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뜨거운 논의의 맹점이 되어온 독도분쟁을 종식시킬 강력한 비책 동여비고를 아는가.
‘간도협약은 원천무효’이며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일축시키고 대마도까지 대대로 대한민국의 고유한 영토라는 진리가 경북대학교에서 발굴·간행한 동여비고라는 고지도에서 재차 확인됐다.
1998년 6월 동여비고를 발굴 간행한 경북대학교측은 동여비고의 제작시기를 1682년으로 추정하였지만, 향토사학자 박혜범 선생의 연구결과 임진왜란 이전인 1499년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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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여비고 표지 ⓒ 데일리안 | 국제적으로 100년이 지나면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관례가 있어 이번 동여비고의 제작연도에 관한 연구는 2009년이 되기 전에 일제가 맺은 간도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간도가 대대로 이어온 우리민족 고유의 영토임을 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일축시키고 이에 대한 정부차원의 대책을 수립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여비고에 대한 경북대학교 발표문을 살펴보면,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의 우리나라 전국과 일본까지를 포함한 아주 세밀하고 체계적인 지도이며, 특히 앞부분에는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까지의 영토와 지역별 통치 단위를 구분하였으며,
또 역사적 사건 기록은 물론 다르게 표기된 다양한 옛 지명, 각 지역의 특색, 사찰과 읍치, 성곽 및 군사 요충지 등의 표기가 대단히 상세하여 역사, 지리학, 지명학은 물론 국어국문학 등 한국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며, 역사적 정황에 비추어, 1682년(숙종 8)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박 선생은 조선왕조 성종, 연산, 숙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 동람도 등의 기록을 연구한 결과, 경북대학교에서 추정하는 1682년보다 더 오래된 지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 박혜범 선생이 연구한 동여비고에 관한 중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여비고(東輿備考)의 의미를 풀어보면, 동여(東輿)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약자라 할 수 있고, 비고(備考)는 말 그대로 어떤 내용에 참고가 될 만한 사항을 보태어 적는 것. 또는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이니, 동여비고는 원본인지 전사(轉寫)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1499년 10월 연산군의 명으로 보완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함께 한 벌로 제작된 지리서의 제목이고, 내용 또한 그러하다. (중략)
먼저 동여비고에서 전라도 구례현과 경상도 남해현의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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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6월 경북대출판부에서 발간한 동여비고 70페이지 구례현과 91페이지 남해현 ⓒ 데일리안 | 1998년 6월 경북대출판부에서 발간한 동여비고 70페이지 구례현과 91페이지 남해현의 그림이다.
동여비고에서, 구례와 남해 두 현(縣)을 일러 “유곡현(楡谷縣)”과 “난포현(蘭浦縣)”이라한 것은, 동국여지승람과 연산일기를 보면, 1498년(연산 4) 10월 8일 배목인과 문빈의 역모사건으로, 구례와 남해 두 현이 동시에 혁파 강등된 사건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역모사건의 최종 결과인 유곡현과 난포현은, 1499년 10월 보완된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었으며, 이후 1507년(중종 2) 4월 11일 구례와 남해로 그 이름이 복원된 이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은 이름이다.
그러므로 구례와 남해를 일러 유곡현과 난포현으로 표기한 동여비고는 1499년(연산 5) 10월 완료된 동국여지승람의 보완작업과 함께 연산군의 명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조선역사에서 연산군을 폐위(廢位)시키고, 폐군(廢君)이 저지른 패악(悖惡)의 상징인 유곡현과 난포현이라는 고을 지명(地名)을, 반정에 성공한 중종(中宗)이 이듬해 1507년 4월 11일 바로잡아 바로잡아 복원시킨 구례현과 남해현의 지명을, 이후 누군가 다시 유곡현과 난포현으로 바꿔 부른다는 것은, 이야말로 중종의 반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반역이며, 혹 왕실이 몰랐다 해도 억울한 피해의 당사자인 구례와 남해 두 지역민들의 상소가 빗발쳐 지도 제작자는 결코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구례와 남해의 역사에서, 가장 혹독했을 정치적 탄압의 상징인 유곡현과 난포현은, 단기간에 있었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건의 기록이므로, 이것을 바탕으로 다음의 동국여지승람 전라도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와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 그리고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여비고의 제작 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중략)
다음은 울릉도(鬱陵島)를 무릉도(武陵島)라 하고, 독도(獨島)를 울릉도로 표기한 동여비고의 기록이다.
동여비고 강원도 울진현 지도에, 무릉도(武陵島)와 울릉도(鬱陵島) 두 개의 섬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위 동여비고의 기록은 태종 세종 성종 삼조(三朝)에서 관리들을 파견 조사 관측한 결과물이고,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해주는 기록들이 이들 왕들의 실록에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어 독도의 옛 이름이 울릉도였다는 명확한 증거이며, 동시에 이 동여비고는 1511년(중종 6)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물증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울릉도를 무릉도라 한 것은, 정확히 언제 개명되어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문헌에 나타난 무릉도는 1379년(신우 2) 7월 “왜적이 무릉도(武陵島)에 들어와서 반달을 머물다가 물러갔다.”는 고려사절요 기록에 처음 나타난 이후, 조선으로 들어와 태종, 세종, 성종, 삼조(三朝)를 거쳐 1511년(중종 6)까지 조정에서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다 이후 사라진 지명이다.
여기서 무릉도와 울릉도로 표기된 동여비고와는 달리 동국여지승람 울진현 기록과 함께 수록된 동람도에 우산도와 울릉도라 한 것은, 동국여지승람을 개정한 목적에서 밝힌 대로 연산군 당시 행정개편으로 바뀌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울릉도를 무릉도로 표기한 동여비고는 1499년 10월 동국여지승람과 함께 만들어졌다는 또 하나의 물증이지만, 동시에 독도를 울릉도로 표기하고, 울릉도를 무릉도로 표기한 동여비고는 울릉도의 이름이 독도였다는 명확한 기록이므로, 이 대목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허구임을 밝히는 차원에서 독도를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중략)
작금 독도에 대한 터무니없는 일본정부의 영유권 주장으로, 한일 양국의 우호는 물론이거니와 극동아시아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데, 동여비고를 기준하면, 울릉도는 본래 사군이부한시분계지도(四郡二府漢時分界之圖)에서, 우산도(羽山島)라 하였고, 신라 백제 고구려 조조구역지도(新羅 百濟 高句麗 肇造區域之圖)에서는, 우산국(羽山國)이라 하였으며, 동여비고 강원도동서주군총도(江原道東西州郡?圖) 울진현도(蔚珍縣圖)에는, 울진과 삼척 사이 동해바다에 무릉도(武陵島)와 울릉도(鬱陵島) 두 개의 섬으로 그려져 있고, 동시대 함께 제작된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동람도에는, 우산도와 울릉도 두 개의 섬으로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사기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의 기록에서, 우산도(于山島) 울릉도(鬱陵島)라 한 이후, 930년(태조 13) 고려사절요 기록에 우릉도(芋陵島)라 하였고, 1379년(신우 5) 무릉도(武陵島)라 한 이후, 조선으로 들어와,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우릉도(羽陵島)·무릉도(茂陵島)·삼봉도(三峯島)·죽도(竹島)·의죽도(?竹島)·송죽도(松竹島)·송도(松島)등의 이름으로, 불리어오다, 1900년(대한제국 광무 4) 10월 본도인 울릉도를 중심으로 송죽도는 울릉도 부속도서인 죽도(竹島 댓섬)로, 우산도는 석도(石島 독도)로 구분 확정하여, 오늘날 행정명칭이 되었다.
섬이 많은 우리 역사에서, 유독 울릉도에 관한 이름만, 이처럼 10여 가지로 불리면서, 뒤죽박죽으로 혼재된 것은, 빈발한 왜구들의 노략질로 섬이 살육되고, 그로인한 조선왕실의 쇄출(刷出)정책으로 행정이 연속되지 못하고 기록이 멸실된 연유로, 시대와 사람에 따라 개명하면서, 혹은 울릉도와 독도를 뒤바꾸었거나, 혹은 하나로 보았거나, 또는 일본과의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며, 조선시대 울릉도에 관한 숱한 기록들은, 거의 대부분이 울릉도를 약탈하거나,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과 그에 대한 조선의 대책과 반박 기록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기후가 따뜻한 남해안에서, 주변에 사람이 살고 있는 부속 섬들을 거느리고 있는 대마도(對馬島)·거제도(巨濟島)·남해도(南海島)·제주도(濟州道)·진도(珍島)·흑산도(黑山島)에 비하여, 유독 별 쓸모도 없는 동해 해중에 있는 울릉도만 두 개의 섬, 두 개의 이름으로 표기한 것은,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이는 곧 우산도와 울릉도는 한 개의 섬을 혼동한 것이 아니고, 동해바다 가운데 있는 두 개의 섬으로 표기했음을 뜻하는 것이다.(중략)
방대한 전국의 지명과 역사를 대상으로 무작위로 하는 표본조사는 마치 연못에 돌을 던져 개구리가 맞기를 바라는 요행과 같은 것으로, 더 이상은 개인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이쯤에서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언론에 공개하여, 발굴 간행한 경북대학교는 물론이거니와, 관심 있는 전문 학자들로부터, 내 스스로 검증하지 못한 사료와 잘못된 오류가 있다면 시정하여 바로 잡고, 관련학계의 연구에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중략)
끝으로 오늘 일본으로 하여금, 이러한 반문명적인 도발을 유발케 한 책임은 일제가 남기고 간 식민사관이라는 달콤한 알사탕을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우리의 학자들과 우리 내부에 암약하는 친일세력들이 그 원인이다.
우리사회 제반분야에서, 우리가 아직도 추려내지 못한 친일세력들이, 일본을 위해 엎드리는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1998년 대통령이 된 김대중의 작태는, 친일의 차원을 넘어 친선과 보은(報恩)을 가장한 매국노의 짓이었다.
일구월심 꿈꾸던 대통령이 된 김대중이 마치 최우수 성적표를 받아든 아이가 기쁜 마음으로 부모에게 달려가듯, 제일 먼저 일본으로 달려가 세계의 이목이 주시하고 있는 앞에서, 60여 년 전, 암울한 식민지통치하에서, 조국을 버리고 일제에 충성하라고 가르친 일본인 교사를 보은(報恩)이라는 지고지순(至高至順)한 명분으로 찾아가 “스승님 제가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입니다.”하고 엎드리며, 전 세계의 인류 앞에 일본의 조선침략과 창씨개명을 정당화 시켜준 것은, 변명의 여지없는 매국노의 작태였다.
이러한 매국노 김대중의 작태로 말미암아 일본인들은 백 년 전 자신들이 저지른 조선침략과 반문명적인 창씨개명을 미개한 조선인들에게 현대문명을 교육 전수해준 시혜(施惠) 즉 은혜를 베풀었다는 당위성을 확실하게 담보하게 되었다.
어디 이뿐인가? 이후 일본의 은혜가 뼈에 사무친 김대중은 마침내 1999년 1월 22일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우리의 영토인 독도와 그 주변수역을 무주공해(無主空海)으로 만들어 일본천왕에게 진상하여버렸는데. 이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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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어업협정 수역도(水域圖) ⓒ 해양수산부 홈페이지 | 위 그림은 친일 매국노 김대중 정부가 1999년 1월 22일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우리의 영토인 독도와 그 주변 수역을 주인 없는 섬과 바다로 만들어 일본천왕에게 진상하여버린 독도와 그 수역도다.
그림에서 보듯이, 일본의 영해로 철저히 보호되어 있는 대마도와 그 주변 수역과 한·일 공동어로수역으로 만들어버린 독도를 비교하여 보면, 김대중이 무슨 짓을 했는지, 한눈에 알 수가 있다.
대한민국 유사 이래 가장 민주적이고, 최고로 청렴하고, 평화적인 정권이라는 등, 온갖 미사여구로 국민들을 기만한 김대중 정부가 작성한 한·일 어업협정 수역도를 보면, 지도에서 “한·일 중간수역”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니, 우리가 무엇으로 일본의 주장을 반박할 것인가?
더 늦기 전에 한·일 어업협정을 파기하고, 친일 매국노 김대중과 그 일당들을, 반민족의 죄로 다스리려, 한민족의 분명하고 단호한 의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친일파들의 일본에 대한 보은의 잔치가 김대중으로 끝났는가? 했더니, 다시 줏대 없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 6월 6일 현충일에 일본으로 달려가 고이즈미 총리와 축배를 든 것은, 즉 이른바 자기 부모의 제삿날에, 그것도 부모를 욕보인 원수를 찾아가 술잔을 부딪치며 축배를 든 것은, 술 취한 기생도 혀를 차며 돌아설 작태였다.
한마디로 김대중과 노무현이 2대에 걸쳐 저지른 이러한 작태는 우리민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지만, 일본에게는 조선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시켜주는 다시없는 기회제공이었으며 즐거움이었다.
생각해보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60여 년 전, 암울한 식민지통치하에서, 조국을 버리고 일제에 충성하라고 가르친 일본인을 보은(報恩)이라는 지고지순(至高至順)한 명분으로 찾아가 스승이라며 엎드렸는데, 과연 한국의 대통령이, 식민지 시대 만났던 일본과 일본인들을, 보은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가서 엎드릴 만큼, 그들이 은혜로운 존재였는가?
또 우리가 영토를 포기하면서까지 먹어야할 생선이 무엇이며, 그 알량한 생선이나마 제대로 먹기나 하고 있는 것인가?
대저 온 나라 국민들이 호국의 영령들을 위해 엎드리고 있는 그날, 하하거리며 일본으로 달려가 고이즈미를 부둥켜안고, 술잔을 부딪혀야할 시급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이런 쓸개 빠진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을, 다시 아시아를 제패(制覇)할 꿈을 꾸고 있는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친일 매국노들이 아니라면, 변명의 여지없는 쓸개 빠진 짓거리였다.(중략)
끝으로 식민사관으로 점철된 우리시대의 자화상과 그 폐해를 함께 공감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동국여지승람 제55권 평안도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의 기록과 동여비고 강계도호부의 지도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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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은 동국여지승람 강계도호부의 기록이고, 우측은 동여비고 강계도호부 지도다. 지금 중국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는, 이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동여비고 지도 속의 만주 벌판이 1909년 일제가 간도협약으로 팔아먹은 우리 고유의 영토였다. ⓒ 데일리안 | 황성평(皇城坪) : 만포(滿浦)에서 30리의 거리가 되는 곳으로 금(金) 나라가 도읍했던 곳이다. 황제묘(皇帝墓) : 황성평(皇城坪)에 있으니, 세상에서 전해 내려온 말로는 금(金) 나라 황제묘라 하는데 돌을 갈아 만들었다. 높이가 가히 10장이고 안에는 침상이 셋이 있다. 또 황후묘와 왕자묘가 있다. 구랑포동(仇郞浦洞)ㆍ서동(瑞洞)ㆍ용괴동(用怪洞)ㆍ고도수동(古都水洞) 이상은 강계(江界)에 있다. 옹촌리(甕村里)는 건주위(建州衛)에 속하고 만포(滿浦)와의 거리가 2백 70리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발췌> 위 “동국여지승람 강계도호부”의 기록을 보면, “구랑포동(仇郞浦洞)ㆍ서동(瑞洞)ㆍ용괴동(用怪洞)ㆍ고도수동(古都水洞) 이상은 강계(江界)에 있다. 옹촌리(甕村里)는 건주위(建州衛)에 속하고 만포(滿浦)와의 거리가 2백 70리이다.” 하였는데, 이는 지금의 장군총이 분명한 우리 땅이고, 옹촌리는 명나라 건주위(建州衛)에 속한 땅임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왕명으로 만든 동국여지승람에, 압록강 이북을 우리의 영토로 규정하고, 이것을 명나라가 인정한 것은, 명나라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영토임을 말하는 것이며, 오늘 우리가 “장군총(將軍塚)”이라고 부르는 능(陵)의 명칭이 “황제릉(皇帝陵)”이며, 그 옆의 작은 총(塚)은 “태자릉(太子陵)”이었고, 그곳을 일러 “황성평(皇城坪)”이라 불렀던 우리 고유의 영토였다.
여타 다른 많은 한국과 중국의 기록들을 보아도, 성스러운 단군이 도읍하고, 고구려가 말을 달리던 대륙이, 우리 한민족의 영토였으며, 황성평(皇城坪)은 저 유명한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이 있었던 곳으로 우리 고유의 국토였으며, 지금도 조선족들의 사이에는, “황제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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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촬영된 장군총 ⓒ 데일리안 | 그러나 우리가 일제침략으로 잃어버린 영토가 어디 여기 황성평(皇城坪) 뿐이랴 ! 동국여지승람 제50권 함경도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를 보면, “공험진(公?鎭) 고령진(高嶺鎭)에서 두만강을 건너 고라이(古羅耳)를 넘고, 오동참(五童站)ㆍ영소참(英所站)을 경유하여 소하강(蘇下江)에 이르는데, 강가에 공험진(公?鎭)의 옛터가 있다. 남쪽은 구주(具州)ㆍ탐주(探州), 북쪽은 견주(堅州)와 연접되어 있다.
선춘령(先春嶺) 두만강 북쪽 7백 리에 있다. 윤관(尹瓘)이 공험진(公?鎭)에 성을 쌓고 드디어 비석을 영(嶺) 위에 세우고, ‘고려의 국경’이라고 새겼다. 비석의 사면에 모두 글씨가 있었는데 모두 오랑캐들이 지워버렸다.”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1909년(순종 3) 일제가 간도협약으로 팔아버린 우리의 땅, 우리 민족이 일어서고, 조상들의 피와 살이 묻힌 땅이라는 사실 앞에서, 울컥 눈물이 난다.
정부는 이제라도 일본정부에게, 이 간도협약의 무효를 선언케 하고, 이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며, 중국정부에게는 간도는 우리 고유의 영토임을 당당하게 선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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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여비고 함경도 회령도호부를 보면, 동국여지승람과 똑같은 기록이다. 뒤로는 말갈(靺鞨)이다 하였고 두만강에서 7백리 맨 위 수빈강(愁濱江)까지가 우리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다. ⓒ 데일리안 |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것은, 경북대에서 발굴하여 발간한 동여비고를, 아무리 눈을 까집고 다시 보아도, 삼한(三韓) 지도를 시작으로, 1500년 대 제작 당시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일대에서부터, 대마도까지, 우리의 강역으로 표시된 지도를 설명하면서,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라고, 축소 규정한 학자들의 해석은, 1909년(순종 3) 일제가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음모로, 간도협약을 맺어 우리의 영토인 간도를 중국에 팔아버린 이후,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의 영토를 압록강에서 제주도로 축소 교육시킨 전형적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신봉(信奉)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이 동여비고의 해석과 소개는, 제작 당대의 강역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동여비고를 만든 제작자의 의도대로,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가 아니라, 최소한 중국 요영성(遼寧城) 환인현 “우라산성(?羅山城, 오녀산성 五女山城)에서부터 대마도까지”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이하 생략)
박 선생은 이번 동여비고의 연구는 “옥룡사지 발굴조사에 대한 의혹을 밝히는 과정에서 연구된 부산물”이라고 밝혔지만, 만일 동여비고가 박 선생의 주장처럼 1499년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진다면 간도협약으로 중국영토가 되어버린 간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것이 재차 입증되는 셈이다.
또한 박 선생은 “연일 망언을 일삼고 있는 일본에게 확실한 근거자료를 제시해 다시는 망언을 일삼지 않도록 정부차원의 정확하고 신속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덧붙여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전에, 역사의 기록들을 살펴보고, 항차 일본을 이끌어갈 후손들에게, 오늘 자신들이 부정하고 왜곡시켜버린 자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것이다”며 뼈있는 말을 던졌다.
정부는 이번 기회를 거울삼아 우리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의 일환으로 KHKMS(Korean History Knowledge Management System)을 구축하여 산재해 있는 역사를 하나로 묶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그 어떤 나라도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쉽게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향후 동여비고에 대한 재검증 절차가 남아 있지만 이번 박 선생의 연구는 식민사관으로 얼룩져 왜곡된 역사로 인해 일그러진 우리의 얼굴을 바로잡는 초석이 될 것이며, 정부차원의 근본적인 대책이 수립되어 더 이상 우리의 근본을 뒤흔드는 망언이 국제사회에서 난립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편 데일리안은 박혜범 선생의 연구결과의 신뢰성에 대해 경북대학교측과 관계자들의 심도있는 연구를 통해 동여비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역사의 중요성을 각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박혜범 선생은 광양시 옥룡면 옥룡사지 발굴조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으며 ´원홍장과 심청전´,´역사천자문´을 저술한 향토사학자이다.
# 박혜범 선생의 동여비고 연구에 대한 전문을 게재합니다. 아래를 클릭하시면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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