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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소련의 수소폭탄 '레이어 케이크' 실험 보고서
"미국이 최초의 수소폭탄을 실험한지 1년도 못되어,
소련은 카자흐스탄에서 400kt의 폭파(장치)를 폭파하였다.
그 폭발력은 히로시마 원자탄보다 30배나 강했으며,
그로 인해 생성된 버섯구름은 하늘로 5마일(약 8Km)이나 피어올랐다."
(히로시마 원폭에서의 버섯구름의 높이가 약 3km가량이었음)
세계 최강의 핵병기이자 인류가 만들어낸 것 중 가장 끔찍한 폭탄...
그것은 차르폭탄(Tsar Bomba)이다.
(결국은 이 얘기를 하기 위해 4편으로 나눠 장황한 글을 작성한것이 아닐까 합니다 --a)
차르폭탄(Tsar Bomba)▼

차르 봄바 프로젝트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1961년 7월 10일 발주한 프로젝트였다.
흐루시초프는 10월 말쯤에 테스트가 실시되기를 바랐는데
이 때 제 22회 소련 공산당 총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15주라는 타이트한 기간이었지만 제작에 들어간 부품을
전부 재고(?!)에서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간 안에 맞출수는 있으리라 생각했다.
차르 봄바는 50Mt(=50,000kt / TNT 50,000,000개)급의 위력을 가진 다단계 수소폭탄이었다.
처음 개발단계에선 핵분열-핵융합-핵분열의 3단계 방식으로 제조되었다.
(소련에서 독자 개발된 '텔러-울람'이라 불리는 이 방식은 차 후
모든 고성능 수소폭탄의 기본이 되었다.)
이 방식은 고위력 수소폭탄 제작에 필수적인 방식이었는데,
핵분열폭탄과 핵융합폭탄을 조합해 위력을 배가시키기 위함이었다.
사실 차르봄바는 100Mt에 이르는 위력을 가질 계획이었지만
예상되는 방사능 낙진의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애초 계획대로 제대로 된 3단계식으로 제작되었다면 나올 100Mt급 폭탄의 경우
만약 폭발했다면 그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모든 핵무기의 25%에 달하는
핵낙진이 발생할 예정이었고, 그만큼의 낙진은 자국(소련) 영토는 물론,
동맹국인 바르샤바 조약국들을 모두 살포시 덮어줄 정도였다.
그래서 이 낙진을 줄이기 위해 (폭발력은 절반으로 줄인 대신)
3단계 핵분열에 사용되는 우라늄 탬퍼를 납으로 교체했고,
그 결과 낙진량도 감소했다.
실험은 러시아 최북단 지방의 콜라 반도에서 행해졌다.
콜라 반도의 실험장은 예전부터 80회 이상의 핵실험이 행해진 장소로
그 중 20Mt급 실험만 3번 있었다(미국은 최대가 15Mt).
핵실험 장소인 콜라반도와 폭탄수송경로▼

폭탄은 특별 개조된 Tu-95 폭격기에 실렸다.
이외에 공기 샘플을 채취하고 실험 장면을 녹화하기 위해
Tu-16 정찰기가 동행했는데, 두 기체 모두 고열 차폐를 위해
특수 제작된 흰색 도료로 도장되었다.
폭탄은 그 무게만 27톤에 길이 8미터, 직경 2미터라는 말 그대로
무지막지한 크기라 당시 소련이 보유한 것 중 가장 대형인 Tu-95의
폭탄창에도 집어넣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폭탄창의 도어를 제거하고
대충 끼워서 매달고 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폭발 위력이 강해서 폭격기와 관측기가 모두
휘말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투하속도를 줄여
폭발 전에 두 기체 모두 45km의 안전거리까지 도망칠 수 있도록
폭탄에 중량 800kg짜리 초대형 낙하산을 달았다.
차르봄바를 매달고(!) 나르는 Tu-95 (그 뒤 멀리 Tu-16도 보인다)와 폭탄 투하순간


차르 봄바는 북해의 노바야젬랴 섬 북쪽 미츄시카만 핵실험장에서 오전 11시 32분 폭발했다.
고도 10,500m에서 투하된 폭탄은 기폭장치와 연결된 고도계에 의해
상공 4km(해발 4,200m)에서 기폭되었다.
폭발의 화구(폭발의 불덩어리-fireball)는 지름이 거의 10km에 이르렀다.
폭발 모습은 1,000km 바깥에서도 관측할 수 있었고,
버섯구름은 너비 40km, 고도 60km(중간권 이상)까지 도달했다.
(참고로 여객기가 지나는 고도는 성층권인 20킬로 전후임)
강력한 충격파는 실험장소에서 800km이상 떨어진 핀란드에서도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였고, 발생한 지진파는 지구를 3바퀴나 돌았다.
폭발시 방출된 열은 너무나 규모가 커서 800km 범위까지
폭발열이 전해졌으며, 폭발지점에서 100km 바깥에 서 있던 사람도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45km 밖에서 본 차르봄바의 버섯구름(...이 저 정도였다)▼

차르 봄바는 인간이 만들었던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를 방출했다.
39nsec(39나노초 = 0.000000039초)동안 방출된 50Mt의 에너지는
210,000,000,000,000,000J로, 이를 환산하면
5,300,000,000,000,000,000 Mwatt 였다.
이는 같은 시간동안 태양이 방출하는 전체 에너지의 1%에 달하는양으로
전 세계의 인류가 (현재의 전력 소모량으로) 80조년 이상 사용 가능한 에너지이다.
이에 비하면 미국이 만든 가장 강력한 핵무기였던 B41(제작만 되고 실험되지 않음)도
최대 위력이 25Mt정도라고 추정되고, 실제 실험된 것 중 가장 대형인
캐슬 브라보 수소폭탄도 15Mt정도이다.
차르 봄바의 파괴범위로 직경 64km 가량은 완전 소멸됐다.
실험 후 조사대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고 한다.
"실험지역 안은 그냥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엄청난 깊이로 파인 지표면은 마치 스케이트 링크처럼 반짝거린다.
엄청난 열 때문에 모든 것이 녹아서 날아가 버린것 같다"
참고원문 : http://nuclearweaponarchive.org/Russia/TsarBomba.html
관련 동영상 : http://www.youtube.com/watch?v=NiyUSv2Z07A
사실 차르봄바의 위력은 대단했지만 별로 실용적인 무기는 아니었다.
너무나 크고 무거워서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에 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특수한 전략폭격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폭발위력이 구형으로 퍼지기 때문에 많은 에너지가 대부분
대기권을 넘어 우주로 퍼져버릴 것이었다.
그래도 1950~60년대에는 미국이고 소련이고 다들 이런 핵무기 만들기에 급급했다.
그 이유는...
1. 당시 핵무기들은 위력에 관계없이 다들 무자비하게 크고 무거워서
미사일보다는 전략폭격기에 실릴 수밖에 없었으니, 같은 크기면 위력이 큰 편이 유리.
2. 전략폭격기란 덩치는 덩치대로 크면서 속력 또한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요격당하기 좋다. 그러니 폭격기 한 대에 최대한 큰 규모의 폭탄을 실어
적당한거리에서 투하해 기폭시키는 것이 유리.
3. 위성정찰이 요즘만큼 정밀하지 못한 관계로 군사시설이나 산업시설에 대한 정보가
부실했기 때문에 대충 근처에 떨어뜨려도 모조리 쓸어버릴 만한 폭탄이 필요.
4. 현대적으로 정밀한 폭탄이 아닌 자유낙하폭탄이므로 낙하오차가 수킬로나 발생.
투하지점의 오차를 메우려면 고위력이 필수.
이런 처지니 멀리서 대충 떨어뜨려도 반경 5~10km 내의 도시 하나정도는
확실하게 쓸어버릴 폭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가면서 공산오차 500m 이하의 ICBM, 레이저 유도폭탄, GPS등이
발전함에 따라 핵무기들의 이런 대형화 요소들이 필요없게 됐다.
덕분에 1960년대 후반 이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핵무기들은 정확도, 소형화,
안전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냉전시대의 핵실험 대부분은 이와같은
핵의 소형화와 고효율화를 위한 실험이었다.
미국은 1945년 최초 핵실험을 한 이후 1992년 마지막 핵실험까지 총 1천30회의 핵실험을 하였으며
현재 약 1만 60 여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고 7만6천50기의 핵탄두를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러시아는 1949년 최초 핵실험을 하여 1990년 마지막 핵실험을 하기까지 총 715회의를 하였고
7천 여기의 전술핵을 포함하여 약 2만 여기의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국은 1952년 최초 핵실험을 한 이후 1991년 마지막까지 총 45회의 핵실험을 하였으며,
약 200여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는 1960년 최초 핵실험에서 1996년 마지막까지 210회의 핵실험을 하였으며,
약 350여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중국은 1964년 첫 핵실험을 하여 1996년 마지막 까지 22회의 핵실험을 하였고,
약 400여기의 전략 전술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8년 이들 5개국은 NPT 즉, 핵무기확산금지조약에 의해 합법적인 핵보유국이 되었고
그 밖의 나라는 핵개발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원자력을 평화적으로만 이용하기로 합의를 하게 된다.
(2007년 현재 NPT가입국은 북한을 제외한 157개국이다.
참고로 북한이 NPT가입 후 탈퇴를 한 최초의 국가이다.)
이외에도 인도는 1974년 처음 핵실험을 하였고 1998년 마지막 핵실험까지
총 7회의 핵실험을 하였으며, 약 40~90기 정도 제조능력을 보유하고 있는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는 자신들이 행하는 핵실험은 평화적 목적이라고 발표했다.
파키스탄은 1972년부터 핵개발을 시작하여 1998년까지 총 6회의 핵실험을 하였고
현재 약 45기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핵보유국임을 밝히진 않았으나 핵보유국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100~200여기의 핵폭발 장치 보유국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은 NPT를 탈퇴하고 2006년 10월3일 핵실험 계획 발표 후
6일 만인 10월 9일에 핵실험을 공식적으로 강행하였다.
(진짜 핵폭발인지 위장폭발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외에 일본은 언제라고 마음만 먹으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맨하탄프로젝트의 연구소 소장(1943~45)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 후
원자력위원회 일반자문회의 의장(1947~52)으로 재직했다.
1949년 10월 수소폭탄 개발계획에 반대했다가 음모로 인해 보안상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충성심과 신뢰도를 문제삼아 기소당했다.
이로 인해 열렸던 정부 청문회 결과로 보안사항 취급허가와 정부 고위층의 자문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사상을 정립하는 데에 바쳤다.
냉전이 쇠퇴해가던 1963년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오펜하이머에게
원자력위원회의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를 복권시켰다.
1966년 프린스턴을 퇴직한 오펜하이머는 다음 해에 후두암으로 죽었다.
'수소폭탄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에드워드 텔러는 맨하탄프로젝트 이 후
소련의 핵실험 성공하자 1950년 (미국의)수소폭탄 계획에 참여한다.
실제로 작동하는 수소폭탄의 설계를 제출했지만 제작을 지휘하는 장(將)이 되지는 못한다.
핵개발론의 옹호자로 지속적인 핵개발을 주장했으며, 1954년 보안청문회때
오펜하이머와 사이가 나빠졌다.
2003년 9월에 타계했으며, 죽을때까지 레버모어 연구소의 명예소장이었다.
텔러-울람 방식을 설계한 안드레이-사카로프(1921∼1989)는 소련 수소폭탄의 선구자이자
인권운동가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인권, 시민 자유, 개혁, 비공산국가와의 화해 등을 주장하는 그는 소련내에서
공적인 비난의 표적이 되었으며, 정부에 의해 1980년 그의 아내인 옐레나 G.보너
(인권활동가로 사카로프와 1971년 결혼)와 함께 소련 내에 유배되었다.
1986년 말 고르바초프가 이끌던 소련정부는 그와 아내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모스크바로의 귀향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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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이 하나 더 있었군요... 핵무기 엄청나군요.. 그리고, 핵무기가 지구상에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 지 몰랐습니다... 무섭네요....
우리나라도 몇개쯤 있어도 괜찬을것 같은데 말이죠 어디 훔쳐올곳 없을라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