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나만의 관점을 형성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유유상종이어서 친구 혹은 동료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내지만 나와 다른 사람과는 멀어지거나 애매한 사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60이 넘은 지금 지나온 삶을 반추해 보면 저 자신이 그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쩌다 나는 누군가를 왜 그리도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어른이 되었을까요?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왜 동료를 적으로,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나이가 들면서 아주 좁고 작은 창문들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의 념(念)이 듭니다.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하였습니다. 그 유래는 이러합니다. 유럽의 한 박물관에 사지가 멀쩡한 젊은 여성 한 분이 앉은뱅이걸음으로 작품을 감상합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큐레이터가 묻지요. "왜 당신은 사지가 멀쩡하면서 앉은걸음으로 작품을 보고 있나요?" 그때 여성은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유치원 교사입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작품을 바라보면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서요."
같은 그림을 보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감동은 다릅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생각나는 장면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린 자기 경험 가치관 신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역사적으로 사건이 일어난 것은 같지만 기록하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되고 달리 해석됩니다. 즉 역사는 관점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군맹무상(群盲撫象)이란 성어가 있습니다. 한 무리의 시각장애인이 코끼리를 처음 만납니다. 그들은 촉각을 통하여 코끼리의 생김새를 인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를 만진 시각장애인은 코끼리는 튜브처럼 생겼다고 주장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처럼 생겼다고 주장하고 배를 만진 사람은 벽처럼 생겼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주장하는 다툼에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해력이 더 깊어지고 차이를 이해하여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데 아집과 고집에 빠져 자신만을 주장하는 꼰대가 되어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꼰대스러움을 지적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할 일입니다.
나 때는 말이야~~ 이런 말을 줄이고 주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꼰대는 사회적으로 용인받기 힘든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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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복> 님의 글입니다.
아이 교육에 극성(?)이던 학부모가 생각납니다. "이번 방학에 서울대 과외 선생을 붙였어요."
그 학생은 성적이 거의 끄트머리에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학부모에게 말했죠. 잘못된 처사다. 아이보다 조금 성적이 나은 친구를 붙여주는게 더 나을 것이다. 서울대생이면 아이가 모르는 것에 대해 "아니, 이건 너무 당연한거 아냐? 이걸 어떻게 몰라" 할 것이고, 아이는 그런 자기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과외교사를 신회하지 못 할 것이고....
내 나이에 걸맞는 눈높이는 과연 어떤 걸까? |
첫댓글 어느새 조용히 가을이 다가왔습니다. 어둠을 뚫고 밤새 달려온 새벽배송 마냥... 그렇게 가을은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새벽배송에는 주로 출입공동현관 비번을 알려달라는 요청이 있는데, 비번도, 동호수 조차도 안 알려줬는데 도둑같이 다가온 가을이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매일 인터넷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다음에 접속하고, 선생님 카페도 들어와 글을 읽으면서... 오늘은 어떤 말씀을 전해 주실까? 하는 호기심과 설램으로 매일 새로운 날을 맞이 합니다.
알지 못하는 낮섬이 주는 설레임 속에 새날을 맞이하고도 저녁이 되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 그렇게 보내고 나면,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우리를 맞습니다. 오늘 아침도 역시 가을 날 아침입니다
그러게나. 벌써 가을이 성큼 왔네. 눈이 보배란 말도 있고, 퍼팅은 눈이 8할이라 했는데, 눈 수술 후 안정될 때가지 6개월, 1년이 걸릴 거라는 얘길 듣긴 했네만, 영 불편해. 자판이 익숙하기에 그나마 두드리지, 다 보면서 두드리려면 눈이 꽤 피곤할 뻔 했네. 그레서 이곳에 들어오기가 게을러지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