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경제학 교수였던 남편(고 심현성 마르티노)이 1977년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그녀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한 달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남편은 반신 불수가 됐고, 수발은 24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녀는 일찌감치 촉망 받는 시인이었지만, 시는 남편의 약값도, 셋이나 되는 아이들의 과자 값 벌이도 안됐다. 결국 양복천을 팔기 위해 보따리장수에 나섰다. 정신을 차릴 즈음, 이번 에는 시어머니가 쓰러져 꼬박 9년을 ‘앉은뱅이’로 살다 아흔에 세상을 떠났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잔혹한 운명은 자신마저 내버려 두지 않아그녀 역시 유방암을 이겨내야 했다. 혹자가 겪었더라도 ‘얘깃 거리’가 될 만큼 가혹한 운명이다. 그런데 이런 지옥 같은 삶의 주인공이 신달자 시인 (엘리사벳. 64세. 명지 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늘 세련되고 화사하며, 매력적인 눈웃음을 짓는 시인의 이야기라고 누군들 짐작이나 할까. 신달자 시인이 ‘대학 교수’, ‘한국문단의 대표 여류작가’라는 화려함 뒤에 꼭꼭 감추어놨던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저자 따르면 이 에세이는 ‘ 대학 정년퇴임 마지막 해를 앞두고 펴낸 책’이다. 남편이 타계한 이듬해인 2001년에 이미 써뒀으나, 치부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아 출판 결정을 수백 번은 번복했단다. 그러나 자신 같은 삶을 살았던 독자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싶어 출간하게 됐다. 에세이는 그녀가 딸처럼 여기는 제자 ‘희수’에게 과거를 술회하는 형식으로 ‘소설 같은’ 삶의 편린들을 44개장과 13개의 시편에 담았다. 시인이 피를 토하듯 쏟아내는 인생사를 보면 우선은 작가에게 그러한 삶의 고난이 있었음에 놀라고,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에서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온가족 집단자살’을 생각하고, ‘남편의 심장을 쏘기 위해 소리 없는 총’을 구하고 다녔으며, ‘시어머니를 너무 미워해 여름 밤 벼락이 치면 벼락 맞을까봐 나가지를 못했다’는 악다구니를 해 댈까. 그녀는 당시의 수난을 한 마디로 함축했다.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죽었고, 그는 아팠지만 살아있었다.’ 시인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것은 신앙이었다.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하염없이 거닐다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언제나 성당이었다. 그녀는 십자가상을 바라보며 ‘주여, 주여’ 울부짖곤 했고, 곧 바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남편은, 결국 ‘나 죽거든 결혼하지 마’ 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시인은 남편이 참 복되게 떠났다고, 스스로도 지나고 보니 고통스러웠던 일보다 잘 견뎌낸일만 남더라고 했다. 시인은 이제 홀로 남아 시를 쓴다. 이제는 ‘다 흘러간 옛이야기’가 됐고, 더 이상 세상에 진 ‘빚’도 없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그 남자 때문에 콱 혀 깨물고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다시금 아내이고 싶다.’고 고백한다. 신명나게 도마질을 하고 수다를 떨면서 ‘여보! 여보!’ 그렇게 자꾸 남편을 부르며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그에게 맛보라고 권하고 싶단다. 시인에게 남은 삶은 더 이상 고통도 아픔도 아니다. 세상에는 절제절명으로 불행한 일이 없다는 진리도 깨쳤다. 그녀는 절망의 늪에서 건져 올린 희망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느님이 나의 게으른 습관을 잘 아셔서 나를 부지런하게 하기 위해 무거운 일거리를 주신 것인지 몰라. (중략) 그래서 나는 열심히 살았고 열정을 잃지 않았고, 무너진 산에 깔려 있으면서도 사랑을 믿었고, 내일을 믿었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축복을 받았고, 딸들을 얻었으며, 무엇이 가족 사랑인지 알았고, 어머니는 강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내게 영원히 싸우고 사랑할 것은 삶이며 아름다운 일상생활이 중요하다는것을 알았다. 2020년 경자년 새해 내일부터 설명절입니다. 설명절엔 여러가지 음식준비며 먼길 오고가느라 바쁘실거고,사시면서 참을수없을정도로 힘들기도 할때가 있을것입니다. 위에서 제시한 글처럼 모든것 믿음으로 이겨내 화목하게 지내시고 평강의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설명절 새해를 맞이하여 마음의 선한 소망도 다 이루시고 항상 건강하시고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한해가 되시길 기원하며 성경말씀처럼 참을수없는 것까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며 감싸주는 소중한 가정에도 온갖 신령한 만복이 깃들길빕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3서2장) 출처 : 가톨릭 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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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가고 있다.
세상은 날 죽으라 하는가.
얼마나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고통이 찾게 하고
고통이 매달리게 하고
고통이 참회하게 하니
고통이 날 이끌고 있었음을...
어쩜 본래의 소통 방식은 고통일지도
인간이 무뎌져 바보가 된지라..
고통이 본래로 이끌고
고통이 본래로 가는 최고의 빠른길임을...
그리고 이 모든것의 기획자는
본래, 나임을...
신타님 감사합니다.
저도 꼬북님 수치에 관한 글이 너무 멋져 제가 즐겨다니는 카페에 링크하기도 했답니다.
고통은 신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방편인 점은 맞습니다.
그러나 꼬북님께서 쓰신 글에서처럼 수치마저도 받아들이게 되면 더 이상 수치가 아니듯이
고통도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면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것이 되고 말죠.
고통도 수치도 말입니다.
그저 그런 세상에서 우리 함께 기쁘고 자유롭게 살아가요. . .
꼬북님!
맞네요~
요즘에야 조금씩 알아갑니다
고통속에서
나의 수치를 보고 참회하면
그 참회뒤에 감사함이
그 감사속에서 행복이 오는 걸...
이제 예전처럼 고통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속에서 소소한 감사도 느껴가며 그런 내가 기특해 웃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그속에 담긴 본래의 가르침을 사랑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 하답니다.
하지만 아직은 깨어있는 시간보다 휩쓸린 시간이 더 많습니다.
고통이 축복임을
수치가 축복임을
마음들이 축복임을
이제 쪼~금 알아간답니다^^
@꼬북 꼬북님의 여정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