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벗이 몇인고 하니 溪山과 水石이라
# 입향조 사의당 이강 1686년 착공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1리 덕동마을은 포항에서 가장 오지라고 할 정도로 깊숙한 지역이다. 포항에서 청송 쪽으로 가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성법령을 향해 점차 좁아지는 호리병 모양의 지형을 달리다 보면 호리병 목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서 덕동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자금산(紫金山) 아래에 위치한 덕동은 지금부터 360여년전 여강이씨(驪江李氏) 사의당(四宜堂) 이강(李·1621~89)이 처음 입향한 후 현재까지 후손들의 세거지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덕동에는 애은당(愛隱堂)과 사우정(四友亭), 여연당(與然堂), 용계정(龍溪亭) 등 경북도 지정 유형문화재와 민속자료들이 동네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 중 덕연(德淵)구곡의 제5곡에 위치한 용계정(경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3호)은 덕동의 주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 송나라 주자의 무이정사를 본뜬 듯
'난간 밖 찬 샘물소리 베갯머리에 울려오니(軒外寒泉入枕鳴), 근원지로부터 콸콸 흘러오는 자연의 소리이네(源頭活活自然聲)….'
사의당의 5세손 삽파(坡) 이능진이 용계정의 첫 이름인 사의당 난간에 기대어 읊은 이 시만 읽어보아도 이곳 풍광이 얼마나 수려한지 상상이 간다.
용계천 다리를 건너 덕동에 들면 우선 덕연구곡, 삼기(三奇), 팔경(八景)을 소개하는 글씨가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덕연구곡 제1곡은 수통연(水通淵)으로 물이 통해 흐르는 연못이란 뜻이고 제2곡은 속세를 멀리한 너른 바위 대(臺)라는 의미의 막애대(邈埃臺)이다. 제3곡은 서천폭포(西川瀑布)이고, 제4곡은 도송(島松)으로 섬처럼 형성된 소나무 군락지이다.
제5곡은 연어대(鳶魚臺)이다. 그 이름은 '시경'의 대아 한록(旱麓) 편에 '솔개는 날아 하늘까지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 오른다(鳶飛戾天, 魚躍于淵)'는 것을 중용에서 '도의 작용이 천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라고 설명한 부분을 축약해 지은 것이다.
이 연어대의 정면에 용계정이 마주하고 있다. 마치 송나라 때 주자가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앉힌 것과 비슷하다. 제6곡은 물이 흘러나오다 합쳐지는 합류대(合流臺), 제7곡은 구름이 피어오르는 연못의 운등연(雲騰淵), 제8곡은 용이 누워있는 바위 와룡암(臥龍岩), 제9곡은 삽연(淵)으로 마치 가래같이 생긴 연못이다.
또 세 가지 기이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삼기(三奇)는 암석 사이에 솟아오르는 샘물이란 뜻의 석간용천(石間湧泉)과 층계누대처럼 누워있는 향나무란 의미의 층대와향(層臺臥香), 용계정 후원에 서린 소나무인 후원반송(後園盤松)을 일컫는다.
팔경은 자금산간운(紫金山竿雲), 귀인봉토월(貴人峯吐月), 응봉낙조(鷹峯落照), 천제당기우(天祭棠祈雨), 오봉귀범(五峯歸帆), 약산방사(藥山訪師), 관령목적(官嶺牧笛), 석현농가(石峴農歌)를 말한다. 구곡, 삼기, 팔경은 사의당의 9세손 석헌(石軒) 이석대가 남긴 시에 있다.
# 손자 이시중이 완성 용계정이라 이름
이러한 절경 속에 자리한 용계정은 덕동 입향조 사의당 이강이 1686년(숙종 13년)에 착공하여 이듬해에 상량을 올렸다. 그는 그러나 1688년 정월 용계정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이곳에서 향년 68세로 임종하였다.
사의당이 임종한 후 손자되는 진사 성헌(省軒) 이시중(1667∼1738)은 정성을 다하여 조부가 못다 이룬 이 일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조부가 사계절이 알맞음의 뜻을 취하여 사의당이라 자호(自號)한 것을 현판으로 새겨 걸었다. 또한 용계천의 이름을 따서 정자 이름을 용계정이라 명명하고, 지족당(知足堂) 최석신(崔錫信)의 글씨를 받아 현판을 걸었다. 훗날 풍우에 퇴락하자 1727년에 성헌은 또다시 수리하고 보수공사를 하였다.
경주 양동의 회재(晦齋) 이언적은 아우 농재(聾齋) 이언괄과 형제의 우애가 특별하였다. 사의당은 바로 농재의 현손이다. 그리고 농포(農圃) 정문부의 조부되는 정언각(鄭彦慤)의 손서(孫壻)이다.
사의당은 명가의 후손으로 경주시 강동면 양동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시절에 폐비 윤씨 사건 등으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벼슬길에 뜻을 접어버렸다. 인조(仁祖) 말에는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는 것을 보고 경주의 북쪽 자금산 아래 덕연으로 은둔하여 거기서 터를 잡게 된다. 현재의 덕동 일대인 덕연은 골짜기가 깊고 세속의 발자취가 드문 곳이다.
사의당에 대한 문적은 불행히도 전란에 모두 불타버렸다. 그래서 그 행적을 알 길이 없다가 경주 향단 종택에서 전해 내려오는 옛 상자 속에서 우연히 사의당과 용계정을 세운 내력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사의당은 그곳 덕연의 계산(溪山)과 수석(水石)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덕연에 거주한 지 40년 만에 작은 정자를 엮게 되었다(愛其溪山水石之佳麗, 居之四十年, 構小亭…)'라는 기록이 있다.
정조 3년(1778)에는 정자가 무너져 위험해지자 성헌의 손자되는 향오(香塢) 이정응(李鼎凝·1743∼96)이 중건하게 된다.
# 명가의 정신 계승하고 있는 후손들
지금은 사의당 7세손 되는 이동진(李東震)옹이 덕동 마을 전체를 관리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자손들에게 조상의 얼을 심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이동진옹은 마을 입구에 건립된 민속 전시관인 덕연관에 가가호호 전해오는 조상의 유품들을 정성스레 모아 자손들과 오가는 길손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이 안에는 조상들의 서찰과 서적, 당대 명사들이 쓴 현판, 농기구류, 희귀 생활용구류 등이 전시되어 있어 하나의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말기인 1778년에는 용계정 좌측에 농재 부자(父子)를 제향하는 세덕사(世德祠)가 건립되어 연연루(淵淵樓), 명흥당(明興堂), 진덕재(進德齋), 면수재(勉修齋), 입덕문(入德門) 등 서원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고 표암(豹菴) 강세황이 쓴 세덕사와 이조판서 조윤형(曺允亨)이 쓴 연연루 등의 현판들만이 그 시절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 사우정은 사의당의 손자가 세운 것
한편 덕동에 있는 사우정(일명 사우당)은 본래 청송부사로 재직하던 정언각이 살던 살림집으로 그가 떠나면서 손서인 사의당에게 물려주었고 그 후 사의당이 셋째 아들 덕삼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손자인 이헌순이 자호를 사우당이라 하였는데, 아래채를 다시 짓고 사우정이라는 이름을 걸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사우정 기문의 주옹(主翁)은 정언각이 아니고 이헌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우정 부분은 그 정침(正寢·살림집 몸체)만 정언각과 관계있는 것임을 독자들에게 고쳐 알려드리는 바이다.
그러나 관계당국에서 세운 안내판 내용은 정언각에 대해서만 소개되어 있고 사의당에 대한 내력은 완전히 빠져 있으므로 관람객들이 이 집을 정씨 집으로 오인하도록 되어 있음은 큰 잘못이다. 이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