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가난한 농부. (수기)
일본의 식민지 아래 있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일본으로 건너가 옷 만드는 공장을 하여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해방 후 귀국하여 김해군 신전이란 동내에 정착 하게 되었으나
할아버지는 외동이라 적산농지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 중에 있는
사촌이 "꼭 이길 수 있으니 돈을 빌려 달라”는 말을 듣고 동네에서
6백m쯤 떨어진 곳에 3칸 오두막집과 논 3백 평 밭9백 평을 사고는
논 30마지기(김해 신전은 논 한마지기가 150평이다) 살 수 있는 돈을 다 빌려 주었으나
사촌이 정부와의 소송에서 지는 바람에 수년 후에 돈을 돌려받았으나 이미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돌려받은 돈은 휴지쪼가리에 지나지 않았다 고 들었다.
그 후 할아버지는 반 실성하였다가 돌아가셨고 우리식구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우리5형제 이렇게 아홉 식구가 살기 힘들어 할머니는 재물장사를 하셨고. 삼촌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셨다. 그 당시는 너 내 할 것 없이 살기 힘들었고 봄이면 들에 나가
쑥이나 나물 뜯는 것이 일상 이었다.
국민 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갈 때 동그랗게 만든 주먹밥에 김 한 장 으로
싸서 소금으로 간을 맞춘 도시락 하나들고 용돈 한 푼 없이 소풍을 가서 언덕 비탈에서
점심을 먹다가 잘못 떨어뜨려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 가는 바람에 너무 창피스러웠고
하루 종일 굶어 배가 몹시 고팠다.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은 중학교 다닐 때 여학생들 중에 제일 옷 색깔이 탈색된 것을
입고 다녔다.
그렇게 어렵게 사는 중에 부산에 사시는 작은 외삼촌께서 논 열세 마지기를 사서 농사를
짓게 하셨고 가을에 타작할 때 나오는 뒷북떼기 에는 벼이삭이 많이 썩여있어
그것은 우리 차지였다. 사정을 아는 동네 가꾸리질 하는 일군들이 일부러 벼이삭을 많이
끌어넣기도 하였고, 소도 한 마리 사주어 소로 농사일을 하게 하였고 나중에는 리어카를
사주어 농사일이 한결 쉽게 되었다,
대수술을 일곱 번이나 받은 아버지께서는 광목 붕대로 복부를 칭칭 두르시고 일 하셨다.
나는 상급하교 가기를 포기하고 중학교 졸업 후 양계를 시작 하였고,아래채를 헐고 그곳에
닭을 키웠다, 어머니께서는 양철 동이에 왕겨 한층 계란 한층 쌓아 하루에 두 번 다니는
부산 외갓집으로 가져가 팔고 자갈치 시장에가 고기머리 내장 꼬리 등을 사서 오시면
조개껍질 절구에 빻은 것과 부드러운 쌀겨, 보릿겨 푸른 풀 등을 썩어 사료를 만들어 주고
둘 때 남동생은 개구리를 잡아와 삶아 사료에 썩어 주기도 하였다.
병아리는 부화장에서 사와 아래채 방안에서 키웠는데 작은 외숙모님께서 보고는 냄새 난다고
기겁을 하셨다,
나는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와서 닭장청소를 하는데 여름에는 그야말로 중노동 이었다,
그러다 군대 갈 나이가 되어 내가 군에 가고 나면 아버지 혼자 너무 힘들 것 같아
닭 한 마리 씩 가두어 키우는 굵은 철사로 만든 KG사(계란은 밑으로 굴러 나오고 게분은 아래로 빠지도록 설계된 닭 집을 들여와 설치 해놓고
군대를 가는 데 나와 같이 가는 다른 애들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요, 눈물까지 흘리는 애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분 좋게 떠났다,
경기도 포천에서 근무하다 첫 휴가를 올 때는 겨울이었는데 눈이 많이 왔고 얼마나
눈이 왔든지 소나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뚝! 소리를 내며 불어지기도 하였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께서 경부 고속도로 건설할 자금을 마련키 위하여 미국에 부탁 했으나
거절당하자 서독 “뤼브퀘”대통령께 차관 형식으로 빌렸고 우리나라에서는 광부와 간호사들이 서독에 파견되어 남자들은 막장에서 연탄 캐는 일을 여자 간호사들은 시체 닦는 일을 하였다,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를 기분 좋게 달렸다.
독일제 버스를 들여와 비행기처럼 여자 승무원이 안내를 하고
지나가는 지역의 이름과 특산물을 소개해 주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길이 넓고 차는 많지 않아
도로위에 차가 띄엄띄엄 한 대씩 보였다.
추풍령 고개를 지날 때는 위령탑이 있었고 고속도로를 만들 때는 처음이라 기술도 부족하고
터널을 뚥을 때 산이 무너져 인명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정적인 김영삼. 김대중. 이는 터널 뚥는 것을 반대하여 도로위에 들어 눕기도 하였으나
완성 후 에는 그 도로를 이용 했었다고 한다.
내가 제대를 앞둔 3개월 전에 김신조 일당, 무장 공비들이 청와대까지 침투하였던 사건이 있었고 그 바람에 우리는 군대 생활 36개월을 꼬박 다 채우고 제대 했다.
제대 후 집에 오니 KG와 닭들은 한 마리도 없었고 그래서 시작 한 것이 비닐하우스 로
참외 농사를 지었다.
그 당시만 해도 김해 대저 에서나 하우스 재배를 하였지만 내가 재대하여 보니 우리 동내에도
터널 재배를 하고 있었다, 같은 교회 다니는 유봉화 (나보다 2살 아래)와 함께 하우스 재배를
처음 시작 하였다. 책자도 사서보고 우리 마을과 2K로 떨어진 유동 이란 마을에
나이 많은 분이 오이를 하우스재배를 하고 있어 물어보기도 하며 농사를 지었다.
모종은 잘 키웠으나 문제는 본밭에 옮겨 심고 나서 활착이 잘되지 않아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주기도하고 약도 뿌리고 하였으나 잎이 말라 죽어 갔다,
선배한테 물어 보았으나 옆에서 지켜보지 않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했고
모종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중간 중간에 직파를 하라고 하여 그렇게 씨앗을
바로 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실은 하우스를 시작 하면서 집에서 기르던 소를 한 마리 팔아서 그 돈으로 하우스 지을 대나무를 사왔다, 그 당시 송아지는 농가에서는 살림 밑천 1호였다,
물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샛강에서 물을 열심히 져다 날라 주기도 하였다.
첫째 남동생도 물 긷는 일을 열심히 물을 져다 날랐고 온 식구가 매달려 고생을 하였다.
하우스 안에서 일하면서 들으니 나보다 한 살 많은 옆집 “최기환” 이가 동래 아줌마들 하고
보리밭 메고 오며 하는 말이 “외도는 소를 잡아 소털을 온 논에 다 뿌려 놓았다” 하는 말이 들렸다,
정말 마음은 태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괴로웠고 절로 “아이고 하나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하고 간절한 기도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하우스안의 작은 터널 에는 겨우내 아버지와 함께 짠 거적을 밤에는 덮고 아침 아홉시 경부터
햇살이 따뜻해지면 벗겨 주는데, 나는 너무 걱정이 되어 논에만 가면 거적을 젖히고
모종의 상태부터 살펴보며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보면 거적 벗기는 일은
거의 동생이 다했다, 그 후 한동안 동생은 거적 벗기는 일은 자기가 다했노라고 하였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실로 온 식구가 매달려 일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3월 초가 되었고 하루는 밤새도록 비가 왔고 아침에 비가 그치고
상쾌하고 푸근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논으로 가서 거적을 벗겨보곤 첫눈에 모종에 생기가
도는 것이 느껴져 자세히 드려다 보니 대궁만 남은 남색의 모종의 밑 부분에 하얀 새 뿌리가 돋아나는 것을 보았다, 아하! 온도가 부족하여 그랬었구나,!
나는 기쁨의 환성을 지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기쁨의 소식을 식구들에게 전하였다.
경험이 없다보니 이제 부터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온도가 부족 하여 그런 줄 알고는 이후에는 열을 너무 가두어 모종이 웃자라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계분을 주어 비옥 한데다 온도가 높으니
참외 잎이 아니라 호박잎처럼 잎이 무성하게 자랐다, 손자 순에서 열매가 달리므로
손자순의 잎은 그대로 두고 아들순의 커다란 잎들은 속아주고 손자 순의 잎들이 햇볕을
잘 받게 해주고 비닐도 높이 걷어 올려 하우스안의 온도를 적절하게 맞추어 주었다.
중간 중간에 직파했던 모종들은 밭에다 옮겨 심었다,
드디어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고 맨 먼저 달린 참외 열두서너 개는 아무도 따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한두 개 는 너무 익어 샛노랗게 보기 아름다웠다,
먼저 익은 참외는 목사님과 식구들이 모여 깎아보니, 맨 먼저 익은 참외 두 개는 보기만
아름다웠지 안은 농해서 먹지를 못하고 버렸다,
그렇게 지은 농사가 계산해보니 여덟 마지기 벼농사 수익과 같았고 그해 빚을 다 갚고도 대나무 거적은 그대로 남았다.
그 동안 군에 가기 전에 양계 5년 했던 것 과 참외 농사 했던 수익으로 바로 동네 앞에
논 1200평을 샀다.
그 이듬해는 2050평에 참외 농사를 지었고 경험이 있어 순조롭게 잘 지었고
그해 결혼도 하였다,
그 당시는 동네 안에서 닭똥 냄새를 풍기며 양계를 하여도 못하도록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고마운 동네 어르신들 이제는 다 돌아가시고 옛 친구들만 한둘 남아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참으로 지나고 보니 하나님 앞에 감사할일 뿐이다. 어려울 때 참고 견디며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도 도우신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18편 1절.
송죽 : 박외도
2025년 2월 18일.
첫댓글 반갑고, 감사합니다.
금년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올려주신 精誠이 깃든 作品 拜覽하고 갑니다.
恒常 즐거운 生活 속에 健康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