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상업영화는 대중들의 정치적 무의식을 드러낸다. 상업 영화들은 대부분 거대 제작비를 투입하여 만들어지는 문화상품이기 때문에 영화소비자인 대중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읽어내기 위하여 처절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영화는 대중들에게 버림받고 거대 제작비는 순식간에 허공으로 증발하기 때문이다. 상업 자본의 투자를 받지 않고 적은 예산을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독립영화의 경우에도 자본의 회수에 대한 압박은 심각하다. 하물며 투자사를 통해 거대 제작비를 유치한 대중 상업영화의 감독이나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영화가 반드시 손익분기점을 넘어서 이익을 산출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아도 상업적으로 실패한 영화감독이나 제작자로 낙인찍히면 다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중 영화감독이나 영화제작자들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무한한 표현방법에 의지해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예술적 영역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장사꾼이 되어야 한다. 자신들이 만든 한 편의 영화가, 그 영화에 투입된 제작비를 상회하는 관객을 동원해야만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제작비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관객이 그 영화에 지지를 보내야 한다. 즉 거대제작비로 만들어지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제작 단계에서부터 영화의 수평적 보편성은 확장되지만 수직적 깊이는 얕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저예산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는, 소규모의 관객만 동원해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 표현보다는 특정한 계층이나 특정한 표현 양식을 표출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사마리아]의 김기덕 감독이 불과 5억원 안팎의 저예산 영화찍기를 고수하는 것도, 거대 제작비를 투입하면 그만큼의 관객을 가상하고 영화를 만들어야 하므로 전문성이 약화되고 보편성이 증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자본의 예술이다. 110억원의 거대제작비가 투입된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전국 관객 15만 명에 그치면서 처참하게 몰락한 것은, 영화적 완성도가 형편없어서가 아니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최초의 인류인 우리들에게, 그 상호 소통과정을 보여주려고 한 중요한 영화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장선우 감독은 그것이 소비되는 당대의 대중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했고, 영화적 표현방법에 있어서 대중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쾌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초점거리를 명확하게 맞추지 못했다. 즉 한 편의 영화가 사회와 교류하는 통로를 잘못 찾은 것이다. 햇빛을 볼록렌즈로 모아 종이를 태우기 위해서는 알맞은 초점거리가 필요하다. 영화 보는 행위(햇빛)는, 감독이 말하려고 하는 내적 주제와 외적 형식(볼록렌즈)을 통해 관객의 욕망(종이)과 만나는 것이다. 그 정확한 초점거리를 찾는데 실패한 것이다. 만약, 조금만 그 지점을 탐색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쩌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한국 영화의 또 하나의 기록을 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렇게 당대 대중들의 정치적 사회적 신화적인 무의식적 욕망을 의식적으로 반영한다. 동시에 한 편의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지 영화 바깥세계에게 영향을 미친다. 다수의 대중들이 관람한 흥행 성공 영화들은 단순히 극장 안의 쾌감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이 말하려고 한 전언이 대중들 속에 유포된다. 영화가 갖고 있는 대중적 흡인력은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더 강력하기 때문에 허구적 구조물인 영화의 서사구조는 어느덧 허구를 탈피해서 현실의 일부가 된다. 영화의 생산 공급 소비의 유통과정에는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당대 대중들의 욕망과 그 대중들이 속해 있는 사회집단의 힘이 스며들어 있다. 영화를 만들고 그것을 본다는 행위는 이미 사회적인 행위이다. 영화는 이렇게 영화 바깥 세계와 간통한다.
그러므로 꿈의 숫자라고 생각되던 전국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미 한 편의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다. 두 영화의 흥행 결과는 이 영화들이 우리 시대 대중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절묘하게 읽어냈다는 반증이다. 어떻게 전체 국민 4명중 1명이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가. 그것도 불과 한 달 남짓의 시간차를 두고. 이 불가사의한 의문을 우리는 풀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영화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나를 사로잡는 속물적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내가 재미없게 본 [실미도]가 한국 영화산업에서 꿈의 숫자라고 생각되던 관객 1천만을 돌파하는가? 웰 메이드를 지향하는 최근의 한국영화 가령 [장화, 홍련][스캔들-조선남녀상렬지사]의 세련된 화면이나, [올드보이][살인의 추억]의 짜임새 있는 극적 구성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실미도]가 왜 최초로 관객 1천만을 돌파하는지. 강우석 감독의 거칠고 투박한 연출, 입체적으로 묘사되지 못한 캐릭터, 디테일한 감정선을 드러내는데 성공하지 못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왜 대중들은 [실미도]에 열광하는 것일까? 더구나 한국전쟁을 소재로 했지만 강렬한 신파적 코드를 갖고 있는 [태극기 휘날리며]는 [실미도]가 세운 한국 영화 흥행사를 뒤 쫒아 가며 또 다시 1천만 관객을 돌파하고 새로운 흥행기록을 수립 중이다. 제작사인 쇼박스가 삼성경제연구소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태극기..]가 유발시키는 경제효과는 4천 600억원 이상이 될 전망이다. 극장 매출 886억원, 해외수출 100억원, 음반 의류 캐릭터 사업 등 총 1천 441억원의 직접 매출을 기록할 것이며, 쇼핑효과 고용 부가가치 생산유발효과 등 간접적 경제효과까지 예상하면 총 5천억 원대의 경제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한국 영화, 정말 왜 이러는 것일까?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서울 관객 1백만을 돌파하는데 여섯 달 걸렸다. 그러나 [실미도]는 불과 12일, [태극기 휘날리며]는 8일 만에 서울 1백만 관객을 돌파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영화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관객점유율 15%의 한국영화가 50%대로 뛰어 올랐으며(지난 2004년 2월의 한국영화 시장 점유율은 82.5%를 기록했다),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던 서울 개봉관 숫자가 지금은 200여개 이상으로 늘어났는가, 그리고 TV 드라마에 밀려 사양산업으로 인식되었던 영화산업에 금융자본을 비롯한 대규모 자본이 밀려드는가, 우리는 설명해야 한다.
수용자와의 행복한 소통에 성공한 다른 대중문화가 그렇듯이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 요인도 복합적이다. 그것을 한국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갖고 있어서 혹은 한국 현대사의 감춰진 부분이 스크린을 통해서 부활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게 상황을 인식하는 것이다. 국가라는 거대조직에 버림받는 실미도 684 부대원들을 통해 각각 왜소한 개인으로서 조직에 상처받은 경험을 갖고 있는 관객들은, 자기동일시의 마취작용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실미도] 흥행의 핵심 요인일 것이다. 또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군사정권하의 전쟁영화들보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훨씬 사상적으로 진일보되어 있는 것도 분명하다. 전쟁 씬들은 세계 최강 할리우드의 기술진들이 총동원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화면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순제작비 148억원이 투입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톰 행크스 한 사람의 출연료보다도 적다. 그러면 왜 한국 영화에 이처럼 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일까? 단순히 영화적 애국심일까? 아니면 정말 다른 대중문화보다 훨씬 완성도가 뛰어나서일까?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1천만 관객 돌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잠복된, 그것을 생산한 우리사회의 구조, 그것을 소비한 대중들의 집단 무의식적 욕망을 알아야 한다. 한국 영화산업은 어디까지 와 있고, [실미도]와 [태극기..]의 그 무엇이 대중들에게 독특한 세계관을 제시했으며 그들을 사로잡는 특정한 이미지를 부여했는가? 이것은 90년대 후반, 더 정확하게는 [쉬리] 이후 달라진 한국 영화산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작품 자체만의 비교로는 해독될 수 없는 부분이다.
1999년 [쉬리] 이후 한국 영화계는 대박의 꿈에 부풀었다. 그 이전까지 영화 한 편으로 몇 백억 원의 이익이 창출될 수 있다고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단 한 편의 성공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영화산업의 지형도가 바뀐 것이다. 투자에서 이득을 보기까지 자본의 회수 과정이 빠르고, 성공하면 짧은 기간에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영화산업은, 위험을 담보로 하는 벤처기업의 속성과 많이 닮아 있다. 지금 한국 영화는 완성된 시나리오를 감독이 연출하는 가내수공업적 단계에서 벗어나, 기획 제작에서 극장 배급망을 통한 유통 소비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전단계가 체계적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선진 기업형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영화 기획의 프리 프러덕션 단계에서부터 대중들의 욕망은 면밀하게 분석되고, 흥행성 있는 소재나 아이디어는 여러 단계의 검증을 받은 후 전문화 된 인력들로 구성된 시나리오 계발 단계를 밟는다. 영화가 완성된 뒤에는 철저한 시장조사로 관객들의 반응을 면밀히 계산하며 효율적으로 영화 마케팅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작사들은 좀 더 안정적인 재원 확보를 위해 코스닥 상장사와 제휴하거나 합병한다. 이제 영화산업은 가내수공업적 단계에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분업 시스템으로 정착되기 시작하고 있다.
특히 언론매체를 비롯해서 홍보에 대규모 물량공세를 투입하여 작품의 인지도를 높이고, 전국의 많은 극장에서 한꺼번에 개봉하여 단기간에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와이드 릴리즈 전략은, 이제 대작 상업영화의 필수적 마케팅이 되었다. [실미도]는 전국 360여개의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체 극장의 1/3에 조금 못 미친다. 순제작비는 90여억원이지만 홍보비는 30여억원에 이른다. 작품이 갖고 있는 내적 요인 못지않게 이런 대규모 배급력과 마케팅이 없었다면 [실미도]는 결코 오늘의 흥행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최대 513개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이것은 1,217개 전국 극장의 거의 반에 해당되는 숫자이다. 순제작비는 145억원이지만 최종 홍보비를 포함하면 전체제작비는 거의 200억원에 가까울 전망이다.
또 [실미도][태극기 휘날리며]는, 110억원 제작비를 쏟아 부었지만 전국 15만 명에 그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비롯해서 [아유레디][예스터데이][튜브][원더풀데이즈][청풍명월] 등 [쉬리] 이후 연전연패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체를 딛고 서 있다. [실미도]는 그런 시행착오를 교묘하게 피해나간다. 작품의 내적 규모를 감독의 능력 이상으로 지나치게 확대하지 않았고, SF나 환타지 장르처럼 테크놀로지에 많은 부분을 의지해야 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중들이 흥미를 갖고 좋아할 수 있는 드라마적 견고함을 갖추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 역시 한국전쟁이라는 소재를 상업적으로 절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전쟁을 소재로 했지만 전쟁 자체가 영화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월남전을 소재로 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나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 혹은 테렌스 멜릭 감독의 [씬레드라인],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메탈 쟈켓]처럼 반전영화의 맥락에서 접근하지는 않는다. 인간적 삶의 가장 극한적 형태인 전쟁을 통해 인간존재의 의미와 삶의 본질적 가치를 탐색하려는 그런 전쟁영화는 목적이 다르다. 강제규 감독은 형제애(일본에서 개봉되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어 제목은 Brotherhood이다)를 보여 주기 위해 집요하게 전쟁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민다. 이데올로기의 함정에서 벗어나 핏줄의 정을 강조하는 이 영화의 접근방식은 이성적이지 않고 감성적이다. 훨씬 보편적인 것이다.
*실미도
[실미도]는 1968년의 1.21사태 보통 김신조 사건이라고 불리는 청와대 무장공비 습격사건에서 시작된다. 근현대사의 감춰진 실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은 대중들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월간 시사 잡지를 통해 읽는 전정권의 비사보다, 영화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는 훨씬 흡인력이 강하고 자극적이다. 우리의 군사독재정권은 필연적으로 감춰진 이야기들을 양산했지만, 그것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극히 적었고 그 접근방법도 우회적이었다.
[실미도]와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던 이수근 위장간첩사건에서 출발한 [이중간첩]을 보자. 어떤 영화의 내러티브보다 훨씬 더 극적 구조를 갖고 있는 실제 사건은 오히려 영화 속에서 자꾸만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것은 실화가 아니라고 한 발 물러서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한석규 고소영이라는 빅 스타를 기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중간첩]은 실패했다. 그러나 [실미도]는 영화의 내적 구조나 외적 마케팅에서 실화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이것은 영화의 흥행이 주관객층인 20대에서 중장년층으로 점화하는 시기에 폭발적인 관객 유인효과를 발휘했다.
실미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건너와 송도에서 시내버스를 탈취, 인질들과 함께 서울까지 진입하던 신원미상의 젊은 군인들이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군경과 대치 끝에 수류탄으로 몰살된 그 사건 사흘 후, 정래혁 국방장관, 공군참모총장 등이 줄줄이 옷을 벗었고, 정부에서는 처음 그들을 무장공비라고 발표했다가 군특수부대원이라고 정정했다. 제3공화국에서 실미도 사건은 금기시되었지만 그 이후 해금되면서, 이른바 실미도 군특수부대 난동사건의 비밀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31명의 북한공작원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파된 김신조 사건의 충격으로, 당시 북쪽 공작을 도맡아 진행했던 중앙정보부가 주축이 되어 만든 북파부대가 바로 실미도 부대였다는 것이다.
1968년 4월 부대가 만들어져서 684부대라고 불렀고, 그들을 훈련시킨 곳이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 실미도이다. 그러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684 북파부대는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아니, 그런 부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서는 절대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결국 부대원 전부를 살해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그 사실을 알고 실미도의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청와대로 향하다가 몰살된 과정을 [실미도]는 서술하고 있다.
국가라는 거대조직의 필요에 의해 차출되었다가 결국 버림받는 실미도 684 부대원들의 희생을 통해, 우리 시대 대중들은 국가에 대한 자신의 헌신적 사랑이 버림받는 것 같은 동질성을 느낀다. 모든 왜소한 개인은 그 상대가 회사든 국가든 거대한 조직에 상처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험은 [실미도]의 684 부대원들과 동일화되면서 증폭된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바로 이 점이 [실미도] 1천만 관객동원의 가장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한 핵심 요인일 것이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도약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쉬리]는 1999년초, IMF의 고통 속에서 개봉되었다. 대중들은 현실적 고통을 영화적 경험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쉬리] 속의 강렬한 이데올로기 대립은, 우리 사회 갈등요인의 뿌리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적 상황은 박무영을 중심으로 한 북한특수부대원들과, 유중원을 중심으로 한 남한 정보부원들의 대립에서 드러나지만, 강제규 감독의 방법론은 직접적이지 않다. 그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사실은 나를 죽이려 한 적의 첩자였다는 삼류 신파 멜로의 구도로 논점을 피해나간다. 그러나 이것은 [쉬리]의 흥행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현실에서 IMF로 국가에 상처받은 대중들에게 [쉬리]는 가장 사랑했던 존재의 배신이라는 신파 멜러 구도를 제시하며 감성을 건드렸다. [실미도] 역시, 국가가 필요할 때 손을 내밀었다가 필요가 없어지자 헌신짝처럼 버리려했다는 부분을 영화의 골격으로 삼으면서 대중들의 감성을 건드린다. 영화의 구체적인 디테일은 약하지만 이 기본 골격이 튼튼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묵직한 드라마로 인식되는 것이다.
또 [실미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훈련과정은, 해골을 갈아 마시기도 했던 생존자들의 증언과 비교해 보면, 당시 684 부대원들이 받았던 것보다 훨씬 약하게 묘사되어 있다. 강우석 감독은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는 끔찍하고 잔인한 현실을 과장하는 대신 그 뼈대는 유지하면서 오히려 잔혹한 부분을 약화시키고 그 자리에 유머를 삽입했다.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이런 의지는, 실미도 사건의 생존자 증언 등 현실과 적극 삼투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영화 [실미도]는 우리 현실 속의 한 부분을 극화하고 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진정성이 살아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허구적 구조물인 영화는 현실에서 소재를 가져왔을 뿐, 내러티브 자체는 극적 짜임새를 위해 변용되어 있다.(마지막 엔딩에서, 실미도 부대원들은 스스로 버스 안에 수류탄을 던져 자폭하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군경의 수류탄 투척으로 몰살당했다. 살아남은 4명의 부대원들은 곧 처형당했다) 또 이야기를 너무 힘 있게 전개하려다 보니까 탄력성이 부족해졌다. 임원희 정재영의 빛나는 감초 연기가 있지만, 영화는 지나치게 어둡고, 무겁고, 딱딱하다. 너무 걸작을 만들려는 목적의식, 잘못된 사명의식이 [실미도]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중심인물인 강인찬(설경구 분)이나 최준위(안성기 분)의 상처는 입체적으로 형상화되지 못했고, 너무 정형화되어 있다. 강인찬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1조장 한상필(정재영 분)이나 원희(임원희 분)가 더 돋보이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그런 억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객기만 있던 건달들이 치밀한 조직적 훈련에 의해 살인병기로 변해가는 과정의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상식적 수준에 그친다. 관객들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놓쳐버렸다. 캐릭터도 너무 정형화되어 있다. 강인찬은 아버지가 북으로 넘어간 소위 빨갱이의 자식이다. 연좌제에 묶여 고통 받던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다시 북파부대원으로 발탁되는 과정은 평범하게 그려져 있다. 북으로 넘어간 아버지 때문에 그가 겪었던 고통은 대사로만 전달된다. 가장 나쁜 방법이다. 또 그들을 키웠다가 살해명령을 받은 부대장 최준위의 인간적 갈등은 드러나지만, 안성기의 연기도 정형화되어 있다. 대본 자체가 캐릭터의 입체성을 부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미도]는, 흥행감독이 아닌 영화작가로서, 한국 영화의 진정한 파워 넘버 원이 되고 싶은 강우석의 야심과 한계가 충돌한 작품이다. 그런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영화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 유연한 사고로 접근하지 못하고 [배달의 기수]처럼 딱딱해져 버렸다. 그러나 또한 한눈팔지 않고, 앞으로 돌진하는 저력과 진정성이 있다. 이것이 [실미도]가 주는 힘이다. 우리는 그것에 주목해야 한다.
[실미도]의 흥행 성공 이면에 잠복한 우리 시대 대중들의 집단무의식은, 개인과 집단이 행복하게 화해하는 시대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더 이상 상처 받은 왜소한 개인들이 늘어나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를 통해 증언하는 대중들의 무서운 발언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그 누구도 절대 한국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이미 한국전쟁이라는 덫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전후세대인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부모나 삼촌들로부터 전해들은,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이야기들이거나 몇몇 신문이나 잡지의 사진 속에 남아 있는 자료화면뿐이다. 누가 먼저 침공을 시작했는지, 그것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의 소산인지 민족통일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광신적 행동이었는지 자료를 통해 판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은 용납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당연한 말은 그럴듯한 대의명분 앞에서 무너진다. 부시는 인류를 위협하는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겠다는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종교적 대의명분을 걸고 쿠웨이트를 침공했었다. 전쟁의 탐욕스러움은 대의명분 밑에 숨어 있는 이기적 욕망이 드러날 때 추악한 본질을 드러낸다. 민족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거부할 수 없는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국전쟁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죄없는 피를 담보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났다. 전쟁은 잊혀져 가고 있고 전쟁 당시의 생존자들도 줄어들고 있다. 전쟁기념관이 건립되고 해마다 6.25가 되면 기념식이 열리지만, 국립묘지에 헌화하고 조포가 울려 퍼지지만, 전쟁으로 희생당한 고귀한 생명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삶의 가장 극한적 상태가 전쟁이라는데 동의한다면, 그것이 우리들의 삶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된다면, 모든 전쟁 영화는 반드시 반전영화여야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50년대에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류의 전쟁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만들어진 반공영화는 진정한 전쟁영화가 아니다. 냉전 시대에 우리는 결코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승복 소년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며 죽었다고 우리는 믿어야 했고, 그렇게 교육받았다. 반공영화들은 이 땅에 남아 있는 수많은 실향민들의 상처난 가슴을 위로했고, 반토막 난 체제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로 마음을 모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DJ와 김정일은 평양공항에서 포옹을 하고, 북한의 미녀 응원단들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전도연이나 전지현 못지않은 인기인 대접을 받는다. 그만큼 시대는 변했다. 그래도 우리는 영원히 한국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통일의 길이 가까워질수록, 감추고 묻어야 할, 외면하고 잊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투명한 햇빛 아래 끄집어내서 그 상처들을 치유해야 한다. 앙금이 있으면 메꿔야 하고 균열이 있으면 봉합해야 한다.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에서 이데올로기를 탈색시키고 접근한다. 가령 엄종선 감독의 [만무방]은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를 지붕에 꽂으며 살아야 했던 산 속 아낙네의 삶을 통해, 그녀의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온 거친 호흡의 국군과 북한군 두 남자를 통해, 삶의 본질과 에데올로기의 상충을 그린 수작이었다. 그러나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제작된 모든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들과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한국영화 최대의 물량이 동원되고 거대 제작비가 투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지금까지는 이데올로기가 우선이었다. 만약 이데올로기에 우선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민족이었다. 그런데 [태극기 휘날리며]는 철저하게 이데올로기를 탈색시킨다. 민족통일이라는 거창한 대의명분도 찾아보기 힘들다. 카메라는 2시간 40분동안 두 형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전쟁전 종로 거리의 분주함 속에서도, 피비린내나는 낙동간 전투의 참호 속에서도, 평양 시가지 전투나 압록강변 장단에서 수십만 명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올 때도, 카메라는 오직 두 형제만을 잡는다.
동생들을 위해 구두닦이하면서 사랑하는 여자와의 결혼을 기다리는 이진태(장동건 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그의 착한 동생 이진석(원빈 분). 우리는 한국전쟁에 휘말린 두 형제의 드라마틱한 삶을 통해 전쟁의 무의미함을, 이데올로기의 덧없음을, 천둥벼락처럼 깨닫는다. 그것이 [태극기 휘날리며]가 주는 가장 위대한 영화적 메시지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국군 대대장이든 중공군이나 북한군이든, 동생을 위협하는 적들에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야수처럼 돌진하는 진한 형제애다.
피난 길에 대구역 앞에서 국군에 징집당한 동생을 따라 군용열차에 오른 형의 행동은, 핏줄에 대한 본능적 사랑 때문이다.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누가 이겨야 하는지, 그는 관심이 없다. 아니 모른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언어장애를 겪으면서도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장통에서 허리 굽혀 가며 국수를 팔고 있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약혼녀 영신(이은주 분) 그리고 어린 동생들 곁으로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몰라. 형, 안죽어. 너 살려서 집에 보낼거야. 우리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꼭 하나만 살아 돌아가야 한다면, 그게 너이길 바랄 뿐이야]
동생에 대한 형의 집착은 맹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그는 점점 광적으로 전쟁 그 자체에 몰입한다. 훈장을 받을 만큼 혁혁한 공로를 세우면 동생을 집으로 돌려 보내주겠다는 대대장의 약속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그는 전쟁 그 자체의 광기에 사로잡혀 간다. 그리고 동생과 약혼녀와 어머니를 서서히 잊어버린다. 전쟁이 인간성을 얼마나 참혹하게 파괴하는지 감독은 요소요소에 장치를 해놓았다. 구두닦이 찍새로 종로통에서 함께 일하다 의용군에 징집되어 포로로 사로잡힌 소년과의 관계는 그 정점이다. 전쟁의 광기에 사로 잡힌 형과 이제 오히려 그를 걱정하는 동생이 대화하는 씬에서, 감독은 동생은 하얀 런닝셔츠로, 그리고 형은 군복을 입혀서 화면 양쪽 끝에 배치한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넓다. 형제간의 균열을 강제규 감독은 이런 시각적 장치를 동원해서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회한에 사로잡힌다. 하나는, 이제 레드 컴플렉스에서 이렇게 많이 자유로워졌구나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같은 감독의 전작인 [쉬리] 때와도 다르다. 또 하나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위 워 솔져스]류의 할리우드 전쟁영화들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 전쟁영화를 생산할만큼 한국영화 콘텐츠 제작의 힘이 상승했구나 하는 것이다. 이 진술을 뒤집어 생각하면, [태극기 휘날리며]는 철저하게, 성공한 할리우드 상업주의 영화를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적 시점에서 과거로 플래시백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타이타닉]이나 [쉰들러 리스트]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던 방법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유해발굴 현장에서 시작되는 오프닝씬은,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현재적 시점에서 과거로 회귀하게 만든다. 우리는 생존자 이진석이 유해현장에서 자신의 유품을 발견했다는 전화를 받고 붉은색 소가죽 구두를 어루만지면서 과거로 함께 돌아가게 된다.
한국 상업주의 영화를 대표하는 강제규의 연출은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샷이 컷팅되어야 할 때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정확하게 다음 샷으로 넘어간다. 상황을 보는 시야도 넓다. 캐릭터의 입체적 드러냄도 훌륭하다. 거대한 사건을 밀고 나가는데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쏟아지며 시체가 뒹굴 때는 힘 있게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고, 호흡을 한 템포 조절하며 숨고르기를 할 때는 순식간에 감성적으로 변화한다. 완급의 리듬을 이렇게 탁월하게 조절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감독은 없다. 그는 관객들의 정서를 철저하게 자신의 페이스대로 끌고 간다. 정확하게 고정 샷으로 찍어야 할 것은 찍고, 헨드 헬드로 카메라를 흔들며 인물에 밀착해서 따라갈 때는 따라간다. 그 차이가 너무나 명확하다. 관객은 추호도 화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전쟁에서 왜 이데올로기를 탈색시키고 형제애로만 갈등을 최소화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묵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대중들의 욕망을 제작자가 읽었기 때문이다. [남남북녀][휘파람 공주][동해물과 백두산이]처럼 최근 제작된 남북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전부 이데올로기 갈등에서 벗어나 있는 것도 [쉬리] 때와 또 다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은 바로 전 작품인 [쉬리]에서 박무영과 유중원을 통해 격렬한 사상투쟁을 벌이게 했다. 그러나 [태극기 휘날리며]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그런 직접적 갈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김대중 김정일 남북 정상회담 이후 달라진 남북 관계를 반영한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관심을 이동시키고 있는 우리 시대 대중들의 욕망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대중들이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읽는 것은, 집단의 다툼이 아니라 개인의 소중함이다. 이제 더 이상 거대조직에 상처받고 싶어 하지 않는 대중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영화보기로 그런 욕망을 표출한다. 또 50년대 당시 중고등학생들의 짧은 머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진석의 긴 머리가 리얼리즘 영화의 흠이 된다는 것을 감독은 몰랐을까? 아니다. 강제규 감독은 동남아 시장을 겨냥하면서 부분적인 사실적 고증보다는 해외의 관객들이 이 영화를 바라볼 때의 효과를 더 계산한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 영화가 산업적 토대를 튼튼하게 구축하면서, 거대집단에서 벗어나 개인적 삶의 가치를 더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대중들의 집단무의식적 욕망을 서사적으로 구축한, 지금 이곳의 대표적인 한국 상업영화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우리는 지금, 역설적으로, 한국영화의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잔칫집에 재를 뿌리려는 것이 아니다. 관객 1천만 시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국영화 점유율 50%의 시대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지금, 이곳의, 한국 영화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음을 진단해야 한다.
영화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 일상의 핵심으로 진입한 것은 아니다. 영화를 둘러싼 우리 삶의 환경이 변한 것이다. 정보화 사회로 속도감 있게 사회가 변화하면서, 극장 상영이 끝나면 영화사 창고에 먼지 묻은 채 버려졌던 필름은, 지금은 비디오나 DVD, 혹은 TV의 주말의 명화나 케이블 TV, 컴퓨터 게임 등으로 계속해서 몸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영화는 단독의 문화 매체에서 고부가가치를 낳는 영상정보화 사회의 핵심 매체로 위치 이동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문화예술 분야로 흩어졌던 고급 인력이 영화계로 유입되고, 전국 50여개 대학에 설립된 영상관련학과와 영상원 등에서 쳬계적 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적 자원은 한국 영화의 질적 향상을 이루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고수익 창출의 욕망에 부풀은 한탕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국내 문화산업 어느 장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1천만 명의 문화수용자 확보는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영화계는 이제 더러운 한탕주의에 한층 더 휩쓸려 갈 것이다.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영화산업의 속성상 작가주의 영화, 예술영화, 저예산 영화들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질 것이다. 전국에는 1200여개의 극장이 있지만 이곳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불과 10여편 내외에 불과한 이런 현상은, 크게 투자해서 크게 벌어보겠다는 블록버스터가 아니면 설 자리가 점점 좁아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행에 성공한다고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예술로서의 영화가 아닌, 대중적 선전선동에 능수능란한 재능을 갖고 있는 감독들이 영민하게 대중들의 성감대를 건드리면서 제작되는 영화들이다. 그런 영화들의 상당수는 천박하고, 감성의 유효기간은 극히 짧다. 극장 밖으로 나가는 순간 덧없이 사라지는 그런 영화들은 힛트 앤 런 작전처럼 치고 빠지는 마케팅을 동원한다. 언론매체를 비롯해서 홍보에 대규모 물량공세를 투입하여 작품의 인지도를 높이고 전국의 많은 극장을 잡아 한꺼번에 개봉하여 단기간에 많은 관객을 동원하려는 와이드 릴리즈 전략은, 이런 상업영화의 필수적 마케팅이다.
그러나 거대 관객을 동원하는 대중영화 속에는 우리 시대 대중들의 집단무의식이 어떤 식으로든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조폭마누라]를 형편없는 쓰레기라고 비난하는 것은 쉬워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대중들의 욕망, 가령 조폭으로 상징되는 권력층을 조롱하고 희화화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얻고 싶은 욕망은 분석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돈이 될 수 있는 영화, 관객이 들 수 있는 영화만 기획되는 것은, 영화산업이 거대하게 부풀어오르고 뭉치돈이 몰리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냉엄한 시장경쟁의 생존논리에 영화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하겠는가? 아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다양한 영화를 즐길 권리가 있다. 상업적 영화의 흥행에 일희일비하는 관객이 아니라, 지속적인 애정으로 극장을 찾고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관객이 필요하다. 즉 일시적으로 반짝하는 베스트 셀러보다는 꾸준히 수요가 늘어나는 스테디 셀러가 좋은 것이다. 올바른 영화보기 운동이 필요하다. 관객들도 일시적 재미를 위해 극장을 찾는 것 보다는, 삶과 세계에 대해 사색하기 위해 극장을 찾아야 한다.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영화진흥위원회같은 곳에서는, 단편영화 예술영화 전용관을 만들어 흥행과는 관계없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영화가 대중들에게 소비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 한국영화 스크린 쿼터 대신, 제3세계 등의 예술영화 스크린 쿼터제를 운영해서 다양한 영화가 극장에 제도적으로 뿌리박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관객 1천만 시대를 맞은 지금, 우리는 영화 매체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일고 있는 한국 영화전성기가 일시적 환영에 불과한 사상누각에 그치지 않기를 위해서, 영화산업의 토대를 튼튼하게 구축할 수 있는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 그리고 최상층부에서 영화의 미래를 예지하는 다양한 실험영화와 작가영화들이 공존할 수 있는 영화적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박수는 어느 순간 썰물처럼 사라지고, 이스트를 많이 넣은 빵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영화산업은 바람이 빠지면서 왜소해 질 수 있다. 그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첫댓글 제가 쓴 [실미도][태극기..] 평을 종합해서 수정 보완하여 다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