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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엡 2장1-10)
○ 은혜에 대한 구원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1:3, 엡3:10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롬3:27, 고전1:29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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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efore 그때에(1-3)
신앙을 갖게 되면 삶과 죽음의 정의가 바뀝니다.
전에는 육신이 살아 있는 것을 살았다 하고, 육신에서 호흡이 멈추는 것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 없이 산 것을 죽었다고 하고,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게 된 것을 살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1절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라고 말씀하며, 5절에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지금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회사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하며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언은 그 중에 산 사람이 있고, 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록 호흡은 하나 죽은 존재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몇 개의 기준들이 있습니다.
2절에 말씀대로 ‘이 세상의 풍속을 좇는 자’는 죽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며 따르는 가치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물질 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 최고입니다.
경쟁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등이 최고며 주위 사람들은 경쟁의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쾌락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만 행복하면 그만입니다.
윤리도 사랑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 삶을 이끌어 가는 축이 이런 세상의 풍속이라면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신앙은 마치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 풍속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살아 있는 고기는 그 물을 거슬러 상류로, 상류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죽어 있는 것은 그대로 그 물결에 쓸려 내려가고 맙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가는 자’
또한 죽은 사람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우리 운명의 배후에서 마치 우리 운명을 주관하는 자처럼 보이는 존재를 말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우상이나 귀신을 두려워했습니다. 요즘도 사람들은 꿈이나 운명, 사주팔자나 어떤 귀신같은 존재를 두려워합니다. 장례식에서는 특히 더합니다. 예전에는 사진도 못 찍게 하고 귀신이 먹었다고 해서 음식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과학과 합리주의가 발달하면서 이런 초월적 세력이나 미신이 꺼림칙하기는 하나 두려워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대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자리는 이제는 돈, 곧 맘몬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현대는 돈이 신이 된 사회입니다. 주님도 산상수훈 말씀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재물을 신과 같은 위치로 인정하였습니다. 참으로 돈은 신입니다. 이 부적만 가지고 있으면 든든합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찬양한 시편 23편이 등장할 정도입니다.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안락한 침실에 눕게 하시고
달콤한 술집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호주머니에 돈이 있음이라.
돈의 권세와 보호가 나를 안전케 하는도다.
돈이 원수를 만들고 나를 괴롭게 하니
내 머리에는 항상 돈 생각으로 근심의 잔이 넘치는 도다.
나의 평생에 욕심과 정욕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돈을 믿고 살다가 죽으리로다.
성경은 이렇듯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가는 자의 삶은 죽은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도 죽은 사람입니다.
자기 욕심대로 살고 자기 욕망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자기 욕심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은데 결과는 허망합니다. 허전해서 더 많은 욕심으로 채우려하지만 더 허전해지고 맙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던 자라고 할 때 저는 영화 ‘시민 케인’의 주인공이 생각납니다.
‘시민 케인’은 1950년 오손 웰즈 감독의 작품으로 지금도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 영화사의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시민 케인은 시민답지 않게 대 부호로 살았습니다. 제너두라는 궁전을 방불케 하는 대저택에서 살았으며 그 평생 자기가 욕심하는 바는 다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첫 시작이 인상적인데 이 시민 케인이 마지막 죽는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가 마지막 죽으면서 한 말은 ‘로즈베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영화는 이 로즈베리가 누구인가를 추적하는 스토리로 전개됩니다. 그러면서 한 기자가 시민 케인의 일생을 더듬게 됩니다. 시민 케인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지냈지만 많은 돈을 유산으로 상속받았습니다. 자신만만했고 돈도 있었던 시민 케인은 사업, 정치, 사랑, 대저택, 보물 수집으로 자기의 목적한 바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 나갑니다. 무한한 권력도 가지고 있어서 무명 배우를 일류 스타로 만들고, 그를 위해 대형 오페라 홀을 지어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의 부러움과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시민 케인의 모습은 항상 고독하고 외로운 모습입니다. 이 기자는 시민 케인의 일생을 추적하지만 끝내 이 로즈베리의 정체를 밝히지 못합니다.
로즈베리의 정체는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관객들에게만 알 수 있도록 크로즈업 되어 보여집니다. 로즈베리는 어떤 대단한 인물이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민 케인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눈썰매의 이름이었습니다. 너무나 평범했기에 기자는 밝힐 수가 없었지요. 그렇지만 시민 케인에게서 이 눈썰매라는 것은 자기가 다시 돌아가고픈 영혼의 향수와 같은 물건이었습니다. 그의 욕망이 그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지만, 그의 행복은 오히려 작은 추억 속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육체의 욕심대로 사는 인생을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이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본질상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심판을 말합니다.
심판은 무엇인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심판입니다.
인생은 본질상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행복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시민 케인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케인이 죽는 장면부터 영화가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삶이 없습니다.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상되는 과거만 있을 뿐입니다.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습니다. 오직 과거만 있고 죽음만이 지배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현재가 천국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서 ‘앉히시니’는 시제가 단순과거형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회적 사건입니다. 결국 예수 믿는 그 시점부터 천국은 현재형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미래에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를 모신 바로 이곳이 천국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천국을 영원히 죽지 않는 곳이라고 정의합니다. 잘못된 정의 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지옥도 영원히 죽지 않는 곳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것은 예수가 있느냐와 없느냐입니다.
T.S. 엘리어트의 <황무지>라는 시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쿠마라는 곳에 점을 잘 치는 무녀가 있었습니다. 너무 점을 잘 쳐 신들이 상급으로 이 무녀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정합니다. 이 무녀는 영원히 살고 싶다고 자기 소원을 말합니다. 이 소원이 이루어져 이 무녀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녀가 소원을 잘 못 말했습니다. 영원히 살되 아름답게 살게 해달라고 간구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녀는 죽지는 않지만 늙어가면서 몸이 자꾸 말라들어 작아집니다. 결국은 조롱에 갇힐 정도로 작아집니다. 사람들이 점을 잘 치면서도 죽지도 않으니까 신기해서 이 무녀를 조롱박에 가두고 조롱합니다. 그 무녀를 놀리던 아이들이 무녀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너의 소원이 무어이냐고 묻자 무녀는 “죽고 싶어” 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영원히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히 살되 아름답게 살아야 하며,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보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게 무어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있고 함께 할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를 모시고 계십니까?
그러면 만족하십시오.
문제는 보물을 내 안에 모시고도 그 가치를 모른다는 점입니다.
마치 건강이 그런 것 같습니다.
건강은 잃고 난 연후에야 그 소중함을 압니다.
자기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고, 화장실에 제 발로 걸어가서 볼 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위대해 보입니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행복은 내 안에 있습니다.
2. After 그러나(4-7)
죽었던 우리를 살렸던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4절에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였고, ‘그 큰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7절에서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 하였습니다.
그냥 풍성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풍성한 은혜입니다. 왜 이런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그 대가가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죽이고 우리가 받은 은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다른 종교에 비해 쉽습니다. 모든 종교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일정한 대가가 요구됩니다. 회교는 선행의 종교입니다. 평생 동안 성지순례를 한 번은 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 심판받을 때에는 선행과 악행의 양을 저울에 달아 선행이 양이 많아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무하마드 알리는 회교를 믿었는데 항상 라이터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 죄를 짓거나 악한 생각이 나면 라이터 불을 켜서 손에 대었다고 합니다. 지옥불은 이렇게 뜨겁다는 것을 체험하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힌두교나 불교는 고행을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평생 동안 손을 들고 다니거나 나무 위에서 땅으로 한 발자국도 내려오지 않는 수도사도 있습니다. 장자불와라고 하여 불교에서는 10년 동안 눕지도 않는 스님도 있고, 30년 동안 면벽한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깨달음을 얻어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너무 쉽습니다. 말 한마디면 됩니다. 8절에 나온 대로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내가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과 구주로 고백하면 구원 받습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이해 하지 못하니까 8절과 9절에서 구원 받는 방법을 거듭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인하여’ 은혜는 값없이 주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우리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는 그 의미가 분명하지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은 값없이 받지요.
9절에서는 또 이렇게 설명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다’
8절과 9절은 철두철미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는 은혜란 뜻입니다.
인간은 항상 내가(I)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도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I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I 종교가 아니라 J, 곧 Jesus 종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습니다. 5절과 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는 비록 믿음이라는 간단한 고백으로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힘든 길이었습니다.
왜? 자기 아들을 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좋고 쉬운 것이지만 결코 값싼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비싸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지극히 풍성한 은혜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면 세상은 난리가 날 것입니다. 방송국 기자가 찾아들고 과학자가 조사를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런 대단한 사건이 바로 지금 우리 심령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에 감격해 하고 있습니까?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은혜로 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 그 크신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가? 그것은 다시 1절에서 3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이 죽은 존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본 사람입니다. 죽기 살기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한번이라도 몸부림을 쳤던 사람, 그 결과 죄 안 짓고 살기 정말 힘들군요 하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이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의 귀중함을 알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감히 죄를 지어라. 그리고 보다 더 씩씩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라”
이 말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은혜는 죄의 고통을 맛보았던 자만이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것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나 예수님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단순한 차원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싸구려 취급하게 만듭니다.
괴테가 쓴 『파우스트』에 보면 일생 동안 이런 저런 노력을 한 끝에 파우스트가 독백처럼 말하는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하는 고백하고,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이 책 몇 권 읽고 “인생은 알 수 없구나!” 하는 고백이 그 무게가 같겠습니까?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을 깨달은 종교개혁자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확신을 갖기까지 루터는 로마의 스칼라산타 성당에 있는 28개의 빌라도 법정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고통과 고민 끝에 얻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고백하고, 성경공부하다 교리적으로 깨달은 고백하고 그 무게가 같겠습니까?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그 의미를 깊이 있게 묵상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날로 새롭습니다. 해가 갈수록 예수의 은혜가 더 깊어져야 합니다. 은혜를 가볍게 받으니까 쉽게 흔들리고 인격의 변화가 없습니다. 날로 새롭고, 매년 깊어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표준 새번역은 10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출발입니다. 예수 믿는 사건은 마치 길가에 구르는 돌 하나를 그 집으로 들여온 것과 같습니다. 이제 그 조각가가 정으로 쪼고 끌로 다듬으면서 작품을 만들어 갑니다.
대기만성이라고 큰 그릇은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자신입니다. 일이 아닙니다. 일 때문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일이란 것은 우리를 빚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일에 성공했습니까?
성공한 일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을 통해서 자신감과 능력이 훨씬 자란 여러분이 하나님은 훨씬 더 자랑스럽습니다.
일에 실패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성공입니다. 실패를 통해서 우리 인격이 더 성숙했으니까요? 그러니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일을 통해서 아름다운 걸작으로 빚어 가십니다.
여기 작품으로 번역된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포이에마’입니다. 연상되는 단어가 없습니까? 네 ‘포우임(poem)’입니다. 시란 뜻입니다. 우리 노애리 자매가 자서전 만드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을 뒤돌아보면 시처럼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이든 무명한 사람이든 각각의 인생은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시입니다. 일은 포기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라는 작품은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물질적 손해는 내 자신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십시오. 마지막 날 하나님께 보여 드릴 작품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향하여 이런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시의 몇 행을 써내려가고 있습니까? 고난의 시기입니까? 캄캄한 동굴입니까? 아니면 클라이막스입니까?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인생이라는 대서사시가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출 처| 이종철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