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열전 208)
연극을 화두로 세상의 번민을 쫓다
- 연극배우 고 이정허(1952 - 2022)
글_ 김문홍 극작가, 연극평론가
하늘 개인 날, 홀연히 사라지다
2022년 10월 27일.
어찌 보면 나고 죽는 것은 하늘의 뜬구름처럼 덧없다. 극단 《하늘개인날》의 창단 주역이면서 정신적 지주였던 배우 이정허 스님(속명 이용재)은 하늘 개인 날에 홀연히 사라졌다. 법랍 41세, 속세 나이로는 만 70세였다. 자신이 폐암에 걸렸단 사실을 연극 바닥엔 쉬쉬 알리지 않은 채 투병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에 홀연히 왔던 그곳으로 다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잠깐 일었다 흩어지는 뜬구름 같은 짧은 시간이었다.
이정허는 연극배우이면서 승려 시인이었다. 연극 작업이 없을 때는 심산유곡 산사에서 불도를 닦다가, 작품 속 역할을 맡으면 속세로 내려와 또다른 허구적 인생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이는 이중생활을 한 셈이다. 승려 생활 초기에는 불도에 전념하지 않는 그의 파격을 동료 스님들은 안타까워했지만, 연극이 또 하나의 화두인 것을 알고부터는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사와의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극 그 자체는 진실하다. 승려들은 특정 화두를 들고 잡념을 쫓아내지만, 나는 연극을 화두로 삼고 세상의 번민을 쫓아낸다. 연극을 통해 순수를 얻을 수 있다.”
연극배우 이정허의 삶은 직선적인 그의 평소 성격처럼 단순 명쾌했다. 출가하게 된 것이나 연극배우가 된 것 역시 즉흥적이었다. 군 제대 후 직장생활을 하던 중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해 범어사 금강암에서 묵게 되었다. 그러다 벽파 스님를 스승으로 1981년에 출가했다. 그러던 중 1986년 가마골 소극장 창단 공연의 <푸가>, <히바쿠사>에 연이어 출연하게 되면서 연극계에 입문했다. 딱히 연극과 관련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가 문예창작과로 전과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장편 에세이 『떠도는 문서 나의 역마살』 (1987), 그리고 이후에 낸 몇 권의 시집 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그의 이력이다. 여하튼 그는 승려 생활을 하면서 연극에 투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함께 가마골 소극장에서 연극을 함께 했던 연출가 이성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마골 창단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끝내는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다 질펀하게 술을 마신 적이 있었죠. 며칠 뒤 소극장에 갔다가 정허 스님이 흐느끼고 있는 것을 우연히 뵜어요. 아마 승려 신분으로 속세에서 질펀하게 즐긴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불쑥 솟구쳤던 모양이에요.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나까지 울컥해지더군요.”
그의 심사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산사에서 면벽 수도하며 부처의 진리를 깨달아야 할 초입 승려가 연극판에 뛰어들었다는 것 자체만 해도 파계나 다름없다. 거기다 욕망의 들끓음 속에서 술 마시고 춤까지 추며 질펀하게 놀았으나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가 흘린 눈물은 일종의 회개였다.
1987년 무렵이었다. 그는 극단 《부산 레퍼토리 시스템》 창단 10주년 기념 공연인 <내마>에 객원 배우로 출연하게 되었다. 함께 객원 배우로 출연했던 권철과 연습을 끝내고 돌아가던 중 온천천 포장마차에 들러 소줏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이정허는 불콰한 얼굴로 “우리, 배우들만을 위한 극단 하나 만들면 어떨까?”하고 엉뚱한 제안을 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88년에 이정허, 권철, 최성락 등이 의기투합하여 극단 《하늘개인날》을 창단하게 되면서, 배우 이정허의 탄탄대로가 펼쳐지게 된다.
연기의 정점을 찍으며 승승장구하다
배우 이정허는 극단 창단의 주역이면서 정신적 지주이며 후원자로 자처했다. 그를 믿고 따르던 보살들의 후원은 든든한 스폰서 역할을 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금정산 자락의 포교당에 극단 사무실 겸 연습장이 마련되면서 연출가 곽종필, 무대 디자이너 김인덕과 김유리라, 배우 김우진, 의사 원경식 등이 극단에 합류했다. 창해에 뜬 돛단배가 순풍을 만난 격이었다. 올려지는 무대마다 승승장구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동의보감」(1993), 「우리들의 광시곡」(1995), 「느낌, 극락 같은」(1999), 「이」(2000) 등의 레퍼토리는 극단이 부산연극사에 정점을 찍고, 그리고 극단의 이름을 전국에 널리 알리게 하는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이 작품들은 부산연극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아 전국연극제에 부산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동의보감」은 이정허의 직선적인 성격과 작가적 고집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은성의 장편소설 「동의보감」은 베스트셀러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던 때였다. 배우 이정허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자신의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희곡으로 각색했다. 그런데 원작 소설은 허준이 중심인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구조였지만, 희곡은 허준이 서사를 진행하고는 있지만 주인공은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정허는 유의태가 자신의 적역일 것을 내정한 가운데 그를 중심인물로 설정해 각색한 것이다. 그런데 연출자인 손기룡과 의견 대립이 생겼다. 동의 보감하면 허준일 정도로 모두들 알고 있는데 유의태가 웬 말이냐며 버텼고, 각색자인 이정허는 ‘스승 없는 제자가 어디 있느냐’며 한치도 물러섬이 없었다는 것이다.
작가 이정허의 작가적 상상력은 적중했다. 부산연극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것은 물론 유의태 역할을 단단하게 소화한 이정허는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전국연극제에 참가해서도 이정허는 이 작품으로 연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처럼 그는 위기나 중대 국면에서는 쾌도난마의 직선적인 성격과 고집으로 일관했다.자신의 원칙과 기준에 어긋나면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물러섬이 없었다. 이런 직선적인 성격과 고집은 어떤 때는 추진력이 되었지만, 극단의 운영에 있어서는 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 때문에 연출과 배우의 두 중심인물이 퇴진과 재기용을 번갈아 교체되면서 극단의 운영과 공연이 한때 차질을 빚으며 쇠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의 그러한 성정은 승려 생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인간관계가 소원하니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정허의 고집과 결단이 원인의 한 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았다. 그런데 그가 홀연히 사라졌으니 극단의 든든한 허리가 끊어진 셈이다. 극단 쇠락은 롤러코스터를 탄 거나 마찬가지라는 주위의 걱정 또한 당연한 생각이니, 배우 이정허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적막강산이 되니 그가 그립다
극단이 쇠락의 길을 걷자 배우 이정허를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뜸해졌다, 그는 평소에도 자신이 속해 있는 극단이 아니고서는 선뜻 출연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활동 터전이 되는 극단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는 연극의 정도를 걷지 않는 단원들에게는 서릿발 같은 죽비를 내려치다가도, 어려움이 있거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일에는 큰 보탬을 주기도 했다. 단원들의 해외여행에도 큰돈을 쾌척했고, 개인 여행에도 노잣돈에 보태라고 얼마씩을 쥐어 주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추상 같은 서릿발의 꾸짖음, 직선적인 성정과 고집, 그러면서도 따스한 속내를 지닌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연극인에게 그가 툭, 한 마디 던지는 짧은 말도 두고두고 곱씹어 보면 따스함괴 진정의 온기가 여백처럼 다가왔다.
극단 《하늘개인날》은 전국연극제에서 연거푸 두 번이나 최우수작품상인 대통령상을 거머쥐어 부산연극의 저력을 알렸다. 그렇게 극단이 작품성의 정점을 찍은 것은 탁월한 연출력과 배우들의 열정도 있었지만, 극단의 중심추로 무게중심을 잡아준 이정허의 말없는 카리스마가 크게 작용했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작품 선택이나 배우의 역할 배정, 든든한 재정적 지원, 그리고 단단한 울타리로 외풍을 막아준 이정허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그의 승려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범어사 금강암, 두 번의 포교당 전전, 그리고 대구 백림사 은거 등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부산연극인들에게 자신의 발병을 알리지 않았던 것도 연극인들의 심사를 어지럽히지 않으려는 그의 잔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배우 이정허의 마지막 작품은 필자의 작품인 「그분이 오신다」(2012)였을 것으로 기억이 된다. 작품 속의 역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참 쓸쓸하게 보였다. 작품 속에서도, 작품 밖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적막하게 느껴졌다. 그가 이승을 떠난 지 벌써 6개월째 접어든다. 그가 없는 부산연극은 조금 적막하다는 생각이 든다. 연극배우로서의 그는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와 수필을 쓰는 문학인으로, 부처의 진리를 깨우치는 승려로 살았으니 배우로서도 그는 어느 것 하나 빠짐이 없는 내공이 탄탄한 배우였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동백이 툭, 툭 온몸으로 몸져눕는 계절이다. 배우 이정허의 부재를 떠올리니 몸져누운 동백꽃이 더 처연하게 느껴진다. 동백꽃 떨어진 모습이 꼭 그의 죽음처럼 덧없이 여겨진다. 그가 떠난 부산연극판은 적막강산이다. 툭툭 지는 동백꽃을 바라보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어딘가 세상 한 귀퉁이도 푸슬푸슬 무너지고 있을 것이다. 빨갛게 드러누운 동백꽃의 모습에서 연극에의 열정이 뜨거웠던 배우 이정허를 떠올려 본다. 그는 비록 떠났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형형한 기억으로 살아 있다. 그가 남긴 따스한 속내도 적막한 연극판을 덥히는 온기가 될 것이다. 배우이며 승려였던 이정허의 기억은 언제나 잔향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잘 가시게 정허 스님. 나무관세음보살.
(계간『예술부산』2023년 5월호)
첫댓글 이정허 선생님.
연극영화과 다니다 문창과로 전과한 경력부터
다채롭군요.
스님이면서 연극을 한 인물.
선생님의 조명으로 이정허 연극배우가
빛을 발합니다.
결기있는 배우가
연극무대에 더 많이 나타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