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면서 ‘혁명한 사람 아내’로서 현실감각 갖춰
육영수 여사는 정치인 배우자의 새 모델을 만들어간 인물이었다. 현모양처형이면서도 현실정치나 사회현상을 평가하며 그 현장에 뛰어든 패기 있는 여성이었다.
1925년 학식 있고 재력 있는 아버지 육종관씨와 어머니 이경령씨의 1남 3녀 중 차녀로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서울 배화여고에 유학한 후 20살부터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 가사교사로 1년3개월 재직했다.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12월 박정희 중령과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의 5·16 ‘군사혁명’에는 육영수 여사도 동의한 정황들이 있다. 그는 ‘혁명한 사람의 아내’로서 몫을 다하고자 했다.
이후 전 비서관 김두영씨가 목도했듯이 정치외교사, 국사, 영어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강의를 저명한 대학교수들로부터 매주 들음으로써 정치와 사회문제에 새로운 안목을 넓혀나갔다. 당시 청와대 출입 아나운서였던 강영숙 예지원장은 육 여사가 “여기자, 여성 방송인들과의 많은 교류를 통해 말하는 법, 표정 관리, 화장과 옷차림새 등에 관해 우회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문을 종종 구했다”고 회상한다.
의장 공관 시절 육 여사의 커다란 임무는 민원 처리였다. 제자이면서 6년 동안 영부인실 비서관이었던 정재훈씨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거리의 여론을 수집하고, 하루 수십통의 민원은 일일이 처리 지침을 남겼으며, 특히 억울한 민원 현장에는 비서들이 늘 발로 달려가게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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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언론인들의 모임인 ‘여류방송인클럽’을 청와대에 초청해 담소를 나누는 육영수 여사. |
연 3000명 접견…청와대 안주인의 덕과 우아함 갖춰
그는 일찍이 교사의 덕목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연 3000여명을 접견하는 중 보여준 그녀의 재치 있는 대화와 알맞은 제스처, 우아한 몸가짐은 청와대 안주인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정씨는 “이 분은 혜안이 있으셨고 모든 것을 통찰하는 듯한 남다른 점을 볼 수가 있었다”고 말한다. 육 여사는 “의례적이거나 형식적이질 못했다.” 김두영씨는 “일에는 거의 완벽주의자로, 선명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풀고 넘어가는 성격”이라고 전한다.
한번은 아버지를 미화한 기사를 보고 “옥천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염려하며 “필자에게 바로 잡아드려라”고 비서관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여사는 늘 웃는 얼굴로 누구에게든 10년 지기를 만난 듯 반갑고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것은 꾸미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품성”인 것 같다. 부속실 직원이 영부인에게 칭찬의 말이라도 하면 “속에 없는 말 하지도 마”라고 대꾸하여 웃기고, 심기 불편한 직원이 보이면 탁구를 치자고도 권하여 마음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지독한 야당’
남편의 군정 연장 의지 꺾어
대통령의 결정을 바꾼 육영수 여사의 위상에 대한 예 한가지를 들어본다. 박 의장이 1963년에 군정 5년 연장을 미 대사에게 전격 선언하여 정국은 혼미해지고 군정 연장 반대 데모가 일어나며 미 국무성도 군정 연장 반대 성명을 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육 여사는 이동원 대사를 불러 군정 연장 취소를 박의장에게 설득하도록 도움을 청했고, 결국 박 의장의 마음을 움직여 군정이 종결되었다. 육 여사는 한계점을 알았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아내를 “지독한 야당”이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육영수의 죽음은 박정희 말기 내리막길 통치에 제어장치가 풀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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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9월 30일 대전 공설운동장에서 연설을 마친 박 대통령에게 육 여사가 한 농부의 진정서를 전해주고 있다. 육 여사는 이처럼 자신이 챙길 수 있다면 사소한 민원이라도 챙기고자 최선을 다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
장·차관 부인들로 양지회 결성해 본격 봉사활동
주부 대상 각종 체육대회 개최도
육 여사는 1964년 장·차관 등 사회지도층 부인들이 참여하는 봉사단체 양지회를 만들고 10여년간 활발하게 움직였다. 적십자 수요 봉사활동, 헌혈운동, 정신박약 어린이 돕기에 열정을 보였고, 수재 모금을 위한 ‘사랑의 열매’ 달기 가두행사에서 열매를 육 여사가 직접 달아주면 시민들이 즐거워했다. 월요 경로회에서 노인들의 시중을 드는 젊은 육 여사의 서민적인 풍모는 친근감을 주었다. 그의 옷차림은 조끼, 어깨띠, 걷어올린 소매, 앞치마, 반소매 원피스 등으로 보기에 경쾌했다. 또 농어촌 문화개발사업, 양지회 장학사업 등을 조용히 추진했다. 여성의 바깥활동으로 어머니들이 참여하는 영부인 컵 쟁탈 정구대회, 탁구대회, 어머니 배구대회 등 각종 경기도 장려하였다.
한편으론 경제성장이 정치적 과제였던 시대에 영부인의 활동영역도 이 큰 과제에 병행했다. 파월장병 위문활동, 새마을운동 후원 등 경제 재건과 관련된 성격의 사업이 따랐는데, 이와 같은 활동의 배경에는 “자선보다는 생활기반 마련”이란 생각이 깔려 있었다. 경제적 지원보다 국수 만드는 기계라든지 노끈을 만드는 기계를 마련해주어 스스로 땀 흘려 정당하게 벌 수 있도록 자세 전환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30여 년 역사 육영재단, 어린이대공원 등 지속사업
육 여사의 대외활동은 항구성을 가진 지속적인 사업에 중점을 두어 갔다.
1968년 서울대학교에 기숙사 정영사를 설치했고, 어린이를 위한 복지재단인 육영재단을 69년 4월에 설립하고 어린이날에 맞춰 어린이대공원, 어린이회관의 건립을 주도했으며, 부산 어린이회관은 72년 기공되었다. 소년소녀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여 농어촌 어린이에게까지 배포하고, 73년에는 불우청소년의 직업보도를 위한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였다. 강영숙 예지원장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아나운서로 비교적 잦은 교류를 가졌던 그녀에게 성인교육과 한국전통 문화교육을 담당할 교육기관인 예지원 설립을 1년여 준비하게끔 귀띔했다는 것. 그러나 개원 한달을 앞두고 육 여사는 유명을 달리했다.
나환자촌·수해현장 등 전국의 현장 직접 뛰며 챙겨
전국 한센환자(나환자)촌을 골고루 방문하여 자활사업을 지원했고, 64년 9월부터 월남에 파병된 장병 가족을 찾아 위로·위문하는 한편, 풍수해 현장에 비를 맞으며 달려가 재난당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사당동 난민촌, 교도소, 전방초소, 탄광촌 방문 등 영부인은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고려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초청을 받아 ‘인자한 어머니’, ‘생각하는 주부’, ‘공부하는 생활인’ 등의 주제로 좌담회를 갖는 일에도 바빴다. 김두영씨에 따르면 “대학 캠퍼스를 방문하는 이런 활동은 영부인으로선 파격적인 것으로, 그 전에도 후에도 없던 일”이었다.
“누가 나를 해치겠느냐. 내가 대통령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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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8월 19일 육영수 여사의 영구차를 떠나보내며 애통해하는 박정희 대통령. |
8·15 기념식장에서의 죽음은 아이러니
육 여사는 비서관과 같이 젊은이들이 모이는 충무로 드럼통 술집, 명동의 맥주집, 무교동의 막걸리집으로 야행을 나가기도 했다.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이후 청년들이 해이해져 걱정이라는 보고를 들은 후 현장 확인차였다. 동행했던 김두영 비서관의 말에 따르면 여사의 소감은 “젊음의 문화현장에 가보기를 잘했다”였다.
비서관들이 경호원 없이 다니는 점에 우려를 표하면 “누가 나를 해치겠느냐. 내가 대통령도 아니고…” 하며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여사가 “가장 경호가 엄한 국립극장 8·15 기념식장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 더 없이 애석하다”고 김두영씨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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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부부와 근혜, 근영, 지만 세 자녀의 단란한 한때. |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육영수
‘여보’란 말보다 ‘저 좀 보세요’로 박통 불러
육 여사는 식사나 차를 준비할 때 그의 소식통인 휴대라디오를 목에 걸고 비판적인 동아방송을 늘 즐겨 들으며 필요한 정보를 남편에게 전달한다. 김두영씨는 “나도 동석한 식탁에서 대통령은 막걸리 반주를 하며 부인이 영양제로 할당한 멸치 10개를 세어가며 드는 순종파였다”고 회상한다. 평생 남편을 “여보”라 하지 않고 “저 좀 보세요”란 애매한 표현으로 부르곤 했고, 공식행사에서도 두발짝 뒤떨어져 걷는 것이나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을 예의로 생각했다. 근혜·근영 딸들에겐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도록 겸손을 가르쳤고, 아들인 막내 지만에게는 여느 엄마와 같이 학부형 자격으로 학급 미술전, 아동극을 참관했다.
죽음 예감한 듯 마지막 민원까지 잘 처리
슬픈 미담으로 남아
정재훈씨는 회상한다. 청와대에 초대된 어린이를 따라온 어머니가 입이 많이 돌아간 안면마비 증세임을 보고 육여사는 제일 좋은 침술원을 찾도록 하여 그를 입원시켰고, 3개월 치료 후 귀향할 때 집에서 고생한 시어머니께 드리라고 육여사가 옷감 한벌을 손수 챙겨 8월14일에 보낸 것이 영부인 서랍에 남아있던 마지막 민원이었다고. 또 육 여사가 서거한 1974년 8·15 당일 대학생 조국순례 대행진을 마치고 땀에 흠뻑 젖은 채 대전 집결지를 향해 도보행군을 하는 학생들에게 H제과 냉동차에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배급되었다. 육 여사가 죽기 전 미리 주문해놓은 선물이었던 것. 이 모든 것이 당시 비서관들에겐 신기하기만 했다.
육영수에 대한 인간적 평가는 거의 모두가 호의적이고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비판의 여론은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는 이권 개입이나 사리사욕에 관한 얘기나 정실 인사에 관한 얘기가 없다.
반면, 육 여사는 유신체제에 대해 언급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김두영씨 등 당시 비서관들은 이번 여성신문 대담에서 “혁명 때도 남편을 믿었으니 무한책임을 같이 지는 심정이지 않았겠는가”라고 유추한다. 그러나 육 여사는 아이들에게 신당동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가끔 했으며, 집도 언제나 돌아갈 수 있도록 관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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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린 육영수 여사 회고 좌담회. 사진 왼쪽 앞부터 시계 방향으로 강영숙 예지원장, 정재훈 전 영부인실 비서관, 이은경 편집국장, 조은희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신정하 ‘새빛’ 전 발행인, 김두영 전 영부인실 비서관, 이정자 편집위원. ? 정대웅 기자 asrai@ |
■ 육영수 여사 일대기
1925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육종관 씨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출생
1938년 죽향 초등학교 졸업 후 배화고등여학교 입학
졸업 후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
1950년 6·25 전쟁 후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중 박정희 소령 만남
12월 12일 박정희 장군과 대구시 계산동 성당에서 결혼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 발발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 장군 제 5대 대통령 당선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 생활 시작
1967년 5월 3일 박정희 대통령 제 6대 대통령 당선
1969년 4월 14일 어린이 복지사업을 목적으로 ‘육영재단’ 설립
1970년 7월 25일 서울 남산에 ‘어린이회관’ 건립
1972년 12월 23일 제8대 대통령 당선
1973년 용산구에 ‘정수직업훈련원’ 설립
1974년 7월 15일 소록도 국립 나병원에 ‘양지회 기념관’ 설립
1974년 8월 15일 서울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식 도중 문세광의 저격에 의해 서거
8월 19일 국민장 영결식 거행 후 동작동 국립묘지 안장
■ 참고문헌
도서
-자비의 향기 육영수(남지심, 랜덤 하우스 코리아, 2007)
-어머니(명사 28인이 어머니께 드리는 감사장) (박근혜 외 28인, 매일경제신문사, 2006)
-훌륭한 어머니들(홍은희, 예담, 2006)
-대한민국과 결혼한 박근혜(묘심화, 찬섬, 2006)
-육영수 여사(박목월, 자유문학사, 2005)
-대한민국 퍼스트레이디 육영수(홍화상, 작은키나무, 2005)
-박근혜 신드롬(주치호, 작은키나무, 2005)
-육영수, 아름다운 내조가 천하를 얻는다(김명주, 은금나라, 2005)
-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홍화상, 국일미디어, 2005)
-샘물 같은 사람(내가 만난 마흔아홉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 (박도, 열매, 2002)
-영부인론(함성득, 나남출판, 2001)
-나의 어머니 육영수(박근혜, 사람과 사람, 2000)
논문
-퍼스트 레이디 역할에 의한 유형화 연구: 한국과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를 중심으로(최고은, 고려대학교, 2001)
-한국 영부인론: 대통령 부인의 유형과 역할 연구/ 정치인 아내의 바람직한 역할 및 위상(이승희·배선희, 한국여성정치연구소, 1997)
-한국 역대 대통령 영부인들의 정치적 역할에 관한 연구(고승현, 단국대학교, 1994)
-청와대의 가정교육: 육영수 여사와 단독 인터뷰(양봉자·염영희, 대한교육위원회 학술지 새교육, 1971)
-가인의 매력: 육영수 여사의 멋(정광모, KSI 논문, 1966)
[사진자료 제공] 국기기록원 대통령기록관리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간행 박정희 대통령 추모 사진집, 강영숙 예지원장, 신정하 ‘새빛’ 전 발행인
917호 [특집/기획] (2007-02-16)
이정자 / 편집위원, 환경칼럼니스트 (yeeann@chol.com)
한국녹색구매네트워크 공동대표
조은희의 대통령 배우자론
왜 육영수일까
한국편 (1) 국민의 어머니로… 청와대 제1야당으로… 여인의 향기 |
육영수 여사는 역대 대통령 부인 평가조사 때마다 가장 훌륭한 대통령 부인 1위로 꼽힌다. 1997년 한국여성정치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부터 지난해 말 필자의 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일까? 첫째는 육 여사의 업적 때문이다. 육 여사는 양지회, 육영재단 등을 통해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한편, ‘청와대의 제1야당’으로 불릴 정도로 민의 수렴에 열성이었다. 둘째는 육 여사만의 ‘인간적인 향기’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사람에 대한 육 여사의 인간적인 배려는 나환자와의 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역대 대통령 부인들 중 나환자촌을 방문한 사람은 육영수, 이희호 여사뿐인데 그 중에서도 그들과의 신체 접촉은 물론, 그들이 손수 껍질을 깐 고구마까지 함께 먹은 사람은 육 여사뿐이었다고 한다. 셋째, 33년 전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도 육영수 신화 창조에 한몫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오래될수록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남편을 대신한 요절이었으니 그 애잔함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육 여사는 여러 면에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최고회의 의장 시절부터 사실상 최장기간(13년) 동안 대통령 부인의 자리에 있었다. 또 대통령 부인의 롤 모델을 정립한 첫 인물로 꼽힌다. 대통령 부인 비서실을 최초로 공식화했으며 ‘대통령 부인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역대 최연소 대통령 부인(38세 취임)이면서, 동시에 남편의 재임기간 중 사망한 최초의 대통령 부인이기도 하다. 후임 대통령 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의 롤 모델로 ‘만인의 어머니’형인 육영수 여사를 꼽곤 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각광을 받자 ‘육영수+힐러리’를 이상형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의 대통령 부인들도 몰개성적인 ‘육영수 따라잡기’나 ‘힐러리 흉내내기’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변화된 시대에 맞는 ‘제2의 육영수 신화’를 창조할 시점이 온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저승의 육 여사가 후배 퍼스트 레이디들에게 가장 당부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굿바이 육영수’ 말이다.
917호 [특집/기획] (2007-02-16)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
나환자 사회정착에 크게 기여하다
환우들 “그 분은 우릴 해방시켰다” 애정 나환자에 각별한 관심…자립사업 펼치며 아픈곳 어루만져 |
▲ 한센병 환자들에 둘러싸여 격의없이 담소 중인 육 여사. 육영수 여사의 한센병(나병) 환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잘 알고 있는 신정하 ‘새빛’ 전 발행인의 증언은 육 여사의 면모를 가장 단적으로 잘 드러낸다. 신씨의 말에 따르면 여사는 한센병이 치료되어도 이들과 이들의 정착촌을 꺼려하는 사회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사는 매달 한센병 환자 사업기관지 ‘새빛’ 3000부를 청와대 봉투에 담아 영부인 육영수의 이름으로 전국 관공서와 우체국 등에 꾸준히 배달케 했다. 자연히 ‘나환자’에 대한 사회 인식과 태도는 개선되어 갔다. 한센병 환자 정착촌에는 관계자 3~4명만 동행하곤 했다. 그러나 사회가 꺼려하는 이들에게 육 여사의 방문은 큰 활력소였다. 육 여사는 이들의 자립사업으로 “돼지는 회임기간이 짧아 그 해에 비용을 뽑을 수 있고 부녀자, 병약자의 농가 부업으로 적절하다”고 판단, 양지회를 통해 총 78개 정착촌 중 우선 37개소에 씨퇘지 470마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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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내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월간지 ‘새빛’ 지령 100호를 축하해 손수 육 여사가 써준 휘호. | 신씨는 “농원들의 짜임새 있는 개발계획을 보거나 잠업마을의 계획 초과달성에 대해서는 기쁜 마음을 표했고, 수익성에 대한 조언도 늘 자상했다”고 기억한다. 강원도 원주 경천농원에 당도해서는 판로를 잃고 있는 1000여만원어치의 계육을 도당국과 군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활로를 트고, 전북 익산 상지원 방문시는 2년 만에 새끼를 볼 수 있다는 소 사육 생계방편을 듣고 50마리분의 무담보 융자를 바로 해결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환자들의 두 손을 어루만지며 살림살이를 같이 걱정하고, 그들이 내놓는 고구마도 같이 나누어 먹는 ‘가식 없는 어머니’ 같았다. 악수를 피하는 미감아 아이에게는 육 여사가 더 다가가 손이며 볼이며를 만져준다. “험상궂은 상처와 볼품없이 문드러진 손까지 일일이 잡아주시는 것을 보고 어찌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씨는 육 여사의 행적을 영부인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기억한다. 육 여사는 전국 정착촌민을 깨우쳤다. “진정한 정신을 갖는 인간회복을 내 안에 정립시켜 생활의 자리를 여러분 스스로가 쟁취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숙명처럼 살아온 빈곤과 수모와 질병의 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쓰고 “이에는 건강한 사람보다 더 인내와 용기와 땀이 요구된다”고 독려한다. 또 “잘못 없이 주위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는 직접 청와대로 연락해 달라”며 그들의 디딤돌임을 자처했다. 신씨는 “그 분은 우리를 해방시키신 분이다. 생전에 큰 사랑을 받았던 환우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센인협회 회원들은 육 여사의 공덕비를 소록도 양지회관에 마련하고, 34년째 변함없이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917호 [특집/기획] (2007-02-16)
이정자 / 편집위원, 환경칼럼니스트 (yeeann@chol.com)
한국녹색구매네트워크 공동대표 |
다시 주목받는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경제 내세워 쿠데타 정권 합리화 시도 “경제발전으로 통일·부패·교포·노동문제 해결 민주주의도 경제개발에 선행할 수 없어” 신념 굳건 |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이후 한국 정치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체제 변화를 경험하였고 그 사이 대통령직을 역임한 사람은 모두 9명에 이르고 있다. 최근 정치체제의 성격과 관계없이 객관적 기준에 의해 역대 대통령들의 업적을 평가하려는 시도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평가에서 일반국민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이러한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판단은 특히 유신체제 하에서 심각하게 유린되었던 민주주의조차도 ‘경제발전’이라는 성과 때문에 불가피한 시대적 산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면 박정희의 리더십이 한국 경제발전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기에 이러한 긍정적 평가를 낳고 있는가?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이념”에서 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는 집권 중 경제발전에 변함없이 매진하였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한 정치적 정당성의 결손을 메우기 위해서 경제발전 제일주의로 나아갔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경제발전은 박정희의 국가 최우선 정책으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박정희는 “경제만 발전한다면 통일문제·부패문제·교포문제·근로자(노동)문제가 모두 해결된다. 민주주의도 경제개발을 선행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다. 박정희의 경제발전 성과는 그의 장기집권을 위한 구실로 바뀌었다. 박정희는 경제발전 제일주의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경제정책 결정과 집행에서 탈정치화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박정희는 경제정책 관리에서 국회와 정당의 영향력 배제를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시도는 박정희 정치권력의 독점화·절대화 과정에서 더욱 현저해졌고, 유신체제 하에선 극에 달했다. 그러면 박정희의 경제발전은 어떤 한계를 보여주었는가? 제1차 5개년계획을 제외하고 2~4차 경제개발계획의 결과는 농림·어업 부문을 제외한 나머지 부문에서 대부분 실적치가 목표치를 초과해 달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의 경제 리더십은 효율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제발전의 평균 수치에 묻혀버린 경제정책 집행 결과, 누적된 적폐로 인한 효율성의 한계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의 경제발전 정책은 1970년 대대적인 국내 부실기업의 정리와 72년 국내 기업들의 심대한 사채부담을 덜어준 8·3조치, 그리고 70년대 중화학공업화의 적폐 등 박정희 피살 직전 79년 초 안정화 정책의 도입과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세계 경제 침체 속에 경제적 위기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반복적인 경제위기는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효율적이었다고 보는 것을 어렵게 한다. 또 경제건설 과정에서 박정희 리더십의 효과성, 즉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한국사회에 내적 안정을 가져왔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 60년대 수출 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은 농업사회의 잠재적 실업자군을 노동집약적인 경공업화에 의한 고용 창출로 바꿔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70년대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부의 편중, 경제의 대외 종속 심화, 산업간 불균형은 노동자·빈민 등 소외계층을 양산하였고, 특히 유신체제 하에서 정치적 반대세력들의 박정희 통치에 대한 도전을 더욱 강화시켜 그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결국 박정희의 경제 리더십은 70년을 전후하여 국내 각 부문에서 도전받기 시작해 79년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효과성의 한계도 보여주었다. 비록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세력의 도전이 주로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시도였지만, 특히 70년대 후반 악화되는 경제사정은 박정희 경제발전 모델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결국 박정희는 야당, 지식인, 학생, 진보적 교회세력의 끊임없는 반유신체제 투쟁으로 통치 기반이 점차 약화되었으며, 박정희 경제 리더십의 효과성은 유신체제 말기에 이미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특히 70년대 중반 육영수의 죽음으로 시작된 박정희 내면세계의 붕괴는 서서히 자기통제력 약화와 대인접촉 범위의 협소화로 나타났고, 78년 말 “아무것도 안하고 같이 다니기만 할” 비서실장의 채용으로 발전하였다. 경제에서 78년 말 대두된 고도 경제 성장정책의 한계와 경제 안정화 시책의 필요성은 박정희로 하여금 “이제는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고 토로하게 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박정희의 대처능력은 78년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현재화된 정치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채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박정희의 오랜 집권 경험과 지식도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정치·경제상태를 극복할 순 없었다.
917호 [특집/기획] (2007-02-16) |
첫댓글 김여사.. 대한민국의 국모 이신. 육사님의 10/ 1만 이라도 해라.. 연예인들 .. 만나는것이. 외교.. 영부인이.. 할일 이냐.. 정신좀 차리세요... 보이는 행동 하지 말고.. 어디 가도 카메라좀 달고 가지 마라.. 역겹다.. 김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