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43일째인 2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군의 남부 헤르손 탈환을 위한 대대적 반격 정황이 포착된 속에 '폭풍전야'의 분위기가 감지됐다. 러시아군은 주민 대피에 이어 점령당국 철수 속에서도 병력을 보강하는 등 본격적인 방어에 돌입했다.
[유엔본부=AP/뉴시스]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지난달 24일 제77차 유엔 총회장 옆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9.24.© 뉴시스 러시아는 국제사회를 상대로 우크라이나가 전장에서 '더티 밤(dirty bombs)'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여론전을 이어갔다. 전날 국방부 장관 연쇄 통화에 이어 외교채널을 총동원해 서방에 '더티 밤' 공론화 작업에 주력했다. CNN, 뉴욕타임스(NYT), 월스트리트저널(WSJ), 가디언 등 외신을 종합하면 키릴로 부다노프 우크라이나 국방정보국장은 우크라 현지 언론 우크라인스카 프라브다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헤르손 점령당국과 금융기관을 도시 밖으로 옮기는 한편 더 많은 병력을 헤르손에 투입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현재 걸을 수 없는 중상자들 중심으로 (헤르손에서) 대피시키고 있다"면서 "반대로 그들은 그곳(헤르손에) 새로운 군병력을 증강시키고 (아군의 탈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헤르손 점령지 행정부는 지난 19일 헤르손 주민에 대피령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6일 간에 걸쳐 6만 명을 대피시키고 있다. 드니프로 강(江) 이남에 있는 크름반도를 거쳐 러시아 영토로 대피시킨다는 계획이다. 러시아측은 현재까지 2만 명 이상을 대피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타스 통신에 따르면 헤르손 점령지 행정부는 이날 텔레그램을 통해 "헤르손에서 영토방어부대를 창설하기 시작했다. 잔류한 사람들의 합류를 촉구한다"며 "언제든 떠나도 좋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도시 영토 방어부대에 합류할 기회는 있다"고 밝혔다. 점령 당국과 주민들이 대피한 상황 속에서 남아있는 헤르손 주민을 대상으로 사실상 강제 징집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0일 선포한 계엄령에서 점령지 4개 지역(도네츠크·루한스크·자포리자·헤르손주) 행정수반에 영토방어본부 창설 지시와 함께 관련한 군사 권한을 부여한 바 있다.
[모스크바(러시아)=AP/뉴시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이 러시아 국방관제센터에서 열린 회의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2022.05.03© 뉴시스 부다노프 국장은 "그들(러시아군)은 지금 (헤르손에서) 철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방어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러한 움직임은 러시아 군대가 시가전(市街戰) 대비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점령 당국과 주민들을 헤르손에서 소개시킨 뒤 우크라이나군을 시내로 유인해 전투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의미다.m WSJ에 따르면 러시아가 임명한 헤르손 점령지 행정 부수반 키릴 스트레무소프는 동영상 연설에서 개전 초였던 3월18일 러시아군이 점령했던 헤르손 지도를 배경으로 "러시아는 곧 잃었던 영토를 되찾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에게 내준 500㎢ 헤르손 점령 영토를 재탈환하겠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총참모부는 이날 국방부 전용 TV·라디오 방송에서 우크라이나군 59연대는 러시아가 점령한 헤르손 지역의 90개 마을을 탈환했으며, 해방시킨 주민은 1만2000명 규모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이틀 째 우크라이나의 '더티 밤' 사용 가능성 주장을 이어갔다. 미국·영국·프랑스 등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거짓 깃발(false flag)'이자 위장술책에 해당 한다며 일축했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m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더티 밤 사용 가능성과 관련해 믿을 만한 증거를 갖고 있다"며 "이 문제는 오늘이나 내일 유엔 안보리에서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거짓말로 치부하고 (오히려) 러시아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비난하기 위해 이 같은 일을 계획하고 있는 서방의 근거 없는 주장은 새삼스럽지 않다"면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서방에 직접 근거를 제시했다고 밝혔다.
[유엔본부=AP/뉴시스]드미트리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이 지난 9월2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는 층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9.22.© 뉴시스 이고르 키릴로프 러시아 국방부 화생방전 방어사령관은 이날 "우크라이나는 더티 밤을 제조할 과학적·기술적 역량뿐만 아니라 이를 사용할 동기도 갖고 있다"며 "더티 밤 개발의 마지막 단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더티 밤에 쓸 방사성 물질을 체르노빌 원전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영국·프랑스 3국 외교장관은 공동성명을 통해 러시아의 더티 밤 주장을 명백한 허위 주장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국제사회는 (러시아가) 이러한 주장을 확전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간파하고 있다"고 밝혔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은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 벤 월리스 영국 국방장관과 러시아의 더티 밤 주장에 대해 논의했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이후 트위터 계정을 통해 "나토 동맹은 우크라이나가 자국 영토에 더티 밤을 사용하려한다는 러시아의 허위 주장을 거부한다"며 "러시아는 긴장 고조를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더티 밤 주장에 대한 진상규명 차원에서 전문가로 구성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검증단 파견을 요청했다.
[브뤼셀=AP/뉴시스]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이 11일(현지시간) 브뤼셀 본부에서 기자회견하고 있다. 2022.10.11.© 뉴시스 드미트로 쿨레마 우크라이나 외무 장관은 이날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과의 통화에서 IAEA 사찰단 파견을 요청했고, 그로시 총장이 사찰단 파견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 대표는 쿨레바 외무장관과의 통화에서 "러시아의 최근 주장은 거짓"이라며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IAEA 전문가 사찰단의 파견을 요청하기로 한 것을 환영하고 지지한다"고 트위터에서 밝혔다. IAEA는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성명에서 "우크라이나가 두 곳에서 (더티 밤)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러시아가 제기한 주장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서 "우크라이나의 요청에 따라 2곳의 원자력발전 시설에 유엔 사찰단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다만 IAEA는 사찰단을 파견할 2곳의 시설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점령중인 남부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우크라이나가 통제 중인 북부 체르노빌 원전 2곳을 지칭한 것으로 풀이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대국민 화상 정례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군은 소위 세계 2위라는 러시아군을 깨뜨리고 있다"며 "러시아는 이제부터 거지가 될 뿐이다. 그들은 이란에서 무언가를 구걸하고 있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여러 가지 허튼소리를 꾸며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더티 밤은 핵무기와는 다른 개념의 비대칭 재래식 무기에 해당한다. 폭탄·미사일 등 재래식 무기의 폭약에 세슘-137 등과 같은 방사성물질을 덧입혀 폭발시 다량의 방사능 오염이 일어난다. 인체에 쉽게 흡수되지만 좀처럼 해독이 어렵다하여 '더러운 폭탄'으로 불린다. 생화학무기 등 대량파괴무기(WMD)와 함께 국제법상 사용이 엄격히 금지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