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현(李世賢)
[세계] 상서공파
[생졸년] 1656년(효종 7)~1697년(숙종 23). / 향년 41세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휘(諱)가 문빈(李文彬)으로 벼슬은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했고, 조부(祖父)는 휘가 뢰(雷)로 벼슬은 장사랑(將仕郞)을 지냈으며, 증조부(曾祖父)의 휘는 용근(庸謹)으로 벼슬은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했다.
공(公)은 군산 지역[옛 옥구현] 출신의 문관이자 학자로, 자는 석경(碩卿)이고, 1681년(숙종 7) 성균시에 급제하고 출사(出仕)하여 예조좌랑·형조좌랑·공조좌랑을 역임하였는데, 이때에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났다.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희빈 장씨 소생의 아들로 세자를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이 이를 지지한 남인(南人)에 의하여 패배하고 정권이 남인에게 넘어간 사건을 이른다.
극력 반대하던 송시열은 파직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고 그를 따르던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 수명이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이렇게 정국이 삼엄한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홀로 상소를 올려서 그 부당함을 통박했으나 미치지 못하였고 오히려 득세한 남인들의 미움을 사서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공이 도성을 떠날 때 공과 교유를 했던 친구들인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이우당(二憂堂) 조태채(趙泰采)·소재(蘇齋) 신태영(申泰英)·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등과 석정(惜情)을 나눴고 특히 친숙했던 네 친구, 나중에 ‘노론 4대신(老論四大臣)’으로 불리웠던 이이명·김창집·이건명·조태채의 4대신이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지어준 시(詩)가 《사대신 풍월축(四大臣風月祝)》이라 하여 가보(家寶)로 전하고 있다.
공은 임지(任地)에 도착하여 얼마 후에 졸하였고 뒤에 옥구 삼현사(三賢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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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현(李世賢)
[정의]
조선 시대 군산 지역[옛 옥구현] 출신의 문관이자 학자이다.
[개설]
이세현(李世賢)은 군산 지역에 세거한 경주 이씨 상서공파 출신으로 1681년(숙종 7)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91년(숙종 17)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예조 좌랑을 지냈고, 율곡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모실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상소문 등 유고가 남아 있다.
[가계]
이세현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석경(碩卿)이다. 이세현은 경주 이씨 중시조 이거명(李居明)의 28세손이고, 경주 이씨 상서공파 파시조 이과(李簻)의 12세손이며, 상서공파 옥구 입향조 이몽원(李夢黿)의 5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봉정대부 군자감 정을 지낸 이용근(李庸謹)이고, 할아버지는 장사랑을 지낸 이뢰(李雷)이다.
아버지는 장사랑을 지낸 이문빈(李文彬)이고, 외할아버는 고전선(高傳選)[본관 제주]이다. 장인은 송시조(宋時祖)[본관 여산]이고, 두 번째 부인의 아버지는 전익태(全翊台)[본관 천안]이다.
[활동사항]
이세현은 1656년(효종 7)에 태어나,1697년(숙종 23)에 사망하였다. 1681년(숙종 7) 식년시 생원시에 3등 58위[총 100명 중 88등]로 합격하였다. 『신유 식년 사마 방목(辛酉式年司馬榜目)』에 이세현의 거주지가 옥구(沃溝), 전자(前資)는 유학(幼學), 부모는 구경하(具慶下)[응시 당시 부모가 생존해 있었다.], 아버지는 유학(幼學) 문빈, 아우는 세태(世泰)로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후 1691년(숙종 17)에 증광시 문과에 을과 4등[총 42명 급제자 중 7등]으로 급제하였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이세현의 전자(前資)가 생원(生員), 관직은 예조 좌랑(禮曹佐郞), 부(父)는 문빈이라고 수록되어 있다.
문과에 급제한 이후 예조 좌랑을 지냈고, 남정중(南正重)의 천거로 의정부에 들어갔다가, 남정중이 화(禍)를 당하자 부당하다고 주장한 까닭에 외직인 어천 찰방으로 제수되었다가, 1697년(숙종 23)에 근무지에서 사망하였다. 자태가 위엄이 있었으며, 문장과 서화에 능하고, 성품이 강직하였다.
1689년(숙종 15) 무렵에는 유생으로써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두 선생을 문묘에 모실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명사였던 민진원, 조태채, 이건명 등이 다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학문과 저술]
상소문 등 유고(遺稿)가 남아 있다.
[묘소]
이세현의 묘는 전라북도 군산시 나운동 미룡[미제] 저수지[현 은파 호수 공원] 옆 산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