 아주 중대한 죄인들입니다. 본향을 향한 긴 항해 속에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이 첫걸음을 내 어 딛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인 사이의 이러한 대화 속에는 우리를 위한 또 다른 교훈이 있습니 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우리의 형제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 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 형제가 어디 있느냐?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물으신 것이고 가인더러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신 것은 나와 이 웃과의 관계를 물으신 것입니다. 아우는 사랑과 협조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사랑대신 미움 으로 아우를 대한 것입니다.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음 속에 간직할 아우를 미워한 나머지 동생을 죽여 들판에 눕혀 두고 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하나님은 물으시는데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 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고 대답했습니다. 마펫의 번역에 보면 내가 내 아우의 목자입니까?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목자를 업신여기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이때 가인도 아우의 직업을 천시 하고 아직도 자기의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나도 아벨처럼 목자란 말입니까? 하면서 이처럼 못난 아 우를 환영하시는 하나님께 반항조로 대답한 것입니다. 네 형제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 세계 속에 있는 이웃에 대해서 우리 의 책임을 지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창세기 전반을 통해서 교차되어 있는 두개의 커다란 주제가 율법과 은총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가인은 율법 아래서 처리됩니다. 첫번째 살인자는 주님 앞 에서 추방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은 그와 함께 하십니다. 가인은 추방이 되고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외칩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가인은 그가 유리하며 다닐 때 죽임을 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면전에 서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가인의 이 비통한 호소를 들으신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 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고 말씀하시며 표를 주셔서 누구나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 다. 가인은 추방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은혜의 말씀으로 떠나 보내십니다. 창세기는 가인이 롯 땅에 거하였으며 그곳에서 가축 치는 자들, 수금과 퉁소를 잡는 음악인들이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장인들의 족장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인은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를 추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와 함께 하십니 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위에 하나님의 표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무서운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 리스도와 그 분의 속죄의 표시는 우리 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도 하나님 의 은총은 작용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치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할만하기 때문 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했음에도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곧 은총입니다. 어떤 양치는 마을에 사는 두 젊은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형제는 남의 양을 훔치다 가 붙잡혔습니다. 그 당시 규율이 남의 양을 훔치다가 붙잡힌 사람에게는 불에 달군 쇠로 ST 라는 문자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 낙인이 찍히자 이런 벌칙을 알지 못하는 동네로 도망을 쳐서 그의 남은 생을 이곳저곳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동네에 가나 이마에 찍힌 낙인 때문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저 낯선 사람의 이마에는 'ST 라는 낙인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며 수군거립니다. 그러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그는 곧 수치를 당하므로 그 이상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전생애를 추방된 사람으로 살았 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은 그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그가 양을 훔친 것 때문에 당한 수 치를 보상했습니다. 내가 순간적인 실수로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내 인 격을 복구해야겠다 는 생각으로 친구들과 이웃을 돌보며 자기 자신을, 이웃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인이 될 때까지 그렇게 헌신과 봉사로 살 았습니다. 어느 날 어떤 낯모를 사람이 그 마을에 와서 이 노인의 이마에 찍힌 ST 라는 글자가 무슨 뜻이 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마을의 어느 중년 신사는 글쎄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어 요.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분의 이마에 표시되어 있었으니까요. 제가 생각하기는 그 ST 란 글자는 성인 Saint 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양을 훔친 벌로 머리에 찍힌 낙인을 나중에는 성인의 약자로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떤 이는 희생의 제물 의 내용이 문제라고 결론을 지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성경에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 고 했는데 가인은 피를 흘린 제물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셨다고 말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벨이 양을 잡아 제단 위에 놓았을 때 가인은 호박을 제단 위에 가득하게 쌓아 놓 았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땅에서 거둔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을 바쳤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말해서 그가 바친 제물의 내용이 그렇게 문제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중 에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목장 주인이거나 양치는 목자였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들도 그들의 산물을 비둘기나 양 또는 염소로 바꿀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하나님이 구하시 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 51편 17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고 하셨 습니다. 글쎄요. 가인의 제물의 양이 적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과부의 엽전 두닢에 관한 이야기는 제물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님 을 말해 줍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기뻐 받으시는 헌물의 다른 실례를 봅니다. 바나바는 땅의 일부를 팔았으며 주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그 모든 돈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우리의 헌물의 양이 많으냐 적으냐 그것이 크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바치는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아마 가인은 아벨보다 자기가 더 많은 헌 신을 하는 사람인 것을 다른 사람뿐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기를 바라는 자만심에서 값으로 따지면 아벨의 제물보다 더 비싼 것을 드렸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부은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제자 중에 한 사람은 불필요한 낭비를 한다고 비난까지 했습니다. 그 비싼 값의 돈을 그렇게 낭비하느니 차 라리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다가 그랬습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녀의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귀한 사실을 복음이 전파되 는 곳에는 어디든지 함께 전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혹시 가인은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바침으로 자기의 소유를 축내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 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조금 드리면서도 많은 것을 받아 보려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 액수나 내용을 넘어서서 우리가 왜 그것을 드리고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드리는 동기를 아십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속이려는 마음 에서 조건적으로 하나님께 그의 헌물을 드렸을 것입니다. 가인은 그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칭 찬과 축복을 받으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얼마 동안 십일조를 꼭 드리고 성실하게 봉사합니다. 그러나 그의 바라던 것이 이 뤄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해서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런 사람 은 하나님께 빚을 지우면서 그렇게 헌금하고 봉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거래를 하다가 이익이 별 로 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만큼 했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이만 한 대접은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면 큰 잘못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너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할 때 우리 마음에 감격과 감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이름의 뜻에서도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인 이란 말은 얻다 , 고대하 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벨 이란 이름은 뜻은 가냘픈 호흡 또는 연약한 , 비어 있는 이란 뜻 이 있습니다. 가인은 무슨 일을 하든 칭찬을 기대한 사람이고, 아벨은 그 마음이 비어 있는 상태 로 언제나 부족하게 생각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어떤 댁에 손님으로 초대를 받아 갑니다. 주인 집 내외는 정성을 다해 손님들을 접대합니다.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릇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가장 아끼는 그릇들을 내놓고 성의를 다하여 음식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어떤 주인 내외는 이 모든 것을 준비하느라 얼마나 수고했는지 알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그런 자세는 손님들에 게 별로 유쾌함을 주지 못합니다. 어떤 주인은 그렇게 수고하고, 정성을 기울인 초대인데도 그것 을 쉽게 한 것처럼, 기쁨으로 한 것을 나타내며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에게는 한없는 영광입니다. 하면서 그렇게 기뻐하고 고마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초대받은 손님이 감정이 좀 무딘 사람이라고 해도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의 동기를 아십니다. 우리는 무슨 봉사든지 헌신이든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면 그것이 짐이 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충 분한 시간이나 충분한 소유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지 않은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고 다른 사 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가난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병들어 고생하는 네 아우가 어디 있느 냐? 억울한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헐벗은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슬픔에 잠겨 있는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는 나 살아가기도 바쁜데요 라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확실히 나오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책임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더 많이 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하늘 나라는 이 세상에서 남을 도와준 것들로 장식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것들 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지니고 있는 동안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떠나 보냈을 때는 영원한 것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 다.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있는 크리스토퍼 챔프멎의 1680년 묘비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내가 준 것을 나는 갖고 있다. 내가 쓴 것은 내가 가졌던 것이다. 내가 남겨 둔 것은 그것을 주지 않았으므로 잃어버렸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큽니다. 무서운 죄가 뒤따른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에서 가인의 시기가 그를 덮쳤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의 아우를 죽였다 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게 창조하셨습 니다.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길이길이 남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사랑의 대상 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등한시하고, 질시하고, 미워하는 대상은 아닙니까?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
창 4장 1~15절 / 이상호목사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예수께서는 죄가 행위로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으로만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고,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주님의 판단기준에서 본다면 죄인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기독교에서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이나 행동으로 그 어떤 죄를 짓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핑계대고 시기질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를 수 없는 죄성에 사로잡혀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하는데 사람은 아름다운 사랑의 속성도 있지만 전혀 그 반대의 속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랑의 속성보다는 증오와 시기하는 마음이 지배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랑과 평화의 시대보다는 전쟁과 분란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인류의 시조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함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자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한 나머지 들판으로 유인하여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류의 비극적인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으로 기록된 이 사건에서부터 오늘 우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가 얼마나 계속하여 되풀이되어 왔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은총을 덧입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1.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1-5절)
가인과 아벨은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이었지만 그들의 성향은 매우 달랐습니다. 가인은 매우 거칠고 다혈질의 사람이었던 반면 아벨은 유순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격이 다른 그들은 직업 또한 서로 달랐습니다. 가인은 농부이었고 아벨은 목자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은 각각 자기의 수고로 거둔 것 중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농부였던 가인은 추수한 곡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가인은 억제할 수 없는 분을 품게 되었고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동생을 살해하는 엄청난 사건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하나님을 섬겼고 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비록 제물의 내용은 달랐지만 외형적으로 가인과 아벨은 전혀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제물은 받으시고 다른 사람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부분을 놓고 학자들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성경 그대로 해석하자면 우선 가인은 단순히 땅의 소산으로 드렸고 아벨은 많은 양 중에서 맏물 양을 구별해서 드리되 기름진, 혹은 특별히 좋은 것으로 드렸다는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곧 아벨이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정성을 다해 준비했음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나와 있는데 아벨의 제물이 이와 같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준비된 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성이 없는 예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려도 정성이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미국에서 흑인교회에 보았더니 얼마나 감격적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성찬을 드는 시간은 모든 성도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흑인교회가 뜨겁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었지만 이렇게까지 감동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예배 후에 점심을 들면서 그 교회 목사님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제가 눈물을 흘리며 성찬을 받는 모습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고 하자 그 목사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는 몸을 찢어주셨는데 주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들면서 어찌 눈물 없이 들 수 있겠느냐고 하시는 말씀에 저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특히 주님의 그 고귀한 몸이 찢기시고 흘리신 살과 피를 들면서 아무런 감동도 없이 무감각하게 성찬에 임하는 것은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예배는 가인의 제사와 같은 것입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정성을 다해 최고의 것을 드렸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예물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정성을 다해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정성어린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제물을 열납하시기 전에 그 제물을 드리는 자의 인격, 곧 내면의 동기와 태도를 먼저 감찰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4-5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만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그 사람까지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내면의 동기와 태도가 모두 주님께 열납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가인의 분노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습니다.(5-8절)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데 대해서 불쾌했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5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화를 냈다는 것보다 "몹시 낙심이 되어"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과 자신을 돌아보지 않자 그것을 자기에 대한 일종의 거절로 보았고 이로 인해 심한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몹시 낙담하여 얼굴을 떨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안색이 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얼굴을 떨군다"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없고 떳떳치 못할 때, 혹은 화가 치밀 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이상한 데에 가서 그 분풀이를 합니다. 남편이 가장으로서 가정의 생활을 책임지지 못하게 되면 누구나 자신감을 상실하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더욱 겸손해져야 마땅할텐데 오히려 그 좌절감을 아내에게 화를 내거나 폭력을 가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참으로 사람의 심리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인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분이 가득하여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얼굴을 떨어뜨림은 어찜이뇨?"(6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가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냉철히 따지고 보면 가인은 전혀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으면 왜 안 받으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고치면 될텐데 그는 낙심하여 머리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어찌하여 낙심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분한 마음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생 아벨을 들판으로 유인하여 그를 그만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시기와 미움으로 낙심하더니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인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결국 아우 아벨을 살해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살인에 대하여 교훈하실 때 형제를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것이 곧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미움과 시기와 질투는 사단의 간교한 속성입니다. 가인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남을 증오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도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가 잘될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자기도 분발하여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미움과 시기는 가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므로 결코 그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들은 남이 어려울 때는 측은한 마음으로 감싸주다가도 내가 잘못되고 남이 잘되면 그만 낙심하여 머리를 떨구고 악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인의 전철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가인의 심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남이 잘될 때 축하해주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선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덫에 걸리지 않는 길입니다.
3. 가인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9-12절)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은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과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이에 아담은 "내가 옷을 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창 3:10)고 했는데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변명하고 죄를 감추려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순간에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였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을 돌이키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실상 우리가 하나님께 변명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인생들은 그렇게 우둔합니까?
가인이 계속하여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하자 하나님은 가인을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준엄한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0-11절). 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준엄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을 때는 힘들게 수고할 경우 땅의 소출을 낼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경우는 그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땅에서 얻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저주의 결과로 인간에게는 언제나 생활고의 무거운 짐이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그 마지막 회개의 기회마저도 거부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전하며 유랑인으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하나님을 뵙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박탈된 채 땅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사는 자는 땅이 저주를 받아 소출이 없고 세상에 어디 한 군데 의지할 곳도 없이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의 현대인은 그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불안해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다.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서로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칼 막스는 세상의 악을 경제체제나 계급문제로 이해하고 이것을 사회 구조적인 변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서 한때 공산혁명이 세계를 뒤엎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산혁명 이론으로도 사회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이론을 따라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 나라의 경제는 더욱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새로운 계급에 의한 수난 당하는 백성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막스의 이론에 반대하면서 버스의 좌석을 편리하게 하고 내부구조를 개조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버스가 깊은 골짜기에 빠져들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류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죄의 병입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사회제도를 바꾸고 경제가 발전하고 정치가 민주화되어도 인류사회는 골짜기에 빠져 있는 버스와 같은 모습일 뿐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가인에게 결코 자유와 평안은 없었습니다. 가인은 오히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13절)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회개할 줄을 모르고 불평만 털어놓았습니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하지 않아 저주의 길, 유리방황의 길,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죄짐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아무리 무거운 죄의 짐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 회개하여 사죄의 큰 은총을 받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성공적인 예배는 인생의 열쇠입니다.
우리는 아벨의 예배를 통해서 배웁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마음이 있는 예배인데, 이것은 희생이 있는 예배입니다. 내 시간, 내 오락, 내 안락, 내 잠을 희생해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기쁨, 더 많은 안식, 더 많은 쉼을 허락해 주십니다.
(예화) 이민교회 목사가 교인이 주일에 골프장 가기에 주일성수할 것를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집사가 또 골프장으로 가서 심방가서 심각하게 권면했더니 집사님 말하기를 “목사님 교회 오면 몸은 교회 있지만 마음은 골프장에 있고, 골프장 가면 몸은 골프장에 있지만 마음은 교회에 있습니다. 목사님이 분명히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고 하셨죠? 그럼 제가 교회에 몸이 와야 하나요? 마음이 와야 하나요? 저는 목사님 말씀대로 마음으로 교회에 왔습니다”하더랍니다. 말이나 못하면 좋겠습니다.
현대인들은 지식과 물질과 과학과 쾌락이 인간에게 큰 의미를 주는 줄 알고 따르고 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방황, 내가 누군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고민, 허무함과 허탈감에 빠져 걷잡을 수 없는 파우스트는 자살하려고 집을 떠납니다. 그 때 교회 종소리가 울립니다. 땡~ 땡~ 땡~ 신령한 소리였습니다. 머리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에 울리는 하늘의 소리였습니다. 파우스트는 영혼을 깨우며, 나를 부르는 하나님의 소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찬송이 들렸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는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나? 하나님께 나가 예배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자에게 절망을 이겨낼 힘을 부어 주십니다.
현대인은 나름대로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에 방황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부터 노인 세대까지 모든 계층이 방황하는 시대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서 현대인의 제일 무서운 병은 ‘모르는 병’입니다. 잠이 안 오는데 왜 안 오는지 본인도 모르고, 전문가도 잘 모릅니다. 집이 싫은데 왜 싫은지 모르고 떠납니다. 그래서 노숙자가 많습니다. 아프기는 분명히 아픈데, 왜 아픈지, 어디에 병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녀도 병을 모르는 환자가 많습니다.
살기 싫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살기 싫고 의욕 없어 잠도 안 오고, 우울한데 왜 그런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자살을 택합니다. 공부가 싫고, 집이 싫어 말 안 듣고 가출합니다. 이유를 모릅니다. 남편이 싫고 아내가 싫어서 겉도는 부부들도 많습니다. 왜 그러는지 모릅니다. 나도 몰라 너도 몰라 전문가도 몰라, 몰라 병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방황하고 있습니다. 왜 일을 하는지, 왜 공부를 하는지, 왜 사는지를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에 있을 때에 인생의 방황을 멈추게 됩니다.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면 일도, 공부도, 살림도, 봉사도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예배에 성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새 힘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생의 목적을 찾고 기쁨으로 살게 도와주옵소서.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
창 4장 1~15절 / 이상호목사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예수께서는 죄가 행위로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으로만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고,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주님의 판단기준에서 본다면 죄인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기독교에서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나 행동으로 그 어떤 죄를 짓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핑계대고 시기질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를 수 없는 죄성에 사로잡혀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하는데 사람은 아름다운 사랑의 속성도 있지만 전혀 그 반대의 속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랑의 속성보다는 증오와 시기하는 마음이 지배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랑과 평화의 시대보다는 전쟁과 분란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인류의 시조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함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자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한 나머지 들판으로 유인하여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류의 비극적인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으로 기록된 이 사건에서부터 오늘 우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가 얼마나 계속하여 되풀이되어 왔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은총을 덧입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1.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1-5절)
가인과 아벨은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이었지만 그들의 성향은 매우 달랐습니다. 가인은 매우 거칠고 다혈질의 사람이었던 반면 아벨은 유순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격이 다른 그들은 직업 또한 서로 달랐습니다. 가인은 농부이었고 아벨은 목자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은 각각 자기의 수고로 거둔 것 중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농부였던 가인은 추수한 곡식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가인은 억제할 수 없는 분을 품게 되었고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동생을 살해하는 엄청난 사건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하나님을 섬겼고 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비록 제물의 내용은 달랐지만 외형적으로 가인과 아벨은 전혀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제물은 받으시고 다른 사람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부분을 놓고 학자들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성경 그대로 해석하자면 우선 가인은 단순히 땅의 소산으로 드렸고 아벨은 많은 양 중에서 맏물 양을 구별해서 드리되 기름진, 혹은 특별히 좋은 것으로 드렸다는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곧 아벨이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정성을 다해 준비했음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나와 있는데 아벨의 제물이 이와 같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준비된 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성이 없는 예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려도 정성이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미국에서 흑인교회에 보았더니 얼마나 감격적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성찬을 드는 시간은 모든 성도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흑인교회가 뜨겁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었지만 이렇게까지 감동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예배 후에 점심을 들면서 그 교회 목사님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제가 눈물을 흘리며 성찬을 받는 모습이 너무도 감동적이었다고 하자 그 목사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는 몸을 찢어주셨는데 주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들면서 어찌 눈물 없이 들 수 있겠느냐고 하시는 말씀에 저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특히 주님의 그 고귀한 몸이 찢기시고 흘리신 살과 피를 들면서 아무런 감동도 없이 무감각하게 성찬에 임하는 것은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예배는 가인의 제사와 같은 것입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정성을 다해 최고의 것을 드렸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예물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정성을 다해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정성어린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제물을 열납하시기 전에 그 제물을 드리는 자의 인격, 곧 내면의 동기와 태도를 먼저 감찰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4-5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만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그 사람까지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내면의 동기와 태도가 모두 주님께 열납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가인의 분노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습니다.(5-8절)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데 대해서 불쾌했습니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5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화를 냈다는 것보다 "몹시 낙심이 되어"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과 자신을 돌아보지 않자 그것을 자기에 대한 일종의 거절로 보았고 이로 인해 심한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몹시 낙담하여 얼굴을 떨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안색이 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얼굴을 떨군다"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없고 떳떳치 못할 때, 혹은 화가 치밀 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이상한 데에 가서 그 분풀이를 합니다. 남편이 가장으로서 가정의 생활을 책임지지 못하게 되면 누구나 자신감을 상실하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더욱 겸손해져야 마땅할텐데 오히려 그 좌절감을 아내에게 화를 내거나 폭력을 가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참으로 사람의 심리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인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분이 가득하여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얼굴을 떨어뜨림은 어찜이뇨?"(6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가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냉철히 따지고 보면 가인은 전혀 그렇게 느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으면 왜 안 받으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고치면 될텐데 그는 낙심하여 머리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어찌하여 낙심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분한 마음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생 아벨을 들판으로 유인하여 그를 그만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시기와 미움으로 낙심하더니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인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결국 아우 아벨을 살해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살인에 대하여 교훈하실 때 형제를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것이 곧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미움과 시기와 질투는 사단의 간교한 속성입니다. 가인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남을 증오하는 마음을 품게 되면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도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가 잘될 때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자기도 분발하여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미움과 시기는 가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므로 결코 그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들은 남이 어려울 때는 측은한 마음으로 감싸주다가도 내가 잘못되고 남이 잘되면 그만 낙심하여 머리를 떨구고 악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인의 전철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가인의 심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남이 잘될 때 축하해주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선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덫에 걸리지 않는 길입니다.
3. 가인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9-12절)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은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과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이에 아담은 "내가 옷을 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창 3:10)고 했는데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변명하고 죄를 감추려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순간에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였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을 돌이키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실상 우리가 하나님께 변명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인생들은 그렇게 우둔합니까?
가인이 계속하여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하자 하나님은 가인을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준엄한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0-11절). 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준엄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을 때는 힘들게 수고할 경우 땅의 소출을 낼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경우는 그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땅에서 얻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저주의 결과로 인간에게는 언제나 생활고의 무거운 짐이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그 마지막 회개의 기회마저도 거부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전하며 유랑인으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하나님을 뵙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박탈된 채 땅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사는 자는 땅이 저주를 받아 소출이 없고 세상에 어디 한 군데 의지할 곳도 없이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의 현대인은 그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불안해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다.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서로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칼 막스는 세상의 악을 경제체제나 계급문제로 이해하고 이것을 사회 구조적인 변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서 한때 공산혁명이 세계를 뒤엎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산혁명 이론으로도 사회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이론을 따라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 나라의 경제는 더욱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새로운 계급에 의한 수난 당하는 백성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막스의 이론에 반대하면서 버스의 좌석을 편리하게 하고 내부구조를 개조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버스가 깊은 골짜기에 빠져들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류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죄의 병입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사회제도를 바꾸고 경제가 발전하고 정치가 민주화되어도 인류사회는 골짜기에 빠져 있는 버스와 같은 모습일 뿐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가인에게 결코 자유와 평안은 없었습니다. 가인은 오히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13절)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회개할 줄을 모르고 불평만 털어놓았습니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하지 않아 저주의 길, 유리방황의 길,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죄짐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아무리 무거운 죄의 짐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 회개하여 사죄의 큰 은총을 받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성공적인 예배는 인생의 열쇠입니다.
우리는 아벨의 예배를 통해서 배웁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마음이 있는 예배인데, 이것은 희생이 있는 예배입니다. 내 시간, 내 오락, 내 안락, 내 잠을 희생해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기쁨, 더 많은 안식, 더 많은 쉼을 허락해 주십니다.
(예화) 이민교회 목사가 교인이 주일에 골프장 가기에 주일성수할 것를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집사가 또 골프장으로 가서 심방가서 심각하게 권면했더니 집사님 말하기를 “목사님 교회 오면 몸은 교회 있지만 마음은 골프장에 있고, 골프장 가면 몸은 골프장에 있지만 마음은 교회에 있습니다. 목사님이 분명히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고 하셨죠? 그럼 제가 교회에 몸이 와야 하나요? 마음이 와야 하나요? 저는 목사님 말씀대로 마음으로 교회에 왔습니다”하더랍니다. 말이나 못하면 좋겠습니다.
현대인들은 지식과 물질과 과학과 쾌락이 인간에게 큰 의미를 주는 줄 알고 따르고 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방황, 내가 누군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고민, 허무함과 허탈감에 빠져 걷잡을 수 없는 파우스트는 자살하려고 집을 떠납니다. 그 때 교회 종소리가 울립니다. 땡~ 땡~ 땡~ 신령한 소리였습니다. 머리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에 울리는 하늘의 소리였습니다. 파우스트는 영혼을 깨우며, 나를 부르는 하나님의 소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찬송이 들렸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는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나? 하나님께 나가 예배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자에게 절망을 이겨낼 힘을 부어 주십니다.
현대인은 나름대로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에 방황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부터 노인 세대까지 모든 계층이 방황하는 시대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서 현대인의 제일 무서운 병은 ‘모르는 병’입니다. 잠이 안 오는데 왜 안 오는지 본인도 모르고, 전문가도 잘 모릅니다. 집이 싫은데 왜 싫은지 모르고 떠납니다. 그래서 노숙자가 많습니다. 아프기는 분명히 아픈데, 왜 아픈지, 어디에 병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녀도 병을 모르는 환자가 많습니다.
살기 싫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살기 싫고 의욕 없어 잠도 안 오고, 우울한데 왜 그런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자살을 택합니다. 공부가 싫고, 집이 싫어 말 안 듣고 가출합니다. 이유를 모릅니다. 남편이 싫고 아내가 싫어서 겉도는 부부들도 많습니다. 왜 그러는지 모릅니다. 나도 몰라 너도 몰라 전문가도 몰라, 몰라 병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방황하고 있습니다. 왜 일을 하는지, 왜 공부를 하는지, 왜 사는지를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에 있을 때에 인생의 방황을 멈추게 됩니다.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면 일도, 공부도, 살림도, 봉사도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예배에 성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새 힘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생의 목적을 찾고 기쁨으로 살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의 젓가락을 의식하라
창 4장 1~5절 / 조상호목사
수년 전, 뉴질랜드 코스타집회(해외유학생수련회) 강사로 오셔서 젊은이들에게 귀한 도전을 주신 적 있는 <높은 뜻 숭의교회>의 김동호목사님께서 과거 영락교회에서 부목사님으로 사역하였을 때, 어느 성도 가정에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방을 받기로 했던 그 가정의 여자 집사님이 점심을 대접하기에 위해 김동호목사님 사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김목사님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가를 물어왔습니다. 그러나 사모님께서 그 질문에 대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무슨 음식을 좋아한다는 말이 퍼지게 되면, 교인들이 그 음식만을 준비하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알아서 음식을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성을 담아 준비한 그 음식이 입에 아주 잘 맞아, 김목사님께서는 그 식사를 아주 맛있게 잘하였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날부터 벌어졌습니다. 심방 할 때마다 전에 심방하던 집에서 아주 맛있게 잘 먹었던 그 음식이, 계속 나오더랍니다. 어느 날 하도 이상해서 김목사님이 그 음식을 준비한 분에게 “이상하다. 이 음식이 나를 계속 따라 다니네.“ 라고 이야기를 하자, 그 집사님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저도 사모님에게 전화를 하여 물어 보았었는데 안 가르쳐 줍디다. 그래서 뭐, 전에 점심을 준비한 집에 전화를 했었지요. 그리고 ‘목사님 젓가락이 어딜 많이 가더냐?’고 물어보았지요....” 김동호목사님은 정성어린 그 집사님의 섬김의 모습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집사님의 모습을 보고 한 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젓가락이 어딜 많이 가시는가를 살펴보고, 그것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목회를 하면 틀림없이 성공하겠다는 확신을 했답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하나님의 젓가락을 의식하는 교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라는 말을 사역과 목회의 표어로 정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항상 ‘하나님의 젓가락’을 생각하고, 항상 ‘하나님의 젓가락’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성공 비결을 각각 다르게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배워야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배워야 세상에서 남보다 앞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소를 팔고 논을 팔고 나중에는 집까지 팔아서라도 자식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쉬지 않고 열심히 뛰어 다니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이 과거 대우그룹 회장이었던 김우중씨입니다. 그는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외국 출장을 위해 비행기를 탈 때 밤 시간을 이용했습니다. 또 대부분의 대기업 회장들이 골프를 치는데, 반해 그분은 골프를 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가 성공 비결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의를 얻기 위해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함께 운동을 하기도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세상에서 현재 통용되고 있는 방법이고, 또 실제로 이렇게 해서 나름대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 가지고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나, 세상적인 노력이나, 인간관계가 우리에게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세상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승리하는 비결이요,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기뻐하신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배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누구를 찾으신다고 합니까? 자기에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예배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천지 창조에 관한 기사는 장수로 말하면 1장, 절수로 말하면 총 31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위한 성막에 대한 말씀은 무려 7장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는 전체가 다 예배에 관한 기록입니다. 또 민수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다가 한 곳에 머무를 때에는 동쪽에 세 지파, 서쪽에 세 지파, 남쪽에 세 지파, 북쪽에 세 지파를 세우게 하고 가운데에 언약궤를 놓아두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쳐다보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구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히브리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을 것인지 ‘예배’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식탁을 차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식탁에 있는 다른 어떤 메뉴보다도 ‘예배’라는 메뉴에 젓가락을 많이 가져가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예배하는 자를 기뻐하시며, 예배하는 자를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예배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으로 구분되는 기준은 다름 아닌 ‘예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 하반절과 5절 상반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으로 구분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으로 구분되게 했습니까? 학력이었습니까? 아니면 돈이었습니까? 아니면 인간관계를 가지고 구분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예배가 그 구분의 기준이었습니다. 예배를 잘 드린 아벨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반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한 가인은 버림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잘 드린 아벨은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닮아가고 싶어하는 모델이 된 반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한 가인은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세상의 그 어떠한 것보다 바로 예배에서 구분되어집니다.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씨의 이야기를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돈만 많은 시시한 요즈음의 부자들과 달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던 진짜 부자였습니다. 그는 십일조 헌금을 관리하는 직원만 40명의 직원을 둘 만큼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록펠러재단, 일반교육재단, 록펠러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하여 시카고 대학을 비롯한 12개의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 대학과 연구소를 지어 기증했습니다. 또 4,928개나 되는 교회를 건축하여 하나님께 바칠 만큼 돈을 쓸 줄 아는 부자였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당시 기자가 어떻게 이러한 축복을 누릴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어머님이 물려주신 신앙교육의 결과입니다.”라고 대답하며 그의 어머니가 남긴 열 가지의 유언을 소개하더랍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잘 섬겨라
3. 오른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준비해 두어라.
- 돈을 벌면 그때그때 떼어 두라는 것입니다.
4. 원수를 만들지 말라
5. 예배드릴 때는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 앞자리는 특별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6. 항상 아침에는 그 날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7.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를 드려라.
-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8. 남을 도울 수 있다면 힘껏 도우라.
9. 주일날에는 꼭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라.
10. 아침에는 제일 먼저 말씀을 읽어라.
그의 어머니가 록펠러에게 가르친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십일조 생활 하는 것이나 항상 앞자리에 앉아 예배드리는 것이나, 본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 등은 사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사소한 것들을 귀하게 지켰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예배에서 우리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의해 우리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우리 개인이나, 우리 가정이나, 우리 교회의 미래는 다름 아닌 예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의 미래는 밝습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집안은 가능성이 있는 집안입니다.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는 소망이 있는 교회입니다. 반면에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가 불투명한 사람입니다. 예배가 사라진 가정은 쇠하는 가정입니다. 예배가 죽은 교회는 서서히 죽어가는 교회요, 예배가 없는 나라는 미래가 없는 나라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결혼시킬 때 그 무엇보다도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가정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 결혼을 앞둔 청년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예배 잘 드리는 배우자인지 아닌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돈이나, 학력이나, 외모, 등의 세상적인 모든 것은 다 양보한다 할지라도, 믿음과 예배드리는 것만큼은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모든 것은 다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예배만큼은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그 어떠한 것보다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1) 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
첫째로, 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본문에 보면 아벨과 가인은 똑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배는 열납하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열납하지 않고 거부하셨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한쪽은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받으셨고, 한쪽은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않았을까요? 물론 어떤 목사님들이나 설교자들은 아벨이 양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셨고, 가인은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고 해석을 합니다만, 그 해석은 사실 무리가 따르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희생제사는 홍수가 끝나 다음, 노아가 하나님 앞에 짐승과 새를 잡아서 희생 제물을 드린 창세기 8장 20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 9절에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취하여 희생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벨과 가인이 살던 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희생 제사를 꼭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꼭 가인이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레위기 2장 1절 이하를 보면, 여러 제사 방법 중에 곡식을 가지고 제사 드리는 <소제, Grain Offering>가 나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방법도 명하셨고, 또 그 제사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제물의 종류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을까요?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그 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이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고,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물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벨과 가인은 똑같이 예배를 드렸지만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린 반면, 가인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비록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믿음이 빠진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모 교회의 장로님이 꿈속에서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높은 시온산 꼭대기에 새 예루살렘 성을 잘 지었는데 금강석과 홍보석과 녹보석과 가지각색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성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새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왔구나." 한 걸움 두 걸음 점점 올라가 보니 큰 문이 있는데 계시록에 기록한 대로, 큰 진주 하나로 된 문이었습니다. "야. 내가 새 예루살렘성에 왔구나!"생각하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문이 곧 열리더니 베드로가 내다봅니다. "저는 아무 교회에서 온 누구누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 성에 들어오려면 믿음표가 있어야 하는데. 믿음표 가지가 왔소?" 이 분이 "네. 가져 왔습니다."하며 안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믿음표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옆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거기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이곳저곳을 아무리 뒤져도 믿음표는 없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베드로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졌습니다. 나에게 믿음표가 없지만 모 교회에 십년 이상을 다녔는데 좀 들어갈 수 없습니까?”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안 되네. 아무리 오래 다니면 뭐하나? 믿음표가 있어야지.“ “그런 게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그 교회에서 장로로 십여 년이나 봉사했습니다. 그러니 좀 들어갈 수 없습니까?.”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이 "아니. 믿음 없이 장로를 십 여 년이나 했으면 말썽꾸러기였겠구먼. 안 되겠네."하며 문을 ‘꽝‘ 닫고 들어갔습니다. 이 장로님은 사도 베드로가 문을 닫는 소리에 깨 보니 꿈이더랍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 되네. 아무리 오래 다니면 뭐하나? 믿음표가 있어야지.“라는 말처럼,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다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집사, 권사, 장로, 목사의 직분을 받고 열심히 봉사해다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오래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예배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믿음이 빠진 예배라면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유명한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지라도, 믿음으로 예배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만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같이 믿음이 빠진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아벨과 같이 믿음으로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배는 희생으로 드려야 한다
둘째로 예배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 때 예배를 제사라고 했는데, 이 제사를 영어로 Sacrifice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희생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소를 끌고 오고, 양을 몰고 오고, 비둘기를 잡아와서, 그것을 죽여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는 희생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희생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혹시 편한 것만을 추구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많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중에 예배의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생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말라기 1장 7절과 8절을 보면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떡도 가지고 왔고, 제사 드릴 짐승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더러운 떡과 병든 소를 가져 온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시장에 내다 팔아도 제 값을 받지 못할, 다리를 저는 동물, 눈먼 동물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희생이 안 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와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희생 없이 예배드리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희생을 추구하기 보다는 편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의 이동원 목사님이 쓰신 책에 주일 예배당에 오기까지의 세 가지 상황을 적은 글을 제가 옮겨왔습니다. “첫째 상황입니다. 교회에 오기 위해 집을 나서는 상황을 다시 한번 더듬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시간까지 4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아직도 준비가 끝나지 않은 듯합니다. 재촉해보지만 마이동풍입니다. ‘도대체 무엇들 하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쳐서 가까스로 20분을 남겨두고 출발하려 나섰지만 주머니를 뒤져보니 자동차 열쇠가 없습니다. 다시 이 옷 저 옷,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뒤져서 열쇠를 찾아낸 다음 차를 출발시키려 하자, 갑자기 아내가 ‘여보, 나 핸드폰을 집에 놔두고 왔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때 아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냥 가자고! 핸드폰 없으면 죽나?’ 둘째 상황입니다. 주일인데도 도로에는 유난히 차가 많습니다. 계속 차선을 바꿔가면서 아슬아슬 곡예운전을 했지만, 두 차선 모두 꽉 막히자 급기야 앞선 차의 운전자를 향해 막말을 합니다. ‘저 자식, 앞에 차도 없는데 도대체 왜 안가는 거야?’ 셋째 상황입니다. 예배 시간은 이미 5분을 지났습니다. 부랴부랴 교회에 도착했지만, 주차장 역시 만원입니다. 가까스로 주차공간을 찾아 주차하려는데 장애우가 들어오는 바람에 이번에도 주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속으로 이런 말이 새어 나옵니다. ‘교회가 여기밖에 없나? 다른 교회를 좀 찾아보아야지.’”
오늘날 우리 주위에 희생 없이 예배드리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희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날씨가 나쁘면 교회 오고, 날씨가 좋으면 그린처치(?)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말고사라고 해서 교회 대신 도서관교회로 가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문제가 생겨서 한두 번 늦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항상 늦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물질을 헌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헌금 시간에 밥 먹고 밥값 계산하듯이 헌금을 한 손으로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식사를 할 때나 가족끼리 외식 할 때는 수십 불, 수백불도 척척 내면서 헌금을 할 때는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배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혼 배우자 찾으러 교회에 오기도 합니다. 외국생활하면서 외로워 한국사람 만나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업 때문에 교회에 오는 사람도 있고, 지방의원이나 국회의원 선거 운동하러 교회에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으로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이 빠진 예배, 희생이 들어가지 않은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말라기 1장 9절과 10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것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이 빠진 예배를 결코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삶을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예배는 삶으로 드려야 한다
셋째로 예배는 삶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나를 헌신하는 것이 예배의 핵심이며, 예배의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시는 길에 수가라하는 한 성의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한 여인을 만나서 여러 가지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라고 하면서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생각은 예배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어느 일정한 장소를 정해서 그 곳에서만 예배들 드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 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장소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구약시대에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지만,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장소에 국한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에는 이제 예배의 형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곳에 예수님은 항상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안 계신 곳이 없이 어디에든 계십니다. 어디에서든지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다 받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드릴 때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크리스천 할머니 코리텐 붐(Corrie Ten Boom)의 전기에 보면 이러한 간증이 있습니다. 그녀가 히틀러의 나치 수용소에 붙들려갔을 때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여기서도 하나님만 예배할 수 있다면 저 불평하지 않을거예요.” 그런데 감방 안에 이가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가 많으면 예배하기가 힘든데 이가 많아 몸이 가려워서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간수들이 그녀가 갇힌 감방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가 많은 감방이라고 소문이 나니까 간수들이 그곳을 방치해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방은 간수들의 간섭도 받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습니다. 코리는 그곳에서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를 하고, 작은 소리지만, 함께 찬송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절망적인 감옥이 서서히 천국과 같은 장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곳에 천국이 임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자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든, 주님께 찬양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발걸음이 미치는 곳에서 주님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가 이 예배를 잃어버렸습니다. 예배를 잃어버린 교회는 아무리 많은 재정이 있어도 거기에서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숫자가 모여도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를 바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앙이 시들어가는 줄 아십니까? 왜 교회를 다니면서도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갑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예배의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배에 생명을 건 개인, 예배에 생명을 건 가정, 예배에 생명을 건 교회, 예배에 생명을 건 민족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01명의 청교도들이 1620년 9월2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를 떠나, 100일이 훨씬 넘는 기나긴 고난의 항해 끝에, 그해 겨울 12월20일 미국동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청교도들이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뭔지 아십니까?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들은 예배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고, 예배를 위해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영국에서는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청교도들은 예배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결국 예배의 정신으로 세워진 미국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세계 최강대국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메이플라워호’와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라는 이름의 배는 남미로 갔습니다. 물론 그 배에도 영국의 청교도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북미로 간 청교도들과 달리, 금을 찾아 갔습니다. God을 찾아서 북미로 간 청교도들과 달리, 그들은 Gold를 찾아 남미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Gold는 커녕, God도 잃어버렸습니다. 물질도 벌지 못하고 신앙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은 페루나, 칠레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같은 남미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당하는 가난한 나라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믿음을 위해 북미로 간 청교도들처럼, 생명을 걸고 예배에 임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해 목숨걸고 북미로 간 청교도들처럼, 예배에 목숨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벨과 같이 믿음을 드리고, 희생을 드리고, 삶을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든, 여러분의 발걸음이 미치는 곳에서 주님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하여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의 성공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뻔뻔한 얼굴
창 4장 2~6절 / 김우영목사
인간에게는 누구나 얼굴이 있고 안색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이의 안색을 보고 ‘순진하고 착하게 보인다' ‘못되게 보인다' ‘철면피 같다' ‘뻔뻔스러워 보인다' 등등... 여러말로 표현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과 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헌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열납 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치 않으셨습니다. 이에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3∼5절).
야곱의 외삼촌이자 장인이기도 한 라반은 야곱이 거부가 됨에 그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창31:2) 스데반은 순교 직전 공회 앞에서의 안색이 천사와 같았습니다(행6:15).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사3:9)" 안색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얼굴이 누렇게 된 사람을 보면 “건강이 좋지 않은가 보다", 얼굴이 까맣게 된 사람을 보면 “간에 이상이 있는가?" 벌겋게 달아 오른 사람은 “혹시 고혈압이 아닐까?", 입술이 파래면 “심장에 이상이 있나 보다" 등 안색으로 건강을 측정하기도 합니다. 해서 어떤 한의사는 여자들을 진찰 할 때 화장을 하지 말고 오라고 한답니다. 얼굴은 현재의 건강 상태도 표현하지만 때로는 과거의 삶도 드러내 주고, 지금의 직업을 알려주기도 하며, 순간의 마음도 보여줍니다.
얼굴은 마음의 화판이요, 계기판이며, 감정의 게시판입니다. 혹자는 얼굴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고, 혹자는 ‘마음의 인덱스(Index)'라고 합니다. 사람의 얼굴은 육체의 한 부분이지만 한 인간 전체를 대표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음이 투영되어야 합니다.
첫째: 자기 탓인데...
가인과 아벨은 동일한 장소, 같은 시간,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허나 아벨의 제물은 열납되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는 이의 원인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로 농산물, 곧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로 양의 첫 새끼를 잡아 피흘리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도 하나 이는 무리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시고 안 받으심은 제물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의 증거는 히브리서 11장 4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이에서 분명히 알수 있는 것은 가인은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믿음이 있는 제사를 드렸음입니다.
‘더 나은 제사'란 비교의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보시매 아벨의 제사가 인간으로서 결함이 없는 ‘완전한 제사'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선 우리가 무슨 제물을 바쳤느냐에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자의 마음가짐을 주목하십니다.
‘열납하다' 라는 히브리어 ‘솨아'는 ‘응시하다' ‘주목하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주의 깊게 보시니 아벨의 제물이 가치있는 것임에 받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 같은 성전, 시간, 똑 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허나 모두의 예배가 다 열납되는 것은 아닙니니다. 어떤 이의 예배는 퇴물이 될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드리고 믿음으로 찬송하며 기도하고, 헌금해야만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예배는 자기자신을 먼저 드린후 제물을 드림입니다. '나' 는 떼어놓고 '나의 것' 만 드림은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음은 아벨의 탓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바로 자기의 탓이요 잘못입니다.
본문 말씀은 옛날 옛날 지나간 역사속의 ‘가인'이라는 한 인물에게 일어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현대판 가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배는 남이 드리니까 나도 덩달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남이 장에 가니 저도 씨나락오쟁이 떼어 가지고 간다" 우리의 속담이랍니다.
둘째: 분을 내다니...
가인은 동생 아벨의 제물만 열납 되었을 때 왜 자기 제사가 열납지 되지 아니 했는가를 살펴 보고, 문제점을 찾아내 돌이켜 회개하고 제사가 열납되도록 재시도를 했어야만 했습니다. 헌데 가인은 자신을 성찰해 보기는커녕 오히려 분을 내었습니다. 까닭은 아벨을 시기함이며, 하나님께 불만, 불평, 원망이 있었음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분노의 감정을 품을 수 있고 화도 냅니다. 그러나 인간의 분노 대상이 결코 하나님일 수는 없습니다. 가인은 제 탓으로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건만 뻔뻔스럽게도, 감히, 하나님 앞에서 심히 분해하며 안색이 변했습니다. 오늘의 우리 가운데도 “내가 그렇게 많이 기도하고 봉사했건만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안들어 주실 수있단 말야" 라고 불평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만, 아니됩니다. 불만을 터뜨리기 전에 기도한 내 마음의 상태를 점검해야만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신앙인은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느냐' 라고 하는 자가 아니라 ‘왜 그러셨을까' 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종교는 악마의 종교다." 웨슬리 (J. Wesley)목사의 말입니다.
“어디 아파?" “무슨일 있어?" 이는 무엇을 보고 하는 말입니까? 안색을 보고 하는 말이잖습니까? 얼굴은 자기의 ‘인격', ‘삶', ‘나' 라는 존재의 거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속에 있는 뻔뻔한 가인을 없애야만 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사랑하는 성도들이시여! 금은 패물 달고, 비싼 옷입고 다닌다고 더 값이 나가는 ‘내' 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 영의 사람을 단장, 늘 예수님의 마음을 품음으로 항상, 어느때나 불변의 안색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가치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질투하여 분을 냄은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고, 이웃을 잃게 하며, 자기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불행은 억제하지 못한 분노의 산물입니다.
게를 담은 바구니는 뚜껑을 닫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어떤 게가 밖으로 나가려고 위로 올라가면 다른게가 끌어 내리고, 또 끌어내려 어느 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나보다 나은 자를 보면 질투가 파도침은 행복의 파괴입니다. 분노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서운 무기 중 하나입니다. 분노는 인격을 파괴하고, 정도를 파괴 하며, 인생을 파괴합니다. 가인은 잘못된, 철면피한 분노로 인하여 복이 깨지고 저주를 받아 유리하며 사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1997년 3월 8일 리버사이드대학 심리학 교수팀의 연구 발표입니다. 1921년부터 1500명의 어린이들을 실험한 결과 양심적이고 화를 내지 아니하며, 참을 줄 아는 아이들이 남을 이용하고 속이며, 죄를 짓거나 시기, 질투하는 아이들 보다 30%가 더 오래 살음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남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시기하여 분을 내지 마십시오, 얼굴만 일그러 지는 것이 아니라 신상이 해롭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책망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6절)" ‘어찜이며... 어찜이뇨(람마...람마)', ‘람마' 라는 히브리어는 ‘왜?' ‘무엇 때문에' 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단어를 두 번거듭, 반복하여 사용하심은 가인이 분해 하거나 안색이 변할 까닭이 전혀 없음을 상기 시키심과 동시에 가인의 태도에 대한 책망이시자 회개를 촉구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사적 감정이나 증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평한 사랑에서의 발로이시며, 삶을 개선토록 선도하심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끝내 하나님의 자비의 책망을 듣지 아니고 빈들에서 아벨을 쳐 죽입니다. 해서 그가 저주받은 인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나 심판은 경고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죄인이 파멸함은 회개할 기회가 없거나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강퍅하여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책은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언행이 삐뚤어져 나갈 때 와지는 것입니다.
참새 열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습니다. 포수가 총을 겨누었습니다. 한 참새가 포수를 발견, “엎드려! 포수가 왔다" 라고 했습니다. 헌데 9마리는 살고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왜 일까요? 9마리는 동료의 경고를 듣고 재빨리 엎드렸으나 죽은 참새는 경고를 아니듣고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형식, 시기, 분노, 원망, 불평은 책망의 대상이요, 경고를 듣지 아니함을 멸망의 대상입니다. 사랑은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것이나(롬20:12), 시기와 미움의 마음은 자기 머리에 숯불을 쌓는 것입니다.
사람의 안색은 수시로 변합니다. 허나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겸허의 안색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앞에서나 항상 불변해야 합니다.
미움의 얼굴=미움의 마음이요, 시기질투 얼굴=시기질투의 마음입니다.
희랍의 어느 도시에 육상선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답니다. 동상의 육상 선수는 국내 경기뿐 아니라 국제 경기에서도 늘 국위를 선양했답니다. 하여, 나라에서 동상을 세워 준 것입니다. 그런 그와 맞먹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왜인지 경기에서는 매번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절망에 빠져 길을 가던 그의 눈에 경쟁 선수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지요 그에게 “저놈 때문에 내가 승리할 수가 없어 저 놈만 없애면 돼"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 동상이 무너지는 날 네 놈은 끝장이고, 나는 육상의 영웅이 될꺼다."라고 하며 매일 매일 조금씩 동상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동상이 쓰러졌는데... 동상이 무너지며 그를 덮어 그는 동상에 깔려 그 자리에서 생을 끝냈답니다.
1900년 청나라 말, 소위 북청사변으로 불리는 폭동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반기독교운동의 구호를 내 걸고 폭동을 일으킨 배외(排外)운동입니다. 당시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대 박해에도 불구하고 몸을 숨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까닭은 그들의 얼굴빛이 그리스도인임을 너무나 잘 드러냈기 때문이랍니다.
제 잘못임에도 자기가 잘한 것인냥 분노하는 뻔뻔한 얼굴, 양심의 가책이 없는 철면피의 얼굴은 그리스도인의 얼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얼굴로 살아야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