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는 물놀이를 좋아한다. 딸과 사위는 손자를 데리고 수영장이나 계곡물이나 아니면 분수라도 찾아가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물놀이를 한 것으로 안다. 제 작은 목욕통에서 텀벙거리며 노는 어린 손녀도 물론 물을 좋아한다. 칭얼대다가도 목욕을 시키면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물장구를 친다.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손자와 손녀와 여행 한번 다녀오자고 딸은 말했다. 풀빌라에 가잔다. 가평 축령산 기슭이란다. 친구부부들과 축령산에 오른 적은 있었다.
대성리를 지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길을 달려간다. 가평에 산이 많은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강원도 산골 못지 않다. 더 놀라운 것은 미로 같은 산길을 가는 동안 도로 옆에 위치한 풀빌라들이다.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풀빌라 주인은 무얼 먹고 살까 궁금해진다. 얼마나 많은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모여들까도 궁금해진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을 것이다. 삼십여 분 산길을 달리다가 오른쪽으로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간다. 앞쪽으로 겹겹이 에워싼 산 능선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첩첩산중이다. 날씨가 꾸물거리는 데다가 계곡에서 올라오는 물안개 때문에 몽환적인 느낌이다.
풀빌라는 풀(pool)과 빌라가 합쳐진 합성어다. 수영장을 실내와 실외에 갖춘 빌라라는 말이다. 겹겹이 에워싼 산 능선들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실외수영장이 있다. 평일인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아니다. 밤이 되니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기구들이 수영장 주변에 즐비하다. 실내에도 거대한 놀이터와 다양한 장난감들이 준비되어 있다. 방이 세 개 화장실이 세 개, 주방 그리고 실내 수영장이 있다. 여러 가족이 와도 충분할 공간이다. 우리가 아이들을 기를 때는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편리하고 넓은 공간이다.
일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실내수영장부터 들어간다. 손자와 사위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고 손녀는 튜브에 앉아 발로 물장구를 치고 있다. 물이 따뜻하다. 따뜻한 물을 사용하는데 칠만냥을 더 냈단다. 칠만냥? 아깝다. 여름인데 찬물에서 놀면 되지 유난스럽다고 생각을 하지만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는다. 딸네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돈을 쓰는 방식에 이러쿵저러쿵 끼어들 일은 아니다. 우리 인생이 있고 저희 인생이 있다고 본다. 아끼는 게 최우선이었던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짜장면을 먹으러 가거나 김밥을 싸서 주변의 명소로 소풍 가거나 가까운 계곡에 가서 물장구를 쳤다. 지금 아이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으나 그것으로도 만족하였다.
새로운 장소에 서먹서먹해 하던 손녀가 주방 장난감 그릇들을 가지고 제법 잘 논다. 손자는 트렘블린에서 뛰거나 병원과 경찰과 소방서 등 다양한 놀이기구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 하필이면 손녀 몸에서 열이 났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제 오빠가 구내염으로 서너날 고생을 하더니, 구내염이 옮은 것이다. 열이 나고 입안에 물집이 생기는 병으로 전염병이다. 해열제를 먹이는 방법 말고는 뾰족한 대책이 없는 병이다. 먹는 것이 힘들고 짜증이 심해진다.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어린 것 몸뚱이가 뜨끈뜨끈하다. 가엾다. 잘 이겨내라고 응원을 보내본다. 손녀는 평소에 몸에서 뿜어져 에너지가 보통을 넘었다. 잘 이겨낼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바로 그런 갑작스럽게 마주친 고통과 싸워 이겨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닌가.
주방이 넓고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전기 그릴이 설치되어 있다. 아이가 둘이니 밖에서 먹는 것보다는 집이 편하다. 저녁을 준비해서 가져갔다. 딸아이는 햇반과 국을 나는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부재료들을 준비했다. 사위는 고기를 도맡아 구웠다. 모두 모두 함께여서 모두 모두 건강해서 감사함의 건배를 하는데 손자도 컵에 물을 따라 함께 건배했다. 감개무량하다. 손자도 못 보고 죽는 거 아니냐고 농담반 진담 반 우스갯 소리를 여러번 했었다. 지금은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 손자가 고기를 커다란 집게로 집어 냠냠 먹는 모습에 오래도록 눈이 간다. 딸아이는 아들 먹여주랴 남편 먹여주랴 제 입에 고기 넣는 일을 잊은 듯 하다. 그런 딸이 측은해서 한 입 고기쌈을 주었더니, 대뜸 사위에게 먹여 보란다. 아차! 싶다. 딸은 보이는데 고기 굽느라 애쓰는 사위를 보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방문에 또 작은 문을 만들어놓아 아이들이 드나들기 수월하게 해 놓았다. 손자가 들락날락하며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불러댄다. 숨바꼭질하자고 난리다. 우리보고 저쪽에 숨으라고 손가락질까지 해준다. 화장실로 들어가 숨으라고 끌고 간다. 살금살금 찾아다니는 모양새를 숨어서 바라보는 재미가 쫄깃하다. 발꿈치를 들고 살살 찾아다닌다. 눈이라도 마주쳐 찾았다 싶으면 장난스런 웃음꽃이 팍팍 피어난다. 우리가 보이지 않으면 할머니 어딨어? 묻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큰소리로 짧게 대답한다. 요기! 우리도 아이가 되어 손주와 시시덕거리고 종종거리는 일, 아이로 돌아가는 일, 이런 낙원이 없다.
몸에 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손녀는 잘 논다. 요즈음 붙잡고 일어서는 일에 눈물나도록 열심이다. 어린 것으로 하여금 저토록 열심히 일어서는 연습을 하게 만드는 인간의 유전자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그래도 혹 넘어질까 싶어 손녀 가까이 앉아 넘어지려 할 때 잡아주는 일을 한다. 손녀의 손이나 몸은 얼마나 보드라운가. 향기로운가.그 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오는 것만으로도, 그 살갗에 닿는 것만으로도, 눈을 맞추어 방긋 웃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사랑스럽다. 평화스럽다.
다음날 동물원에 갔다. 사슴, 조랑말, 공작새, 호랑이와 사자와 꾀꼬리 종류등 많은 동물을 보았다. 특히 암사자의 울음소리는 숲 전체를 울릴만큼 사납게 우렁우렁 울렸다. 정글에서 사자를 직접 맞닥뜨린 것 만큼 두려운 울음이었다. 뾰족한 이빨로 단번에 공격할 듯 포효하는 울음소리였다. 우리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였으니 손자는 우리 뒤에서 뒷걸음질치며 주춤거린다. 그것도 잠시 불안하게 왔다갔다 하던 걸음을 멈추고 사자가 슬며시 누웠다. 손자 손을 잡고 우리는 다가가 본다.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얌전히 눈을 감고 누워 있다. 동물도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정글이 아닌 좁은 우리에 갇혀있으니 소리라도 질러야 하지 않을까.
남편은 손녀딸을 태운 유모차를 밀어준다. 순한 동물들 앞에 가면 유모차를 돌려 손녀가 동물을 구경하도록 해준다. 사위와 손자는 손자 손에 들려진 먹이 바구니에서 당근을 꺼내 동물들에게 주고 있다. 사위는 손자의 눈높이로 무릎을 구부려 키를 맞춘 자세다. 중간 정도 구경했을 때 딸아이는 손녀를 안고 벤치에 앉아 우유를 먹이고 있다. 먹는 일이건 자는 일이건 정해진 시간을 지나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사육사들은 각각의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동물이 기거하는 공간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사랑의 몸짓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아름답지만, 동물을 각 동물의 식성이나 환경에 맞춰 관리하는 사육사들에게서 사랑을 본다. 좀 더 진지한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손자와 손녀를 위한 여행이라고 딸아이는 미안해하지만, 아니다. 나이 먹어가는 우리를 위한 여행이다. 손자와 손녀가 웃는 모습도 찡그리는 모습도 뛰어다니는 모습도, 여기저기 붙잡고 일어서는 모습도 아니 우는 모습도 귀엽고 짠하고 사랑스럽다. 웃음 보따리를 풀어놓은 세상이다. 4년째 일주일에 두 번 이나 세 번 손주들을 봐주고 있다. 얼마나 힘드시냐고 사돈은 말씀했지만, 아니다. 어린 손자와 손녀가 있는 세상은 달콤하고 부드럽다. 손자와 손녀가 커지기 전에 이 세상을 맘껏 탐닉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