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선물세트 / 단편소설
추석이 이십 일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부터 추석 선물세트를 포장할 참이다. 출근길에 아내를 조수석에 태워 출발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와인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부둣가의 보세창고에 보관 중이던 프랑스산 와인 3만6천병 중에 우선 1만2천병만 통관하여 운송해 온 거였다.
나는 차에서 내려 화물차 기사로부터 수입필증 사본을 건네받았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지게차를 불렀다. 지게차가 도착할 동안 수량을 확인 차 화물차의 짐칸에 올랐다. 모두 합쳐 14팔레트이고, 팔레트마다 12병 들이 종이박스가 일정한 수량으로 재어져 있다. 13팔레트는 각각 72박스씩이고, 나머지 1팔레트는 64박스이다, 모두 1천 박스이고,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이 각각 반반씩이다. 병당 용량은 750㎖이다. 수입필증에 기록된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지게차가 도착하여 와인을 창고에 부리고 있을 때, 저마다 배송 승합차를 모는 네 명의 배송직원이 속속 도착했다. 오 분쯤 지나자, 경리 직원인 노처녀 미스 황의 흰색 경차가 도착했고, 뒤미처 영업 과장들의 아이보리색 지프 두 대가 도착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배송직원들이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듯 서로 앞다퉈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들 중 선임 직원에게 선물세트를 포장할 아르바이트(이하 알바생) 신청자 25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용지를 건네면서 세관 앞 전철역에 나가서 그들을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자, 서로 인사들 하지. 이 분은 엊그제 잠깐 언급했던 손달자 씨야. 오늘부터 와인 선물세트 포장이 끝날 때까지 포장 작업을 지휘 감독할 거야.”
내가 직원들에게 손달자 씨를 소개하자 미스 황은 덤덤한 표정이었고, 두 과장은 사뭇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엊그제 사무실에 간편 책상을 들여놓으면서 주위에 와인 선물세트 포장 경험이 풍부한 젊은 여성이 있는데, 그 분이 열흘쯤 사용할 거라고 했었다. 아마도 두 과장은 젊은 여성이라는 표현에 제 또래인 삼십대 초반의 여성일거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나는 직원들이 부담감을 가질까봐 손달자 씨가 아내라는 걸 숨긴 채 소개했다.
나는 이태 전에 경기도 K시의 외곽 지역에서 오십 평 남짓한 조립식 창고 건물을 보증금 없이 전액 월세로 얻은 후 곧장 주류 수입면허를 냈다. 건물 한쪽 끝에 열다섯 평 남짓 2층을 올려 사무실을 만들었다. 현재 수입하고 있는 주류는 프랑스산 와인만 열 품목이고, 판매처로는 40개의 점포를 지닌 C-마트와 수도권에 있는 주류 도매점 일곱 군데이다. 거래처별 매출 비율은 C-마트가 80%쯤 되고, 도매점이 20%쯤 된다. 그러니까 C-마트의 매출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알바생들을 데리러 갔던 배송직원들이 돌아왔다. 출근한 알바생은 모두 스무네 명이었다. 한 명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선임 배송직원한테서 알바 신청자의 명부를 건네받아 나오지 않은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를 붉은 사인펜으로 그었다. 명부를 아내에게 건네주면서 별도로 출근부를 만들어서 관리하라고 했다.
배송직원들과 알바생들을 데리고 창고로 내려왔다. 알바생 스무네 명을 12명씩 두 개 조로 나누어 작업대를 사이에 두고 6명씩 서로 마주보고 서게 했다. 레드와 화이트 와인을 각각 한 박스씩 작업대 위에 꺼내놓은 뒤, 원산지 및 맛과 향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작업대 위에 나무로 된 선물세트 케이스를 펼쳐놓고 천천히 포장 시범을 보였다.
조별로 배송직원을 둘씩 붙였다. 이는 무거운 와인 박스를 계속해서 작업대 위로 들어 올려서 꺼내야 하거니와, 또한 포장이 끝난 선물세트를 카트에 실고 안쪽 가장자리로 옮겨가서 높이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배송 직원들은 다들 두 차례씩 경험을 한 터라, 자신들의 소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내가 출근부 파일을 손에 들고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바투 다가왔다. 그녀는 알바생들에게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손달자 입니다. 오늘부터 선물세트 포장이 끝날 때까지 여러분과 함께 포장 작업을 할 겁니다. 모쪼록 작업이 끝날 때까지 시종 웃음을 잃지 않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셨으면 해요. 그럼, 출석 체크 들어갑니다. 제가 이름을 부르면 손울 들어 주세요. 구아름, 김슬기, 김영선, 나혜경, 박미숙….”
나는 아내가 출석을 체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내는 미혼일 때, 선물세트 포장 작업 감독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당시 아내와 나는 주류 수입업체 무역 파트에서 함께 근무했다. 그때 아내는 명절 때마다 와인 선물세트를 포장하는 알바생들을 곧잘 관리했다.
C-마트와 거래를 튼 이후로 지난 설까지 두 번의 선물세트를 준비하면서 선임 배송직원에게 포장 작업 감독을 맡겼었는데, 그는 내가 생각했던 만큼 일을 원만하게 처리해 내지 못했다. 하루하루 실적이 계획에 못 미쳤을 뿐더러, 취급 부주의로 와인을 깨뜨리는 횟수도 잦았다. 배송 직원들은 두 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포장 작업 전반을 맡기기에는 미덥지가 않았다.
나는 와인 선물세트 포장 작업을 아내에게 내맡긴 채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족한 통관 자금 때문에 심사가 편치 않았다. 내일 통관할 자금은 그럭저럭 준비가 되었지만, 다음 주에 통관할 자금이 부족했다. 현재 대부업체와 상담중이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몇 해 전부터 명절에 와인 선물세트 판매량이 부쩍 늘었다. 소비자 가격과 선물세트 케이스의 재질과 모양을 잘 선택하면 명절 한철의 매출이 6개월 매출액을 앞서는 와인 수입업체들이 수두룩했다. 나도 금번 추석 명절에는 매출을 올려보려는 심산으로 전에 없이 무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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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모든 것을 남김없이 할퀸 후 삼켜버리는 환영에 사로잡힌 채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와인 선물세트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첫댓글 작품은 올리지 않은 채 만날 구경만 하고 사라지자니 일방 손님 같은 느낌이 들어 요렇듯 재탕합니다. 요즘 작품을 전혀 못 만들다보니 이렇듯 재탕, 좀 더 지난 후에는 삼탕까지 할 지도.... 꺼2꺼2
축하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한이발작가님~~^^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전에도 한 벗 읽은 적이 있지만 구성이나 문체 모두 흠잡을데가 없군요. 그런데 지금 농촌에 계시는 줄 아는데 소재는 어디에서 얻으셨는지요. 손달자 씨도 실망이 클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대성하십시오.
@행전 박영환 칭찮이 과하신 듯하지만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여기고 더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행전 선생님.
소재는 십여 년 전, 와인 및 맥주를 수입하여 프랑스계 대형 마트인 '까르푸'와 거래를 할 때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에 약간의 허구를 가미해서 그려보았어요. 중심소재랄 수 있는 와인이 전체적인 서사를 이끌어 가는데 큰 역할을 햇어요. '손달자'는 허구 혹은 가공의 인물이지만 마음 고생이 많겠죠. 하하.
십여 년 전에 수입 주류 사업을 접고 지금은 매일매일 쇠똥을 치우거니와 양파와 벼논에 물을 대느라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하.
@박말이 어르신?
감사합니다.
@행전 박영환 역시 그런 경험이 있군요. 문학상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계속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행전 박영환 넵.
아녀요.. ㅎㅎㅎ. 선생님 마음 조금은 알거같아요. 저도 가끔 글을 잃어버릴때가 있지요. 그러면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거나
흰둥이보러 고당리길을 갑니다. 글을 쓴다는 건 어려운 작업이지요. 선생님 넘 재미있으세요..
화이팅!!
고맙습니다, 서문순 작가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청도문학신문에서 소설을 읽는 재미도 괜찮은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별빛 하나 선생님!
ㅎㅎ 저번에 제가 예견 하였 잔습니까? 최우수상 작품될 것이라고.....ㅎㅎ
또 다시 읽어 보아도 여운이 길게 남네요
늣게나마 축하 축하 ~합니다. 건필 하시고 대성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샛별 선생님!
반드시 소모적인 글이 아닌 생산적인 글만을 쓰겠습니다.
아, 그예 조회수가 천을....
삭제해야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조이다 못해 엄청시리 아파 온다.
할!
정말 조회를 하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슬몃 장난을 치는 걸까?
나는 이 글 앞뒤에 있는 조회수 1000이하의 글들에게 미안해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다. 으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