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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에게 이르시되
창 4:8-15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 4:8-15 / 그때 가인은 아우 아벨에게 `아벨아, 우리 함께 들판으로 나가자꾸나' 하고 말을 건넸다. 그후 형과 아우 두 사람이 함께 들판에 있을 때 형 가인이 갑자기 아우 아벨에게 돌아서서 그를 쳐죽였다.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제 아우를 돌보는 사람입니까?' 10)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가인아, 어쩌자고 네가 이렇듯 엄청난 일을 저질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구나. 11) 너는 이제 이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더 이상 땅을 갈아먹고 살지 못할 것이다. 네가 아우 아벨을 죽일 때 땅이 입을 벌려 그의 피를 받아들인 까닭이다. 12) 네가 아무리 열심히 땅을 간다 해도 땅은 네게 낟알을 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는 이 땅에서 정처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신세가 되리라.' 13) 그러자 가인이 여호와께 여쭈었다. `제게 내리신 벌이 너무도 무겁습니다. 어떻게 다 견뎌 낼 수 있겠습니까? 14) 주께서는 이 몸을 이 땅에서 아예 몰아내시는군요 또 주님의 낯도 보지 못하게 하실 생각이시군요 이 몸은 어느 한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정처없이 헤매며 살아갈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15) 그러자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주겠다. 혹시라도 너를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일곱 배나 무거운 벌을 내리겠다.' 여호와께서는 가인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가인의 몸에 표를 찍어 주셨다.
가인은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시고 자신이 드린 제물에 받지 않으시자 분노합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가인은 아벨을 쳐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을 쫓아내시며 표를 주셔서 죽음을 면하게 하십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8-12) 가인과 아벨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은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알 수도 없는 들이기에 가인은 모든 것을 숨길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아담을 찾아 오셨던 것처럼 가인을 찾아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묻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가인은 발뺌하며 모른 체합니다. 아담의 태도와 가인의 태도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가인은 오히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반문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가인이 무죄한 아벨의 피를 흘렸기에 땅과 관련된 3가지 심판을 내리십니다. “땅에서 저주를 받고”, “땅은 그에게 더 이상 효력을 주지 않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심판입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는데 이제는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가인의 호소(13-15) 가인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두려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거나 자책하지도 않고 징계가 무겁다고 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해 들어갔던 땅에서도 쫓겨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라고 하면서,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에서도 쫓겨나는 것이라 말하며 두려워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보호로부터 제외되는 것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제 가인은 정처 없이 방랑자가 되고 자기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라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말씀하면서 가인에게 보호의 증표로 표를 주십니다. 이것은 가인이 죄인임을 알게 하는 표시이며 동시에 가인마저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입니다.
적용: 죄는 숨길 수 없고,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은 참으로 두렵고 무겁습니다. 이러한 죄가 당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지, 죄에 대한 회개의 기회가 있을 때 당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비롯해서 많은 히트작품을 감독한 박찬욱 감독이 그가 감독한 ‘설국열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배우 송강호가 달리는 열차 안에서 “이게 너무 오랫동안 닫혀 있어서 벽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문이다.”라는 얘기하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당신도 살면서 뭔가 딱딱하고 널찍한 것과 마주하게 되면 그것을 벽이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밖으로 나가는 문일 수 있습니다. 벽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문을 찾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처음 출생자, 처음 살인자, 가인
창 4장 8~12절 / 이정선목사
창세기는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의 처음과 시작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 첫 번째입니다. 첫 사람, 첫 여자, 첫 범죄 등등 말이지요. 처음으로 인간이 태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신과 같은 인간을 생산해낸다는 뜻입니다. 가인을 낳고 하와가 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With the LORD's help, I have produced a man”(창 4:1, NLT). 무슨 말인가 하면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마치 하나님이 하셨던 것처럼 사람을 만들어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신성하고 신비한 것이 생명을 낳는 일입니다. 그것은 원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가인이 태어나고, 또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그뿐이겠어요? 아들뿐만 아니라 딸들도 태어났을 것입니다. 아이가 새로 태어날 때마다 하와는 죽을 고생을 했겠지만, 몇 차례 경험하면서 익숙해졌을 것이고, 또 새로 아이를 얻는 기쁨에 그 고통을 금방 잊었을 것입니다. 산아제한을 할 줄도 몰랐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셋째 아들 셋을 낳은 후 800년 동안 자녀를 낳았다고 했으니 아담과 하와가 자녀를 몇 명이나 낳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낳은 자녀들이 짝을 지어서 또 자녀를 낳았겠지요. 그러니 짧은 기간 내에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처음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쳤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소득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는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논란이 되는 것은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 9:22)고 말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주로 소나 양을 잡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피를 흘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제물은 피를 흘리지 않은 농작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사를 드렸다면 피흘림이 필요했을 것이지만, 소득에 대한 감사의 제사였다면 그것이 농작물이든 가축이든 그 소득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구약의 제사에도 곡물로 드리는 제사와 포도주로 드리는 제사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사의 규례를 주셨는가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는 피흘림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가인이 알면서도 농작물로 제사를 드렸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안 받으셨겠지요. 그런데 만일 제사는 꼭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직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피흘림의 제사를 드린 것이라면,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었다는 것은 공정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다는 대목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제물의 종류와 성격 때문이 아니라 제물을 드린 사람 때문에 받으시거나 받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히 11:4). 예수님은 부자들이 드리는 많은 액수의 헌금보다 과부의 엽전 두 개가 더 많이 드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21:2-3). 제사는 제물보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것은 그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 이후의 결과에서도 증명됩니다.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것을 보고 가인은 무척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가인은 원래 선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즉 죄의 지배를 받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7절).
그러나 그 다음 가인의 행동은 아벨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교하고 경쟁해서 발전하게 되는 순기능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이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자기 함정이 되기도 합니다. 가인은 그 자기 함정에 깊이 빠졌습니다. 가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는 분노를 쏟아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는 게임이 안 되니까요. 그래서 그 모든 분노가 아벨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벨을 죽이는 것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서 가장 신성하고 신비한 것이 생명을 낳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생명을 죽이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장 악한 것이고, 인간이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그 죄성이 이처럼 빨리 살인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우리가 집에 들어갈 때 문에 웅크리고 엎드려 있던 죄가 나를 사로잡으면, 내가 집에 들어가서 하는 행동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족들을 학대하고 상처를 입히게 될 것입니다. 집에 있다가 밖에 나가는데 문에 엎드려 있던 죄가 또 나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면 밖에 나가서 범죄하고 악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its desire is for you), 이 말은 죄의 소원은 너를 갖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죄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분노가 있을 때, 조금 섭섭한 일이 생길 때, 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우리 마음을 점령하고 지배하려 할 것입니다. 가인은 죄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었습니다. 죄가 그의 인격과 성품과 행동을 지배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죄에 사로잡히지 않는 방법은 그것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문에 엎드려 있습니다. 멀리 쫓아버릴 수 없습니다. 죄의 유혹과 위험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도록,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즉 그것은 죄와 우리 사이에 서로 다스리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래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온다”(롬 7:23)면서 탄식했습니다. 우리가 그 싸움에서 지지 않도록,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면서 믿음으로 승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인, 죄를 다스릴 지니라
창 4장 8~15절 / 김영규목사
가인의 분노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배를 거절하신 것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심히 분하 여”라고 했습니다. 크게 화가 났다는 뜻입니다. “daom] hr;j;”(very angry) “안색이 변하니”란 말은 얼굴을 떨구었다는 뜻인데, “hn<P; lp'n:”(his face was downcast), 실망의 표시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예배가 거절당한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실망했습니다. 가인의 태도를 보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인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든 말든 별 관심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예배가 거절당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하고 실망했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인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욕은 네게 있으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인이 어떤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차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달라는 예배였습니다. 마치 무당이 소원을 빌듯이 가인은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자 분노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가인이 무슨 요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이니까 아마 수확을 많이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지도 모릅니다. 가정 일, 예를 들면 자식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소 하나님을 크게 믿지도 않고 예배 생활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슨 큰 소원이 있을 때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빌어요. 하나님 내 아들을 명문 대학에 합격시켜 주옵소서! 하나님 저에게 한 번 만 큰돈을 벌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하면서 화를 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지금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는 것이 정당한 요구인지, 아니면 내 욕망인지? 만일 내 욕망이라면, 하나님께서 내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크게 화낼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 화를 잘 내시는 분들 있지요?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왜 내가 화를 잘 낼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뭐든지 내 뜻대로 되어야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거예요. 자식이 내 맘대로 안 될 때, 아내나 남편이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화를 냅니다. 남들이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 회사 동료들이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친구들이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겁니다. 방구 뀐 놈이 왜 화를 냅니까? 자기 맘대로 방귀를 뀌어야 되는데 누가 뭐라고 하니까 화를 내는 겁니다. 분명히 자기 잘못인데도 남의 탓을 합니다. 남들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남들이 나를 무시한다! 너무 내 뜻대로 하려고 욕심 부리지 마세요. 내 뜻을 관철하려고 할수록 열 받고 분통이 터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면 절대로 화 날 일이 없습니다.
둘째는 자신은 거절당했는데 동생 아벨은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동생이 잘 된 데 대해서 마음이 상했습니다. 제대로 돼먹은 사람이라면 내 기도는 안 들어주셨지만 동생의 기도라도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못 살아도 사촌이라도 잘 살아야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지! 그런데 가인은 사촌이 땅 사면 맹장 걸려 죽을 사람입니다. 친 동생이 잘 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얼마나 못마땅했으면 동생을 쳐 죽이겠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는 남 잘되는 것을 못 봐줍니다. 대한민국 교육 제도가 왜 힘듭니까? 다 학부형들의 과욕과 시기심 때문입니다. 남의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조건이 주어지는 것은 못 참습니다. 남의 자식이 공부 좀 더 하는 것 못 참아요. 내 자식도 똑 같이 잘 하게 해 달라!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모두가 똑 같은 환경에 있을 수 있습니까? 태어난 집안이 다르고, 부모가 다르고, 지능지수가 다르고, 생긴 게 다르고, 가진 게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성취 욕구가 다르고, 취향이 다른데, 어떻게 똑 같은 환경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차별은 좋지 않지만 차이는 인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네 자식만 천재냐? 내 자식은 만재다! 너만 돈 버니? 나도 억만장자가 꼭 되어야 되겠다! 도대체 남이 잘 되는 일에 박수를 안 쳐요. 남에게 박수 쳐주지 않는데, 남들이 내게 박수를 쳐 주겠습니까? 심보를 똑바로 가져야 됩니다. 남이 부자 됐으면 열심히 일해서 부자 됐구나, 인정해 주세요. 남이 공부 잘 하면, 머리가 좋아서 공부 잘 하는구나, 인정해 주세요. 미인을 볼 때마다, 참 잘 생겼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거꾸로 생각합니다. 부자를 보면 또 무슨 도적질을 해서 부자 됐나? 남이 공부 잘 한다고 하면, 또 무슨 족집게 과외를 싸발랐나? 남이 미인이라고 하면 또 무슨 성형 수술을 했나?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박수치고, 나도 잘 되기를 힘쓰는 것이 정상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 못 봐주고, 깎아내려서 같이 낮아지자고 하는 것은 병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요. 밤낮 “낮은 데로 임하소서!” 하면서 남들보고 낮아지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렇게 낮아지고 싶으시면 다 거지 깡통 차고 다리 밑에 사세요! 그렇게 낮은 것이 좋으시면 대학도 가지 마시고, 승진도 하지 마시고, 돈도 벌지 마시고, 그냥 빈 털털이로 사세요. 낮아지라는 것은 남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소리입니다. 남에게 가난해지라고 하지 말고 남을 부하게 하세요. 그래야 나도 부해집니다. 남에게 겸손해지라고 하지 말고 내가 겸손해지세요. 남을 높여주세요. 그러면 남들이 나를 높여줍니다. 가인은 욕망의 예배, 시기심의 예배로 분노에 빠졌습니다.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가인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중요한 몇 가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죄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세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로, 죄를 짓지 않는 자가 가장 당당하다는 사실입니다. 뭐니 뭐지 해도 죄 짓지 않는 것이 최상 책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 선을 행하면 얼굴을 들 수 있다! 반대로 악을 행하면 얼굴을 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떳떳하다”, 혹은“당당하다”는 말을 합니다. 떳떳하고 당당한 인생이 되는 비결이 뭡니까? 선을 행하는 겁니다. 소극적으로 말한다면 죄를 짓지 않으면 당당합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니까 후보 검증 얘기가 자꾸만 나옵니다. X-FILE이 있다! 그래서 열어보니까 별 것 아니더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랍니다. 저는 세상에서 헐뜯는 놈이 제일 싫습니다.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죄 없는 자가 가장 당당하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죄가 없으면 물고 늘어질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세상에서 당당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죄 짓지 마세요. 죄 없는 당당함, 바르게 사는 당당함이야말로 가장 떳떳한 인생입니다. 여러분, 돈 많다고 얼굴 들지 마시고, 착하게 사는 것으로 얼굴을 드시기 바랍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얼굴 들지 마시고, 죄 짓지 않은 것으로 얼굴 드시기 바랍니다. 유명해졌다고 얼굴 들지 말고, 공부 잘 한다고 얼굴 들지 말고, 진실하고 정직한 것으로 얼굴 드시기 바랍니다. 무죄의 당당함! 가장 당당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선을 행함으로써 죄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는 일입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전쟁의 전략이 있습니다. 자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방법은 가장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그런데 무기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사랑의 공세, 용서의 공세, 정직함의 공세, 의로움의 공세를 취하세요. 본문에 보세요.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가 어느 때에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선을 행치 않을 때입니다. 문에 엎드린다는 말은 “$bero taF;j' jt'P,l'” 문에 웅크리고 눌러 앉는다는 말입니다. “sin is crouching at the door” 類類相從입니다. 끼리끼리 모입니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 곁에는 착한 사람이 모여듭니다. 어깨 곁에는 어깨들이 모입니다. 공부 하는 사람 곁에는 공부하는 사람이 모이고, 노는 사람 곁에는 노는 사람이 모입니다. 일하는 사람 곁에는 일하는 사람이 모이고, 건달 곁에는 건달이 모입니다. 진실한 사람 곁에는 진실한 사람이 모이고, 거짓된 사람 곁에는 사기꾼이 모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곁에 모여드는 사람이 다릅니다. 영적 원리도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 곁에는 선한 일들이 다가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 곁에는 또 다른 죄악이 다가옵니다.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사람 곁에는 감히 죄가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막으려면 선을 행해야 됩니다. 오늘 내게 죄를 끌어들이는 죄의 요인은 없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내부적으로 죄의 욕망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는 외부에 있지만 욕망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스리려면 내 마음의 욕망을 다스려야 됩니다. 본문에서 다스리라는 말은(lv'm) 통치하다, 지배하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you must master it(NASB)” 즉, 너는 지배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마치 황제가 신하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듯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주인이 되어야 됩니다. 남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시기 바랍니다. 즉, 죄의 욕망을 거절하고, 죄의 요구를 금지하는 결단과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게으른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쓰는 변명이 있지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쿨쿨 잤습니다. 잠시만 깨어 같이 기도하자고 거듭 말씀하셨지만 계속 잤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요즘 새벽 기도 못 가면서 이 말씀을 종종 인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 받기 이전의 말씀입니다. 성령 받은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육신이 약해도 성령이 도와주심으로 뭐든지 가능합니다. 죄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죄의 욕망이 일어날 때에 단 일 초 만이라도 “주여!”라고 외쳐 보세요. 단 일 분만이라도 “성령님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요청해 보세요. 반드시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죄의 욕망이 다가올 때에 죄를 다스리려는 의지가 없는 겁니다. 죄를 다스릴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의 욕망 쪽에 기울어집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가 아닙니다. “주여 잠깐 비키소서!” “성령님 잠깐 모른 척 하소서!” 그리고 죄를 짓습니다. 기억하세요. 죄의 욕망은 충분히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5:7)
하나님의 심문과 처벌
결국 가인은 죄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들로 유인하여 죽였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가인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소행을 보셨습니다. 아담의 죄와 같이 하나님은 가인의 죄에 대해서도 똑 같이 심문하시고 처벌하셨습니다. 죄는 반드시 처벌됩니다. 비록 빈들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죄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가인의 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입니다. 경찰에서 강도를 붙잡으면 반드시 묻는 질문이 있잖아요? “네가 강도질을 했지?” “네, 제가 했습니다!”라고 말하면 간단합니다. 그러나 범인이 죄를 부인하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둘째는 형제 우애의 책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yjia) 아벨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으로써 아우에게 할 도리를 했는가? 즉, 아우를 돌봐주고 지키는 일을 했는가? 최소한의 우애를 지켰는가?
가인은 기대에 어긋나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 첫째는 자기가 죽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른다는 모르쇠로 나갔습니다. 목격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아니라고 시치미를 뗍니다. 범죄자들은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다. 둘째는 자기의 책임을 거부했습니다. 내가 무슨 동생이나 지키는 자입니까? 형제 우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비방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이 아벨을 지키는 자가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서 죄가 얼마나 발전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남의 탓을 하는 변명은 했지만 거짓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감히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의 수치를 알고 숨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살인의 수치를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대들고 있습니다. 부모가 바늘 도둑이면 자식은 황소 도둑이 됩니다. 부모가 사기를 치면 자식은 강도가 됩니다. 죄는 발전합니다.
가인에 대한 심문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 심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죄인에게 무슨 심문이 더 필요합니까? 이제 남은 것은 처벌뿐입니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10-11)” 가인의 죄는 하나님이 목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증인이십니다. 그런데 또 다른 증인들이 있습니다. 가인이 흘린 아벨의 피가 증인이요, 그 피를 받은 땅이 증인입니다. 가인이 아우를 죽일 때에 아우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형님, 제발 살려주세요!” 그런데도 그는 계속 아우를 쳤습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렸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때렸습니다. 그 처절한 장면을 하나님이 땅에 녹화를 하셨습니다. 땅이 입을 벌려 피를 받았다고 합니다. 피의 소리가 하나님에게 들려졌습니다. 땅이 증인이요 피 자체가 증인입니다. 이 세상에 피보다 더 강한 증인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가장 강력한 증인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24)
가인 에게 내려진 형벌은 아담에게 내려진 벌과는 또 다른 성격의 처벌입니다. 아담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쫓겨나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영적인 사망과 육신의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보다 더 큰 벌은 없습니다. 가인은 이미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처벌을 물려받은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대한 처벌은 현세적인 성격의 처벌입니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 ” 이 구절을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너를 위해 농산물을 내지 않을 것이며 너는 땅에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가 될 것이다.” 가인에 대한 처벌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경제적 빈곤입니다. 가인의 직업은 농사였습니다. 그런데 힘들게 노동을 해도 땅이 소출을 내지 않습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너를 위해 농산물을 내지 않을 것이며” 농사의 비결은 높은 생산성입니다. 한 알을 심으면 백 개 천 개가 나오는 것이 농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를 심으면 한두 개밖에 증식이 나옵니다. 더 이상 먹고 살기 힘듭니다. 오늘날 지구상에 수 많은 인구가 굶주리고 있습니다. 일부 부자 나라에서는 과 영양 상태로 온갖 성인병에 시달리지만, 많은 나라들은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로 죽어갑니다. 요즘 어떤 예수쟁이들은 고상한 척 하면서 가난한 것이 복이라고 자꾸 가난해지라고 합니다. “장로님 가난해지세요! 목사님 가난해지세요!” 가난한 게 그렇게 좋으면 아주 깡통 차고 거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경제적 빈곤 자체는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구제하라고 합니다. 구제는 줄 것이 있는 자가 하는 겁니다. 먹을 것 없는 자가 먹을 것을 줄 수 있습니까? 입을 것 없는 자가 입을 것을 줄 수 있습니까? 그래도 대한민국이 잘 사니까 김정일 정권에게 퍼주자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거지 같이 살아 봐요, 뭘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동생을 죽인 살인자, 가인에게 빈곤의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둘째는 안정되지 못한 삶입니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 “너는 땅에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가 될 것이다(12절)”(현대인의 성경) 본래 땅은 아담에게 안식처로 주신 곳입니다. 생육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까지 번영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범죄 한 가인에게는 안식처가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떠돌아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게 아닙니다. 먹고 살 것이 없으니까 떠돌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글로벌 시대니 뭐니 하면서 국제화를 외칩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는 사람들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기업도 다국적 기업이 되어야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사람은 태어난 곳에서 WELL BEING 하면서 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부모님이 계시고, 사촌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이웃이 있는 곳! 고향에 사는 것이 얼마나 그립습니까?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 있네!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바다에는 배만 떠 있고 어부들 노래 소리 멎은 지 오래일세!” 살인자 가인에게는 정한 처소가 없었습니다.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육신적으로도 그랬지만 정신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정신적 방랑은 더 심각합니다. 그는 항상 불안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죽이지는 않을까? 자기가 동생을 죽였듯이 남들도 나를 죽일까봐 겁이 났습니다. 요즘 불안장애라는 정신 질환이 아주 많습니다. 가인은 불안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불안 장애가 뭡니까? 사전에 보니까 이렇게 설명합니다. “불안해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불안해 하거나 정도 이상으로 지나치게 불안해 하는 경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 장애를 갖고 있는 환자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짜증을 잘 내며 예민하다. 또 닥치지도 않을 위험을 걱정하고 최악의 사태만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신체적인 증상으로는 심박동 증가, 소화불량, 설사, 변비, 발한, 근육긴장으로 인한 두통, 불면증 등이 나타난다.” 불안 장애는 증상별로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공포 장애입니다.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을 회피하는 장애로서, 공포의 대상과 상황에 따라 사회공포·동물공포·폐쇄공포·고소공포 등으로 나뉩니다. 둘째는 공황장애입니다. 반복적인 공황발작과 정신과민을 나타내는 경우를 말하는데, 공황발작이란 급격한 자율신경 자극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으로 호흡곤란·심박동항진·흉부압박감·질식감·현기증·졸도·근육경련 등의 증상이 따릅니다. 셋째는 범 불안장애입니다. 특정 상황에 국한되지 않고 긴장 상태가 지속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뒷목이 당기듯이 아픈 긴장성 두통, 손 떨림, 발한, 어지러움, 타는 듯한 갈증, 상복부 통증, 소화불량 등의 신체적 증상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넷째는 강박 장애입니다. 자신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박적인 사고나 행동이 반복되는 증상입니다. 집을 나선 지 한참 만에 집안의 가스밸브를 잠그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해 하다가 결국 집으로 되돌아가 확인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안정이 없는 삶, 육신의 안정이 없고, 마음의 안정이 없는 삶은 바로 하나님이 가인에게 내리신 형벌입니다.
처벌 중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자비
가인은 하나님이 내리신 처벌이 너무 과중하다고 불평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13-14)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나는 당연히 내 죄 값을 받은 것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또 불평입니다. “내 죄에 비하면 처벌이 너무 지나칩니다!” 대개의 죄인들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죄보다 내 벌이 더 크다! 특히 가인은 자신의 불안 증세에 대해서 하나님께 하소연 했습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이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자비를 나타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가인에게도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가인이 절대로 죽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표를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8-15)” 가인의 표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어떤 얼굴에 무슨 표식을 주셨는지? 혹은 가인을 만나는 사람마다 죽일 마음을 갖지 않도록 마음의 증표를 주셨는지? 아무튼 가인의 증표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신 자비의 표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 약속을 주셨습니다.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하와에게는 산자의 어미(조상)라는 뜻에서 “생명”(하와)이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인에게도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표식을 주셨습니다. 비록 살인자라 해도 죽지 않고 구원 받는 표를 주셨습니다. 마치 예수님 우편에서 사형을 당했던 죄인처럼, 살인자 가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을 소망을 주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벨의 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예표합니다. 아벨이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피로써 증명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써 모든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살인강도라 해도 모든 죄를 용서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에게 죽지 않는 구원의 예표를 주셨습니다. 오늘 가인보다 더한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영접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모든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에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 4장 8~16절 / 이종철목사
아벨을 쳐 죽이니라
주님은 가인에게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죄에 끌려 다니고 맙니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끌려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주님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시기심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참 사람의 생각은 이상합니다. 가인은 아벨만 없으면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받을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요? 아벨만 없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요? 가인이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소망은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 안에 있습니다. 시기심은 모든 정상적인 판단을 흐리고 맙니다.
시기심은 상대방 뿐만 아니라 자기를 죽입니다. 시기심은 남과 비교하는 데서 나옵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생기는 미움의 감정입니다. 내가 더 큰 집에 살아야 하고, 내가 더 높아야 하고, 내가 더 유명해야 하고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 드는 감정입니다. 인간에게서 시기심은 원죄만큼 근원적이고 오래되었습니다. 인류의 DNA 안에는 가인의 이 시기심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습니다.
어느 사막에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마귀들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물질과 여자로 유혹하고 두려움 등으로 겁을 주었지만 전혀 요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이나 불이나 배고픔 등 그 어떤 유혹에도 수도사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마귀들이 유혹에 실패했을 때 대장 마귀가 자기가 한 수 가르쳐 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딱 말 한마디로 그 수도사를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대장 마귀는 그 수도사의 귀에 “자네 친구 아무개가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네.” 하고 들려주었습니다. 그 순간 그 수도사는 “아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며 그만 시기심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기심은 이처럼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시기심이 단지 마음 안에만 존재한다면 괜찮겠지만 시기심은 분노로 바뀌고 결국 최초의 형제 살해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런 점에서 죄의 발단에서부터 조심할 것을 요구합니다. 바로 마음과 입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 말씀하며 먼저 마음을 다스릴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하여 그 입과 태도에서부터 조심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노와 미움이 결국 살인에 이르게 합니다. 그 뿌리로부터 다스리지 않으면 시기심이 일어나고 난 연후에는 도무지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시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사람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온전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기심의 문제는 상대방을 온전한 한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가 가진 재산만 보이고, 그가 가진 잘 생긴 얼굴만 보이고, 그가 가진 성적만 보이고, 그가 가진 인기와 영광만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란 것이 어디 그렇습니까?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시기하는 그 사람은 인기는 많지만 외롭습니다. 친구가 없고 가족이 없습니다. 그는 재산은 많지만 자녀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는 1등을 하지만 그 마음은 그 자리를 빼앗길까 늘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대신 거의 쉬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가진 눈물과 상처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 인간 전체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축하하고 위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가 가진 어두움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내 인생과 그의 인생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그 사람의 인생과 우리에 눈에 보이는 인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가 둘째로서 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물을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인간 아벨을 보지 못하고 그의 한 면만 보다가 결국 살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또한 시기심이란 자기가 가진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남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부러워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가인은 장자입니다. 부모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아벨은 이런 가인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을까요? 가인은 마치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과 같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에게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즐거워하자 큰 아들은 이를 시기하여 몹시 분노합니다.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어 대접한 적이 없거늘 저 못난 자식은 융숭하게 대접한다고 잔뜩 화가 나 있습니다. 이런 형에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31-32) 큰아들은 아버지 소유가 다 자기 소유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는 이 기쁨을 모릅니다. 또한 그가 동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졌더라면 시기심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개발하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학교에서는 시험 성적으로, 사회에서는 물질의 성취라는 획일적인 기준으로 경쟁시키고 궁극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회는 결국 자기 가진 장점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빼앗도록 하는 가인의 시기심을 부추기는 사회가 되고 맙니다.
또한 시기심이 나는 이유는 작은 것에 연연해 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작은 것 때문에 시기하지 않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염소 새끼와 살진 송아지라는 작은 것을 시기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생환과 화목이라는 더 큰 것을 바라보았기에 시기심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딱지 가지고 싸우고 장난감이나 게임기 가지고 싸우고 시기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는 다른 것 가지고 시기합니다. 큰 집이나 큰 차나 명품 가방이나 연봉이나 지위나 명예입니다. 목회자들은 큰 교회 건물, 성도 수, 감투나 명예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내가 어떻게 진리 안에 거하고 예수님 닮아가고 있는지를 시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더 큰 것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일이나 민족을 사랑하는 자는 그보다 작은 것들에 대해서 시기하지 않습니다. 애국지사가 언제 부귀영화를 시기했던가요? 그들은 오직 민족만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신앙인들 또한 보다 큰 것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만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을 닮아가는 이것이 너무 기뻐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그가 어떤 집에 사는지, 그가 어떤 지위에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없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그를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길 뿐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동생을 죽인 형 가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또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두 질문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아담에게 물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었고, 가인에게 물었던 것은 이웃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느냐가 우리 구원을 결정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가인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9절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 가인은 모른다고 하고 또 자기와 이웃과는 상관이 없다며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란 말은 어디선가 비슷하게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심판의 비유에서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최후심판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영생에 이르는 양의 부류와 영벌에 이르는 염소의 부류로 나눕니다. 그 때의 기준은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옥에 갇힌 작은 소자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하게 살았니? 예수 잘 믿었니? 예배 잘 드리고 헌금 잘했니? 이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네 가난한 이웃을 향한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때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마25:44) 그들은 자기들이 왜 영벌에 처하게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웃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변명처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 가난한 이웃이 있었다면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알았더라면 헤롯 왕과 당시 서기관들과는 달리 마구간에 태어난 예수님을 경배했을 것이고, 내가 알았더라면 주님을 외면했던 백성들과는 달리 목마른 예수님께 물 한 모금 드렸을 것이며, 내가 알았더라면 유대 관원들처럼 예수님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에 열려 있고, 사랑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으로 우리가 되돌아간다 한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많은 정보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일부일 뿐입니다. 관심 있는 것만 눈에 들어옵니다. 외면하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에 갇혀 자기 좋아하는 것만 보려합니다. 보지 못한 것은 주변에 가난한 이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상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고통으로, 외로움으로, 병으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간관계의 상처로, 물질적인 고통으로 그 영혼은 아파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웃고 있어도 그 영혼은 울고 있는데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왜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 한마디, 무심코 행하는 행동 하나만 유심히 보았더라도 우리는 그 영혼의 상처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뻔뻔하게도 가인처럼 “내가 내 이웃을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항의합니다. 우리의 항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주변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믿기가 복잡하지요? 그냥 예배만 드리고, 적당히 우리의 헌신을 받아주고, 또 우리가 기도할 때 가끔 응답만 해주시면 될 것 같은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좀 까다롭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일찍이 경험했던 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 제사만 말없이 받으시는 하나님을 원했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7-8) 하나님은 공의, 인자, 겸손 등 우리 이웃을 향한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웃을 향한 정의와 사랑이 없는 예배는 받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 이웃이 어디 있는지, 내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내 아우 아벨이 눈에 뻔히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북한의 형제들입니다. 요즘 통일의식 조사를 하면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서 낮은 응답이 나옵니다. 북한은 귀찮고 까다롭고 마음에 들지 않으며, 우리 남한만 편히 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네 형제 북한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나는 모릅니다. 북한은 나와 상관없고 우리가 북한 형제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은 90년대 말에 수백만의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갈 때, 또 지금도 북한 주민의 3분의 1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데 너희는 무엇하였느냐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고사하고 지금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부유한 남한과 가난한 북한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나중에 통일이 되어 남한의 부유한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자기 가족 중 일부를 굶주림으로 보내야 했던 북한 형제들은 우리에 대한 원망이 없을까요? “좀 잘 살면 진작 도와주지......”
저는 우리 사회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 공동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고 지키려는 의식입니다. 이웃의 고통에 대해 외면하고 나만 잘살면 된다고 하는데 실상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웃을 지키지 않고 이웃을 죽였던 가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14절입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17절에서는 자기만의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식이 있으면 서로 지켜주지만 이웃이 사라진 곳에서는 불안과 두려움, 의심만이 쌓입니다.
한국사회가 이렇게 힘들어진 이유는 이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강남이라는 높은 성만 쌓았지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고 돌보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현재 비정규직이 800만에 이르고 그들의 평균 월급은 120만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장애인만 400만 명에 이르고, 청년 실업률 또한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통계를 보니 사회복지 지출이 GDP 대비 10%로 OECD 국가 중 꼴찌입니다. OECD 평균은 23%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면서도 국가 경쟁력이 세계 10위권에 들어갔다고 자랑만 합니다.
우리나라 출산율 통계를 보니 1.22명으로 세계에서 꼴찌입니다. 이처럼 출산율이 낮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아이를 낳고 기르기가 비용이 많이 들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집값도 비싸고 사교육비도 많이 들어가니 누가 아이를 낳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출산과 육아와 관련된 사회복지 비용은 OECD국가 평균의 1/7에 불과합니다. 형편이 이러한 데 아이를 낳자고 캠페인만 벌여서 되겠습니까? 이런 추세라면 40년 후에는 대한민국 인구가 400만 명 정도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성장과 수출 지상주의로만 달리고 사회 복지에 소홀히 한 결과 이제는 성장 동력마저 잠식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식이 옳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지키는 것은 결국 모두를 평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잘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성장, 승자독식, 경쟁 위주로만 나간다면 사회는 불안하고 성장도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부유층은 빈곤층을 생각해서 세금을 많이 내어야 합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생각해 주고, 사장은 사원들을 생각해 주고,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강남은 그 외 지역을 배려해 주어야 하고, 수도권은 지방을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대형교회는 중소형교회를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 자기만의 성을 쌓고 있으니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고 불안해하는 가인의 문화만이 팽배한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공동체성의 회복은 우리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네 이웃이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은 단순한 윤리적 요청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정신적 가치입니다.
아벨의 핏 소리
아벨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형 가인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의 귀에는 묻혀진 것 같지만 하나님의 귀에는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렸습니다. 10절입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호소한다는 단어는 날카롭게 외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은 한숨소리를 매우 민감하게 듣습니다.
성경에는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자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갈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으로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갈은 이 일 때문에 사라로부터 핍박을 받고 쫓겨납니다. 하갈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부르짖을 때(창21:19) 하나님께서는 방성대곡하는 하갈과 아이의 소리를 듣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에게 물을 주시고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축복하셨습니다. 하갈에게는 하나님이 두 번 나타나셨는데 그 때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창16:11)고 말씀하였고, 하갈은 이런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감찰하시는(살피시는) 하나님”(창16:13)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피부병을 앓고 부자 집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던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다만 개들만이 그 헌 데를 핥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마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이요 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면하지만 하나님은 정확히 그리고 큰 소리로 듣고 계십니다.
아벨은 오늘 말씀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가인이 주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평가는 다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오히려 아벨이 칭찬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아벨을 “의인 아벨”(마23:35)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히11:4)라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귀이고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고 답답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큰소리로 여러분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56:8) 주님은 소리없이 흘린 우리의 눈물을 하나하나 담고 계신 분입니다.
가인의 표
하나님의 사랑은 아벨에게 뿐만 아니라 가인에게도 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가인의 표는 옛날 사극에 보듯 이마에 죄수라고 썼던 것인지, 아니면 소설 <주홍글씨>의 간음한 여인의 가슴에 새겼던 “A”라는 글자와 같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표시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해주심으로써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그 7배에 해당하는 벌을 내리겠다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당황하게 됩니다. 형제를 죽인 살인자에게 죽음의 심판을 내리기는커녕 너무나도 가벼운 형벌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실상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우리는 에덴동산에서도 일찍이 경험한 바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당장 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흉악한 살인자에 대해서 너무 관대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한 단서를 우리는 4장 1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나님은 엄격한 정의의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냉정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낳은 아버지이자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아들이 아무리 살인했다고 하여 무정하게 버리고 심판을 내리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사건들이 급격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고통과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가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가인의 표가 주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 말씀하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하나님을 떠나 살며 이웃을 외면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자신의 성을 허물고 에덴으로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죄악의 성에서 돌이킬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할 때만이 불안한 삶에서 해방되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왜 가인입니까
창 4장 9~10절 / 백장흠목사
인류의 최초 인간이라는 아담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처음 낳은 아들이 바로 가인입니다. 장자라는 말입니다. 장자는 축복권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전에 장자는 가족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동생들을 잘 거느리고 장래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게 장자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비교적 장자는 마음이 너그럽습니다. 제가 장자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만 우리 형제 6남매 중에 제가 장자입니다. 본문의 가인은 장자였는데 장자 구실을 못했습니다. 장자는 성실함이 있어야 하는데 가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왜 가인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1. 제단 실패자입니다.
구약의 제단은 신약의 예배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인생의 실패 시작이 어디에서 부터 오는가? 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신앙의 사람들 모든 일에 성공자가 되고 싶다면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데이비드 핑크' 박사는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이라고 하는 논문을 통하여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언가 하면 정신적인 안정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안정보다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안정보다 정신적인 안정이 시급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안정이 안된 사람은 항상 불안합니다. 누군가가 반대하는 말을 하면 피해의식을 갖습니다. 한 사람이 정신적인 안정이 없으니까 다른 이들까지 불안하게 만듭니다. 정신적인 안정이 있어야 육체도 건강하고 능력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안정을 위하여 네 가지가 균형이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일이라고 합니다.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일 자기가 있고 일하는 목표가 분명하여야 합니다. 둘째는 놀이(Play)입니다. 즐겨야 합니다. 재미있어야 합니다. 계속 즐거움이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놀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할 줄은 아는데 놀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놀아도 돈내기 화투나 하고 무엇을 하던지 돈내기를 합니다. 일본 사람들 중에 일년에 골프 치다가 죽는 사람이 년간에 16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골프를 즐기는 것이어야 하는데 스트레스를 받고 병을 오히려 안고 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지나친 경쟁을 합니다. 아니면 돈내기를 합니다. 잘 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러브(Love)입니다. 사랑할 줄 알고 사랑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 없이 수고 없이 사랑을 받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사랑해야 합니다. 넷째는 예배라고 하였습니다.(Worship)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목사님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인생을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배는 정신적인 안정을 찾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그리는 예배는 성공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열납 되고 자신도 은혜를 받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이후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것은 가인과 아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는데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 하셨습니다. 가인의 제물을 생각해 봅니다.
1) 땅의 소산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예배는 형식만 갖추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도들의 응답이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의 형식으로 순서가 진행되면 예배가 되는 게 아닙니다. 내용이 분명해야 합니다. 보통 신자들은 예배를 왜 드립니까? 물으면 은혜 받으려고 드린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배를 통하여 자신이 깨닫기도 하고 마음에 평안함을 얻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영국의 ‘The Times’ 의 보도에 의하면 최소 매주에 한 차례 이상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평균수명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7년이나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흑인들은 14년이나 장수한다는 소식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육신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은혜를 받고 장수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이 깊어지면 가인의 예배같이 됩니다. 인본주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열납 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찬양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 예배를 드리려면 몇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날짜와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자기가 분주하면 즐거운 일이 있으면 그 날은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예배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에 참석하여야 합니다. 주인은 물론입니다. 공 예배에 참석하여야 합니다. 공예배가 무언지 모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기독교 가정이 있었습니다. 주일이 되면 지혜로운 남편이 아내에게 이런 제안을 했답니다. 우리 둘이 다 교회에 갈 수는 없지 않소. 둘 중에 한 사람이 대표로 예배에 참석합시다. 그래서 서로가 교대로 예배에 참석합니다. 가족 대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꿈에 죽어서 천국에 갔더랍니다. 하늘나라 문 앞에 당도했습니다. 문지기가 그러더랍니다. 당신들은 부부지요? 고개를 끄덕 했습니다. 문지기가 말하기를 당신 둘 중에 대표 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가시오. 꿈에서 깬 남편은 그 뒤로 대표 제도가 없어지고 다같이 예배생활을 잘하게 되었답니다. 예배 날짜를 잊지 않고 교회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도 지켜서 늦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다음은 예배를 위한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옷은 단정하게 입고 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정장하고 갈 것입니다. 얼굴도 예쁘게 단장할 것입니다.
셋은 마음과 자세를 분명하게 할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 예배 시작 전에 하나님께 경건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데 핸드폰은 꺼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는데도 그대로 켜고 들어갑니다. 헨드폰은 항상 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어느 분은 화장실에서도 받고 지하철 타고 가면서도 전화하고 스포츠 센터에서 운동하면서도 받기에 휴대폰 말대로 휴대폰하고 다닙니다. 결혼식장에서 핸드폰 소리가 요란하게 들립니다. 사방을 두리 번 거립니다. 왜 그렇게 소리는 크게 해놓았는지 한참 있다가 신랑이 호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들고 여보세요 나 지금 결혼식 중이거든요 잠시 있다가 끝나고 다시 전화하자구요 그럽니다. 얼마 있다가 주례자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 소리가 울립니다. 나 바빠 결혼주례중이야 다음에 만나 알았지. 요즈음 시대풍경입니다. 우리는 예배에 방해되는 모든 장애물을 사전에 제거해야 합니다. 예배의 자세는 정좌 정시 정청이어야 합니다. 바른 자세를 갖고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 들어야 합니다. 관심이 없으면 좁니다. 물론 피곤하면 졸리지요. 졸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이 아닐 겁니다만 목사님의 부친이 예배시간에 맨 앞에 앉아서 졸고 있습니다. 교인들 보기에 민망하여서 아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할아버지가 졸면 깨우라. 그러면 내가 1000원을 줄게 아들이 할아버지 옆에 앉아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졸면 깨우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졸고 있는데 아들이 깨우지 않습니다. 예배 후에 너 왜 할아버지 깨우지 않았니 아들이 하는 말 할아버지가 깨우지 아니하면 2000원 준다고 했거든요. 넷 예배는 생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배 자체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요 자신이 은혜를 받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가 생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찬양하고 영광 돌렸으면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2) 가인의 제사는 피 없는 제사였습니다.
히브리서 9:22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의 제1차 원리는 속죄함 받기 위함입니다. 속죄함은 예수의 보혈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 12:1-7절에 베다니 마을에 마리아가 향유 병을 깨뜨린 것은 주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런 자세가 아닌 형식만 있었습니다. 그는 제단 실패자였습니다. 그것이 가인입니다.
2. 왜 가인입니까? 마음관리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제단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하나님께로부터 열납 받았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마음에 시기와 질투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고의 원인이나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 같이 좋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열납 하지 아니하셨으나 동생이 드린 제물이 열납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라고 생각했으면 같이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기를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 수도사가 리비아의 어느 사막에서 하나님께 합당한 경건 생활을 위하여 금식하며 극기 고행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때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귀들이 그를 시험하려고 음식을 가져 다 놓고 먹으라 해보고 육체적인 욕망을 충동하고 물질로 공포심으로 다 해보아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더랍니다. 마귀들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온갖 방법을 다 짜는데 넘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를 여보시오 당신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되었답니다 라고 말해주니까 그 경건하던 수도사가 금새 얼굴이 창백해져서 금식을 중단하고 고향집으로 가더랍니다. 왜 사람의 마음에 시기심 질투심이 생깁니까? 교만해서 그럽니다. 토인비는 말하기를 경쟁은 발전과 향상을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는 인간생활에 후퇴와 비판과 절망에 빠지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시기심은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잠언 14:30절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라” 고 하였습니다. 시기가 무엇입니까? 다른 이가 성공하고 행복한 것을 보면 마음에 화나는 것을 말합니다. 사무엘상 18장을 보면 왜 사울 왕이 몰락을 가져왔습니까?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을 시기하다가 이후에는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1:18절에 베드로에 대하여 주께서 예언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젊어서는 네게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십니다. 21절에서 요한을 가리키며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 21:22-23) 남과 비교할 때에 시기심이 생깁니다. 시기는 범죄의 원인이 된답니다. 예일대학의 심리학교수 살로비(P. Salovey) 박사는 미국 범죄의 20%가 질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범죄 행위의 암적 요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혼한 부부의 30%가 바로 질투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음관리에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좋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질투심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정의로운 것도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는 분노로 이어집니다.
사람마다 감정이 있습니다. 좋으면 웃습니다. 슬프면 웁니다. 마음에 만족이 없으면 불평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감정의 표현이 정당하고 아름답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되면 같이 좋아하고 웃어주는 사람 슬픈 일을 당했는데 같이 붙잡고 울어주는 사람 얼마나 멋 있습니까? 이와 반대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인데 화를 냅니다. 엄격하게 따지면 자기와 관련도 없는 일인데 분노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딘지 호감이 덜 갑니다. 자기 자신에게 기쁨이 없습니다. 자기 건강에도 유익이 없습니다. 어느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화낸 사람의 숨을 액체질소로 급랭시켜 보았더니 노란색의 독소 액체가 나왔는데 그 독소는 무려 80명의 사람 죽일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최근에 암에 대하여 연구하는 이들의 말을 들으면 암이란 언제부터 발생하는가? 마음에 상처 입은 감정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섭섭한 감정, 억울한 일, 분한 일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고 잠이 오지 않는 사람들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사람에게 정신적인 게 중요합니다. 정신적으로 피곤하면 되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걱정하는 것, 둘은 긴장하는 것, 셋은 화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화가 무엇입니까? 불입니다. 마음에 불이 붙으면 해가 됩니다. 다 태웁니다. 존 헌터(John Hunter) 같은 유명한 심리학자는 화내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노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14:29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분노하지 맙시다. 화가 날 때 어떻게 해야 할 까요?
1) 양보하려고 하고 무시하여야 합니다.
창세기 26:12~29 이삭은 파기 힘든 우물을 팠는데 여러 번 빼앗겼습니다. 그럼에도 대꾸하지 않고 양보해 버렸습니다. 이해득실을 따지고 그럴 수 있느냐 라는 생각을 하면 분노가 더 생깁니다.
2) 달리 대응책을 생각해야 합니다.
황후 에스더는 하만이 자기 동족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습니까? 그는 기도하고 지혜를 짰습니다. 즉시 행동하지 않고 대응책을 합리적으로 강구하였습니다.
3) 자상하게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분노한다고 이일이 잘될 것인가 내게 해가 되지 아니할 것인가? 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추적해 오는 사울을 피하는 다윗은 화나는 대로 행동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만일 다윗이 사울을 죽이는 것은 다윗에게 유익하지 않는 것입니다. 장인을 죽인 존속 살해자요 그를 추종하는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종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왜 분노하고 분을 갚은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부가 화를 내는 일이 있다면 생각해보세요. 서로간에 절대 이익이 없습니다. 화내지 맙시다. 그러면 가인입니다.
4)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른 이가 나에게 화나게 하는 일이 있을 때 잘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좋게 하신 답니다.
5) 기도해야 합니다.
화날 때 마음으로 열을 세라는 것입니다. 열을 세고 기도하세요. 가인은 누구입니까? 분노하다가 사람을 죽인 사람입니다.
3. 왜 가인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도리킬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동생의 제물이 열납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내가 드린 제물은 열납 되지 않을까? 돌이켜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드린 제물을 용서하여 주세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지 못했는데 다음부터는 바른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으면 얼마나 멋있었겠습니까? 그런 자기 과오를 돌이키지 못하고 피해의식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드린 제물이 열납 되지 않았다는 섭섭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돌이키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신은 인간을 세 단계로 측정한답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 신은 그의 과오를 용서하십니다. 청년이 된 뒤에는 그가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측정하신 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신은 그가 참회할 때까지 기다리신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애가입니다. 돌이켰는가 아닌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왜? 가인입니까? 가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예배 실패하는 게 가인입니다. 예배에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같이 솔로몬같이 야곱 같이 제단생활에서 성공합시다.
마음을 바르게 잘 관리하는 지혜자가 됩시다. 마음에 시기와 질투를 몰아냅시다. 그렇지 아니하면 가인입니다. 불행입니다.
돌이킬 줄 아는 여유와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인입니다. 가인이 아닌 아벨 같은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
가인의 분노(2)
창 4장 8~17절 / 임현수목사
여러분, 세계 각 나라의 형무소를 채우고 있는 죄수들의 죄목 가운데 가장 많은 범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살인죄> 입니다. 인류역사를 살펴봐도 살인죄는 모든 범죄 가운데 항상 top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인 집단 살인의 기록을 비롯해서 개인적인 살인까지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입니다. 근래 역사를 간단히 살펴 볼까요?
불과 얼마 전 중공 땅에서만 6,300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소련 땅에서는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6,600만 명이 죽임을 당했으며, 캄보디아에서도 75년 에서 79년 사이에 300만명이 killing field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독일의 나치는 1941-45년 사이에 무려 580만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뿐 입니까? 각 나라마다 마피아라는 범죄 조직을 통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도 헤아리기 힘들 것 입니다. 브라질에서는 하루에 300명 이상이 살인으로 죽어 갑니다. 1년에 120,000명이 죽어 갑니다. 미국에 있는 각 도시별 살인률을 아십니까? 뉴욕과 와싱톤과 사카고에서만 매일 수 십명의 사람들이 살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미국 땅에서 1년에 총 맞아 죽는 사람만 20,000명이 넘습니 다.그리고 총 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의 분노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총 을 쏜 것 입니다.
지금 전쟁의 휴유증을 앓고있는 아프칸과 이라크에서 이슬람의 종파 싸움으로 분노 가운데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발표되지 않고 있습니다. 분노에 가득찬 팔레 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죽인 후 가족들이 오열 하는 모습을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매일 보고 있습니다.중동의 분노….
아프리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노한 민족들의 분쟁으로 인한 끝없는 내전과 전쟁으로 인한 살인은 수 십년 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살륙을 비롯 해서 민족간의 분쟁으로 인한 살인도 엄청납니다.
북한 땅에서 죽어 간 사람들의 숫자도 아직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크게 작게 죽어간 사람들의 죽음의 원인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에서부터 시작 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 하였다>고 말씀 하신 것 입니다. 살인에 대한 이런 예수님의 시각에서 본다면 <내가 누구를 미워한다>는 미움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인의 동기> 일 뿐 아니라 이미 <살인이 시작> 된 것 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런 죄에 대해서 무관한 사람 일까요?
살인범과 나는 백지 한 장의 차이 일수도 있는 것 입니다. 계속되는 오늘 본문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 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왜 이런 끔찍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런 죄를 예방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에 보시면 가인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성경은 <가인이 심히 분 하여>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안색이 변하고 열을 받아 피가 끓고 죄의 소원을 불태우며 자기의 감정을 콘트롤 하지 못하고 있는 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그 감정을 어떻게 콘트롤 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성경은 분노의 감정 자체를 죄라고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라고 분과 죄를 구별하고 있습니 다. 문제는 분노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는 것 입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와 인격이 있느냐 하는 것 입니다. 지혜자는 이렇게 말 합니다.
잠 12:16절은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미련한 자가 분노를 당장에 나타낸다는 말은 걸핏 하면 성낸다는 말입니다.도무지 참을성 없이 그저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화를 벌컥벌컥 내는 사람이 있는데, 성경은 이런 사람을 미련한 사람이라 했습 니다. 스스로 '내가 성을 잘 내는 사람인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하자면, 성 잘 내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에요. 그러면 이 성내는 자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14:17)."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 느니라"(14:29).
야곱 가정의 끔찍한 살인 사건을 기억 하십니까? 자기들의 여동생이 들에 나갔 다가 세겜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 했습니다.그래서 분노에 가득찬 아들들 이 흥분하기 시작 합니다.
그래서 결국 거짓말을 하고 세겜 사람들로 할례를 받게 합니다. 그 후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사람들이 할례로 인해 가장 고통을 많이 받는 제3일 에 세겜성을 엄습하여 하몰과 그 아들 세겜 그리고 성의 모든 남자를 죽입니다. 이처럼 분노는 이성을 잃게 만들어 상대방을 증오하게 되고 그 증오가 결국은 살인을 낳습니다.
시37:8절에서 성경은 권합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압살롬도 자기누이를 강간한 이복 형 암논에 대하여 분노를 품고 양털 깎는 날에 형제들을 대접 하겠다며 거짓으로 초청해 놓고 음흉한 살인 계획을 꾸밉 니다.그리고 암논을 죽이지 않았습니까?(삼하13:23-29) 분노로 온 생각이 사로 잡혀 있을 동안 그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말씀 드린 야곱의 아들들은 끔찍한 살인을 통해 비록 그들의 분노는 풀렸을지 모르나 세겜 사람들의 무서운 보복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수를 금하고 있읍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롬12:19) 고 말씀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수 갚겠다는 생각 자체가 불신앙적 동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의를 실현 한다는 미명 아래 보복 하지만,이것은 결국 다른 보복의 위협성 만을 낳을 뿐 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무고히 해하려는 사울에 대하여 결코 자신이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읍니다. 만일 다윗이 자신의 손으로 사울 왕을 해쳤다면 다윗은 사울 아들들의 복수의 위협아래 늘 전전긍긍하며 사는 생이 되었을 것 입니다.
여러분 중에 억울함을 당하는 분이 있읍니까?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은 성도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실 것입니다.
미국 역사에 보면 <1931년 5월> 미국 뉴욕에서 경찰이 한 유명한 살인범을 체포한 기록이 있었습니다.그 살인범은 크라울리(Crowly)라는 사람 입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이 사람은 지나가다가 어떤 사람이 자기 모자를 건드리면 <왜 기분 나쁘게 내 모자를 건드리고 다니느냐> 고 하면서 총을 쏘았습니다. 또 경찰관이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하면 경찰관을 쏴 죽이고, 그 다음엔 그 경찰관의 옆구리에서 총을 뽑아 다시 확인 사살을 하고,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사람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미국 사람들에게 준 충격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살인하면서도 항상 자기는 언제나 정당하다고 느꼈다는 사실 입니다. 항상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기는 절대로 잘못한 일이 없고 항상 정당하다고 주장 했던 것 입니다.
그는 결국 전기의자에 앉아 <최후의 사형을 받으면서>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내가 오늘 이 지경이 되어서 내 생을 마치는 것은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을 끝까지 합리화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도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술좌석에서 자기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자기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클렉토스>라는 장군을 죽인 사건 때문 이었습니다.그는 자기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 입니다. 저 유명한 잠언의 교훈을 기억 하십니까?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분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분노를 바르게 처리하지 못하는 태도가 문제 이고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한 인격이 문제입니다.
몇년 전 44세 된 고독한 중년 남자가 직장에서 상관에게 야단을 맞고 화가 났 습니다. 그는 그 날 직장 일을 끝내지도 않고 분노의 감정을 처리하지 않고 뛰 쳐 나왔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분노의 불길을 태웠습 니다. 이틑날 아침 그는 권총 세 자루를 가지고 직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14명의 직장 동료들을 무참하게 살해 했습니다. 이것이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오클라호마 시의 우체국에서 일어났던 사건 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한 유명한 문화 평론가는 미국 문화를 가르켜서 <분노하는 문화 >라고 지적 했습니다.요즘의 청소년들이 참을성이 없고 위험하다고 말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즘의 아이들은 18세가 될 때까지 TV나 영화를 통해서 1만 8천 건 이상의 살인 사건을 보면서 자라고 있습니다.그리고 그들은 분노를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 간단한 방법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권총을 사용하는 것 입니다.그래서 요즘의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살인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분노를 살인으로 처리하는 학습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고 계십니까? 분노를 창조적으로 표현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차분히 일기를 쓸 수도 있고, 침착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시편 기자처럼 기도로 표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대화에 미숙합니다. 먼저 터트리고 봅니다. 먼저 큰 소리 치고 보고 먼저 신경질부터 내고 봅니다.터트릴 줄은 알아도 대화에 있어 서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분노의 감정 그 지체가 범죄는 아니지만 이 분노의 감정을 잘못 다룰 때 무서 운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인의 사건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 입니다.
2. 시기심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가인의 경우 동생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고 자기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자 그 시기심으로 분노를 냈던 것입니다.가인이 하나님께도 덤비면서 소리를 지르는 밑바탕에는 일종의 불평과 원망과 항의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왜 하나님은 동생만 사랑하시느냐는 항변 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형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영접하고 잔치를 베푸는 모습을 보고 그는 어떠한 마음을 가졌습니까 ?
눅15: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 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까 ?"
억울함과 더불어서 자기는 누리지 못하는 것을 동생이 누린다는 시기심으로 인해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1604년 영국에서 맨 처음으로 공연된 연극 가운데 <오델로>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베니스의 장군인 아프리카 훅인 오델로는 그 뛰어난 용맹성 때문에 원로원 의원의 딸이며, 천사처럼 아름다운 <데모스데모나>의 사랑을 얻어 결혼 하게 됩니다.그러나 청년 장교이며 그의 부하인 <이야고>는 흑인 어델로에게 질투와 앙심을 품고, 그의 아내를 <부정한 여자>라고 모함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 이야고의 교활한 간계에 넘어간 오델로는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데 의심과 질투를 느껴 아내를 목졸라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이 이야고의 간계인 것을 깨닫고 그는 회한에 못이겨 아내 걑에서 자살해 버린다는 내용 입니다. 질투는 사람의 뼈를 썪게한다는 잠언의 말씀을 기억 하십시오.
그렇게도 유명한 화가였던 레오노르도다빈치의 생애를 보면 그의 젊은 날은 매우 행복했는데. 그의 노년의 생애는 대단히 불행했습니다. 그런데 다빈치의 노년의 불행은 사실 <단순한 하나의 사건> 때문에 시작이 됩니다. 플로랜스의 회당 벽화를 누구의 그림으로 채울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 해 city counsil이 모였는데 우선적으로 다빈치에게 부탁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한 젊은이의 작품을 하나 더 받았는데 그 젊은이의 스케치를 보는 순간 모든 city counsil들은 한 마디로 언어를 잃어 버립니다. 너무나 그림이 압도적 이 었기 때문 입니다. 그들은 다빈치에게 정중한 사과를 하고 새로운 젊은이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선택했다고 합니다.그 순간부터 다빈치는 불행해 진 것 입니다. 그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질투의 영성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서양 속담에도 <내가 실패 할 때 동정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내가 성공 할 때 시기하는 사람은 백 사람쯤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우리가 성령충만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이 시기와 질투와 다툼은 세상적이요,정욕적이요,마귀적 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심지어는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들도 이 질투의 영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 입니까? 그러나 남의 교회가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헐뜯는 것은 성령의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까지도 내 교회라는 소유의식이 있기 때문 입니다. 교회는 누구의 교회 입니까? 주님의 교회 입니다. 그러나 무심코 내 교회라고 생각하는 한 질투의식에서 해방되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 합니다.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 사람이라는 소유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자식도 내 소유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잠간 애게 맡겨 주신 것 뿐 입니다.
소유의식에서 자유하십시오. 그러면 질투와 시기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 반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그 때가 자기의 범죄를 하나님께 자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런 기회를 참회의 순간으로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반항하는 모습으로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의 장에 불행과 재앙이 찾아 왔을 때 어떤 사람은 그 불행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 보려고 하는 겸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이런 사람들에게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 자기성숙, 자기 성찰의 기회로 도약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눈의 실명>을 자기 성숙의 기회로 성화시켜 9,000편의 찬송가를 남겼던 화니크로스비의 생애였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전신마비된 불구의 몸>을 가지고 입으로 그림을 그리며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 을 전하는 죠니 에릭슨의 이야기이며, 그것이 바로 <어린 나이에 중도 실명을 하고 시력 회복 불능>이라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 그래서 불과 2년 사이에 부모 와 누나와 시력을 잃어 버렸지만 오히려 고난을 성숙의 기회로 삼아 와싱톤의 인간 승리 를 이룩한 강영우 박사의 이야기 입니다…그것이 낮은데로 임하소서의 안요한 목사의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 반항하고 형벌을 받게 됩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창 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안식 없는 삶의 방황 이것이 가인이 받은 형벌 이었습니다.그러나 이 순간 우리가 주의 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이것이 가인을 하나님이 포기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섣부른 속단입니다. 아직 하나님이 그를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가인의 삶은 더욱 더 비뚤어지기 시작 했습니다. (14,16절)
하나님이 버리신 것도 아닌데 자기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는 가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피해의식과 강박관념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그래서 주님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창 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그래서 가인은 에덴의 동쪽으로 갑니다. 스스로의 선택입니다.
자기의 죄책을 처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현저한 삶의 증상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하나님을 등지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떠나가고 있는 죄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짜르트를 시기 하다 못해 그를 죽일려는 음모를 꾸미고 나아가서 하나님께 불평하다가 하나님을 저주까지 하고 있는 안테니오 셀리엘이라는 사람의 비극을 기억하십니까?
가인에게 형벌이 내려졌고 그는 유랑하기 시작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하나 주셨습니다.
창 4:15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이것은 형벌의 표시가 아니라 사랑의 표시였고,은혜의 표시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너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너는 아직도 내 사랑의 대상이고,내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인간이다라는 아직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애정과 보호가 끝나지 않았다는 은총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깨달았다면 가인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가인에게는 자기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채찍 속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때립니다.그러나 부모의 채찍은 단순한 형벌만은 아닙니다. 자식들이 만일 부모의 채찍 속에 숨어있는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그들의 삶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그러나 흔히 부모에게 반항을 시작한 자식들이 부모가 자기를 받아주지 않을 것 이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집을 떠나서 도피하여 부모를 만나기를 거절하는 것처럼 꼭 같은 반항의 모습을 우리는 가인에게서 볼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또스또예프스키의 <죄와벌>이 주는 레슨이기도 합니다.
라스꼴리니꼬프라는 젊은 청년은 고리대금하는 노파 한 사람쯤 없어져도 그것은 절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노파를 죽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후회가 시작 됩니다. 그리고 죄책이 생기기 시작 합니다. 그렇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그 순간이 라스꼬리니끄프가 회개 할 수 있는 순간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도 그는 이렇게 생각 합니다.
<아마 이런 감정은 내가 약하기 때문에 그럴거야.내가 좀더 강하고 심장이 튼튼한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 순간에 이런 죄책을 느낄 수가 없지>라고 생각 합니다.
얼마 동안 그는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그가 진정한 참회를 하게 되는 것은 <소냐>라는 소녀를 만나고 그에게서 정말 순수한 사랑을 체험한 순간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 합니다. 그 사랑 앞에 녹아지면서 근 엎드려 땅을 향해서 자기의 죄를 토하기 시작 합니다.
여기서 또스또예프스키는 이 소녀를 통해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입니다. 내가 범죄한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고독하고 답답하고 괴롭고 방황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앞에 나올 수가 있었다면 가인의 삶은 달라졌을 것 입니다.
소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 하던 기도를 기억 하십니까? 이렇게 말 합니다.
<당신의 사랑은 나의 부활이 되었습니다><당신의 사랑은 나의 부활이 되었…
우리들의 삶의 고뇌와 고독,그리고 방황과 갈등, 이 모든 밑바닥에 있는 나의 범죄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나의 범죄를 생각하고 그래서 피할 수 없이 임할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형벌과 저주를 깨닫는 사람이라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 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 삶에 임한 이 하나님의 형벌과 채찍을 바라볼 뿐 아니라 그 형벌과 채찍의 배후에 아직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 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라면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며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앞에 나와 내죄를 자백하고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일어설수 있는 사람이 라면> 그의 삶은 가인의 삶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은 어디를 향해 걷고 있습니까?
아직도 이 죄문제를 끌어안고 방황하며 끝없이 에덴의 동쪽을 향하여 걷고 있는 사람은 아닌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내 삶을 돌이켜 그 사랑 앞에 매달리며 용서를 구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향해 걷고 계신 사람인가요?
가인을 통해 주시는 교훈
창 4장 16~24절 / 지용수목사
아침 식탁에서 아빠와 엄마가 큰 소리로 싸우는 것을 보고 학교에 간 아이가 공부를 잘 하겠습니까? 아내와 대판 싸우고 출근한 남편이 회사 일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가화만사성입니다. 가정이 편안하고 화목해야 온 가족이 자기 일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가정에 화목을, 평안을 넘치게 부어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 개인도 마음이 편하고 안정되어 있어야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자기 일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시기, 분노, 억울함, 섭섭함, 미움으로 꽉 차 있으면 우리가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홧김에 집을 뛰쳐나온 남편들이 교통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또 홧김에 뛰쳐나온 아이들이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주식 시세가 올라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다가 곤두박질치면 불안해집니다. 회사가 잘 되면 편안하다가 부도 직전에 있으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시면 산이 흔들려 바다에 던져지고 바닷물이 육지를 뒤엎는 혼돈 속에서도 평안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공적으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때에도『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요한복음 20:19) 하시며 거듭거듭 평강의 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마음에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로운 평안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가인의 마음은 복잡했습니다.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자신의 예배는 받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 억울함, 동생을 향한 시기와 질투,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이러한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마구 소용돌이치는데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때 일을 하면 후회할 일을 하게 되고 죄를 짓게 되고 큰 사고를 내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6, 27절에『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분을 내면 죄를 짓게 되고 마귀가 들어오게 된다.”
화를 내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또 마귀가 쑥 들어와서 나를 사용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분이 가득할 때는 사람을 만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감정을 추스르며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를 진정시켜야 됩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를 조용히 돌아보았던 것이 아니라 화를 참지 못하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동생 아벨을 유인하여 들판으로 데리고 가서 쳐 죽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일이 잘 되고 남보다 성공항 위치에 있으면 조심해야 됩니다. 시샘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동료도, 형제마저도 여러분을 시샘할 수 있습니다.
한 노처녀가 있었습니다. 자기는 결혼도 못하고 있는데 좋은 신랑을 만나 좋은 집에서 살고 있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들이 백일이 되었으니 놀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그 친구가 너무나 행복하게, 깨가 쏟아지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시기심과 질투심이 불타올랐습니다. 친구가 부엌에 차를 가지러 간 사이 누워있는 아기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끓어올랐습니다. 아기를 죽이려 하는 순간 친구가 차를 가지고 와서 그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의 마음을 솔직하게 기록한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따라 합시다.
“친구를 조심하자.”
내가 잘 되면 못 견디는 친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나를 시기하는 사람이 “등산가자.”라고 할 때 함께 가서는 안 됩니다. 어떤 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마귀를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벨은 조심하지 않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물론 그의 육신이 조금 일찍 흙이 된 것뿐이고 그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라 하늘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일찍 죽어서 그 부모는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120살까지 장수하면서 끝까지 잘 되기를 바랍니다.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사람에게 당하는 일 없이 깃발 날리며 살다가 천당으로 이사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까지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하는 일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괜히 하나님께 역정을 부리고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다 자기 탓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은 그의 예물이 믿음의 예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까워하면서 억지로 바친 것이었고 그의 생활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으시면 먼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는데, 가인은 “왜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제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까?”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무언가 마음이 편치 못하면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펴도 잘못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때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창세기 22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번 미국 집회 때 저를 숙소까지 차로 태워주신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장로님의 아들이 스탠포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모 회사에서 한 달에 만 삼천 불(우리 돈으로 천삼백만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엘리트인 그가 입사한 지 2년 만에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목회자가 되려고 풀러 신학교에 입학을 했답니다. 그때 장로님이 “앞길이 창창한 네가 왜 그것을 접고 하필이면 목사가 되려 하느냐?”라고 하시며 통곡을 하셨답니다. 그러나 나중에 회개를 했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영화를 누릴 아들인데 목사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니 통곡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으니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하나님, 이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시험에 합격하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삭도 살았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화를 내고 싶을 때 먼저 회개해야 되고 회개해도 죄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아!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구나!’하고 그 때를 잘 통과해서 아브라함처럼 큰 축복 속에 나아가게 되시기 바랍니다.
가인은 동생을 쳐 죽여 놓고도 뉘우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뭐, 하나님이 내가 아벨 죽인 것을 아시겠어?’라고 하면서 뻔뻔하게, 뻔뻔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죄를 짓고도 강퍅하여 회개하지 않고 뻔뻔하게 삽니다.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이 사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죄 짓는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 보시겠나? 나 한 사람이 죄 짓는 것에 하나님께서 관심이나 가지시겠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간섭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앉았다가 일어서는지, 어느 장소에 누웠다가 일어나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가인,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뜨끔했지만,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 내가 내 아우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내 동생 아벨을 지키는 목자입니까?”
여러분, 내가 편안하게 산다고 형님이나 동생이나 누님이 어떻게 사는지를 잊고 산다면 그 사람은 형제가 아닙니다. 내 누님이, 동생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며 도와주어야 아름다운 형제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밀어주어야 형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놈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너 자신이 잘 알지 않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내게 호소하고 있다. 네 손으로 흘린 네 동생 아벨의 피를 땅이 입을 벌려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제는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다. 땅이 너를 배척할 것이다. 너는 이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선고할 때는 검사나 변호사의 말을 들어보고 판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니 검사도 변호사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고등법원도 대법원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판결이 끝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선고를 내리시는 바로 그 시간에 죄벌의 짐이 가인을 짓누르니 가인은 천근 만근 같은 짐으로 휘청휘청합니다.
노동판에서 흙이나 벽돌을 지고 옮기는 것도 짐이고, 아내와 가족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것도 무거운 짐이고, 학생이 입시 때문에 놀지 못하고 공부하는 것도 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짐은 그래도 견딜 만합니다.
그러나 죄의 짐은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죄에 대해 심판의 하나님께서 내리신 죄벌의 짐은 영혼을 짓누르니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덜덜 떨며 하나님께 고합니다.
“내가 견딜 수 없나이다. 내 죄의 짐이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나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제 주께서 나를 지면에서 쫓아내시니 나는 있을 곳이 없어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만나는 자들이 나를 죽일 것입니다.”
아벨의 피를 받은 땅이 그를 배척하니 그가 쉴 곳이 없습니다. 하늘이 그를 저주하니 그는 하늘을 보아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전에는 그에게 웃어주던 산과 들의 나무들도 이제는 웃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은혜롭고 의롭게 살 때는 새도 나를 보고 노래하는 것 같고, 꽃도 나를 보고 웃는 것 같고, 하늘도 나를 보고 미소 짓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죄를 지으면 온 세상이 나를 저주하는 것 같으니 피곤에 지쳐 쉬고 싶어도 쉴 곳이 없어서 방황하는 방랑자가 되는 것입니다. 날개에 힘이 빠지고 기진해서 어딘가에 앉고 싶은데 바다 한복판에 있어 어찌할 수 없는 가련한 새처럼 가인이 바로 그런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는 마음 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일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은 ‘아니, 아담과 이브가 가인과 아벨 두 아들만 낳았는데 만날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족보가 아니라 구속사를 담은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쓰시는 데 필요한 인물만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낳은 수많은 자녀들 중에서 가인과 아벨 그리고 130살에 낳은 셋의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27~28)
따라 합시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이 세상이 사람으로 가득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남자 나이가 50, 60살이 되면 손자를 봅니다. 80살이 되면 손자의 아들을 봅니다. 100살이 되면 손자의 아들의 아들을 봅니다. 120살이 되면 손자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을 봅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내들이 서로 아기를 많이 낳으려고 경쟁했듯이, 아담의 아들들과 손자들도 서로 아이를 많이 낳으려고 경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과 이브가 낳은 자손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우리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것을 사람들이 알면 자기를 그냥 두지 않고 죽일 것 같아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캄캄해지고 자신이 미워지며 사람들과도 단절되고 자연과도 막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짐을 지고 두려워 떠는 가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렇지 않다. 너를 죽이는 자는 칠 배로 벌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너를 죽이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가인이 살기는 살지만, 죄의 짐을 지고 고통 가운데 살다가 바위와 돌이 물에 가라앉듯이 지옥으로 가라앉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겉보기에는 신사숙녀로 살지만 ‘내가 인간인가, 동물인가?’하며 영혼의 짐, 죄벌의 짐으로 마음은 무거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수로, 교사로, 전문인으로, 국회의원으로 살면서도 양심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가인과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큰 죄, 작은 죄를 짓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모든 사람이 집중해서 들어야 할 좋은 소식이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하늘에서 큰 나팔을 불고 땅에서 큰 북과 징을 치며 황금 종을 울려 온 세상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집중시켜서 전해야 할 소식이 하늘에서부터 왔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독생자 외아들 예수그리스도, 성령으로 처녀 몸에 잉태되어 나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려 그 보배 피를 쏟아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모든 죄의 짐, 죄벌의 짐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온 우주가 박수쳐 줄, 온 세계 만민이 기뻐 뛸 굉장한 소식이 바로 이 죄 사함의 소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근로자의 벽돌이나 흙의 짐,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의 짐, 학생에게 매여 있는 공부의 짐은 본인이 싫으면 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짐, 죄벌의 짐은 자기 스스로도 벗을 수 없고, 부모나 친구가 벗겨 줄 수도 없고, 억만 금을 치러도 벗겨지지 않습니다.
죄의 짐, 죄벌의 짐은 오직 우리 하나님께서 벗겨 주셔야만 벗겨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와 회개할 때 그 죄 짐을 벗겨 주십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들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1서 1:7)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이사야 1: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1서 1:9)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편 32:3)
그러나 시편 32편 5절에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편 32:5)
우리에게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지는 원죄가 있고, 또 우리 스스로 짓는 죄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추하고 악한 죄가 많아도 예수님 앞에 나아와 “제가 잘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는 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습니다. 하루도 걸리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잠시에 용서 받고 구원 받았듯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는 순간 우리의 죄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께 큰 박수를 올려드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과도, 그 용서의 내용도 기록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몇 월 며칠에 지은 어떤 죄를 내가 용서했다.”라고 기록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따라 합시다.
“죄의 기록이 없다.”
우리가 충성한 기록은 있습니다. 우리가 드린 헌금과 찬양대원으로, 교사로 충성한 기록은 있어도 우리가 지은 죄의 기록은 없습니다.
「너희 죄 흉악하나 기억하니 하시네」
예레미야 31장 34절에『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미가서 7장 19절에도『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겨 버리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소판으로 시작된 부부싸움이 대개 중판이 되고, 중판이 대판으로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 어제도 그랬고 전에도 그랬잖아? 도대체 몇 번째야?”
“당신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잘했어?”
이렇게 과거 때문에 대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과를 묻지 않으십니다. 용서하신 죄는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용서하신 죄는 모르십니다.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가 일을 많이 할 때는 콩이나 다른 곡식을 넣어서 소죽을 구수하게 끓여서 줍니다. 저희 아버님도 소가 일을 많이 할 때는 저희에게도 잘 주시지 않는 귀한 콩을 넣고 소죽을 끓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소가 그 맛있는 소죽을 먹을 때 닭들이 와서 소죽에 들어 있는 콩을 다 쪼아 먹습니다. 그런데도 소는 닭을 쫓지 않고 그냥 먹습니다. 소가 닭을 사랑해서 그런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소는 닭이 먹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용서 받은 죄는 소 닭 보듯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뻔뻔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우리는 뻔뻔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뻔뻔할 수 있는 것은 용서 받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더 고마운 것은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용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앞으로 절대 죄를 짓지 않을 사람이 계십니까? 사람이 천당 갈 때까지는 계속 죄를 짓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매일 씻어도 몸에 때가 끼듯이 말입니다.
이번 예수제자아카데미 세미나 때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성자같이 귀한 분인 김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룩한 교인을 섬기는 목사인 제가 아직도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서, 아직도 의로운 사람이 아니어서 그저 ‘주님, 제 손을 잡아 주세요!’라고 할 뿐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라도 사람입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도 의로운 생활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로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가 “목사님이나 잘 하세요.”라는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는 목사님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도 제가 전하는 말씀대로 다 살지 못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갈 때까지 때때로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그러나 그 죄까지도 주님께서 다 맡아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로마서 8장 1,2절에『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습니다.
「해방 되었네 해방 되었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도 때때로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꾸중을 받고, 이미 받았던 축복을 빼앗기고, 또 받을 축복을 받지 못하는 벌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가 정죄 받아 지옥에 갈 죄는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우리는 늘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님을 찬송하고 살아야 합니다.
더더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는 말씀은 죄 짐, 죄벌의 짐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다 감당하지 못할 일을 만났을 때 “오, 주님!”하고 그 짐도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한두 권이나 열 권 정도는 쉽게 들지만 천 권은 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남편 노릇, 아내 노릇, 자식 노릇을 할 때나 직장생활을 할 때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너무 힘겨워 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려라』(시편 55:22)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편 37:5)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편 68:19)
따라 합시다.
“날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져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날마다 기쁨으로 여러분과 저의 짐을 져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 손자 준이가 어젯밤에 무엇을 하다가 “할아버지 아빠! 준이는 못 하겠어. 도와 줘.”라고 해서 제가 도와주었습니다. 준이가 도와달라고 할 때 제가 “귀찮다, 이놈아!”라고 하지 않습니다. 준이를 도와주는 것이 제 기쁨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짐을 맡기면 주님께서는 귀찮다 하지 않으시고 기쁨으로 그것을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는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없는 아이디어가 하나님께는 다 있습니다.
로마가 유대를 지배할 때 한 유대인이 로마인을 살해했습니다. 로마 당국은 그 유대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로마인을 죽이면 유대인도 죽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 죄인 대신 한 유대인 남자를 잡아다가 죽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을 죽일 때 조롱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목숨이 너희가 믿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하니 기회를 주겠다. 항아리 안에 ‘사형’이라는 글이 적혀 있는 쪽지와 ‘사형 면제’라는 글이 적혀 있는 쪽지 두 개가 있는데 ‘사형’이라고 적힌 쪽지를 집으면 사형을 당하고 ‘사형 면제’라고 적힌 쪽지를 집으면 사형이 면제된다.”
사실은 두 개의 쪽지에 다 ‘사형’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유대인 남자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반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는 항아리에서 쪽지 하나를 집자마자 바로 입에 넣고 삼켜버렸습니다. 로마 집행관이 소리쳤습니다.
“당신, 왜 그것을 먹어? 먹으면 어떻게 해?”
“걱정 마십시오. 남은 쪽지를 보시면 제가 집은 쪽지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은 쪽지를 펴보니 사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가 살았다고 합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 양 옆에는 험산준령이 버티고 있어 길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홍해에 길을 내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길을 내어주십니다. 우리의 길도, 우리의 짐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다 담당해 주십니다.
서울의 한 장로님은 사업이 잘 되니 교만해져서 교회 문을 들어오고 나갈 때 거드름을 피우고 교인들을 은근히 멸시했습니다. 헌금도, 충성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와서 집과 자동차는 물론 냉장고와 TV, 심지어 장판까지 다 벗겨서 가지고 갔습니다.
깃발 날릴 때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 가졌다고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부천의 한 지하 단칸방에 사글세로 들어가 살게 된 장로님은 얼마나 추운지 교회 생각이 났습니다. 교회에 들어서니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내가 조금 잘 산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까불다 망했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울고 또 울면서 회개하다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제가 계속 잘 나갔으면 완전히 망가졌을 텐데, 이 정도로 망해서 새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벗었네」하고 막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출발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망할 사람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면 삽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할 때 여러분의 마음도 편안해지고 하나님께서 잘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큰 은혜를 받고, 죄 사함의 복을 받고, 지옥과 사망과 마귀로부터 자유를 얻고,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다시는 죄 짓지 말라. 다시는 간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 받고 또 같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죄는 또 다시 짓지 않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금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땅에,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잘 살지 못하면 사람들한테 짓밟히고 멸시받고 손가락질 받는 교인이 됩니다.
“저 사람이 ○○교회 집사래. 아이고…….”
유대에서는 방탕하여 교회에서 쫓겨나갔다가 새 사람이 될 각오를 하고 다시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교회 문 앞에 눕힙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나는 맛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세요.”라는 말을 하게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누워 있으면 교인 몇 백 명이 그를 넘어 지나갑니다. 그 행사가 끝나야 그 사람이 다시 교회 식구가 됩니다.
우리 모두는 짓밟히는 교인이 되지 말고 어디에 가도 대접을 받는 존귀한, 소금 같은 성도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또 마태복음 5장 14절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등불을 켜서 말통으로 덮어두면 무엇합니까? 등불은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우리 때문에 그곳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것이 용서 받은 사람답게 사는 길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위해 늘 마음을 쓰고 어머니께서 좋아하시고 필요로 하는 것을 다 해 드리고 싶은 것은 어머니께서 어머니의 모든 것을 제게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무리 갚아도 다 갚을 수 없지만 어머니를 위해 힘이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구와 우주를 주시고, 교회를 주시고, 예수님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기만 하고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철들지 않은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내 귀한 시간, 내 첫 이삭 같은 귀한 것을 주님께 바치고 충성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한 후 첫 번째로 모신 손님이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었습니다. 빌리 목사님은 이 세상의 보배입니다. 저는 맑고 깨끗하고 경건한 빌리 목사님의 사진을 보면서 매일 저를 돌아봅니다. 저도 빌리 목사님처럼 귀한 목사가 되고 싶어서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빌리 그레함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 세계의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그때 빌리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을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돈을 벌고 무엇 때문에 자식을 기르고 무엇 때문에 삽니까? 결국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게 그토록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저는 조금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이것만은 하고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아들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
피영민목사(강남중앙교회) / 창세기 4:19~26
서론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제사는 안 받고 아벨 제사만 받으시자 아벨을 시기해서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아 밭을 갈아도 땅이 제대로 수확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땅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 저주받고 가인이 범죄했을 때 또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방랑자(vagabond)가 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와 독일어, 불어도 다 똑같습니다. 저는 프랑스의 샹송보다는 이탈리아의 칸초네를 더 좋아합니다. 칸초네 가수 중에서 니꼴라 디 바리(Nicola Di Bari)라는 유명한 가수가 있는데 ‘Vagabondo’라는 곡을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우리나라의 박인희라는 여자가수가 ‘방랑자’라고 번역해서 불렀습니다. 제가 가사를 잠깐 불러드리겠습니다.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 방랑자여 방랑자여’ 왜 이런 노래를 사람들이 공감하느냐? 우리가 방랑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인생을 방랑자처럼 살아갑니다. 무엇 때문에 살아가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살인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리대로 하면 사형을 당해야 됩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창 9:6). 살인자는 사람을 향해서 범죄하는 것 같아도 근본적으로는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을 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판사들도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을 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왜 죽지 않았느냐? 창세기 4장에는 아직까지 국가의 사법제도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사사롭게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무리 범죄를 했더라도 개인이 사사롭게 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형의 집행은 국가 사법기관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무슨 표를 어떻게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벨이 죽고 가인은 혼자 남았을 것인데 누가 자신을 죽일까봐 걱정했을까?’ 창세기 5장 3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을 때 130세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 사건이 있기 전에도 아담과 하와는 부지런히 자식을 낳았을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60년을 살아도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았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많이 낳았겠습니까? 성경은 중요한 인물 위주로 기록하기 때문에 가인과 아벨 이후에도 얼마든지 다른 자녀를 낳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방랑자가 되어 살면서도 계속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다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계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인의 계보와는 다른 계보를 허락하셨습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5~26). 셋의 계보는 경건한 후손들을 이어나갔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나오는 에녹도 역시 셋의 후손입니다. 에녹은 365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죽음을 보지 않고 곧바로 하늘로 올라간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아 역시 셋의 후손입니다. 셋의 계보로부터 에녹, 노아, 다윗,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계보였고 셋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실 경건한 계보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두 가지 계보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 아니면 셋의 계보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계보에 속해 계십니까?
Ⅰ.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의 삶
첫째,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은 혼인제도를 부패시켰습니다. 라멕은 가인까지 포함해서 가인의 6대손입니다. 라멕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아내 둘을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중혼제도를 처음 실시하여 결혼제도를 부패시킨 것입니다. 라멕은 왜 아내를 둘씩이나 취했느냐? 그 이유는 정욕과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여자를 볼 때 자식을 낳는 도구로 생각하고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목적으로 결혼한 것입니다. 한 여자가 낳으면 10명 낳을 것을 두 여자가 낳으면 20명 낳을 것 아니냐며 자식을 두 배로 얻기 위해서 아내 둘을 취한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 20~25절에서 하나님이 혼인제도를 정하실 때 일부일처제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만나 한 몸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는 서로 이용해먹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런 관계로 한 결혼은 파탄이 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상호 협력해야하는 관계입니다. 동반자이고 협력자인 것입니다.
남자는 자녀가 100명이라면 사랑을 1%씩 주는 것이 아니라 100%씩 100명에게 모두 줍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내가 2명이면 2명 모두에게 100%씩 가는 것이 아닙니다. 50%씩 나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는 100%씩 다 가는데 왜 아내한테는 사랑이 나뉘느냐?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우리 각자를 인구수대로 나눠서 사랑하시느냐? 그러지 않으시고 우리 각자를 100% 사랑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중혼을 절대 금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구약성경을 보면 경건한 사람들이 불경건한 사람들을 따라 악을 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권하여 여종 하갈을 취했고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그 때문에 지금도 중동지방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야곱은 아내가 넷이었고 다윗은 아내 일곱과 첩 셋을 거느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후궁이 칠백명에 첩 삼백명 도합 천명을 거느렸습니다. 만약 교인이 천명이라면 이름만 외우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천명이면 이름을 어떻게 다 외우겠습니까? 이처럼 중혼제도는 언제나 질투와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와 여종 하갈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서 집안에 문제가 생겼고 야곱도 아내들끼리 서로 질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1장을 보면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가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자식을 잘 낳고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자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혔고 한나가 기도하여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경건한 사람들도 가인의 계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따라서 중혼을 많이 했습니다. 성경과 어긋나는 일반적인 관습을 따라서 중혼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남들이 다 한다고 해도 성경과 어긋나는 관습은 따르지 말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인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의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이 머리가 좋아서 갖가지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라멕에게는 아다와 씰라 두 아내가 있었는데 아다는 두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야발과 유발이었습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목축업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한 곳에서 건물을 지어놓고 육축을 치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면서 장막에 거했느냐? 그 이유는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곳에서 풀이 충분히 나지 않기 때문에 풀을 다 먹고 나면 다른 곳을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집을 짓고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발의 아우 유발은 수금과 퉁소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음악인과 예술인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라멕의 첫째 아내 아다에게서 난 야발과 유발이 각각 목축업과 음악인의 선조가 되었고 라멕의 둘째 아내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은 기계공업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동철로 각종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도 창조성(ingenuity)이 있습니다. 경건성(piety)은 없어도 창조성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은혜(Common Grace)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도록 하시는 것은 특별은혜인데 가인의 후손들은 특별은혜는 못 받아도 일반은혜는 받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불신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같이 누리며 살아야 됩니다. 아프면 불신자 의사한테 가서 진료를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배고프면 불신자가 운영하는 음식점에도 가서 먹어야 됩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만든 음악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그린 그림을 볼 수도 있는 것이고 학교에 가서 불신자 선생님에게 배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두에게 일반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일반은혜를 주셨지만 가인의 후손들은 이것을 악용되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 4:23~24). 이것은 라멕이 부른 노래입니다. 성경에서 인류 최초로 나온 노래인데 그 내용이 무엇이냐면 소년이 자신을 때렸기 때문에 그 소년을 자신의 아들 두발가인이 만든 날카로운 기계로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흉악한 내용의 노래가 인간이 최초로 부른 노래가 된 것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이렇게 악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두발가인이 만든 날카로운 기계도 올바르게 써야 되는데 그것으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음악과 기계 모두 악용한 것입니다. 사람이 원자력이라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자원을 만들어냈지 않았습니까? 원자력을 발전소를 잘 이용하면 엄청난 전기를 생산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으로 폭탄을 만들어 대량 살상무기로 사용한 것입니다. 또한 의술의 발달도 사람들을 유혹하여 장기를 적출하는데 악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도 가정을 이루고 문화도 발전시키며 살아가지만 결국 그런 것들을 모두 악용하는 것입니다.
Ⅱ. 셋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의 삶
가인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번성하여 온 세상이 악해질 것 같아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셋을 주십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 4:25).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을 끊으려고 온갖 시도를 다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끊으려고 노아의 홍수 이전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부패시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와 여덟 식구를 의로운 자손으로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왕 바로는 갓 태어난 이스라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여서 이스라엘의 후손이 끊어지게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모세를 살려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본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출애굽기 18장 11절에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출 18:11).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십니다. 예수님의 계보를 끊으려는 사단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단보다 훨씬 크고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남왕국 유다의 왕 가운데 7번째 왕이 아합의 딸 아달랴입니다. 아달랴는 아주 악한 여자입니다. 아버지는 아합이고 엄마가 이세벨인데 부모보다 더 악한 여자였습니다. 아달랴는 바알 숭배자였는데 여호와 섬기는 것을 완전히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을 모두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린 요아스를 살려두셨습니다. 요아스는 그의 고모였던 여호세바와 고모부이면서 당시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의 손에서 자랐고 요아스가 7살이 되던 해 여호야다가 혁명을 일으켜서 아달랴를 쫓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 12:20).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 유다 백성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페르시아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라는 자가 모르드개를 미워해서 모르드개가 성문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 자기한테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만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모두 몰살시키기 위해서 날짜를 잡았는데 하만은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조카였고 직접 딸처럼 키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에스더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가서 악한 하만이 자기 민족을 몰살시키려고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아하수에로 왕이 진노하여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준비했던 나무에 도리어 하만을 매달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셋의 후손 편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아무리 잘 살고 문화를 발전시켜도 하나님은 믿음의 자손들 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을 때 동방에서 박사 세 사람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옵니다. 그리고 헤롯 왕에게 찾아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봅니다. 이 말을 들은 헤롯 왕이 서기관들을 불러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어보자 서기관들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미가서에 기록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헤롯 왕은 동방박사들을 보내면서 예수님을 발견하면 자기에게도 말해달라고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꿈에서 헤롯 왕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러자 헤롯 왕은 자신이 왕인데 또 무슨 왕이 나느냐며 베들레헴 근처의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모두 죽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어 피하게 하셨습니다.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마 2:13). 요셉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헤롯 왕이 죽고 나사렛으로 간 것입니다. 메시아를 죽이려는 사단의 음모는 예수님의 탄생 순간까지 계속되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사단보다 한발 앞서서 역사하셨습니다.
결론
이 세상의 가인의 후손들이 아무리 번영하고 발전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믿음의 후손, 셋의 후손들의 편이 되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신명기 32장 35~36절은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확신인데 개역성경의 번역이 어려워서 제가 다시 번역을 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하는 것이다. 내가 내 백성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때가 되면 그 원수들은 실족할 것이다. 그들의 환난 날이 가까우니 그들이 당할 운명이 속히 임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나니 자기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자기 백성들이 무력해지고 종이든 자유인이든 남지 않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개입하실 것이다."
이 세상을 보면 불신자들과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성공하고 이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을 운명인 것입니다. 반면에 셋의 후손들은 세상에서 핍박도 당하고 시험에 들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이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개입하셔서 도와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보니까 공적인 예배가 셋의 후손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6). 셋의 후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주일은 안식일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일에 하나님을 마땅히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지신 분들은 교회를 옮겨서는 안 됩니다. 현재 직분을 가지신 분들은 이사했다고 해서 교회를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셋의 계보에 속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셋이라고 확실히 대답해야 됩니다. 우물쭈물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고 셋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도 문화와 부유와 쾌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내를 둘씩 거느리고 자식도 많이 낳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계보와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믿음과 경건을 갖고 예배하는 셋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때로는 어려울 수 있고 좌절할 수도 있으며 낙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꺼져가는 심지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불을 피워주시고 상한 갈대 같을 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붙들어 주셔서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