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싸운 베트콩이란 그들은,
비루한 빨갱이 인가?
숭고한 민족주의자인가?
구수정의 역사진실관; 2
『 』안의 글들은 구수정 선생의 해설을 녹취·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덧붙여 보았다.
『먼저 하노이에 있는 바딘 광장의 모습이다. 호찌민의 영묘가 있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1945년 9월 2일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습이다.
호찌민 주석이 낭독했던 독립선언문 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진본은 하노이 호찌민 박물관에 있다.
"베트남은 자유와 독립과 진실을 탐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 베트남 전체 민족은 이러한 독립과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 모두의 정신과 역량과 생명과 재산까지 다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 이것은 독립선언문 마지막 부분이다.』
1945년 8월
6일, 미군 폭격기에서 떨어진 폭탄 하나가 터져 오렌지 색 섬광이 번쩍이는 순간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자, 30만 명이 사는 히로시마는 순식간에 인류가 처음 겪은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9일, 그래도 일본이 곧바로 투항하지 않자 미국은 나가사끼에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
11일, 일본이 패배하는 순간을 기다려 만반의 준비를 해 온 호찌민은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호찌민은 인민에게 호소했다.
“이제 곧 연합군이 베트남에 진입할 것이다. 연합군을 상대하려면 막강한 힘을 갖춰야 한다. 그 힘은 일본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강대해질 것이다.
동포들이여! 궐기하라!”
15일, 일왕은 미국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16일, 지압 장군의 베트민은 홍강 삼각주로 진격했다. 그날 밤에 한 분대가 하노이 시내의 한 극장에 진입해 영화를 중단시키고 연설을 했다. 극장 안에 있던 일본인 장교 하나는 도주하다가 총살당했다.
17일, 하노이에는 베트민이 자랑하는 금성홍기가 휘날렸다.
19일, 하노이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일본 괴뢰 정부의 사무실을 모두 점거했다. 일본군은 감히 저항도 못하고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은 어제의 도둑인 프랑스인 주택을 습격했다.
20일, 베트민은 하노이를 완전히 지배했다.
21일, 일본이 세운 괴뢰 황제 바오 다이는 하노이 새 정부에서 퇴위하라는 전문을 받았다.
24일, 하노이의 베트민은 괴뢰 황제 바오 다이를 폐위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호찌민의 베트민은 8월 11일부터 8월 24일까지 13일 동안에 ‘8월 혁명’ 과업을 완료했다.
25일, 사이공 시민 8만여 명이 거리를 가득 메우자, 일본 괴뢰정부는 완전히 물러났다. 베트남은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에 완전한 자주독립정권을 수립했다. 베트남에는 프랑스와 일본이라는 야수가 도사라고 있었다. 그때 베트민이 섣불리 나섰더라면 야수의 만행으로 봉기는 실패했으리라. 시기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 기회를 놓치지 않는 치밀성으로 일제히 총궐기해 불과 두 주 만에 완전 자주독립을 쟁취한 ‘8월 혁명’이 혁명가 호찌민의 천재성을 입증한다. 그 날 호찌민은 비밀리에 하노이에 들어왔다. 남쪽으로 300km 떨어진 고향 낌리 엔의 조그만 초가집을 떠난 지 무려 40년 만에 하노이 땅을 처음 밟았다.
26일, 보 응우옌 잡의 군대가 인민의 뜨거운 환호 속에 하노이에 당당하게 들어왔다.
30일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는 베트민 대표에게 베트남 지배를 상징하는 황금 칼을 넘겨주었다.
얼마 전 쩐 짜오에서 연 ‘국민회의’ 결정에 따라 호찌민을 국가 주석으로 추대했다. 호찌민은 주석직을 수락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혁명가다. 내가 태어났을 때의 조국은 노예 상태였다. 따라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이것이 내 공이라면 미미한 공이다. 내 동지들은 이 같은 내 과거를 참작하여, 나를 정부의 수반으로 내세웠다.”
석달 뒤에 외신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주석직을 수락한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명예나 부에 대한 욕망은 추호도 없습니다. 나는 다만 내 인민들이 나를 신뢰하기 때문에 이 직책을 맡을 뿐입니다. 나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 싸움터로 가는 군인일 뿐입니다.”
‘8월 혁명’은 영예로운 승리다. 백년의 식민 통치와 천년의 봉건체제를 타도했기에. 더구나 인류 역사상 가장 겸손한 지도자가 탄생하였기에.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요코하마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서명하기를 모두 기피해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장관이 마지못해 악역을 떠맡았다.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왼쪽다리를 잃은 외교관이다.
바로 그 날, 하노이 시는 붉은 깃발이 뒤덮었다. 베트남어,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그리고 러시아어로 쓴 슬로건을 적은 현수막이 길거리마다 내 걸렸다. “베트남인을 위한 베트남”, “프랑스 식민주의 타도”, “독립 아니면 죽음”, “임시정부를 지지하라”, “호찌민 주석을 지지하라”, “연합국 사절단 환영”…
하노이 프랑스 총독부 관저 앞 퓌지니에 광장에 새벽부터 수만 군중이 운집했다. 시내 모든 점포들은 문을 닫았다. 군중은 여러 날을 흥분상태로 보내다가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상에 알려진 신비한 혁명 영웅을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활기와 자신감으로 충만한 군중은 당당한 주인 정신으로 환희의 새날을 마음껏 봉축했다.
수많은 농부들도 몰려왔다. 인민 민병대원들은 봉과 칼을 찼다. 사원 병기고에서 가져 온 구식 청동 곤봉과 긴 자루가 달린 칼을 찬 사람도 있었다. 예복을 입은 부녀 농부들 중엔 고풍스러운 예복, 노란 터번과 선명한 초록색 장식띠를 두른 사람도 있다. 하노이 주변에서 사는 가난한 시골 농부들이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도시로 걸어들어 온 적은 일찍이 없었다.
늙은이들은 엄숙했고, 소년 소녀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밝게 웃었다. 어린이들이 가장 생기 있게 놀았다. 장래는 이들이 자주 독립 국가의 당당한 주인이다. 승려와 카톨릭 사제들도 새 역사 창조를 봉축하려고 수도원을 떠나 왔다.
위대한 역사를 장식한 그날, 9월의 따가운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광장 중간에 목제 연단을 설치했다.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중년 신사가 연단에 올라 인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찌민, 그 모습은 아직 낯설었다. 심지어 이제까지 그 인사가 탄 차의 운전수조차 그 정체를 몰랐다. 이 운전수는 휴가를 얻어 자신의 아버지를 모시고 독립기념일에 참석한 뒤에야 새로운 주석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극소수 사람만이 그 인사가 프랑스와 러시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해서 베트남에도 널리 알려진 전설적 애국자 응우옌 아이 꾸옥(阮愛國: 애국자 응우옌이란 뜻, 호찌민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별명)이란 사실을 알았다. 30년 넘게 해외에서 거친 유랑 생활을 하며 프랑스 지배자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여러 감옥에서 갖은 고생에 시달린 응우옌 아이 꾸옥으로 알아온 호찌민이 이제야 돌아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직전까지 이 일을 상상조차 못했다.
호찌민은 넓은 이마와 빛나는 눈, 성긴 수염을 기른 야윈 늙은이로, 낡은 모자와 깃 높은 카키 재킷, 그리고 흰 고무 샌달을 신고 비로소 대중 앞에 검소한 정체를 드러냈다. 주석 재직 24년 동안, 국경일이나 외국을 방문할 때도 한결같이 평범한 옷을 입었다.
‘노인네’의 활기찬 모습에 자못 놀란 사람도 있었다. 주석의 거동에서 상류층 인사들이 지니는 거만한 거동을 엿볼 수조차 없었다. 고향 응에 안의 시골 말투로 자신이 쓴 베트남독립선언문을 읽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신은 인간에게 아무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생존,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그것이다.” 놀랍게도 미국독립선언문 첫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연설은 잔잔하고, 온화하고, 또렷하였다. 종종 엄숙한 행사에서나 듣는 유창한 변설을 들을 수 없었다. 이런 어조는 더욱 깊은 애정과 굳은 결의를 시사하는 듯했다. 모든 문장과 모든 단어들은 활력으로 충만해서 모든 인민의 폐부를 꿰뚫었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중간에 갑자기 멈추고 물었다.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제 말 잘 들립니까?”
“예”, “예”
수십만 명의 대답이 일제히 우뢰 같이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열정적인 갈채와 함성소리가 폭발했다. 이 소박한 말 한 마디가 위대한 지도자와 인민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기운을 없애고 이들 사이에 끈끈한 유대를 만든 계기였다. 그 질문은 호찌민이 한 국가의 지도자로써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모든 것들을 버렸음을 의미했다.
이때부터 호찌민과 인민은 한 몸이었다. 가냘픈 몸매에, 산양 모양의 수염이 상징하는 역사적 호찌민이 탄생하였다.
독립선언문을 이렇게 끝냈다. “베트남 인민 모두는 몸과 마음을 다 하여,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더라도, 자유와 독립을 수호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80년 간 연면連綿히 이어온 민족 투쟁 끝에, 막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선언이다. 가장 강인한 혁명적 선구자의 피의 대가다. 무산 계급과 민족의 이익을 위해, 총살대 앞에서 검은색 눈가리개를 벗고 ‘베트남독립 만세’를 외친 인물들의 혼이다,
신비에 싸인 투사 호찌민이 인민에게, 조국 베트남이 이제 모든 억압에서 풀려났음을 엄숙히 선언한 것이다. 일본이 패망한 지 불과 18일 만이다. 전광석화 같은 역사 변천의 가속도! 베트남의 역사는 이 순간을 유사 이래 가장 감격적 순간으로 기록할 것이다. 호찌민은 전 인류가 앞다퉈 숭앙하는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30년 전에 호찌민이 “가련한 인도차이나여! 제 죽어가는 기력을 즉각 회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명랑하리라”고 한 통한이 다시는 호찌민을 억압하지 못할 것이다. 베트남 민족이 소생했기에.
호찌민의 독립선언이 지니는 심장한 의미는 러시아 혁명 이후 최초로 자신의 힘으로 공산당 정권을 세운 것이고, 더욱이 한 세기에 걸쳐 혹독한 착취를 당해온 약소민족이 어떤 외세의 도움도 없이 완전히 자력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추방하고, 인민이 압박과 착취, 성차별이 없는 자유롭고 풍요롭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세계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이 역사적 의미를 지닌 퓌지니에 광장의 이름을 한층 더 광채를 띤 바딘 광장이라 명칭을 바꾸었다.
<현재의 주석궁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총독관저였다. 이 앞 광장을 ‘퓌지니에 광장’이라 불렀다. ‘퓌지니에’는 로마카톨릭 사제인 프랑스인의 이름이다. ‘바 딘’이란 이름이 나온 것은 1886년 9월부터 1887년 1월까지 탄화성의 바 딘에서 대프랑스 항전운동을 일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며, 독립선언 뒤부터 하노이 인민들은 퓌지니에 광장을 바 딘 광장 또는 독립 광장으로 부른다. 우리의 대표적 광장인 여의도 광장은 역사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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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처삼촌 김규익은 내가 베트남에서 사온 보 응우옌 잡의 ‘unforgettable days' 영어본을 번역하셨다. 다음은 김규익의 해석이다.
<호찌민은 미국 독립선언문을 원문 그대로 인용했다는 끊이지 않는 역사가들의 오류가 생겨났다. 호찌민은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미국판을 자신의 견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수정했다. 호찌민은 영문판 원문을 참조했지만, 원문의 서두를 느슨하게 자신의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개역했다. “......all men are created equal"을 ”......all people......"로, 이는 여성을 새로운 베트남의 시민으로 포함하려는 호찌민의 오랜 평등사상을 반영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성경에서 men을 people이나 persons로 수정한 것이 그 뒤의 일이니. 놀라운 페미니스트의 시대를 앞선 발상이다.)>
역사가들 다수가 이제까지 호찌민이 미국독립선언문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알아왔지만, 그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무지의 소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