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군인들의 증언록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 최근에 출간되었는바, 광주사태 때 남파되어 무기고 무기 탈취 등을 주도하였던 북한군의 연인이자 사실상의 부부관계였던 여성의 증언도 수록되어 있다. 그녀의 증언 중 목포를 경유하여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 관련 몇가지 핵심 요점을 추리면 아래와 같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지휘부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광주에서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는 전라도 내에 잠재해 있는 지하조직들을 간접적으로 동원해서 반정부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 그들이 사전에 일일이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 자세한 증언은 http://cafe.daum.net/issue21/3Fdk/4357 에서 보기.)
위의 탈북여성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남한 자료
위 증언의 핵심 요점은 광주사태는 북한과 남한의 친북 세력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위의 증언은 북한자료이다. 그런데, 위의 증언 하나하나가 남한 자료들로 그 사실성이 입증된다.
『그들이 지휘부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이것은 아주 정확한 객관적 사실이다.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은 조총련으로부터 정치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으로서 광주사태를 주동하였던 윤상원은 조총련으로부터 북한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을 전국 운동권에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서적들의 영향으로 형성된 386 주사파의 함성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은 주지의 사실이다.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요컨대 적화통일이 그 첫번째 노림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5월 16일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첫 문장에 바로 그러한 문구, "민중적 민족 주체 세력의 형성을 통한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가 들어있으며 "민중의 승리와 민족통일 위한 초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등의 표현들이 반복되고 있지 아니한가. 만약 원하는 것이 적화통일이 아니라면 통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두번째 노림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친북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라 하였다. 실로,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되었으며, 시위 구호 중 하나가 "전남국을 세우자"였다.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이 사실 역시 전남대 운동권 핵심부의 증언으로 증명된다. 총학생회장 박관현과 총무 그리고 많은 시민군이 광주사태 동안에 북한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 이 북한 자료 역시 5월 19일 나주에서의 시민군의 최초 무기 탈취 사건의 산증인 김동명 기자의 증언과 짝이 맞는바, 그는 지난 해에 27년간 고이 간직했던 낡은 취재 수첩을 수기 형식으로 공개하면서 북한군 개입 의혹을 5월 19일 당일부터 품었음을 발표하였다.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가 5월 20일 찍은 아래 사진은 5월 20일 나주, 화순, 영암 등 광주 외곽 지역에서 광주로 향하고 있었던 5.18무장단체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은 광주시민군이 5월 19일부터 이미 무장하고 있었다는 김동명 기자의 증언을 분명하게 뒷받침하여 준다.
자, 여기 어째서 북한 자료는 목포라는 지명을 언급하는지의 문제가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인데, 목포에서 있었던 사건들, 목포를 경유하여 북한군 부대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 등이 언급되어 있다. 독자들에게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리라. 그러나 남한 자료에도 처음에는 황당하게 받아들여지는 증언들이 있다. 외부 무장단체가(혹은 가짜 연고생 300 명이) 목포를 경유 광주에 침투하여 시민군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선무 방송을 전옥주 본인의 입으로 하였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방송해 놓고도 그녀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황당하게 여기고 있다. 그 스토리는 이러하다.
탈북군인들이 300 명씩 두 떼로 북한군이 광주로 침투하였다고 증언하였을 때 일각의 반응은 과연 300 명씩 두 떼거리가 광주로 침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느냐였다. 여기서 300명이란 숫자가 중요한 것인데, 놀랍게도 5.18측 자료들이 300명씩 두 떼거리의 외부 무장단체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있음을 입증해 준다.
연고생이 300 명씩 두 떼거리로 광주로 침투한다는 소문이 시민군들 사이에 파다했다. 그런데, 그 많은 연고생이 광주시민군에 입대할 목적으로 침투한 사실이 전혀 없다. 즉, 연고생 300 명은 위장명칭이요, 실제로는 외부 불순세력 300 명이었다. 전옥주는 광주사태의 핵심인물이다. 그녀의 선무방송만 없었어도 광주사태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 하지 않는가. 광주사태 기간 내내 무수한 선무방송을 했던 그녀가 8년후 기억한 것은 연고생 300 명 침투설 뿐이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10.html ). 광주시민들조차 그녀를 간첩으로 의심하여 경찰로 연행하였다. 그녀는 간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쪽지를 준 이들은 간첩들이었다. 즉, 간첩들이 그녀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5.18 단체들에 누가 전옥주에게 쪽지를 주어 목포쪽에서 연고생들이 오고 있다고 방송케 하였느냐고 물으면 그 답이 나온다. 광주시민들 중에는 아무도 그런 쪽지를 전옥주에게 준 이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일진대 간첩들이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이 여기서도 입증된다. "담양쪽에 연ㆍ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계엄군의 제지를 받고 있다고 해 그쪽으로 가보면 없고, 그 뒤 곧 송정리, 목포쪽에서 온다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습니다."고 말할 때 그녀가 생각해도 황당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위의 북한자료를 읽는 독자들도 목포사태가 아니라, 광주사태인데 어째서 목포가 자꾸 언급되는지 황당할 것이다. 그러나 남한 자료들로 그 사실이 여실히 입증된다.
위에서 보듯 1985년 미공개 자료·조선일보 취재일지는 광주사태 당시 목포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북한 자료가 사실임을 보여준다. 해안경찰서를 파괴하면 민주화운동이라는 5.18측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가? 아니다. 해안경찰서를 파괴하는 것은 공산당 군대에 성문의 빗장을 열어주는 꼴이다. 실제로 북한군이 자유로이 목포로 침투하여 활동하였으며, 광주로 침투할 때 광주시민군이 지원하게 하였다. 즉, 광주사태 배후 세력이 북한군에 협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포 주재 박홍서 기자는 목포에는 단 한명의 경관도 군인도 없었음을 그 전날인 5월 21일 오후 6시에도 이렇게 보고하였다. "경관은 모두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 전파출소가 비어 있다. 시내에 군인들은 안 보여." 그렇다면, 북한군이 목포를 아지트로 삼았다는 북한 자료가 사실임이 입증된다. 북한군이 활동하고 있는 목포에 단 한 명의 경관도 군인도 없었다. 자, 여기서 우리는 5.18측에 단 한 명의 군인도 경관도 없었던 목포에서 왜 백 명 단위의 복면 부대가 발포하였는지 물어보자. 목포에서 시민군이 있었다는 말인가?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는 목포에 먼저 복면부대가 출현하였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그가 광주에서 본 복면부대는 외지에서 온 불순세력이었음을 그의 1987년 8월 기사 <「광주사태」그날의 5가지 의문점> 중 네번째 의문점에서 밝힌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2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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