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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포엠 포커스 04>
기호(記號)의 감응과 감성적 파동(波動)
- 강지희 시인의 시학적 해법과 음계의 적절성
엄창섭(사) k 정나눔 이사장, 본지 주간)
1. 시적 감응과 매혹적인 감각의 언어
모름지기 「기호의 감응과 감성적 파동-강지희 시인의 시학적 해법과 음계의 적절성」의 관점에 있어 대다수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이 이기주의로 치닫는 시간대에서 그나마 감사하게도 함께 공존하며 일관된 소임의 수행을 결코 우연으로 수락할 수 없다. 일단 창조하는 영혼은 보다 위대하고 아름답기에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면 소외와 갈등으로 인해 마음의 깊은 상처(trauma)로 좌절하는 이들에게 하나 같이 힘겨운 삶의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꿈과 비전을 주지시킬 일이다. 차지에 월간『모던포엠』통권 211호 「모던포엠 포커스」의 대상자는 <매화 붙들기>, <놀이터>를 비롯한 10편들로 비교적 인간관계 층위를 형성하는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관용성을 따뜻한 서정성으로 행간의 여백에 적절히 배합시켜 한층 섬세함이 눈부신 경북 영천태생으로 현재 「페이퍼로즈 공예연구실」 원장으로 활동 중인 강지희 시인이다.
그간에 총총 걸음으로 우리시단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존재감 당당한 그 자신은 지난 2009년 『문화일보』신춘문예의 시 심사평에서 심사위원(황동규·정호승)이 “<즐거운 장례식>에서 단점보다는 죽음을 보는 눈이 새롭다는 장점을 더 높이 샀다. 누구의 죽음이든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기존의 생각을 즐겁게 뒤집는 역설적 묘미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나름대로 높은 시적 성취도를 이루고 있다.”라는 호평도 그렇지만 또 『파랑을 입다』(서정시학사, 2018)의 첫 시집해설에서 이기철 시인의 “강지희는 사물이나 대상의 내면을 파고드는 따뜻하나 예리한 시선을 가지고 언어를 구부리고 편다. ‘와인을 따르며 강물 소릴 듣는 귀’, ‘파랑이 파랑의 팔짱을 끼는 일요일’, ‘나무에 고인 울음으로 완성되는 문장’, ‘새에게 열어놓은 맑디맑은 귀’의 감각과 언어들은 언뜻 만개한 라일락 아래서 듣는 일벌의 날개소리를 듣게 한다.”라는 이 같은 지적을 예의주시하며 『모던포엠』의 현명한 독자라면 저마다 분별력을 지니고 헤아려볼 바다.
무엇보다 치열한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비정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인간과 초인』(1925)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극작가 조지버나드 쇼가 "무관심은 가장 큰 죄악이다."라는 그 일상의 일깨움처럼 아직은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사회현상에서도 충직하게도 ‘하늘에는 별, 땅에는 꽃, 그리고 영혼에는 시’를 구가하는 이 땅의 시인 중에서 정신기후를 따뜻하게 조성하며, 생명경외(生命敬畏)의 존엄성을 의식하고 차별화된 시작위에 몰두하는 강지희 시인의 시편을 통해 ‘네가 타고 갈 꽃구름 택시 언제든 불러줄게’라는 또 그렇게 열린 마음가짐으로 “잇몸 활짝 드러내 맞이할게//고결한 종 흔드는 건 순간일 테니/이번 여행이 좀 더 길었더라면/길 잃은 바람처럼 두리번거리지 않았을 거야//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하품 손에 쥔/소담한 온기로 나에게 깊숙이 박힌/체념 따위 말끔히 씻어다오(매화 붙들기)”에서와 같이 ‘맑음의 극한은 추위를 모른다.’는 그 매화(梅花) 붙들기야말로 ‘일생을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으리라.’는 집념과 맞물린 짐짓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그 시적 행보(行步)는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이탈의 여유로움을 접할 수 있기에 한순간의 정신적 위안에 해당한다.
특히 만상이 단절의 시간대를 거쳐 연초록 생명의 계절에 금화처럼 짤랑이는 그의 맑게 깨인 내면의식은 일상화의 양상에 머물지 않을뿐더러 ‘저물도록 이어지는 난민행렬놀이 속 고무줄이 되는’ 현상에서 끝내 “회초리 들고 노을 선생님이 아무리 훈계해도/끝나지 않은 고무줄놀이//발산하는 체온을 거미가 끊으려 하지만/오래된 단짝인 어둠은 감꽃을 흔들어요(놀이터)”를 통해 새삼 입증되듯이 각질화 된 고정관념을 깨뜨려 보이고 있다. 비록 사물의 재해석에서 은유적 재구성이란 용어를 의도적으로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의 시적 포즈는 대상 속에 몰입되어 ‘형태, 색깔, 감각 등’의 속성들을 상반균형의 시적 형상화로 아득한 유년의 꿈이 자리한 ‘놀이 속 고무줄이 되는’ 그 놀이터에 투사된 모성 같은 그리움의 해법은 그만의 당위성을 지닐 것이다.
각론하고 전체적인 시의 틀 짜기나 시적 흐름에서 강지희 시인의 시적 매혹이라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아니한 물의 생리와 같이 ‘항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그 겸허함과 뿌리에서 가지 끝으로 차오르는 물의 강인함, 그리고 생명의 모천으로 흘러 바다에 합일하는 통섭(通涉)으로의 수용성에서 기인한 상생의 정신이기’에, <감정 달력>이라는 시제(詩題)의 돋보임에서 상투적인 ‘-겠다와 –겠지’의 종결어미 사용의 반복으로 시적 긴장감을 풀어낸 수사적 처리의 동질화 양상은 다소 이채롭기에 “상투적인 숫자 멀뚱히 쳐다보다/정형외과 통원확인서 받으러 가는 날에는/우려낸 모시조갯국 마실 거야//병뚜껑 넣어 해감 시킨 요일들은/부르르 끓어오르며 나를 간 큰 토끼라하겠지만(감정 달력)”에서 ‘마실 거야→하겠지만’ 가정법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 충동적 기대감은 곧 역동적 생명감으로 전이된다. 까닭에 잊고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강지희 시인 의 삶의 일상에서 확증되는 지극한 정직성의 발현은 ‘한 알의 풋사과를 입에 물었을 때 입안에 번지는 햇살의 맛을 기록하고 싶어졌다.’는 이 같은 담백한 격조의 맞물림이다.
2. 시인식의 전환과 영적 상승의 신비성
어디까지나 심층적 논의의 대상에 관하여 그 나름의 「시인식의 전환과 영적 상승의 신비성」에 앞서 미국의 시인이며 비평가 랜섬(J. C Ransom)이 “시는 자연미의 표현이며, 상상이라는 훌륭한 기능이 시의 작인(作因)이다.”라는 지적에 유념하여 ‘몽상의 시학’으로 지적해도 지나치지 않은 그 자신의 시적 의미망은, 비교적 일상의 언어도 자유롭게 사용하며 ‘먹잇감보다 목구멍이 가늘다는 것 알고 휘휘거리는 바람의 혀를 조심하라’는 경계이다. 일단 연유야 어떠하든 ‘작살→붉은 피(血)’를 연상케 하는 금속성언어와 결속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도 때로는 기억 뒤편의 잊혀 진 황홀함에서 비롯된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이다. “작살 들었으면 표적을 쏴라//신중할수록 먹이를 구할 수 없는 어렵//손아귀에 넣었다고 해서 모두 네 것이 아니니/일렁이는 물가 벗어나 먹이를 눕혀라(부력의 법칙)”의 낯선 분위기도 그렇거니와 그만의 담백한 시격(詩格)은 따뜻한 감성에 의한 시적 정조(情調)의 특이성에 응당 눈부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최후의 절창(絶唱)을 위하여 날카로운 가시에 영혼을 주고 선혈(鮮血) 흘리는 생리(生理)를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고, ‘감사함은 일어남(起)의 에너지임’을 의식하고 가끔 예상치 못한 여행을 통해 ‘쁘리비엣(러시아말로 안녕!)’하고 도스 높은 보드카의 잔을 뜨겁게 돌릴지라도 “밤은 안녕한가를 해바라기에게 묻는다//어쩌면 이건 오해일 수도/오해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아주 일상적으로 건네는 인사(쁘리비엣)”의 보기에서 한순간 감정을 압도하는 신선한 충격은 자연의 순치(馴致)를 쫓고 순응(順應)하는 바람꽃의 영혼이기에 이처럼 일상적인 자잘한 삶의 편린(片鱗)에서 새삼 인사 같은 겉 치례도 사유하는 자의 삶에 있어서는 중차대한 관심사(關心事)이다.
그렇다.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기욤 드 생티에리가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떻게 바로 자기 안에 그 모습을 비추는 자의 찬란함에 정복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듯이 무엇보다 극명한 사실은 ‘인간은 점진적으로 영적 상승을 통해서 동물적 상태에서 이성적 상태로, 다시 또 이성적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이동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가끔 그 자신의 즉물적 대상에 대한 기대감이나 시적 작위(作爲)는 예기치 못한 결과 뒤에 ‘미로 같은 골목은 휘파람이 몰려다녀 떠났던 새가 돌아올 때를 맞춰 모이를 뿌릴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하다.
어려운 일이 아니지. 직벽 난간 위 허공으로 돌아가는 일은//
철커덕 잠긴 문을 밀면 새소리가 나지. 신기한 일이지. 한동안 버건디 네일에 덮여있다 해도 방은 긁을수록 더 붉은 소리를 내지. 손톱이 새를 감춘 실핏줄의 방이라면 엄지를 뺀 네 개의 벽은 네 번의 도배를 하지. 계절마다 이리저리 가구들로 채워지지. 물총새 좀 몰아본 여자처럼 방마다 암호를 새기지. 미로 같은 골목은 휘파람이 몰려다녀 떠났던 새가 돌아올 때를 맞춰 모이를 뿌리지//
깃털 빠진 날개 밑에 구름을 사려 넣지. 갈라진 벽 틈새에서 붉게 기어 나온 담쟁이넝쿨마다 새파랗게 돋아나는 잎들//
-<벽을 긁다> 전문
그렇다. 위에 인용한 다소 호흡이 긴 산문적 형식으로 처리된 그의 시편인 <벽을 긁다>에서 시적 변명이지어지기에 족한 충동은 마치 「불과 물, 공기」를 통해 세상을 해석한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욕망은 형상을 만들고, 피조 된 형상은 다시 욕망과 조응한다."의 진술처럼 비록 인간에게 새처럼 날 수 있는 날개는 없을지라도 하나의 욕망, 그 열정은 끝내 새로운 비상의 나래 짓인 꿈을 지향하기에 어디까지나 현상학적으로 ‘물총새 좀 몰아본 여자처럼 방마다 암호를 새기’는 동일화 양상의 습성으로 이 같이 변주(變奏)될 조짐에 한 사람의 충직한 독자라면 주의 깊게 경계할 바다.
각론하고 매순간 엄숙한 삶의 생존을 위해서 그 자신을 물음 앞에도 겸허히 놓아볼 일이기에 또 다른 시편에서 “집들은 낡은 영화 세트장처럼 허름해서/반나절 공중을 선회하는 바다새 대신/뚫린 창으로 너를 기다리는 눈먼 내가 스치네//황혼이 널어놓은 빨래는 조용해서/바깥 구름은 초대받은 손님처럼 느긋해질 수 없다며/기댈 어깨를 내어주네(지프니 타다)”의 보기처럼 ‘서 있는 곳이 모두 저녁의 정거장이 되는’ 그 필리핀 빈민가 톤도의 땅에서 시계를 버리고 부르릉 시동을 거는 심성은 못내 따뜻한 화자의 인간적인 행위 또한 이 같이 이국적이며 낭만적이다. 또 한편 스스로의 삶을 반추하면서 진정한 가치와 의미의 추구를 위하여 뼈아프게 자기통찰의 시간을 헤아리는 일상은 모처럼 아름답기에 ‘기댈 어깨 내어주는’ 빛나는 잠언이 ‘어떤 내일을 맞이하고 삶의 가치를 무엇에 둘 것인가?’라는 물음과 결부되고 있음은 명백한 현상이다.
이와 같은 삶의 공간에서 ‘일상의 통섭(通涉)과 온전한 화평을 위한 상생의 해법’을 모색한 끝에 돌이킬 수 없는 그만의 사유의 결정체를 시적 형상화로 빚어내어 암울한 시간대에서 2%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정화시키듯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시대적 소임을 올곧게 수행하고 있음도 가슴 뿌듯하지만, 그 자신이 본질적 고독 앞에서도 ‘떠난 네가 돌아올 때까지 밤하늘을 향해 부는 휘파람’은 더없이 눈물겹다.
알 수 없는 바람이 목덜미에서 불 때/입안에 별을 넣고 굴리다 보면/흔들리는 수숫대 소리로 들려오는 환청/이른 꽃망울 낭창하게 터진 낯선 거리마다/들썩거리는 구두의 뒤꿈치들/텅 빈 반지하방이 우울하여 뛰쳐나오다/밤하늘에서 만난별을 나는/조개껍데기 속에 집어넣곤 했다//
-<별사탕>에서
위에 인용한 시편 <별사탕>(Confeito)에서 ‘밤하늘에서 만난별이야말로’ 화자 자신이 ‘잇몸이 헐까 걱정 깊어지는’ 그 아픈 상흔(傷痕)을 매개로 한 나직한 통곡 뒤의 숨죽음이며 때로는 환청처럼 꽃망울 낭창하게 터진 그 현재성은 끝내 충격적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마저 불러낸다. 이 같은 시의미의 확장과 전위(轉位)는 마치 법정 스님의 유지문(遺志文)처럼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는 그 소망과도 무관치 아니하기에 ‘별(시각)과 사탕(미각)의 조합’이야말로 ‘어둡고 침울한 반지하방을 뛰쳐나올 그 매개물의 작동‘으로 인한 소외된 인간관계층위의 회복을 지속적으로 탐색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극소수(極少數)의 행위자로서 그 역할’이 맞물려 있기에 한껏 이채롭다.
3. 절제된 감정과 엇박자 음표처리
차지에 인간은 운명의 별 아래 태어나 저마다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지만 서산대사의 “눈 덮인 들판 길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답설(踏雪)은 교시적 의미를 지닌다. 까닭에 좋은 시인이란, 꼬인 전통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정신기후를 따뜻하게 조성하는 존재이기에 ‘과거는 미래와 같은 선상에 있고, 미래는 위대한 꿈을 꾸는 자의 것임’을 이 땅의 어느 시인보다 의미 있게 인식하는 강지희 시인만의 당당한 자존감의 빛남도 그렇지만 언어에 관한 분별력은 새삼 놀라운 조짐이다.
어디까지나 강한 일념으로 삶의 일상에서 감동의 회복에 주저함을 수용하지 않는 연유로 ‘칼날 닮은 어린 칼새와 날갯짓하며’ 살지라도 그 자신의 다음의 시편에서 ‘-했겠다.-살겠다.“의 보기처럼 미래추측보조어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화자의 의중을 짐짓 묵언으로 응시하고 지켜볼 일이다. 또 하나 “자색물쇠닭이 연꽃밭의 파수꾼이라는 별호 얻었듯이/발걸음은 가볍게 몸짓은 재빠르게/발가락으로 분산시키는 온몸의 무게 미리 알았겠다//물 밖과 물 안을 구별하지 못하는 나/어떤 새의 이름으로도 찾지 못하는 나(서식지)”에서 입증되어지듯 서식지(棲息地)는 ‘모든 동식물의 개체군이 살고 있는 공간’을 뜻하기에 화자의 경우 또한 ‘충실하게 삶의 포도밭을 지키는 파수꾼의 소임’을 켜켜이 지켜내며 ‘참으로 먼 길이지만 그래도 가야 할 길이기’에 필연적인 운명일지라도 사유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그의 시적 행보는 이처럼 다감하다. 까닭에 칼릴 지브란의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는 서있지 말라./사원의 기둥들도 떨어져 있고,/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예언자』)”라는 예시는 시인식의 의미망을 다양하게 확장시켜주기에 이미지의 형상화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간혹 잠시나마 낯선 이국풍물에 아득함을 체감하면서도 시간 개념의 동질성을 형이상학적인 이미지와 궤를 함께 하는 점을 공감케 하는 그 자신의 심사(心事)는 따뜻한 감성시학의 실체이기에 시적 역동성은 충만한 생명감의 인자(因子)로서 음계가 엇박자임도 감지케 한다. 따라서 감동을 회복시키는 지난한 ‘몸의 시학’은 가슴 저리게 할뿐더러 그 자신이 동물적 언어의 심각성을 식별하여 한순간 불안 심리도 놓치지 않고 상생과 화해를 위해 역사 앞에 몸을 던지는 역할담당에 비장감마저 묻어있다. 한편 사물의 본질을 절제된 언어로 해명하고 생명적인 형질로 이행시키는 추이(推移)로 그 누군가 등을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에 끝내 안도감마저 수락된다.
각론하고 총체적으로 우리가 직면한 위기적 상황은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할 때야 비로소 극복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혼돈 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해 왔기에 그 자신이 하찮은 미물에게 주입시키는 깊은 배려와 분별력은 못내 유의미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한동안 기차 바퀴가 질러대는 소리에 갇혀있어도’ “누가 떠나고 돌아오는지 궁금해서/경산역 플랫폼을 서성거렸다//아카시아 한아름 꺾어든 손이/천천히 걸어와서 내게 건네는 꽃다발의 꿈/앞으로 나아가지 않던 자전거처럼/오후 세시는 애잔하고 고요하게 서있었다(경산역에서)”를 통해 ‘누가 떠나고 돌아오는지 궁금함에서 비롯된 세심한 헤아림’은 기억 흔적에 담아둬야 할 본말(本末), 그 자체가 개아의 일상에서 짐짓 ‘오후 3시는 애잔하고 고요하게 서있는’ 끈끈한 결집력임은 못내 자명할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강물이 합수하여 ‘생명의 본원(本源, 海)’에 이르듯 일체의 대상을 끌어안고 포용하는 수성(水性)의 대의야말로 눈부신 시어로 존재의 꽃을 피워내는 창조적인 행태 또한 그와 같은 연계성을 지닌다. 모처럼 맑은 영혼의 소유자인 강지희 시인에게 평자의 각별한 기대감이라면 자존감 빛나는 정신작업을 거쳐 일체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의식하되 피멍든 손으로 움켜잡은 팽팽한 긴장의 끈을 결코 늦추지 말아야 할 뿐더러 모쪼록 영감의 비의(秘義)를 끊임없이 매듭짓고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역사적 소임의 온전한 수행은 무론하고 시적 의미망을 치밀하게 엮어내되 불멸의 시혼을 눈부시게 꽃피울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